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하지 않다고?’강이나는 조금 전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다. 이수호가 도아영과 키스하고, 이씨 가문에서는 도아영을 위해 새 가구까지 들여놓았다는 말이 아니던가.그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강이나는 곧장 이수호의 사무실로 향했다.문 앞에 다다르자 안지원이 먼저 막아서며 말했다.“이나 씨! 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라 들어가시면 안 됩...”안지원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이나는 이미 사무실 문을 확 열어젖혔다.안을 보니 이수호는 헤드셋을 낀 채 컴퓨터 화면 넘어 외국 회사와 온라인 회의 중이었다. 강이나의 난데없는 등장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수호는 간단히 마무리 인사를 한 뒤 통화를 끊었다.“이나야, 나 아직 일하는 중이야.”강이나는 이토록 무턱대고 들어올 사람이 아니었다.예전 같으면 강이나가 이렇게 무턱대고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이수호는 헤드셋을 내려놓으며 강이나가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걸 들었다.“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나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퇴근할 때 차 태워주려고 왔어요.”강이나가 겨우 미소를 지었지만 굳어버린 표정에서는 억지스러움이 가득했다.그러나 이수호는 그녀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오늘은 볼 일이 있어서 같이 못 갈 것 같아. 조금 늦을 테니 기사를 붙여줄게. 밤늦게 돌아다니면 위험하니까.”이수호는 늘 그랬듯 강이나를 배려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강이나는 그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망설이다가 그녀는 결국 물어봤다.“수호 씨... 아영 씨랑 같이 지내기로 한 거 사실이에요?”그 질문이 나오자 이수호의 눈이 잠시 싸늘해졌다.“누가 그랬어?”“저...”강이나가 망설이자 이수호는 재차 물었다.“설마 도아영이 말했어?”“아, 아니에요.”강이나가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이수호는 도아영이 일부러 흘린 정보라고 확신했다.예전 같으면 도아영이 강이나를 도발하려고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한 것에 혐오감만 커졌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왠지 모르게 기분
‘안 돼,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도아영이 수호 씨를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그 생각이 들자 강이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 당장 귀국해 줘.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저녁 무렵, 이수호는 이미 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와 있었다.거실에는 조명 하나만 켜져 있고 2층에서는 가구 옮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이수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직도 못 끝냈어?”안지원이 대답했다.“아영 씨가 요구사항이 많아서요. 오후 내내 세 번이나 가구를 바꿨습니다.”“본인은 어디 갔는데?”안지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마... 일일이 지휘하고 있는 것 같아요.”“지휘? 뭘 지휘한다는 건데?”이수호는 얼굴이 굳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도아영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막 계단을 오르자마자 하얀 연기가 이수호의 얼굴로 휙 끼얹어졌다. 가구를 옮기는 업자 중 하나가 다급히 외쳤다.“대표님, 죄송해요. 아영 씨가 벽을 다시 칠하자고 해서...”이수호의 옷에 하얀 먼지가 잔뜩 내려앉았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조금 더 들어가 보니 안쪽에서 도아영이 업자들을 이리저리 지휘하고 있었다.“조금만 더 왼쪽이요. 침대는 이쪽이 좋아요.”그녀는 말하면서 손에 사과를 들고 유유히 베어 물고 있다.“도아영!”이수호가 갑자기 등 뒤에서 소리치자 도아영이 돌아봤다.문가에 선 이수호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다.“수호 씨? 수호 씨도 구경하러 왔어요?”“구경?”이수호는 기가 막혔다. 집안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 저런 소리를 하다니 말이다.“미안해요. 먼지가 좀 심하죠?”그녀는 말하면서 한 석회 가루를 들어 보였다. 이수호는 본능적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도아영이 덧붙였다.“벽면에 퍼티 칠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해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같이 해요.”“그만해, 그거 치워!”이수호는 코와 입을 감싸 쥐고 방 안
“네, 대표님.”안지원은 조용히 물러났다.아래층.이수호는 편안한 흰색 가운 차림으로 내려왔다. 냉장고 안에는 몇 가지 간단한 반찬들이 있었다.하지만 이수호는 한눈에 보아도 이것이 도아영이 만든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득 그는 예전에 도아영이 이씨 가문에 머물던 때를 떠올렸다.그 시절, 도아영은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만들어 주었고 이수호가 입맛이 없을까 봐 메뉴까지 바꾸어 주었다.그때 이수호가 먹을지 말지는 오로지 그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먹을 밥이 아예 없었다.그 생각이 스치자 이수호는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져서 쾅 소리를 내며 냉장고를 닫았다. 안지원이 살짝 눈치를 보며 물었다.“대표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신가요?”“네 생각은 어때?”이수호가 기분이 언짢아 보이자 안지원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예전에는 도우미가 만든 요리를 가장 좋아하셨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제가... 배달 음식을 주문해 드릴까요?”“됐어.”이수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도아영은 저녁 먹었어?”“아직 드시지 않았을 겁니다.”“내려와서 먹으라고 해.”“그건...”안지원은 도아영이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수호가 매섭게 쳐다봐서 결국 말을 삼켰다.결국 안지원은 2층으로 올라갔다. 도아영은 여전히 방 안에서 업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안지원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말했다.“아영 씨, 대표님께서 내려와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십니다.”“저는 저녁 안 먹어요.”도아영은 담담하게 답했다.전에 이씨 가문에 머물 때 저녁 식사를 했던 것은 이수호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이수호는 위장이 약해서 반드시 세 끼를 챙겨 먹어야 했지만, 도아영은 하루 두 끼면 충분했고 몸매를 유지하려고 저녁은 늘 거르는 편이었다.안지원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수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대표님은 그래도 아영 씨가 만들어 주는 요리를 좋아하세요. 그러니까...”안지원은 노골적으로 부
안지원이 한 말을 듣고 이수호는 순간 얼이 빠졌다.‘그런 일이 있었나?’이수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예전에는 도아영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터라, 그녀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안지원의 입을 통해서 들은 그는 도아영에게 너무 가혹했다. 심지어 무례하기까지 해서 믿기 어려웠다.“대표님, 저는 아영 씨가 화가 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누구도 자신의 진심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짓밟히길 바라지 않는다.도아영도 마찬가지다.하물며 안지원조차 도아영이 저녁을 먹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 정작 약혼자인 이수호만 모르고 있었다.이수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식욕은 이미 뚝 떨어졌다.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안지원도 뒤따르려 했지만 이수호는 말했다.“오늘 밤 업무는 미뤄 둬요. 안 비서도 먼저 퇴근해요.”“네, 대표님.”안지원이 대답했다.이수호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거기서는 도아영이 방에서 별다른 거리낌 없이 업자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아예 모자를 쓰고 직접 돕기까지 했다.전형적인 재벌가 아가씨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도 우아하거나 조심스러운 구석이 없었다.이때, 도아영이 고개를 돌리다가 문가에 서 있는 이수호를 발견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놓고 불편해했다.‘저 인간은 왜 또 왔대?’“대표님, 여기 지저분하니까 들어가 계세요. 최대한 조용히 해볼게요.”작업을 총괄하던 인부가 이수호의 표정을 보고는 잔뜩 긴장해 말했다. 이수호가 화를 낸다면 그의 회사는 운영을 못 하게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하지만 도아영은 이수호를 못 본 척하며 계속 붓질했다.그런데 이전에는 그렇게 먼지를 피하던 이수호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도아영이 들고 있던 페인트가 이수호의 비싼 수제 구두에 튀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내려와.”“무슨 일이죠?”도아영은 사다리 위에 있었다.이수호의 목소리에는 명령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물러서지 않을 듯하자 도아영은 어쩔 수 없이 사다리
위가 안 좋은 사람에게 식습관을 배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저녁은 조금이라도 먹어야지 굶으면 안 돼. 하루에 두 끼만 먹으면 생활이 불규칙해져. 오늘부터 내가 저녁 먹을 때 너도 같이 먹어.”“수호 씨, 저는 저녁을 먹지 않아요. 이렇게 강제로 시키는 건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요?”“매일 저녁 먹으면 너한테 하루에 2억씩 줄게.”도아영은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매일 2억씩이나 준다고? 미친 거 아니야?’이수호는 도아영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그걸로 부족해?”“혹시... 4억도 돼요?”이는 도아영이 시험 삼아 불러 본 금액이다. 그러나 이수호의 얼굴을 보고는 지나쳤음을 깨달았다.“그, 그냥 2억이면 돼요.”“하루라도 저녁을 거르면 4억씩 깎을 거다. 한 달 내내 제대로 먹으면 60억 원은 거뜬히 벌겠지.”그러면서 이수호는 벌써 밥그릇에 젓가락을 댔다.이수호는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고 식재료에 대한 까다로운 입맛도 있다. 게다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제한적이다.예전에는 도아영이 이수호의 입맛에 맞추려고 온갖 고생을 했다. 그녀는 요리법을 연구하기 위해 별별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지금 순순히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는 전에 일부러 까다롭게 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맛있어요?”“내 세상에 맛있고 없고는 없어. 먹을 수 있으면 그냥 다 괜찮아.”그 말을 듣자 도아영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럼 전에는 일부러 까다롭게 굴었다는 말이네요?”“뭐?”이수호는 잠깐 눈을 깜박이다가, 예전에 도아영을 쫓아내려고 일부러 까다로운 요구를 늘어놨던 걸 떠올렸다.뼈 없는 생선, 질감이 흐물거리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고기, 꽃 칼집을 넣은 채소 등등...원래는 그녀가 진짜로 해낼 줄 몰랐는데, 점점 그의 기호에 맞춰 만들어 내기까지 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이수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오늘은 그냥 억지로 먹는 거야. 나중에라도 네가 만들어주면...”“꿈도 꾸지 마요.”
이수호는 끝내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고는 불이 환하게 켜진 방으로 걸어갔다.‘한밤중에 웬 공사야? 진짜 시끄럽게!’“도아영, 너!”다만 그는 입이 쩍 벌어졌다. 도아영이 사다리에 앉아서 드릴로 무언가를 뚫고 있었고 방 안에는 인테리어 기사가 보이지도 않았다.그녀는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높게 틀어서 이수호가 들어온 걸 아예 몰랐다.이수호는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보더니 냉큼 달려가서 음악을 꺼버렸다.도아영은 문득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뭐지? 블루투스가 왜 끊겼지?”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면서 헤드폰을 벗자 아래에서 갑자기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장 내려와!”도아영은 화들짝 놀라서 다리를 휘청거리다가 사다리까지 함께 온몸이 뒤로 기울었다.이를 본 이수호는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사다리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옆에 있던 페인트통까지 죄다 그의 몸에 쏟아졌다.그는 순식간에 온몸이 페인트로 새하얗게 물들었다.“스읍!”도아영은 너무 아파서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그녀는 허리를 부축하며 일어서다가 초라한 몰골의 이수호를 보게 됐다.“야!!”이수호는 이를 악물고 음침한 얼굴로 쏘아붙였다.도아영이 이사 온 이후로 그는 줄곧 불행을 겪게 되었다.금전적 손해, 프로젝트 미스, 온갖 당황스러운 일들만 겪고 있다.이 여자가 정말 용한 사람을 찾아서 그를 저주한 걸까?“미안해요... 그러게 왜 몰래 남의 방에 들어오고 그래요?”그녀가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들어올 때 노크라도 했어야죠!”이토록 뻔뻔스러운 태도에 이수호는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일단 가서... 좀 씻을래요?”도아영은 이미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그도 그럴 것이 이수호는 지금 온몸이 새하얀 페인트로 물들어서 이대로 놔뒀다가 다 말라서 처리하기 더 힘들 것이다.이수호는 곧장 일어나서 그녀를 힘껏 노려본 후 자리를 떠났다.한편 도아영은 주눅이 들어서 목을 움츠렸지만 그가 등 돌린 후 중지 손가락을 확 내밀었다.“쌤통이야!”‘이런 게 바로 처절
도아영의 펑키룩을 본 순간 이수호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짧은 재킷에 배꼽이 훤히 드러난 탱크톱, 타이트한 블랙진 숏 팬츠와 망사스타킹까지... 이보다 더 충격적인 패션은 없을 것이다.늘씬한 두 다리는 너무 유혹적이고 S자 몸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너... 이렇게 입고 어디 가려는 거야?”이수호의 인상 속 그녀는 노출이 전혀 없는 단아한 샤넬 원피스로 마냥 착하고 순수한 이미지였는데 오늘은...“실은 나 이렇게 입는 거 엄청 좋아하거든요. 시원하잖아요.”도아영은 일부러 까진 척하면서 이수호에게 다가왔다.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얇은 탱크톱을 사이에 두고 살결이 은은하게 비쳤는데 새하얀 속살은 그야말로 탐스러웠다.긴 생머리가 어깨까지 드리워지자 요염한 자태가 사람을 매혹할 것만 같았고 거기에 백옥 같은 피부와 잘록한 허리까지 더하니 엉큼한 생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도아영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는데 바지가 너무 짧다 보니 하마터면 속살이 훤히 비칠 뻔했다.이수호는 저도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대낮부터 왜 이렇게 온몸이 후끈거리는 걸까?어제 그녀와 키스할 때 부드러운 촉감을 생각하노라면 이수호는 목이 다 간질거렸다.“왜 그래요, 대표님?”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오늘 스모키한 메이크업을 했지만 지저분해 보이는 게 아니라 요염하고 섹시할 따름이었다.“아니야, 아무것도.”이수호가 시선을 피하자 그녀는 더 의아해졌다.‘뭐야? 이 남자 이런 스타일 싫어했잖아? 농염하고 끼 부리는 여자라면 딱 질색일 텐데?!’‘이 반응은 뭐지? 내가 좀 더 오픈해야 했나?’하지만 이건 이미 도아영의 한계였다.설마...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나와야 한다는 말인가?그녀는 일부러 하이힐로 이수호의 바지 끝자락을 스쳤다.식탁 아래에서 이수호는 망사스타킹이 다리에 닿는 느낌을 받고 감전된 것처럼 온몸을 움찔거렸다.“됐어, 그만해!”말을 마친 그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부랴부랴 집 밖을 나섰다.‘오케이, 효과 있네!’그녀
“헐, 대박! 너 진심?”주민서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도아영을 쳐다봤다.대체 본인에게 얼마나 가혹해야 이런 식으로 꾸미고 학교에 나올 수 있을까?“아영아, 단언컨대 네가 이수호 약혼녀가 아니었다면 학교 대문도 못 들어왔어. 경비 아저씨가 극구 말렸을 거야.”“그래? 난 뭐 괜찮은 것 같은데.”도아영이 거울에 몸을 비추면서 답했다.이에 주민서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넌 지금 딱... 드라마에서 나오는 반항기 불량소녀 같아. 소년원에 갇혀야 할 판이라고.”“됐어, 넌 신경 꺼. 내가 이렇게 해야 이수호가 날 미워할 거거든. 나도 이게 최후의 방법이라서 그래.”“그럼 이수호는 뭐래? 정말 싫대?”“아마도...”오늘 아침 이수호의 반응을 되새겨보면 증오와는 조금 거리가 먼 것 같기도 했다.하지만 전에 갖은 수법을 써도 이 남자는 늘 무덤덤한 태도였다. 혐오까진 아니지만 호감도 절대 아니었다.그녀는 답답하다는 식으로 말을 이어갔다.“대체 왜 날 안 미워하는 거야? 전에는 그렇게 잘하더니.”“그건 네가 전에 귀찮을 정도로 이수호 꽁무니만 쫓아다녔으니 당연히 싫어할 만 했지.”도아영은 잠시 머뭇거렸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계속 꽁무니를 쫓아다니면 이수호도 계속 날 미워한단 뜻이지?”“내가 볼 땐 그 방법이 최고야.”주민서와 도아영 모두 이 방법이 꽤 괜찮을 듯싶었다.하지만 지금 도아영은 도저히 이수호에게 아양을 떠는 여자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이것 참 난감할 따름이었다.이수호에게 치근덕거리면서 아부하라고?그녀는 절대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아 참, 어제 구 쌤이 널 찾으시던데?”“구연준 씨가? 갑자기 나를 왜?”주민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구연준 같은 레벨의 강사는 일반 학생들이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도아영 정도가 돼야 그와 교류할 자격이 있다.“내가 한번 가보지 뭐.”도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주민서가 재빨리 말렸다.“곧 수업 시작인데 어디 가게?”“쌤 찾으러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