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영은 ‘병신’이라는 두 글자를 꾹 집어삼키고 구연준의 사무실을 나섰다.학교에서의 시간은 역시 빨리 지나가는 법이었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그녀와 주민서도 나란히 강의동에서 나왔다.사실 오후에 수업이 아예 없었지만 도아영이 도서관에서 좀 더 머무르고 싶다고 했다.주민서는 그녀가 이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지난번 약혼식 때 수영장에 빠진 이후로 정신을 번쩍 차리고 새 출발을 한 것만 같았다.이수호에게 들러붙지 않을뿐더러 공부에도 갑자기 너무 큰 흥취를 느끼고 있으니까.“아영아, 이렇게까지 힘들게 공부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너희 집에 남은 돈으로 평생 플렉스하면서 살 텐데.”“그건 안 되지. 돈이란 건 오늘 네 것이었다가도 내일이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는 수가 있어. 하지만 지식은 아니야. 배우는 대로 전부 네 머릿속에 저장해서 아무도 못 뺏어가.”여기까지 말한 도아영이 시계를 들여다봤다.“시간 다 됐다.”“뭐가?”주민서는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수호가 통금 시간까지 정했어? 오지랖 너무 심한 거 아니야?”“노노. 황홀한 밤이 시작됐다고.”도아영이 말했다.“이수호 같은 남자는 제 약혼녀가 밤에 밖에서 실컷 놀고 다니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할 거야.”“정상적인 남자라면 밖에서 놀기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다 싫어해...”그녀는 독해도 너무 독했다.이런 수법으로 이수호한테 미움을 받으려 하다니.그들의 신분으로 자칫하다 큰일이라도 빚으면 엄청날 텐데...“내가 클럽에서 식스팩 복근을 지닌 남자를 여섯 명 불렀는데 너도 갈래?”주민서는 당연히 가겠다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정중하게 말했다.“지금 바로 당장!”그 시각.클럽 안.심정우가 이수호를 데리고 VIP룸으로 들어갔다.“네가 싫어하는 거 알아. 그래도 어떡해? 일이니까 피할 순 없잖아.”심정우는 문득 나지막이 속삭였다.“내가 장 마담한테 미리 말해뒀으니 이따가 이쁜 애들 줄줄이 들어올 거야. 너도 이참에 스트레스 좀 풀어. 종일 일
이건 거의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루틴이다.술이 알딸딸해진 후 심정우가 이수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화장실 다녀올게!”그는 살짝 취했지만 이수호는 뭐라 하지 않았다.다만 옆에 있던 여자들이 눈치도 없게 들이대기 시작했다.“대표님...”이수호가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끼 부리려던 여자들은 사색이 되어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죄송하지만... 제가 술을 잘 못 해요...”이때 옆에서 잔뜩 난감해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한 여자가 남자의 품에 안겨서 강제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려 얇은 옷을 흠뻑 적셨고 속살까지 훤히 드러났다.이수호는 그제야 봉변을 당하는 여자가 임규리라는 걸 알아봤다.횡설수설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수호가 앞으로 다가가 유태범의 손을 덥석 잡았다.한편 유태범은 그가 임규리를 지켜주니 이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고 얼른 놓아줬다.“이 대표가 강이나 씨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얘도 좀 비슷하게 생겼네요. 역시 대표님 취향이셨군요!”만취한 유태범은 말투가 아주 무례했다.이때 임규리가 재빨리 이수호의 뒤에 숨어서 겁에 질린 채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이수호는 별안간 미간을 구겼다.도아영만 아니었다면 오늘 임규리를 거들떠볼 리도 없을 테니까.“대표님...”임규리는 겁에 질린 사슴처럼 한없이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나가.”하지만 이수호는 매우 차갑게 쏘아붙였다.“저는 그저 등록금 벌려고 온 거예요. 절대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임규리가 서둘러 해명하려 했지만 이수호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이때 문밖에서 심정우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황급히 뛰쳐 들어왔다.“수호야, 나 방금 누구 봤는지 알아?”그가 짙은 얼굴로 이수호에게 속삭였다.순간 이수호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대표님!”이수호가 밖으로 나가자 임규리는 사색이 되었다.그 시각, 룸 안.주민서도 귀신을 본 듯 허겁지겁 룸으로 들어왔다. 도아영은 한창 식스팩 연하남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녀가 대뜸 말을
도아영이 남자 어깨에 손을 걸친 순간 이수호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졌다.그 남자는 이수호와 눈이 마주치더니 겁에 질린 채 도아영에게 바짝 다가갔다.“누나, 저 사람 누구예요?”“누군지 몰라?”도아영은 눈썹을 치키고 그에게 답했다.“이경 그룹 대표, 내 약혼자잖아.”드디어 이수호의 정체를 알아낸 그 남자는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룸에 있던 다른 남자들도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왔다.지금 다들 모여서 이수호의 약혼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니?!하지만 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착하지. 지금도 충분히 나갈 수 있어.”남자들은 하나같이 넋을 놓고 그녀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곧이어 이수호가 분노를 참으면서 큰소리로 외쳤다.“다 나가!”짤막한 한 마디에 남자들은 황급히 줄행랑을 쳤다.이수호가 제대로 뿔나자 주민서는 그녀가 몹시 걱정되어 뭐라도 편들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심정우가 곧장 그녀를 말렸다.“쉿! 여긴 네가 끼어들 데가 아니야.”룸문이 닫히고 도아영이 속절없이 고개를 내저었다.“대표님, 다들 여기 즐기려고 온 거잖아요. 나도 뭐라 안 하는데 대표님이 왜 간섭하려고 들어요?”그녀는 여전히 오늘 아침 옷차림으로 술까지 마신 채 새하얀 얼굴에 홍조기를 띄었다. 빨갛게 물든 촉촉한 입술은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즐겨?”이수호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턱을 집어 올렸다.“즐긴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걸 몰라요? 대표님은 여자 한 명도 안 불렀다고요? 에이, 난 전혀 못 믿겠는데?!”그녀가 간사하게 웃으며 말했다.전생이나 현생이나 이수호는 늘 자기관리가 투철한 사람이고 이런 일에 대해서도 무조건 절제하는 성격이다.그는 다른 여자가 터치하는 걸 싫어하고 항상 여자 문제 앞에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그 어떤 여자도 이수호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가 없다.이 몇 년간 강이나만이 의외였다.그의 모든 애틋함을 독차지한 여자였으니까.한편 그는 일할 때도 매우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이곳에 온
도아영은 별안간 탄탄하면서도 은근 열기가 차오른 복근에 손을 댔다.그녀가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이수호가 더 세게 잡아당겼다.“대답해.”그는 소파를 짚고서 도아영과 거의 닿을 것처럼 거리가 좁혀졌다.“걔야 나야? 누구 복근이 더 좋냐고?”도아영의 나른한 손은 더 세게 잡힐수록 고통이 차올랐다.이 남자는 술기운 때문인지 갑자기 도아영을 몸 아래에 짓누르고 한바탕 괴롭히고 싶어졌다.몇 번이고 심기를 건드리는 이 여자가 눈물이 글썽한 채 애원하는 모습을 너무 보고 싶었다.이수호는 문득 배에 뜨거운 열기가 샘솟았다.한편 도아영은 손이 너무 아파서 재빨리 빼내고는 그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나쁜 놈!”이수호의 얼굴에 손자국이 고스란히 났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아영이 어느새 이 방을 뛰쳐나갔다.“뭐야? 방금 뭐한 거냐고?!”문밖에 있던 심정우는 주민서와 도아영이 함께 도망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이수호는 달아오른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색이 한없이 음침해졌다.“여기 사장한테 전해. 방금 이 방에 들어온 새끼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말을 마친 이수호는 문을 박차고 나갔고 심정우는 그저 멍하니 넋을 놓았다.‘대체 무슨 일이냐고?’클럽 밖에서 주민서가 한창 씩씩거렸다.“이수호 진짜 너무 일방적이야! 아까 그 방에도 예쁜 애들 몇 명은 되던데 이게 무슨 내로남불이냐고? 아니 뭣 하러 남자애들 다 내쫓은 거야?”두 여자는 술을 마신 연유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아영아, 그 자식 너 함부로 대한 거 없지?”주민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 건 딱히 없는데... 모르겠어, 그냥 좀 찝찝해.”도아영은 아직도 손끝에서 그의 뜨거웠던 복근의 열기가 느껴졌다.‘이건 아니지. 정상적인 남자라면 약혼녀가 룸에서 딴 남자를 불러서 노는 걸 보면 엄청 화내야 하잖아. 당장이라도 파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수호 대체 무슨 속셈이야? 파혼에 관한 얘기는 왜 전혀 없냐고?!’“내가 볼 때 이수호 그냥 집착 광이야. 강이나랑 좋다
주민서는 매우 진지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바라봤다.“아영아, 구연준이든 서현우든 다 이수호보단 나은 것 같아.”도아영은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이 소문은 대체 어떻게 난 걸까? 게다가 근거 없는 찌라시까지...구연준은 둘째치고 서현우만 해도 전생에 강이나에게 목숨까지 바칠 기세였고 강주에 온 이유도 전부 강이나 때문이었다.대체 도아영이랑 무슨 연관이 있다고 이러는 걸까?게다가 강이나는 한때 빼어난 미모와 단아한 분위기로 구연준의 소꿉친구 박태오의 마음을 홀딱 빼앗아버렸다.박태오와 서현우 모두 전생에 강이나를 위해 많은 걸 희생했다.이토록 치열한 삼각 관계 속에 도아영이 대체 웬 말일까?그녀는 단지 거들일 뿐 소설 속 서브 여주에도 속하지 못한다.주민서가 한창 도아영의 약혼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다.서현우가 간만에 메시지를 보내왔다.대화창을 열어보니 서류 한 부가 전송되었다.도아영은 순간 입꼬리를 씩 올렸다.“아영아, 도아영!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냐고?”“다 들었어.”“그럼 넌 누가 더 좋아?”“지금은... 서현우.”“뭐?”도아영이 받은 서류는 대출 서류인데 대출자가 바로 유정연이다.다음날 이른 아침.가정부는 홀로 아래층에 내려오는 도아영을 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아영 씨, 대표님께서 어제 외박하셨어요.”“네.”도아영은 한없이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럼 수호 씨 아침은 따로 준비할 필요 없어요.”가정부는 말문이 턱 막혔다.약혼자가 외박했다는데 지금 아침 식사가 목에 넘어갈까?한편 도아영은 아침을 먹으면서 가정부에게 전했다.“나 오늘 좀 늦게 돌아올 테니 따로 저녁 안 차려도 돼요.”“네? 어디 가시게요?”가정부가 초조한 얼굴로 되물었다.어제 도아영이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와서 어르신이 충분히 언짢아하고 계시는데 오늘 또 늦게 돌아온다는 건가?!이건 대놓고 어르신과 대표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수작이었다.한편 도아영은 손을 내젓고 딱히 정면으로 대답
“미안 미안, 책 읽다가 그만 늦어버렸네요.”뭇사람들의 놀라운 시선 속에서 도아영은 서현우의 차에 올라탔다.그 시각, 이제 막 강의1동에서 나온 강이나는 다들 한정판 수입차를 바라보며 쉬쉬거리자 저도 몰래 미간이 구겨졌다.“도아영? 바로 그 이수호 대표님 약혼녀 말하는 거야? 걔가 서현우 차에 올라탔다고?”“서현우 같은 큰 인물이 학교 앞까지 찾아왔다는 건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말해주잖아!!”몇 사람들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쉬쉬거렸다.차가 떠나갈 때 강이나는 차창 너머로 도아영과 서현우가 흐뭇하게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순간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지난번에 도아영이 그녀에게 서현우를 소개해줄 때 일부러 꼽 주려고 한 게 틀림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강이나는 곧장 박태오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얼른 움직이라고 했다.이수호에게 도아영의 본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한편 차 안에서 서현우는 도아영이 품에 안은 책들을 바라봤다.[자본론]에 시선이 꽂히자 서현우가 대뜸 실소를 터트렸다.아주 잠깐이지만 도아영은 그의 표정을 바로 캐치했다.서현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여전히 입꼬리를 씩 올렸다. 눈가에 스친 경멸의 뜻은 지울 수가 없었다.“왜 웃어요?”도아영이 인상을 구기면서 물었다.“이 책 보면 네 머리만 더 나빠질걸.”“...”그녀는 어이가 없었다.“오후 내내 봤거든요. 나름 수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수확?”서현우가 눈썹을 치켰다.“교과서는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다루는 경향이 많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교과서는 항상 두 페이지로 늘려놓지. 이런 책들은 평범한 대학생들이나 속일 수 있다고 여겼는데 아영이 너도 당하는구나?”“이봐요!”서현우는 대놓고 그녀를 야유했다.이에 도아영은 창문을 열고 품에 안은 책들을 아예 밖으로 내던졌다.“자, 이제 책 다 버렸어요. 대표님께서 무슨 뜻인지 나도 알거든요. 이제 직접 강의해주시죠. 회사는 어떻게 운영해야 해요? 금융 쪽으론 대표님이 나보다 훨씬 선배잖아요
하지만 이 돈은 도아영이 그녀에게 준 돈이다.즉 다시 말해 유정연은 앞으로 먼저 도아영에게 180억을 갚고 또 그녀에게 180억 원을 갚은 후 어마어마한 이자까지 전부 부담해야 한다.이 거래에서 도아영은 굉장한 수입을 얻을 것이다.그녀가 이렇게 하는 건 오직 돈 때문만은 아니다. 유정연을 감방에 보낼 이유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 종일 그녀 앞에서 알짱거리는 유정연을 없애기 위해서였다.“아무튼 이 일은 대표님께 너무 감사드려요...”도아영은 그의 손에서 계약서를 가져오려 했으나 서현우가 번쩍 들어 올리니 손이 닿지 않았다.“공짜는 없지. 내가 말했던 건 어떻게 됐어?”“...”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서현우에게 건넸다.“우리 집안에서 시내 구역에 있는 땅이에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난 강이나처럼 빵빵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서 공짜로 줄 순 없어요.”“전에 다 얘기했잖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조 원이야.”그의 대답을 들은 도아영은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이 남자가 줄곧 장난치는 줄로만 여겼으니까.전생에 서현우는 확실히 2조 원을 들여서 강이나의 땅을 샀었다.강이나도 그 일로 강주에서 이름을 떨쳤고...하지만 도아영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일도 없다.거래 금액이 1600억이어도 좋고 160억이어도 좋지만 2조 원은 절대 안 된다.“대표님... 지금 나까지 대표님의 진흙탕물에 끌어들이시려는 거예요?”그녀는 이를 악물고 겨우 말을 내뱉었다.서현우가 2조 원이나 들여서 이 땅을 사는 건 해외에 있는 검은돈을 토지 매입 경로를 통해 세탁하려는 것뿐이니까.나중에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감방에 몇 년이나 갇혀있어야 할지 모른다.아니, 어쩌면 평생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네. 너는 이해돼?”서현우가 예리한 눈빛으로 질문했다.이때 도아영이 감히 돈세탁이란 세 글자를 꺼내기만 한다면 아예 그와 한배를 탄 사람이 된다.그녀는 숨을 깊게 몰아쉬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농담도
어제 클럽에서 나온 뒤로 그는 줄곧 밖에서 지냈다.어떻게 도아영을 마주해야 할지 몰랐으니까.어젯밤엔 분명 술에 취해서 그녀더러 복근을 만져보라는 유치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대표님,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안지원이 참 타이밍도 안 맞게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수호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룸을 연장하겠습니다.”“이리 와!”이수호가 대뜸 그를 불러세웠다.“네, 대표님!”“아영이 오늘 어때?”“아영 씨요?”안지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 별일 없는 것 같았어요.”“난 안 묻고?”“네. 그리고 저녁에 늦게 돌아올 테니 식사는 따로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순간 이수호의 안색이 확 짙어졌다.밥도 준비하지 말라고?이렇게 빨리 그와의 약속을 잊은 걸까?이수호는 당장 전화해서 따져 묻고 싶었지만 어제 클럽에서 있은 일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아영이한테 전화해!”“네...”안지원은 곧장 그녀에게 연락했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도아영이 전화를 받았다.“네, 안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이때 이수호가 휴대폰을 낚아채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안지원은 마지못해 큰 소리로 물었다.“아영 씨 수업 끝났어요? 기사 보내드릴까요?”“네, 끝났어요. 근데 저 볼일 있으니까 기사 안 보내줘도 돼요.”“누구 전화야?”문득 전화기 너머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수호의 안색이 돌변했고 안지원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사무실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도아영은 곧장 안지원에게 답했다.“그럼 이만 끊을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전화를 끊은 후 사무실에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안지원은 조심스럽게 이수호의 표정을 살폈다.방금 들려온 그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인물, 바로 서현우였다.“대표님, 어쩌면... 어쩌면 오해일 수도 있잖아요.”그는 여전히 도아영을 편들어주려고 했다.다만 이수호의 이마에 어느덧 실핏줄이 튀어 올랐다.“당장 조사해. 두 사람 지금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