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거기 남겨서 아버님 조수로 삼고 싶으신가 봐.”강서연은 어리둥절했지만 얼마 안 지나 그 말을 이해했다. 전에 윤정재가 말했다.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송임월을 해치려 할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도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지켜볼 수는 없다고.이제 서지현도 있으니 지켜보는 눈이 하나 더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지현은 총명하고 반응이 빠른 데다 임기응변에도 능해 윤정재의 훌륭한 도우미가 될 수 있었다. 누군가 송임월을 해치려 해도 누구보다 빨리 이를 저지할 수 있을 터였다.“우리 아빠 대단하긴 하네! 그런데 지현이도 그러겠다고 했대요?”“맨체스터 시티에 있을 때, 지현이가 나석진 씨 호텔에서 묵었잖아? 아버님, 어머님 바로 옆 호실에서 말이야. 그때 좋게 본 모양이야. 게다가 너도 지현이에게 잘해줬고. 그게 고마웠는지 바로 승낙했대.”“하지만 임월 전하 상태가... 지현이가 다치는 건 아닐지 걱정돼요.”“송임월이 지현이에게 엄청나게 잘해준대. 자기 옷까지 꺼내서 입게 해주나 봐.”“그래요?”강서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최연준이 핸드폰을 꺼내 윤정재가 보낸 사진을 찾았다. 서지현이 송임월의 옷을 입은 사진이었다.송임월의 옷은 서지현의 몸에 딱 맞았다. 게다가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까지 더해져 언뜻 보면 젊은 시절의 송임월 같았다.강서연이 인상을 썼다. 뭔가 이상했다.“왜 그래, 여보?”“우리 아빠가 이상해요. 아빠가 누구한테 사진 찍어주는 거 봤어요? 그런데 지현이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니... 뭔가 알아낸 거 아니에요?”최연준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 느낌은 방향을 알 수 없이 그저 마음속에 떠다니기만 했다.“현수 씨, 지현이는 어릴 때부터 맨체스터 시티에서 살았어요. 송임월은 쭉 남양에 있었고요. 하지만 그 둘... 머리색이 같아요!”머리색뿐만 아니라 몸매, 심지어는 미간이 주는 미묘한 인상마저도 같았다.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했다. 서로의 놀란 눈빛 속에서 둘은 무언가를 직감했다.윤정
최연준이 피식 웃었다. 김자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최연준에게는 말하지 않고 강서연에게만 전화를 걸곤 했다. 김자옥에게 며느리는 친딸 같은 존재였고, 아들은 주워 온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최연준도 엄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김자옥의 좋은 소식은 보통 자신의 주가가 올랐다든지, 경쟁 상대의 주가가 내렸다든지, 사업을 확대했다든지, 눈엣가시가 없어졌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하지만 곧이어 김자옥이 한 말에 최연준은 머리가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나 남자친구 생겼어... 한 번 만나봐!”“네?”최연준이 화면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강서연의 반응이 빨랐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액정에 얼굴을 부딪칠 뻔했다.“뭐라고요? 남자친구? 진짜예요?”강서연이 최연준에게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최연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최연준은 고지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이혼이 그에게 상처가 되긴 했지만, 만남과 결혼은 억지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인연이 아닌 두 사람을 억지로 묶어놓는 건 누구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더군다나 김자옥과 최문혁의 결혼은 오직 가족의 이익을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갈라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최연준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아버지가 딸을 혼내듯 무거운 목소리로 질문하기 시작했다.“엄마,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신났어요? 어떤 사람인지 잘 관찰해요! 혹시 다른 걸 노리고 접근한 거면 어쩌려고요?”“이놈 자식! 내가 행복한 게 싫어?”“그런 게 아니잖아요! 억지 부리지 마요!”“너 다시 한번 말해봐!”“됐어요... 어머니, 이 사람 원래 이런 거 아시잖아요. 상대하지 마세요!”강서연이 최연준을 눌러 앉히고 웃는 얼굴로 김자옥에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김자옥이 화가 조금 풀린 듯 조금씩 진정했다.강서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의 행복이 곧 저희의 행복이에요. 하지만... 연준 씨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돼요. 대체 어떤 사람이
이 강인한 남자더러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반응을 보니 강서연의 말이 맞았다.한참의 침묵 후 최연준이 입을 열었다.“여보, 그게...”강서연이 애틋하게 최연준의 뺨을 어루만졌다.“부모님 이혼하신 후에도 내게는 잘해주셨지만, 그래도 항상 마음에 걸렸어. 은 대표님은 날 친아들처럼 대해주셨지만, 가끔 그분과 연희, 우리 아빠가 한 가족이고 난 홀로 남겨진 것 같았어. 곧 엄마도 가정이 생길 테고.”최연준이 자조 어린 웃음을 짓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이런 내가 정떨어져?”강서연은 최연준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녀의 체온과 향기는 최연준을 진정시키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특효약이었다.“바보, 다들 그래요. 당신이 왜 홀로 남겨져요? 내가 있잖아요! 내가 평생 옆에 있을게요.”“서연아...”“인생이라는 게 다 그래요. 부모님은 언젠가 떠날 테고, 자식들도 모두 자기 인생을 살 테니까요. 사람은 원래 외로운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있다면 난 외롭지 않아요! 당신은요? 당신도 나와 같아요?”강서연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최연준의 가슴을 톡톡 쳤다. 최연준은 입술을 꿈틀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깊은 키스로 마음을 표현할 뿐이었다.“흡!”갑작스러운 키스에 강서연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최연준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큰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안 돼... 오늘은 안 돼요...”“알아.”최연준이 옅게 웃었다. 그는 몽롱한 눈빛으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씩 웃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달빛이 흔들리는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며칠 뒤, 최연준과 강서연은 아들과 함께 맨체스터 시티에 도착했다. 최군형은 다행히도 비행 내내 보채지 않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는 동그란 두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제 아빠를 보고는 입을 삐죽대고 고개를 홱 돌렸다.“이 자식...”최연준이 최군형에게 눈을 부라리고는 작게 말했다.그는 기분이 썩 좋지
비록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최군형은 두 팔을 벌리고 할머니의 품에 안겼다.강인한 여전사이던 김자옥은 최군형의 귀여움에 완전히 정복돼 연신 그의 뺨에 뽀뽀하고는 조심스레 그를 차에 앉혔다. 이어 다른 쪽으로 차에 오르려는데, 누군가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겼다.“뭐야?”그녀는 의문이 가득 담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최연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군형이를 며칠만 맡아줘요. 저랑 서연이랑 다른 곳에서 놀다 올게요!”“응?”“엄마, 한 번만 도와줘요! 저 장애물을 저 서연이 옆에서 떼어줘요!”그 말에 김자옥은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최연준의 머리를 콩 때리며 말했다.“이 자식, 군형이는 네 친아들이야! 말 똑바로 못해?”“알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아무리 그래도 너무했다! 난 못해.”“네?”“서연이가 군형이를 떼놓고 어딜 가겠어? 그건 그렇다 쳐도 네 엄마 요즘 바빠서 애 봐줄 시간 없어!”“...”“아들이랑 여행하는 게 얼마나 낭만적인데! 내가...”김자옥이 말을 멈췄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여행한 적이 없었다. 최문혁과 결혼한 지 얼마 안 되고부터 그녀는 이 결혼을 깊이 후회했다. 아이를 낳고는 빨리 이혼해 버리고 멀리 떠나고만 싶었다.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심정이었다.“아, 그래요? 연애에 정신이 팔려 친손자도 못 봐준다 이거예요?”“최연준!”“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빠져있는 거예요?”김자옥은 심호흡하고는 웃으며 최연준의 어깨를 두드렸다.“곧 아저씨를 만나면 잘 좀 대해드려, 알겠지?”“네?”“맞다, 아저씨에게 넌 장애물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김자옥이 차에 오르려다 말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최연준에게 말했다.“이...”김자옥이 그런 최연준을 보며 인상을 썼다.‘왜 남양의 그 자식과 점점 닮아가는 거지? 사위가 장인어른을 닮아갈 수도 있나?’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감쌌다. 그래도 최군형을 보는 게 제일 좋았다.최연준도 차에 올랐다. 최군형이 아빠, 아빠 하며 그를 불러댔
강서연이 창문 밖의 풍경을 보며 물었다.“어머니, 여긴 집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밥부터 먹고 돌아가자!”“밥이요?”강서연은 그 말의 뜻을 곧바로 알아채고는 생긋 웃으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어머님이 쏘시는 건가요, 아니면 미래의 아버님이 쏘시는 거예요?”“얘도 참! 이제 나와 농담도 하는 거야?”“어머니, 그분은 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너무 궁금해요.”김자옥은 그녀를 흘깃 보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아직은 비밀이야.”얼마 뒤 그들이 탄 차는 김중 호텔에 도착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상징물인 김중 호텔은 호화로운 외관부터 최상의 서비스까지 온갖 좋은 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오늘 김중 호텔은 이들 부부를 위해 다른 손님들을 모두 거부했다. 호텔 이사가 직접 차 문을 열어 이들을 맞이했다.“대표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꼭대기 층으로 가시죠.”김자옥이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응. 변 선생님은 오셨어?”“네, 기다리고 계십니다.”강서연과 최연준이 눈빛을 교환했다. 곧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니, 두 사람은 궁금하기도, 긴장되기도 했다.강서연은 최연준의 손을 꼭 잡은 채 김자옥과 함께 꼭대기 층의 식당에 도착했다. 창가에 풍채가 좋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에서 우아함과 귀티가 뿜어져 나왔다.남자는 일어나 그들에게 영국 신사처럼 인사했다.김자옥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소개할게. 여긴 우리 아들 최연준, 여긴 내 며느리 강서연, 그리고 여긴 내 손자 최군형이야! 그리고 이쪽이 바로 너희 아저씨...”김자옥이 남자를 한 번 보고는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말했다.“변덕수야!”강서연이 깜짝 놀라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최연준도 어쩔 바를 몰라 했다.방금 만날 때만 해도 남자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명문가 사람 같은 것이, 김자옥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이름은... 김자옥이 열정적으로 말했다.“다들 서있지만 말고 앉아! 밥 먹자! 덕수야, 너도 앉아!”강서연이 참지 못하고
강서연이 입을 열었다.“아저씨, 저희 둘 다 아저씨의 책을 읽은 적 있어요. 연준 씨가 정말 좋아해요. 매일 몇 페이지라도 읽어야 잠이 들 정도로요.”변덕수는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사람 좋게 웃었다.“아니야, 내가 운이 좋아서지.”강서연이 생긋 웃었다.운은 실패한 자의 핑계이기도, 성공한 자의 겸손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변덕수는 겸손하고 온화한 사람인 것 같았다. 어쩐지 김자옥을 사로잡았더라니, 두 사람의 성격이 잘 맞아 가능한 일이었다.변덕수는 김자옥에게 굉장히 잘해줬다. 그녀가 최근 일 때문에 몸이 약해져 있는 걸 알고는 일부러 자극이 덜한 요리를 주문했다. 김자옥의 허리가 안 좋은 걸 알고는 쿠션을 가져와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주기도 했다.강서연과 변덕수는 몇 마디 더 나누었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좋은 분인 것 같았다. 성격도 좋았고 특히 모르는 게 없었기에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식사 도중 최군형이 칭얼대자, 강서연이 그를 데리고 나갔다. 식당 안에는 최연준, 김자옥 그리고 변덕수만이 남아있었다.김자옥은 과거의 호랑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변덕수를 바라보며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최연준은 굳은 얼굴로 앉아있다가 변덕수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김자옥에게 눈치를 주었다.“뭐 해?”“엄마, 두 분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결혼한 것처럼 굴지 마요. 변씨 집안 사람 다 됐네.”“내가 언제? 네 아빠와 이혼하기 전에도 난 최씨 집안 사람은 아니었어!”“그래요? 그럼 아저씨가 데릴사위가 되는 거예요?”“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혼인신고서 한 장 따위가 뭐가 중요해. 그리고 결혼하면 꼭 그 집안 사람이 돼야 해? 누가 뭐래도 난 김씨 집안 사람이야!”“어...”“나도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 덕수랑은 정말 서로 좋아서 만나는 거야. 난 영원히 김씨 집안 사람이야!”최연준이 멍하니 김자옥을 쳐다보았다. 김자옥은 웃으며 최연준의 손등을 톡톡 쳤다.“내 성격 이런 거 알잖아.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자신
본업을 언급하자 변덕수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음... 아예 그런 건 아니고, 로맨스 요소가 들어간 추리소설을 써볼까 해.”“진짜 재미있겠네요! 줄거리를 조금 알려주실 수 있어요?”“서연아!”최연준이 웃으며 강서연을 저지했다. 작가들은 작품의 뒤 내용을 알려주기 꺼린다는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변덕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책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이건 실화를 바탕으로 쓴 거야. 찾아봤는데, 남양의 공주가 맨체스터 시티에서 한 유랑하는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대.”“네?”강서연과 최연준은 동시에 흠칫하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그 예술가는 집시였는데, 엄청난 재능이 있었나 봐! 얼굴도 잘생겼고. 아니면 어떻게 공주의 마음에 들었겠어?”“그래서요?”“황실은 이를 반대했는데, 공주는 그 예술가를 사랑한 나머지 그와 자식까지 낳았대! 하지만 누군가 이를 모두 지워버려서 별다른 자료는 남아있지 않아. 황실의 치부라서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게 싫은가 봐.”강서연은 포크를 내려놓고 최연준과 눈을 맞췄다. 무언가를 알아낸 듯했다.공주, 유랑하는 예술가, 집안의 반대, 사생아...모든 단서가 송임월을 가리키고 있었다.“그 예술가는 어떻게 됐어요?”“죽었대. 공주가 황실에 잡혀 돌아간 뒤, 그 예술가는 배를 타고 남양에 가서 공주를 찾으려 했대. 그런데 배가 전복된 모양이야. 이건 누군가의 음모일 수도 있어. 이게 내 소설의 중요한 사건이야.”강서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변덕수가 작게 웃었다.“이건 다 소설을 쓰려고 사처에서 긁어모은 정보야. 그러니 너무 믿지는 마. 다른 작가가 지어낸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난 이 결말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내 작품에서는 다른 결말로 갈 거야.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로!”“네 스타일은 아닌데? 전에 썼던 작품은 모두 새드엔딩이었는데, 어쩌다 해피엔딩을 다 쓰고?”김자옥이 웃으며 말했다. 변덕수가 김자옥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인생 짧은데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살 수는
윤정재는 최근 남양의대에서 초청 교수로 특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송임월을 돌보러 갈 수 없었다.하지만 서지현은 그 대신 서궁에서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송지아는 가끔 대황궁의 높은 곳에 서서 망원경으로 서궁 안의 상황을 살피곤 했다. 서지현을 그 안에 가두면 송임월은 분명 미친 듯이 서지현을 괴롭힐 줄 알았다.그래서 비명을 지르거나 괴롭힘에 시달리는 서지현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녀의 상상과 정반대였다.서궁은 한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송지아는 망원경으로 질서정연한 서궁의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가끔 서지현이 마당에 나타나곤 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얼굴색이 불그스름한고 혈색이 좋아 보였다. 몸이 조금 말라진 것 외에는 전혀 괴롭힘을 당한 것 같지 않았다.송지아는 미간을 구기더니 짜증이 몰려와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송임월은 사람만 보면 미친개처럼 무는 거 아니었어? 저번에도 포크로 서지현을 찔러 유혈사태가 발생했었잖아.’“전하...”시녀가 살금살금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막 찻잔에 차를 부으려고 하자 송지아는 팔을 휙 들더니 찻잔과 받침까지 모두 내동댕이쳤다. 바닥에는 산산조각이 난 유리 조각으로 가득했다.송지아가 주먹을 꽉 쥐고는 벽을 ‘쿵’ 내리찍더니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전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건강도 생각하셔야지요.”“쓸모없는 것. 그 미련한 년 하나를 해결하지 못해?”송지아는 시녀에게 화풀이를 했다.“송임월은 왜 갑자기 얌전해진 거야? 미친 사람 아니었어? 서지현 그년을 보고서도 왜 발작을 하지 않아?”“전하, 목소리를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시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전하의 고모님이시잖아요. 그대로 이름을 부르시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럽니까...”“들으면 들으라고 하지. 어차피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는 사람인데.”“하지만 윤정재 회장님께서 치료에 성공한다면요?”송지아는 날카로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