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찬혁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표정이 스쳤다.“안 그럼 내가...”그의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곽보미는 대장부처럼 가슴을 두드렸다.“괜찮아, 나 혼자 할 수 있어! 너는... 걱정 말고 돌아가!”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불빛으로 들어갔고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 남자의 눈에서 한 가닥의 걱정하는 마음을 본 것 같았다...그가 방금 하지 못한 말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녀의 보디가드가 되어주겠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곽보미는 머리를 힘껏 흔들며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자기한테 말했다.겨우 유찬혁을 마음에서 뽑아냈는데 다시 심을 수는 없다.곽보미는 그가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성설연만 있을 것이다.곽보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주아와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고 술집에서 때때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여배우들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춰서 이곳을 대형 예능 현장처럼 만들었다.하지만 아무리 대형 예능이라도 이렇게 많은 스타를 동시에 섭외할 수는 없을 것 같다.유찬혁은 가볍게 웃으며 지켜봤다. 곽보미는 호소력이 있었고 그런 호소력은 그녀의 독특한 인격 매력에서 나왔다.부정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사람들은 후광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유찬혁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고 바텐더 두 명이 소곤거리다가 그가 최씨 가문에 큰 공을 세운 그 유명한 변호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한 잔을 만들어 그의 앞에 가져다주었다.“유 변호사님 죄송해요.”잘생긴 남자가 미안하게 말했다.“오늘 여기 대절되어 이거밖에 안 남았어요.”유찬혁은 웃으며 술을 받아왔다.“유 변호사님도 곽 감독이 초대해서 왔나요?”“아니요.”유찬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여기서 보미를 기다리는 게 방해가 되진 않겠죠?”“괜찮습니다. 사진만 찍지 말아 주세요!”유찬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술을 마시며 사람들 사이로 곽보미를 바라보는데 시선이 모호해
“안녕, 아직 안 갔어요?”주아는 예쁜 보라색 모피 망토를 걸치고 안에는 은색 슬립 드레스가 반짝반짝 빛나며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유찬혁은 잔을 들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주아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다가 갑자기 시원한 웃음소리를 냈다.유찬혁은 어안이 벙벙했다.“주아 씨,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주아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말했다.“갑자기 곽 감독이 왜 당신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요! 느낌 있게 잘 생겨서 정말 귀여운 것 같아요!”유찬혁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사실 주아가 말하는 것도 꽤 일리가 있다. 최연준보다는 그가 한 수 아래지만 최연준과는 다른 부류에 속한다.최연준은 사람들을 호소할 수 있는 그런 강한 포스와 항상 차가운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다.반면 유찬혁은 친화력이 좋아 최연준의 각진 모습보다는 선이 부드럽고 또 유명한 변호사로서 나름대로 박학다식한 기질을 지니고 있어 온몸에 신사적인 우아함을 풍기고 있다.이런 남자를 만나면 어느 여자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가!주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곽 감독만 아니었으면 나는 진작에 당신을 꼬셨을 텐데... 내 손바닥 안에서 도망 못 가게 할 수 있어요! 변호사님은 정말 내 이상형에 딱 맞는 남자예요!”“그건...”유찬혁이 어색해하며 웃었다.‘잠깐! 방금 뭐라고 했지? 곽보미를 봐서?’유찬혁은 갑자기 심장이 요동쳤고 한 박자를 놓친 것 같아 숨이 미세하게 멎기까지 했다.“유 변호사님, 정말 느끼는 게 없어요?”주아는 외계인을 보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곽 감독이 당신에 대한 마음은 정말 하늘과 땅도 다 알고 있어요! 전에는... 성설연 그 계집애만 계속 감싸고 있었잖아요. 정말...”주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유찬혁이 잘생긴 얼굴을 가진 게 다행이지 안 그러면 진짜 그를 두드려 팰 수도 있다.유찬혁은 마음이 복잡했고 한동안 이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지금... 보미
곽보미는 자신이 취한 나머지 환각이라도 본 줄 알았다.‘이건 그냥 아름다운 꿈이겠지? 깨고 나면 또 처량한 현실을 마주해야겠는데 그럴 바엔 이 꿈을 빨리 깨는 게 나아.’곽보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해져오는 고통에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유찬혁을 힘껏 밀어버리고 똑바로 서 있으려 애를 썼다.“괜찮아, 정말. 다른 바쁜 일이 있는 거 알아.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갈 수 있긴 뭘 갈 수 있다고 그래? 왜 거절하는 건데?”유찬혁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도 술을 조금 마신 바람에 어떤 말은 술기운을 빌려서 한 말이었다.“보미야,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 나...”“그 손 놓으시죠?”문 쪽에서 누군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찬혁과 곽보미는 동시에 멈칫했다. 어두운 불빛 사이로 기다란 윤곽이 나타났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곧이어 어떤 힘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 바람에 곽보미는 그 사람의 곁으로 잡아당겨졌다.“유 변호사님, 지금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석진 씨.”곽보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그를 불렀다.유찬혁은 뭐라 얘기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불끈 쥐었다.“오늘 보미 씨와 약속했어요. 회식이 끝난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요.”나석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러니 변호사님은 걱정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세요. 제가 보미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게요.”나석진은 곽보미에게 눈짓을 보낸 후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하지만 곽보미의 마음속에 옅은 슬픔이 밀려왔다. 마치 파도가 모래사장을 치듯 가슴이 조금씩 아팠다.그녀는 자신의 강한 의지력으로 이 꿈에서 깰 줄 알았지만 결국에는 외부의 힘을 빌렸다.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간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유찬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 영원히 멈춰있으면 얼마나 좋을까?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쳐다보는 나석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 말
최연준과 강서연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유찬혁과 나석진이 로비의 의자에 앉아있었다.두 사람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고 가운데 낀 곽보미가 난감한 기색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강서연을 발견한 순간 마치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후다닥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최연준은 어리둥절해하며 유찬혁을 째려보았다.“변호사가 쌈박질을 해?”유찬혁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이 올라오니 창피한 짓도 서슴없이 했다.평소 경찰서에 와서 사람을 데려가는 건 늘 그의 일이었는데 오늘은 최연준이 다른 변호사와 함께 그를 데리러 왔다.최씨 가문 변호사 군단의 일 처리 효율이 아주 높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절차를 끝내버렸다.몇몇 변호사들은 유찬혁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러고는 최연준과 인사를 나눈 후에 경찰서를 나섰다.강서연도 이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곽보미를 위로하고는 재빨리 나석진에게 다가가 얼굴을 살펴보았다.“다행히 괜찮네요.”강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얼굴을 다치진 않아서 스케줄은 문제없겠어요.”“뭐?”나석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이 오빠가 다른 데 다쳤는지는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얼굴만 걱정하는 거야?”“당연하죠.”강서연이 피식 웃었다.“오빠 얼굴이 비싼 얼굴이잖아요. 회사에서 비즈니스 행사를 얼마나 많이 잡았는데 참석하지 않으면 위약금이 엄청나단 말이에요. 그리고 유 변호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아요. 절대 오빠가 다칠 정도로 때릴 분이 아니에요.”“허!”나석진은 유찬혁을 힐끗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최연준은 원칙을 따져야 하는 이 중요한 상황에서 당연히 친구의 편을 들 리가 없었다. 다짜고짜 유찬혁의 머리를 때리며 째려보았다.강서연이 임신한 바람에 가뜩이나 우울한데 유찬혁이 때마침 사고까지 쳤다.“얼른 가자. 계속 창피하게 여기에 있을 거야?”최연준이 째려보자 유찬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서연 씨의
그때 곽보미가 나서서 호통쳤다.“두 사람 약 잘못 먹었어요?”나석진과 유찬혁은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며 뭐라 얘기하려다가 다시 눈짓을 주고받고는 꾹 참았다. 이런 상황에 누가 먼저 입을 열었다간 괜히 불똥이 더 튈 게 뻔했다.“됐어요. 여기서 그만 싸워요.”곽보미는 두 사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면서 손을 흔들었다.“얼른 가요, 얼른.”“알았어요.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나석진이 한발 먼저 그녀 옆에 섰다. 그 모습에 유찬혁은 잠깐 멈칫했다.‘난 왜 하필 이럴 때 반응이 이렇게 늦은 거야?’“보미야, 내가 데려다줄게.”유찬혁이 웃으며 말했다.“경찰서에서 밤새 고생하느라 아침도 못 먹었잖아. 일단 아침부터 먹으러 가자... 학교 앞에 있던 그 죽집 어때? 네가 예전에 좋아했잖아.”나석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유치하긴. 지금 두 사람의 추억으로 날 이기겠다, 이거지?’“변호사님은 아무래도 먼저 사무실로 가서 에이스 변호사의 이미지부터 회복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쨌거나 변호사 바닥이 그리 큰 것도 아니고 어젯밤의 위대한 공적이 한순간에 쫙 퍼져나가면 어떡해요?”“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유찬혁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변호사 업계는 연예계와 달라서 이깟 작은 일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아요. 허, 다들 바쁘고 또 머리를 써야 돈을 벌거든요. 누구처럼 얼굴만 믿는 게 아니라.”“네, 그렇군요.”나석진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바쁘신 분이니 보미 씨는 제가 데려다줄게요. 보미 씨와 먼저 호텔에 가서 뭐 좀 먹으면서... 대본에 관한 것도 상의 좀 하고요.”“아 참!”곽보미도 그제야 문득 떠올랐다.“보충해야 할 신이 있다고 얘기했었죠? 하지만 어떤 앵글로 할지, 어떻게 편집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그럼 천천히 생각해요.”나석진이 우쭐거리며 웃었다.“어차피 오늘 스케줄도 없어서 종일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석진 씨, 아무리 그래도...”유찬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석진은 곽보미의
가슴이 움찔한 최연준은 바로 최연희를 뒤따라갔다.강서연은 임신한 터라 빨리 뛸 수 없어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병원 건물 앞에 멈춰 선 최연준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이 건물에는 정신과밖에 없었다. 그리고 심리 상담실이 있었는데 평소 오성의 유명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마음속의 답답한 말들을 꺼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한다.강서연은 깊은 수심에 잠겼다. 최연희가 정신과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게 진학 시험 때문이 아니라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메시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진학 시험은 줄곧 신석훈이 책임져왔다. 평소 최연희도 수험생 스트레스는 별로 받지 않아 성적도 늘 상위권을 유지하였기에 공부 때문은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그 메시지밖에 없다.강서연은 바로 최연준에게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 속에서 뭔가를 알아낸 듯했다.“여보.”강서연이 그를 덥석 잡았다.“지금 쳐들어가면 안 돼요.”최연준이 발걸음을 멈췄다.‘그래. 흥분한 바람에 머리도 잘 안 돌아가네.’지금 이때 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최연희는 더욱 꼭꼭 숨길 것이고 그에게 한마디도 솔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지난번 최연희는 신석훈네 병원의 정신과를 다녔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생겼는데도 가장 먼저 신석훈을 찾지 않았다는 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연준 씨.”강서연의 목소리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한마디 한마디 귀에 또박또박 박혔다.“아가씨 문제는 분명 인지석과 관련 있어요. 문제의 해결은 반드시 저지른 장본인이 해야 해요. 인지석만 찾아낸다면 모든 걸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지석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몇 달 동안 감감무소식이었고 찾으러 보낸 사람들도 그에 관한 어떤 소식도 알아내지 못했다. 유일한 단서라고는 인지석이 변장술에 능하다는 것이다. 밖에서 다니면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강서연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경수 아저씨에게 조금 더 신경 써달라고
분위기가 갑자기 무르익었고 주변의 공기마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주아의 귀여운 얼굴이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색다르게 보였다.유찬혁의 얼굴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주아가 가까이 다가가면 자꾸 옆으로 피한 바람에 몸이 기울다 못해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주... 주아 씨.”유찬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제발 진정 좀 하면 안 돼요? 진정해요...”주아는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고 시무룩한 얼굴로 술을 마시며 툴툴거렸다.“정말 재미없네요.”유찬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뭘 그렇게 긴장해요?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요?”주아가 피식 웃었다.오늘 그녀는 몸에 붙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두운 레드 톤에 수놓아진 큼지막한 금색 꽃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옷깃에 풀어놓은 단추 사이로 하얗고 기다란 목이 드러났고 가끔 쇄골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고혹적이었다.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유찬혁의 모습만 보면 주아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방금 그건 다른 새 작품의 한 신인데 어때요? 오케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그게...”유찬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거짓말 아니에요. 이것 봐요, 아직 촬영 때 입던 옷도 갈아입지 않았잖아요. 이따가 다른 신도 촬영하러 가야 해요.”“그래요.”유찬혁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랄게요.”주아가 사랑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사실 그녀도 유찬혁의 마음속에 아직 곽보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성설연에게 속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뿐이다.평소 예리하던 변호사도 사랑 앞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감정은 절대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되고 일단 건드리게 되면 푹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주아는 어깨를 들먹였다. 유찬혁에게 호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보다는 일이 더 좋았다. 그리고 그녀가 남자를 고르는 기준은 돈이 많고 얼굴도 잘생긴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없어
“나...”유찬혁은 입술을 적시며 멋쩍게 웃었다.“여긴 술집이야. 너 같은 학생들이 올 수 있는 데가 아니라고. 아까 널 본 것 같아서 따라온 거야... 너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 오빠는 아마 오성 전체를 다 뒤집을걸?”“나 이젠 성인이야...”최연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학업 스트레스도 많은데 나도 스트레스 좀 풀면 안 돼? 누가 학생은 술집에 가면 안 된다고 했어?”“알았어, 알았어.”유찬혁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럼 너무 늦게까지 놀진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알았어. 안 그래도 지금 가려던 참이었어.”최연희는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골목 건너편의 큰길로 폴짝폴짝 뛰어갔다.유찬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말투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애써 밝은 척하는 모습이긴 했지만... 아무튼 뭔가 달랐다.그는 자신이 괜한 생각을 했길 바라며 아무래도 신석훈에게 얘기하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다들 신석훈이 최연희의 남자친구가 되길 바라니까.하여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대리운전을 부른 후 신석훈에게 문자를 보냈다.그 시각 술집과 멀지 않은 어느 한 거리에서 최연희는 책가방을 꽉 껴안은 채 눈앞의 사람을 보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네... 네가 하라는 거 모두 다 했어. 그러니까 이젠 그 물건 돌려줘.”“다 했다고?”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붉은 석양이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고 병적에 가까울 정도로 몸이 말라 있었다. 하지만 모자 밑에 드러난 눈빛에는 음험함과 잔인함이 섞여 있었다.최연희가 당황해하며 대답했다.“다... 다 했어. 정말이야. 네가 하라는 거 다...”그런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그녀의 책가방을 확 빼앗아 갔다. 화들짝 놀란 최연희가 소리를 지르며 다시 빼앗으려 했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책가방 안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난잡한 책 사이에 약이 담긴 작고 투명한 약봉지가 있었다.“허, 여기에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