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미안, 책 읽다가 그만 늦어버렸네요.”뭇사람들의 놀라운 시선 속에서 도아영은 서현우의 차에 올라탔다.그 시각, 이제 막 강의1동에서 나온 강이나는 다들 한정판 수입차를 바라보며 쉬쉬거리자 저도 몰래 미간이 구겨졌다.“도아영? 바로 그 이수호 대표님 약혼녀 말하는 거야? 걔가 서현우 차에 올라탔다고?”“서현우 같은 큰 인물이 학교 앞까지 찾아왔다는 건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말해주잖아!!”몇 사람들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쉬쉬거렸다.차가 떠나갈 때 강이나는 차창 너머로 도아영과 서현우가 흐뭇하게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순간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지난번에 도아영이 그녀에게 서현우를 소개해줄 때 일부러 꼽 주려고 한 게 틀림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강이나는 곧장 박태오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얼른 움직이라고 했다.이수호에게 도아영의 본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한편 차 안에서 서현우는 도아영이 품에 안은 책들을 바라봤다.[자본론]에 시선이 꽂히자 서현우가 대뜸 실소를 터트렸다.아주 잠깐이지만 도아영은 그의 표정을 바로 캐치했다.서현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여전히 입꼬리를 씩 올렸다. 눈가에 스친 경멸의 뜻은 지울 수가 없었다.“왜 웃어요?”도아영이 인상을 구기면서 물었다.“이 책 보면 네 머리만 더 나빠질걸.”“...”그녀는 어이가 없었다.“오후 내내 봤거든요. 나름 수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수확?”서현우가 눈썹을 치켰다.“교과서는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다루는 경향이 많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교과서는 항상 두 페이지로 늘려놓지. 이런 책들은 평범한 대학생들이나 속일 수 있다고 여겼는데 아영이 너도 당하는구나?”“이봐요!”서현우는 대놓고 그녀를 야유했다.이에 도아영은 창문을 열고 품에 안은 책들을 아예 밖으로 내던졌다.“자, 이제 책 다 버렸어요. 대표님께서 무슨 뜻인지 나도 알거든요. 이제 직접 강의해주시죠. 회사는 어떻게 운영해야 해요? 금융 쪽으론 대표님이 나보다 훨씬 선배잖아요
하지만 이 돈은 도아영이 그녀에게 준 돈이다.즉 다시 말해 유정연은 앞으로 먼저 도아영에게 180억을 갚고 또 그녀에게 180억 원을 갚은 후 어마어마한 이자까지 전부 부담해야 한다.이 거래에서 도아영은 굉장한 수입을 얻을 것이다.그녀가 이렇게 하는 건 오직 돈 때문만은 아니다. 유정연을 감방에 보낼 이유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 종일 그녀 앞에서 알짱거리는 유정연을 없애기 위해서였다.“아무튼 이 일은 대표님께 너무 감사드려요...”도아영은 그의 손에서 계약서를 가져오려 했으나 서현우가 번쩍 들어 올리니 손이 닿지 않았다.“공짜는 없지. 내가 말했던 건 어떻게 됐어?”“...”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서현우에게 건넸다.“우리 집안에서 시내 구역에 있는 땅이에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난 강이나처럼 빵빵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서 공짜로 줄 순 없어요.”“전에 다 얘기했잖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조 원이야.”그의 대답을 들은 도아영은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이 남자가 줄곧 장난치는 줄로만 여겼으니까.전생에 서현우는 확실히 2조 원을 들여서 강이나의 땅을 샀었다.강이나도 그 일로 강주에서 이름을 떨쳤고...하지만 도아영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일도 없다.거래 금액이 1600억이어도 좋고 160억이어도 좋지만 2조 원은 절대 안 된다.“대표님... 지금 나까지 대표님의 진흙탕물에 끌어들이시려는 거예요?”그녀는 이를 악물고 겨우 말을 내뱉었다.서현우가 2조 원이나 들여서 이 땅을 사는 건 해외에 있는 검은돈을 토지 매입 경로를 통해 세탁하려는 것뿐이니까.나중에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감방에 몇 년이나 갇혀있어야 할지 모른다.아니, 어쩌면 평생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네. 너는 이해돼?”서현우가 예리한 눈빛으로 질문했다.이때 도아영이 감히 돈세탁이란 세 글자를 꺼내기만 한다면 아예 그와 한배를 탄 사람이 된다.그녀는 숨을 깊게 몰아쉬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농담도
어제 클럽에서 나온 뒤로 그는 줄곧 밖에서 지냈다.어떻게 도아영을 마주해야 할지 몰랐으니까.어젯밤엔 분명 술에 취해서 그녀더러 복근을 만져보라는 유치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대표님,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안지원이 참 타이밍도 안 맞게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수호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룸을 연장하겠습니다.”“이리 와!”이수호가 대뜸 그를 불러세웠다.“네, 대표님!”“아영이 오늘 어때?”“아영 씨요?”안지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 별일 없는 것 같았어요.”“난 안 묻고?”“네. 그리고 저녁에 늦게 돌아올 테니 식사는 따로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순간 이수호의 안색이 확 짙어졌다.밥도 준비하지 말라고?이렇게 빨리 그와의 약속을 잊은 걸까?이수호는 당장 전화해서 따져 묻고 싶었지만 어제 클럽에서 있은 일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아영이한테 전화해!”“네...”안지원은 곧장 그녀에게 연락했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도아영이 전화를 받았다.“네, 안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이때 이수호가 휴대폰을 낚아채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안지원은 마지못해 큰 소리로 물었다.“아영 씨 수업 끝났어요? 기사 보내드릴까요?”“네, 끝났어요. 근데 저 볼일 있으니까 기사 안 보내줘도 돼요.”“누구 전화야?”문득 전화기 너머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수호의 안색이 돌변했고 안지원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사무실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도아영은 곧장 안지원에게 답했다.“그럼 이만 끊을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전화를 끊은 후 사무실에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안지원은 조심스럽게 이수호의 표정을 살폈다.방금 들려온 그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인물, 바로 서현우였다.“대표님, 어쩌면... 어쩌면 오해일 수도 있잖아요.”그는 여전히 도아영을 편들어주려고 했다.다만 이수호의 이마에 어느덧 실핏줄이 튀어 올랐다.“당장 조사해. 두 사람 지금
“자, 얼른 먹어.”서현우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도아영은 테이블에 놓인 티본 스테이크를 바라보았는데 핏물이 고인 육즙이 실로 역겨울 따름이었다.“네, 천천히 먹을게요.”솔직히 그녀는 저녁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가끔 미팅하는 것 외에는 저녁을 거의 안 먹으니까.한편 서현우는 맞은편에 앉아서 마디가 선명한 손을 테이블에 걸치고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저번에 날 떠보려고 했던 사람은 결과가 어떤 줄 알아?”도아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난 누가 날 떠보는 게 딱 질색이야. 잘난 척하는 인간들이 너무 별로거든. 널 죽이지 않고 함께 협력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줄 알아.”“아, 네... 너무 고맙네요, 대표님.”도아영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서현우와 강이나를 이어주려고 그토록 애를 썼지만 정작 서현우는?도아영을 같은 배에 태워버리다니...그는 대체 도아영의 어디가 마음에 든 걸까?배경을 따져도 강이나가 외동이긴 하지만 물려받을 인맥과 재력이 어마어마할 것이다.강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사이가 안 좋았으니 망정이지 남현숙은 아마 강이나를 달갑게 손주며느리로 들였을 것이다.외모를 따져도 강이나 정도면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성의를 논하자면... 강이나는 무려 시가 2천억의 땅을 공짜로 주겠다고 했다.그걸 마다한 사람이 서현우였다.환생한 후 도아영은 겪고 있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았다.멍청한 유정연 모자만 빼고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그녀는 미간을 구기고 수척한 얼굴로 말했다.“대표님, 그래도 한 번 더 고려해보시는 게...”“사인도 마쳤으니 더 고려할 거 없어.”서현우가 눈썹을 치켰다.“혹시 겁먹었어?”“네?”“진짜 겁먹은 거라면 애초에 알았어야지. 날 건드린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말이야.”그녀가 서현우의 명성을 모를 리 있을까?갱스터나 다름없는 서현우는 인성을 무시하고 룰도 없고 원칙을 따지는 법이 없다.이런 사람과의 거래가 가장 아찔하고 위험하다.하지만 그때 도아영에겐 별다른 선택권이
“말해봐.”“대표님이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저는 전혀 아는 게 없거든요.”“그래서?”“이렇게 갑자기 저를 끌어들이시는 건 저한테도 확실한 보장을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그러니까 네 말은 나중에 내가 감방에 들어가더라도 너만큼은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 이거네?”“난 죄가 없잖아요!”“그럼 지금 나랑 하는 얘기는 또 뭔데?”“대표님!”서현우는 지금 뻔히 알면서 모르쇠를 하고 있다.그녀가 2조 원의 돈세탁에 관하여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만약 입 밖에 꺼낸다면 그녀 또한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공범이 될 테니까.나중에 감방에 들어가도 변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도아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서현우는 흥미진진하게 웃었다.“좀 전까지 본인은 용감하다고 하더니 그새 졸았어? 리스크가 큰 만큼 보상도 많은 법이야. 그렇게 겁에 질려서 산다면 평생 남들에게 짓밟히고 디딤돌이나 되어줄걸. 자고로 우린 약육강식의 시대에 살고 있잖아. 이수호랑 파혼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 사람보다 더 강해져야 해. 안 그러면... 떡하니 결혼식을 치르고 전업주부로 살 거야.”이 도리는 도아영도 잘 알고 있다.전생을 겪은 그녀로서 두 번 다시 이수호에게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법, 저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그건 걱정 마세요.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 결혼은 반드시 무를 겁니다. 난 절대 이수호의 와이프로 살기 싫거든요.”때마침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던 이수호가 이 말을 고스란히 듣게 되었다.옆에 있던 안지원도 표정이 확 굳었다.도아영이 이런 말까지 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한편 이수호는 이마에 실핏줄이 튀어 오르고 두 눈이 한없이 음침해졌다.수년간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이토록 싸늘한 표정은 오늘이 처음이었다.“그래? 절대 내 와이프로 살기 싫어?”이수호가 이 말을 내뱉은 순간 도아영은 등골이 오싹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도아영이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어차피 수호 씨는 항상 나를 돈만 밝히는 여자라고 생각해왔잖아요. 내가 허영심에 눈이 멀어서 더 높은 곳에 기어오른다면서요? 그렇다면 뭐 당연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겠죠. 서 대표님은 수호 씨보다 훨씬 낫네요. 적어도... 나만 사랑해주고 다른 여자들과 애매한 사이를 유지하진 않아요. 또한 사생아도 없고요.”한때 강주에서 오랫동안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강이나가 이수호의 아이를 가졌는데 그녀가 이수호를 위해서 아이를 지웠다고 했다. 이 소문에 관해서 이수호는 단 한 번도 해명한 적이 없다.결국 가까운 지인들은 그 아이가 이수호의 아이라고 묵인했다.전생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아영을 이씨 일가에서 애만 낳아주는 도구라고 놀려댔었다.이수호에게 사랑받는 강이나에 비해 그녀는 단지 우스개에 불과했으니까.“내가 이나랑 아이가 있었다고?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야? 도아영, 너 정말...”이수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지원이 서둘러 나섰다.“대표님! 아영 씨가 홧김에 한 말이니 일단 진정하세요.”“두 사람 사이에 애가 있든 없든 수호 씨가 강이나를 사랑한 건 팩트잖아요. 두 사람 계속 사랑하라고 내가 자리를 내주니까 수호 씨도 이제 나 좀 놓아줘요.”도아영은 이참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와 함께 여태껏 약혼한 상태로 지내면서 두 집안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이제 너무 지칠 따름이었다.이수호가 툭하면 도씨 일가를 들먹이면서 그녀를 협박하지만 않았어도 진작 파혼했을 텐데.절대 일말의 미련도 안 남았을 텐데.하지만 이수호는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다.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도아영과 서현우를 번갈아 보았다.“파혼? 좋아, 해줄게!”“대표님!”순간 안지원은 표정이 얼어붙었다.이 일을 남현숙이 알게 되면 뒷수습이 어려워질 테니까.이수호는 곧장 레스토랑을 나섰다.문득 대책 없이 질러버린 제 모습을 되새기자 도아영은 마음이 편해지긴커녕 다리에 힘이 풀렸다.그녀는 아직 이수호와 맞
“어머, 난 또 누구라고? 이 대표한테 파혼당한 도아영 씨잖아!”유하영이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조용하던 도서관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떠들썩해졌다. 다들 이쪽으로 따가운 시선을 보내왔다.그럼에도 도아영은 일을 더 크게 벌이지 않으려고 허리 숙여 책을 주우려고 했는데 조나린이 발로 힘껏 짓밟아버렸다.그녀는 하이힐로 도아영의 가늘고 새하얀 손을 짓밟고 심지어 거들먹거리면서 발목까지 비틀었다.심장을 후벼 파는 고통이 온몸에 퍼졌다.도아영은 일어날 수가 없었고 상대도 그녀를 부축할 생각이 없었다.“전에는 그렇게 이 대표님 약혼녀란 신분을 거들먹거리면서 잘난 척하더니 이제 파혼하니 어때? 계속 네 그 잘난 신분 거들먹거려봐?!”“얘가 무슨 신분이 남아있다고 그래? 도씨 일가는 원래 파산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 이 대표가 모든 협력을 중단하고 파혼 소식까지 발표했으니 얘 완전 궁지로 몰린 거야. 등록금은 낼 수 있을까?”유하영과 조나린은 맹비난을 날렸다.이 광경을 본 강이나가 입을 열었다.“나린아, 그만해. 얼른 부축해야지!”“뭐? 이나 넌 정말 너무 착해서 탈이야. 애초에 다들 너랑 이 대표가 천생연분이라고 했어! 도아영 이년이 제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다가 이 지경이 된 거잖아. 쌤통이다! 이년 때문에 너랑 이 대표가 뭔 죄야? 제발 좀 그만 편들어.”조나린은 말하면서 또다시 도아영의 손을 세게 짓밟았다.곧이어 그녀의 손등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너 무릎 꿇고 이나한테 사과하면 우리도 용서해줄게. 더는 너한테 따질 일 없어.”“맞아. 그리고 방금 떨어트린 책도 모조리 다 주워!”유하영과 조나린은 입을 나불거리면서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쳐다봤다.이수호가 없는 도아영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어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뭇사람들이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있을 때 뒤에서 문득 차갑고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들 뭐 하는 거야?”순간 조나린은 화들짝 놀라서 발을 치웠다.도아영의 손등은 검푸른 멍이 들고 눈 깜짝할 사이
구연준은 그녀라고 체면을 살려주진 않았다.강이나도 바로 눈치채고 목이 확 멨다.계속 말을 이어간다면 본인만 손해 보는 일이니까.구연준은 도아영의 손목을 잡고서 손등에 난 험한 흉터를 보더니 미간을 확 구겼다.“근골을 다쳤어. 병원에 가봐야 해.”“나 그렇게 세게 밟진 않았는데!”조나린은 본인까지 연루될까 봐 얼른 강이나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나린이도 부주의로 그런 거예요. 치료비용은 저희가 부담할게요!”강이나가 구연준에게 말했다.“지금 치료비가 문제야?”이에 구연준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도서관 CCTV 조회해서 고의상해가 성립된다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학교에서도 경찰 측 판정과 부상 정도에 의해 조나린에게 마땅한 처벌을 내릴 줄 알아.”“선생님!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그저...”조나린은 식겁하여 사색이 되었다.집에서 거액의 돈을 들이고 인맥을 수없이 동원하여 겨우 그녀를 한성대에 보냈는데 이렇게 퇴학을 당하면 부모님께 맞아 죽을 게 뻔하다.“이나야, 도와줘!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조나린은 결국 모든 희망을 강이나에게 걸었다.다만 오늘 일은 일단 CCTV만 확보한다면 조나린도 틀림없이 처벌을 받을 것이다.강이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선생님, 배상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그러니까...”“한성대에 돈 없는 애들 있어? 이나 너 계속 편들어주다가 세 사람 모두 공범이 되는 수가 있어.”말을 마친 구연준은 도아영을 부축하여 도서관을 나섰다.떠나갈 때 도아영은 고개를 돌리고 세 여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도발에 가득 찬 그녀의 눈빛을 강이나가 모를 리 있을까?‘도아영, 너 일부러 이런 거지!’강이나가 속으로 되뇌었다.도서관 밖에서 구연준이 도아영의 손을 뿌리쳤다.“스읍! 아파요. 살살하라고요!”“이제야 아파? 대체 아까는 왜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어?”구연준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꼭 마치 가시 돋친 고슴도치 같았다.좀 전에 손을 짓밟힐 때 도아영은 찍소리 없이 잠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