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이 옷을 걸치고 마당에 나오자, 아침 운동을 하는 구현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상의를 벗고 두 손으로 아령을 번갈아 가며 들고 있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마치 태양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했다. 강서연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일찍이네요."구현수는 고개를 돌려 표정 없이 그녀를 힐끗 보았다.강서연이 주위를 둘러보니, 그다지 크지 않은 마당에는 샌드백, 권투 장갑, 야구 방망이, 아령 등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구현수는 평소에 싸움을 많이 하는 것이 분명하다.이 남자의 성격은 어떨까?듣자니 이곳 사람들은 술에 취해 아내를 때리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작은 걸음으로 다가가 긴장한 듯 물었다."저기… 아침 식사는 하였나요?""아직이야."남자가 차갑게 몇 마디 내뱉었다."네가 가서 차려봐."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녀는 평소 일을 많이 하던 탓이라 손이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좁쌀죽 한 가마에 계란전도 부쳤고, 장조림도 한 그릇 담아 구현수 앞에 차려놓았다.구현수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활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구현수는 소고기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가져다 놓았다.강서연은 어리둥절하며 사양하려다가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많이 먹어, 너무 말랐어!""네..."그녀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사실 그녀는 구현수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어젯밤 일에 대하여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신혼부부 사이에 당연한 일을 가지고 마치 그가 강요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 것에 대하여 말이다.또한, 그녀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하여 묻고 싶었다. 이제 부부가 된 이상 함께 앞날을 계획하는 것은 응당하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무슨 수입으로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거 깨끗이 세탁하였으니 절대 문제없을 거예요!""아이고, 세탁했다고요?"점원은 차갑게 비웃었다."하루만 빌리고 왜 세탁했어요? 결혼용으로 빌린 거 아니에요? 설마 입고 농사지으러 간 건 아니겠죠?"낯가죽이 얇은 강서연은 점원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그녀가 결혼하던 날의 상황은 농사짓는 것보다 별로 더 낫지는 않았다. 큰비를 맞으며 진흙탕 시골길을 걸었고, 새하얀 웨딩드레스도, 웨딩 신발도 모두 더러워졌으며 발도 다 까지고 말았다.점원은 웨딩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이따금 그녀에게 불쾌하다는 눈길을 보냈다."서연 씨, 이런 웨딩드레스는 세탁하더라도 손빨래가 아닌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해요! 드라이클리닝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점원은 강서연의 성격이 만만한 것을 보고 일부러 그녀를 조롱했다. "어휴, 우리가 이 가게를 연 이후로 웨딩드레스를 팔기만 하였지 이렇게 임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쯧쯧, 웨딩드레스 한 벌도 못 사면서 무슨 결혼을 해요?""웨딩드레스를 사지 못하면 결혼을 못 한다... 이게 어느 법률에라도 적혀있어?"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서연은 어리둥절하여 돌아섰는데, 구현수가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강서연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껴안으며 점원을 바라보았다."저렇게 '웨딩드레스 대여' 라고 크게 써놓고서, 모두를 눈먼 사람 취급하는 거야?""아니...""게다가 이렇게 스타일도 별로고, 품질도 그저 그런 웨딩드레스를 집에 사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점원은 그들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못 사면 못 산다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요? 이렇게 허물 잡는 게 아니라... 저희 가게에는 특별히 디자인된 고급 드레스도 있다고요!"구현수는 홀 정중앙에 있는 웨딩드레스에 눈길이 갔다. 머메이드 핏으로 몸매를 잘 드러내고 은은한 금실로 포인트를 주었으며 가슴 부위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박혀 있었다.비교적 뛰
가게 안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바닥에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다른 사람들은 그 점원에게 동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점원의 안색은 이미 보기 나쁘게 변해있었다. 이때 매니저가 다가와 그녀에게 눈짓하였는데, 비싼 웨딩드레스이니 손님의 뜻에 따르라는 뜻이었다.이를 지켜보는 구현수는 기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강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구현수의 손을 꼭 쥐었다."괜찮아요, 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그녀는 나지막이 그에게 속삭였다."이 드레스는 가격이 너무 비싼 것 같아요, 앞으로 따로 입을 기회도 없을 것 같은데...""이 카드로 결제해."구현수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결국 매니저와 디자이너가 함께 나서서 오해를 풀어주려 노력했다.구현수은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며 안에서 사이즈를 재고 있는 강서연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감히 그녀에게 빈정거리지 못했고, 전에 그 점원은 매니저에게 호통 받고 옆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디자이너는 강서연의 몸매가 좋다고 연달아 칭찬했고, 매니저도 그녀를 귀빈으로 모시며 차를 대접하고 물을 따라주며 조심스럽게 시중들었다.한참 뒤에서야 웨딩숍을 나선 강서연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시무룩했다.그 웨딩드레스는 600만 원이 넘었다...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현수 씨."그녀는 오랫동안 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저 현수 씨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구현수는 걸음을 멈췄다.어린 여인은 검은 포도처럼 검고 큰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아까… 현수 씨가 너무 충동한 것 같아요.""뭐?""그러니까 아까 웨딩숍에서 말인데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 비싼 웨딩드레스를 샀어요? 600만 원이면 우리 둘이 얼마나 오래 먹고 살 수 있을지 생각해 봐요."구현수는 확실히 이 금액의 가치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예전의 그에게 이 금액은 아마 한 끼의 밥값으로도 부족했을 것이다.
구현수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문지르더니 심호흡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오성에 다녀오기는 해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지금 돌아가면, 구현수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다시 말썽을 일으키며 더 악랄한 방법을 생각해 내 그를 해칠 것이다!"캐러멜과 바닐라 중 어느 쪽이에요?"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돌려 보니 반짝이는 큰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를 향해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은 그녀의 손에 든 밀크티처럼 달콤했다."왜 그래요? 안색이 안 좋아요...""괜찮아."다른 사람에게 들통나는 느낌은 정말 좋지 않았다.구현수은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말했다."혼자 먹어, 난 이런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강서연은 밀크티 두 잔을 손에 들고 그 자리에 한창이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입술을 깨물며 쫓아갔다.그녀는 그의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며 따라갔다. 그의 넓은 등은 차가운 벽과 같았다. 그 벽 너머에는 그만의 세계였고, 그녀는 비록 그의 가까이에 있지만, 도저히 그 벽을 넘어갈 수 없었다....신혼 다음 날은 평소와 다름없었다.구현수는 강서연에게 침대를 내주고 자신은 밖에 있는 소파에서 잤다. 이불도 하나뿐이어서 강서연에게 양보한 뒤 낡은 시트로 몸을 감쌌다. 강서연은 미안한 마음에 침실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렸다."어서 가서 쉬어!"구현수의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대로 돌아갔다.구현수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아직 자신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하였다.강서연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가볍게 웃었다.소문에 따르면 구현수는 성격이 차갑고 사람들과 잘 소통하지 않으며 싸움에 매우 익숙하다고 한다. 하지만 강서연은 그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느껴졌다. 적어도 그녀를 충분히 존중하고 배려해 주고 있다.현지 습속에 따르면 셋째 날에는 신부 쪽 집을 방문해야 한다.강서연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셋째 날에는 보통 남편과 함께 떡 같은 걸 준비하여 친
구현수는 짐작이 갔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방에 가서 서랍장을 열면, 안에 상자가 있을 거야. 그걸 가져와."강서연은 응하며 방으로 갔다. 그의 말대로 서랍을 열자, 가장 깊은 곳에 꽃이 조각된 나무 상자가 있었다. 상자의 꽃무늬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아주 아름다웠고, 상자에서 그윽하고 맑은 향기가 났다.구현수가 그 상자를 받아서 여니, 안에는 금빛 찬란한 장신구들이 담겨있었다. 목걸이와 귀걸이, 반지, 특히 금과 옥으로 만들어진 팔찌는 매우 특별했다. 금에 박힌 양지옥은 부드럽고 투명하며 색이 풍부하였는데 정말 아름다웠다.강서연은 어리둥절한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쳐다봤다."이건…""결혼할 때 제대로 된 예물 하나 못 갖춰줬잖아."구현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꺼내 보며 말했다."이것들은 너에게 보충하여 주는 거니 또 뭐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말해.”강서연은 긴장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하였다. 그녀는 구현수의 표정 없는 얼굴을 바라보며, 어쩐지 가슴속에서 약간의 달콤함이 흘러났다.이 장신구들은 하나하나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 어떤 흠도 잡을 수 없었다.다만 그는 어떻게 이런 정교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 거지?구현수는 그녀의 속심을 알아차리기도 한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훔친 것도 아니고 빼앗아 온 것도 아니니 안심해."강서연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어떻게 자기 남편을 이렇게 의심할 수 있어...'"자."구현수는 상자를 덮어 그녀 앞으로 밀었다. 그는 깊은 눈동자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이것들은 내가 꺼낼 수 있는 전부이자 이 집의 전부야. 우린 이미 결혼했으니, 너에게 이 집을 맡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구현수 씨, 전...""그리고 하나 더 말할 게 있어."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오늘 친정에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으니 나 대신 가족에게 사과 좀 부탁할게."강서연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된 몸을 풀었다."네,
강서연은 입가의 미소가 갑자기 굳어지더니 가슴속에 잔잔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임유정의 말이 맞았다. 결혼은 평생에 연관되는 일인데,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한번 해본 적 없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시집오게 된 것은, 정말 자기 평생의 행복을 건 거나 다름없었다.하지만...강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현수 씨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만약 현수 씨가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 거액의 혼수도 못 가질 거 아니에요?"엄마의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동생이 공부를 계속할 수만 있다면, 가족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것이 강서연의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다음에 얘기해요."거의 다 도착한 것을 보고 강서연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난 오늘 돈을 가지러 여기 온 거예요. 이제 돈을 받으면 언니한테 좋은 소식 전할게요."강서연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얼마 가지 않아 강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길가에 서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기에 서 있는 자신에게 위화감을 느꼈다...."어머, 동생! 왔어?"강유빈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며 계단에서 내려오더니 오만한 태도로 그녀를 위아래로 한바탕 훑어보았다.강서연이 요 며칠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것이다.그녀가 시집간 상대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에, 동네에서 유명한 망나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강유빈은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어려서부터 그녀는 항상 그 어떤 면에서도 강서연과 비교당하며 살아왔었다.강서연이 오래된 낡은 옷을 입고 있어도 주변에서는 예쁘다는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강서연은 성격이 온화하여 사람들은 모두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게다가 강서연은 성적조차 강유빈을 훨씬 뛰어넘었다.강유빈은 어렸을 때부터 강서연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비록 강서연은 그녀를 해칠 마음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강유빈은 강서연을 난처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이
"아빤 집에 안 계셔!"강유빈은 입꼬리를 치켜들며 거만하게 말했다."아빤 네가 오늘 집에 다녀간다는 것조차도 잊고 계셔! 하긴, 그런 거지 놈에게 시집가는데 밥상을 따로 차릴 필요가 있겠어? 넌 창피하지도 않은가 봐?""상 차릴 필요는 없으니 내 혼수나 돌려줘!"강서연은 벌떡 일어나 강유빈의 앞을 가로막았다."혼수? 난 들어본 적도 없는데?"강유빈은 입가에 교활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그 순간 강서연은 억울함, 분노, 원망... 등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미천한 사생아로 낙인찍힌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출신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도 그녀는 밝은 곳을 향해 다가가려고 무진 애를 썼다.어떤 제정신인 여자가 남을 대신하여 시집가려 할까? 그녀는 단지 엄마를 구하려고 터무니없는 요구에 응했을 뿐이다.그런데 이 작은 소망마저도 그들에게 박탈당하다니!"가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강서연은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가려는 강유빈의 앞을 가로막았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강유빈은 강서연의 팔을 세게 꼬집으며 소리 질렀다.강서연은 너무 아픈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만 뒤통수가 벽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순간 귀도 먹먹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런 강서연의 모습을 보며 강유빈은 더욱 음산하게 비웃었다."서연아, 너는 이미 시집간 딸이야, 그 촌구석에 버려진 오물이랑 다를 바 없어. 앞으로 우리 강씨 집안과 어떤 일로도 엮일 생각 말어!""아버지께선 나하고 약속하셨어! 내가 너 대신 시집가면 혼수를 푼푼이 주겠다고! 그럼 엄마도...""엄마를 좋은 병실에 입원시켜 좋은 약을 쓰게 하겠다던?"강유빈이 깔깔대고 웃었다."나의 바보 동생 같으니라고, 쯧쯧... 너는 그때 아버지가 왜 너와 네 엄마를 내쫓았는지 기억 안 나?"한줄기 섬뜩한 기운이 강서연의 가슴에 스며들었다."행실이 바르지 않은 네 엄마가 어데서 잡종을 임신해 가지
구현수가 집에 들어서니 강서연이 부엌에서 반찬 두 접시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강서연은 구현수를 보더니 근심 어렸던 얼굴에 애써 웃음을 띄웠다.구현수는 손을 씻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는 하루 종일 훈련한 탓에 배가 무척 고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보자 식욕이 저절로 당겨 밥그릇을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맞은 편에 앉은 강서연은 가만히 앉아 꿈쩍도 하지 않는다."무슨 일 있어?"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에 강서연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러면 빨리 밥 먹어."구현수는 고기 한 점을 집어 강서연의 접시에 담았다."보기만 하면 배가 저절로 불러?"강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정말 입맛이 없었다. 이때 '띵' 하고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동생 윤찬이 보낸 문자였다."누나, 엄마 병원비는 언제 가져올 수 있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더 이상 지급 안 하면 약을 끊는대!"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침실 안의 낮은 서랍장을 바라보았다.지난번에 구현수가 준 금 장신구들, 특히 그 옥을 박은 팔찌는 꽤 값이 가 보였다..."뭘 멍하니 생각하고 있어?"강서연은 갑자기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남자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몸을 약간 떨었다. 매번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그의 남다른 기세는 무언의 강한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아무것도 아니에요..."강서연은 조용히 말했다.수저를 내려놓은 구현수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야?"강서연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구현수는 서두르지 않고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더니 다시 혼자 식사하기 시작했다.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그도 더는 묻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참지 못하고 저절로 말할 때가 오겟지...그날 밤 강서연은 마음이 어수선해서 윤찬이 보낸 메시지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돈 버는 방법을 머릿속에 떠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
백시연이 병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좌우에서 갑자기 두 명의 경호원이 다가와 백시연을 붙잡았다.머릿속이 새하얘진 백시연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상대는 거구의 남자들이었기에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한 남자가 거칠게 천 조각을 백시연의 입에 밀어 넣었다.백시연은 신음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그들은 병원의 구조를 꿰뚫고 있는 듯, 감시 카메라가 없는 경로를 정확히 따라 움직였다. 백시연은 어느 한 실험실로 끌려갔다.그곳에서 창가를 등진 채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권욱이었다. 햇빛이 권욱의 실루엣을 감싸며 그의 냉혹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백시연은 눈을 크게 뜬 채 두려움에 몸부림쳤고 더 다급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백시연, 미안하군.”권욱의 목소리는 낮고 차갑게 울려 퍼졌다.“널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권욱은 옆에 서 있던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의사들은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호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백시연은 그대로 수술대에 강제로 눕혀졌다.“윽!”“백시연, 저항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권욱은 백시연을 냉랭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말했다.“네가 더 몸부림칠수록 이 과정은 더욱 고통스러워질 거야. 하지만 협조하면 고통은 최소화될 거야. 알아서 잘 판단해 봐.”권욱은 경호원에게 손짓하며 백시연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빼내게 했다.갑자기 숨통이 트인 백시연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간신히 말했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나는 네가 약속을 지키길 바랄 뿐이야.”“권욱...”“백시연.”권욱은 차갑게 말을 이어 나갔다.“넌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부모에게 아이는 목숨과도 같은 존재야. 그리고 내 딸은 지금 목숨이 위태로워. 네가 계속 핑계를 대며 골수 검사를 하지 않고 있으니... 흥!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이렇게라도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설마 강제로 골수 검
종수의 눈빛에 묘한 어둠이 깃들었다. 그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사진 몇 장을 꺼내 백인서 앞에 내던졌다.백인서는 멍하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 얼굴은 자신과 똑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친 듯 백인서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단번에 멈춰버렸다.“이 아이는 백시연이다.”종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의 쌍둥이 동생이지.”“쌍...쌍둥이요?”백인서는 귀를 의심하며 중얼거렸다.종수는 백인서를 잠시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홍이 누님은 한 번도 이 사실을 말한 적 없었겠지.”백인서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백인서는 줄곧 자신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해 왔다. 어머니 백홍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세상에 더 이상 자신의 혈육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하지만 자신과 피를 나눈, 게다가 얼굴마저 똑같은 자매가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당시 홍이 누님은 두 명의 아이를 낳았어. 하지만 너희는 사생아였고 이름도 가문도 없었지.”종수는 조용히 말했다.“홍이 누님은 입지도 부족했고 평판 또한 좋지 않았어. 늘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살아야 했지. 그래서 두 아이를 모두 데리고 있을 수 없었기에 결국 동전을 던져 남을 아이와 떠날 아이를 정했어.”백인서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그리고 시연이가 남게 되었어.”종수는 백인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그리고 너, 인서... 너는 떠나는 쪽이었어.”백인서라는 이름도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떠날 인연이라는 뜻을 담아...“홍이 누님은 널 정대명에게 맡겼고 매달 돈을 보내며 널 돌보게 했지. 그 작은 마을에 널 숨긴 이유는 그곳이 세상과 단절된 곳이라 누군가 널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홍이 누님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 너도 알고 있겠지. 만약 경찰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너와 시연의 인생은 평생 망가졌을 거야.”백인서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흥, 그 작은 마을이 정말 그렇
최지용이 말을 이으려 하자 표아정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머니가 직접 데려온 사람들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남매는 나이는 어리지만 움직임이 번개처럼 빠르고 머리 회전도 뛰어났다. 혹독한 훈련을 버텨내고 선발된 이들이니 그 실력만큼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표아정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왜? 어머니가 보낸 사람들이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거야?”“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알아, 네가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표아정이 최지용을 힐끔 바라보았다.“네 마음 이해해. 그런데 말이야, 아들. 어떤 일이든 급해한다고 해결되지 않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함을 유지해야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백인서는 이미 밀실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어둠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관자놀이에서는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머릿속이 비어 있는 듯 혼란이 가득했다. 겨우 몸을 일으킨 백인서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참 동안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병원, 복도, 그리고 그 아저씨...백인서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다 무릎이 옆에 있던 서랍장에 부딪혀 적막한 공간에 큰 소리가 울렸다. 백인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조용히 울리는 발소리, 그리고 낮고 거친 목소리가 어둠 속을 가르며 들려왔다.“깨어났군.”백인서는 얼어붙은 듯 몸을 멈췄다.“누구세요?”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들어왔고 백인서는 눈앞의 사람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아저씨?”백인서는 놀라서 소리쳤다.종수는 아무 말 없이 백인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백인서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두 다리는 멀쩡했고 심지어 젊은이들보다 더 날렵했으며 움직임에는 힘이 넘쳤다. 그동안의 세월은 그에게 태연히 위기를 마주하는 침착함과 냉혹한 결단력을 심어준 듯했다.“정말... 아저씨예요?”백인서의 목소리가 떨렸다.“아저씨가 왜....”“그래, 나야.”종수는 낮은
시간이 흐를수록 백시연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표아정과 최지용이 주방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정말 송어찜을 만들기 위해서일까?혹시 최씨 가문의 사모님이 백인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일부러 이렇게 방치하는 건 아닐까?백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종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모두 백인서가 어두운 방에 갇혀 있는 사진이었다.[알겠어요.]백시연은 답장을 보냈다.[백인서를 잘 감시하세요. 하지만 앞으로는 저한테 메시지 보내지 마세요. 지용 씨가 볼 수도 있어요.]문자를 보내자마자 백시연의 다른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권씨 가문과 연락할 때만 사용하는 전용 휴대전화였다.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백시연의 눈에 짜증 섞인 기색이 스쳤고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죠?”“무슨 일이냐고?”전화기 너머의 권욱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도대체 골수 검사는 언제 와서 받을 건데?”백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에 있는 도우미를 피해 구석으로 걸어갔다. 백시연은 목소리를 낮추며 차갑게 대답했다.“흥, 그걸 왜 저한테 묻죠? 오라버니, 부인의 ‘성의’가 너무 부족한 거 아닌가요?”“너...”권욱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목소리를 차분히 가다듬으며 말했다.“온유 상태가 더 나빠졌어. 와서 온유라도 보고 가면 안 되겠니?”“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요.”“돈이 필요한 거 아니야?”백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돈 줄게.”권욱은 냉정하게 말했다.“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그저 내 딸을 구하겠다는 약속만 지켜줘.”“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네 모든 조건을 들어줄 수 있어!”권욱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백시연, 내 딸을 구해주겠다던 약속은 지켜!”백시연은 핸드폰 마이크를 손으로 꼭 감싸며 주위를 경계하듯 둘러보았다.최씨 집안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마지못해 권욱의 요구에 대답했다.“지금은 곤란해요... 조금만 기다려요. 곧 갈 테니까.”바로 그때, 표아정이 환한 미소를 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