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빈도 김단의 손을 꼭 잡았다. 물론 조금 전에 김단의 뺨을 때리고 김단에게 욕설까지 퍼부었지만 덕빈은 김단이 명정 대군을 반드시 구해줄 거라고 확신했다.명정 대군은 김단의 유일한 구세주이니까.임학은 교환 시간이 오늘 밤 자정이라고 얘기했고 덕빈은 김단에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더 전하고 나서 김단에게 얼른 돌아가서 쉬라고 했다.김단은 뜨거운 찻물에 데어 어깨가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허리를 쫙 편 채 앞에서 뚜벅뚜벅 걸어갔고 뒤따라오는 소한과 임학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궁 밖으로 나서자 김단은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산군 관저 마차에 올라타려고 했다.하지만 그녀가 발을 내딛기도 전에 뒤에서 소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머슴으로 위장하여 낭자와 함께 갈 것이오.”소한은 자신이 뒤따를 것이니 김단에게 겁먹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김단은 그저 고개를 돌려 소한을 힐끗 쳐다보더니 비꼬듯이 말했다.“장군님은 저를 보호하려는 겁니까 아니면 명정 대군을 보호하려는 겁니까?”머슴으로 위장하여 김단과 함께 간다고 했는데 생사가 걸린 위급한 순간이 찾아오면 소한은 과연 김단을 보호할까 아니면 명정 대군을 보호할까?그 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소한은 김단을 위해 머슴으로 위장하는 게 아니라 황제의 어명을 받고 명정 대군을 안전하게 데리고 오려는 것뿐이다.때문에 김단은 소한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너무도 어이없고 우스웠다.한편, 소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김단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고 곁에 서있던 임학이 소한의 어깨를 툭툭 치고 나서 김단이 탔던 마차에 타려고 했다.이때, 갑자기 마차 안에서 발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마차에 타려고 하는 임학을 뻥 차버렸다.뒷걸음질 치던 임학은 화가 난 듯 마차 안에 앉아있던 김단에게 소리를 질렀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오!”김단이 천을 살짝 거두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좁은 마차에 함께 타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지금 미친 것이
임학이 말한 것처럼 김단이 뒤끝이 길고 반드시 복수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소한 때문에 생긴 것이지만 김단은 전혀 기억 못 할 것이다.김단에게 있어서 소한은 그저 자신을 다른 남자 방에 억지로 밀어 넣은 나쁜 놈일 뿐이니까.생각을 하다 보니 소한은 마취제마저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하마터면 큰 사고를 칠 뻔한 임학이 너무 짜증이 났다.소한은 고개를 돌려 임학을 힐끗 노려보고는 장군 관저의 마차에 올라탔고 어리둥절해 있던 임학은 떠난 진산군 관저 마차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소한이 탄 마차에 함께 올랐다.하지만 임학에 마차에 발을 대기도 전에 소한이 냉랭하게 말했다.“난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이 있으니 임 장군과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소.”말을 마친 소한은 빠르게 떠났고 임학 혼자만 궁문 앞에 멍하니 서있었다. 한편, 김단이 별당으로 돌아오자 숙희가 한걸음에 달려와 잔뜩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아씨, 명희가 집안에서 쫓겨났습니다. 둘째 아씨도 이 일을 알게 됐고요. 소인이 보기엔 둘째 아씨가 몰래 명희를 보러 갈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집안에서 가장 똘똘한 노비를 보내 명희를 확실하게 지켜보라고 시켰습니다.”말을 하던 숙희는 그제야 김단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아씨, 왜 그러세요? 덕빈 마마께서 뭐라고 하신 거예요?”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김단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고 머릿속에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산적들은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았기에 명정 대군이 잡혀가고 나서 지금까지도 조정에서는 산적들이 숨어있는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다.하지만 인질을 교환하면 산적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신분이 노출되는 위험이 커지는 건데 명정 대군이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산적들이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인질을 교환하려는 건지 김단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명정 대군과 아직 혼인을 치르지도 않은 명정빈이 명정 대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굳이 김단으로 교환하려는 걸까?김단은 불안감이 점
김단도 예전에 무술을 배운 적이 있지만 거리를 떠도는 저질스러운 놈들만 상대할 수 있을 뿐, 진정한 고수를 만나면 절대 승산이 없다.당우리 산적들은 전부 특수 훈련을 받은 고수들이기에 김단은 소한에게서 한두 가지 기술이라도 익혀야만 그자들을 상대로 목숨 정도는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김단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하지만 김단은 소한이 건넨 비수를 받지 않았고 소한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김단은 예전에 이 비수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그럼 이건…”소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단은 자신의 머리 위에 꽂은 비녀를 빼더니 말했다.“비수를 몸에 지니고 있기엔 너무 티가 납니다. 산적들이 제 몸을 수색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전 이 비녀가 저에게 더 유용할 것 같습니다.”김단이 예전에 소한이 건넨 이 비수가 갖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필요 없었다.한편, 비수를 손에 꽉 쥐고 있던 소한은 이내 비수를 도로 거두더니 씁쓸한 말투로 대꾸했다.“낭자 말도 일리가 있소. 낭자한테는 비녀가 더 유용하게 쓰일 것 같소.”말을 하던 소한은 이내 김단을 데리고 저택 앞에 있는 빈 공간으로 향했다. 김단은 무술을 배운 적이 있기에 습득 능력도 빨랐다. 그렇게 소한은 한참 동안 김단에게 동작을 가르쳤고 두 사람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이때, 소식을 들은 임씨 부인과 임원도 한걸음에 달려왔다. 임씨 부인은 무술을 연습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산적들은 왜 우리 단이로 교환하려는 겁니까?”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임원은 곁에 서서 임씨 부인을 위로했다.“어머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 장군님께서 언니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언니는 무사하게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임씨 부인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단을 쳐다보고 있었다.이때, 강도 높은 연습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김단이 갑자기 휘청거렸고 소한이 한발 빠르게 달려가 김단의 팔을
숙희의 눈물이 멈추지 않자 진산군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뭘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냐? 조정의 근심 걱정을 덜어줄 수 있는 건 우리 가문의 영광이고 단이한테도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말을 하던 진산군은 고개를 돌려 김단에게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똑똑히 기억하거라. 오늘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무조건 명정 대군을 지켜야 한다. 만약 명정 대군이 무사히 돌아올 수 없다면 단이 너도…”“대감!”임씨 부인은 언성을 높이며 진산군의 말을 끊었고 진산군은 바로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지만 김단은 진산군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잘 알고 있었다.만약 명정 대군이 무사히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도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하긴, 김단이 세답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진산군 가문이 명정 대군과 혼약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만약 명정 대군이 이대로 죽는다면 김단도 진산군 가문에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게 된다.김단을 친딸로 생각한다던 진산군은 결국 긴박한 상황에서 진심이 튀어나온 것이다.진산군을 씁쓸하게 쳐다보던 김단을 어릴 때 진산군 어깨 위에 올라가 하늘의 별을 세던 기억이 떠올랐고 마음이 더욱 착잡하고 씁쓸했다.김단은 더 이상 진산군 가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전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김단은 진산군을 지나치던 순간, 진산군이 밖을 지키던 시녀들에게 몰래 눈짓을 하는 것을 곁눈질로 목격하게 되었다.‘내가 바람 쐬는 핑계로 도망갈까 봐 나한테 시녀를 붙이겠다는 건가?’김단은 말없이 마당으로 향했다. 별당 여기저기에 호위병들이 잔뜩 지키고 있었기에 김단은 걸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으며 그저 돌다리 위에서 맴돌았다.이때, 임원이 김단을 향해 걸어왔고 손에는 물 한 잔 들고 있었다.“언니,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는데 물 한 모금 더 마셔요!”김단은 그저 담담하게 임원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 괜히 말 돌
임원의 돌발 행동에 김단까지도 하마터면 연못에 빠질 뻔했지만 순간, 김단은 오른발로 돌다리에 설치된 울타리를 지탱하더니 몸을 뒤로 확 당겼다.등이 물에 닿은 임원은 그대로 김단에게 당겨져 돌다리 위로 올라왔고 다리에 힘이 풀린 임원은 김단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김단은 임원의 손을 확 뿌리치고는 역겹다는 표정을 지은 채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오후에 덕빈 마마가 던진 뜨거운 찻물에 데인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참다못한 김단은 울고 있는 임원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이번 생에 네가 이렇게 귀신처럼 나한테 계속 달라붙는 거야! 임원, 내 말 똑똑히 새겨들어. 앞으로 나한테 친한 척하지도 말고 죽고 싶으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서 죽어!”한편, 큰 소동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몰려왔고 돌다리 위에서 펼쳐진 광경에 임씨 부인은 놀란 표정으로 재빨리 달려와 물었다.“왜 이러는 것이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원아…”“거기 서세요!”큰소리로 외친 김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씨 부인을 노려보았고 화들짝 놀란 임씨 부인은 걸음을 멈춘 채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김단은 이내 고개를 돌려 임원을 쳐다보았으며 분노가 점점 치밀었다.“네가 나에게 약을 타서 먹인 일은 내가 아직 제대로 따지지도 않았어. 그런데 감히 네가 또 한번 나를 건드려? 임원! 내가 정말 널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산군 가문 사람들이 전부 네 편을 들고 너를 옹호하고 있으니까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김단의 말에 임원은 더욱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언니, 전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 언니가 믿든 안 믿든 전 단 한번도 언니를 해하려고 한 적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언니가 내 15년 인생을 빼앗아간 건 사실이잖아요?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귀하게 자랐지만 저는요? 전 가난한 마을에서 힘들게 살았어요! 전 언니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두려워요. 언니가 제 모든
다음 순간, 갑자기 두 손으로 임원의 목덜미를 잡은 김단은 임원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확 들어올리더니 연못 안으로 밀어버렸다.“악!”비명소리와 함께 임원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김단에게 밀려 연못에 풍덩 빠졌고 다들 김단이 갑자기 이런 돌발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사람들은 너무 놀라서 미처 반응도 못한 채 임원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고 김단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소한을 쳐다보았다.소한은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으며 임원을 구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심지어 소한은 연못에 빠진 임원이 아닌 김단을 쳐다보고 있었다.김단은 예외라는 생각에 살짝 놀랐다가 이내 입꼬리를 씩 올리며 차갑게 웃고는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향했다.그러다가 임씨 부인을 지나칠 때 김단은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얘기했다.“연못 물이 그리 깊지는 않지만 계속 저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임씨 부인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는 사람들에게 임원을 구하라고 명령했고 김단은 문 앞에 서있던 진산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의자에 앉아 숙희가 건넨 따듯한 차를 한 모금 마시던 김단은 진산군이 방으로 들어오자 냉랭하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어르신께서도 얼른 돌아가서 쉬십시오. 이곳은 호위병들이 지키고 있는 걸로 충분합니다.”임원 때문에 김단은 현재 임씨 가문 사람만 봐도 기분이 언짢았다.하지만 진산군은 김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김단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고 밖에서는 기침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임원이 구조된 것이다.임씨 부인은 얼른 임원을 데리고 의원에게 찾아갔고 조금 뒤, 시끌벅적하던 바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편, 김단을 차를 마시면서 태연하게 앉아있는 진산군을 힐끗 쳐다보았고 이내 의문이 들었다.평소에 임원이 눈물만 보여도 발을 동동 구르던 진산군이 지금은 왜 이렇게 태연하게 앉아있는 걸까?밖에 호위병도 잔뜩 지키고 있고 소한까지
사실 김단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기 꺼려 했다.임원에게 그 시간은 15년 동안 양자로 사랑받은 시간 일뿐이다.하지만 김단에게는 다르다.15년 동안 행복했던 기억은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그녀는 이미 상처 투성 인 탓에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기억의 문이 열리고 말았다.순간 과거 행복했던 시절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결국 김단은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코도 시큰거렸다.그녀는 진산군에게 슬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서둘러 고개를 숙인 채 손에 쥔 술잔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하지만 김단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만약 임원이 나타나지 않았고, 제가 여전히 댁의 아씨였더라도, 대감마님께서는 저와 명정 대군을 바꾸시려 하였나이까?”질문의 끝에는 긴 침묵만이 오갔다.그녀는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가설을 지어 얻는 대답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임원은 이미 나타났다.자신은 댁의 아씨가 아니다.당연히 자신의 목숨을 이용해 진산군 관저에 명예를 얻고자 할 것이다.그녀는 잠시 생각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자신을 향한 비웃음과 씁쓸함이다.진산군은 끝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그녀의 시선을 피해 까마득한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하지만 김단이 고개를 숙여 씁쓸해 하는 모습은 그의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소한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하인의 옷으로 갈아 입고 그들의 앞에 섰다.김단은 눈살을 찌푸렸다.위아래로 그를 훑고는 물었다.“이런 모습으로 저와 동행을 하시는 것이 옵니까?”소한은 몸이 다부지다.그 탓에 하인의 옷을 입어도 그의 기백은 결코 숨길 수 없었다.김단도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라면 산적도 당연히 눈치를 챌 것이다.사실 소한도 이상하다고 느끼고 일부로 김단을 찾아간 것이다.이렇게 되면 그는 김단과 같이 동행할 수 없게 된다.하지만 산적들의 기술이 현란하여 기술을 배운 김단이라고 해도 결코 상대가 되지 못한다.소한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내각에 가서
경조부윤이 잠시 멈칫했다.“불주산에 도착하려면 여기서 십 리나 떨어져 있소. 자정에 교대를 하려면 늦을 지도 모르오!”김단이 낮게 대답했다.“지금 가겠소. 서두르면 제시간에 도착 할 수 있나이다.”하지만 궁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이때, 숙희가 김단을 막아섰다.“아씨, 노비도 같이 동행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노비가 힘이 세서 위기의 순간에도 아씨를 지킬 수 있사옵니다.”그녀는 자신의 아씨를 혼자서 보낼 수 없었다.김단은 그녀의 행동에 마음이 따뜻해졌다.곧이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그 산적들은 악행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야, 여인인 네가 그놈들의 손에 잡힌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내말 듣고 가만히 관저에 있거라.”“하지만.. 아씨도 여인이 아니옵니까!”흐느끼는 숙희의 목소리는 도끼가 되어 진산군의 마음을 내리쳤다.김단도 여인이다,만약 그들의 손에 잡히게 된다면 무슨 결과를 맞이할지 모른다.이 일에 대해 진산군이 생각을 안 해볼리 없었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명정 대군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이때, 궁에서 사람들이 도착했다.총 다섯명의 내시가 그들 앞에 섰다.모두 몸집이 작았다.그들 중 몇몇은 김단보다 작고 말라 보였다.김단 마저도 그들이 명성 대군을 지킬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소한은 달랐다.그의 표정에서는 그들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소한은 그들을 한번 쓱 훑고는 김단에게 말했다.“산적이 딱 한 사람만 허락하였으니,낭자가 고르시오.”김단은 다섯 명 중 어느 한 명도 믿지 못했다.결국 아무나 짚어 답했다.“이 분으로 하겠습니다.”뽑힌 내시가 서둘러 김단에게 절을 올렸다.“소신 녹자, 최선을 다해 명정 대군의 안위를 지키겠사옵니다.”곧 김단이 아니라 명정 대군만을 지킨다는 말처럼 들렸다.김단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재빠르게 말 위로 올라탔다.그녀의 행동에 진산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곧 떠나갈 김단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불렀다.“단아!”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