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머리가 텅 비는 것만 같았다.뜨거운 가슴이 그녀의 등에 닿아왔고, 그의 뜨거운 심장 박동 소리도 들려왔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지만, 여전히 팔다리가 뻣뻣하여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남자의 손이 갑자기 멈춘다."내가 누군지 알아?"강서연은 이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 남편이고, 오늘이 신혼 첫날밤이기도 하니, 부부 사이에 이런 일은 당연하다는 건가?강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네, 알고 있어요… 구현수 씨잖아요."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구현수라...'내가 진짜 구현수는 아니라는 걸 알까? 하지만 뭐 그녀도 진짜 강서연은 아니잖아.'사실 그녀가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그녀가 강서연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 씨네 아가씨의 성격으로는 이런 시골뜨기에게 시집올 리가 없다.하지만 상관없었다, 둘 다 사기 결혼인 셈이니..."구현수씨..."그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여보니 사슴같이 무고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의 수줍고 부드러운 표정은 그의 마음속 어딘가를 움켜잡는 듯하였다."죄송해요, 제가 너무 긴장해서..."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작고 가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목을 껴안았다."구현수 씨는 이제 제 남편이니… 이런 일은 당연한 거죠, 그럼, 우리 시작해요."그녀의 앙증맞은 코끝에서 땀방울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고, 그녀는 서툰 동작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온몸을 떨면서 말이다.구현수는 살짝 설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입술에 키스하려고 할 때, 그는 갑자기 그녀의 작은 손을 잡더니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강서연은 달아오른 멍한 얼굴로 그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됐어. 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쉬어.""구현수 씨, 저...""너에게도 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적응하게 되면 그때 다시 봐."그는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누웠다.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던 강서연의 귓가
강서연이 옷을 걸치고 마당에 나오자, 아침 운동을 하는 구현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상의를 벗고 두 손으로 아령을 번갈아 가며 들고 있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마치 태양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했다. 강서연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일찍이네요."구현수는 고개를 돌려 표정 없이 그녀를 힐끗 보았다.강서연이 주위를 둘러보니, 그다지 크지 않은 마당에는 샌드백, 권투 장갑, 야구 방망이, 아령 등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구현수는 평소에 싸움을 많이 하는 것이 분명하다.이 남자의 성격은 어떨까?듣자니 이곳 사람들은 술에 취해 아내를 때리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작은 걸음으로 다가가 긴장한 듯 물었다."저기… 아침 식사는 하였나요?""아직이야."남자가 차갑게 몇 마디 내뱉었다."네가 가서 차려봐."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녀는 평소 일을 많이 하던 탓이라 손이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좁쌀죽 한 가마에 계란전도 부쳤고, 장조림도 한 그릇 담아 구현수 앞에 차려놓았다.구현수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활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구현수는 소고기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가져다 놓았다.강서연은 어리둥절하며 사양하려다가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많이 먹어, 너무 말랐어!""네..."그녀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사실 그녀는 구현수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어젯밤 일에 대하여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신혼부부 사이에 당연한 일을 가지고 마치 그가 강요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 것에 대하여 말이다.또한, 그녀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하여 묻고 싶었다. 이제 부부가 된 이상 함께 앞날을 계획하는 것은 응당하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무슨 수입으로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거 깨끗이 세탁하였으니 절대 문제없을 거예요!""아이고, 세탁했다고요?"점원은 차갑게 비웃었다."하루만 빌리고 왜 세탁했어요? 결혼용으로 빌린 거 아니에요? 설마 입고 농사지으러 간 건 아니겠죠?"낯가죽이 얇은 강서연은 점원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그녀가 결혼하던 날의 상황은 농사짓는 것보다 별로 더 낫지는 않았다. 큰비를 맞으며 진흙탕 시골길을 걸었고, 새하얀 웨딩드레스도, 웨딩 신발도 모두 더러워졌으며 발도 다 까지고 말았다.점원은 웨딩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이따금 그녀에게 불쾌하다는 눈길을 보냈다."서연 씨, 이런 웨딩드레스는 세탁하더라도 손빨래가 아닌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해요! 드라이클리닝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점원은 강서연의 성격이 만만한 것을 보고 일부러 그녀를 조롱했다. "어휴, 우리가 이 가게를 연 이후로 웨딩드레스를 팔기만 하였지 이렇게 임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쯧쯧, 웨딩드레스 한 벌도 못 사면서 무슨 결혼을 해요?""웨딩드레스를 사지 못하면 결혼을 못 한다... 이게 어느 법률에라도 적혀있어?"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서연은 어리둥절하여 돌아섰는데, 구현수가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강서연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껴안으며 점원을 바라보았다."저렇게 '웨딩드레스 대여' 라고 크게 써놓고서, 모두를 눈먼 사람 취급하는 거야?""아니...""게다가 이렇게 스타일도 별로고, 품질도 그저 그런 웨딩드레스를 집에 사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점원은 그들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못 사면 못 산다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요? 이렇게 허물 잡는 게 아니라... 저희 가게에는 특별히 디자인된 고급 드레스도 있다고요!"구현수는 홀 정중앙에 있는 웨딩드레스에 눈길이 갔다. 머메이드 핏으로 몸매를 잘 드러내고 은은한 금실로 포인트를 주었으며 가슴 부위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박혀 있었다.비교적 뛰
가게 안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바닥에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다른 사람들은 그 점원에게 동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점원의 안색은 이미 보기 나쁘게 변해있었다. 이때 매니저가 다가와 그녀에게 눈짓하였는데, 비싼 웨딩드레스이니 손님의 뜻에 따르라는 뜻이었다.이를 지켜보는 구현수는 기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강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구현수의 손을 꼭 쥐었다."괜찮아요, 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그녀는 나지막이 그에게 속삭였다."이 드레스는 가격이 너무 비싼 것 같아요, 앞으로 따로 입을 기회도 없을 것 같은데...""이 카드로 결제해."구현수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결국 매니저와 디자이너가 함께 나서서 오해를 풀어주려 노력했다.구현수은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며 안에서 사이즈를 재고 있는 강서연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감히 그녀에게 빈정거리지 못했고, 전에 그 점원은 매니저에게 호통 받고 옆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디자이너는 강서연의 몸매가 좋다고 연달아 칭찬했고, 매니저도 그녀를 귀빈으로 모시며 차를 대접하고 물을 따라주며 조심스럽게 시중들었다.한참 뒤에서야 웨딩숍을 나선 강서연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시무룩했다.그 웨딩드레스는 600만 원이 넘었다...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현수 씨."그녀는 오랫동안 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저 현수 씨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구현수는 걸음을 멈췄다.어린 여인은 검은 포도처럼 검고 큰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아까… 현수 씨가 너무 충동한 것 같아요.""뭐?""그러니까 아까 웨딩숍에서 말인데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 비싼 웨딩드레스를 샀어요? 600만 원이면 우리 둘이 얼마나 오래 먹고 살 수 있을지 생각해 봐요."구현수는 확실히 이 금액의 가치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예전의 그에게 이 금액은 아마 한 끼의 밥값으로도 부족했을 것이다.
구현수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문지르더니 심호흡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오성에 다녀오기는 해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지금 돌아가면, 구현수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다시 말썽을 일으키며 더 악랄한 방법을 생각해 내 그를 해칠 것이다!"캐러멜과 바닐라 중 어느 쪽이에요?"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돌려 보니 반짝이는 큰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를 향해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은 그녀의 손에 든 밀크티처럼 달콤했다."왜 그래요? 안색이 안 좋아요...""괜찮아."다른 사람에게 들통나는 느낌은 정말 좋지 않았다.구현수은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말했다."혼자 먹어, 난 이런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강서연은 밀크티 두 잔을 손에 들고 그 자리에 한창이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입술을 깨물며 쫓아갔다.그녀는 그의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며 따라갔다. 그의 넓은 등은 차가운 벽과 같았다. 그 벽 너머에는 그만의 세계였고, 그녀는 비록 그의 가까이에 있지만, 도저히 그 벽을 넘어갈 수 없었다....신혼 다음 날은 평소와 다름없었다.구현수는 강서연에게 침대를 내주고 자신은 밖에 있는 소파에서 잤다. 이불도 하나뿐이어서 강서연에게 양보한 뒤 낡은 시트로 몸을 감쌌다. 강서연은 미안한 마음에 침실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렸다."어서 가서 쉬어!"구현수의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대로 돌아갔다.구현수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아직 자신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하였다.강서연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가볍게 웃었다.소문에 따르면 구현수는 성격이 차갑고 사람들과 잘 소통하지 않으며 싸움에 매우 익숙하다고 한다. 하지만 강서연은 그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느껴졌다. 적어도 그녀를 충분히 존중하고 배려해 주고 있다.현지 습속에 따르면 셋째 날에는 신부 쪽 집을 방문해야 한다.강서연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셋째 날에는 보통 남편과 함께 떡 같은 걸 준비하여 친
구현수는 짐작이 갔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방에 가서 서랍장을 열면, 안에 상자가 있을 거야. 그걸 가져와."강서연은 응하며 방으로 갔다. 그의 말대로 서랍을 열자, 가장 깊은 곳에 꽃이 조각된 나무 상자가 있었다. 상자의 꽃무늬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아주 아름다웠고, 상자에서 그윽하고 맑은 향기가 났다.구현수가 그 상자를 받아서 여니, 안에는 금빛 찬란한 장신구들이 담겨있었다. 목걸이와 귀걸이, 반지, 특히 금과 옥으로 만들어진 팔찌는 매우 특별했다. 금에 박힌 양지옥은 부드럽고 투명하며 색이 풍부하였는데 정말 아름다웠다.강서연은 어리둥절한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쳐다봤다."이건…""결혼할 때 제대로 된 예물 하나 못 갖춰줬잖아."구현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꺼내 보며 말했다."이것들은 너에게 보충하여 주는 거니 또 뭐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말해.”강서연은 긴장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하였다. 그녀는 구현수의 표정 없는 얼굴을 바라보며, 어쩐지 가슴속에서 약간의 달콤함이 흘러났다.이 장신구들은 하나하나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 어떤 흠도 잡을 수 없었다.다만 그는 어떻게 이런 정교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 거지?구현수는 그녀의 속심을 알아차리기도 한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훔친 것도 아니고 빼앗아 온 것도 아니니 안심해."강서연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어떻게 자기 남편을 이렇게 의심할 수 있어...'"자."구현수는 상자를 덮어 그녀 앞으로 밀었다. 그는 깊은 눈동자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이것들은 내가 꺼낼 수 있는 전부이자 이 집의 전부야. 우린 이미 결혼했으니, 너에게 이 집을 맡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구현수 씨, 전...""그리고 하나 더 말할 게 있어."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오늘 친정에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으니 나 대신 가족에게 사과 좀 부탁할게."강서연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된 몸을 풀었다."네,
강서연은 입가의 미소가 갑자기 굳어지더니 가슴속에 잔잔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임유정의 말이 맞았다. 결혼은 평생에 연관되는 일인데,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한번 해본 적 없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시집오게 된 것은, 정말 자기 평생의 행복을 건 거나 다름없었다.하지만...강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현수 씨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만약 현수 씨가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 거액의 혼수도 못 가질 거 아니에요?"엄마의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동생이 공부를 계속할 수만 있다면, 가족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것이 강서연의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다음에 얘기해요."거의 다 도착한 것을 보고 강서연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난 오늘 돈을 가지러 여기 온 거예요. 이제 돈을 받으면 언니한테 좋은 소식 전할게요."강서연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얼마 가지 않아 강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길가에 서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기에 서 있는 자신에게 위화감을 느꼈다...."어머, 동생! 왔어?"강유빈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며 계단에서 내려오더니 오만한 태도로 그녀를 위아래로 한바탕 훑어보았다.강서연이 요 며칠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것이다.그녀가 시집간 상대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에, 동네에서 유명한 망나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강유빈은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어려서부터 그녀는 항상 그 어떤 면에서도 강서연과 비교당하며 살아왔었다.강서연이 오래된 낡은 옷을 입고 있어도 주변에서는 예쁘다는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강서연은 성격이 온화하여 사람들은 모두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게다가 강서연은 성적조차 강유빈을 훨씬 뛰어넘었다.강유빈은 어렸을 때부터 강서연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비록 강서연은 그녀를 해칠 마음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강유빈은 강서연을 난처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이
"아빤 집에 안 계셔!"강유빈은 입꼬리를 치켜들며 거만하게 말했다."아빤 네가 오늘 집에 다녀간다는 것조차도 잊고 계셔! 하긴, 그런 거지 놈에게 시집가는데 밥상을 따로 차릴 필요가 있겠어? 넌 창피하지도 않은가 봐?""상 차릴 필요는 없으니 내 혼수나 돌려줘!"강서연은 벌떡 일어나 강유빈의 앞을 가로막았다."혼수? 난 들어본 적도 없는데?"강유빈은 입가에 교활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그 순간 강서연은 억울함, 분노, 원망... 등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미천한 사생아로 낙인찍힌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출신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도 그녀는 밝은 곳을 향해 다가가려고 무진 애를 썼다.어떤 제정신인 여자가 남을 대신하여 시집가려 할까? 그녀는 단지 엄마를 구하려고 터무니없는 요구에 응했을 뿐이다.그런데 이 작은 소망마저도 그들에게 박탈당하다니!"가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강서연은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가려는 강유빈의 앞을 가로막았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강유빈은 강서연의 팔을 세게 꼬집으며 소리 질렀다.강서연은 너무 아픈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만 뒤통수가 벽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순간 귀도 먹먹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런 강서연의 모습을 보며 강유빈은 더욱 음산하게 비웃었다."서연아, 너는 이미 시집간 딸이야, 그 촌구석에 버려진 오물이랑 다를 바 없어. 앞으로 우리 강씨 집안과 어떤 일로도 엮일 생각 말어!""아버지께선 나하고 약속하셨어! 내가 너 대신 시집가면 혼수를 푼푼이 주겠다고! 그럼 엄마도...""엄마를 좋은 병실에 입원시켜 좋은 약을 쓰게 하겠다던?"강유빈이 깔깔대고 웃었다."나의 바보 동생 같으니라고, 쯧쯧... 너는 그때 아버지가 왜 너와 네 엄마를 내쫓았는지 기억 안 나?"한줄기 섬뜩한 기운이 강서연의 가슴에 스며들었다."행실이 바르지 않은 네 엄마가 어데서 잡종을 임신해 가지
결혼한 이후, 두 사람은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없었다.“욱아, 제발 부탁이야...”조순영이 떨리는 손으로 권욱의 옷깃을 힘겹게 움켜쥐었다.“나 온유를 잃을 순 없어. 어떻게든 살려야 해. 당신이 우리 결혼 생활에 불만이 많았던 것도,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도 다 알아.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남동생을 찾아 적합 테스트를 받을 수 있다면 우리 온유에게도 다시 희망이 생기는 거잖아, 안 그래?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어. 온유의 엄마로서 부탁할게, 제발 다시 한번만 생각해줘.”조순영의 목소리는 울음에 잠겨 끊겼고 권욱은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권씨 가문이라면 사람 하나 찾는 건 문제도 아니잖아. 필요하다면 우리 아버지도 힘을 보태실 거야.”“순영아.”권욱은 한참을 침묵하다 고개를 숙여 조순영의 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동생... 남동생 아니야.”“뭐라고?”“그 당시 태어난 아이는 남동생이 아니었어. 여자아이였다고. 그러니까, 온유에겐 고모가 있는 셈이지!”...최근, 최군형은 꽤 우울한 상태였다.이제 막 한 살이 되는 딸을 품에 안아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린 가원이가 밤새 울며 젖을 찾고 기저귀를 갈 때마다 최군형은 직접 챙기려 애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역할은 집안의 보모들로 자연스레 넘어갔다.가원이를 돌보기 위해 강서연은 최씨 가문의 대저택에 다섯, 여섯 명의 보모를 배치했고 육경섭과 임우정도 육씨 가문의 경험 많은 도우미들을 추가로 보냈다.한 아이를 돌보는 데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매달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수시로 찾아와 손녀를 챙겼다.최군형뿐만 아니라 엄마인 강소아 역시 육아라는 짐이 한결 덜어진 듯 느껴졌다.게다가 강서연과 최연준은 손녀를 유난히도 아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가원이를 여주 별장으로 데리고 갔다.부모님 댁을 찾은 최군형은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풍경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최연준이 호랑이 옷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권욱과 조순영은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한때 그렇게 활기차고 밝던 딸이 지금처럼 힘없이 변해버린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에 휩싸였다.의사가 최신 검사 결과지를 들고 다가왔다.조순영은 이미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고 권욱은 차마 눈을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권욱은 결국 용기를 내어 한 마디 물었다.“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의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권욱은 입술을 꼭 다물고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몇 달 동안, 그들은 연락 가능한 모든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권욱과 조순영뿐만 아니라 권씨 가문과 조씨 가문의 모든 가족이 적합성 검사를 받았지만, 그 누구의 결과도 일치하지 않았다.최근 검사한 사람은 권씨 가문의 먼 친척이었다.권욱은 고개를 벽에 기대며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고 조순영은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의사는 조심스레 한숨을 쉬며 위로했다.“사실 지금으로서는... 따님의 병세가 꽤 잘 억제되고 있습니다. 골수은행에서 계속 찾을 수 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아이를 하나 더 낳는다면요?” 권욱은 갑작스레 고개를 들며 말했다.“신생아의 탯줄혈액이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만...”“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실제로 성공 사례도 있습니다.” 의사는 사실대로 대답했다.“하지만 임신 과정이 너무 길어요. 두 분이 먼저 몸을 준비하는 데만 3개월가량 걸릴 테고, 임신에 성공한다 해도 열 달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다른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그렇다고 제 딸이 죽어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권욱의 외침은 마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처럼 절망에 빠진 목소리였다.바로 그때, 조순영의 눈이 반짝였다.“권욱, 우리에게 한 사람이 더 있잖아...”“누군데요?” 의사가 의아한 듯 물었다.“가족 중에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있어요!” 조순영은 구명줄을 붙잡은 듯 외쳤다.하지만 조순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권욱이 조순영의 손을 붙잡았다.
최군형은 최연준이 젊었을 적 강서연에게 자주 난감한 질문을 받았다고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최군형이 결혼한 후에도 강소아는 그런 질문을 자주 한다고 했다.이제는 차례가 최지용에게까지 돌아온 것이다.마치 최씨 가문의 남자들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처럼 보였다.“아니야, 아니야! 나는... 나는 절대 영미랑...”최지용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변명했지만, 백인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백인서는 소고기 국수를 유난히 맛있게 먹으며 비로소 과거를 내려놓고 새롭게 걸음을 뗄 수 있었다....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영미와 정대명은 모두 마땅한 벌을 받았고 영미는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표아정은 정대명이 그날 연회장에서 했던 헛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세간의 입은 날카로웠다. 이 소문은 이미 사교계 전반에 퍼졌다.하지만 표아정의 성격상,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수록 오히려 그들에게 맞서고자 했다.표아정은 백인서를 데리고 사교 모임에 자주 나섰고, 심지어 고스톱을 치러 갈 때도 그를 데려갔다. 매번 외출할 때마다 백인서를 정성스럽게 치장해 주기도 했다.“내 며느리가 되려면 절대 표씨 가문 얼굴에 먹칠할 수 없어!”표아정은 백인서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어봐. 표씨 가문의 품격을 보여줘야지!”한쪽에서 최연서는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밀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며느리는 최씨 가문 사람인데... 최씨 가문이라고! 하...”최지용과 백인서는 눈을 마주친 뒤 살며시 웃음을 터뜨렸다.정승우는 여전히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했다.산골에서 올라온 이 아이들은 이 소중한 기회를 누구보다도 아꼈고 있는 힘껏 공부에 매달렸다. 그들 중엔 타고난 재능으로 또래를 훨씬 앞서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아이들은 여러 가문에게 발탁되어 집중적으로 키워지기도 했다.백인서와의 인연 덕분에 최군형과 강소아는 일찌
백인서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한쪽으로 걸음을 옮겨 전화를 받았다.정승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돌아온 백인서는 최지용이 만든 소고기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정승우한테서 온 전화야? 뭐라고 하던데?”백인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최지용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요즘 남자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싶어요.”“음...”최지용은 진지하게 잠시 생각하면서 대답했다.“내가 그 나이 땐 하루 종일 공부에만 매달렸던 기억이 나.”“진짜요?”“그럼. 우리 집안은 아이들 교육에 꽤 엄격했거든. 우리 부모님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군형이와 군성이는 나보다 훨씬 힘들었어!”특히 최군형은 줄곧 최씨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로 키워졌고 집안 어른들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조심스럽게 살아야 했고 작은 실수도 범해선 안 됐다.그런 높은 압박 속에서 자란 최군형은 후계자로서 아주 훌륭하게 자랐지만 동시에 어린 시절의 즐거움도 빼앗겼다.“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최지용은 담담하게 말했다.“인생이란 건 모든 게 다 뜻대로 될 수 없는 법이잖아. 그래도 하늘이 최씨 집안 아이들에게는 정말 많은 걸 주었어. 우리가 스스로 길을 잘못 들지 않는 한, 우리 삶은 망가질 일이 없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서 있는 출발선 자체가 이미 많은 사람이 평생 닿지 못할 종착점이니까.”“정말 만족해하시네요.”백인서가 웃으며 말했다.“그저 어린 남자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했을 뿐인데, 벌써 이런 깊은 이야기로 넘어가셨네요.”“아, 그 이야기 계속하자!”최지용도 웃으며 말했다.“정승우가 대체 뭐라고 했어?”“별건 아니에요. 그냥, 왜 요즘 온유가 자기를 안 챙겨주는지 물어보더라고요.”최지용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이번에 정승우가 없었더라면 온유는 정말 큰일 났을 거야.”백인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그러니 정승우는 온유의 구세주인 셈이네.”“아이들의 마음은
백인서의 가슴이 움츠러들고 차가운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그 후 며칠 동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최지용은 백인서가 잠든 사이에 조용히 집에 들렀고 백인서가 깨어 있는 동안엔 언제나 떠나 있었다. 백인서의 세끼는 항상 정성스레 만들어진 요리로 채워졌고 집은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최지용은 백인서를 묵묵히 돌보았을 뿐,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최지용이 백인서를 위해 직접 소고기 국수를 만들었다. 얇게 저민 소고기 조각은 적당한 불에 부드럽게 익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백인서의 눈물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마치 멈출 수 없는 홍수가 방파제를 삼키듯, 단단히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순식간에 무너졌다.백인서는 맹렬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최지용의 뒷모습이었다.최지용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그때, 최지용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려 백인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최지용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백인서는 울면서 최지용의 품으로 달려들었다.“괜찮아, 인서야.”최지용은 백인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다 지나간 일이야. 앞으로는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백인서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최지용은 백인서가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백인서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것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알기에 지금은 터뜨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백인서가 울다 지치자, 최지용은 백인서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거실로 돌아왔다. 둘은 부드러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백인서는 마치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 몸을 기대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백인서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할 용기를 냈다.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백인서는 고개를 떨구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백인서는 자신이 두근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럼...”최지용은 백인서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권욱과 조순영은 숨을 삼키며 얼어붙었다. 의사의 깊게 굳은 표정이 두 사람의 마음에 불길한 예감을 드리웠다.“장 박사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장 박사는 권온유의 건강검진 결과를 두 사람에게 건넸다.“아이가 처음 돌아왔을 때 몸에 난 상처를 확인하며 전신 정밀 검사를 진행했는데, 혈액에서 이상이 발견됐습니다...”권욱과 조순영은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았다.“쉽게 말씀드리면, 백혈병입니다.”“뭐라고요?”조순영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숨이 막혔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권욱이 간신히 조순영을 부축했지만, 그의 얼굴 또한 충격으로 빛을 잃고 멍하니 굳어 있었다. 겨우 침착한 척하며 물었다.“확실합니까?”권욱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장 박사님, 정말 우리 딸의 검사 결과가 맞습니까?”“저도 잘못된 결과이길 바랐습니다.”장 박사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그래서 처음 결과를 확인한 후, 직접 다시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아이는 백혈병 초기 단계이며, 다행히 치료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부탁드립니다. 반드시 우리 딸을 살려주세요!”조순영은 흐느끼며 말했다.“저에게는 딸 하나뿐이에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 모든 것을 다해 키운 아이입니다. 아이는 제 전부예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도 살고 싶지 않아요...”“진정해!”권욱이 낮은 목소리로 조순영을 다독였다.“의사 선생님도 말씀하셨잖아. 온유는 치료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권 대표님, 권 사모님,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두 분이 침착하셔야 합니다.”장 박사는 두 사람을 차분히 바라보며 말했다.“저희는 곧 상세한 치료 계획을 수립할 것입니다. 다만, 치료 과정에서 사용되는 약물이나 주사제가 아이의 체질에 따라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제 딸을 반드시 살려주세요!”권욱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조순영은 고개를
강소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표아정을 살폈다.“숙모, 괜찮으세요?”“괜찮아.”표아정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창백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숄을 단정히 여몄다.“그런데 아까 그 아이는...”표아정의 눈빛이 번쩍였다. 표아정의 말에 모두가 머리를 돌려 정승우를 바라보았다. 정승우의 이마에서는 아직도 붉은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때 권온유가 안에서 급히 뛰쳐나오더니, 정승우의 피 흐르는 모습을 보고는 와아 소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정승우를 꼭 끌어안았다.“안 아파, 정말 안 아파!”정승우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건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품 안에 보들보들하고 사랑스러운 작은 공주님이 있으니 괜히 어색하고 쑥스러워졌다하지만 속으로는 누나 걱정이 떠나지 않았고 머리가 지끈거려 불편하기도 했다. 아까 맞은 충격이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 같았다.“우선 정승우를 병원으로 데려갑시다!”조순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내 차로 가요!”“최씨 연합 병원으로 가면 됩니다.”최군형이 덧붙였다.“제가 이미 의사에게 연락했으니, 도착하면 상처를 치료하고 정밀 검사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저도 갈래요!”권온유는 얼굴이 엉망이 되어 울면서 정승우를 붙잡고 흔들었다.“오빠, 오빠! 제가 병원까지 같이 갈 거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요!”정승우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온유의 땋은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중간에서 망설이며 멈췄다.지금은 그때의 낡은 공장도 교외의 길가도 아니었다. 온유는 다시 공주님으로 돌아왔고 자기 손은 늘 더럽고 거칠었다. 그런 손으로 온유의 머리를 만질 순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승우는 연합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시장님의 차로 병원에 도착한 데다 최군형이 미리 부탁해 둔 덕분에 간단한 상처지만 최고의 의사가 직접 치료에 나섰다.붕대를 감은 뒤, 정승우는 병실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VIP 병실은 정승우에게 마치
정승우는 몸을 피하지 못했고 머리에 무거운 충격이 가해졌다.정대명이 다시 손을 올리려는 순간, 경찰이 제때 그를 제압하며 상황은 순식간에 진정되었다.그러나 정승우의 이마에는 수갑이 남긴 상처가 선명히 드러났고 그 틈에서 피가 서서히 흘러내렸다. 정승우는 손으로 상처를 감쌌지만, 붉은 피는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흘러내렸다.“정승우!”백인서는 놀란 목소리로 외치며 황급히 달려가 정승우의 상처를 살폈다.“이 나쁜 자식! 네가 아버지를 감히 저주해?”정대명은 경찰에 의해 제압당해 몸부림칠 수 없자 대신 고래고래 소리쳤다.“백인서! 이 빌어먹을 년... 네가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 놨어!”“감히 아버지를 저주하다니! 지옥 가서 천벌 받을 거야?”“이 나쁜 놈아! 네 몸엔 내 피가 흐르고 있어! 결국 넌 나처럼 될 거다, 쓰레기 같은 놈아!”“정대명 씨! 헛소리 그만하세요!”정호가 엄격한 목소리로 꾸짖었다.“아니요! 아니요!”정대명은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발로 차고 몸부림쳤다.“경찰이 아무리 강해도 내가 내 아들을 훈계하는 걸 막을 순 없지! 내가 아들만 훈계하겠냐? 저 계집애도 훈계해야지!”백인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정대명을 응시했다.정대명의 잔혹한 언행은 백인서를 순식간에 어두운 과거로 끌어당겼다.폭풍우가 휘몰아치던 그날 밤, 백인서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깊은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했다.온몸이 떨리며 심장은 쿵쿵거렸고 귓가에는 정대명의 독설이 메아리쳤다.“젠장, 이 빌어먹을 년이. 집에 있을 때도 착하게 굴지 않았어... 그때도 내가 올라타면 얼마나 반항했는지!”그 한마디는 깊은 바닷속에서 폭발한 수류탄처럼 연회장의 공기를 산산이 갈라놓았다. 그 소리는 연회장의 모든 혼란을 멈추게 했다.모두가 알고 있었다. 백인서는 최씨 가문의 미래 며느리라는 사실을.그런데 정대명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최지용은 순간 멍하니 굳어졌다. 최지용은 본능적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 백인서의 청초한 얼굴은 깊은 먹구름
“여기는 시장님의 연회 자리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죠.”정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곳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반드시 체포해야겠지요!”“아니에요, 저는 인신매매범이 아니에요!”영미가 격렬히 몸부림치며 외쳤다.“아이를 납치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건 정대명이 했어요, 모든 게 그의 짓이라고요! 제발 믿어주세요!”하지만 영미의 몸부림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희미해지다 이내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정대명은 이 광경을 보며 무릎이 풀리고 말았다.지금 정대명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곧 자신도 영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정대명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간절히 애원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몰랐어요, 그 여자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저는 그냥 돈 받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요!”“그 말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정호가 손짓하자, 사람들이 정대명을 데리고 가려 했다.그 순간, 정대명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던 정승우를 향했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승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에는 끝없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듯했다.그러나 정승우는 정대명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정대명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승우의 그 적대적인 눈빛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버렸다. 정대명은 자신이 정승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통이 터졌다.몇 대 때리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감히 원한을 품다니?정대명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뒤엉키며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죽더라도 누군가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들이었다.정대명은 눈빛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더니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