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수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편한 자세로 고쳐 눕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첫째, 자신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면 안 돼요. 난 부귀영화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에요. 돈이야 얼마를 벌든 상관없어요. 살 수 있을 만큼 벌면 되는 거죠.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편히 일하는 거예요. 알겠죠?”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둘째, 위험한 일을 하면 안 돼요.”강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경기에서 너무 안간힘을 쓰지 말라는 얘기예요. 우린 상금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항상 당신의 안전이 보장된 조건에서만 백 프로 당신을 지지할 수 있어요.”“셋째는...”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다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여자 학생에게 당신의 근육을 만지게 하면 안 돼요!”구현수는 참지 못하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강서연은 새빨개진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파묻고는 그를 톡톡 두드렸다.“정말이에요!”그녀가 말했다.“저도 여자라 여자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아요! 아무튼... 아무튼 절대 만지게 하면 안 돼요. 정상적인 접촉은 괜찮지만 선을 넘는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당신이 약속해주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게 할 거예요! 어디도 가지 말고 그냥 얌전히 집에만 있어요!”씩씩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순간 구현수의 마음에 연민의 감정도 피어올랐다.그는 그녀를 꼭 껴안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맹세했다.“알았어. 뭐든 네 말대로 할게.”강서연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그제야 가라앉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음 짓고는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꿈나라를 거닐면서 말이다....다음날은 주말이었다.강서연은 구현수의 팔짱을 끼고 나가 쇼핑을 했다.그는 쇼핑엔 조금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꼭 그에게 그럴듯한 옷을 사주어야 한다는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이곳저곳 바삐 돌아쳐야 했다. 한동안 떠돌아다니다 드디어 남성복 브랜드숍을 찾아낸 강서연이
구현수는 의아한 얼굴로 강서연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어느새 강유빈이 매장으로 들어와 조롱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피식거리고 있었다.강서연이 구현수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려고 한 순간, 강유빈이 한 발자국 나서며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이런 우연이 있나!”강유빈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말했다.“보아하니 우리 동생 꽤 잘나가나 본데? 승진하고 월급도 올랐다며? 이제 남편을 데리고 이런 브랜드숍에도 오고 말이야!”“아참, 새로 산 아파트는 어때? 반드시 깨끗이 잘 써야 할 거야! 그 집은 아빠가 고뇌에 고뇌를 다 한 끝에 고른 거니까!”강서연은 그녀의 말에 뼈가 있음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들어 강유빈과 시선을 맞추었다. 강유빈 눈 속의 분노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맞아요. 장인어른이 우릴 위해 애써주셨어요.”구현수가 담담히 웃으며 강서연을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좋은 집을 골라주셨을 뿐만 아니라 집문서에 우리 서연이의 이름까지 넣었다니까요! 안타깝게도 누구는 이제 작업실을 다시 찾아야 할 것 같네요. 젊고 창창한 나이에 문제 있는 집에 들어갔다가 콩밥을 먹으면 안 되잖아요?”“당신...”강유빈이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반면 구현수는 한없이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유빈 따위가 뭘 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이다.“당신 둘 과하게 나대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강유빈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우리 강씨 가문이 아량을 베풀어 거지한테 남는 집 하나 던져준 것뿐이니까!”“강씨 가문 큰 아가씨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네요!”구현수는 그녀와 더는 말을 섞기 싫어 강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강유빈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강서연, 거기 서!”강서연이 뒤돌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무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나 요즘 너희 회사와 프로젝트 하나를 하고 있어.”강서연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강유빈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어
강서연이 귀를 쫑긋 올리고 신경을 곤두세웠다.뒤돌아 살펴보니 야한 차림의 여자가 구현수에게 매혹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 손으론 와인잔을 살랑살랑 흔들었고 다른 한 손으론 치마 아래 자락을 확 찢어 새하얀 다리가 드러나게 했다.강서연은 돌연 그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서빈?”그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강유빈은 어디든 저 친구와 함께 다니는구나...예전 학창시절 서빈은 늘 강유빈과 함께 강서연을 괴롭혔었다. 그 후 성적이 바닥을 치는 데다, 술집을 드나드는 것까지 밝혀져 퇴학을 당했다.서빈은 강주시에서 평판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도 강유빈이라는 뒷배를 등에 업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으스대고 있었다.강서연은 답답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객 접대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단호히 방향을 돌려 구현수에게로 걸어갔다.“혼자 술 마시면 재미없잖아요?”서빈이 얇은 허리를 흔들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우리 같이...”“나랑 같이 마시는 게 어때?”돌연 한기가 가득 실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서빈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강서연의 날카로운 눈매가 눈에 들어왔다.구현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이어 흥미롭다는 듯 씩 웃음을 지었다.강서연은 등으로 구현수를 막아서고는 정면으로 서빈의 도발적인 얼굴과 마주하며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나 기억 안 나? 학창시절엔 매일 내 숙제를 빼앗아 베끼더니 이젠 내 남자까지 빼앗으려고?”“어머, 강서연 동생이네!”서빈이 손으로 입을 막고 쿡쿡 웃어댔다.“그게 무슨 말이야? 난 그냥 이 멋진 남자분이 알고 싶었을 뿐인데 네 남자를 빼앗으려 한다니. 거기다 조금 전 넌 여기에 없었잖아. 내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알겠어!”“그럼 이젠 알겠지?”강서연이 그녀를 노려보았다.“알았으면 얼른 가!”구현수는 얌전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눈앞의 이 여자는 작은 주먹을 꼭 움켜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의연한 표정과 단호한 태도로 서빈
그녀는 구현수가 넓고 따뜻한 품에 자신을 껴안아 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일분일초가 속절없이 흘러감에도 그녀가 기대하는 안정감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현수를 쳐다본 순간, 구현수는 서빈을 향해 걸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강서연의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봤죠? 남자는 역시 현실적이라니까요.”누군가 피식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서빈 씨가 평판이 좋지 않긴 하지만 강서연 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부자잖아요.”“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유혹당하는 남편을 지켜만 보고 있다니... 강서연 씨 너무 불쌍해요. 평소 남편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더니 지금은...”“이래서 남자들을 너무 오냐오냐해주면 안 된다니까요!”강서연은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저 멍한 얼굴로 제자리에 굳어있을 뿐이었다.“현수 씨, 당신...”“여보, 하마터면 서빈 씨를 다치게 할 뻔했잖아.”구현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서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괜찮아요?”그 말에 서빈은 환희와 불안감이 섞인 얼굴로 구현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토록 멋진 분이 걱정해주는데 당연히 괜찮죠!”서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랑 춤 한 번 추실래요? 손을 잡아보니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구현수!”강서연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구현수는 그런 강서연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서빈을 밀어내기는커녕 도리어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이에 강서연을 보는 서빈의 눈동자엔 득의양양함이 한층 더 짙어졌다.“서빈 씨, 제 손이 좋아요?”구현수가 여자를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한 감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서빈은 이미 그에게 푹 빠져버린 듯했다.“당연하죠!”“예전 이 손으로 누군가를 죽였다 해도요?”순간 서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구현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하늘 높은 줄 모르고
파티장은 다시 원래의 질서를 되찾았고 사람들은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말이다.하지만 다들 몰래 소곤소곤 서빈을 비웃고 있었다.구현수는 강서연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강서연은 춤에 서툴렀지만 구현수가 이끌어주니 어색함 없이 부드럽게 그와 함께 음악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선남선녀의 춤이 끝나니 이곳저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서빈은 여전히 분노에 부들거리고 있었다. 강유빈은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그녀를 흘겼다.“너 정말 쓸모없어!”“강유빈, 너...”“너 스스로 마당발이라고 자랑했잖아? 남자들이 너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며?”강유빈이 씩씩거리며 말했다.“구현수 한 놈도 처리하지 못하면서! 사람을 죽였다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겁을 먹다니! 쓸모없는 게 아니면 뭐야!”서빈이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전에 그녀는 강유빈과 반드시 강서연에게 창피를 줄 거라 약속했었다. 하지만 창피를 당한 건 오히려 자신이 되었다.그녀는 처음 구현수를 보았을 때 그의 준수한 외모에 본능적으로 마음을 빼앗겼었다. 하지만 싸늘하게 웃는 얼굴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순간, 눈동자에 비친 살기, 입꼬리에 깃든 뼈까지 시리게 만드는 한기,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는 압박감 모두가 그녀를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들었었다.그녀가 미쳤다고 살인범을 유혹하겠는가!“강유빈.”한동안 흐르던 침묵을 깨고 서빈이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말했다.“우리에게 아직 역전의 가능성은 있어.”강유빈이 분노에 차올라 먼 곳에 있는 강서연을 노려보았다.“어떤 방식이든 강서연을 눌러버리기만 하면 목적 달성 아니야?”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서연의 남자는 별 볼 일 없지만 네 주변의 남자는 다르잖아!”강유빈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무슨 뜻이야?”“너한텐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잖아!”순간 강유빈의 얼굴에 긴장감이 차올랐다.이어 서빈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한 장의 사진을 찾아냈다.“유빈아, 이것 봐!”
서빈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핸드폰을 흔들었다. 핸드폰 속 화면엔 확실히 강유빈과 남자 한 명의 모습이 찍혀있었다.“다들 처음 보죠? 이분이 바로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에요! 강유빈은 당시 도련님의 환영 파티에 참석한 거고요!”“오성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요?”“당연하죠!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귀공자세요!”사람들은 모두 강유빈에게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다.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매체에 공식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하여 그를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숫자가 적었다.그런데도 강유빈은 최씨 가문 파티에 초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셋째 도련님과 사진까지 찍었다고 한다.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감탄과 부러움의 목소리가 파티장을 가득 채웠다.강유빈은 본래 서빈을 막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따지는 사람이 없으니 이대로 이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그날 밤 강서연이 대신 들어간 게 뭐 어떻단 말인가. 강서연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 또한 상대할 방법은 있다!강유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저 멀리 강서연과 구현수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그녀가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걸어가 서빈에게 눈빛을 보냈다. 서빈은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사진을 강서연에게 들이밀며 비아냥거렸다.“강서연 동생, 이날 밤 너도 갔지? 그런데 왜 도련님과 찍은 네 사진은 못 봤지?”강서연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강유빈을 쳐다보았다.“사생아답게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는 거지.”강유빈이 말을 보탰다.“셋째 도련님 같은 고귀한 분이 어떻게 저런 비천한 사생아와 사진을 찍을 수가 있겠어?”강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날 밤 넌...”“왜? 설마 너 혼자 들어간 줄 알았어?”강유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널 마중 나온 건 최씨 집안의 개였지만, 나한텐 셋째 도련님이 직접 나오셨더라고!”구현수는 흠칫 놀라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남자의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냉랭함은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온 소진명까지도 섬뜩해지게 만들었다.“소 대표님, 보세요!”누군가 핸드폰을 그에게 건네주었다.“이건 강유빈 씨와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조금 전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맞아요!”소진명이 강유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강유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기세등등한 모양새로 일관했다.소진명은 처음엔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경직됨을 느꼈다.“아가씨.”소진명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 사람이 정말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에요?”그의 눈빛을 마주한 강유빈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맞... 맞는데요?”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곳엔 최연준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든 얼굴에 철판을 깔고 거짓말을 이어갈 생각이었다.“그날은 도련님의 환영 파티였어요. 우리 집 식구들 모두 오성에 초대되어 갔죠.”강유빈이 새로 한 매니큐어를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말했다.“그날 파티는 정말 굉장하더라고요. 세계 각지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었어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이었어요!”“소 대표님은 가본 적 있어요?”강유빈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소진명의 강주에서의 세력은 작지 않다. 하지만 강씨 집안에 비해선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러니 당연히 최씨 가문과 연이 닿지 못했을 것이다.역시 소진명은 허리를 굽히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아가씨의 말씀이 맞아요. 저의 능력이 부족해 아직 도련님을 만나 뵙지 못했어요.”“하지만...”소진명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몇 년 전 오성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요. 마침 최씨 가문 산하 명황세가 호텔에 머물렀어요. 그때 제가 똑똑히 봤는데 사진 속 아가씨와 함께 있는 사람은 당시 제 주차를 도와주었던 문지기였어요!”강유빈은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소진명의 얼굴에 걸려있는 미소는 점점 더 짙어져 갔지만 그 의미는 갈수록 예측
당신들... 입 다물어요!”강유빈이 화를 벌컥 내고 바깥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하지만 몸을 돌린 순간 조심하지 않아 하이힐이 꺾이는 바람에 발목을 접질렸다. 극심한 고통에 눈물까지 찔끔 차올랐다.강서연은 그녀의 옆에 서서 무정한 눈빛으로 그 초라한 모습을 쳐다보았다.자업자득이다.강서연은 강유빈을 동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됐든 강유빈도 강 씨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두 사람은 한 몸이나 다름없다. 이런 가족을 두었다는 건 당연히 수치스러운 일이다.강유빈은 자리를 뜨기 전 매서운 눈빛으로 강서연을 노려보았다. 이는 얼마나 꽉 깨물었는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소진명이 덤덤히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작은 오해였을 뿐이에요. 이제 다들 파티를 즐기세요!”파티는 계속하여 진행되었지만 강서연은 더는 머무르고 싶지 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소진명이 그녀를 불러세웠다.“강서연 씨, 잠시만요.”강서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소진명은 그녀의 손에 여전히 에메랄드 반지가 끼워져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가 이어 그녀 옆에 서 있는 구현수를 보며 말했다.“소개 안 해줘요?”강서연은 하는 수없이 구현수의 팔을 잡아당기며 소개했다.“제 남편 구현수 씨예요. 여보, 이분이 바로 내가 말했던 소 대표님이에요. 진광 그룹 소진명 대표님.”소진명이 손을 내밀었지만 구현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소진명이 나타나는 순간 구현수는 어딘가 께름칙함을 느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구현수가 뒷짐을 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경계심을 높였다.소진명의 손이 구현승에게 거절당하고 방향을 잃고 허공에 머물렀다. 그는 몇 번의 헛기침과 머리를 쓸어 넘기는 동작으로 머쓱함을 감췄다.“여보.”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저번 성소원이 저를 곤경에 빠뜨렸을 때 소 대표님께서 나서서 제 이 에메랄드 반지가 진짜임을 증명해주셨어요. 또한 반지의 귀중함도 인정해 주셨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