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형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어떤 상황이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사실대로 말씀드린 것뿐인데...”“됐어요! 그... 군형 씨, 둘만 잠깐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최군형은 잠깐 생각하더니 은침을 챙기고 구봉남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차 안에서 방금 확인한 사실을 구봉남에게 전달했다.구봉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군형을 찾기 전에 먼저 병원에 갔었다. 그럼에도 그를 찾아온 이유는 그가 소문처럼 대단한지 확인하는 동시에 이 최군형이 그 최군형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는 남양 의학회의 회장인 윤정재가 외손자를 끔찍이도 아껴 자신의 지위와 의술을 모두 손자에게 전수해 주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앞의 이 사람의 윤정재의 외손자가 맞는지 증명하려면 반드시 직접 시험해 봐야 했다.최군형이 그의 병세와 원인에 대해 줄줄 읊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새파랗게 어린 최군형의 진단은 병원 의사와 똑같았다!윤정재의 가르침이 없다면 누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구봉남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눈 속에 의심이 짙게 드리웠다. 그는 시험조로 물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화 적게 내시고, 몸보신에 신경 쓰시고요. 식사와 수면은 꼭 규칙적으로 해주세요. 큰 문제는 아닙니다. 신장이 허한 건...”최군형은 입술을 씰룩댔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남양 윤제 그룹의 알약이 생각났다.외할아버지는 종종 그 알약을 아버지한테 보내주곤 했었다. 어릴 적의 기억은 별로 없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알약이 오는 주기는 점점 더 짧아졌다. 아빠가 홧김에 약을 던져버리는 주기도 점점 더 짧아졌다. 아빠는 항상 그렇게 소리쳤었다.“내가 이런 걸 필요로 할 것 같아?”그러고는 사람을 시켜 그 물건을 최대한 멀리 버리라고 명령했었다.최군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좋은 물건을 왜 버렸지? 아빠 말고도 그게 필요한 남자는 많을 텐데.예를 들면 눈앞의 이 남자라든지.최군형은 구봉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최군형의 바늘 함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최군형
최군형은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본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육소유 컵을 가져온 게 맞아?”“응, 아무도 모르게 가져왔고 조심해서 보관했으니 확실해.”“경섭 아저씨 거랑 같이 보낸 것도 확실하고?”“응! 경섭 아저씨 건 구하기 쉽잖아. 우리 병원에서 검사했으니 조작됐을 리도 없어!”‘검사한 건 우리 사람들이지만 검사지를 가져온 사람은 아닐 수도 있지.’최군형은 잠깐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입원 병동에서 육소유를 봤다며?”“응! 어라? 육소유가 부르던 사람이 입원 병동에 있는 사람 아니야?”최군성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말했다. 최군형이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하지만 확실해지기 전까지 함부로 말하진 말자. 돌아오기 전까진 다른 사람들이 키우고 있었으니, 양어머니를 부른 것일 수도 있어.”“형, 형이 너무 신중한 거야! 여기서 어떻게 더 확실하게 해? 이미 확인된 거잖아!”“아빠가 가르쳐주신 건데, 너 벌써 잊은 거야?”“헤헤... 아빠 말은 잘 듣네. 그래서, 신분 속이고 여자랑 연애하는 것도 아빠가 가르쳐주신 거야?”최군성이 짓궂게 웃으며 최군형에게 다가갔다.“너...”“형, 둘이 어디까지 갔어? 뽀뽀만 하고 다른 건 안 했어?”“최군성!”이어 최군성의 방에서 그의 비명이 들려왔다. 고용인들은 모두 밖에서 몰래 웃고 있었다. 주 씨 아줌마도 마음이 아팠다.“큰 도련님은 돌아오실 때마다 자비 없이 작은 도련님을 때리세요...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떡해요!”“걱정 마요. 요즘 둘째 도련님이 육씨 가문 아가씨와 친하게 지내시잖아요. 걱정할 거 없어요!”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최군형이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며 여유롭게 옷을 정리했다.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거두고 정중하게 인사한 뒤 흩어졌다.방 안에는 아직도 최군성의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최군형은 작게 웃고는 부모님의 방으로 향했다.강서연은 통유리 창문 앞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최연준은 그 옆에서 아내에게
“군성이랑 둘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우리가 모를 줄 알아?”“아빠, 엄마...”“됐어, 빙빙 돌려 말하지 마. 나와 네 아빠도 소유의 신분이 의심스러워. 하지만 경섭 씨와 우정 언니가 기분 나빠할까 봐 말 안 하는 거야.”“엄마, 저와 군성이 모두 제일 큰 문제는 육명진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번에 군성이가 소유의 컵을 빼돌려서 DNA 검사를 했는데 경섭 아저씨와 일치했어요! 혹시 중간에서 누군가 손을 쓴 게 아닐까요?”“병원에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모두가 우리한테 충성을 다할 수는 없는 거야. 한두 명 정도 매수할 수도 있지.”강서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최연준이 미소 지으며 이어 말했다.“중요한 건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거야. 권투에서 페이크 치는 것처럼, 상대에게 혼란을 주다 예상하지 못했을 때 상대방에게 펀치를 날리는 거야.”“네. 알겠어요.”최군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은 그를 절대적으로 믿어주고 지지해 줬으며 그에게 길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행복함이 차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어릴 때처럼 강서연을 꽉 안았다. 원래는 엄마를 안은 뒤 아빠를 안으려 했으나, 그 전에 최연준이 먼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야야야! 다 큰 녀석이... 이게 뭐 하는 거야!”최군형은 웃으며 강서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빠는 엄마가 자신의 품에 없으면 불안해하는 사람이었다. 전에는 그런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강소아를 만난 후로 이해하게 되었다.“그래요, 제가 가도 두 분은 계속 깨 볶고 계셔요. 근데 가기 전에 엄마한테 받을 게 있는데...”최군형이 아이처럼 생글거리며 강서연의 앞에 앉았다.“뭔데?”최군형의 눈길이 강서연의 화장대 위에 놓인 나무상자에 고정돼 있었다. 강서연이 뭔가를 직감하고 물었다.“뭐하고 싶은 거야?”“엄마, 평소에 액세서리는 잘 안 하시죠?”최군형이 아기 여우처럼 웃으며 물었다.“응?”“사놓고
“아뇨, 괜찮아요.”최군형이 단칼에 거절했다. 아직 강소아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지금 집에 데려올 수는 없었다.하지만 엄마의 말이 그에게는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자신을 꼭 육소유와 결혼시키려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최군형이 더듬거리며 설명했다.“때가 되면 데리고 올게요. 좋은 사람이에요. 엄마도 좋아하실 거예요.”“정말?”최연준이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이밀고는 최군형을 훑어보며 웃었다. 최군형이 못 말린다는 듯 탄식했다.“아빠...”“아들, 우린 육씨 가문과 통혼하기로 했어. 지금 육소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지만, 경섭 아저씨와 우정 아줌마는 너희가 잘됐으면 하는 눈치야. 하지만 나와 네 엄마가 먼저 확인할 거야. 그 아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확실히 해야지.”“네.”최군형이 감동적인 눈빛으로 부모님을 쳐다보았다. 그는 오글거림을 참고 두 사람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제 부모님 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 정말 행복해요.”“됐어!”강서연이 최군형의 등을 팡 치며 말했다. 벌써 케이크 만들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급히 책을 내려놓고 꼭대기 층의 제과점으로 갔다. 최군형이 멀어지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만 자리를 뜨려는데, 최연준이 뭔가를 손에 들고 그를 쿡쿡 찔렀다.“응?”그가 고개를 숙이자 그 나무 상자가 보였다.“아빠, 이건...”“에메랄드 반지만 빼고 다 가져가. 그 반지는 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 못 줘. 다른 건 마음껏 가져가서 그 애한테 줘!”“엄마가 알면 어떡해요?”“어떡하긴 뭘 어떡해? 내 용돈이 끊기겠지!”최군형은 멍하니 아빠를 쳐다보며 웃었다. 최상 그룹이 다 그의 손에 있는데, 그가 돈이 부족하겠나? 하지만 최연준은 평생 강서연에게서 용돈을 받아 썼다. 이것 또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최군형은 상자 안에서 금풍옥로 팔찌를 꺼내며 말했다.“아빠, 전 이거면 돼요. 다른 건 다시 가져가요.”“이거로 되겠어? 너무 적은 거 아니야?”“소아는 그렇게 물질적인 사람이
최군성은 온몸이 뻣뻣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육소유, 너...”“저, 전 군성 오빠랑 같이 나갈래요.”육소유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최군성이 땀범벅이 돼 물었다.“뭐?”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숙여 육소유의 반짝이는 두 눈을 보자 찌릿하며 마음이 움직였다. 그 눈에는 두려움과 억울함이 가득 들어있었지만, 그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최군형은 입술을 꾹 물고는 몸에 힘을 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 그럼 제가 소유랑 갔다 올게요.”“응, 빨리 가! 천천히 있다 와!”부모들이 모두 어리둥절해 있는데 최군형만 웃으며 말했다.최군성은 최군형을 째려보고는 육소유의 손에 이끌리다시피 해서 문을 나섰다.“어떻게 된 거야? 군형아, 너...”임우정이 어리둥절하게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가 최군형을 보며 물었다. 강서연이 그녀의 손을 잡고 옅게 웃었다.“우정 언니,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는데 마침 잘됐네. 사실 그때 혼약도 충동적으로 한 거였잖아. 아이들 결혼 문제는 우리가 너무 간섭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언니 생각은 어때?”임우정이 멍해지더니 고개를 돌려 육경섭을 쳐다보았다. 최군형은 듬직하고 영리한 데다가 능력도 있어서 둘도 없는 사위 후보였다.하지만 어떻게 찾아온 딸인데, 고작 이런 일 때문에 딸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육경섭은 젊을 때처럼 호탕하게 웃고는 손을 아내의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맞아, 소유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라고 해! 어차피 다 최 씨잖아!”임우정이 웃으며 그를 툭 쳤다.강서연과 최연준은 서로를 쳐다보며 말하려다 말았다. 그 자리에 육명진도 있었기에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됐다.그들 몇 사람은 거실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서연은 은근슬쩍 임우정에게 딸과 사이가 어떠냐고 물었다.임우정이 씁쓸하게 웃고는 작게 말했다.“뭐랄까... 낯설어.”“어떻게 그래?”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임우정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20년이 지났어. 20년 동안 내 딸을 못 챙겨줬다고. 나
강서연은 작게 몇 마디 위로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육명진의 굳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강서연은 테이블 밑으로 최연준을 툭 차고는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최연준도 육명진의 표정을 보아냈다. 그들 부부는 마주 보고 작게 웃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것만 같았다.육소유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간에 육명진은 꼭 이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육씨 가문을 나간 뒤, 육연우는 경호원을 따돌리고는 최군성을 이끌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최군성은 그녀같이 창백하고 연약한 몸에서 이렇게 큰 힘이 나올 줄 상상도 못 했다.둘은 해변에 도착했다. 체력 좋은 최군성도 지친 것 같았다. 하지만 육연우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공허한 두 눈으로 안개가 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문 그녀의 몸이 옅게 떨렸다.최군형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소, 소유야, 괜찮은 거지?”육연우는 ‘소유’라는 이름을 듣자 본능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고 모래사장에 주저앉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최군성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가느다랗게 말했다.“군성 오빠...”“소유야, 무슨 일 있어? 나한테 말해봐, 내가 도와줄게!”육연우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른 사람 행세를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최군형과 최군성은 모두 머리가 비상했다. 그녀 혼자서 두 사람을 속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그들에게 들키기보다는 스스로 자백하는 게 나았다.그래서 최군성이 그녀의 컵을 가져갈 때도 못 본 척한 거였다. 그 DNA 검사지면 모든 진실이 밝혀질 줄 알았는데, 육명진이 자신의 표본과 육경섭의 표본을 바꿔치기할 줄은 몰랐다.그들은 혈연관계가 있었기에 DNA 검사지는 또다시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육연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이 모든 게 곧 끝날 것이라도 되뇌였다. 최군성을 끌고 나온 것도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였다.“군성 오빠, 사실 나...”최군성이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
최군형은 집에 며칠 있나 싶더니 급히 강주로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그는 보물을 바치는 것처럼 그 팔찌를 강소아에게 전해주었다.“이건 뭐예요?”강소아가 놀라운 목소리로 물었다.최군형은 가기 전 장난치는 듯한 어투로 오성에서 선물을 사 오겠다고 했다. 설사 그게 열쇠고리 하나일지라도 사 왔다는 것 자체로 의미 있다고 했다.그런데, 이렇게 귀한 팔찌를 사 올 줄은 몰랐다... 이 팔찌는 정교한 공예로 만들어졌다. 액세서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강소아조차도 고가의 팔찌라는 걸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강소아가 주저하는데 최군형이 작게 웃고는 팔찌를 그녀의 팔에 끼워주었다.“우리 집 대대로 내려오는 거예요. 엄마가 그러는데, 며느리에게 주겠대요!”“정말요?”“네! 며느리 보고 싶어서 난리예요.”“그게 아니라요!”“네?”“앞의 말이요... 당신 집 대대로 내려오는 거예요?”최군형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 정도로 귀한 건 아닌데... 안 비싼 거예요, 마음껏 껴요! 이걸 가져온 건, 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예요.”“어떤 마음이요?”강소아는 알면서도 물었다. 입을 열자마자 얼굴이 빨개졌다.최군형은 이 틈을 타 강소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그는 드디어 당당하게 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모든 게 완벽했다. 강소준은 학원에 갔고, 강소아의 부모는 가게에 있었기에 집에는 그들 둘뿐이었다.최군형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는 약간의 웃음기를 띠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소아 씨... 이게 뭘 의미하는지 정말 모르는 거예요?”“몰라요, 저한테 설명해 줘요!”“네, 좋아요.”최군형은 짓궂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려 했다. 한 번 입 맞춘 뒤로 그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강소아가 뭐라 하든, 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는 다른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강소아의 손이 그의 가슴을 약하게 밀쳤다. 최군형은 그녀의 손목을
하수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강소아와 친해진 후로 그녀가 처음 거절한 일이었다.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최군형의 눈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 찼다. 당연히 하수영이 먼저라 하수영에게 팔찌를 끼워줄 줄 알았다. 강소아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그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하수영이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이 일심동체가 된 모습을 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귀한 물건인 거 알아. 내가 가지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그럼... 그럼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가자, 그건 되지?”하수영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강소아를 바라보았다. 강소아는 마음이 약했다. 이렇게 불쌍한 척하고 있으면 강소아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다.게다가 그저 팔찌 하나일 뿐인데, 사진 찍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하수영은 강렬한 직감에 사로잡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팔찌는 분명 일반 팔찌가 아니었다.‘육 선생님이 이걸 알아야 하는데...’하수영은 작게 웃으며 강소아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강소아는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피하더니 팔찌를 빼 최군형에게 쥐어주었다.“군형 씨, 이렇게 귀한 건 넣어두는 게 좋겠어요. 이러다 망가뜨리면 큰일 나요.”최군형은 어리둥절하게 있다가는 이내 웃음을 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하수영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소아야, 너...”최군형이 방에 들어간 뒤에야 강소아는 머쓱하게 웃으며 하수영의 팔을 잡아끌었다.“미안해!”하수영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뿌리쳤다.“수영아! 그거... 군형 씨가 준 거라서 다른 사람이 끼는 것도, 사진 찍는 것도 싫어. 이해해 줘.”“사랑 얻은 지 얼마나 됐다고 우정을 잃은 거야? 팔찌 하나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래! 나도 남친 생기면 한가득 사달라고 할 거야!”“응! 군형 씨 말 들어보니 그 팔찌 별로 비싼 것도 아니래. 지금도 충분히 살 수 있어!”강소아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수영에게 미안했기에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는 것이었다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