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서의 목소리가 마침 이수호의 귓가에 들려왔다.그는 안색이 확 굳어졌다.문득 전에 도아영이 옆에 있을 때도 자신이 그녀를 이렇게 비난했던 일이 떠올랐다.주민서는 이리로 다가오는 이수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 우리 아영이 공부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게 학교로 찾아오시면 어떡해요? 아영의 보호자라도 해주시려고요?”도아영도 그를 보면서 언짢은 듯 미간을 구겼다.“왜 자꾸 날 따라다녀요? 대표님은 다른 일 없어요? 종일 나만 괴롭히는 게 정작 다른 사람들한테는 민폐라는 걸 몰라요?”익숙한 멘트에 이수호의 안색이 더욱 일그러졌다.그녀는 아직도 너무 잘 기억하고 있다.전에 이수호를 위해 도시락을 회사까지 챙겨 갔을 때 그는 멀리서부터 그녀를 따돌렸다. 도아영은 하이힐을 신고 그를 쫓아오다가 매정하게 야유나 당했다.“아영아, 너는 여자가 돼서 종일 나만 쫓아다니는 게 창피하지도 않아? 나 말고 다른 할 일은 없어? 종일 나만 괴롭히는 게 정작 다른 사람들한테는 민폐라는 걸 몰라?”그때 도아영은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 뒤로 이수호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줄 때면 프런트데스크에 올려놓거나 가끔 멀리서 이수호를 바라보고 황급히 도망쳤다.전에 이토록 비굴했던 자신을 되새기며 도아영은 문득 실소가 새어 나왔다.환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세가 이렇게 역전될 줄이야.“내가 왜 찾아왔는지 잘 알 텐데?”이수호는 여전히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이에 도아영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업도 들어야 하는데 경호원 잔뜩 불러와서 뭐 하는 짓이에요 이게? 본인이 우리 학교 투자자라고 이렇게 멋대로 굴어도 되는 거예요?”“그러게 말이에요. 아까 보니까 학교에 꽤 많은 사람들이 언짢아했어요. 수업도 제대로 못 하게 진짜 너무 민폐네요.”주민서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어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해댔다.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꾹 참았다.“아침에 밥해놓으라고 했는데 어디 갔어?”“저기요, 집에 가정부도 있고
“딱히 증거도 없으신 것 같은데 길 좀 비켜주시죠? 수업 들어가야 해요.”도아영이 그대로 떠나가려 하자 이수호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도아영은 그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장소는 좀 가려가야죠, 대표님. 나 대표님 집안에 인신매매 계약이라도 한 건 아니잖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주민서를 데리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이수호는 멍하니 넋을 놓았고 옆에 있던 안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 정말 저희가... 아영 씨를 오해한 건 아닐까요?”이수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오해가 맞든 아니든 방금 그녀의 태도는 이미 충분히 이수호의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까.“임규리한테 가서 똑똑히 물어봐.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이야!”“네, 대표님.”안지원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한편 이수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여 관자놀이를 문질렀다.그 시각 주민서는 방금 이수호에게 쏘아붙이던 도아영을 되새기다가 입이 쩍 벌어졌다.“아영아, 너 아까 진짜 끝내주더라. 널 알고 나서부터 그렇게 사이다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야! 전에는 항상 이수호가 널 심부름꾼처럼 부려먹어서 너무 화났는데 우리 아영이 드디어 정신 차렸네!”“맞아, 이제 정신 차렸어.”한번 죽은 몸인데 정신을 못 차릴 리가 있을까?이때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유정연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툭 꺼버렸다.하지만 금세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유정연이 아양을 떨어댔다.“아영아, 지금 이씨 저택이야? 수호 옆에 있어?”“학교예요.”유정연은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너는 이경 그룹 사모님이나 돼서 뭣 하러 계속 학교를 나가? 애가 참 어리석다니까.”도아영은 더 이상 그녀의 푸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별일 없으면 끊을게요, 아줌마.”그녀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유정연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아니, 잠깐만! 끊지 말고! 나 아직 할 얘기 안 끝났어.”도아영이 아무 말 없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다
유정연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했다.도아영은 문득 전생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맘때쯤 유정연이 도지호를 위해 생일파티를 열어주었고 이경 그룹 예비며느리라는 도아영의 신분으로 다른 한 고급 호텔을 예약했었다.하지만 파티 현장에서 아주 창피한 일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이수호는 도아영을 더더욱 혐오하게 되었다.전생에 그녀는 이수호의 환심을 사지 못했기에 유정연도 감히 더 들이댈 수 없었다.다만 이번 생은 이씨 저택에 입주까지 했으니 유정연도 점점 기고만장하게 날뛰고 있었다. 마치 본인이 도아영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긴 듯싶었다.“아줌마, 작년 제 생일은 아예 같이 보낸 기억도 없는데... 그때 아줌마가 저희 아빠한테 그러셨죠. 여자애는 나이도 어리니 서둘러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요. 제 말 맞죠?”도아영이 과거를 들추자 유정연은 뻔뻔스럽게 반박에 나섰다.“남자랑 여자랑 같아? 게다가 넌 이제 회사까지 가져갔으니 지호는 앞으로 어떡하라는 거야? 이런 기회를 빌려서라도 거물급 인사들을 알고 지내야지. 정 못하겠으면 이 대표한테 직접 말할게. 어차피 내가 예비 장모님이니까 체면을 살려줄 거야!”도아영은 피식 웃었다.장모님?이건 아마 유정연의 일방적인 바람일 것이다.이수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안중에 둔 적이 없는데 장모님은 더욱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그래요, 그럼. 수호 씨가 허락할지 한번 물어보세요.”도아영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옆에 있던 주민서는 그녀에게 무슨 영문인지 따져 물었다.“또 무슨 일이래?”“도지호 생일파티를 열어주고 싶은데 로열 호텔에서 보내고 싶대.”“뭐라고?!”주민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로열 호텔이라니?!이 호텔은 주민서의 집안에서도 선뜻 예약할 수 없는 호텔이었다.“거기 예약은 사회적 인지도부터 샅샅이 따지잖아. 할망구가 꿈도 야무지네.”“이수호 찾아가겠대.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 어차피 쪽팔릴 건 본인이니까.”도지호처럼 물러터진 녀석은 생일날 어떤 꼴일지 굳이 생각하지
한편 이수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내가 언제부터 이런 일까지 신경 썼지?’“사모님, 제발 본인 주제 파악부터 하세요. 너무 선 넘지 말고요.”이수호는 아예 그녀의 체면을 구겨버렸다.곧이어 그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너머로 가차 없이 거절을 당한 유정연은 안색이 한없이 일그러졌다.이수호가 이런 일에 신경을 안 쓸 줄이야.하지만 유정연은 이미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다녔는데 그 호텔을 예약하지 못하면 앞으로 강주에서 어떻게 머리를 들고 다니란 말인가?곧이어 휴대폰이 울리고 부잣집 사모님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정연 씨 아들 로열 호텔에서 생일파티를 연다던데 정말이에요? 우리 그이도 참석하겠대요!”마침 정곡을 찔린 유정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물론이죠! 그런 거로 뭣 하러 거짓말을 해요? 우리 아영이가 이씨 일가의 예비며느리잖아요. 지호가 또 아영이 동생이니 로열 호텔을 예약하는 건 식은 죽 먹기 아니겠어요?”그녀는 정말 입만 열면 거짓말이 줄줄 새어 나왔다.어찌 됐든 부잣집 사모님들 앞에서 체면이 구겨져서는 안 되니까.아니나 다를까 상대도 그녀의 거짓말을 덥석 믿어주었다.“그래요? 그럼 저도 이참에 세상 구경 좀 해보겠네요. 역시 정연 씨가 복이 타고났다니까요. 우리가 선물 푸짐하게 챙겨 갈 테니 준비 잘하고 계세요.”상대가 선물을 준다는 말에 유정연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네. 걱정 마세요. 그때 가서 초대장 가장 먼저 드릴게요.”“고마워요!”상대의 깍듯한 태도에 유정연은 어깨가 으쓱해졌다.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걱정이 태산이었다.로열 호텔은 보통 사람들이 예약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현재 도씨 일가의 신분으론 안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다.만약 이수호가 안 도와준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그녀에겐 더는 뒤돌아갈 길이 없었다.남들에게 사정하느니 본인을 믿고 봐야지. 그녀는 이제 이경 그룹 장모님인데 이 신분만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
“그래요.”유정연은 장수현을 샅샅이 훑어보았는데 명찰에 고작 부매니저라고 되어 있었다.“연회장 예약한다고 했는데 준비는 다 됐죠? 지금 현장으로 가보면 될까요?”장수현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죄송하지만 연회장은 이미 예약이 완료된 상태입니다.”“뭐라고요?”유정연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말도 안 돼! 아까 카운터에 전화했을 때만 해도 분명 있다고 했어요.”장수현은 머쓱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때까지 있었는데... 어떤 분이 연회장 전체를 대관해서...”다만 유정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색하며 쏘아붙였다.“이봐요, 부매니저! 지금 내가 바보로 보여요? 강주에 유명한 호텔이 고작 이 몇 개뿐인데 어느 누가 그런 대규모의 연회를 연다고 그래요? 게다가 여긴 일반인들이 소비할만한 곳이 아니잖아요! 그쪽에서 얼마를 주던가요? 두 배로 드릴게요!”“사모님, 이건 돈 문제가 아니라...”장수현이 몹시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유정연은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그에게 소리쳤다.“뭐라고요? 돈 문제가 아니면 그냥 우리 도씨 일가가 자격이 없다는 말이겠네요? 로열 호텔에서 우리 집안 얕잡아보는 거예요 지금?!”그녀는 안 그래도 목청이 큰데 더욱 크게 고함을 지르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전부 귀를 기울였다.“사모님, 정말입니다. 이미 어떤 분이 통째로 대관했어요...”“됐고! 어차피 전화는 내가 먼저 했잖아요! 그쪽도 알다시피 우리 아영이가 이제 곧 이경 그룹 사모님이 될 거예요! 그럼 난 이 대표 장모님으로 등극하겠죠?! 이씨 일가가 강주에서 어떤 지위인지는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거라 믿어요. 미리 경고하는데 나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다가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유정연은 그야말로 폭주 기관차였다.그녀가 이수호까지 들먹이자 장수현은 더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사모님, 정말 일부러 안 보여드리는 게 아니라...”“그럼 뭔데요?”그녀가 피식 웃었다.“누가 이렇게 통 크게 로열 호텔 연회장 전체를
한편 구연준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아영의 면을 봐서 하나쯤 내주는 것도 문제 될 건 없죠.”유정연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럴 줄 알았어요. 연준 씨라면 분명 내줄 거라고 믿었거든요.”구연준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아영이가 원한다면 제일 큰 연회장에서 생일파티를 열게 해줘야죠.”이때까지도 유정연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입이 귀에 걸리게 웃어댔다.“좋아요, 하하! 그럼 너무 좋죠! 연준 씨는 역시 대인배라니까요!”‘이수호 그 자식보다 몇백 배나 더 나은지 몰라요!’이를 본 구연준이 장수현에게 말했다.“그럼 아까 상의한 대로 내 계좌에 두 배 금액으로 이체하라고 해요.”“네, 대표님.”구연준은 더는 유정연과 얘기를 나누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한편 그녀는 구연준이 돈을 요구할 줄은 전혀 모르고 끝까지 쫓아가려 했는데 이미 멀리 떠나가고 없었다.유정연은 다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두 배로 지불하기로 했다.‘어차피 연회장 하나에 얼마나 하겠어?!’그때 장수현이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사모님, 다 해서 24억 원입니다. 어떻게 지불하시겠어요?”“뭐, 뭐라고요?!”금액을 듣는 순간 유정연은 얼이 빠졌다.24억 원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비쌀 수가...“사모님, 그게 실은 대표님께서 저희 호텔의 가장 큰 연회장을 내주셨거든요. 그 연회장은 한번 대관하시면 3박 4일 동안의 모든 지출을 부담해야 하고 또 방금 사모님께서 두 배로 내주시겠다고 해서...”장수현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24억 원이라...대체 이 많은 돈을 어디 가서 구해온단 말인가?“사모님, 이 연회장은 거물급 인사들만 예약할 수 있어요. 이번에 사모님께서 예약하신 걸 너무 축하드립니다. 아드님 생일파티도 근사하게 보내세요.”유정연은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24억 원짜리 연회장이라, 아마 강주 전체를 둘러봐도 더는 없을 스케일이었다.구연준이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걸까?!“사모님?”그녀가 줄곧 돈을
“알았어요.”구연준은 휴대폰에 뜬 알림을 보더니 곧장 도아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미션 성공.]그의 메시지를 확인한 도아영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유정연은 이제 큰코다치는 일만 남았다.그날 도씨 일가에서 로열 호텔의 제일 큰 연회장을 예약했다는 소식이 이미 유정연 본인의 입을 통해 동네방네 쫙 퍼졌다.돈을 낼 때 그녀는 그토록 괴로웠지만 이제 드디어 신분을 과시할 소재가 생기니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었다.지나가는 개미 새끼에게도 그녀가 로열 호텔 연회장을 예약했다는 사실을 알릴 지경이었다.한편 도아영은 오늘 수업이 끝나고 도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유정연이 동네방네 전화하면서 도지호의 생일파티에 꼭 참석하라고 자랑질을 해대는 걸 보게 됐다.“아이고, 사모님, 우리 아들 생일파티는 로열 호텔의 제일 큰 연회장에서 열릴 예정이에요. 꼭 와주셔야 해요.”도아영은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래, 실컷 기뻐해야지. 이제 도지호 생일날이면 웃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거야.’그제야 유정연도 집에 돌아온 도아영을 보더니 곧장 전화를 끊었다.이어서 언짢은 얼굴로 질문을 건넸다.“여긴 왜 왔어?”“내 집인데 못 올 이유라도 있나요?”도아영이 신을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왔다.“수호가 네 짐 다 뺐어. 오늘 돌아온 거 수호는 알아?”“왜요? 아줌마는 내가 이씨 저택에서 지내길 바라는 것 같네요?”“당연하지! 여자는 크면 다 시집가게 돼 있어. 넌 이미 약혼식까지 치렀으니 거기 들어가도 안 될 건 없잖아. 수호 마음 단단히 사로잡아야 앞으로 편하게 살 수 있어. 그래야 도원 그룹도 든든한 버팀목이 생기는 거라고.”유정연은 말하면서 그녀와 함께 거실로 들어갔다.도아영이 소파에 앉아서 그녀의 말을 듣는 척도 안 하자 유정연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수호가 내쫓은 거야?”요즘 유정연은 도지호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도아영과 이수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도아영이 줄곧 무표정한
다만 도아영은 아직 다 까발릴 순 없다.“그래요? 고마워요, 신경 써줘서.”“뭘 새삼스럽게. 넌 앞으로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너 정도 미모면 수호도 충분히 반하게 되어있다니까.”유정연의 말투가 또다시 나긋해졌다.“우리 아영이 나중에 잘되거든 이 아줌마가 관심하고 신경 써준 거 잊으면 안 돼.”“당연하죠. 평생 잊지 않고 잘 간직할게요.”도아영의 미소가 유정연을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하려던 말까지 까맣게 잊었다.‘이 계집애가 왜 점점 더 조종하기 어려워졌지?’“엄마, 나 왔어요!”이때 문 앞에서 도지호가 캐주얼한 운동복 차림에 스타일리쉬하게 치장하고 서 있었다. 귀걸이, 반지, 어느 하나 빠진 것 없고 거만한 표정은 영락없는 MZ 세대였다.도아영을 본 도지호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여긴 왜 왔어? 누구 마음대로 돌아와!”한편 도아영은 소파에 앉아서 전혀 일어날 기미가 없었고 도지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이에 도지호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X발, 묻고 있잖아! 귀먹었어?”“아영아, 이건 아니지. 동생이 말하는데 왜 무시해?”유정연이 일부러 도아영을 탓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분명 말했죠. 여긴 내 집이라 다른 사람 허락받고 돌아올 이유는 없다고요.”“야, 도아영! 우리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도지호의 욱한 성격은 여전했다.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따끔하게 혼내려 할 때 도아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이 집문서 내 손에 있는데 거기 네 이름은 안 적혀 있거든. 여기서 확 쫓겨나고 싶어?”“너!”그녀는 단숨에 도지호의 정곡을 찔렀다.유정연은 진짜 화난 도아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얼른 가서 도지호를 말렸다.“얘가 대체 왜 이래? 얼른 누나한테 사과하지 못할까!”사람은 자고로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전에 유정연은 본인이 어른이라고 도아영 앞에서 온갖 꼰대질을 다 해댔다. 또한 도아영이 만만하니까 쉴 새 없이 그녀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옛날의 도아영이 아니다.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