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이때,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윤찬이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고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서지현과 나석진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고는 동시에 핸드폰을 낚아챘다.그러나 나석진이 상처를 입은 탓에 핸드폰은 서지현의 손에 들어갔다. 안면인식이라는 것을 안 그녀가 핸드폰을 나석진의 눈앞에 갖다 대자 잠금이 풀렸다.서지현은 나석진에게서 멀리 떨어져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나석진이 힘겹게 일어나 그녀를 제지하려 할 때, 그녀는 이미 모든 메시지를 전부 읽은 뒤였다.[형, 이제 깨어날 때도 되지 않았어요? 지현 전하가 얼마나 걱정하는데, 너무 오래 버티는 거 아니에요? 연기를 해도 다른 병원을 찾아요. 총알 빼내는 것쯤은 작은 수술인데, 사흘씩이나 못 깨어났다는 게 알려지면 저희 의술이 안 좋은 게 아니냐, 그런 얘기가 나온단 말이에요! 맞다, 이건 마취과 의사 때문이라고 했으니, 괜히 다르게 얘기하지 마요!]나석진이 굳어졌다. 서지현은 핸드폰을 흔들거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석진은 급히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아, 어깨 아파...”“어깨가 아파요, 등이 아파요?”“응?”“사흘씩이나 누워있었는데, 등에 굳은살은 안 생겼어요?”나석진이 억지로 웃으며 서지현을 쳐다보았다. 고양이 같던 서지현은 이제 날카로운 발톱을 자랑하는 호랑이가 되어있었다.이내 병실에 고함이 울려 퍼졌다.“나석진!”나석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진짜 망했다.“사흘 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당신이 못 깨어날까 봐 얼마나 자책했는데...당신이 못 깨어나면 나도 확 죽어버릴 거라고 했다고요! 그런데 연기였어요? 이게 재미있어요?”“아니, 내 얘기 들어봐, 내가 다 설명해줄게...”나석진은 울고만 싶었다. 그는 얼른 서지현의 손을 잡았다. 이제 서지현은 ‘설명 따위 필요 없다’며 그를 밀어낼 것이다. 그가 어깨를 맞은 척, 아픈 척 하면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지현아, 내가 다 설명해줄게...”“그래요! 설명해봐요!”“...
왜 생각대로 되지 않지?“얘기해요, 뭘 설명할 건데요?”나석진이 숨을 헉 들이마셨다. 서지현은 반지를 꺼내 그에게 던지고는 한 글자 한 글자 끊어가며 말했다.“거짓말쟁이!”“지현아, 그게 아니라... 난... 너무 과했어.”“변명하지 마요!”“네가 날 걱정해 줬으면 해서 그랬어! 이렇게 오래 할 생각은 없었어. 못 믿겠으면 찬이와 얘기한 걸 봐!”서지현이 눈을 크게 떴다. 기록까지 있다고?나석진은 아차 싶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서지현은 차갑게 웃으며 윤찬의 메시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했다. 나석진은 혼이 빠진 듯 침대에 앉아 천천히 한쪽으로 고꾸라졌다.“연기하지 마요, 정말 아프다 해도 안 믿을 거예요.”“지현...”“이제 그만 갈게요. 몸조리 잘해요.”서지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나석진은 돌아눕고 싶었지만 어깨가 아파 어쩔 바를 몰랐다. 힘겹게 몸을 돌리려는데, 침대 위에 뭔가 딱딱한 게 걸렸다.서지현이 던진 반지 한 쌍이었다.그는 반지를 꼭 쥔 채 찬찬히 관찰했다. 보면 볼 수록 완벽한 공예로 만들어진 보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보석마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그는 짜증스레 반지를 베개 밑에 밀어 넣고는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사흘 뒤, 나석진은 퇴원했다. 원래 건강한 데다 윤찬의 의술, 윤제 그룹의 약까지 더해지니 엄청난 속도로 회복한 것이다. 상처 쪽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에는 문제없었다. 다만 최근 들어 풀이 죽어있을 뿐이었다.고용인들이 수군댔다.“도련님, 설마 지현 전하께 거절당한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 온 남양의 여자들이 모두 도련님을 탐내고 있잖아.”“하지만 온 남양의 남자들도 지현 전하를 탐내고 있는걸?”“억지 부리지 마!”“억지가 아니야, 도련님 손가락을 잘 봐. 반지 하나는 약지에, 하나는 새끼손가락에 꼈잖아.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는 하도 작아 절반밖에 끼지 못했고. 커플링인 게 분명해. 대체 누가 커플링을 혼자 낀단 말이야?”이때
나석진이 눈을 반짝 빛냈다.“정말?”최연준이 피식 웃었다.“솔직히 딱히 도와주고 싶진 않아요, 돕는 입장은 우리인데, 뭐 부탁이라도 해야 해요?”“아니...”나석진이 말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지금은 그가 을이었다.“어떻게 도와줄 건데요?”“그건 모르죠.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겠다 했지,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 생각해야죠. 우리가 지현이를 화나게 한 것도 아니잖아요.”그 말을 들은 나석진이 김빠진 풍선처럼 소파에 털썩 앉았다.‘그러게 오버해서는 안 됐는데...’나석진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다 강서연의 핸드폰을 가지고 놀고 있는 최군형을 보자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그는 소파에서 튕겨 일어나 최군형을 끌어안았다.“어이구, 우리 조카!”최군형은 깜짝 놀라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강서연이 깜짝 놀라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군형아, 너 이렇게 잘생겼는데, 연예계 쪽은 생각 없어? 삼촌이 잘해줄게, 그런데 일단은 좀만 도와줘...”“형님! 제 아들을 이용하려고요?”“방금 말했잖아요, 방법만 생각한다면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겠다고.”강서연과 최연준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들이 한 말이었기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최연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어떤 방법인데요? 군형이에게 연기라도 시키겠다는 거예요?”나석진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오빠...”“물론 주인공은 나야. 하지만 군형이가 중요한 역할을 맡아줘야겠어! 지현이는 내게 화났지만, 군형이는 좋아하잖아! 군형이라면 지현이를 불러낼 수 있을 거야!”“...”강서연과 최연준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긴 했다.“오빠, 이 방법이 통한다고 확신해요?”“당연하지!”나석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서지현은 정말 화가 난 게 아니라 삐친 것이었다. 진심을 보여준다면 서지현도 언제까지고 그를 모른 척 하지 않을 것이었다.“그럼 그렇게 하죠.”강서연이 작게 웃으며 최군형을 안아 들었다
“자식, 나도 네 삼촌이야!”나석진이 최군형에게 가까이 가자 최군형은 얼른 손으로 나석진을 막았다.“아냐, 아니야!”최연준이 짓궂게 웃고는 아들을 받아들고 얘기했다.“군형아, 윤찬 삼촌은 똑똑해서 안 도와줘도 돼. 그런데 이 삼촌은 조금 멍청해. 아빠가 말했지? 동정심이 있어야 한다고.”“네!”“그럼 이 멍청한 삼촌을 도와주자, 어때?”최군형이 제법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매제!”“왜요?”“아니에요.”나석진이 이를 악물고 남은 몇 글자를 뱉어냈다.“정. 말. 고. 마. 워. 요!”......날씨 좋은 주말이었다. 강서연과 서지현은 유유자적하게 교외의 풀밭에서 산책하고 있었다.서지현은 별로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최군형의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듣고는 완전히 사르르 녹아 금세 약속을 잡았다.최군형은 곧잘 걸었지만 달릴 때면 조금 뒤뚱거렸다. 그는 넓은 풀밭에서 뛰어다니며 기분 좋은 듯 깔깔 웃었다.서지현의 눈은 계속해서 최군형을 쫓아다녔다. 그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강서연이 서지현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지현아, 군형이가 그렇게도 좋아?”“당연하죠, 군형이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네 아이도 분명 저렇게 예쁠 거야!”“언니...”“아, 잘못 말했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아이 얘기했네.”서지현이 강서연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서로의 뜻을 알아낼 수 있었다.서지현은 강서연이 나석진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강서연도 서지현이 이를 알아챈 것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씩 웃고는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아직도 화난 거야?”“아니에요.”“진짜?”“저 때문에 총까지 맞았는데요. 그다음이 어떻게 됐든 그건 사실이잖아요.”강서연이 씩 웃었다. 서지현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보아하니 나석진에게도 희망이 있었다.서지현이 입을 삐죽하며 민들레 홀씨를 털었다.“날 그렇게나 오래 걱정시켜서 화난 거예요! 내가 걱정한다는 걸 알면서도 안 일어났잖아요! 정말 너무...”“맞
서지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릴 적 빈민가에서 학교 따위 꿈도 꾸지 못한 채 살았다. 한글도 옆집 사는 집시 할머니에게 배웠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 할머니도 거의 까막눈이라 가르쳐준 글씨 중 절반은 틀린 것이었다.조금 더 자란 뒤 그녀는 남들이 버린 교과서를 주워 와 보기 시작했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탓에 한 번 보고도 금방 배울 수 있었다. 독학으로 한글을 뗐을 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까지 할 수 있었다.그녀는 남양에 와서야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하지만 이 학교는 강서연이 말한 학교와는 달랐다. 짓궂은 남학생들 대신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들뿐이었다.그래서 그녀는 강서연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언니, 좋아한다면서 왜 괴롭히는 거예요?”“남자의 미성숙한 심리랄까? 좋아하는데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고, 주의를 끌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이...”서지현은 머리를 저으며 풉 하고 웃었다. 강서연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현아, 석진 오빠 겉으로는 상남자지만 속은 아직 어린애야, 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하지만 오빠는 널 정말 사랑해.”서지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엄마, 엄마!”최군형이 흥분한 채 뒤뚱거리며 뛰어왔다. 강서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엄마, 봐! 벌레, 벌레!”서지현도 고개를 빼 들었다. 최군형의 손에는 반딧불이 모양의 장난감이 쥐어져 있었다.“벌레, 빛이 나!”서지현이 웃으며 말했다.“반딧불이는 밤에만 빛이 나요!”“빛이 나!”최군형은 토실토실한 손으로 반딧불이의 엉덩이 부분을 가리켰다.서지현은 그제야 장난감의 엉덩이 부분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붙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강서연이 물었다.“군형아, 이건 어디서 난 거야?”“저쪽!”최군형이 가까이 있는 풀숲을 가리키고는 서지현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요! 벌레 잡으러 가요!”서지현의 심장이 더욱 심하게 뛰었다. 풀숲 속에 누가 숨어있을지
하지만 최군형은 익숙한 듯 서지현을 이끌고 그곳을 빠져나왔다.서지현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군형아, 빨리 돌아가자. 엄마가 걱정하셔!”“그럴 순 없지,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이때 매력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지현의 발길이 멈췄다. 귀 끝까지 화끈해지는 게 느껴졌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그 목소리를 등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최군형은 나석진을 쳐다보았다. 나석진이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최군형은 웃으며 서지현의 손을 놓고 나석진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나석진은 하인을 불러 최군형을 강서연에게 데려갔다. 풀숲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았다.서지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여름의 바람이 습기를 머금고 불어왔다.그는 공기 중의 꽃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도 최군형이 가져온 반딧불이 장난감이 꼭 쥐어져 있었다. 엉덩이 부분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거렸다.서지현은 문득 울고 싶었다.“내가 잘못했어.”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기배우가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빌고 있었다.“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거 알아.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냥 널 놀려보고 싶었어. 날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내가 네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받고 싶었어. 사실 수술할 때 전신마취를 안 해서, 정신은 또렷했거든. 그때 그 생각했어.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고. 총을 맞는 순간에 이미 네게 반지를 끼워줬으니까. 지현아, 날 용서해 주면 안 돼? 내가 나빴어, 이 나이를 먹고도 그렇게 유치하게 굴었으니... 내가 잘못했어.”말을 마친 나석진이 서지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긴 머리가 햇볕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으나 그는 지금 그 모습을 감상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서지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몰래 웃고 있었다. 나석진은 그 사실을 몰랐다.서지현은 반딧불이 장난감의 엉덩이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중지에 꼈다가 다
나석진은 머리를 들어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맑은 날을 바라보았다. 한 순간 눈이 부셔서 뜨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음, 그건... 사실, 가끔 날씨가 좋을 때 내 어깨도 아프기도 해. 하하, 남양은 바다에 가까워서 공기가 습하잖아. 조금만 습기가 있으면 내 어깨가 불편해져."서지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강서연이 말한 것을 떠올렸다."그는 너를 아주 좋아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정도로." 그 말에 마음이 떨렸고 따뜻한 느낌이 밀려왔다. 그녀가 지낸 세계에서는 이렇게 표현한 사람이 없었다. 어리고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따뜻하고 감동적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그의 어깨에 상처는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 그가 연기를 더하는 것도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서지현은 고개를 숙이며 웃었고, 마음의 방어선은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았다."서지현, 이번에는 날 용서해 줘." 나석진은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앞으로 절대로 내가 스스로에게 연기를 더하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너는 내 삶에서 유일한 감독이자 유일한 작가야. 네가 어떻게 말하든 나는 그렇게 연기할 거야...""그리고 이 반지." 나석진은 반지를 쥐고는 목이 마른 듯 몇 번 기침을 했다. "이건... 이건 혁준이의 마음이야. 그를 실망시키지 말아줘, 그래 줄래?"시간은 이 순간에 멈춘 것처럼 보였고 얼마나 지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서지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석진은 그녀의 약지에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는 마음이 거세게 뛰었다."너...""이 반지는 내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서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여왕이 아니에요. 근데 어떻게 이걸 껴요?"나석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흰 옷을 입고 푸른 잔디밭에 서 있었고 햇빛은 그녀의 갈색 긴 머리에 비추었다. 그녀는 마치 빛의 환상으로 보였다."서지현..." 나석진은 가벼운 웃음으로 말했다. "너는 남양의 여왕이 아니지만, 너는 영원히 내
"너희 삼촌 너무 인색하다. 아이스크림 하나로 우리를 보내려고?"최군형이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렇게 크게 뜨고 아빠를 쳐다보며 귀여운 얼굴을 지었다. 그는 아빠도 먹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여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며 웃었다. 최연준은 약간 놀랐지만 거기에 감동을 받았다. 아들이 딸보다 못하다고 누가 그랬는가! 오히려 딸보다 더 좋다! 심지어 강서연이 조금 씁쓸하게 말했다. "오, 아빠가 더 좋은가 보지? 엄마한테는 벌레를 잡아 주고 맛잇는 건 아빠를 주네."“왜? 어떻게, 아들이 나를 생각하니까 질투해?" 최군형은 아빠의 이모저모를 지켜보며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들고 큰 눈을 깜빡거리며 애원했다."조그마... 조그마!" 아들은 아빠가 조금만 맛을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미 아들의 사랑을 자랑한 후에 어떻게 아들의 이 아름다운 마음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는 너무 감동해서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없애버렸다.최군형은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했다. 방금 아이스크림이 하나였는데, 이제는 조금의 아이스크림 껍질만 남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남자는 뭐지? 입이 어떻게 그렇게 크지? 최군형은 자신의 손을 보고 다시 최연준이 어깨를 들썩이는 것을 보며 슬퍼서 울었다."연준 씨! 왜 그래요!" 강서연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급히 아들을 안았다."애기야, 울지마. 엄마가 새로 사줄게!" "나... 나도 일부러는 아니야!" 최연준이 당황하여 말했다. "방금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내게 줬잖아!" "당신 어른이 되어서 아이랑 뺏으려고 해요?" "여보..." "당신도 나석진처럼 손이 참 많이 가네요." 이 말을 하고 강서연은 아들을 안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버렸다. 최연준은 입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아내와 아들을 급히 따라 잡으려고 했다.“서연아, 나도 고의가 아니야!”“아들, 이 아이스크림은 딸기 맛이야, 사실 별로 맛이 없어! 아빠가 다른 맛으로 바꿔 줄게, 어때?”최군형은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