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예쁜 색시, 팬케이크 할 줄 알아?”몇몇 남자들이 구현수의 집 앞에 서서 강서연에게 음흉한 미소를 날렸다.주위에 구경꾼들도 꽤 있었지만 이 건달들이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아무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다들 쌀쌀맞게 구경만 할 뿐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예쁜 강서연을 홀로 집에 두고 나가버린 구현수가 죄인이었다. 대놓고 딴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격이 돼버렸으니까!강서연은 심장이 빨리 뛰고 낯빛도 창백해졌지만 꿋꿋하게 버텨냈다.“듣자 하니 이 어여쁜 색시가 재벌 집 따님이라면서?”“어쩐지, 재벌 집 따님께서 주방일을 할 리가 있겠어? 팬케이크가 웬 말이냐고!”“이봐, 색시, 아직 여기 룰을 모르나 봐?”건달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강서연을 아래위로 흘겨봤다.“우리 여기서는 갓 결혼한 여자들이 직접 팬케이크를 만들어 집집이 돌려야 해! 결혼한 지가 며칠인데 왜 우린 아직도 못 먹어봤지?”“죄송해요, 그런 규칙이 있는 줄 몰랐어요.”강서연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다 만들면 집집이 돌릴게요. 저희 남편이 곧 오니 다들...”강서연이 대문을 닫으려 할 때 한 남자가 불쑥 문 사이에 무릎을 끼워 넣었고 다른 두 남자도 옆에서 거들먹거렸다. 강서연은 당황하여 손이 떨렸다. 세 건달은 문을 박차고 마당에 뛰쳐 들어가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거 참 생각 밖이야. 구현수 그 빌어먹을 자식이 이렇게 예쁜 여자를 얻어!”남자들의 눈빛이 점점 더 음침해졌다.강서연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역겨움을 느끼며 두 손으로 가슴을 껴안고 경계심 가득한 눈길로 그들을 쳐다봤다.“여긴 우리 집이에요. 당장 나가란 말이에요!”그녀는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남편이 곧 있으면 돌아와요! 우리 남편 어떤 사람인지 다들 잘 알고 있죠!”남자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사악한 미소를 날렸다.“알지 그럼, 싸움만 나면 지리고 도망치잖아!”“이봐, 예쁜이, 아직 잘 모르나 본데! 구현수는 예전에 참 찌질해 빠졌어. 매번 우리가 싸울 때마다 걔
“괜찮아, 내가 왔잖아.”구현수는 그녀더러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으라고 했다.강서연은 순순히 그의 말대로 했다. 한편 구현수는 그녀를 뒤따라가지 않았다. 강서연은 방에 들어가 쿵쾅대는 문밖의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건달들의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그녀는 창밖 너머로 건달들이 한바탕 얻어맞아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을 지켜봤다. 다들 바닥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마당의 모랫바닥은 피로 흥건해졌다.구현수는 아직 직성이 안 풀렸는지 좀 전에 그녀가 잡았던 몽둥이로 한 남자의 다리를 힘껏 내리쳤다...“한 번만 더 내 아내를 건드려. 그땐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로 끝나지 않을 거야!”구현수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싸늘하게 한 글자씩 내뱉었다.건달들은 지리며 허겁지겁 도망쳤다.강서연은 방 안에 숨어 쿵쾅대는 심장을 겨우 추스르며 호흡까지 가빠졌다.이때 구현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남편의 몸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지만 결국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아까 많이 놀랐지?”구현수가 다가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강서연은 머리를 내저으며 두 팔을 벌려 그를 안고 작은 얼굴을 그의 품에 기댔다.다소곳하게 품에 안긴 그녀를 보니 구현수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던데.”구현수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그 자식들이 집 마당에 쳐들어왔을 때 몽둥이를 들고 내쫓을 엄두가 났어?”“안 그럼 어떡해요?”강서연이 고개를 들고 예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주위에 날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당신도 집에 없는데 내가 용감해질 수밖에 없잖아요...”“그래, 다 내 탓이야. 너와 함께 집에 있어 줘야 했어.”구현수가 나지막이 말했다.“하지만 그 인간들 앞으로 더는 찾아오지 못할 거야.”강서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작은 손으로 탄탄한 그의 가슴 근육을 무심코 어루만졌다. 남자의 튼실한 몸매가 순간 그녀를 설레게 했다.구현수가 싸움을 잘
둘은 동시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구현수는 강서연에게 먼저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곁눈질한 후 홀로 가서 문을 열었다.신석훈은 문밖에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현수 씨가 사람을 때렸다고 들었...”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구현수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보더니 그는 식겁하여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헐, 진짜였네요!”“건달들 몇 명일 뿐이에요.”구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너무 심하게 때린 것도 아니에요. 안 죽어요, 그 사람들.”“안 심하다고요?”신석훈은 그를 한쪽 옆으로 끌고 와 나지막이 말했다.“내장까지 파열돼서 지금 강주시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요!”구현수는 눈썹만 들썩일 뿐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그들은 죽음을 자초한 거나 다름없었다. 감히 겁도 없이 강서연에게 집적거렸으니 죽어도 쌀 목숨이었다.“그리고 또 한 명은 다리가 부러졌다던데!”신석훈은 안달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그 사람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요?”“그걸 내가 알아야 해요?”“현수 씨, 그 사람들 틀림없이 복수하러 올 거예요!”구현수는 핏자국이 묻은 웃옷을 벗어 한쪽 옆에 내던지고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실은 그도 몇몇 건달들이 집안 배경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마을 이장의 아들, 면장의 조카 등등 보잘것없는 이따위 집안 세력을 믿고 마을에서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구현수는 진작 이런 건달들을 다스리고 싶었다.“아내분 데리고 일단 여길 떠나는 게 어때요? 다른 곳으로 가서 잠시 피해 있어요!”신석훈이 그에게 제안했다.“그 사람들은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에요. 보복을 당할 게 뻔한데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말고 얼른 떠나요. 그 사람들과 절대 정면충돌해선 안 된다고요!”구현수는 그런 그가 너무 시끄러웠다.이제 막 거절하려던 참에 그는 곁눈질로 침실 문 앞에 서 있는 강서연을 보게 되었다.“내 생각엔... 우리가 피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구현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흥미진진하게 물었다.“왜
그날 오전의 회의는 유난히 견디기 어려웠다.강서연은 왠지 방진영이 줄곧 야릇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고 이에 성소원은 적의에 찬 눈빛으로 날카롭고 예리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것만 같았다.회의가 끝난 후 방진영이 먼저 찾아와 말을 꺼내기 전에 강서연이 재빨리 깍듯하게 웃으며 핑계를 둘러대고 회의실을 나섰다.문을 나서기 전 성소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대체 뭐 하는 거야? 여우 같은 년한테 아주 시선을 못 떼던데!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강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점심시간에 이 일을 임우정에게 알리자 그녀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큰 회사에서 하필이면 그 두 원수와 마주치다니, 임우정도 기막힌 우연에 한탄했다.“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조심스럽게 상대해.”임우정은 나지막이 그녀에게 말했다.“서연아, 난 이미 영업팀에서 나오다 보니 널 챙겨주기가 힘들어. 게다가 그 성소원 씨 외삼촌이 이 회사 대주주라 평소에 그것만 믿고 기고만장하게 날뛰어... 아무튼 앞으로 네가 갈 길이 험난할 거야. 조심스럽게 상대해야 해!”“알았어요, 걱정 말아요.”강서연이 가볍게 웃었다.“나만 실수하지 않으면 성 매니저도 딱히 날 어떻게 하지 못할 거예요.”다만 그날 오후 성소원은 일부러 그녀에게 미션을 하나 주었다.“잠시 후에 티타임이 있을 예정이야. 이건 참석자 명단이고. 전부 우리 회사의 중요한 바이어들이니 준비 제대로 해.”강서연은 머리를 끄덕였다.명단에 대략 십여 명 인원이 적혀 있었다. 이번 티타임은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고객이 만족할 수 있게 깔끔하고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참 그리고, 진안 그룹의 은 대표를 많이 신경 써야 할 거야.”성소원이 입꼬리를 올렸다.“모든 방면에 막강한 여자 대표인데 유독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서 디저트 준비할 때 절대 땅콩이 들어가면 안 돼.”“네, 명심하겠습니다.”강서연은 명단을 들고 자리를 나섰다.비록 첫 출근한 신인이지만 그녀는 조리 밝고 꼼꼼하게 정
“영업팀은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 중 하나에요.”성소원이 일부러 회사 정기 회의에서 야유 조로 비아냥거렸다.“누구든 영업에 천부적 재능이 없으면 자리만 떡하니 차지하지 말고 다른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남겨줘야죠! 우리 회사는 노후 보내러 온 장소가 아니란 걸 다들 잘 알고 있겠죠? 오더를 한 개도 내리지 못한 채 기본 수당만 받는 사람은 앞으로의 진로를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요!”강서연은 줄곧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후 내내 그녀는 구겨진 미간을 펴지 못했다.다만 종일 지쳐있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문을 열자마자 구현수가 양반처럼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주방은 텅 비었고 목을 축일 따뜻한 물조차 없었다.강서연은 오랫동안 참은 서러움이 그 순간 완전히 폭발하고 말았다.“당신... 밥을 안 지었어요?”구현수가 흠칫 놀라더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눈앞의 그녀는 작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강서연은 맑고 커다란 두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만 질문 조의 말투가 전혀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서러움에 북받친 새신부가 제 남편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것만 같았다.구현수는 가슴이 움찔거려 그녀를 더 지그시 바라봤다.“왜 그래?”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무고한 표정으로 물었다.“결혼한 뒤로 줄곧 당신이 밥을 했잖아?”강서연은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구현수의 체구에서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녀 앞에 서 있으니 덩치가 훨씬 더 커 보였고 순간 강서연은 마냥 연약해 보였다.게다가 그녀의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럽게 포용해주다 보니 구현수를 탓할 것도 없었다.다만...“그래요, 맞아요.”강서연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줄곧 내가 밥을 했죠. 하지만 이젠 출근도 해야 하잖아요. 현수 씨가... 현수 씨가 집안일을 좀 분담하면 안 되나요? 이 집에 나만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오늘 늦게 돌아왔는데 현수 씨가 밥을 짓지 않더라도 최소한 식자재는
강서연은 이 제안을 미처 거절할 새도 없이 구현수에게 이끌려 집 문을 나섰다.가는 길에서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머릿속엔 오직 이까짓 월급으로 무엇을 먹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그녀는 구현수를 힐긋거리며 생각했다.‘현수 씨는 줄곧 가난하게 살아서 강주시에 어떤 음식점들이 있는지 모를 거야! 현수 씨 소비 수준이라면 길거리 음식으로도 대충 끼니를 때울 수 있어. 그리고 어떤 음식점들은 주식이 무한 리필이라 충분히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야.’강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씩 웃었다.그녀는 결혼한 이후로 줄곧 아껴 쓰며 검소하게 생활했다. 평소 끼니를 준비할 때도 저렴한 채소만 골라서 샀다. 다만 전에 강씨 일가의 연장자 도우미가 말하기를 젊은 부부는 열정이 식어가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 가끔 나가서 로맨틱한 데이트를 하는 것도 부부의 감정을 더 승화할 수 있다고 했다.‘그럼... 오늘 아예 현수 씨를 데리고 밖에서 거하게 한 끼 먹을까?’강서연은 생각에 푹 빠져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보니 어느덧 구현수와 함께 가장 번화한 거리의 제인 호텔 입구에 떡하니 서 있었다!“여기로 해.”구현수는 마치 재래시장에서 배추 고르듯 홀가분하게 말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여기서 먹자고.”구현수가 실눈을 뜨고 가볍게 웃었다.“이 호텔 괜찮은 것 같아.”강서연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심코 가방을 꽉 잡았다.이곳은 강주에서 가장 비싼 오성급 호텔이라 그녀는 평소 문 앞을 지나면서도 고개 들어 간판을 쳐다보지 못했다.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으면 그녀의 월급으로 아마 밑반찬 한 접시도 사지 못할 것이다!구현수가 그녀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종업원 두 명이 깍듯하게 90도 경례를 했고 매니저가 앞으로 마중 나오며 노련하게 미소 지었다.“어서 오세요.”“현수 씨!”강서연은 불쑥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왜 그래?”“우리...”‘우린 돈이 모자란다고요. 딴 곳으로, 저렴한 곳으로 바꾸면 안 될까요? 우리와 같은
강서연은 낯빛이 살짝 변하더니 심장이 쿵쾅댔다.그가 뭘 알아낸 걸까?아니면 딴 사람들에게 강씨 일가에 사생아가 한 명 있는데 강유빈을 사칭하여 이 혼약을 이행했다고 엿들은 걸까? 그와 결혼한 여자는 사실 짝퉁이고 강씨 일가에서 애지중지 키운 딸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걸까?남자들은 다 허영심이 있다 보니 자신과 결혼한 배우자가 예쁜 재벌 집 딸이길 바라지 그녀처럼 못생기고 촌스러운 신데렐라길 원치 않을 것이다.강서연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녀는 절대 인정하면 안 된다고 되뇌었다. 구현수는 싸움을 벌여 감방까지 갔던 사람이다...그런 그가 작정하고 화를 내면 후폭풍은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네? 할 얘기라니요?”그녀는 맑고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며 애써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아 참, 나 이번 달에 실적이 별로 없어서 다음 달에 더 분발해야 해요! 그래서... 집에 돌아가 함께 밥 먹을 시간이 별로 없을 거예요. 현수 씨 혼자 잘 지낼 수 있죠?”“내가 애야?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구현수가 웃으며 그릇에 담긴 랍스터 볶음밥을 절반 덜어서 그녀에게 줬다. 강서연이 기어코 안 받으려 하자 구현수가 음침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내가 먹여줘?”그녀는 결국 목을 움츠리며 그에게 수긍했다.잠시 후 구현수의 휴대폰이 진동했는데 배경원한테서 온 문자였다.그는 몰래 주변을 살피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사악한 미소를 날리고 있는 배경원과 그의 옆에 서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유찬혁을 발견했다.“나 화장실 다녀올게.”구현수는 담담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하고는 레스토랑 복도 모퉁이로 걸어갔다.배경원은 끝내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부부가 애틋해 죽던데요?! 랍스터 볶음밥 1인분을 서로 한 숟가락씩 나눠 먹다니, 심지어 머리까지 맞대고요... 형이 이렇게 로맨틱한 사람인 걸 난 왜 전에 몰랐죠?”구현수가 힐긋 째려보자 배경원은 애써 입을 다물고 더는 나불거리지 못했다.“형, 경원이 뭐라 할
배경원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배씨 가문이 강주에서 세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깨알만 한 작은 회사까지 조사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신분으로 조사를 시작한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다.만에 하나 또 저번처럼 강명원을 처리하다가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는다면...배경원은 마른기침을 해대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형, 알아볼 순 있는데 미리 부정적인 얘기부터 해둘게요. 이 기간에 누군가가 헛소문을 퍼뜨리며 내가 형수님과 바람났다고 떠들어대도 절대 믿으면 안 돼요... 악!”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찬혁이 그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입사한 지 2개월이 되어가니 강서연은 더 열심히 일에 전념했다. 사회초년생의 생존 법칙도 거의 파악했고 성소원의 괴롭힘에도 원만하게 해결할 줄 알게 되었다. 방진영이 대놓고 또는 은밀하게 집적거려도 그녀는 저 자신을 지키는 법을 터득하여 업무상에서 그와 최대한 적게 접촉하려 했다.다만 이 또한 엄청난 정력을 소모하기에 그녀는 매일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집에 돌아와 하이힐을 벗고 소파에 누우면 가끔은 너무 피곤해 새벽까지 잠들기가 일쑤였다. 깨어나 보면 몸에 얇은 담요를 덮고 있고 구현수가 옆 마룻바닥에서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그녀가 구현수의 소파를 차지하고 잠들었을 때 구현수는 침실에 있는 그녀의 침대에 들어가 자지 않았다.강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불안감을 느끼는 동시에 가슴에 따뜻한 전류가 흘렀다.구현수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회사 다니기 그렇게 힘들면 그냥 관둬, 하지 마.”“어떻게 그래요?”강서연이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일을 안 하면 무슨 돈으로 집세를 내고 밥을 먹어요 우리?”“이까짓 돈에 연연하는 거야?”“이까짓 돈이요?”강서연이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양반 납셨네요. 집안 살림을 안 하니까 쌀이 귀한 줄도 모르겠죠? 내 월급으로 우리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어휴, 오더를 많이 내리지 못하고 보너스를 받지 못하면 우리 앞으로 엄청 고생해야 할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
어느 일요일, 정승우는 돈을 꼭 쥔 채 백인서를 찾아갔다.처음에는 백인서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백인서는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맛있는 건 이미 다 먹어봤을 테니, 한 끼 식사가 백인서에게 그다지 특별할 리 없었다.그럼에도 정승우는 이 돈으로 어떻게든 백인서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결국 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이렇게 제안했다.“백 선생님, 우리 놀이공원 가요! 제가 살게요.”백인서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승우의 간절한 부탁에 결국 놀이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사실, 백인서도 놀이공원은 처음이었다.오랜 시간 오성에서 살았지만, 이런 곳에 대해선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여긴 웃음과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곳이었고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처럼 느껴졌다.늘 자신에겐 잿빛 하늘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최지용을 만난 후에도 이곳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커플들이 관람차를 타면 결국 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인서는 최지용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기에 그 소문이 괜히 두려워 오지 않았던 것이다.“백 선생님, 무슨 생각 해요?”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백인서를 현실로 끌어당겼다.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 가득한 눈을 내려다보았다.“제가 이미 자유 이용권을 사뒀어요.”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자유 이용권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자유 이용권이 뭔지 아세요? 그거 있잖아요, 놀이공원의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거요! 따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요!”“생각보다 똑똑하네.”백인서는 미소를 지었다.“적응력도 빠르고.”“똑똑하지 않으면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없잖아요!”“그래, 오늘은 네 말에 따를게.”백인서는 정승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먼저 어떤 걸 타볼까?”남자애들은 자극적인 놀이기구를 특히 좋아하곤 했다. 정승우는 백인서를 데리고 롤러코스터, 자이로드롭, 급류타기 같은 놀이기구들을 함께 탔다.하지만 백인서는 오히려 회전목마를 타고 싶었다.두 사람은 떠들썩한 놀이공원에서 땀을
정승우는 정대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정대명은 문을 열어 정승우를 들여보냈다. 정승우는 방 안을 둘러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방은 마치 금으로 뒤덮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정대명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정승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런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여긴 왜 온 거야?”정대명은 거칠게 정승우의 등을 밀며 물었다.“지금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정승우는 정대명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그냥 좀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왔죠.”“네가 날 보러 왔다고?”정대명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소리를 들은 듯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개자식이 언제부터 제 아비를 생각했다고! 흥!”정승우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제정신이라면 주먹만 휘두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좋아요, 그러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술 마실 시간 뺏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정승우는 정대명의 손에 들린 술병을 힐끔 보고, 시선을 그의 바지 주머니로 옮기며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저, 다 봤어요!”“뭐?”“그 여자가 아버지에게 돈을 준 거요.”정대명은 당황하며 정승우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정승우는 재빠르게 옆으로 비껴가며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저, 다 봤고, 다 들었어요! 두 분은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이 자식아, 헛소리하지 마!”정대명은 부끄러움과 분노에 휩싸였다. 또 영미의 경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일이 절대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헛소리 아니에요.”정승우는 이례적으로 침착한 표정이었다.“아버지는 그 여자랑 손잡고 우리 누나를 모함하려는 거잖아요!”“이 자식이!”“아버지, 제 입을 막고 싶으시죠?”“뭐?”정대명은 얼떨떨해졌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이 일은 비밀로 해 드릴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정승우는 천천히 말했다.“단, 입 막
영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정대명 씨! 말도 안 되는 말 좀 그만해요!”정대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마치 영미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았다.뭐 잘못 말했나? 남자아이가 더 귀한 건 사실이잖아! 이 여자도 참, 돈이 될 만한 건 마다하고 오히려 돈이 안 되는 여자아이를 고집하다니!아휴, 역시 여자는 태생부터 천박한 존재야!정대명의 어리석고 근거 없는 우월감이 속에서 서서히 꿈틀거렸다.“영미 아가씨, 아직도 잘 모르겠어? 하하!”그는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들며 말했다.“여자애는 어차피 자라 봤자 시집가야 할 운명이야. 결국 여자는 남자의...”“닥쳐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영미는 더는 말로 설득할 여유가 없었다.“당신은 그저 이 아이를 데려오면 돼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요!”분노에 휩싸인 영미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고 여기가 호텔 뒤뜰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사람이 없다 해도 여긴 엄연한 공공장소였다.“정대명 씨.”영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번뜩이고 정대명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꺼내 정대명의 얼굴에 내던졌다.정대명은 순간 당황했다. 지폐가 비처럼 흩날리며 땅에 떨어졌다. 돈을 보는 순간 정대명의 두 눈은 탐욕으로 반짝였고, 그는 모든 것을 잊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폐를 하나씩 주워 손에 꽉 쥐었다.영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제, 그 아이를 데려올 수 있겠죠?”정대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당연하지! 영미 아가씨, 걱정하지 마. 아이 하나가 아니라 열 명이라도 데려올 수 있어!”“말귀를 알아듣기나 한 겁니까?”영미는 정대명을 흘겨보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오직 그 아이 하나뿐이라고요!”“알았어, 알았어.”돈을 다 주운 정대명은 몸을 일으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돈을 세려다, 영미의 혐오 가득한 시선을 느끼고는 머쓱해졌다.정대명은 멋쩍게 웃으며 손을 옷에 닦고
정대명의 손이 살짝 떨렸다.오성에 오고 나서 정대명은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에 대한 소문을 여기저기서 들었다. 육씨 가문은 연예계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폭 배경의 가문이었다.“허허...”정대명은 쓴웃음을 지었다.“어린아이인데도 정말 대단한 배경을 가졌군. 태어날 때부터 복이 터졌어, 이렇게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다니!”영미는 방금 새로 한 네일아트를 무심히 살펴보며 정대명의 말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영미 아가씨.”대명이 누렇게 변한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저한테 이 사진을 주신 이유가 뭔가요?”“그 아이 어떻게 해서든 훔쳐 오세요.”“네?”정대명은 너무 놀라 휘청거릴 뻔했다.“왜 그러시죠?”영미는 고개를 돌려 정대명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당신네 마을은 인신매매가 심각한 곳으로 소문났잖아요. 아이나 여자를 납치하는 기술쯤은 다들 익혔다면서요? 심지어 당신 아내도 그렇게 끌려온 거 아닌가요? 흥, 아이 하나 훔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그게...”정대명은 말문이 막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굳어버렸다.“하하, 영미 아가씨, 너무 쉽게 말하네! 우리 마을에 끌려온 여자랑 아이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전문 인신매매범들이 하는 일이고 난 잘 몰라.”“정대명 씨.”영미는 진지한 눈빛으로 정대명을 쏘아봤다.“여기 호텔에서 지내시기에 편한가요?”“편안하지...”“그러면 계속 여기서 살고 싶다면 제 일을 도와줘야죠. 전에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요.”“하지만 영미 아가씨...”“이 아이를 훔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영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정대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아이는 지금 여덟 달 됐어요. 뒤집고 기어다니기도 하죠. 최씨 가문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집안이라 벌써 조기교육을 시작했더라고요.”정대명은 '조기교육'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최씨 가문의 경호원 두 명을 이미 매수해 뒀어요.”영미는 정대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