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수가 집에 들어서니 강서연이 부엌에서 반찬 두 접시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강서연은 구현수를 보더니 근심 어렸던 얼굴에 애써 웃음을 띄웠다.구현수는 손을 씻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는 하루 종일 훈련한 탓에 배가 무척 고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보자 식욕이 저절로 당겨 밥그릇을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맞은 편에 앉은 강서연은 가만히 앉아 꿈쩍도 하지 않는다."무슨 일 있어?"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에 강서연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러면 빨리 밥 먹어."구현수는 고기 한 점을 집어 강서연의 접시에 담았다."보기만 하면 배가 저절로 불러?"강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정말 입맛이 없었다. 이때 '띵' 하고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동생 윤찬이 보낸 문자였다."누나, 엄마 병원비는 언제 가져올 수 있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더 이상 지급 안 하면 약을 끊는대!"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침실 안의 낮은 서랍장을 바라보았다.지난번에 구현수가 준 금 장신구들, 특히 그 옥을 박은 팔찌는 꽤 값이 가 보였다..."뭘 멍하니 생각하고 있어?"강서연은 갑자기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남자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몸을 약간 떨었다. 매번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그의 남다른 기세는 무언의 강한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아무것도 아니에요..."강서연은 조용히 말했다.수저를 내려놓은 구현수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야?"강서연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구현수는 서두르지 않고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더니 다시 혼자 식사하기 시작했다.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그도 더는 묻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참지 못하고 저절로 말할 때가 오겟지...그날 밤 강서연은 마음이 어수선해서 윤찬이 보낸 메시지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돈 버는 방법을 머릿속에 떠
전화 저편에는 침묵이 흘렀다.휴대폰을 사이에 두고도 배경원은 구현수의 무표정한 얼굴을 짐작할 수 있었다.희노애락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의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마크니..."형!"배경원이 말을 이었다."형은 할 말 없어요?""어떤 말?"구현수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었다."그건 내가 선물한 것이니 이젠 그녀의 물건인 거야. 어떻게 처리하는가 또한 그녀의 일이기도 하고.""그래도 형님 증조할머니께서 쓰셨던 '금풍옥로' 인데..."구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벨에 무게를 가했다."그 팔찌를 얼마에 팔았어?""형수님이 안 팔던데요!"구현 수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어젯밤부터 그는 강서연이 안절부절못하며 계속 서랍 쪽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아마도 그녀가 장신구를 팔 거라 예상했다. 혼수를 강유빈한테 빼앗기고 어머니 병원비도 마련해야 하니 장신구를 팔지 않고서는 당장 이 돈을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팔찌를 그대로 가지고 올 줄은 몰랐다."형, 나 오늘 마침 가게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팔찌 꺼내자마자 이내 알아봤지 뭐예요. 난 또 어느 간 큰 도둑이 훔친 줄 알았는데, 형수님이었네요! 형수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 같아요. 난 일부러 점원에게 비싼 값을 쳐주라고 했는데... 아, 물론, 금풍옥로의 원래 가치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형수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는 값이 많았을 거예요!""어, 그리고?"배경원은 머리를 긁적였다."그런데 저당 안 하겠대요!"구현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젯밤 강서연의 걱정스러운 모습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이미 부부가 되었는데도 그녀는 아직도 그에게 마음 줄 생각이 없는 건가? 이런 어려움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고... 구현수는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이 일은 더 신경 쓰지 마."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땅이나 잘 관리해. 난 그 땅이 강 씨 손에 넘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강명원 그 늙은이에게 압력 더 가해봐. 그들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어.""강
저녁 식사 후, 강서연은 과일 접시를 들고 구현수 옆에 와서 앉았다.한참이나 계속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구현수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들여다보았더니 외국어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화면 속 양복 차림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공한 사람들처럼 보였다.이때 구현수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코끝이 서로 닿을 뻔하였다. 갑작스레 생긴 일이라 둘은 한참이나 이렇게 서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서연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은 바로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왜 그래?"구현수가 물었다."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강서연은 어색한 듯 두 손을 꼬면서 말을 돌렸다."뉴스 보고 있나요?""경제 신문을 읽는 중이야.""그런 것도 봐요?"구현수는 얼굴에 옅은 웃음을 띠더니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서연을 바라보았다."그럼 당신은 싸움도 하고 감옥에도 갔다 온 나 같은 사람이 어떤 것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그런 뜻이 아니에요!"강서연은 얼굴이 빨개졌다."전 그저 현수 씨가 이렇게 많은 걸 알고 있는 줄 몰랐어요."갑자기 조용해지는 바람에 주위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약간 긴장했던 강서연은 구현수의 태연한 표정을 보고는 자신이 부질없는 걱정을 한 거로 생각했다.분명 합법적인 부부인데 같이 있을 때 이렇게도 어색하다니...강서연은 자신이 너무 멍청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며 작은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때렸다.이 작은 동작은 구현수의 눈에 들어왔다.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구현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과일을 먹으며 물었다."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네? 없어요."강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돈이 모자라지 않아?""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요?""아무 얘기라도 하고 싶어서."구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부부들은 어떤 대화를 나누지? 모두 이런 사소한 일상을 얘기하는 게 아닐까?"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아님, 우리
강서연은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윤찬은 병원비뿐만 아니라 엄마를 이미 VIP 병실로 옮겼고, 지금은 전담 간병인이 옆에서 도울 뿐만 아니라, 최첨단 수입 약품도 쓸 수 있다고 말했다."누나, 사실 누나 아버지는 아직 엄마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것 같아."윤찬은 단순하게 웃으며 말했다."참, 인제 그만 끊어야겠어. 야간 자습 가야 해! 그리고 누나, 내 책값 잊지 마, 지금 반에서 나 혼자만 안 낸 것 같단 말이야!”"알았어..."강서연은 윤찬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강유빈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아니면 강명원이 엄마에 대해 아직 옛정이 남아있는 걸까?하지만 이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그날 강 씨 가족이 그녀에게 대하던 태도를 돌이켜보기만 하면 혼수는 물거품이 된 게 분명했다.강서연은 혼수를 다시 받을 수 있다고 생각지도 않았다.그녀는 서둘러 침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팔찌를 상자에 넣어두었다.'저당하지 않길 잘했어!'그녀는 웃으며 손으로 상자 안의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앞으로 너희들을 잘 보호할게. 절대 너희들을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을 거야!"구현수가 문밖에서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니 여자의 장난스러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입꼬리에도 따스한 미소가 어렸다.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배경원이 보낸 메시지에는 '완료' 라는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알았어, 나중에 보상해 줄게.」구현수는 항상 말을 아꼈고 오직 기분이 좋을 때만이 답장을 보내곤 했다. 배경원도 이렇게 많은 회답을 받아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주말, 강서연은 집 청소를 하고 있었고 구현수는 마당에서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그녀는 그의 리듬 있는 타격 소리를 들으며 가볍게 웃었다. 남자들은 왜 이런 폭력적인 운동에 푹 빠져 매일 연습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운동을 막을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매우 지지했다.집에서 샌드백을 치는 편이 오히려 나가서 싸우는 것보
배경원은 다리를 툭 치며 그제야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아챘다.“찬... 찬혁아, 제발 나 좀 도와줘!”배경원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난 연준 형 여자를 뺏을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게다가 강서연 같은 앳된 여자는 내 스타일도 아니라고! 연준 형 진짜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스타일을 좋아할 수 있지?”유찬혁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그도 그럴 것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늘 차갑고 단호하던 최씨 일가 셋째 도련님께서 어느덧 구현수로 변신해 강서연 같은 어린 여자에게 이토록 신경 쓰다니, 실로 의아할 따름이었다.“연준 형이 말했잖아. 이 결혼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결혼을 빌미로 잠시 은신하는 것뿐이라고 말이야...”“넌 그 말 믿어?”유찬혁이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두고 봐. 강서연 절대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야. 어쩌면 그때 가서 연준 형이 오성에 돌아가지 않으려 할지도 몰라!”...점심을 먹고 난 후 구현수는 강서연에게 인사하고 바로 외출했다.이 마을은 그다지 크지 않다. 강서연이 시집오기 전에 구현수는 마을 오솔길을 따라 자주 산으로 갔었다. 그곳엔 인적도 드물고 공기가 신선하여 혼자 있기 참 좋은 장소였다.구현수는 본인만의 시간을 가지며 앞으로의 일을 세심하게 계획하곤 했다.다만 오늘은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강유빈이 전화로 내뱉었던 험한 말들이 줄곧 귓가에 맴돌았다.구현수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계속 산 정상으로 올라가려 했는데 불쑥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현수 씨!”한 젊은 남자가 팔을 휘두르며 아래에서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구현수는 흠칫 놀라더니 미간을 살짝 구겼다.“아까 산기슭에서부터 현수 씨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빨리 올라왔어요? 저 겨우 쫓아왔잖아요! 아 참, 몸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았어요? 제가 가서 약을 더 구해드릴까요?”구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고마워요, 다 나았어요. 그땐 제가 너무
“어이, 예쁜 색시, 팬케이크 할 줄 알아?”몇몇 남자들이 구현수의 집 앞에 서서 강서연에게 음흉한 미소를 날렸다.주위에 구경꾼들도 꽤 있었지만 이 건달들이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아무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다들 쌀쌀맞게 구경만 할 뿐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예쁜 강서연을 홀로 집에 두고 나가버린 구현수가 죄인이었다. 대놓고 딴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격이 돼버렸으니까!강서연은 심장이 빨리 뛰고 낯빛도 창백해졌지만 꿋꿋하게 버텨냈다.“듣자 하니 이 어여쁜 색시가 재벌 집 따님이라면서?”“어쩐지, 재벌 집 따님께서 주방일을 할 리가 있겠어? 팬케이크가 웬 말이냐고!”“이봐, 색시, 아직 여기 룰을 모르나 봐?”건달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강서연을 아래위로 흘겨봤다.“우리 여기서는 갓 결혼한 여자들이 직접 팬케이크를 만들어 집집이 돌려야 해! 결혼한 지가 며칠인데 왜 우린 아직도 못 먹어봤지?”“죄송해요, 그런 규칙이 있는 줄 몰랐어요.”강서연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다 만들면 집집이 돌릴게요. 저희 남편이 곧 오니 다들...”강서연이 대문을 닫으려 할 때 한 남자가 불쑥 문 사이에 무릎을 끼워 넣었고 다른 두 남자도 옆에서 거들먹거렸다. 강서연은 당황하여 손이 떨렸다. 세 건달은 문을 박차고 마당에 뛰쳐 들어가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거 참 생각 밖이야. 구현수 그 빌어먹을 자식이 이렇게 예쁜 여자를 얻어!”남자들의 눈빛이 점점 더 음침해졌다.강서연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역겨움을 느끼며 두 손으로 가슴을 껴안고 경계심 가득한 눈길로 그들을 쳐다봤다.“여긴 우리 집이에요. 당장 나가란 말이에요!”그녀는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남편이 곧 있으면 돌아와요! 우리 남편 어떤 사람인지 다들 잘 알고 있죠!”남자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사악한 미소를 날렸다.“알지 그럼, 싸움만 나면 지리고 도망치잖아!”“이봐, 예쁜이, 아직 잘 모르나 본데! 구현수는 예전에 참 찌질해 빠졌어. 매번 우리가 싸울 때마다 걔
“괜찮아, 내가 왔잖아.”구현수는 그녀더러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으라고 했다.강서연은 순순히 그의 말대로 했다. 한편 구현수는 그녀를 뒤따라가지 않았다. 강서연은 방에 들어가 쿵쾅대는 문밖의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건달들의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그녀는 창밖 너머로 건달들이 한바탕 얻어맞아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을 지켜봤다. 다들 바닥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마당의 모랫바닥은 피로 흥건해졌다.구현수는 아직 직성이 안 풀렸는지 좀 전에 그녀가 잡았던 몽둥이로 한 남자의 다리를 힘껏 내리쳤다...“한 번만 더 내 아내를 건드려. 그땐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로 끝나지 않을 거야!”구현수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싸늘하게 한 글자씩 내뱉었다.건달들은 지리며 허겁지겁 도망쳤다.강서연은 방 안에 숨어 쿵쾅대는 심장을 겨우 추스르며 호흡까지 가빠졌다.이때 구현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남편의 몸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지만 결국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아까 많이 놀랐지?”구현수가 다가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강서연은 머리를 내저으며 두 팔을 벌려 그를 안고 작은 얼굴을 그의 품에 기댔다.다소곳하게 품에 안긴 그녀를 보니 구현수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던데.”구현수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그 자식들이 집 마당에 쳐들어왔을 때 몽둥이를 들고 내쫓을 엄두가 났어?”“안 그럼 어떡해요?”강서연이 고개를 들고 예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주위에 날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당신도 집에 없는데 내가 용감해질 수밖에 없잖아요...”“그래, 다 내 탓이야. 너와 함께 집에 있어 줘야 했어.”구현수가 나지막이 말했다.“하지만 그 인간들 앞으로 더는 찾아오지 못할 거야.”강서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작은 손으로 탄탄한 그의 가슴 근육을 무심코 어루만졌다. 남자의 튼실한 몸매가 순간 그녀를 설레게 했다.구현수가 싸움을 잘
둘은 동시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구현수는 강서연에게 먼저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곁눈질한 후 홀로 가서 문을 열었다.신석훈은 문밖에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현수 씨가 사람을 때렸다고 들었...”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구현수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보더니 그는 식겁하여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헐, 진짜였네요!”“건달들 몇 명일 뿐이에요.”구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너무 심하게 때린 것도 아니에요. 안 죽어요, 그 사람들.”“안 심하다고요?”신석훈은 그를 한쪽 옆으로 끌고 와 나지막이 말했다.“내장까지 파열돼서 지금 강주시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요!”구현수는 눈썹만 들썩일 뿐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그들은 죽음을 자초한 거나 다름없었다. 감히 겁도 없이 강서연에게 집적거렸으니 죽어도 쌀 목숨이었다.“그리고 또 한 명은 다리가 부러졌다던데!”신석훈은 안달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그 사람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요?”“그걸 내가 알아야 해요?”“현수 씨, 그 사람들 틀림없이 복수하러 올 거예요!”구현수는 핏자국이 묻은 웃옷을 벗어 한쪽 옆에 내던지고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실은 그도 몇몇 건달들이 집안 배경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마을 이장의 아들, 면장의 조카 등등 보잘것없는 이따위 집안 세력을 믿고 마을에서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구현수는 진작 이런 건달들을 다스리고 싶었다.“아내분 데리고 일단 여길 떠나는 게 어때요? 다른 곳으로 가서 잠시 피해 있어요!”신석훈이 그에게 제안했다.“그 사람들은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에요. 보복을 당할 게 뻔한데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말고 얼른 떠나요. 그 사람들과 절대 정면충돌해선 안 된다고요!”구현수는 그런 그가 너무 시끄러웠다.이제 막 거절하려던 참에 그는 곁눈질로 침실 문 앞에 서 있는 강서연을 보게 되었다.“내 생각엔... 우리가 피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구현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흥미진진하게 물었다.“왜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