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운전이나 해!”“...네.”안지원은 감히 다른 말을 더 붙이지 못했다.차가 강주호텔 앞으로 도착하자 이수호는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호텔 직원들은 이수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이 대표님,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비켜.”직원은 이수호의 날 선 기세에 움찔했다.안지원은 얼른 이수호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3층의 8302호에 있다고 합니다.”이수호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8302호 문 앞에 섰다. 그러나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안지원이 먼저 카드키로 문을 열려 했지만 이수호는 그 카드를 빼앗듯 받아들었다. 한참을 문 앞에서 서성이던 이수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나서야 카드키를 꽂았다.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깨끗하게 텅 비어 있는 방이 보였다.“사람은?”이수호는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안지원도 당황한 기색이었다.“어, 여기 맞는데요? 아까 조사해 보니까 이 방이라던데...”“다시 찾아내.”“네.”안지원은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직원들에게 더 알아보라 지시했다.그 시각, 도아영은 강이나와 연락이 되지 않자 문자를 보내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밖에서 수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도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밖에 시끄럽네요. 무슨 일이에요?”“아마 네 약혼자가 사람을 몰고 쳐들어온 모양이야. 현장에서 잡겠다고.”“뭐라고요?”도아영은 순간 당혹스러웠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은 그녀의 이름으로 체크인을 했으니 이수호가 찾기 쉬울 터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도아영은 서현우에게 물었다.“대표님 방을 두 개 잡았어요?”강주에서 이수호만큼 발이 넓은 사람이 여기까지 찾아오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서현우가 예상하고 각자의 이름으로 방을 두 개 잡았을 가능성이 컸다.“합의가 끝났으니 난 먼저 가볼게.”“대표님, 그럼 전 어쩌라고요?”“내가 왜 그걸 신경 써야 하지?”서현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 방을 나갔다. 문이 닫
“그걸 누가 봤대요?”서현우가 흥미진진하게 물었다.“그 사람 한번 만나봐야겠네.”그의 눈가에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해외든 강주든 서현우를 안 두려워할 사람은 없으니까.이수호도 물론 잘 알고 있다. 이 타이밍에 임규리를 불러온다고 해도 그녀가 감히 서현우 앞에서 도아영과 서현우가 함께 호텔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이때 안지원이 가까이 다가왔다.“대표님, 다 찾아봤는데 도아영 씨는 안 보입니다.”“그럼 계속 찾아. 보일 때까지 찾으란 말이야.”이수호가 싸늘하게 답했다.“호텔이 고작 이만큼인데 걔가 어디 날아갔을까 봐?”“네.”안지원은 곧바로 인력을 추가하여 도아영을 찾아 나섰다.한편 서현우는 이 일에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그럼 천천히 찾으세요. 저는 이만.”그는 카드를 긁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 시각 도아영은 뭇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모자를 꾹 눌러쓰고 강주 호텔을 벗어났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했다.도아영은 휴대폰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더니 곧장 꺼버렸다.지금 전화를 받는 것이야말로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니까.20분 후, 도아영은 한성대로 돌아왔다.주민서는 어느덧 수업을 두 개나 듣고 교실에서 코를 골면서 자다가 그녀가 돌아오자 정신을 번쩍 차렸다.“헐, 왜 이렇게 빨리 왔어?”“너 나한테 문자해서 임규리랑 이수호가 함께 있다고 했잖아! 임규리 지금 어디 있어?”“임규리? 나야 모르지. 걔 금융학과라고 하지 않았나? 1학년생이니 지금쯤 아마 수업 중이겠지. 수업 일정표 보면 알잖아.”“가자, 임규리 찾으러!”“지금? 이제 곧 수업 시작인데?”“하나쯤 땡땡이쳐도 괜찮아.”주민서는 늘 전교 10등 안이라 성적도 우수하고 또한 학생 간부라서 땡땡이를 쳐도 아무도 간섭할 자가 없다.그녀는 재빨리 도아영을 따라갔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무슨 일이냐고? 혹시 임규리가 이수호한테 이간질했어? 하여튼 유정연 그 여자도 참 나빠. 그 집안엔 멀쩡한 사람이라곤 없다니까!”주민
도아영은 아예 그녀에게 거절할 기회조차 안 줬다.뭇사람들은 도아영이 임규리를 끌고 가는 걸 보더니 쉬쉬거리기 시작했다.“쟤 설마 임규리랑 이수호가 부쩍 가까워졌다고 질투한 거야?”“잘잘못을 따지러 온 거지. 아까 표정 봤잖아.”“도아영도 참! 본인 뭐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수호가 임규리 좋아하는데 쟤가 뭐라고 질투해? 어차피 쇼윈도 부부일 거잖아.”...몇 사람들이 도아영의 험담을 해대자 주민서가 곧바로 두 눈을 부릅떴다.“방금 뭐라고 한 거야? 다시 한번 말해줄래?!”다들 주민서가 신문사 대표 딸인 걸 알고 황급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죄송해요, 선배. 저희 그냥 헛소리한 거예요!”“맞아요. 헛소리한 거니 너무 새겨듣지 마세요.”“잘 들어. 앞으로 누가 감히 도아영 험담 한 번만 더 했다가는 내 손에 아작나는 수가 있어.”주민서가 싸늘하게 경고장을 날리자 뭇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그녀는 감히 건드릴 상대가 아니니까. 부모님이 다 계시는 주민서와 달리 도아영은 가족이라곤 계모뿐이라 아무도 뒷받침해줄 수가 없다.한편 도아영은 임규리를 이끌고 아무도 없는 교실로 들어왔다.질질 끌려온 임규리는 가여운 눈길로 도아영을 쳐다봤다.“언니... 아파요.”“이수호 앞에서 무슨 얘기를 한 거야?”“그게...”임규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아무 말 안 했는데요.”그녀의 가여운 눈빛을 바라보며 도아영이 피식 웃었다.“내가 폭력을 참 싫어하거든. 근데... 상대가 자꾸 내 마지노선을 건드린다면 손을 댈 수밖에 없어.”“언니... 저, 저 진짜 언니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요.”임규리가 울먹거리면서 답했다.“대체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대표님 앞에서 허튼 소리한 적 없어요, 저.”“닥쳐. 오늘 네 친구들도 봤고 나도 다 봤으니 발뺌할 생각 마. 아니면 그냥 네 친구 한 명 불러와서 물어볼까? 다들 네가 아침에 이수호랑 뭔 짓거리를 했는지 알던데?”갑작스러운 주민서의 등장에 임규리의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이때
“괜찮아. 너도 그저 팩트만 말했을 뿐이잖아.”도아영이 웃으면서 말했다.“나도 너 때문에 화났다고 한 적 없는데?”“아영아, 네가 어떻게 화가 안 날 수가 있어?”주민서는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외부인인 그녀마저 임규리의 꼼수가 훤히 보이는데 도아영이 어떻게 아무것도 모를 수 있을까?이때 도아영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렇지만 네가 아직도 생각이 너무 단순한 것 같아. 이수호가 만약 나랑 서 대표님 관계를 의심하고 홧김에 나랑 파혼한다면 한성대에 입학 비리로 들어온 너 따위가 앞으로 계속 여기서 버텨나갈 수 있을 것 같아?”여기까지 들은 임규리는 가여웠던 표정이 금세 얼어붙었다.“네가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이수호가 다 내 체면을 보고 허락한 거야. 우리가 파혼한다면 이수호도 더는 너 신경 안 써.”임규리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졌지만 도아영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우리 학교 학생들은 죄다 상류층 인사들의 자녀인지라 네가 아무리 친해지고 싶어도 감히 넘지 못할 문턱이라는 게 있어. 넌 그저 우리 집안의 먼 친척일 뿐 강주 사람도 아니고 시골 출신이잖아. 나랑 이수호의 관계가 무너지면 너는 과연 이 학교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낼까?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겠지?”도아영의 말이 이어질수록 임규리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오늘 반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놀려댔는지 직접 보고 겪었으니까.만약 이수호와 도아영의 관계가 무너진다면 임규리는 고작 도씨 일가의 친척이란 신분으로 한성대에서 4년 내내 야유와 비난만 당할 게 뻔하다.여기까지 생각한 임규리는 덜컥 겁이 났다.“언니, 잘못했어요! 저 이제 어떡해야 하죠?”그녀가 드디어 말귀를 알아듣자 도아영이 곧이어 답했다.“사실 어려울 것도 없어. 오늘 내가 서 대표랑 나간 건 맞아. 다만 우린 업무상의 일로 만났을 뿐이지. 이 일은 이수호에게 어떻게 해명해도 안 믿어줄 게 뻔해. 그러니까 이따가 네가 대신 내 알리바이를 만들어줘야 해.”“네?”“내가 줄곧 학교에 있었다고 말
“괜찮아. 여기서 멀지도 않잖아.”도아영은 그녀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냈다.이에 주민서는 썩 내키지 않아도 함께 가주는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교실에 선생님이 아직 안 왔지만 학생들은 거의 다 자리에 앉아 있었다.도아영과 주민서가 임규리를 데리고 교실까지 왔을 때 그녀는 일부러 문 앞에서 도아영과 친한 척하면서 얘기를 나눴다.이 모습을 본 학생들은 임규리의 정체를 의논하기 시작했다.다들 그녀가 시골 촌뜨기인 줄 알았는데 도아영과 사촌지간이고 또 이토록 돈독할 줄은 몰랐으니까.아침에 이수호가 임규리를 불러갈 때도 다들 그녀가 평범치 않다고 수군거렸다.임규리가 교실 안으로 들어갈 때 주민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대체 쟤를 왜 도와줘? 널 이용해서 제 신분 좀 올리려는 거잖아. 저런 인간들 딱 질색이야!”방금 주민서는 임규리의 계략을 바로 알아챘으니 도아영도 분명 알고 있을 거라 믿었다.“나도 다 도와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아직은 쟤를 이용해서 이수호를 진정시켜야 하거든.”만약 그녀와 서현우가 사적인 거래를 했다는 걸 이수호가 알아버린다면 일이 매우 번거로워진다.그때 되면 이 남자가 또다시 도원 그룹을 억압할 테니까.이것만 생각하면 도아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전생에 그에게 그토록 아양을 떨어도 거들떠보지 않더니 이번 생엔 아무리 발악해도 좀처럼 놓아주질 않는 이수호였다.이것 참,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저기 봐봐, 이 대표님 왔어!”“진짜네! 대표님이 여긴 왜 왔지? 요즘 부쩍 우리 학교에 나오는 것 같아.”“강이나 보러 왔겠지. 두 사람 싸웠다고 들었는데 학교까지 찾아왔나 봐.”“아닐걸! 요즘은 줄곧 도아영만 찾으셨잖아.”“도아영을? 대표님은 도아영이라면 치 떨리시는 분인데?!”...복도에서 학생들이 수군거렸다.마침 도아영과 주민서가 창가 앞에 서서 이수호가 한 무리 사람들을 거느리고 오는 걸 보게 됐다.주민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수호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경 그룹 그렇게 한가해? 왜 자꾸 재수
주민서의 목소리가 마침 이수호의 귓가에 들려왔다.그는 안색이 확 굳어졌다.문득 전에 도아영이 옆에 있을 때도 자신이 그녀를 이렇게 비난했던 일이 떠올랐다.주민서는 이리로 다가오는 이수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 우리 아영이 공부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게 학교로 찾아오시면 어떡해요? 아영의 보호자라도 해주시려고요?”도아영도 그를 보면서 언짢은 듯 미간을 구겼다.“왜 자꾸 날 따라다녀요? 대표님은 다른 일 없어요? 종일 나만 괴롭히는 게 정작 다른 사람들한테는 민폐라는 걸 몰라요?”익숙한 멘트에 이수호의 안색이 더욱 일그러졌다.그녀는 아직도 너무 잘 기억하고 있다.전에 이수호를 위해 도시락을 회사까지 챙겨 갔을 때 그는 멀리서부터 그녀를 따돌렸다. 도아영은 하이힐을 신고 그를 쫓아오다가 매정하게 야유나 당했다.“아영아, 너는 여자가 돼서 종일 나만 쫓아다니는 게 창피하지도 않아? 나 말고 다른 할 일은 없어? 종일 나만 괴롭히는 게 정작 다른 사람들한테는 민폐라는 걸 몰라?”그때 도아영은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 뒤로 이수호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줄 때면 프런트데스크에 올려놓거나 가끔 멀리서 이수호를 바라보고 황급히 도망쳤다.전에 이토록 비굴했던 자신을 되새기며 도아영은 문득 실소가 새어 나왔다.환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세가 이렇게 역전될 줄이야.“내가 왜 찾아왔는지 잘 알 텐데?”이수호는 여전히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이에 도아영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업도 들어야 하는데 경호원 잔뜩 불러와서 뭐 하는 짓이에요 이게? 본인이 우리 학교 투자자라고 이렇게 멋대로 굴어도 되는 거예요?”“그러게 말이에요. 아까 보니까 학교에 꽤 많은 사람들이 언짢아했어요. 수업도 제대로 못 하게 진짜 너무 민폐네요.”주민서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어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해댔다.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꾹 참았다.“아침에 밥해놓으라고 했는데 어디 갔어?”“저기요, 집에 가정부도 있고
“딱히 증거도 없으신 것 같은데 길 좀 비켜주시죠? 수업 들어가야 해요.”도아영이 그대로 떠나가려 하자 이수호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도아영은 그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장소는 좀 가려가야죠, 대표님. 나 대표님 집안에 인신매매 계약이라도 한 건 아니잖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주민서를 데리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이수호는 멍하니 넋을 놓았고 옆에 있던 안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 정말 저희가... 아영 씨를 오해한 건 아닐까요?”이수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오해가 맞든 아니든 방금 그녀의 태도는 이미 충분히 이수호의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까.“임규리한테 가서 똑똑히 물어봐.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이야!”“네, 대표님.”안지원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한편 이수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여 관자놀이를 문질렀다.그 시각 주민서는 방금 이수호에게 쏘아붙이던 도아영을 되새기다가 입이 쩍 벌어졌다.“아영아, 너 아까 진짜 끝내주더라. 널 알고 나서부터 그렇게 사이다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야! 전에는 항상 이수호가 널 심부름꾼처럼 부려먹어서 너무 화났는데 우리 아영이 드디어 정신 차렸네!”“맞아, 이제 정신 차렸어.”한번 죽은 몸인데 정신을 못 차릴 리가 있을까?이때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유정연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툭 꺼버렸다.하지만 금세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유정연이 아양을 떨어댔다.“아영아, 지금 이씨 저택이야? 수호 옆에 있어?”“학교예요.”유정연은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너는 이경 그룹 사모님이나 돼서 뭣 하러 계속 학교를 나가? 애가 참 어리석다니까.”도아영은 더 이상 그녀의 푸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별일 없으면 끊을게요, 아줌마.”그녀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유정연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아니, 잠깐만! 끊지 말고! 나 아직 할 얘기 안 끝났어.”도아영이 아무 말 없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다
유정연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했다.도아영은 문득 전생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맘때쯤 유정연이 도지호를 위해 생일파티를 열어주었고 이경 그룹 예비며느리라는 도아영의 신분으로 다른 한 고급 호텔을 예약했었다.하지만 파티 현장에서 아주 창피한 일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이수호는 도아영을 더더욱 혐오하게 되었다.전생에 그녀는 이수호의 환심을 사지 못했기에 유정연도 감히 더 들이댈 수 없었다.다만 이번 생은 이씨 저택에 입주까지 했으니 유정연도 점점 기고만장하게 날뛰고 있었다. 마치 본인이 도아영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긴 듯싶었다.“아줌마, 작년 제 생일은 아예 같이 보낸 기억도 없는데... 그때 아줌마가 저희 아빠한테 그러셨죠. 여자애는 나이도 어리니 서둘러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요. 제 말 맞죠?”도아영이 과거를 들추자 유정연은 뻔뻔스럽게 반박에 나섰다.“남자랑 여자랑 같아? 게다가 넌 이제 회사까지 가져갔으니 지호는 앞으로 어떡하라는 거야? 이런 기회를 빌려서라도 거물급 인사들을 알고 지내야지. 정 못하겠으면 이 대표한테 직접 말할게. 어차피 내가 예비 장모님이니까 체면을 살려줄 거야!”도아영은 피식 웃었다.장모님?이건 아마 유정연의 일방적인 바람일 것이다.이수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안중에 둔 적이 없는데 장모님은 더욱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그래요, 그럼. 수호 씨가 허락할지 한번 물어보세요.”도아영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옆에 있던 주민서는 그녀에게 무슨 영문인지 따져 물었다.“또 무슨 일이래?”“도지호 생일파티를 열어주고 싶은데 로열 호텔에서 보내고 싶대.”“뭐라고?!”주민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로열 호텔이라니?!이 호텔은 주민서의 집안에서도 선뜻 예약할 수 없는 호텔이었다.“거기 예약은 사회적 인지도부터 샅샅이 따지잖아. 할망구가 꿈도 야무지네.”“이수호 찾아가겠대.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 어차피 쪽팔릴 건 본인이니까.”도지호처럼 물러터진 녀석은 생일날 어떤 꼴일지 굳이 생각하지
“맞아.”임규리의 실루엣은 나름 구분하기 쉬웠고 이 사진 또한 가까이에서 찍어 오관이 뚜렷하게 보였다.주민서는 씩씩거리면서 말을 이었다.“발랑 까진 년! 감히 전에 네 자리를 노리네!”“뭐라는 거야 대체?”도아영은 그녀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지금 널 대신해서 이수호 약혼녀가 되려는 거잖아! 단톡방에서 오늘 임규리가 이씨 일가에서 보낸 차를 타고 그리로 갔대! 사진까지 떡하니 있는데 빼박이지 뭐!”그녀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단톡방에 온통 임규리와 이수호의 관계를 추측하는 내용들이었다.“네가 이미 이수호랑 파혼했으니 임규리는 기껏해야 너랑 아주 먼 친척 사이인데 이씨 일가에서 뭣 하러 차까지 보내냐고? 지금 다들 이수호랑 임규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래. 바로 이 때문에 이수호가 너랑 파혼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니까. X발! 이거 지금 널 대놓고 능멸하는 거잖아.”“능멸? 난 아무리 봐도 이수호를 능멸하는 상황 같은데?”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면 이수호가 도아영을 배신한 꼴밖에 더 될까?오늘부로 이 남자는 배신남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쓸 것이다.다만 도아영은 애초에 이수호를 좋게 보진 않았다.한편 주민서는 화가 나서 도아영의 머리를 툭 쳤다.“지금 장난해? 이수호가 시골 촌뜨기 때문에 널 버렸다는데 창피하지도 않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그러는 넌 수호 씨 할머니가 바보로 보여? 너도 이 일이 황당하다는 걸 아는데 할머니가 정말 이수호랑 임규리를 엮어주실까 봐? 게다가 이수호 이제 약혼녀가 있잖아. 이런 스캔들은 이수호가 참는다고 해도 그 진설아 씨가 펄쩍 뛸 거야.”“진설아? 얘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그 여자 이미 이경 그룹에서 대놓고 쫓겨났어. 심지어 이수호는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쐐기를 박았대.”도아영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진짜야?”“백퍼.”“망했다...”“그걸 이제 알았어? 얼른 이씨 저택 찾아가서 따지라니까!”“아니, 그게 아니라...”도아영은 사실
여기까지 생각한 임규리는 도아영을 향한 원망이 더욱 짙어졌다.멀쩡한 부잣집 사모님 놀이를 눈앞에 놔두고 기어코 파혼이라니.그 바람에 임규리도 이제 학교에서 머리를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됐다.이때 선생님이 문득 교실에 들어오더니 학생들을 쭉 훑어보았다.임규리를 발견한 선생님은 바로 그녀에게 말했다.“임규리 맞지? 얼른 나와. 누가 찾아왔어!”“누구요?”임규리는 살짝 긴장됐다.설마 시골에서 부모님이 찾아온 걸까?정말 그런 거라면 그녀는 전교 왕따가 될 수도 있다.“이씨 저택 차야! 얼른 나와.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순간 그녀는 두 눈이 반짝거렸다.옆에 있던 학생들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돼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도아영은 이씨 일가에서 파혼을 당했는데 왜 굳이 임규리라는 먼 친척을 데리러 온 걸까? 그것도 웅장하게 차까지 보내면서 말이다.설마 이수호가 도아영과 파혼한 이유가 임규리 때문일까?곧이어 임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좀 전까지 비아냥거리던 몇몇 여학생들이 제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아부했다.“규리야, 우리 방금 그냥 장난친 거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래. 우리 다 친구잖아. 장난 좀 친 거로 너무 마음에 새겨둬선 안 돼!”그녀들은 임규리를 비난한 후폭풍이 너무 두려웠다.만약 임규리가 정말 이수호와 뭔가가 있다면 그녀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여학생들 전부 강제 퇴학을 당할 수 있으니까.“괜찮아. 나 그렇게 속 좁은 애 아니야.”임규리는 비록 상냥하게 말했지만 말투에서 이미 오만함이 묻어 나왔다.그녀가 떠나간 후 반에 남은 다른 학생들도 당황해하기 시작했다.“헐, 대박! 이 대표님이 정말 쟤를 찜한 거라고?”“시골 촌뜨기가 대체 뭐라고?”“우리 이제 끝났어. 쟤를 얼마나 괴롭혔는데... 나중에 일일이 복수하는 건 아니겠지?”한편 임규리는 선생님과 함께 학교 대문 앞으로 나왔는데 차갑고 거만하던 선생님이 별안간 그녀에게 굽신거리기 시작했다.이에 임규리는
몇 개월씩 휴학하고, 머릿속엔 온통 재벌가에 시집가려는 생각뿐인 여자가 호락호락하게 한성대를 졸업할 수 있을까?“대표님, 우리 진짜 도아영 씨 안 도와줘도 돼요?”“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 허위 날조하는 곳이 아니야!”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실력도 안 되는 게 기어코 시험을 보겠다고 하니 큰코다쳐봐야 정신 차리지.”“알겠습니다.”“학교 측에 미리 연락해. 이경 그룹의 관계로 도아영 뒤 봐주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네.”같은 시각, 한성대.“소문 들었어? 이수호 대표님 약혼녀 찬밥신세래!”“뭐? 이렇게 빨리? 아직 관계가 확정된 것도 아니잖아.”“그러게 말이야. 우리 엄마가 바로 그 회사 다니는데 아니 글쎄 진설아 씨가 회사에서 처참하게 쫓겨났다지 뭐야.”“이렇게 되면 우리도 기회가 있다는 거네?”“장난치지 마. 이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 그 바닥에 아무리 여자가 궁해도 절대 우리 차례는 안 와!”...반에 있는 몇몇 학생들이 이수호와 진설아의 관계에 대해 수군거렸다.진설아가 이수호에게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임규리는 몰래 기뻐했다.이 반 학생들은 죄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상류층에 닿을 실력은 안 된다.다만 이들 부모님은 연봉이 모두 2억 이상이다.오직 임규리만 친인척의 인맥을 동원해서 한성대에 오게 됐다.“규리야, 이 대표 네 전 형부 아니었어? 얼른 말해봐. 대체 너희 언니랑은 왜 파혼한 건데?”“진짜 소문대로 아영이가 바람 피웠니?”“바람은 무슨! 내가 볼 때 이 대표는 아영이가 성에 안 찼어. 걔 이 대표한테 잘 보이려고 얼마나 비천하게 굴었는데? 여자가 그러니까 너무 하찮았던 거지.”이수호가 도아영과의 파혼을 선언한 이후로 임규리는 반에서 모진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분명 도아영 본인의 문제인데 임규리만 수모를 겪어야 했다.그녀는 내키지 않더라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옆에 있던 누군가는 일부러 이상야릇한 말투로 말했다.“규리 너 예전에 이 대표랑 인사도 했잖아. 얼른 얘기해봐. 너희
...뭇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수호는 책상 위의 반찬을 보더니 안지원에게 말했다.“이거 다 치워.”“네.”안지원은 반찬을 전부 휴지통에 버리고는 경비원더러 처리하라고 했다.곧이어 경비원이 휴지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이수호는 의자에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전에 도아영이 도시락을 가져올 때 광경이 떠올랐다.그때 도아영은 감히 그의 사무실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행여나 그에게 방해가 될까 봐 도시락만 내려놓고 도망쳤다.이수호가 도시락을 전부 버리자 그녀는 이 남자가 다 먹은 도시락을 치우기 귀찮아서 그런 거라고 여기면서 그 뒤로 더는 챙겨오지 않았다.그랬던 도아영인데 지금은...이수호는 안지원에게 말했다.“내가 전에 아영이한테 너무 각박하게 굴었지?”“네... 좀 그런 것 같습니다.”안지원은 차마 더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각박이란 단어로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문득 이수호가 뜻밖의 질문을 내던졌다.“도아영 지금 뭐 해?”“아영 씨는...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가신 것 같습니다.”“학교?”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겨우 걸어 다니면서 누가 학교 나가래?”“그건...”안지원도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사실 도아영의 말 한마디면 굳이 수업을 안 들어도 이수호가 알아서 졸업시켜줄 테니 말이다.“한정민한테 전화해서 아영이 집에 돌려보내라고 해.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학교 못 나가게 막아.”“다만 이제 곧 기말고사라 이번 시험까지 못 건네면 퇴학을 당할 것 같아요.”“벼락치기로 한다고 무슨 소용이야? 걔 성적으론 복습해도 합격 못 해.”이수호는 누구보다 그녀의 실력을 잘 안다.그도 그럴 것이 휴학 기간이 너무 길어서 진도가 한참 뒤떨어졌으니까.벼락치기로 복습을 한다고 해도 순조롭게 졸업하긴 힘들다.“네, 지금 바로 교장한테 전하겠습니다.”말을 마친 안지원은 곧장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한정민은 살짝 어리둥절한 채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요? 오늘 오전에 방금 병가를 내고 돌아갔는데요
진설아는 그나마 부잣집 딸인데 임규리는 대체 어디서 굴러온 애일까?“공짜로 준다는데 왜 마다해? 말 잘 듣고 집안일 잘하고 조신하게 있으면 돼. 난 말이야... 강이나 그 계집애만 아니면 다 괜찮아.”남현숙은 원래 도아영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아쉽게도 도아영이 통제 불능이었다.그렇다면 순종적인 애로 도아영의 자리를 대체하면 그만이다.나중에 도아영은 이씨 일가를 버리고 간 걸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테니까.그 시각, 이경 그룹.이수호가 회의실에서 나와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진설아가 안에 떡하니 있었다.그는 미간을 구기고 진설아에게 쏘아붙였다.“누가 들어오라고 했지?”“아무도 없길래 그냥 들어왔어요.”진설아는 그의 반말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웃으면서 답했다.책상 위에는 그녀가 만든 도시락이 놓여 있었는데 국 하나에 요리 세 개로 매우 풍성했다.“대표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해봤어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그녀는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진설아가 이제 막 가까이 다가오려고 할 때 안지원이 덥석 가로막았다.“진설아 씨, 대표님 피곤하니까 좀 쉬게 나가주실래요?”“뭐라고요? 오자마자 날 내쫓더니 반 시간이 기다린 지금도 내쫓는 거예요? 여긴 원래 이렇게 사람을 막 다뤄요?”그녀는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이때 이수호가 책상 앞으로 다가와 전화기 버튼을 누르면서 차갑게 말했다.“지금 올라와.”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를 끊자 진설아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이에 이수호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앞으로 내 허락 없이 사무실에 들어오거나 책상 위에 쓰레기 널어놓지 마. 딱 질색이니까.”“뭐라고요?”진설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난생처음 수호 씨를 위해서 요리를 만들었는데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에요?”이수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있었고 이때 마침 경비원이 올라왔다. 그는 경비원 두 명에게 얼른 손짓했다.“이 사람 끌어내.”“네, 대표님.”경비원이 다짜고짜 다가와 그녀의 두
유정연은 전에 180억을 대출받다 보니 이제 빈털터리가 돼버렸다.이 시점에 이수호가 도아영과 파혼을 선언했다.이수호라는 울타리를 잃게 된 유정연은 이 바닥에서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전에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몇몇 친구들도 이수호와 도아영의 파혼 소식을 들은 순간 죄다 그녀의 전화를 피했다.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녀는 남현숙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남현숙은 소파에 앉아서 피곤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래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의 말투마저 소외감이 느껴졌다.유정연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네, 사모님. 다름이 아니라 아이들 문제로 오게 됐어요.”유정연은 아부하듯 상냥하게 말했지만 남현숙의 말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두 아이가 파혼을 결정했으니 정연 씨도 이제 그만 간섭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요즘 남현숙은 도아영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그런 그녀를 이경 그룹 안방마님으로 들이는 건 더더욱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사모님께서 아영이한테 실망이 크시다는 걸 다 알아요. 그래서 제가 사모님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주려고 온 겁니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아영이가 요즘 도통 말을 안 듣고 그래서 사모님이 진씨 일가 따님을 봐두신 걸 알고 있어요.”유정연은 줄곧 남현숙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그녀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유정연이 계속 말을 이었다.“진설아 씨는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커오다 보니 일말의 서러움도 감당하기 힘들어하죠. 그에 비해 우리 규리는 성격도 야무지고 온순한 데다가 현모양처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아주 평범한 집안 출신이에요. 전에 수호 덕분에 규리도 한성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됐어요. 지난번에 클럽에서도 수호가 규리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줬다던데... 우리 규리가 옆에서 수호를 보살펴주면 안 될까요? 뭐 시녀라도 좋으니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는 차원에서 옆에 있게 해주는 건 어떨까요?”유정연은 그야말로 함축적으로 말했지만 남현숙은 그녀의 속내를 금세 알아챘다.지금 임규리를 이수호에게 선뜻 내
줄곧 사람들에게 사랑만 받던 그녀가 언제 이런 서운함을 겪어봤을까?진설아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서 남현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정부가 전화를 받자 그녀는 다짜고짜 쏘아붙였다.“할머니 집에 계시죠? 바꿔봐요. 드릴 말씀 있으니까!”가정부는 진설아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감히 지체하지 못한 채 낮잠을 주무시는 남현숙을 깨우러 갔다.“무슨 일인데?”남현숙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진설아 씨가 찾으세요. 속상한 일을 겪으신 것 같아요.”가정부는 말하면서 남현숙에게 전화기를 건넸다.이에 남현숙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진설아가 얼마나 큰 서러움이라도 당한 것처럼 울면서 하소연했다.“할머니! 대표님 저 싫어하는 거 맞죠? 만약 그런 거라면 당장 집에 돌아갈 거예요!”“왜 그래? 무슨 일인데? 천천히 얘기해봐.”남현숙은 이제 연세가 있다 보니 칭얼대는 진설아의 목소리가 짜증이 나고 머리까지 지끈거렸다.이때 진설아가 곧장 대답했다.“정성껏 도시락 싸서 대표님이랑 함께 먹으려고 회사까지 찾아갔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있죠! 제대로 된 휴식실도 마련해주지 않았어요. 옆에 따라다니는 안 비서인가 하는 그분도 아예 저를 무시했고요. 저희 집안이 뭐 얼마나 대단한 집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대표님 이런 식으로 저 괴롭히는 거 아예 저한테 마음이 없어서죠?”진설아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원하는 바를 다 이뤘다. 그저 울기만 하면 부모님이 어르고 달래면서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줬으니까.한편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남현숙은 짜증이 났는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고작 이런 것 때문에 나한테 전화해서 우는 거야?’‘이러다가 나중에는 큰일 나겠는데?’“수호 업무가 바쁘다 보니 네가 마땅히 이해해줘야지. 내가 나중에 수호한테 얘기할 테니 거기서 기다리기 싫으면 도시락 안 비서한테 주고 그만 나와. 앞으로 함께 지낼 날이 많으니 굳이 점심까지 같이 먹을 필요는 없어.”남현숙이 전혀 본인 뜻대로 나서주지 않자 진
주민서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눈앞의 시험지를 찬찬히 들여다봤다.아니나 다를까 커다랗게 적힌 글씨를 이제야 발견한 그녀였다.더 심각한 것은 그녀가 무려 7일이나 이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는 점이다.“박사 시험 문제라니... 어쩐지 꽤 어렵더라.”“뭐? 올해 학교조차 제대로 안 나온 네가 이렇게 많은 걸 적었으면서... 아영이 넌 대체 어떻게 한 거야?”그도 그럴 것이 도아영이 시험지에 적은 건 낙서가 아니었다.전생의 3년 동안 줄곧 이경 그룹에서 이수호를 위해 회사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배운 점이 많았고 또한 이 금융 업계도 대충 파악이 됐다.3년의 실기 덕분에 시험지를 푸는 것도 우월성을 부각하는 전략적인 수단이 돼버렸다.시험지에 빼곡하게 적은 답안을 바라보며 도아영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번엔 할만하겠는데?”그 시각, 이경 그룹.진설아가 화이트 샤넬 스커트를 입고 회사 로비에 들어선 순간 모두의 시선을 강탈했다.“저분이 바로 진설아 씨래. 대표님이 새로 찾으신 약혼녀인가 봐.”“예쁘장하게는 생겼는데 인성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대표님께 점심 도시락 드리려고 왔나 봐. 전에 도아영 씨도 그랬잖아.”몇몇 사람들이 뒤에서 몰래 수군거렸다.예전에 도아영은 이수호에게 잘 보이려고 매일 다양한 도시락을 만들어서 회사까지 보내왔다.다만 이수호는 그런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제 그 역할이 진설아로 바뀌었지만 결론은 변함이 없을 듯싶었다.진설아는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그녀는 대표이사실로 곧게 향했다. 이제 막 회의실에서 나온 안지원이 그녀를 보더니 재빨리 달려가서 말했다.“진설아 씨, 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라 물건은 그냥 여기 두시는 게...”“괜찮아요.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먹으면 돼요.”진설아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부잣집 딸이었지만 부모님께서 최대한 이수호에게 잘 보이고 그의 약혼녀가 되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탓에 마지못해 도시락을 들고 회사
이삿짐센터 기사는 도아영의 짐을 다 옮긴 후에야 떠나갔다.이곳은 30평 남짓한 방 두 개짜리 아늑한 집이었다. 물론 도아영이 혼자 살기엔 충분했지만...이수호 같은 빅 보스가 이렇게까지 돈을 아낄 줄이야.그녀는 짐을 다 풀고 침대에 덩그러니 누웠다. 지금 몸 상태로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서 미칠 지경이니까.손목뿐만 아니라 다리 근골까지 다치는 바람에 의사도 한 달 동안 누워만 있으라고 했다.한 달 뒤에 재활 훈련을 시작하라고 했는데 막상 달력을 보니 열흘 뒤에 기말고사였다.전생에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우월한 성적으로 한성대에 입학했다.하지만 그 뒤로 이수호에게 푹 빠져있다 보니 대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나중에 이경 그룹에 근무하면서 경영 지식을 많이 배웠지만 기말고사에 회사 경영에 관한 내용은 없다.도아영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이래서 사회에 나오기 전에 충분히 학문을 닦아야 하나 보다.환생한 뒤 종일 도서관을 다니긴 했지만 대학교 때 배운 지식은 까마득히 잊었다.‘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말고사를 건네고 졸업장을 따야 할 텐데.’다음날.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나갔다.경찰서에 잡혀갔다가 이 지경이 돼서 나온 그녀를 보더니 주민서는 입이 쩍 벌어졌다.“아영아, 너 언제부터 공부에 이렇게 진심이었어? 이 지경이 됐는데 기어코 도서관에 나온 거야?”“보다시피 지금부터 진심이야.”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공부에 몰입했다.하지만 복습 범위가 너무 넓다 보니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그럼 너 혼자서 공부하면 그만이지 뭣 하러 나까지 불러? 난 하기 싫단 말이야.”주민서는 한성대에 온 이유가 오직 졸업장을 따내기 위해서이다. 시험 기간에 열심히 공부하는 법은 아예 없다.하여 도아영은 그녀한테서 도움을 받을 거란 기대조차 없었다.“할 수 없지 뭐. 과제가 너무 많이 밀렸어. 졸업 못 하면 이 몇 년 동안 시간 낭비한 거잖아.”“하긴, 전에는 이수호가 있으니 교장도 그냥 졸업장을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