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진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이때 핸드폰에서 작은 소리가 전해졌다.전화를 끊은 나석진의 기분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했고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지현이가 위험해요... 그녀가 위험하다고요!”나석진은 인내심을 잃고 갔다 왔다 안절부절못했다.“지금 바로 가서 구해낼 거예요.”“일단 진정해요!”최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막았다.“전화 한 통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없어요.”“매제가 모르는 게 있어요. 송지아는 왕후 손에서 컸어요.”나석진은 매우 조급해하며 이렇게 말했다.“무조건 송지아가 왕후 마마 앞에서 뭐라고 한 게 틀림없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왕후 마마께서 왜 뜬금없이 지현이를 대황궁으로 불러들였겠어요. 왕후 마마께서는 지현이가 주군지도 모르는데.”“그렇다 해도 가면 안 돼요!”최연준이 진지하게 분석했다.“저도 비록 남양에 온 시간은 별로 안 되지만 황궁이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고, 나오고 싶으면 나오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지금 무슨 명분으로 들어갈 거예요? 들어가서는 뭐라고 할 건데요? 설마 가연 왕후에게 지현이를 납치했다는 죄명이라도 씌우려고요?”“그게...”나석진이 침을 꿀꺽 삼키며 갈라진 입술을 살짝 젖혔다.“그리고.”최연준이 그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가연 왕후가 아까 그랬잖아요. 그저 지현 씨를 데려다 옷 수선을 맡긴 것뿐이라고. 진짜 왕후의 말씀이 맞다면 지현 씨는 일이 끝나면 오겠죠. 지금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갔다가 장군부도 영향받을 수 있어요.”나석진은 심호흡을 연거푸 하며 진정하려 애썼다.그도 최연준이 하는 말이 다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대황궁에 갇힌 사람이 강서연이라면 최연준이 여전히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아마 나석진보다 더 인내심이 없을 것이다.“그럼 어떡하자는 거예요?”나석진이 힘껏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내기할까요? 가연 왕후가 절대 좋은 뜻으로 왔을 리가 없어요.”최연준은 침착하게 잠깐 고민하더니 눈빛이 반짝
서지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최대한 침착하게 보이려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냈다.가연 황후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송임월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둘은 나이가 비슷했기에 어른들을 따라 연회에 자주 나가곤 했었다. 가연 왕후는 전형적인 숙녀였지만 송임월은 황실에서 놓고 보면 반항아 스타일이라 자주 사람을 놀랍게 할만한 행동을 했었다.매번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일을 저지르면 황실의 선생님들은 권력을 행사하여 채찍으로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을 혼내곤 했다.하여 송임월도 어릴 적 많이 맞았고 맞기 전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바르르 떨었던 것이다.가연 왕후는 머리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서지현의 밤색 긴 생머리를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부르르 떨렸다.이럴 수가?가연 왕후는 애써 침착해지려 했다.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가연 왕후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마른기침을 짓고는 웃으며 서지현에게 말했다.“서지현 씨,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보자고 한 건 바느질을 매우 잘한다고 들어서입니다. 윤씨 집안 아가씨에게 맞춤 제작해 준 드레스를 보니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 무늬와 설계는 궁에 있는 수냥도 비기지 못할 만큼 정교하던데요.”“왕... 왕후 마마, 과찬입니다.”서지현은 떠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를 대굴대굴 굴렸고 손바닥은 어느새 땀으로 가득 차 있었다.오늘 여기로 ‘모셔져’ 왕후를 만나려면 복잡한 예절을 따라야 할뿐더러 황실 내규에 따라 핸드폰도 몰수당해야 했다.외부와 연락이 닿을 방법이 아예 없었다.“나도 옷이 몇 벌 있는데 자수가 좀 별로인 것 같아서 지현 씨가 좀 고쳐줬으면 하는데.”가연 왕후가 웃으며 덧붙였다.“돈은 10배로 줄게요.”서지현은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올려다봤다.왕후는 자태가 고귀했고 관리를 잘 받아서 그런지 전혀 마흔 살이 넘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말할 때는 항상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우아하면서도 대범
서지현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거기 서 있었다.가연 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탁자를 돌아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그러더니 그중 한 벌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건 판금 공예 중 하나죠. 주변에 사용한 이 금실의 원자재는 우리 남양의 이웃 나라에서 오고요. 매년 생산되는 양이 적어 매우 귀하지만 부드럽고 연해서 탄탄하지 않으니 자수를 놓을 때도 배로 조심해야 끊어지지 않게 완전하게 수를 놓을 수 있죠.”이 금실은 서지현도 들은 적 있지만 이렇게 본 건 처음이었다.“이런 공예는 바느질에 대한 요구도 매우 높아요.”가연 왕후는 그런 서지현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말했다.“이 옷 한 벌 만드는 데만 해도 5에서 6개월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경험 있는 장인들이 같이 협력해야만 이 한 벌을 만들어낼 수 있죠.”서지현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서지현 씨, 나는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가연 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사람이 가끔 뭔가를 해내지 못할 땐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견식이 문제거든요.”“이 옷과도 같죠. 본적도 없고 이런 공예를 접한 적도 없으니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자수를 놓지 못하는 거예요.”“서지현 씨와 나석진 씨, 둘 사이도 마찬가지예요.”“서지현 씨도 남양에 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죠? 통역사 찾을 필요 없이?”씁쓸함이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서지현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고 손톱은 그렇게 그녀의 살을 파고들었다.하지만 서지현은 아픈 줄 몰랐다.가연 왕후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서지현은 이렇게 좋은 옷을 접하게 되었지만 어떻게 고치고 관리하는지 모른다. 나석진처럼 좋은 남자를 만났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신분 차이가 점점 드러나면서 갈등이 심해지고 생각이 엇갈리게 될 것이다.신선함이 지나고 서로 사랑이 식어도 과연 서로를 배려해 줄 수 있을까?서지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에게 나석진을 포기하라는 건
서지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예쁜 호박색 눈동자가 신념으로 가득 찼다.“서지현 씨, 고민 끝났나요?”가연 왕후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봉투에 있는 달러면 꽤 오래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남양 여권은 많은 사람들이 꿈에 그리는 물건이었다.이 두 가지를 모두 줬으니 동의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서지현은 콧방귀를 끼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이를 경멸했다.“제가 당신들처럼 아저씨를 거래의 도구로 생각할 줄 아셨나요?”가연 왕후가 깜짝 놀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요?”서지현은 봉투를 집어 들더니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제가 왕후 마마의 조건만 들어준다면 이 돈과 남양인의 신분을 얻을 수 있겠죠. 이 두 물건은 제가 원하던 거 맞아요. 하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제가 직접 따내지 아저씨와 맞바꿀 생각은 없어요!”“이게 지금...”“왕후 마마,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서지현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가연 왕후의 눈을 똑바로 바라 봤다.“하지만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절대 물러나지 않습니다.”“서연 언니가 그러더군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꼭 용기 내어 도전하라고 했어요. 셋째 도련님과 그렇게 이루어진 거라면서요.”서지현은 목소리가 떨렸지만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때 언니는 자기가 재희 제약 딸임을 모르고 있었고 비천한 신분으로 어찌 셋째 도련님을 넘볼 수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에 노력을 가했죠.”“언니가 그랬어요. 나란히 설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제일 아름답다고요. 그 사람이 좋은 건 맞지만 나도 꿀리는 데가 없어야 어울리는 거죠.”“저... 저도 아저씨와 나란히 설 수 있게 노력 중이에요. 내가 아저씨랑 나란히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 꼭 알 수 있게 노력할 거라고요.”“그러니 마마, 저는 이 조건 받지 않을 겁니다.”서지현은 봉투를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말을 이어갔다.“저는 그 어떤 걸 준다 해도 아저씨와 맞바꾸지 않을 거예요.”이렇게
이때 정전 시위가 송혁준을 발견하고 급히 그에게 인사했다.“전하!”가연이 흠칫하며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송혁준이 이미 그녀의 앞에 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인사하고 있었다,“숙모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지금이 아침은 아닌 것 같은데. 듣자 하니 젊은이들은 아침 겸 점심을 즐겨 먹는다며? 뭐더라... 브런치? 하하, 마침 디저트가 있으니, 브런치를 대접해 줄게. 이리 와서 먹어.”“아닙니다, 괜찮습니다.”송혁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서지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혁준아, 뭐 해?”“아닙니다...”“찾는 사람이라도 있어?”“서지현 씨를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저도 마침 지현 씨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요. 지현 씨 용건은 해결됐나요?”송혁준은 조금 망설이다가 이실직고했다. 가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대답했다.“응, 다 끝났어. 이미 돌아가라고 했는데.”“돌아갔다고요?”송혁준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머리를 굴렸다. 방금 정전 밖에서 영상을 찍을 때만 해도 서지현은 당당했다. 영상을 나석진에게 보내고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무리 많이 쳐봤자 20분이 채 안 될 터였다. 그런데 그사이에 서지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가연 왕후가 10여 분 사이에 한 사람을 증발시켰다고?송혁준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릴 적 엄마를 잃었기에 가연이 그와 누나를 키워주었다. 그에게 삼촌, 숙모는 친부모보다 더욱 큰 존재였다.그도 가연이 가끔은 자만에 빠지고 이기적으로 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왕후였기에 그 정도 성질은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마음씨는 착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서서 다른 사람을 해할 줄은 몰랐는데!송혁준의 주먹 쥔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숙모, 죄송합니다만, 방금 분명히 서지현 씨가 여기 있는 걸 보았는데요. 지현 씨가 나가는 모습도 못 봤고요!”“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지현 씨를 가두기라도 했다는
설마 서지현이 정말 떠난 걸까?“혁준아, 이참에 하는 말인데, 난 네 누나와 석진이가 잘됐으면 좋겠어. 그래서 서지현 씨가 제 발로 남양을 떠났으면 해. 하지만 지현 씨가 싫다고 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사리 분별은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 서지현 하나 때문에 나 씨 가문에게 밉보이는 건 너무 손해잖아?”송혁준이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연왕후는 손을 저어 그를 내보낸 뒤 홀로 곰곰이 생각하다 인상을 확 찌푸렸다.‘서지현은 어디로 간 거지? 정전을 나선 뒤 누굴 만나기라도 한 거야?’이때 그녀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여봐라! 송지아 여친왕을 불러오거라!”...서지현은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춥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흰 벽, 흰 방, 흰 카펫, 심지어 창문틀까지 모두 흰색이었다. 겨울왕국에 온 것만 같았다.남양의 여름은 무더웠지만 지금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침대 위의 여인이 천천히 일어나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여인도 서지현을 따라 몸을 웅크렸다.서지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공포감이 마음속에 꽉 들어찼다. 여인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강서연과 최연준의 결혼식에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 포크로 그녀의 손목을 깊이 찔렀던 그 여자였다!서지현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부딪히며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어...”송임월이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서지현은 당황해 어쩔 바를 몰라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송임월은 한참 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담요 하나를 들고 휘청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아, 오지 마요!”서지현은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싼 채 눈을 꼭 감았다.송임월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담요를 서지현에게 둘러주었다. 서지현은 머리가 하얘져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얼마 뒤,
송임월이 저 멀리 달려갔다. 서지현은 구석에 가만히 앉아 몸에 둘린 담요를 만지작댔다.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맨체스터 시티에 있을 적 그녀는 종종 이웃집의 집시들과 얘기하곤 했다. 그들은 점성술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들을 좋아했는데, 사람들 사이의 인연은 초자연적이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똑같이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누군가는 이유 없이 정이 가는 반면 누군가는 이유 없이 싫어지는 것이 그 예라고 말했다.마치 가연왕후와 송임월처럼 말이다.가연은 비록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지현은 그녀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반면 송임월은 서지현을 다치게 했다. 하지만 서지현은 그녀가 밉기는커녕 그녀를 위해 변호하고 있었다.‘임월 전하는 그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랬을 뿐이야.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서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도망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사실 가연왕후는 이미 그녀더러 황궁을 떠나라 했다. 서지현이 금방 정전을 나섰는데 바로 앞에서 송지아가 사람들을 이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송지아에게 예를 차리고 몸을 일으키는 그 순간, 손수건 하나가 그녀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서지현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이곳 서궁에 와 있었다.서지현은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핸드폰은 아마 정전에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서궁이었다.그녀는 밖을 쳐다보았다. 궁전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사실 감옥과 비슷했다. 문가의 경비는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삼엄했다.하지만 궁 안에는 별사람이 없었다. 시녀들은 모두 송임월이 미쳐 날뛸까 봐 무서워 문밖에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서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송임월도 돌아오지 않았기에 지금 궁 안엔 서지현 한 사람밖에 없었다. 묘한 긴장감이 그녀를 감쌌다.이때 발소리가 들리더니 시녀 한 명이 방금 달인 약을 들고 들어왔다.“당신은...”시녀가 이상하다는 듯 입을
최연준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거기 남겨서 아버님 조수로 삼고 싶으신가 봐.”강서연은 어리둥절했지만 얼마 안 지나 그 말을 이해했다. 전에 윤정재가 말했다.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송임월을 해치려 할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도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지켜볼 수는 없다고.이제 서지현도 있으니 지켜보는 눈이 하나 더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지현은 총명하고 반응이 빠른 데다 임기응변에도 능해 윤정재의 훌륭한 도우미가 될 수 있었다. 누군가 송임월을 해치려 해도 누구보다 빨리 이를 저지할 수 있을 터였다.“우리 아빠 대단하긴 하네! 그런데 지현이도 그러겠다고 했대요?”“맨체스터 시티에 있을 때, 지현이가 나석진 씨 호텔에서 묵었잖아? 아버님, 어머님 바로 옆 호실에서 말이야. 그때 좋게 본 모양이야. 게다가 너도 지현이에게 잘해줬고. 그게 고마웠는지 바로 승낙했대.”“하지만 임월 전하 상태가... 지현이가 다치는 건 아닐지 걱정돼요.”“송임월이 지현이에게 엄청나게 잘해준대. 자기 옷까지 꺼내서 입게 해주나 봐.”“그래요?”강서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최연준이 핸드폰을 꺼내 윤정재가 보낸 사진을 찾았다. 서지현이 송임월의 옷을 입은 사진이었다.송임월의 옷은 서지현의 몸에 딱 맞았다. 게다가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까지 더해져 언뜻 보면 젊은 시절의 송임월 같았다.강서연이 인상을 썼다. 뭔가 이상했다.“왜 그래, 여보?”“우리 아빠가 이상해요. 아빠가 누구한테 사진 찍어주는 거 봤어요? 그런데 지현이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니... 뭔가 알아낸 거 아니에요?”최연준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 느낌은 방향을 알 수 없이 그저 마음속에 떠다니기만 했다.“현수 씨, 지현이는 어릴 때부터 맨체스터 시티에서 살았어요. 송임월은 쭉 남양에 있었고요. 하지만 그 둘... 머리색이 같아요!”머리색뿐만 아니라 몸매, 심지어는 미간이 주는 미묘한 인상마저도 같았다.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했다. 서로의 놀란 눈빛 속에서 둘은 무언가를 직감했다.윤정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