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영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권욱 앞에서 조순영은 강인하지도 않았고 날카로움이나 당당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조순영에게 남은 것은 그저 억울함과 끝없는 불만뿐이었다.알고 보니 최군형은 이미 동혜림이 몰래 사진을 찍고 있는 걸 보고 있었고 경호원에게 연락해 동혜림을 데려가게 하려 했었다.하지만 그 모든 것이 채 실행되기도 전에 조순영이 먼저 ‘정의를 실행’한 셈이었다.최군형은 두 사람을 보고 미소를 지은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백인서도 최군형을 따라갔다.조용한 곳에 이르자, 최군형은 걸음을 멈추고 몇 마디 더 당부했다.“제가 말한 것들, 다 기억하고 있죠?”백인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절대로 육연우가 소아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요.”“알겠습니다.”백인서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말했다.“우리가 미리 대비하는 게 맞아요. 지금 육연우의 정신 상태는 정상이 아니에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소아 언니는 임신 중이라 더 조심해야 해요.”“그렇죠.”최군형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보아하니 정말 소아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네요.”백인서는 잠시 멍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왜죠?”“그건...”백인서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소아 언니가 저한테 정말 잘해줬으니까요.”“소아는 예전에 육연우에게도 정말 잘해줬죠.”“저는 육연우와 달라요!”백인서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저는... 저는 절대 소아 언니를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최군형은 더 묻고 싶었지만,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사실 최군형은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중에는 최지용이 처음에 의심했던 것, 즉 백인서의 성향 문제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백인서와 최지용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백인서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최군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세상에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가족끼리도 이익 때문에 서로를 해칠 수 있다.가
이전에 성소월을 조사할 때 이미 알아냈다. 성소월은 몰래 오성의 작은 조직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 일당은 모두 소규모의 불량배들이었다.성소월이 절벽에서 떨어지자, 그 일당은 마치 바람 속 나뭇잎처럼 흔적도 없이 흩어져 사라졌다.육경섭은 그 일당을 얼마든지 잡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럴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겨우 몇 명의 작은 잡범일 뿐, 큰일을 일으킬 인물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은 암시장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희철 형이 그들에게 물어봤다더군.”육경섭은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그들은 삶의 길을 찾지 못해 작은 비리를 저지르며 보호비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더군. 그러다 약품 암시장을 눈여겨보게 됐고 이 업종이 돈이 된다고 생각해서 함께 일하게 된 거지.”“그러다 얼마 전, 육연우가 그들을 찾아간 거였어.”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최군형의 얼굴에는 서서히 어둠이 드리웠다.“육연우가 그들에게 구해달라고 한 수면제는 ‘자살 명약’이라는 약이었어. 몇 년 전에 이미 나라에서 판매 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여전히 암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었어. 그들 진술에 따르면 육연우는 그들에게 꽤 많은 돈을 건넸고, 약을 받은 후 정해진 용량대로 복용했기 때문에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던 거지.”“육연우가 약을 복용한 후에도,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약에 대한 주의 사항을 물었다고 하더군.”육경섭은 조사한 통화 기록도 보여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최군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연우는 사고 전에 실제로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역시 육연우가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이었군요!”최군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육연우는 이런 방식으로 군성의 마음에 죄책감을 심어, 군성이를 곁에 붙잡아두려 했던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속셈이죠!”육경섭의 얼굴이 굳어졌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군형아, 정말 미안하구나... 난 육연우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아버님, 이건 아버님의 잘못이
최군성의 만화 연재가 며칠째 업데이트되지 않았다.최군성의 만화는 1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탄탄한 팬층을 쌓았고 플랫폼에서도 좋은 추천 자리를 차지했다.그러나 갑작스러운 연재 중단은 플랫폼에 손실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추천 목록에서 곧바로 제외되었고 팬들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많은 사람들이 댓글에서 직업 정신이 없다며 비난했다. 팬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고 일부 악성 팬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비서가 이 사태를 조심스럽게 최군형에게 보고했다.최군형이 홍보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이미 누군가가 댓글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최 대표님, 우리가 처리할 필요가 있을까요?”최군형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누가 한 일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요?”홍보팀은 서둘러 조사를 시작했고 금세 답을 찾아냈다.“위치는 어느 작업실로 추정됩니다.”기술팀 직원이 대답했다.“이 댓글 관리 방식은 좀 단순하긴 한데, 불리한 댓글을 하나하나 지우고 긍정적인 댓글을 올려서 위로 올리는 방식입니다.”“단순한 방법이지만, 효과는 꽤 있네요.”“혹시 둘째 도련님 팬 아닐까요?”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이렇게 성가신 일을 도맡다니, 진정한 헌신이네요!”“쉿...”모두가 최군형의 표정을 살폈다.최군형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누군지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배윤아일 것이다.그러나 육연우는 최군성이 온라인에서 공격을 받을 때조차, 연락 한번 없었다.최연준과 강서연은 최군성의 상태를 걱정하며 하루에 세 번씩 최군형에게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최군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군성이를 지켜줄 사람이 있으니까요.”“무슨 말이야?”최군형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고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군형아.”강서연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네 동생이 요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고 거의 먹지도 않아... 심지어 만화도 그리지 않더구나. 이런 적은 없었잖아! 전에 누구를 만난
최군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천천히 최군형의 뒤를 따라갔다.형제는 차를 타고 교외로 나섰다. 해는 이미 저물어 하늘은 짙은 푸른빛을 띠었고 붉게 물든 노을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최군형은 텐트를 설치한 뒤, 최군성을 불러 함께 저녁을 먹었다.교외는 고요했고 밤하늘엔 수많은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최군성은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형제 둘만이 남은 이 공간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어릴 적, 두 형제는 남양에서 아무 걱정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종종 윤상 빌라의 개인 정원에서 "캠핑"을 하곤 했다.그때도 밤하늘은 별빛으로 가득했고 주위에는 반딧불이 어른거렸다.최군성의 마음은 조금씩 풀어졌고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군성아.”최군형이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지금 여기 우리밖에 없으니, 형이 너한테 솔직하게 묻고 싶어.”“응?”“너, 연우랑 계속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최군성은 순간 멍해졌고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형, 나...”최군형은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고 모든 걸 알아차렸다.“계속 갈 수 없다면, 여기서 그만둬. 이미 들인 시간이 아깝겠지만 계속 이 구멍을 메우기보다는 낫지 않겠어?”최군성도 그 이치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형, 그게 소유였으면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을까?”“그런 상황 자체가 없을 거야.”최군형은 최군성을 바라보며 말했다.“소유는 변하지 않았으니까.”최군성은 잠시 침묵했다.“난 아직도 연우를 처음 본 날이 생생해... 그때 육명진은 우리에게 소유라고 소개했지. 연우는 겁에 질린 얼굴로 다가와 차를 내주었고 그 목소리도 참 부드럽고 따뜻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최군형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고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사람은 변하잖아.”“왜 하필 연우가 변한 거야?”최군성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형, 사실 난 연우가 조
최군성은 깜짝 놀랐다. 최군형은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데리고 위층으로 향했다.한 층에 두 세대만 있었고 그들이 갈 곳은 금수 작업실 맞은편이었다.“여긴...”최군형은 열쇠를 최군성에게 건넸다.“앞으로 당분간 여기서 지내.”“뭐라고?”“이곳은 육자 그룹에서 개발한 아파트라 품질은 확실히 보장되지!”“그걸 말하는 게 아니고 나는...”최군성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맞은편 문이 살짝 열렸다.배윤아가 붓을 손에 든 채로,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최군성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기쁨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최군성은 배윤아의 작업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어수선한 상태였고 물감과 화판, 그림 용지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곳에 있던 아기 고양이들은 벌써 많이 자라 있었고 고양이들은 뚱한 표정으로 낯선 사람을 둥근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최군성은 크게 웃었다. 그동안 이렇게 즐겁게 웃은 건 처음이었다.최군형은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짐을 동생에게 건네고 배윤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앞으로는 군성이가 너 맞은편에 살게 될 테니, 잘 부탁한다!”아파트를 나서며 최군형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최군성을 배윤아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일 것이다.하지만...최군형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아직 처리되지 않은 일이 남아 있으니 완벽한 결말이라 할 수 없었다.그 생각이 스치자 최군형은 서둘러 육자 그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동혜림은 더 이상 회사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판매부의 일부 고객 정보를 헐값에 팔아넘길 계획을 세웠다.어쨌든 수년간 영업을 해왔으니 동혜림에게는 우수한 고객 자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하지만 지금 동혜림에게 중요한 건 돈이었고 무엇보다 육자 그룹에 대한 복수가 더 중요했다. 고객 자료를 유출하면 돈도 조금 벌 수 있고 육자 그룹의 평판을 망가뜨려 개인 정보 유출이라는 죄목을 안길 수 있을 터였다.동혜림은 휴일을 틈타
“아니에요...”동혜림은 몸을 떨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동혜림과 육연우는 같은 배에 탄 처지였다. 만약 동혜림이 고객 자료를 빼돌린 일이 알려지면 목격자인 육연우도 이 일에서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이사회에 있는 영악한 늙은이들은 이 일을 빌미로 육연우를 공격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육연우는 해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동혜림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차라리 육연우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럼, 돈을 벌어서 나누면 될 테니 말이다!“연우 아가씨.”동혜림은 마음을 다잡고 육연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씀드리죠. 전 이제 육자 그룹에서 더 버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저는 억울합니다! 그래서 회사를 떠나더라도 육자 그룹이 이 업계에서 평판을 망가뜨리고 싶어요. 이 고객 자료를 팔 생각인데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은 거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경쟁업체들이 육자 그룹이 고객 자료를 파는 회사라고 알게 될 거예요. 그럼 앞으로 육자 그룹이 좋은 파트너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해질 겁니다?”육연우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불법이에요!”“연우 아가씨!”동혜림은 눈에 악독한 표정을 띠며 웃었다.“이 일, 우리가 입만 다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나중에 일이 터지면 사람들은 그냥 육자 그룹이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육연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연우 아가씨, 저도 아가씨가 쉽지 않은 상황에 있는 걸 알아요.”동혜림은 설득하듯 부드럽게 말했다.“아가씨는 육 대표님의 사촌이시지만, 요즘 그 백인서이라는 여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잖아요. 마치 연우 아가씨를 대신하려는 것처럼요! 이걸 참을 수 있겠어요?”육연우의 주먹이 단단히 쥐어졌다.백인서의 이름이 나오자, 육연우의 화가 치밀어 올랐다.육연우의 마음에는 복수 이외에 다른 것은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사실, 육연우도 느끼고 있었다. 요즘 강소아가 백인서와 점점 가까워지고
육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백인서의 자료를 조용히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육연우는 고개를 돌려 동혜림에게 재촉했다.“다 끝났어요?”동혜림은 겁에 질린 채 억지로 용기를 내어 몇 가지 자료를 챙기고 컴퓨터에서 전자 파일을 찾아냈다. 두 사람은 모든 일을 서둘러 마치고 인사부를 빠르게 떠났다.육연우는 인사부 출입구의 사각지대를 잘 알고 있어, 의도적으로 CCTV를 피해 움직였다.그러나 두 사람은 몰랐다. 그 순간, 깊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화면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3일 후, 육자 그룹 이사회가 평소와 다름없이 열렸다.평소 잘 출석하지 않던 육연우가 이번에는 특별히 이사회에 참석했다.최군형도 참석했다. 육연우가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최군형의 시선과 마주쳤다. 육연우는 속으로 당황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최군형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 이사회의 주제는 육자 그룹의 미래 발전입니다. 각자 건설적인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십시오. 최근 작은 대표님이 몸이 좋지 않으니, 저에게 말씀하셔도 똑같습니다.”이사회의 고참들은 상황을 빠르게 눈치채고, 먼저 최군형에게 아부성 발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최상 그룹의 투자를 기대하는 발언을 했다.최군형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말없이 육연우를 바라보았다.다른 주주들이 모두 발언을 마치자, 육연우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했다.“저는 현재 회사가 인사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 있을 자격조차 없으며, 오성에 남아 있을 자격도 없습니다.”최군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최군성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육연우는 바로 사람을 시켜 주우남을 호출했다.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육연우는 주우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우남 씨는 판매부 팀장이니 부하 직원들의 인사 자료를 열람할 권한이 있죠, 그렇죠?”주우남은 잠시 당황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습니다.”“그럼 주우남
최군형은 옆에서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며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듯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최군형의 차가운 무관심은 회의실에 있던 주주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주우남 씨.”육연우는 마음을 추스르고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인사부에 가서 자료를 가져오지 않으려는 건, 분명히 백인서의 인사 기록이 비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거죠, 맞죠?”주우남은 백인서를 힐끗 쳐다보며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백인서 같은 사람, 과거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누가 알겠어요?”육연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백인서가 정말 결백하다면 왜 자기 부모의 이름조차 적지 않았을까요? 왜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 하는 거죠?”“백인서는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거예요! 내가 회사에 자주 오지 않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아요. 이건 육자 그룹 규정을 어긴 거라고요!”그때 몇몇 주주들이 육연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그 사람 뭔가 수상해 보였어요. 영업부 직원 맞나요?”“우리 육자 그룹은 큰 기업인데, 인사 문제는 신중해야 합니다!”“주우남 팀장님, 번거롭겠지만 그 직원의 자료를 가져와서 우리에게 보여주세요. 혹시 오해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자료를 보고 나면 연우 아가씨에게도 잘 설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주우남은 최군형을 바라보았으나 최군형은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육연우는 그 순간이 승리의 순간인 듯 기뻐하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최군형의 휴대전화에는 이미 인사부 출입구의 감시 카메라 영상이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을 육연우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바로 며칠 전 육연우와 동혜림이 한 짓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이었다.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최군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군형의 날카로운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육연우 씨의 말이 맞습니다.”최군형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자 그룹에는 분명히 그런 규정이 있습니다. 직원들은 입사 시 모든 정보를 정확하게 기재해야 하며 고의로 숨기면 안 됩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