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영은 눈썹을 살짝 내리며 남현숙의 말을 들었다.“도지호가 올해 열아홉이라고? 그 나이에 입은 왜 그렇게 방정맞은 건지 모르겠구나. 동네방네 자신을 수호 시동생이라고 떠벌렸다는데,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 자기가 문제를 일으키면 이경 그룹이 지켜줄 거라고 믿는 거야?”이수호가 차분히 대답했다.“할머니, 이 문제는 제가 처리할게요.”“네가 어떻게 처리하려고?”남현숙은 이수호를 쳐다보며 물었다.“설마 도원 그룹과 약혼을 파기하겠다는 거니?”파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도아영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그녀가 어젯밤 도지호를 그냥 내버려둔 이유는 남현숙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전생에도 도지호는 연회에서 비슷한 짓을 벌여 해인 그룹과 심하게 충돌했고, 당시 도아영은 그 문제를 수습하려 온갖 사죄를 하다가 이경 그룹의 체면까지 구기고 말았다.남현숙이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도아영을 조금씩 탐탁지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그 후 도아영은 남현숙의 호감을 되찾으려 별별 굴욕적인 짓까지 다 했다. 그러다 간신히 약혼녀로 인정받은 것이다.이번 생에는 더 이상 남현숙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도지호를 방치한 건 남현숙이 스스로 이 결혼은 안 되겠다고 포기하도록 만들려던 의도였다.남현숙이 마음만 먹으면 이수호가 아무리 미련을 둔다 해도 파혼을 피하기 어려울 테니까.이수호는 나지막이 말했다.“할머니, 겨우 해인 그룹 정도로 제가 눈치 볼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게다가 어젯밤 아영이 이미 송 회장한테 사과했고, 도지호는 그쪽에서 벌 줬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건 아영이 잘못이 아니에요.”이수호가 아영이라고 부르며 연신 감싸는 모습에, 도아영은 속으로 역겹기만 했다. 어젯밤 그녀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강이나를 데리고 다니던 사람이 말이다.“말은 그렇다 해도 도원 그룹 명성이...”남현숙은 차가운 얼굴로 도아영 쪽을 바라봤다.“너랑 수호 혼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구나.”과거 도아영이 이수
이수호가 도아영을 대신해 말하자 남현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아영아, 넌 참 영리하고 착한 아이야. 그런데 두 집안 명성에 너무 무심해서는 안 돼. 어제 일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같은 일이 또 생기면 나도 예전처럼 너를 좋게 볼 수 없어. 그때는 정말 너희 결혼을 다시 생각할 거야.”남현숙은 겉으로는 웃으며 말했으나, 그 안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도아영은 이수호의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그가 워낙 꽉 잡고 있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도아영이 입을 열려는 순간 이수호는 먼저 덧붙였다.“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아영이는 똑똑하고 착한 애인데 동생이 그 모양이네요. 하지만 이번에 꼭 잘 가르쳐서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했어요.”이수호는 또 안지원을 향해 지시했다.“안 비서, 할머니 모셔다드려.”“네.”안지원이 남현숙을 부축하자 이수호는 거침없이 도아영을 자기 뒤쪽으로 끌어갔다.도아영은 시야가 가려진 상태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그녀는 남몰래 손을 뻗어 이수호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러자 이수호가 아픈 듯 숨을 들이켰다. 그가 고통을 참으며 입을 다무는 모습에 도아영은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남현숙은 안지원의 부축을 받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그다음 순간 이수호가 재빨리 몸을 돌려 도아영을 벽 쪽으로 밀었다.도아영은 깜짝 놀랐다. 아까부터 이수호가 화를 삭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토록 강하게 밀치리라고는 예상 못 했다.서로 몸이 가까워지는 순간 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낮게 물었다.“너 파혼하고 싶어?”만약 그가 말을 끊지 않았으면 도아영이 파혼 얘기를 직접 꺼냈을 테고, 그러면 모든 게 틀어질 뻔했다.이수호는 또렷한 목소리로 한 마디씩 강조했다.“내가 말했지. 그건 절대 안 돼.”“말이 심하네요, 수호 씨. 할머니도 결혼을 다시 생각한다고 했어요. 만약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웁!”도아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입술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덮쳤다
도아영, 오직 도아영만 이토록 대담하게 굴 수 있었다.“대표님...”안지원이 안으로 들어와 참다못해 말했다.“도아영 씨가... 나가면서 현관 앞에 있던 나무를 부쉈습니다.”“부수고 싶으면 부수라고 해.”“네?”안지원은 잠시 멍해졌다.‘부수게 내버려두라고?’이수호는 입가에 맺힌 핏방울을 닦으며 말했다.“도씨 가문 저택에 가서 도아영을 다시 데려와.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어디도 못 가게.”“대표님...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만약 도아영 씨가 그냥 가 버리면 대표님의 체면만 구기는 거잖아요.”전에 도아영이 떠났을 때 이수호는 도발대발하며 그녀의 물건을 버렸었다. 그런데 다시 데려왔다는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거나 강이나가 알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내가 가라면 가! 이젠 내 말도 안 들을 거야?”“아닙니다.”안지원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이수호가 다시 말했다.“도아영은 내 약혼녀야. 내가 약혼녀보고 내 집에서 지내라고 하는 게 뭐 잘못된 일인가?”“... 아니요.”“그럼 빨리 가. 세 번 말하게 하지 마.”“네, 대표님.”안지원은 황급히 사무실 밖으로 물러났다.이수호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다 비로소 입가에 계속 느껴지는 통증을 알아차렸다. 손끝으로 만져 보니 도아영에게 물려 피가 맺혀 있었다.‘이 여자 개라도 되는 건가? 어쩜 이렇게 잘 물어뜯지?’하지만 또 생각해 보니 약혼녀와 키스하는 게 잘못된 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도아영도 그를 화나게 해서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이다.그리고 키스하고 나서 은근히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이수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잠시 뒤, 안지원이 다시 들어왔고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고민하는 이수호를 보더니 물었다.“대표님, 도원 그룹 쪽에 말을 전했습니다. 이제는...”“사과를 하려면 장미꽃이 좋을까, 백합이 좋을까?”“네?”안지원은 순간 뜻을 이해하지 못했
도아영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안 비서님, 이건 무슨 뜻이죠?”“이수호 대표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오늘은 대표님이 조금 과했던 것 같아서 사과의 뜻이라고...”안지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도아영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러자 안지원은 다급히 외쳤다.“아영 씨! 대표님께서는 진심으로 사과를 하시는 겁니다. 또 직접 사람을 보내서 아영 씨를 모셔 오라고 하셨어요! 제발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지시받은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요! 아영 씨!”도아영은 안지원이 밖에서 무슨 말을 하든 들을 생각이 없었다.그때, 2층에서 뛰어 내려온 유정연이 도아영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도아영! 감히 수호가 보낸 사람을 막다니, 이게 무슨 경우야?”유정연은 아들 도지호가 해인 그룹과 얽혀 송씨 가문을 제대로 건드린 뒤에 이수호를 의지해 겨우 살길을 찾으려는 중이었다. 그러니 이수호와 더는 갈등을 만들어서는 안 됐다.이런 생각으로 유정연은 활짝 웃는 얼굴로 문을 다시 열고 안지원에게 말했다.“안 비서님, 아영이가 조금 부끄러움이 많은 애라 그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곧 아영이를 이씨 가문으로 보낼게요.”도아영은 유정연의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가 우스워 보였다. 그녀에게 큰 빚을 진 상황에서도 이씨 가문을 이용해 도지호를 도와줄 심산이니 말이다.“아줌마, 집안일은 제가 결정해요.”“아영아, 이건 다 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유정연은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동주하고 돈은 계속 마련하는 중이야. 그러니 수호 집에 잠시만 가 있어. 네 동생은 병원에서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다리를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대. 네가 가서 어떻게든 수호 마음을 풀어줘야 우리 집안을 지킬 수 있지 않겠니?”유정연은 바로 울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야말로 프로 연기자처럼 익숙한 수법이었다. 속으로는 도아영을 이용해 이수호에게 잘 보여 도지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면서도 말이다.“좋아요. 아줌마를 봐서라도 갈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빚 청산 기한을 7일이
남현숙은 원래부터 유정연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유정연이 도아영의 새어머니이자 현재 도원 그룹의 안주인이기에 겉으로 예의를 차렸을 뿐이었다.그런데 그녀의 아들 도지호가 어젯밤 한 짓을 생각하면 남현숙도 더는 상대해 줄 마음이 없어졌다.남현숙은 냉담하게 물었다.“얼마를 빌리려는 건가요?”“그, 그렇게 많지 않아요... 그냥 180억 정도요.”180억이라는 숫자를 듣고 남현숙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180억? 제정신이야?!’“사모님, 이경 그룹은 워낙 규모가 크잖아요. 180억 정도는 새 발의 피 아닐까요? 제발 저희 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도 어쩔 수 없어서 염치를 불문하고 연락드렸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부탁드리지 않았습니다.”유정연은 동주를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틀 뒤면 값이 또 오른다고 했으니 빨리 160억 정도를 마련해야 했다.“정말 대단하시네요. 입만 열면 180억이라니... 우리 그룹을 무슨 현금 인출기로 보는 거예요?”남현숙은 원래부터 도아영의 태도에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어젯밤 일까지 겹쳐 호감이 뚝 떨어진 상태였다. 당연히 유정연에게 거액을 빌려 줄 리도 없었다.그렇게 말한 뒤, 남현숙은 통화를 바로 끊어 버렸다. 유정연에게 체면을 세워 줄 마음도 없었다.유정연은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듣고 순간 멍해졌다.‘끊었어?’남현숙이 돈을 빌려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은 유정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제 어떡하지?’남현숙마저 안 된다고 하면 그녀는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은행에서 가정주부에게 180억을 빌려줄 리가 없었다.‘혹시... 사채는 가능하지 않을까?’같은 시각, 이씨 가문.도아영이 안지원의 안내로 이씨 가문에 들어섰다. 사실 그녀가 이곳을 떠난 지는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도우미는 공손하게 도아영을 맞이하며 인사를 건넸다. 도아영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그녀는 잠시 조용히 숨어 있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도지호가 곧 퇴원할 테니 매
이때 도아영의 뒤에서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좋아, 다 받아들이지.”그 말에 도아영은 뒤돌아보았다. 이수호가 마침 이 타이밍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의 가슴팍에 살짝 부딪쳤는데 옷깃에 달린 장식이 콧등을 찧어 아팠다.도아영은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제가 말한 조건들 정말 다 동의하겠다는 거예요?”평소답지 않은 이수호의 너그러운 태도에 도아영은 의아해졌다.이수호는 담담히 답했다.“왜, 내가 허락하니까 오히려 기분이 나쁜 건가?”“아니요, 받아준다니 기분은 당연히 좋죠.”도아영은 이수호가 혹시 마음을 바꿀까 봐 황급히 안지원에게 고개를 돌렸다.“안 비서님, 수호 씨가 허락했으니 필요한 건 다 부탁드릴게요.”“...네, 아영 씨.”안지원은 재빨리 지시를 내려 도아영의 방을 새로 준비하러 움직였다.도아영은 이수호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다른 볼일 없으면 저는 위로 올라가서 쉴게요.”“잠깐.”이수호가 그녀 팔을 붙잡았다.도아영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고 그의 손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을 자르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무슨 일이죠?”“내가 보낸 꽃, 어디 있어?”이수호가 장미꽃 얘기를 꺼내자 도아영은 아까와 다름없는 예의 바른 미소로 답했다.“아, 그 장미꽃이요? 저랑은 영 안 어울리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두고 왔어요.”“집에 뒀다는 게, 설마 버린 건 아니지?”도아영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그냥 남겨둔 거예요.”‘정원 쓰레기통에 남긴 것도 남긴 거니까.’도아영이 분명히 남겼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니 이수호도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문을 나설 때 버린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더 볼 일 없으면 저는 올라가 볼게요.”“기다려 봐.”이수호가 또다시 붙들자 그녀는 대놓고 귀찮은 기색을 보였다.‘또 무슨 일인데?’“할 말이 있으면 한꺼번에 해줘요. 이러면 정말 피곤하거든요?”“왜 하필 안쪽 방에서 지내겠다고 한 거야?”전에 도아영은 이수호 방 바로 옆 객실을 썼었
이수호는 도아영이 자신을 암시한다고 착각하며 느긋하게 말했다.“우리는 약혼한 사이니까 같이 지내는 것도 이상할 건 없어. 내 침대가 세 사람이 누워도 넉넉한 사이즈라 너만 원하면...”“대낮에 했던 일 때문에 책임지려고 하는 거라면, 안 그래도 돼요. 저는 이해해요, 수호 씨가 잠깐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겠죠. 사실 그냥 키스일 뿐이라 저는 크게 개의치 않고 있어요.”도아영의 말을 이수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뭐? 개의치 않는다고?”“그럼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남녀가 키스 좀 했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키스 때문에 목숨까지 걸 이유도 없고요.”“...”이수호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지금 나만 신경 쓴다는 얘기야?’“네 말이 맞아. 난 또 네가 정조 관념이 엄청 강한 줄 알았네. 아까 한 말은 못 들은 거로 해.”이수호는 가슴이 답답했다.2층으로 올라간 그는 이제야 일까지 내려놓고 돌아온 이유가 뭔지 떠올랐다. 그는 도아영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 명확히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도아영, 잊지 마. 너는 내 약혼녀야, 우리 그룹 미래의 안주인. 내 곁에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도망간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든 다시 잡아 올 거니까!”말을 마친 이수호는 등을 돌려 저택 밖으로 나갔다. 도아영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미친 거 아니야?’“아영 씨, 방은 다 정리됐어요. 다만 당장 리모델링은 어려워, 일단은 전에 쓰던 방을 좀만 더 쓰셔야겠어요. 인테리어 기사님이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안지원은 지금 막 사무실로 돌아가려다 이수호가 화내며 나가는 걸 보고 진땀을 흘리는 중이었다.‘아영 씨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가는 것 같아. 결혼까지 하면 대표님을 얼마나 더 꽉 잡으실까.’안지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인테리어까지 할 건 없고 그냥 가구 몇 개만 바꿔 줘요.”그렇게 말한 뒤 도아영은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이수호의 옆방에 다시 머무
‘확실하지 않다고?’강이나는 조금 전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다. 이수호가 도아영과 키스하고, 이씨 가문에서는 도아영을 위해 새 가구까지 들여놓았다는 말이 아니던가.그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강이나는 곧장 이수호의 사무실로 향했다.문 앞에 다다르자 안지원이 먼저 막아서며 말했다.“이나 씨! 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라 들어가시면 안 됩...”안지원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이나는 이미 사무실 문을 확 열어젖혔다.안을 보니 이수호는 헤드셋을 낀 채 컴퓨터 화면 넘어 외국 회사와 온라인 회의 중이었다. 강이나의 난데없는 등장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수호는 간단히 마무리 인사를 한 뒤 통화를 끊었다.“이나야, 나 아직 일하는 중이야.”강이나는 이토록 무턱대고 들어올 사람이 아니었다.예전 같으면 강이나가 이렇게 무턱대고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이수호는 헤드셋을 내려놓으며 강이나가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걸 들었다.“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나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퇴근할 때 차 태워주려고 왔어요.”강이나가 겨우 미소를 지었지만 굳어버린 표정에서는 억지스러움이 가득했다.그러나 이수호는 그녀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오늘은 볼 일이 있어서 같이 못 갈 것 같아. 조금 늦을 테니 기사를 붙여줄게. 밤늦게 돌아다니면 위험하니까.”이수호는 늘 그랬듯 강이나를 배려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강이나는 그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망설이다가 그녀는 결국 물어봤다.“수호 씨... 아영 씨랑 같이 지내기로 한 거 사실이에요?”그 질문이 나오자 이수호의 눈이 잠시 싸늘해졌다.“누가 그랬어?”“저...”강이나가 망설이자 이수호는 재차 물었다.“설마 도아영이 말했어?”“아, 아니에요.”강이나가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이수호는 도아영이 일부러 흘린 정보라고 확신했다.예전 같으면 도아영이 강이나를 도발하려고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한 것에 혐오감만 커졌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왠지 모르게 기분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