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웠던 마음은 순식간에 당혹스러움으로 변했다.산기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녹자는 그녀 뒤에 있었다.인기척 하나 없는 숲속에서 녹자는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이때,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안에서 사람 몇 명이 나왔다.그들은 서둘러 김단을 에워쌌다.총 세 명으로 모두 복면을 쓰고 있다.김단은 그들이 명정 대군을 납치한 산적이라 확신했다.산적들은 김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중 한 명이 뒤에 있는 말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나머지 한명은?”김단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서둘러 상황을 빠져나갈 궁지를 생각했다.곧이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되물었다.“무슨 말이요?”“야 이년아, 모르는 척하지 마!”다른 산적이 옆에서 화를 냈다.“몸뚱아리는 하난데, 말을 두 마리나 데려왔네.”김단은 숨을 들이켜 두려움을 감추었다.“나머지 하나는 대군의 말이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적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설마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셋째 형님, 계집 혼자 온 거 보면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오?”그의 말에 한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몇 명을 더 데리고 왔어도 똑같을 거야.”곧이어 다른 산적들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두 사람이 김단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말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난폭하게 그녀를 데리고 숲 안으로 들어갔다.숲속의 길은 평탄하지 못해 걷기가 어려웠다.게다가 어두웠기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그 탓에 김단은 여러 번 돌에 넘어질 뻔했다.휘청거리며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드디어 산 동굴 앞에 다다랐다.동굴 앞에서는 모닥불이 타고 있다.다른 산적 두 명이 앉아 토끼를 굽고 있는 중이었다.그들은 김단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계집 한 명이야?”그들도 여인이 혼자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셋째 형이라고 하는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저 계집이 얼마나 당돌 한 지 알아?”곧이어 김단을 동굴 안으로 세게 밀었다.김단은 그대로 바닥에
순간 상처가 가득한 팔목이 드러났다.곧이어 산적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김단은 그들에게 높은 신분의 여인으로 보였다.이러한 여인의 몸에 상처투성이라는 사실에 그녀가 가엾어 보였다.명정 대군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이거 보십시오. 이 계집은 절대로 안 죽습니다. 대장께서 데려가시면 백중백발 좋아하실 겁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저를 풀어주세요!”이때, 칼 한 자루가 김단 앞에 던져졌다.그녀는 잠시 멈칫하고는 셋째 형님이라 하는 사내를 바라보았다.사내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놈을 잡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어,그 왕이라고 하는 작자의 태도를 시험하고 싶었을 뿐이지. 네년은 저 자식이랑 돌아가도 전과 다를 바 없는 날을 보낼 거야. 네가 직접 죽이고 우리를 따라와.”명정 대군은 산적이 이러한 선택을 내릴 줄은 몰랐다.그는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뒷걸음을 쳤다.“자, 자네들이 분명 저 년을 주면 놓아준다고 했잖아!”옆에 있던 산적이 코웃음을 쳤다.“지금 산적이랑 거래를 하겠다는 거야? 보아하니, 대군도 멍청하기 짝이 없군.”명정 대군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는 김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칼을 집어 들었다.명정 대군이 깜짝 놀라 다급하게 말했다.“김단, 네가 짐을 죽이면 아니 된다.짐은 네 약혼자이자 유일한 버팀목인 것을 잊었느냐! 날 죽이면 아니 된다!”약혼자?버팀목?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으로 우습지 아니한가.김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손 꽉 쥔 칼을 들고 코웃음을 쳤다.“자네는 날 죽일 뻔했던 사람이 아닌가. 무슨 낯짝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도 여기서 끝이라면 자네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집어치워!”김단은 자세를 취하고 명정 대군에게 달려들었다.명정 대군은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이때, 김단이 몸을 돌려 셋째 형님이라 하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그녀는 명정 대군을 죽일 수 없다.더더욱 산적에게 끌려갈 수 없었다.만약 고문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또한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녹자는 주상이 명정 대군을 위해 보낸 사람이 아닌가?명정 대군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는 녹자가 칼을 빼지 못하도록 손을 잡았다.그리고 죽일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입을 열자 피를 토했다.“왜, 네가 왜?”“3년 전, 대군자가께 맞아 죽은 나인 청아를 기억하십니까?”녹자도 명정 대군을 죽일 듯이 노려 보았다.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하인이 대신하여 복수를 하러 왔습니다.”하지만 명정 대군은 그저 혼란스러운 표정이다.그는 나인 청아에 대해 까마득히 잊은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러한 그의 표정에 녹자는 마음이 아려왔다.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 있는가,그의 가장 중요한 사람을 때려 죽게 한 사람이면서 어떻게 잊을 수 있는가.녹자는 명정 대군의 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곧이어 칼을 뽑고 다시 깊숙이 찔렀다.마치 분노를 푸는 것처럼 네다섯 차례 다시 칼을 찔렀다.녹자가 다시 한번 더 공격하려 하자 김단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서둘러 녹자를 밀쳐냈다.명정 대군은 힘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그의 자리 옆으로 피가 흥건했다.김단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명정 대군의 상처 부위를 막았다.표정에는 황급함이 드러났다.“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명정 대군이 죽어서는 안된다.적어도 지금은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하지만 김단이 아무리 용을 써봐도 넘치는 피는 멈출 줄 몰랐다.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구하러 오지 않았는 가.이대로 그를 죽게 할 수는 없었다.다급한 김단의 모습이 명정 대군의 눈에 들어왔다.그는 자신의 생사를 걱정하는 사람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이때, 명정 대군이 김단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김단의 두 눈은 이미 벌겋게 변했다.그녀는 명정대군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죽으면 안돼, 죽어서는 안돼!”명정 대군이 웃음을 터뜨렸다.“미,미안했소...”말을 끝으로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김단은 그대로 멈추
숲 속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김단은 이제 전혀 무섭지 않았다. 숲 속을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김단은 이제 겨우 명정 대군을 휘어잡을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명정 대군에게 함부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됐는데! 이제 곧 진정한 명정빈이 되어 진산군 관저를 벗어날 수 있었는데, 명정 대군이 죽어버린 것이다.그럼 김단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명정빈의 신분을 잃은 그녀는 어떻게 진산군 관저를 벗어날 수 있을까?가문의 부귀와 영화를 지키기 위해 진산군과 임씨 부인은 또 어떤 계획을 세우고 김단을 어떤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리려고 할까?우르릉 쾅!이때,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더니 이어 빗줄기가 거세게 떨어지기 시작했다.옷이 흠뻑 젖은 김단은 차가운 공기에 몸이 으스스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고개를 천천히 들어 어두컴컴한 하늘을 쳐다보더니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욕설을 퍼부었다.“당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대체 왜! 저를 농락하는 게 재밌습니까? 제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사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요?”김단은 그저 진산군 관저의 딸로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하늘은 갑자기 그녀에게 임원이라는 벌을 내려주었고 이제 겨우 어둠을 뚫고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는데 하늘은 또 명정 대군을 데려갔다.그리고 김단은 분명 비와 추위를 제일 싫어하는데 하늘은 하필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폭우를 선물하고 있다.김단은 하늘이 매 순간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우르릉 쾅!천둥 번개가 번쩍거렸고 마치 김단의 분노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했다.쏟아지는 빗물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던 김단은 갑자기 미친 듯이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이런다고 제가 포기할 줄 알아요? 어디 한번 더 해보세요! 전 절대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전 절대 당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가슴이 찢어질 듯한 김단의 외침이 숲 속에 울려 퍼지던 순간, 그림자 하나가 숲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김
폭우는 밤새동안 내렸다.날이 밝아오자마자 김단은 바로 궁으로 향했다.대궐 안에는 문관과 무관들이 양쪽에 갈라 서있었고 용상에 앉아있는 황제는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김단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어젯밤 김단은 명정 대군을 안전하게 돌려보낼 인질이 되어 떠났는데 계획대로라면 살아서 돌아와야 할 사람은 김단이 아닌 명정 대군이어야 한다!한편,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김단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용상에 앉아있는 저 남자는 말 한마디만으로 김단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하지만 김단은 최대한 차분한 표정으로 한 걸음 나아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인사를 올렸다.“소인, 주상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김단을 머리를 바닥에 댄 채 감히 꿈쩍도 하지 못했고 대궐 안에 서있던 대신들도 숨죽이고 있었다.모든 사람들이 황제가 김단에게 벌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용상에서 예상 밖으로 차분하고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그제야 고개를 살짝 든 김단은 황제를 힐끔 쳐다보았다.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어도, 슬하에 황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명정 대군의 죽음은 황제에게 비통할 일일 텐데 황제는 왜 이렇게 태연한 걸까?한편, 김단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 대신들이 전부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어젯밤 명정 대군이 산적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개처럼 빌었다고 하면 황제의 체면은 말이 아닐 것이다.입술을 살짝 깨문 김단은 미리 생각해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어젯밤 소인은 산적들에게 잡혀 산굴 속으로 끌려갔습니다. 산굴 속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명정 대군을 보았고 그 안에는 산적들이 생각보다 더 많았습니다. 심지어 산적들은 명정 대군 앞에서 저를 범하려고 했는데 명정 대군께서 목숨 걸고 저를 지켜준 덕분에 저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정 대군은 산적들이 휘두른 칼에 크게 다쳤습니다. 녹자가 명정 대군의 복수를 위해 산적 다섯 명을 죽였고 그 틈에 도망친 산적들
황제도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한 나라의 왕으로서 체면을 완전히 잃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똑똑히 기억하거라. 내 아들 명정 대군은 너를 지키다가 살해된 것이다.”“명심하겠습니다.”김단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하자 황제는 그런 김단을 아래위로 자세하게 훑었다.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로 입고 있는 옷은 흠뻑 젖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안색은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했다.어젯밤 비가 많이 내렸는데 김단도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너도 이만 나가보거라.”“성은이 망극하옵니다.”황제가 손을 내두르자 김단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대궐을 나섰다.조금 뒤, 누군가가 대궐 뒤편에서 걸어 나와 황제 앞에 허리를 숙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황제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처음부터 저 아이의 잘못도 아니었지 않느냐? 하지만 소 장군, 소 장군이 이러는 건 다 저 아이를 위한 일인데 왜 저 아이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냐?”소한은 어제 비를 맞으며 급히 궁에 찾아와 황제에게 명정 대군의 사망 소식을 알렸지만 본심은 김단을 위해 황제에게 사정하려는 목적이었다.이제 모든 사람들은 명정 대군이 목숨 걸고 김단을 지켰다고 생각하기에 아무도 감히 명정 대군의 죽음으로 김단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한편, 소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릿속에는 온통 어젯밤 빗속에서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던 김단의 모습이었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지만 소한은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김단 낭자가 괜한 오해를 할까 봐 그러는 것이옵니다.”“오해? 뭘 오해한다는 것이냐? 소 장군 자네는 그 아이를 신경 쓰고 있는 게 확실하지 않느냐?”황제는 조금 의아했다가 이내 소한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한편, 소한은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하지만 소인은 이미 임씨 가문 둘째 따님과 혼사가 정해져 있는 사내
한편, 진산군 관저에서.김단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임씨 부인이 한걸음에 달려와 김단을 반겼다.“단아!”임씨 부인은 김단의 팔을 덥석 잡은 채 그녀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말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옷이 아직 덜 마른 데다가 숲 속에서 몇 번 넘어진 탓에 다리에는 흙도 잔뜩 묻은 김단은 더할 나위 없이 처량해 보였다.하지만 김단은 일부러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처량하게 보일수록 황제의 동정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김단은 살 수 있는 희망이 더 커진다.김단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임씨 부인의 손을 딱딱하게 뿌리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전 괜찮습니다.”말을 마친 김단은 곁에 서있던 임원과 임학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밤새 몸과 마음이 괴로웠던 김단은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두 사람을 상대할 힘도 없었으며 더군다나 김단은 얼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큰 마님을 보러 가야 했다.곧 궁에서 조종이 울릴 것이고 큰 마님도 결국 명정 대군의 죽음을 알게 될 수밖에 없기에 김단은 큰 마님 곁에 남아 큰 마님이 놀라지 않게 위로해야 한다.한편, 김단의 “안하무인” 태도에 임학과 임원은 기분이 언짢았고 임원이 먼저 나서서 김단에게 말을 걸었다.“언니, 어머님은 밤새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언니 걱정을 밤새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어떻게 어머님에게 이렇게 매정하게 대할 수 있어요?”김단은 임원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계속 저택 안으로 걸어갔고 보다 못한 임학이 한걸음에 달려가 김단의 앞을 가로막았다.“원이 말을 못 들은 것이오?”한숨을 살짝 내쉰 김단이 걸음을 멈추고는 역겹다는 듯이 임학을 쳐다보며 대꾸했다.“들었습니다. 그래서요?”임학은 김단이 이렇게 세게 나올 줄 몰랐기에 미간을 확 찌푸렸다.“낭자가 어젯밤 원이를 연못에 빠트린 것도 제대로 따지지 않았는데 지금 이게 무슨 태도란 말이오! 명정 대군이 죽었다고 내가 낭자를 불쌍하게 여길 것 같소?”임학의 말에 김단이 코웃음을 치며 대
김단은 고개를 돌려 임학을 쳐다보며 말했다.“도련님께서는 당연히 명정 대군을 살해할 생각까지는 못하겠죠. 도련님은 그저 저를 해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김단의 말에 임학은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고 김단은 그런 임학을 보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도련님께서도 확실하게 아셨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저를 함부로 건드린다면 전 여러분들과 함께 머리가 잘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보거든요.”그녀 한 사람의 목숨으로 임씨 가문 전체가 멸할 수 있다는데 그것도 꽤 괜찮은 선택 같았다.한편, 임학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고 심지어 김단의 말에 겁을 먹은 듯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명정 대군을 약왕곡에 보내자는 제안을 한 건 소한이지만 실질적으로 행동에 옮긴 건 임학이다. 더군다나 임학은 소한처럼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황제의 은총을 받지도 못했기에 만약 황제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임학은 제일 먼저 목이 잘릴 것이고 임씨 가문도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다.임학의 표정이 점점 퍼렇게 질리자 보다 못한 임원이 한걸음 나서서 말했다.“언니, 다들 언니를 많이 걱정했어요. 오라버니도 밤새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고요. 그런데 어떻게…”“어젯밤 연못에 빠진 걸로 부족해?”김단이 임원의 말을 딱 자르며 임원을 싸늘하게 쳐다보았고 또다시 눈물을 질질 짜는 임원 때문에 짜증이 확 치밀었다.두 남매를 번갈아 쳐다보던 김단은 손을 뻗어 앞을 막고 있는 임학을 확 밀쳐냈다.“비키세요!”말을 마친 김단은 별당으로 곧장 걸어갔고 그곳엔 숙희가 한참 전부터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다가 김단을 보자 한걸음에 달려가 김단을 모시고 집안으로 들어갔고 미리 준비한 따듯한 물을 욕조에 부었다.김단은 이내 욕조에 몸을 담갔고 그제야 얼어붙은 몸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한편, 숙희는 너무도 피곤해 보이는 김단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아씨, 명정 대군께서 살해당하셨는데 아씨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5일 후.김단은 허약해 보이는 안색을 숨기기 위해 가볍게 치장을 하고 외출하려 했다.그녀는 이미 십여 일 동안 조모께 문안드리지 않았다. 비록 수 나인께서 돌보고 계시지만, 조모는 틀림없이 그녀를 매우 걱정하실 것이다. 그녀는 조모께 안부를 드려야 한다.조모를 만난 후에 그녀는 정암을 찾아가려 한다.그녀는 정암도 틀림없이 자기를 매우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문을 나서자마자, 마당에 서 있는 임씨 부인을 보았다.김단을 보자 임씨 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다가서려 했으나 김단이 밀어낼까 봐 걱정되어 그 자리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김단은 살짝 한숨을 쉬고 나서야 임씨 부인을 향해 걸어갔다.그녀는 인사를 올렸다.“마님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김단의 부드러운 말투를 듣자, 임씨 부인의 웃음은 그제야 어색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김단을 보고 말했다.“원이가 오늘 침대에서 내려온 것을 보고서야 너를 보러 왔다. 지금 네가 이렇게 잘 회복되는 것을 보니 나도 안심할 수 있다.”김단은 고개를 숙이고 말하지 않았다.분위기가 어색해하자, 임씨 부인은 다시 물었다.“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외출하려는 것이냐?”김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네, 정암한테 가려고 합니다.”“뭐?”임씨 부인은 좀 놀랐고,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단이야, 잘 생각했어? 정말 정암과 함께 할 셈이야?”김단은 대답은 하지 않고 단지 조용히 임씨 부인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임씨 부인은 그녀 눈에 담겨있는 확고함을 똑똑히 보았다.이 상황을 본 임씨 부인의 마음은 매우 아팠다.“나는 네 결심을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정암의 아버지께 일이 생기고, 그럼 다음은? 앞으로 정암의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너는 계속 이렇게 너와 원이의 몸을 망가트릴 것이냐?”이 말을 듣고서야 김단은 참지 못하고 비웃었다.임씨 부인이 걱정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정암은 진산군댁에 들어서자마자, 별당으로 곧장 달려갔지만, 김단을 만나지 못했다.숙희가 방문 밖에 서서 정암을 향해 인사하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정암 종사관님의 아버지께서 괜찮으시다니 첨만 다행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아씨께서 휴침 중이시라 아마도 종사관님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오시지요!” 정암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혹시 아씨께서 날 만나고 싶지 않은 건지?”숙희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가 다시 말했다.“종사관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씨께서는 최근 며칠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종사관님 아버님께서 풀려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안심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정암은 심장이 갑자기 쪼여지더니,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방해하지 말고, 푹 쉬게 해야지. 그럼, 그럼 내일 다시 오겠네.”그는 말하고는 돌아가려 했다그러나 숙희가 급하게 그를 불렀다.“종사관님!”정암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숙희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미간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아씨는 종사관님 아버지께서 감옥에서 고생하셨을 거라 생각하셨고, 종사관님께서 요 며칠 동안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시며 아버님의 마음을 달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지나서 저희 아씨께서 종사관님을 보러 갈 것입니다.”며칠 지나서 김단이 그를 보러 갈 테니, 그는 다시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정암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그녀는 며칠 동안 단식을 했으니, 지금은 분명히 매우 허약할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그가 걱정하고 자책할까 봐,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다만,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파서 그의 두 눈마저 시뻘게졌다.그는 무능한 자신이 너무 밉다.숙희는 정암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바삐 입을 열었다.“종사과님, 아씨의 마음속에는 종사관님이 있어요.”이 말을 듣고 정암이 멍하니 있다가,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
정암은 멍해졌다.단식? 찌꺼기를 먹는다고?요즘, 그는 아버지의 일 때문에 바쁘게 뛰어다녔고, 가끔 한가해질 때면 항상 그녀를 그리워했다.그는 그녀가 자기 아버지가 걱정되어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이루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달려왔다.진산군댁의 호위가 그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하지만 그도 감히 담을 넘지 못한다.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그녀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할까 봐 걱정했다.그러나 그는 그녀가 이렇게 큰 희생을 할 줄 몰랐다.그는 그가 찾은 증거가 충분해서 아버지가 석방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지금은 아버지가 경조부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단식하고, 찌꺼기까지 먹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가슴이 무언가에 찢기는 것 같았다. 정암은 지금처럼 자신을 미워한 적이 없다.무능한 자신이 너무 미웠고, 그녀를 보호해 주겠다고 해놓고, 결국 그녀는 자신을 위해 이 지경까지 괴롭힘을 당했다!임학은 이 틈을 타서 정암의 제한 속에서 벗어났고 정암의 얼굴을 향해 두 주먹을 날렸다.“너 때문이야! 이 썩을 놈아! 네가 뭔데 내 여동생이라 혼인하겠다는 거야!”정암은 비틀거리며 두 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임학을 향해 돌진했다. 주먹이 사정없이 임학의 얼굴로 향했다.“당신들은 왜 계속 그녀를 괴롭힙니까? 그녀는 진산군댁의 친딸이 아니더라도 당신 집에서 15년 동안 키운 딸이지 않습니까?”임학은 몇 대 맞고 피를 토했지만,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정암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네가 분수도 모르고 나대지만 않았어도 단이는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정암은 피하지 않았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자신이 맞아도 싸다고 느꼈다.자신의 무능함에 주는 벌이라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임학이 자기보다 더 못났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다시 주먹을 휘두르고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당신들이 그녀의 살갗을 벗기고 피를 마시고 있습니다!”임학은 쓰러지더니, 발버둥 치며 일어나 바닥에 앉아 거
진산군은 몸을 돌려 시녀들을 향해 화냈다.“다들 멍청이느냐? 빨리 의원을 불러 큰 아씨한테 오라고 해! 어서 제비집 죽 가져와!”이렇게 소리쳤지만 몸을 돌려 김단을 쳐다보지는 못했다.숙희도 그제야 김단 곁으로 다가가 손수건을 꺼내 그의 다른 손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아씨, 흑흑흑, 방에 들어가요...”그러나 김단은 그저 평온하게 임학을 바라보며 목이 멘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도련님께서는 말한 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오늘 이후로, 진산군댁은 더 이상 정암 가족을 괴롭히지 못한다!이 말은 마침내 임학을 자극했다.임학은 김단을 보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정암이 그렇게 좋아?”얼마나 좋았으면, 정암을 위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 통의 찌꺼기를 다 먹을 수 있겠어?정암이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녀를 이 지경까지 만드는 건가?김단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숙희랑 방 안으로 걸어갔다.그녀는 과연 정암을 그렇게 많이 좋아하나?그녀도 잘 모른다.그녀의 진산군댁 생활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듯했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올 때면,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러나 정암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쪽배처럼 그녀가 익사할 때 나타나 그녀를 배에 태워서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모든 사람이 정암은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고 한다. 작은 쪽배도 바다 위에서는 물결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거센 파도가 밀려올 때면 쪽배도 부서지고 새고 결국 그녀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다...하지만 그들은 이 쪽배가 그녀의 생명을 구했었다는 것을 모른다.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정암이 그녀를 버리지 않는 한 그녀는 정암을 포기할 수 없다!임씨 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김단을 따라 방에 들어가려 했지만, 방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김단이 막았다.“숙희만 있으면 돼요, 마님은 돌아가세요!”말이 떨어지자, 김단은 방에 들어가 담담하게
임학은 김단을 노려보았다. 마치 김단이 먹지 않을까 봐 걱정된 듯 또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이 통 안의 것을 먹는다면 진산군댁에서 더는 정암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임학의 말을 듣고, 임씨 부인은 마음이 쪼여졌다.“학아, 네가 어떻게 단이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 단이는 벌써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네가 어떻게 단이에게 찌꺼기를 먹이느냐?”임학은 몸을 돌려 임씨 부인을 바라보았다.“어머님! 제가 독한 것이 아니라, 정말 김단이 너무 교활해서 그래요! 이번에 원이를 단식하게 하고, 다음에 또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두 분은 정말 더 이상 김단을 믿어서는 안...”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임학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임원마저 삼키는 동작을 멈추고 모든 사람과 함께 놀라서 그의 뒤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그제야 임학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온몸이 뻣뻣해져 천천히 몸을 돌렸다.김단은 어느새 찌꺼기 통 옆에 엎드려 두 손을 통에 넣고 통 안의 물건을 잡고 먹고 있었다.임원처럼 게걸스럽게 먹는 것과 달리, 그녀는 천천히 먹고 있었다.그녀는 그저 조용히 먹고 있었다.마치 평범한 음식을 먹는 것 같았다.그런데, 그것은 어젯밤에 남겨진 찌꺼기다!모든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이다!먹기는커녕, 한쪽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찌꺼기 통에서 가끔 풍기는 이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냄새만 맡아도 속이 쓰리다.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지?임원의 눈이 심하게 떨고 있었다.3년 전에 그녀가 김단을 해쳤지만, 그녀가 도대체 김단을 어느 지경까지 만들었는지 잘 몰랐다.지금, 이 순간, 한때 구슬처럼 눈부시게 빛났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 길가의 거지처럼 찌꺼기 통을 안고 먹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마침내 자기가 도대체 김단을 어느 지경까지 헤쳤는지 깨달았다!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려 무의식적으로 진산군과 임씨 부인을 바라보았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놀
김단의 움푹 들어간 검은 눈언저리를 본 숙희는 마음이 깨질 것만 같았다.김단이 힘없이 입을 여는 것을 보았다.“사람을 보내서 경조부에 가서 확인해 봐.”숙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제가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말을 마치자, 숙희는 즉시 사람을 경조부로 보냈다.진산군은 조급했다.“너도 사람을 보냈으니, 내가 속일 수는 없지 않느냐? 빨리 네 여동생에게 좀 먹어라 해!”말하는 사이에 임씨 부인도 왔다. 그녀의 뒤를 바짝 따르던 시녀 두 명이 제비집을 넣고 끓인 죽을 한 그릇씩 들고 있었다.김단과 임원을 보고 임씨 부인은 마음이 아팠고 바삐 시녀에게 말했다.“빨리 두 아씨에게 죽을 먹여라!”그러자 두 시녀는 김단과 임원 앞에 무릎을 꿇고 제비집 죽 한 숟가락을 떠서 두 사람의 입으로 떠넣었다.그러나 김단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김단은 위협하는 눈빛으로 임원을 바라보았다.김단의 시선을 감지한 임원은 가슴이 조여와, 이미 벌린 입을 재빨리 다물고 다시 누웠다.임원은 눈을 감고 어깨를 계속 떨며 우는 것 같았다.그러나 5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아서, 그녀는 지금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못했다.이 장면을 보고 진산군과 임학은 분노했다.임학은 심지어 욕설을 퍼부었다.“양심 없는 년! 아버지께서 이미 사람을 풀어주셨는데, 또 뭐 어쩌려고? 정말 원이를 죽게 만들 셈이야? 정암 때문에 네 눈에는 네 여동생의 목숨도 보이지 않니?”임학은 화가 나서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그러나 김단은 천천히 눈을 감고 그를 보지 않았다.5일 동안 먹고 마시지 않았는데, 그녀는 지금 정말 그와 다툴 힘도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꼭 한마디 했을 것이다. 임원은 자기의 여동생이 아니라고!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숙희가 보낸 머슴애가 황급히 돌아왔다.이 머슴애는 별당 사람이다. 김단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떨려 말하는 소리에는 슬픔이 묻어났다. “아씨, 소인은 정암 종사관이 그의 아버지를 데리고 가는 것을 똑똑히 봤습니다.”이
예전에 김단을 위해 별도 달도 따다 주겠다는 사람이 지금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참!김단은 소리 내며 웃더니, 몸을 돌려 계속 풀을 뽑았다. 땅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슬픔이 숨어 있었다.“대감마님께서 정말 임 낭자를 아끼신다면 빨리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임 낭자는 굶어 죽어도 전 계속 살아 있을 것입니다.”이렇게 말하자, 김단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어 진산군을 바라보았다.눈빛에 담긴 슬픔은 이미 사라졌고, 오직 비웃음만이 남아 있었다. “임 낭자는 대감마님의 유일한 딸이십니다. 그녀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진산군은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김단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고, 마음속의 분노는 더욱 솟구쳤다.“좋아! 좋아! 정말 이것으로 나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니? 너는 정말 이 아버지를 우습게 보는구나! 내가 전쟁터에 나갔을 때, 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 진산군은 김단에게 자기도 고집불통이라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고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김단은 가볍게 말을 내뱉었다. “제 아버지의 성은 김씨 입니다. 벌써 죽었다고 들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진산군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손가락으로 김단을 가리키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커다란 별당이 다시 썰렁해졌다.김단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다시 굳게 닫힌 정원 문을 보면서 오랫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정원 문이 다시 열릴 때는 3일 후였다.이때 김단은 정원의 흔들의자에 누워 힘이 조금도 없었다.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입구를 바라보니 진산군이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화내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배고픔이 극에 달했는지, 김단은 눈앞이 흐릿해져도 진산군이 오는 쪽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진산군의 뒤를 따르는 임학과, 뒤에서 누군가에게 이끌려 오는 임원의 모습을 뚜렷이 알아보았다.그녀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보
김단은 정원 문 뒤에 서서 어두운 밤 속에 가려진 연못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연못 물은 맞은편에 있는 초롱의 빛을 거꾸로 비추고 있었다. 약한 빛은 마치 언제든지 어둠에 삼켜 버릴 것만 같아 연못의 돌다리조차도 똑똑히 비추지 못했다.김단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돌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귀밑의 살쩍을 불었지만,연못은 미동도 없었다.김단은 자기가 마치 초롱의 빛이고, 부드러운 바람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망가지든 옛 가족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고 느꼈다.이렇게 생각하자, 김단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씁쓸하게 웃었다.이 순간, 그녀는 오히려 임원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임원이 정말 마시지 않고 먹지 않는 한 진산군은 반드시 마음이 아플 것이다!김단의 짐작이 맞았다.이틀이 지나자, 진산군은 노기등등하여 별당으로 왔는데, 마침, 김단은 정원에서 김매고 있었다.초봄이 되어 화단의 잡초가 매우 빨리 자라서 제때 뽑지 않으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꽃보다 더 높아질 수 있다.진산군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걸 본 김단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진흙으로 더럽혀진 두 손을 진산군을 향해 내보이며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대감마님께서 오늘 오실 줄 몰랐습니다.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망할 년!”진산군은 노발대발하더니 손을 휘젓더니 엄하게 명령했다.“뒤져라!”갑자기 두 팀의 호위가 좌우로 나뉘어 줄지어 들어왔다.김단은 그제야 눈살을 찌푸렸다.“대감마님께서 무슨 뜻입니까?”진산군은 대답 없이 김단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팀의 호위는 또 모두 나왔다.“대감마님, 어떤 음식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대감마님, 저희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그녀가 음식을 숨겨서 먹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콧방귀를 꼈다.진산군이 차갑게 소리치며 물었다.“너는 도대체 먹을 것을 어디에 숨겼느냐!”이틀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서 임원은 침대에서 내려올 힘
진산군은 이 일을 알고 매우 화가 났다.김단이 별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산군댁의 호위들은 벌써 별당을 포위했다.호위장은 때마침 돌아온 김단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대감마님께서 오늘부터 큰 아씨를 별당에 연금하여 외출을 금지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김단은 이미 예상해서 놀라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별당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그러자, 호위장은 또 김단을 막고,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큰 아씨께서 단식하는 것을 좋아하시니 오늘부터 잘못을 뉘우칠 때까지 마시지 말고, 먹지도 말라고 명하셨습니다.”김단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여전히 담담한 모습으로 말했다.“알겠으니, 이제 들어가도 되겠소?”김단이 이렇게 차분한 것을 보자, 호위장은 의아했다. 김단이 무슨 방법이 있어 연금에서 빠져나갈까 봐 작은 소리로 알려줬다.“대감마님께서 우리더러 별당을 엄격히 지키라 하셨습니다. 이 기간에 별당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합니다. 명을 거역하는 자는 당장 죽이라고 하셨습니다.”이 말은 김단이 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 밖의 사람과 연락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예를 들면, 전에 몰래 그녀를 보러 왔던 정암을 말한다.하지만 지금, 김단이 걱정되는 사람은 정암이 아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대감마님께서 벌을 내린 사람은 나뿐이오. 내 마당의 하인과는 무관하오. 나를 가둬두기 전에 내 마당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나오라 해도 되겠소?”이 말을 듣자, 호위장도 난감했다.“이러면...”“모두 살자고 일하는 것인데, 그들도 집에 살려 먹여야 할 사람이 있는데, 주인인 내가 잘못했다고 그들까지 연루해야 하오?”김단은 말하면서 머리에서 비녀 하나를 뽑아서 호위장 손에 넣어 줬다.“좀 봐주시죠.”이 비녀는 전에 궐에서 하사한 것이다. 비녀 위에 있는 진주만이라도 가치가 어마어마해서 호위장은 바로 마음이 움직였다. 생각해 보면 김단의 말도 도리가 있다.더군다나, 진산군은 큰 아씨를 연금하라 했지, 미리 별당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