한참 후에야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저 아니에요. 저도 다른 사람한테서 전해 들은 거예요.”“저도 아니에요. 낮에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다들 똑같은 얘기만 하더라고요!”“이분이 도씨 일가 따님일 줄은 몰랐어요.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건지 양심도 없네요, 정말.”...주민들은 하나둘씩 이 사건에서 빠지려고 애를 썼다.“걱정 마세요, 아영 씨. 이번 일은 제가 반드시 조사해낼 겁니다. 3일.. 아니 2일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꼭 해결해드리겠습니다!”장윤기가 단호하게 말했다.이때 도아영이 임규리를 지그시 바라봤다.그녀의 따가운 시선에 임규리는 온몸이 불편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범인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거든요.”도아영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한 순간 임규리는 바짝 긴장했다.“정말요? 그게 누구죠? 말만 하세요. 당장 체포하겠습니다!”주위 사람들도 범인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했다. 오늘 도아영에게 실질적인 해를 끼치지 않기를 다행이지 하마터면 그들도 연루될 뻔했다.“아줌마,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별안간 도아영이 집주인에게 물었다.집주인은 도아영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로 멍하니 넋을 놓고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그녀가 단지 사과만 원하자 집주인이 곧바로 말했다.“다 제 잘못입니다. 미안해요, 아영 씨! 제가 정말 아영 씨 정체를 몰라서 그랬어요. 미리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텐데... 죽을죄를 지었어요. 지금 바로 물건들 다시 정리해드릴게요!”도아영은 무려 부잣집 딸이다.오늘처럼 대놓고 능멸했으니 처벌을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한다.집주인은 감히 그녀 앞에서 거만을 떨 수가 없었다.곧이어 한바탕 널어놨던 도아영의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옷장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아영 씨, 시간도 늦었고 여기 환경도 별로이니 오늘 밤은 제가 호텔 스위트룸으로 예약해드릴까요? 여기서 지내시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장윤기도 아주 상냥하게 말했다.전에 그녀를 대하던 모습과 아예 딴판
집주인은 임규리에 대한 호감이 뚝 떨어졌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나가는 집주인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분명 이수호랑 파혼까지 했는데 대체 왜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아영을 도와주는 걸까?이건 너무 불공평했다.다음 날 아침, 도아영이 부잣집 딸이라는 소문이 온 동네에 쫙 퍼졌다. 또한 부잣집 딸이 이 동네에서 지낸다는 말도 주민들의 토크 소재가 되었다.다들 전설 속의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했다.결국 도아영은 다음날 이른 아침 집에서 내려오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했다.그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구연준에게 연락했다.“어제 집 구해준다는 말 진짜죠?”“당연하지. 이미 다 구했어. 마침 연락하려던 참인데.”“너무 잘됐어요. 지금! 당장! 이사해야겠어요.”“뭐가 그렇게 급해? 누가 심기 건드렸어?”구연준은 곧바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그녀는 시시각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게 너무 싫었다.“맞아요.”“지금 제자리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 사람 바로 보낼 테니까 짐 싸서 나오면 돼.”말을 마친 구연준이 전화를 끊었다.단지 입구에서 잠시 기다렸더니 구연준이 보낸 차가 금세 도착했다.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차에서 내려와 먼저 도아영에게 인사를 건넸다.“아영 씨!”“물건들 다 위층에 있어요.”“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6명의 경호원들은 곧바로 위층에 올라갔다.여전히 그녀가 부잣집 딸인 걸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본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이런 경우는 처음이니까.도아영이 근처 공원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사이에 경호원들이 어느덧 짐을 싸서 내려왔다.잠시 후 그들은 짐을 전부 차에 싣고 도아영에게 다가갔다.“다 됐습니다. 대표님께서 친히 또 다른 차량을 보내셨어요.”“네.”도아영도 그제야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어젯밤 일로 이 동네를 떠났다는 얘기에 뭇사람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부잣집 딸을 처음 보는 건데 누가 헛소문을 퍼뜨린 바람에 그냥 떠나가 버릴 줄이야.유일한 부자를 놓
“천한 년이! 당장 나와!”집주인은 욕설을 퍼부으며 임규리의 방에 쳐들어갔다.순간 임규리는 사색이 되었다.“아줌마, 왜 함부로 들어오고 그래요? 으악!”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주인이 가차 없이 싸대기를 날렸다.“왜 때려요?”임규리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요즘 학교에서 학생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던 그녀는 처음 뺨을 맞았다.“왜 못 때려? 다 너 때문이야. 제 언니가 재벌인 걸 뻔히 알면서 온 동네에 헛소문이나 퍼뜨리고 다녀? 너 때문에 내가 아영 씨한테 그런 짓까지 저지른 거잖아. 애가 어쩌면 이렇게 독해?”집주인의 삿대질에 임규리는 재빨리 눈알을 굴렸다.“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요? 다짜고짜 나한테 이러면 안 되죠.”“그건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너 같이 돈 많은 애들 부러워하는 년 너무 많이 봐왔어! 그런데 내가 그 계략에 빠질 줄은 몰랐네? 나만 나쁜 사람 만들고 넌 착한 척하고 싶었던 거야? 세상에 그런 횡재는 없어. 당장 나가. 이 집에서 당장 나가란 말이야!”집주인의 연이은 독설에 임규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런 낡아빠진 동네, 더 있으라고 해도 나갈 거예요! 나도 진작 나갈 생각이었거든요! 잘 들어요 아줌마! 오늘 날 건드린 건 도아영 건드린 것보다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임규리는 원래 짐 빼러 온 것뿐이었다. 남현숙이 이씨 저택으로 들어오라고 했으니 짐 정리할 시간만 며칠 내줬을 뿐이다.이씨 저택에서 차만 보냈다면 그녀도 이 시궁창 같은 곳을 진작 벗어났을 텐데...다만 그녀는 처음 시골에서 상경했을 때 이런 집에서 지낼 수 있는 것에 엄청 만족했다는 걸 까마득히 잊었다.“젠장!”집주인은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시골에서 올라온 그녀가 딱해 보여서 저렴한 가격으로 월세를 내주었더니 이제 오히려 한 방 먹은 걸까?그것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따름이었다.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임규리는 짐을 싸서 단지 입구로 나왔지만 막상 나오고 나니 골치가 아팠다.이씨
임규리는 안달이 났다.이제 정말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이니까.이씨 일가에서 번복하고 그녀를 들이지 않는다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바로 어르신께 여쭤볼게요.”가정부는 그녀를 위로하면서 소파에 앉은 남현숙을 바라보았다.남현숙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자 가정부는 곧장 알아채고 다시 임규리에게 말했다.“규리 씨, 어르신께서 못 오시게 하는 게 아니라 대표님이 집에 딴사람을 들이는 걸 정말 싫어하시거든요. 어제도 어르신께서 이 일로 대표님을 혼냈는데 전혀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두 분 지금도 냉전 중이시라 참 곤란하게 되었네요.”“아니 그럼 저는...”“괜찮아요. 규리 씨 지금 사는 집 계약이 이달 말까지 된 거로 알고 있는데 어차피 거기가 학교랑도 가까우니 며칠만 더 지내세요. 학교랑 여기랑 두 군데를 다녀야 하니 며칠 동안 고생은 좀 하겠지만 걱정 말아요. 어르신께서 대표님을 설득만 하시면 바로 기사님 보낼 겁니다.”가정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임규리는 점점 짜증이 몰려왔다.이미 이 집에서 이틀이나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라니.그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가정부가 다른 핑계를 둘러대면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임규리는 휴대폰을 멍하니 들여다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제 어떡하지? 집도 없고 돈도 없는데 어디서 지내란 거야?’유정연은 빚이 산더미라 그녀에게 생활비를 줄 리가 없고 도아영도 절대 그녀를 도씨 저택에 들일 리가 없다.짐도 한가득한데 택시를 안 잡으면 근처 모텔까지 가기도 힘들었다.임규리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고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아까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었어. 일단 뒷길은 마련해두는 건데!’그 시각, 이씨 저택.“어르신, 임규리 씨를 집에 안 들이실 생각이세요?”가정부는 남현숙과 제일 오래 함께한 사람이라 누구보다 그녀의 마음을 잘 안다.이에 남현숙이 차갑게 말했다.“이런 애들은 말 잘 듣고 부려먹기 좋지만 신분이 너무 천해. 우리 집이 개나 소나 다 들이는 곳은 아니잖아?
뭇사람들은 그녀를 본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두 눈을 의심하기까지 했다.이씨 저택에 있어야 할 임규리가 왜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걸까?게다가 쫓겨났는지 처참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임규리는 그녀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금세 들켰다.그중 한 명이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임규리에게 물었다.“규리 맞지? 여기서 뭐해?”“이씨 저택으로 간 거 아니었어? 혼자 여기서 뭐 하는 거야?”날이 점점 어두워지는데 여자애가 쓸쓸하게 길옆에 서 있는 건 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옆에 쌓인 짐도 산더미를 이루었다.오늘 낮에만 해도 이제 곧 이씨 저택으로 들어간다고 자랑하던 임규리가 대체 왜 길바닥에 서 있는 걸까?그녀들은 언제 한번 시간 내서 이씨 저택으로 놀러 갈 참이었는데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그게...”임규리는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쫓겨났어...”그녀는 누구한테 쫓겨났는지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말을 얼버무렸다.다만 여학생들은 임규리와 이수호의 관계를 떠올리며 곧장 도아영에게 책임을 전가했다.“아영이가 내쫓았구나! 나쁜 계집애!”“걔 진짜 나쁜 년이라니까! 파혼한 마당에 대체 왜 너한테 화풀이냐고?”“화풀이로 사람을 내쫓아? 그것도 이렇게 추운 날에, 이 저녁 시간에? 도아영 진짜 지독하다!”...그녀들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았다.오해의 소지가 뻔했지만 임규리는 끝까지 해명하지 않았다.어차피 집주인에게 쫓겨났다는 것보단 이 핑계가 더 나으니까.“규리야, 정 갈 곳 없으면 우리랑 함께 기숙사에서 지내. 우리 서로 친구잖아.”“맞아. 기숙사 환경이 여기보단 훨씬 좋을 거야. 빈 침대가 남아있으니 일단 우리랑 함께 가자.”“어차피 며칠 뒤에 이씨 저택으로 갈 테니 당분간 기숙사에서 지내.”그녀들은 임규리와 더 가까워지려고 당장이라도 기숙사로 데려갈 기세였다.나중에 임규리와 더 친해지면 그녀 덕에 돈 많고 잘생긴 남자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질 테니까.기숙사에서 함께 지내자는 말에 임
임규리가 어수선한 짐들을 바라볼 때 여학생 중 한 명이 의아한 듯 물었다.“이 쓰레기들 설마 네 거는 아니지?”그녀의 물건이 더러운 건 아니지만 저렴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다른 학생들 집안은 벼락부자 혹은 재벌 출신이라 상류층에 닿을 정도는 아니어도 명품만 고집하는 건 사실이었다. 침대 시트와 입고 있는 옷들만 해도 가격이 무려 천만 원대였다.본인 물건이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순간 임규리는 가슴이 찔려서 이것들을 전부 버리기로 했다.“나도 몰라, 누구 건지. 그냥 여기 있길래 대신 좀 봐준 거야.”“뭐야, 왜 이렇게 착해? 이런 쓰레기는 누가 놔두고 간 게 아니라 그냥 버리는 물건 같아.”몇만 원짜리 캐리어와 크고 작은 비닐봉지까지 딱 봐도 시골 사람들의 물건 같았다.이곳은 번화 구역인지라 백 명 중에 가난한 사람을 한 명 찾아보기도 힘들다.그녀들은 이 물건들이 당연히 누가 버리는 줄 알고 통째로 무시했다.“됐어, 일단 학교 가자. 마침 내게 침대 시트 하나 남았으니 그거 네가 써.”여학생 중 한 명이 임규리의 팔짱을 끼고 친한 척하며 말했다.임규리는 그녀들에게 등 떠밀려서 학교로 돌아갔지만 버려둔 짐이 너무나도 눈에 밟혔다.저 안에 모든 물건이 들어있으니까.진짜 다 버린다면 옷과 생활용품까지 일일이 다시 사야 한다.‘괜찮아. 이제 곧 이씨 저택으로 들어갈 테니 쿨하게 버리면 돼.’낡은 것을 버려야 새것이 오는 법이니 저렴한 물건들은 이제 더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한성대.그녀들과 함께 기숙사에 도착한 임규리는 가지런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허영심에 푹 빠졌다.시골의 집들은 늘 허름한 분위기가 차 넘쳤지만 이곳은 은은한 향기가 났고 가구 배치마저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다.이런 곳은 임규리에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규리야, 여기가 바로 네 방이야.”이때 누군가가 그녀를 데리고 침실에 들어갔는데 텅 빈 침실은 유독 깨끗하고 아늑했다.책상과 의자, 침대, 화장실까지 없는 게 없었고 컴퓨터와 책장, 옷장까지 모든 게 완벽
여학생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감히 대놓고 티 내진 못했다.그녀들이 종일 바라는 건 상류층 남자들을 만나서 전세 역전하는 일이다. 그것 또한 가장 쉽게 팔자를 바꿀 방법이니까.“그래? 일단 여기서 쉬어. 이따가 침대 시트 보내오면 도우미더러 네 방 정리까지 해놓으라고 할게.”임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런 혜택을 누렸다.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룸메들은 침대 시트가 온 줄 알고 재빨리 가서 문을 열었더니 가정부는커녕 유하영과 강이나였다.“선배?”두 사람을 본 룸메가 눈을 반짝였다.유하영은 그렇다 치고 강이나는 이 학교의 레전드 인물이자 모든 남학생들 마음속의 여신이니까.한편 방에 있던 임규리는 룸메의 반응에 바짝 긴장했다.‘강이나? 걔가 왜 갑자기 여길 와?’전에 이경 그룹에서 한 방 먹은 일만 생각하면 임규리는 저도 몰래 심장이 쿵쾅댔다.“침실 점검하러 왔어. 이 방 좀 전에 딴 사람 들어온 거 맞지?”기숙사마다 룰이 정해져 있고 비용을 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여기서 지낼 수 없다.이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건 일정한 경제 조건을 갖췄다는 뜻이기에 누군가가 몰래 들어온다면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느낄 게 뻔하다.학교에서 부잣집 자녀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일찌감치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룰을 정했다.학생회 주석 강이나는 좀 전에 기숙사 관리원 아줌마의 말을 듣고 곧장 조사하러 왔다.“그게 아니라 친구 한 명이 갈 곳이 없어서 며칠만 여기서 지내기로 했어요. 며칠 뒤에 금방 짐 뺄 거예요.”“친구? 누군데? 이름 말해봐.”유하영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겁한 인간이다.한성대에서 선배란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신입생들은 감히 선배를 건드리지 못한다.유하영의 질문에 룸메가 곧바로 대답했다.“임규리요! 며칠 뒤에 남자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남자친구?”강이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조신하고 다정한 그녀가 미소를 지으니 더욱 친근해 보였다.“네. 이제 곧 약혼식을 앞두고
아니나 다를까 임규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이때 미처 상황파악이 안 된 룸메 한 명이 입을 열려고 했다.“그 사람은 바로...”“조용히 해!”다른 여자애가 재빨리 그 룸메를 말렸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 학교에 거의 모르는 이가 없다.강이나를 앞에 두고 누가 감히 헛소리를 지껄일까?방금 임규리에게 방을 내준 룸메는 아직 이수호와 강이나의 관계를 모르는 게 뻔했다.순간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옆에 서 있는 임규리도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대답해! 왜 가만히 있어?”유하영이 그녀를 째려봤다.임규리는 애초에 도아영보다 더 뻔뻔스러웠다.“죄송해요, 일부러 수호 씨를 뺏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할머니께서 대표님과 서로 감정을 쌓으라고 해서... 정 그렇게 거슬린다면 지금 바로 할머니께 말씀드릴게요. 더는 대표님과 연락하지 않겠습니다.”임규리는 더없이 가여운 표정으로 말했다.다른 룸메들도 인기척 소리에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해서 밖으로 나왔다.한편 유하영은 그녀의 말이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야, 네가 뭔데? 시골 촌뜨기 주제에 어딜 감히 이 대표님을 넘봐? 그 자리는 아영이가 꿰찰지언정 넌 턱도 없어! 뭐? 대표님과 연락하지 않겠다고? 잘 들어 임규리! 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 이나야. 넌 기껏해야 이씨 일가 도우미일 뿐이라고. 이 대표님 할머니 기쁘게 해드렸다고 뭐라도 된 것 같아? 우리 이나 말 한마디면 널 평생 강주에서 매장해버릴 수도 있어!”“됐어, 하영아. 애 놀라겠다.”강이나는 임규리가 적당히 능멸을 당하자 선뜻 착한 사람 코스프레에 나섰다.“규리야, 방금 한 말 마음에 새겨둘 필요 없어. 나랑 수호 씨도 별 거 없어. 그러는 넌 매일 이씨 저택으로 가서 할머니 시중하느라 엄청 힘들겠다. 이참에 그리로 들어가지 왜? 이렇게 다니는 게 얼마나 불편한데? 왜? 수호 씨가 허락 안 했어? 내가 대신 얘기해줄까?”임규리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밖에 있던 사람들도 그녀에게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