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영의 펑키룩을 본 순간 이수호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짧은 재킷에 배꼽이 훤히 드러난 탱크톱, 타이트한 블랙진 숏 팬츠와 망사스타킹까지... 이보다 더 충격적인 패션은 없을 것이다.늘씬한 두 다리는 너무 유혹적이고 S자 몸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너... 이렇게 입고 어디 가려는 거야?”이수호의 인상 속 그녀는 노출이 전혀 없는 단아한 샤넬 원피스로 마냥 착하고 순수한 이미지였는데 오늘은...“실은 나 이렇게 입는 거 엄청 좋아하거든요. 시원하잖아요.”도아영은 일부러 까진 척하면서 이수호에게 다가왔다.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얇은 탱크톱을 사이에 두고 살결이 은은하게 비쳤는데 새하얀 속살은 그야말로 탐스러웠다.긴 생머리가 어깨까지 드리워지자 요염한 자태가 사람을 매혹할 것만 같았고 거기에 백옥 같은 피부와 잘록한 허리까지 더하니 엉큼한 생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도아영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는데 바지가 너무 짧다 보니 하마터면 속살이 훤히 비칠 뻔했다.이수호는 저도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대낮부터 왜 이렇게 온몸이 후끈거리는 걸까?어제 그녀와 키스할 때 부드러운 촉감을 생각하노라면 이수호는 목이 다 간질거렸다.“왜 그래요, 대표님?”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오늘 스모키한 메이크업을 했지만 지저분해 보이는 게 아니라 요염하고 섹시할 따름이었다.“아니야, 아무것도.”이수호가 시선을 피하자 그녀는 더 의아해졌다.‘뭐야? 이 남자 이런 스타일 싫어했잖아? 농염하고 끼 부리는 여자라면 딱 질색일 텐데?!’‘이 반응은 뭐지? 내가 좀 더 오픈해야 했나?’하지만 이건 이미 도아영의 한계였다.설마...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나와야 한다는 말인가?그녀는 일부러 하이힐로 이수호의 바지 끝자락을 스쳤다.식탁 아래에서 이수호는 망사스타킹이 다리에 닿는 느낌을 받고 감전된 것처럼 온몸을 움찔거렸다.“됐어, 그만해!”말을 마친 그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부랴부랴 집 밖을 나섰다.‘오케이, 효과 있네!’그녀
“헐, 대박! 너 진심?”주민서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도아영을 쳐다봤다.대체 본인에게 얼마나 가혹해야 이런 식으로 꾸미고 학교에 나올 수 있을까?“아영아, 단언컨대 네가 이수호 약혼녀가 아니었다면 학교 대문도 못 들어왔어. 경비 아저씨가 극구 말렸을 거야.”“그래? 난 뭐 괜찮은 것 같은데.”도아영이 거울에 몸을 비추면서 답했다.이에 주민서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넌 지금 딱... 드라마에서 나오는 반항기 불량소녀 같아. 소년원에 갇혀야 할 판이라고.”“됐어, 넌 신경 꺼. 내가 이렇게 해야 이수호가 날 미워할 거거든. 나도 이게 최후의 방법이라서 그래.”“그럼 이수호는 뭐래? 정말 싫대?”“아마도...”오늘 아침 이수호의 반응을 되새겨보면 증오와는 조금 거리가 먼 것 같기도 했다.하지만 전에 갖은 수법을 써도 이 남자는 늘 무덤덤한 태도였다. 혐오까진 아니지만 호감도 절대 아니었다.그녀는 답답하다는 식으로 말을 이어갔다.“대체 왜 날 안 미워하는 거야? 전에는 그렇게 잘하더니.”“그건 네가 전에 귀찮을 정도로 이수호 꽁무니만 쫓아다녔으니 당연히 싫어할 만 했지.”도아영은 잠시 머뭇거렸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계속 꽁무니를 쫓아다니면 이수호도 계속 날 미워한단 뜻이지?”“내가 볼 땐 그 방법이 최고야.”주민서와 도아영 모두 이 방법이 꽤 괜찮을 듯싶었다.하지만 지금 도아영은 도저히 이수호에게 아양을 떠는 여자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이것 참 난감할 따름이었다.이수호에게 치근덕거리면서 아부하라고?그녀는 절대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아 참, 어제 구 쌤이 널 찾으시던데?”“구연준 씨가? 갑자기 나를 왜?”주민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구연준 같은 레벨의 강사는 일반 학생들이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도아영 정도가 돼야 그와 교류할 자격이 있다.“내가 한번 가보지 뭐.”도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주민서가 재빨리 말렸다.“곧 수업 시작인데 어디 가게?”“쌤 찾으러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얼굴은 만화를 찢고 나온 얼굴이라 해도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하지만 도아영에게 잘생긴 남자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 현재 급선무는 구연준을 만나는 일이었다.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박태오가 선글라스를 벗자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다 왔어?”“강의1동이야.”그가 강이나에게 답했다.잠시 후, 강이나가 강의1동에 도착했다.“방금 저 사람 도아영 맞아?”박태오는 사실 도아영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서로 비슷한 집안 출신이라 어릴 때 함께 놀면서 커왔다.박씨 일가와 도씨 일가는 집안 환경이 거의 비슷하여 어릴 때부터 함께 놀기도 했지만 그가 아역 배우가 된 이후로 더는 도아영을 본 적이 없다.아마 도아영도 이제 그를 거의 까먹었을 것이다.“바로 쟤야.”강이나는 언짢은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아주 날 바보처럼 갖고 논다니까. 태오야, 넌 어려서부터 줄곧 내 편이었잖아. 이번에 이렇게 널 불러온 것도 어쩔 수가 없었어.”“이수호랑 싸웠니?”박태오는 그녀와 전화할 때 이미 서러움에 북받친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챘다.어렸을 때 강이나는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존재였다. 강씨 일가에 나쁜 일이 생긴 후 동년배들은 전부 그녀와 함께 놀기를 꺼렸다.그럴 때 박태오가 항상 그녀를 지켜주었다.강이나는 박태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다 쟤 때문이야. 뭐든 나랑 맞서 싸우려고 한다니까. 태오야, 나 이제 너밖에 없어. 제발 좀 도와줘.”그녀의 말을 들은 박태오는 잠시 침묵했다.그 시각.도아영은 이미 6층까지 기어 올라갔다. 특급 강사의 사무실은 왜 이렇게 높은 층에 있는 걸까?학교 엘리베이터를 최대한도로 사용하고 싶어서?!이때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방금 하얀색 후드의 남자가 뇌리를 스쳤다.‘잠깐! 방금 그 남자 왜 이렇게 눈에 익지? 설마 박태오?’도아영은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돌아가서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이때 마침 구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무 느려.”그는 5층 계단까지 올라와서 다시
“무슨 생각 하는 거야?”구연준이 불쑥 수중의 책으로 도아영의 머리를 두드렸다.그제야 도아영도 전생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왜 때려요?”“할 얘기 있다고 했잖아.”구연준은 수중의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것 좀 봐봐.”서류를 펼치자 남원 교외 부지의 승인에 관한 서류가 들어 있었다.이를 본 도아영은 곧바로 예스를 외쳤다.구연준은 미간을 구기면서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이야?”“연준 씨는 몰라요. 나 곧 부자 될 거라고요.”그녀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구연준은 피식 웃었다.“이거 하나로 부자 된다고? 기껏해야 정부 보조금이나 받겠지. 얼마나 하겠어? 게다가 남원 교외는 황폐한 땅이라 승인이 내려와도 큰돈은 못 벌 거야.”구연준은 남원 교외 부지가 어느 정도의 값어치를 하는지 당연히 알 리가 없다.애초에 그녀가 큰돈을 들여서 이 땅을 낙찰받은 이유가 바로 추후에 온천 리조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황폐한 땅에 온천 리조트를 만든다는 것은 상인들이 꿈에도 얻지 못할 초특급 혜택이다.“난 이미 시공 준비가 다 됐어요. 그때 가서 나랑 협력하겠다고 사정하지나 말아요.”“걱정 마. 난 그쪽 땅에 관심 없어.”구연준은 솔직히 말해서 남원 교외 부지에 일절 관심이 없다.애초에 도아영이 천억을 들여서 이 땅을 살 때 그는 이 여자가 머리가 잘못된 거라고 비웃었다.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늘 변함이 없다.구연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전부 같은 생각일 것이다.특히 도아영의 약혼자 이수호가 제일 많이 비웃겠지...잠시 후 도아영이 서류를 들여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구연준은 문득 그녀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따가운 시선이 불편했던 도아영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뭘... 그렇게 봐요?”“이렇게 입고 학교에 나와? 학점 깎을 거야.”말을 마친 구연준이 책자를 들어 올렸다.그가 진지하게 나오자 도아영이 재빨리 대답했다.“나 이제 대학생이에요!”“대학생이면 마음대로 입고 다녀도 돼? 한성대생들이 다 너처럼
도아영은 ‘병신’이라는 두 글자를 꾹 집어삼키고 구연준의 사무실을 나섰다.학교에서의 시간은 역시 빨리 지나가는 법이었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그녀와 주민서도 나란히 강의동에서 나왔다.사실 오후에 수업이 아예 없었지만 도아영이 도서관에서 좀 더 머무르고 싶다고 했다.주민서는 그녀가 이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지난번 약혼식 때 수영장에 빠진 이후로 정신을 번쩍 차리고 새 출발을 한 것만 같았다.이수호에게 들러붙지 않을뿐더러 공부에도 갑자기 너무 큰 흥취를 느끼고 있으니까.“아영아, 이렇게까지 힘들게 공부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너희 집에 남은 돈으로 평생 플렉스하면서 살 텐데.”“그건 안 되지. 돈이란 건 오늘 네 것이었다가도 내일이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는 수가 있어. 하지만 지식은 아니야. 배우는 대로 전부 네 머릿속에 저장해서 아무도 못 뺏어가.”여기까지 말한 도아영이 시계를 들여다봤다.“시간 다 됐다.”“뭐가?”주민서는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수호가 통금 시간까지 정했어? 오지랖 너무 심한 거 아니야?”“노노. 황홀한 밤이 시작됐다고.”도아영이 말했다.“이수호 같은 남자는 제 약혼녀가 밤에 밖에서 실컷 놀고 다니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할 거야.”“정상적인 남자라면 밖에서 놀기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다 싫어해...”그녀는 독해도 너무 독했다.이런 수법으로 이수호한테 미움을 받으려 하다니.그들의 신분으로 자칫하다 큰일이라도 빚으면 엄청날 텐데...“내가 클럽에서 식스팩 복근을 지닌 남자를 여섯 명 불렀는데 너도 갈래?”주민서는 당연히 가겠다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정중하게 말했다.“지금 바로 당장!”그 시각.클럽 안.심정우가 이수호를 데리고 VIP룸으로 들어갔다.“네가 싫어하는 거 알아. 그래도 어떡해? 일이니까 피할 순 없잖아.”심정우는 문득 나지막이 속삭였다.“내가 장 마담한테 미리 말해뒀으니 이따가 이쁜 애들 줄줄이 들어올 거야. 너도 이참에 스트레스 좀 풀어. 종일 일
이건 거의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루틴이다.술이 알딸딸해진 후 심정우가 이수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화장실 다녀올게!”그는 살짝 취했지만 이수호는 뭐라 하지 않았다.다만 옆에 있던 여자들이 눈치도 없게 들이대기 시작했다.“대표님...”이수호가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끼 부리려던 여자들은 사색이 되어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죄송하지만... 제가 술을 잘 못 해요...”이때 옆에서 잔뜩 난감해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한 여자가 남자의 품에 안겨서 강제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려 얇은 옷을 흠뻑 적셨고 속살까지 훤히 드러났다.이수호는 그제야 봉변을 당하는 여자가 임규리라는 걸 알아봤다.횡설수설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수호가 앞으로 다가가 유태범의 손을 덥석 잡았다.한편 유태범은 그가 임규리를 지켜주니 이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고 얼른 놓아줬다.“이 대표가 강이나 씨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얘도 좀 비슷하게 생겼네요. 역시 대표님 취향이셨군요!”만취한 유태범은 말투가 아주 무례했다.이때 임규리가 재빨리 이수호의 뒤에 숨어서 겁에 질린 채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이수호는 별안간 미간을 구겼다.도아영만 아니었다면 오늘 임규리를 거들떠볼 리도 없을 테니까.“대표님...”임규리는 겁에 질린 사슴처럼 한없이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나가.”하지만 이수호는 매우 차갑게 쏘아붙였다.“저는 그저 등록금 벌려고 온 거예요. 절대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임규리가 서둘러 해명하려 했지만 이수호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이때 문밖에서 심정우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황급히 뛰쳐 들어왔다.“수호야, 나 방금 누구 봤는지 알아?”그가 짙은 얼굴로 이수호에게 속삭였다.순간 이수호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대표님!”이수호가 밖으로 나가자 임규리는 사색이 되었다.그 시각, 룸 안.주민서도 귀신을 본 듯 허겁지겁 룸으로 들어왔다. 도아영은 한창 식스팩 연하남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녀가 대뜸 말을
도아영이 남자 어깨에 손을 걸친 순간 이수호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졌다.그 남자는 이수호와 눈이 마주치더니 겁에 질린 채 도아영에게 바짝 다가갔다.“누나, 저 사람 누구예요?”“누군지 몰라?”도아영은 눈썹을 치키고 그에게 답했다.“이경 그룹 대표, 내 약혼자잖아.”드디어 이수호의 정체를 알아낸 그 남자는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룸에 있던 다른 남자들도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왔다.지금 다들 모여서 이수호의 약혼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니?!하지만 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착하지. 지금도 충분히 나갈 수 있어.”남자들은 하나같이 넋을 놓고 그녀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곧이어 이수호가 분노를 참으면서 큰소리로 외쳤다.“다 나가!”짤막한 한 마디에 남자들은 황급히 줄행랑을 쳤다.이수호가 제대로 뿔나자 주민서는 그녀가 몹시 걱정되어 뭐라도 편들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심정우가 곧장 그녀를 말렸다.“쉿! 여긴 네가 끼어들 데가 아니야.”룸문이 닫히고 도아영이 속절없이 고개를 내저었다.“대표님, 다들 여기 즐기려고 온 거잖아요. 나도 뭐라 안 하는데 대표님이 왜 간섭하려고 들어요?”그녀는 여전히 오늘 아침 옷차림으로 술까지 마신 채 새하얀 얼굴에 홍조기를 띄었다. 빨갛게 물든 촉촉한 입술은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즐겨?”이수호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턱을 집어 올렸다.“즐긴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걸 몰라요? 대표님은 여자 한 명도 안 불렀다고요? 에이, 난 전혀 못 믿겠는데?!”그녀가 간사하게 웃으며 말했다.전생이나 현생이나 이수호는 늘 자기관리가 투철한 사람이고 이런 일에 대해서도 무조건 절제하는 성격이다.그는 다른 여자가 터치하는 걸 싫어하고 항상 여자 문제 앞에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그 어떤 여자도 이수호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가 없다.이 몇 년간 강이나만이 의외였다.그의 모든 애틋함을 독차지한 여자였으니까.한편 그는 일할 때도 매우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이곳에 온
도아영은 별안간 탄탄하면서도 은근 열기가 차오른 복근에 손을 댔다.그녀가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이수호가 더 세게 잡아당겼다.“대답해.”그는 소파를 짚고서 도아영과 거의 닿을 것처럼 거리가 좁혀졌다.“걔야 나야? 누구 복근이 더 좋냐고?”도아영의 나른한 손은 더 세게 잡힐수록 고통이 차올랐다.이 남자는 술기운 때문인지 갑자기 도아영을 몸 아래에 짓누르고 한바탕 괴롭히고 싶어졌다.몇 번이고 심기를 건드리는 이 여자가 눈물이 글썽한 채 애원하는 모습을 너무 보고 싶었다.이수호는 문득 배에 뜨거운 열기가 샘솟았다.한편 도아영은 손이 너무 아파서 재빨리 빼내고는 그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나쁜 놈!”이수호의 얼굴에 손자국이 고스란히 났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아영이 어느새 이 방을 뛰쳐나갔다.“뭐야? 방금 뭐한 거냐고?!”문밖에 있던 심정우는 주민서와 도아영이 함께 도망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이수호는 달아오른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색이 한없이 음침해졌다.“여기 사장한테 전해. 방금 이 방에 들어온 새끼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말을 마친 이수호는 문을 박차고 나갔고 심정우는 그저 멍하니 넋을 놓았다.‘대체 무슨 일이냐고?’클럽 밖에서 주민서가 한창 씩씩거렸다.“이수호 진짜 너무 일방적이야! 아까 그 방에도 예쁜 애들 몇 명은 되던데 이게 무슨 내로남불이냐고? 아니 뭣 하러 남자애들 다 내쫓은 거야?”두 여자는 술을 마신 연유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아영아, 그 자식 너 함부로 대한 거 없지?”주민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 건 딱히 없는데... 모르겠어, 그냥 좀 찝찝해.”도아영은 아직도 손끝에서 그의 뜨거웠던 복근의 열기가 느껴졌다.‘이건 아니지. 정상적인 남자라면 약혼녀가 룸에서 딴 남자를 불러서 노는 걸 보면 엄청 화내야 하잖아. 당장이라도 파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수호 대체 무슨 속셈이야? 파혼에 관한 얘기는 왜 전혀 없냐고?!’“내가 볼 때 이수호 그냥 집착 광이야. 강이나랑 좋다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