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임나연은 당황했다.“걔가 사람도 때린다고?”“맞아요! 이 계집애가 사람들 앞에서만 불쌍한 척하고 뒤에서는 완전 딴사람이에요! 그 여자 리더를 아주 외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CCTV가 없는 곳에서 매섭게 뺨을 몇 대 때렸대요! 그래서... 아가씨, 우리는 생일 파티에서 미리 준비할 수 있어요!”“어떻게 하는데?”“서연이를 아무도 없는 곳으로 끌고 가서... 아가씨께서 참아줘야 해요. 혼자서 자기 뺨을 몇 대 때리고 제가 사람들을 거기로 유인해 갈게요. 다들 서연이가 때렸다고 믿을 거예요!”“이건...”임나연은 들을수록 이상하게 느껴졌다.‘왜 내 손으로 내 뺨을 때려야 하는 거지? 고육책?’고육책이라고 하더라도 임나연은 자신이 출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게다가, 강유빈의 계략에 대해서는, 그녀는 이미 백 퍼센트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계책은 오히려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만일 성공한다면?’“아가씨, 그때 가서 꼭 연약한 척을 해야 해요!”강유빈은 말만 번지르르했다.“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서연이가 악녀라는 것을 각인시켜 줘야 해요! 그러면 사람들도 아가씨 편이 될 거예요.”임나연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이 방법이 좋기는 한데... 강유빈.”임나연은 자세를 바로잡았다.“우리의 최종 목적은 강서연을 생일파티에서 망신시키는 거잖아. 강서연의 본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까발리는 거야, 맞지?”강유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 목적만 달성되면 중간 과정이 어떻든 상관이 없겠네.”“아가씨, 그 말씀은...”“자기 뺨 때리는 임무는 네가 맡아!”강유빈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사실 방금 임나연한테 이 방법을 알려 주었을 때도 약간의 복수심이 들어가 있었다. ‘감히 들어오자마자 내 뺨을 때려? 아직도 얼굴 반쪽이 얼얼한데!’임나연이 이렇게까지 똑똑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뺨 때리는 것을 거절하다니!’“아가씨!”강유빈은 최선을 다해서 설명했다.
이날은 강서연이 쉬는 날이다.쉬는 날에도 그녀는 쉴 새 없이 바빴다. 보고서와 계획안들이 눈송이처럼 끊임없이 메일로 날아 들어왔고, 이른 아침부터 그녀의 핸드폰과 컴퓨터는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박경실은 강서연에게 세 번째 아침밥을 데워 주었다.“서연 씨, 아침 드세요!”박경실은 마음이 조급했다.“지금 벌써 9시예요. 더 끌다가는 점심시간이에요!”강서연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받아넘겼다.“네... 알고 있어요. 일단 여기 두세요. 계약서에 아직 수정해야 할 게 몇 개 남았어요...”“조금 전에 올라 올 때도 똑같이 말했어요!”박경실은 입을 삐죽삐죽하고 그녀 앞에 다가서서 죽을 들어 건네주었다.“이번에는 도련님께서 직접 요구하셨어요. 다 먹을 때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했어요!”“네?”강서연은 잠시 반응하다가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뗐다.“연준 씨는... 집에 없어요?”“없어요!”박경실이 웃으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떠날 때 말했잖아요. 오늘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처리해야 한다고!”“이런, 깜빡했네요...”“잊은 게 아니라 너무 바빠서 못 들은 거예요!”강서연은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가끔가다가 너무 바빠지면 귀도 닫은 상태가 되는 게 사실이다.그녀는 박경실 손에서 죽을 받아왔다. 온도도 적당하고 단맛도 적당하며 대추와 곡물의 향까지 들어있다.그녀는 정말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박경실이 또 계란말이를 건네주었는데 그것도 몇 입 만에 깨끗이 해치웠다.박경실은 계속 옆에서 보고 웃고 있었다.“이렇게 잘 먹는데... 설마 좋은 소식이 있는 건 아니겠죠?”강서연은 이 말에 목이 메어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아주머니, 농담하지 마세요! 생리가 막 끝났는데 무슨 좋은 소식이 있겠어요!”“그래요...”박경실은 조금 실망했다.그녀는 두 사람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아들 낳는 부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휴, 나의 도행이 아직 부족한 모양이구나. 이 아들 낳는 부적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아직도 소
강서연은 순간 당황했다.그녀는 인지석이 이런 요구를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강서연은 쉽게 대답 못 했다. 지금 최연희한테는 이 남자가 세상 전부였다.그래서 최연희를 무안하게 할 수 없었다.“지석 씨.”강서연은 웃으며 말했다.“어떤 그림을 좋아하세요?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 가져가서 천천히 감상하시면 남의 집 여기저기서 사진 안 찍으셔도 되겠죠?”인지석의 눈동자에 먹구름이 스쳤다.그는 약간 복잡한 표정을 한 채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강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조금 전 그녀가 한 말은 얼핏 들었을 때 우호적인 것 같은데 ‘남의 집’ 에 강조했다. 조금만 돌려 생각해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다.인지석은 고개를 들어 강서연과 눈이 마주쳤다.‘이 여자는 생각했던 것만큼 연약하지 않네. 까만 눈동자에는 결연함과 위엄이 깃들어 있고 최연준한테서 느낄 수 있는 기세까지 갖췄구나.’인지석은 잠시 생각하고 핸드폰을 거두었다.“호의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이 그림들은 모두 도련님께서 좋아하는 것일 텐데, 저 같은 하인이 어떻게 주인집 물건을 가져갈 자격이 있겠어요.”“지석 씨...”최연희는 그의 곁으로 걸어가서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그녀가 지금 인지석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강서연은 알고 있다.강서연은 근심이 가득했다.사랑에 빠진 여자를 속이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지석 씨, 말이 심하시네요.”강서연이 말을 했다.“사실 연준 씨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게다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최씨 가문과 당신은 그저 고용 관계일 뿐이에요. 월급 받고 일을 하는 건데 하인 주인이라고 오해하면 안 돼요!”“그래도 우리 집안의 팔자가 좋아서 최씨 가문과 같은 고용주를 만날 수 있는 것이에요!”인지석은 웃으면서 최연희를 바라보고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 앞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 줬다.소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부끄러움이 보였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으면서 행복해 보였다.그러나 강서연의 마음에는 시종일관 응어리가
“국물 끓이는 솜씨도 일품이에요.”강서연은 허풍을 떨었다.“서연 씨가 좋게 봐줘서 그런 거예요!”박경실은 인지석과 가까운 자리에 국솥을 올려놓았다.그를 힐끗 쳐다보고 박경실이 말했다.“음식이 다 나왔어요! 아참, 요즘 젊은 사람들끼리 식사하기 전에 인증샷 찍는 것이 유행이라고 들었는데요? 다들 같이 찍을래요?”“맞아요!”최연희는 즉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주머니가 해준 밥이 이렇게 먹음직스러운데 당연히 찍어야죠!”“지석아, 아가씨가 직접 찍게 하지 말고 네가 찍어드려라!”인지석은 얼굴빛이 변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박경실은 그의 악랄한 눈빛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그러나 그 악랄함은 잠깐도 지속되지 않았다.박경실이 다시 정신을 차리자, 인지석은 또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소년으로 돌아왔다.“미안해요, 제 핸드폰이 자주 먹통 돼서요...”“그래요?” 강서연은 웃으며 말했다.“아까 사진 찍을 때는 괜찮은 것 같던데요.”인지석은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핸드폰을 꺼냈다.그러나 바로 이때 그는 최연희를 한번 봤다. 최연희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둘러댔다.“됐어요. 먼저 밥 먹어요!”“왜요!”박경실은 앞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다들 드세요. 제가 찍어줄게요! 제가 나이는 좀 많지만 그래도 유행을 잘 타는 사람이에요!”그녀는 인지석의 핸드폰을 가지려고 했지만, 인지석이 안 놓아주는 느낌을 분명히 느꼈다.인지석이 힘을 꽉 써서 핸드폰을 쥐고 있어 손등에 핏줄까지 튀어나왔다.박경실은 속으로 냉소했다. 두 사람이 서로 안간힘을 쓸 때, 박경실은 갑자기 손을 놓았다!그는 그녀가 이런 수단을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핸드폰은 순간 펄펄 끓는 국물에 떨어졌다. 국물은 튀어나와 식탁보를 더럽혔고 인지석의 마음도 같이 뒤흔들었다.분위기가 갑자기 얼어붙더니 집안은 조용해졌다.강서연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었고 박경실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녀는 인지석이 화가 났지만 애써 화를 억누르며 제법 자연스러운
강서연이 이렇게 말하자 박경실도 이상을 의식하고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서연은 계속해서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발견했는지 모르겠는데 인지석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먼저 연희 씨를 보고 나서 연희 씨가 입을 열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아요.”“맞는 거 같아요.”박경실은 조금 전 상황을 돌이켜봤다.“방금 핸드폰을 꺼내게 했을 때, 인지석이 연희 씨를 한 번 쳐다보더라고요. 연희 씨 얼굴색이 변하더니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어요.”“연희 씨 표정이 어떤 것 같았어요?”“그게... 두려움?”박경실은 설명할 수 없었다.강서연도 같은 느낌이다.최연희는 인지석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이것은 아마도 인지석이 실제로는 최연희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박경실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서연 씨, 이 사실을 사모님에게 빨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은미연에게 인지석이 위험하다고 알려줘야 할지... 고민이다.섣불리 가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적절하지 않다. 또 너무 성의 없게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고 심각하게 말하다가 만약 오해라면 또 어떻게 해야 할까?강서연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 일은 반드시 적절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할 것이다....인지석은 바람처럼 앞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다.뒤에는 소녀가 비틀거리며 따라오는데, 소년의 걸음걸이가 빨라서 소녀는 뛰어서 따라잡을 수밖에 없었다.너무 달려서 숨을 가쁘게 쉬었다.“지석 씨. 지석 씨...”최연희는 마음이 조급했다.“나 좀 기다려 줘!”인기척이 없는 작은 길로 걸어가자, 인지석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최연희는 깜짝 놀라서 온몸이 굳어 버린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슬퍼하며 고개를 숙였다. 두 손은 옷자락을 쉬지 않고 문지르고 있었다.“왜 계속 나 따라다니는데?”인지석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눈빛에는 그녀에 대한
강서연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최연준과 은미연은 이미 응급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무슨 상황이에요?”강서연은 걱정스럽게 물었다.최연준은 그녀를 한쪽으로 데려가서 말했다.“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 DL 몰 매니저가 갑자기 나한테 연락이 와서 연희가 쓰러져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 하더라고.”강서연은 많이 걱정했다.“연희 씨가 왜 백화점에 갔을까요?”최연준은 깊이 생각 안 했다.“여자애가 평소 백화점에 가는 것이 뭐가 이상해? 게다가 연희는 DL의 블랙 골드 카드 고객인데, 평소에 자주 가는 곳이야.”“제 말은...”강서연은 말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최연희가 쓰러진 것이 인지석과 관련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은 두 사람이 에덴을 떠난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서연아, 무슨 일인데?”“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강서연은 입술을 깨물고 눈빛이 복잡했다.“사람 없는 곳을 찾아 얘기해줄게요. 일단 은 대표님이 듣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아요...”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미연이 황급히 달려왔다.“깨어났어! 연준아, 연희가...”“서연 씨도 왔어요?”“네.”강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 연희 씨는 괜찮은 거죠?”“괜찮아요.”은미연은 눈이 빨갛게 부었다.“머리를 부딪쳐서 머리에 세 바늘을 꿰맸어요.”강서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마음 아파했다.“지금 들어가 봐도 돼요?”“아직은 안 된대요. 의사가 좀 기다리라고 했어요.”은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길도 제대로 못 걸어서 넘어지다니요. 내가 잔소리해도 안 듣는 걸 어떡해요. 그러니 오늘 심하게 넘어졌지요! 한번 넘어져 봐야 다음에 정신 차릴 수 있어요!”최연준은 앞으로 걸어가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어릴 때부터 최연준 기억 속의 은미연은 항상 강인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지금 말로는 그렇게 얘기하지만,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플 것이다.간호사가 다가와 병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자 은미연은 급하게 달려
지금은 또 그를 지켜 주겠다고 말했다.최연준은 운명이 자신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서로 속이고 당하고 하는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고 세 살 때부터 언제든 독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항상 이 세상을 경계하면서 살아왔다.그로 하여금 인간 세상의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하였고 심장은 굳은살로 박혀 다시는 인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강서연을 만나면서 그는 운명이 한 사람에게 진 모든 빚을 다른 방식으로 갚아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리고 강서연을 만난 후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다. 자기가 여자 앞에서 연약한 척하는 것도 꽤 재능이 있다는 것을...최연준은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었다.이때 복도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온 사람의 훤칠하고 마른 체구를 확인한 강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인지석?”최연준도 경각심을 가지면서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네가 왜 여기 왔어?”“도련님, 서연 씨.”인지석의 표정은 초조해 보였다.“연희 아가씨는 지금 어떠세요?”강서연은 그의 표정을 살펴봤다. 그의 까만 눈동자 속에는 오직 최연희에 대한 근심이 가득했고, 에덴에 있을 때처럼 음흉한 느낌은 없었다.“연희 씨는 넘어져서 머리에 바늘을 꿰맸어요.”그녀는 인지석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네?”인지석의 입은 살짝 떨리면서 표정은 슬퍼 보였다. 보아하니 정말 정이 많은 남자 같았다.“셋째 도련님.”그는 최연준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제가 들어가서 연희 아가씨를 돌봐도 될까요?”“필요 없어.”최연준은 차갑게 거절했다.“인지석. 인씨 집안은 삼대째 최씨 가문에서 집사로 일을 하고 지금까지 본분을 지키면서 충실하게 일해왔어. 나는 네가 그 장점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란다.”최연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여전히 위엄이 있다.“최씨 가문은 너희를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을 것이야.”“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인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저는 아
최연준은 잠시 멈칫했다.“나는 무슨 수를 쓰든 여기에 남을 것이야.”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강서연은 웃었다. 이 대답은 그녀가 이미 예상했다.이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나오는 행동이다. 최연준이 다쳤어도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병실 밖에 남았을 것이다.그러나 인지석은 한참 애틋하고 감동적인 고백을 한 후 성큼성큼 떠나 버렸다.마치 조금 전의 모든 것들이 연기 같았다.최연준은 강서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음이 조여지면서 무언가를 깨달았다.“내가 진작부터 알아봤어. 인지석 이 사람은 믿으면 안 돼! 연희가 계속 이 감정에 깊이 빠져들면 장차 큰 손해를 볼 것이야!”최연준은 몹시 화가 났다.“성급하지 마세요.”강서연은 그를 살살 달랬다.“보아하니 은 대표님께서는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것 같아요.”“알게 되더라도 크게 캐묻지 않을 거야.”최연준은 얼굴이 어두워졌다.“은 대표님은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아이가 가문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것을 가장 싫어해. 하지만 인지석과 연희는 어울리지 않아서 절대로 같이 있으면 안 돼.”“연준 씨.”강서연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제가 걱정하는 건... 인지석이 연희 씨에게 진심이 아니라 이용하려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제가 잘못 생각하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해야 해요. 연희 씨가 손해 보지 않게 우리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강서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최연준은 이전에 강주에서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구현수가 도망친 이후로 그는 모든 길목의 CCTV를 찾아봤는데 번호판이 없는 그 검은 차는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때 최연준은 CCTV에서 모호하게 찍힌 기사를 의심했다. 그 사람은 검은 모자를 쓰고 얼굴은 반쪽만 드러냈는데 창백하고 말라 보였다. 만약 인지석의 코 윗부분을 다 가리고 보면 그 반쪽 얼굴과 매칭이 된다.그러나 그는 감히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 사람을 보내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