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온지유는 남이 아니라 당신 여자지, 내가 남이야!”강지한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을 마친 심미연은 바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여기서 더 말하면 그에게 손을 댈 것만 같아 간신히 참은 건데 양심이라고는 없는 강지한은 또 한숨을 쉬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심미연, 너 진짜 속 좁은 거 알아?”온지유는 강씨 집안 족보에 이름을 올린 한 집안사람인데 그녀에게만 매정한 심미연이 강지한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의 말에 발걸음을 멈춘 심미연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렇게 내가 형님보다 못난 사람인 것 같으면 빨리 서류에 사인이나 해, 이혼하고 각자 갈 길 가자.”강지한은 이혼서류에는 사인도 안 하면서 또 이래저래 꼬투리만 잡고 있었기에 심미연은 그가 자신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런다고만 생각했다.“이혼 얘기 한 번만 더해.”하지만 강지한은 강지한대로 이혼을 시도 때도 없이 입에 올리며 결혼을 애들 장난으로 생각하는 심미연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낮은 목소리로 화를 참으며 말했다.강지한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심미연도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이혼 얘기 듣기 싫으면 너부터 온지유랑 거리 유지해, 둘이 같이 기사에 오르는 거 나 더는 못 봐줘. 약속하면 나도 이혼 얘기는 안 꺼낼게.”일말의 보장도 없는 결혼생활은 심미연에게도 고통에 불과했기에 결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심미연...”강지한이 그 말에 대답하려고 할 때 그 품에 안겨있던 온지유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지한 씨, 여기 어디야? 나 쓰러졌었어?”지금 눈을 뜨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의 말에 응할 것만 같아 온지유는 연기도 집어치워 버렸다.정말 강지한이 심미연 말대로 자신과 거리를 두면 둘 사이는 여기서 끝이 날 것만 같아서 일단은 그걸 막는 게 먼저였다.강지한도 그제야 온지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너 아까 쓰러졌었어. 괜찮아? 병원 갈까?”“저혈당으로 쓰러진 걸 거야. 괜찮으니까 병원은 안 가도 돼.”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고개를
일부러 보란 듯이 잘난 척하는 심미연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강지한에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온지유가 또 떼를 쓰기 시작하자 강지한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알겠다고 할 뿐이지 그걸 꼭 다 지킨다는 건 아니야. 너 지금 임산부야,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면 배 속의 아이한테도 안 좋아.”그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눈물을 도로 집어넣으며 다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알겠어, 감정 조절 잘할게.”사실 온지유의 기분은 강지한의 태도에 의해 좌우지됐지만 온지유는 그걸 사실대로 말하진 못했다.“넌 이제 로펌으로 가, 나 심미연이랑 얘기 좀 할게.”“지한 씨는 진짜 안 가? 같이 가자, 응?”온지유는 강지한의 팔을 잡고 그를 올려다보며 졸라대고 있었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강지한이 온지유를 거절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굳이 듣지 않아도 대답이 어떨지는 이미 예상이 갔다.“알겠어.”역시나, 예상한 대답을 뱉어내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하지만 강지한에게 버려지는 건 3년 동안 자주 겪어온 일이었기에 별로 큰 상처는 아니었다.“지한 씨, 나 좀 어지러운데 부축 좀 해줘.”그 대답에 만족스럽게 웃은 온지유는 강지한의 손을 잡으며 그가 보지 못하게 심미연을 향해 웃어 보였다.이긴 건 나라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의 웃음이었다.“가자 그럼.”하지만 온지유의 도발에도 심미연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본 강지한은 그 평온한 표정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미연아, 같이 가자.”그때 온지유가 보란 듯이 손을 저으며 자신을 부르자 심미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버렸다.그리고는 강지한과의 이혼에 더욱더 확신을 가졌다.앞으로 이런 모습을 더 보다가는 정말 암이라도 걸릴 것 같아서 몸을 위해서라도 이혼만이 답인 것 같았다.한편 미련 없이 돌린 등을 보며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주름이 새겨질 정도로 깊게 찌푸린 미간을 한 채 심
“심미연 씨, 듣고 있어요?”그에 정신을 차린 심미연이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서둘러 가방을 챙긴 뒤 방을 나섰는데 마침 들어오고 있던 강지한과 온지유를 마주쳐버린 것이다.심미연은 못 본 척 지나치려고 했지만 온지유는 당연히 그녀를 쉽게 보내줄 리가 없었다.“심미연, 너 또 어디가?”“병원.”온지유의 말에 발걸음을 멈춘 심미연이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그리고 강지한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신약 얘기를 꺼내려고 시도해봤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래서 일단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고 정 방법이 없으면 그때 강지한에게 말하기로 했다.예전 같았으면 할머니 병세에 대해 전해 듣자마자 강지한을 떠올렸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심미연의 말에 강지한은 전에 성무진에게서 들었던 심미연 외할머니 병에 대해 떠올렸다.아마도 신약이 필요한 것 같은데 심미연은 돈을 들여 다른 약을 사들일지언정 저에게는 절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그게 또 선을 긋는 것 같아 강지한은 강지한 나름대로 못마땅했다.“할 얘기 있으니까 얘기 마치고 가.”온지유는 말을 하면서도 옆에 서 있는 남자의 눈치를 봤다.혹여나 심미연이 아까 한 말을 들었을까 봐 쳐다본 건데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는 강지한은 들었어도 도와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나 지금 급하니까 나중에 얘기해.”한 시간 전에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서 이렇게 다정한 부부마냥 온지유와 한 프레임에 서 있는 강지한에 역겨워 난 심미연은 무표정으로 대꾸했다.“미연이 화난 것 같은데, 지한 씨가 나 데려다줘서 그런 거 아니야?”제가 뻔히 듣고 있는데 일부러 강지한을 보며 말하는 온지유에 심미연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딴 거 신경 안 쓰니까 어디 사무실에라도 들어가 있어. 여기 계속 서 있으면 또 우리 삼각관계에 대해서 다들 수군댈 거야. 앞으로 누가 또 내가 강지한 침대에 기어올랐다느니 뭐니 하는 헛소문 퍼뜨리면... 그땐 혼인신고서 단톡방에 뿌려버릴 거야.”할머니
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며 말했다.“내가 급한 일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날 못 가게 막은 게 온지유야. 할머니가 응급실에서 수술 기다리시는데 이 상황에 내가 어떻게 걔 말에 따라! 온지유가 무시당하는 게 그렇게 마음 아프면 그냥 회사 보내지 말고 끼고 살아, 당신 돈으로 얼마든지 책임질 수 있잖아.”심미연의 할머니가 응급수술에 들어가야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던 강지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나 이제 가도 될까? 이러다 할머니 마지막 모습도 못 볼 것 같아서 그래.”말을 마친 심미연은 눈물을 닦으며 방을 나왔고 그에 문에 기대어 엿듣고 있던 온지유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심미연이 이미 멀리 간 뒤라서 바로 심미연을 부르려고 했는데 그 순간 강지한이 방에서 나오는 바람에 온지유는 바로 그에게로 달려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지한 씨.”“앞으로 심미연이 어디 가겠다고 하면 그냥 보내줘, 쟤 너한테 허락 맡을 이유 없어.”저를 한번 보며 저런 말만 남기고 가버리는 강지한에 온지유는 화가 나 이를 갈기 시작했다.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화가 나 있었는데 왜 나올 때는 태도가 180도로 변한 건지 온지유는 의아하기만 했다.한편 차를 몰고 주차장을 나서던 심미연은 제 앞을 가로막아버리는 강지한의 벤틀리에 경적을 울렸지만 전혀 비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렸다.“사모님!”성무진은 심미연의 모습에 깍듯하게 인사부터 건넸다.“문 열어요.”말을 마친 심미연이 뒷좌석으로 가 문을 당기자 안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는 강지한의 모습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날 보내줄 거야...”“타.”키보드를 두드리며 고개도 들지 않고 명령조로 말하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나 지금 급해, 할 얘기 있으면 밤에 하자.”할머니가 응급수술을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했는데도 제 앞길을 막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그가 온지유가 받은 서러움을 되갚아주려고
“성 비서님, 강지한 위한다고 일부러 그렇게 지어낼 필요 없어요.”만약 강지한이 정말로 할머니의 병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할머니가 자주 쓰러지는 것도 알 텐데 지금까지 신약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게 말이 안 되어서 심미연은 성무진이 자신의 대표를 위해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대표님이랑 큰 사모님 사이는...”“운전하라고 보냈더니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심미연 빨리 보내.”그런데 때마침 들려오는 강지한의 호통에 성무진은 더는 제 대표를 도와주지 못할 것 같아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표정을 보고 있던 심미연이 웃으며 대꾸했다.“강지한이랑 온지유 사이는 저뿐만 아니라 온 경성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예요, 성 비서님이 아무리 감싸고 돌아도 사실은 사실이죠.”한편 차에 앉아서 백미러로 심미연을 보고 있던 강지한은 성무진을 향해 웃어주는 그 얼굴이 못마땅했다.심미연의 말을 듣고 있던 성무진은 그녀의 대답에서 오해의 골이 깊어졌음을 눈치채고는 하루 이틀에 해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그냥 짤막하게 한마디만 했다.“나중이면 다 알게 되실 거에요.”나중에 기회를 봐서 강지한을 도우려고 한 말인데 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강지한이 가장 믿는 비서답네요 이런 말도 다 하고. 온지유 앞에서도 강지한 대신 낯간지러운 말도 많이 했겠죠?”“아니요! 그럴 리가요!”강지한이 온지유에게 사준 선물을 전해준 적은 있어도 오글거리는 얘기들은 절대로 전한 적이 없었다.그리고 강지한은 어차피 온지유를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었기에 그런 말들을 할 리도 없었다.강지한이 온지유를 챙겨주는 건 그저 자그마한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였다.“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말했다 해도 어차피 나는 모르잖아요. 제 차는 운전해서 집으로 가주세요, 수고하세요 그럼.”말을 마친 심미연은 강지한이 화내기 전에 서둘러 그의 차 문을 열어젖혔는데 문을 열자마자 강지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짜 나를 운전기사로 쓸 참이야?”타라고 해서 탔더니만
하지만 강지한의 장난에 로펌에서부터 쌓였던 화는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이럴 때보면 심미연은 자신이 아주 쉽게 만족을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강지한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이렇게 쉽게 마음이 풀리는 사람인데 강지한은 자신에게 아예 마음이 없으니 줄 진심은 당연히 없을 것이기에 심미연은 다시 씁쓸해졌다.심미연이 하도 조용하니 강지한은 운전을 하면서도 자꾸만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창가에 비친 그 조막만 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자신이 심미연을 사랑하지 않는 건 분명하지만 그녀와 함께 보내는 이 평온한 시간들을 좋아하는 것 또한 분명했다.결혼한 지 3년밖에 안 됐지만 이상하게 심미연과 있으면 몇십 년을 함께 산 부부처럼 편안했다.조급한 심미연을 위해 강지한은 최대한 빠르게 운전을 한 덕분에 그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도착했고 차를 멈추자마자 심미연은 바로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주차를 마친 강지한도 서둘러 그녀를 따라 올라갔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작고 왜소한 인영이 응급실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게 보였다.할머니가 쓰러질 때마다 이렇게 수술실 앞에서 기도했을 심미연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도 모르게 답답해진 강지한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그렇게 정신없이 피우다가 한 갑을 다 태워버린 강지한은 그제야 창문을 열어 몸에 남아있던 담배 향을 지우고는 심미연에게로 다가갔다.자연스레 심미연 옆으로 다가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는데 그게 강지한인 줄 모르고 호신술을 쓰려 하는 심미연이었다.“심미연, 나야!”익숙한 목소리와 변함없이 잘생긴 얼굴에 심미연은 잠시 당황하다가 물었다.“아직 안 갔어?”“너랑 같이 할머니 나오는 거 기다리려고. 할머니 괜찮으실 거니까 걱정 마.”결혼한 지 3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다정한 위로에 심미연은 잠시 넋을 놓고 강지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강지한이 저한테 그렇게 매정한 것 같지는 않았다.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고 마른 몸에 수많은 관들을 연결한
강지한의 질문에 심미연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니야...”일부러 유혹하지 않아도 강지한과 밤을 보낸 다음 날이면 온몸이 다 쑤시는데 유혹까지 한다면 며칠은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한쪽에 서 있던 주치의는 이노 하이브의 대표가 심미연한테 와이프라는 호칭을 쓰자 둘의 관계가 부부라고 생각하고 그럼 약 걱정은 없을 것 같아 심미연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미연 씨, 노력 좀 해서 빨리 신약 얻어와요. 그래야 할머니 더 오래 뵙죠.”나이도 드신 분인데 자꾸만 수술하는 것도 방법은 아니었기에 주치의도 심미연만큼이나 신약이 생기길 바라고 있었다.“네, 그럴게요.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매번 감사드려요.”심미연은 빨개진 얼굴을 한 채 강지한의 손을 뿌리치더니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누워계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미연 씨, 할머니 일단 병실로 모셔다 드려야 해요.”“아, 네.”그때 간호사가 넌지시 말하자 심미연은 곧바로 침대에서 떨어져서 다시 강지한을 돌아보았다.강지한은 마치 심미연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마냥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실 성무진에게서 심미연 할머니의 병세를 전해 들었을 때 바로 신약을 보내주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뼛속 깊이 자본가인 그는 심미연이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면 그 틈을 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지한 씨.”그때 강지한 앞에 서 있던 심미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3년 동안 그리 좋은 부부관계는 아니었어서 심미연이 이렇게 다정하게 강지한의 이름을 부른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갑자기 제 이름을 불러오는 심미연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달콤해서 강지한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침대에서도 저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가둬버리고 싶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반응하는 몸에 강지한은 깊은 눈동자로 심미연을 주시하며 입술을 움직였다.“여기서 유혹할 생각이야?”제 앞
심미연은 저녁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그래.”강지한은 손으로 심미연의 코를 건드리며 말했다.“가서 할머니 옆에 있어 드려.”그 말에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도 얼굴 한번 못 본 손주사위가 보고 싶으시다던 할머니가 떠올라 심미연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지한 씨, 나랑 같이...”그때 갑자기 울리는 강지한의 핸드폰에 심미연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강지한의 핸드폰에 적힌 온지유라는 이름에 심미연은 품고 있던 모든 기대가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세 사람이 나누는 사랑은 항상 참는 이가 생기기 마련이었다.“가서 할머니 옆에 있어 드려. 나는 로펌 좀 가봐야겠어, 지유가 배 아프다고 해서.”강지한은 혹시나 심미연이 기분 나빠할까 봐 부러 한마디 더 보탰다.“임신 중이라 감정 기복이 심한 거야, 3개월 뒤면 괜찮아질 거야.”온지유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던 심미연은 애써 괜찮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얼른 가봐, 운전 조심하고.”심미연은 자신도 임산부라고 나랑은 같이 있어 줄 수 없는 거냐고 다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말한다 해도 강지한이라면 그녀가 온지유를 질투해서 꾸며낸다고 생각할 테니 말 안 하느니만 못했다.그런 심미연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지한이 그녀의 얼굴을 잡아 올렸는데 심미연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린 탓에 입술이 그녀의 볼에 가 닿았다.그에 강지한은 조금 언짢은 듯 물었다.“기분 나빠?”아까 온지유의 상태에 대해 다 설명했는데 왜 기분 나빠하냐는 듯한 질문에 심미연은 애써 주먹을 그러쥐며 웃음을 띠고 말했다.“아니야 그런 거, 얼른 가봐. 저녁에 밥 같이 먹자.”지금은 자신의 기분 따위가 아니라 할머니의 신약이 더 중요했기에 심미연은 이런 억지웃음은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다.하지만 자신의 그런 속내를 보아내려는 듯 집요하게 눈을 맞추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그를 살짝 밀어내며 웃어 보였다
강지한은 미간을 꾹 누른 채 시선이 옆에 있는 심미연에게로 향했다.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심미연을 편애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노하이브의 지분도, 강씨 가문의 가보도 툭툭 넘겨주었다.심미연 이 여자는 권모술수도 많고 악랄한데 뭐가 좋다고!“병원에 곧 도착하니까 만나서 얘기해요. 심미연이랑 같이 있어요.”심미연도 함께 있다는 말을 들은 강준형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졌다.“그래, 기다리마.”전화를 끊으며 강지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준형이 갑자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낸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심미연이 뒤에서 허튼수작을 부린 게 밝혀지면 그도 수단 가리지 않고 상대할 생각이었다.곧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손목이 아프게 꺾이자 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강지한, 손 놔!”강지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놓으면 도망가게?”그러면서도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심미연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할머니 주치의가 전화해서 특효약에 대해 말해줬어. 당신이 약속 지켰으니까 나도 말한 대로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억울하더라도 온지유에게 사과할 거니까.”강지한은 경성에서 손으로 하늘도 가릴 사람이라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하지만 그가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는 온지유의 일방적인 말을 믿고 싶어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차라리 순순히 온지유에게 사과하면 강지후가 좋게 봐줘서 다음 약을 얻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부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마음이 씁쓸했다.강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아버지 앞에서 말 제대로 해.”심미연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강지한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할머니는 그의 손에 있는 약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지한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심미연은 단화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지한보다 다리가 짧아서 빠르게 걷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지유가 임신한 몸으로 혼자 있는데 내가 좀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강지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온지유가 그를 구해줬고 이제 그녀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당연히 도와줘야 마땅했다.그런데 심미연이 그가 온지유를 도와준 것에 대해 속 좁게 따지는 게 못마땅했다.심미연은 그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나랑 이혼만 하면 그 여자를 도와주든지 그 여자랑 결혼하든지 상관 안 할게.”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 사람을 위해 꺼져주겠다는데 이 바닥에서 그녀처럼 너그러운 사람은 둘도 없으니 강지한은 고마워해야 했다.강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심미연...”바로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고 강지한은 말을 삼켰다.심미연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형수님 전화 오셨네, 받아.”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았다.온지유의 전화라면 둘이 관계를 할 때에도 전화를 받곤 했다.대체 온지유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면 그럴까.“나랑 지유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강지한은 심미연을 노려보았다.‘이 여자 표정은 뭐지?’“그래,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그냥 온지유는 임신만 한 거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잡것을.”그녀도 임신 중이었기에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공격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강지한이 거듭해서 선을 넘지 않나.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눈빛이 갑자기 살벌해졌다.“심미연, 한 번만 더 잡것이라고 해. 내가 가만 안 둬.”심미연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당신은 날 가만 둔 적 없어.”온지유에 대해 말만 해도 그는 꼬리가 밟힌 것처럼 발끈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최대한 화를 내지 않고 강지한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임신 중이라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배 속의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강지한은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것을 느꼈다.정말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그를
온지유가 사고를 당한 건 그녀가 시킨 일이고,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내려는 것도 그녀가 일러바친 거다?한마디로 온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다 그녀가 했다는 뜻이다.강지한의 마음은 참 변함없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강지한이 화가 난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심미연, 제대로 설명해.”심미연은 화를 억누르며 작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강지한, 내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무슨 설명을 하라는 거야?”온지유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자 강지한은 머리가 없는 사람처럼 정상적인 생각이 불가능한 듯 보였다.성무진은 황급히 차 칸막이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그 역시 강지한이 심미연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을 설득할 수도, 심미연을 도울 수도 없었다.가끔은 정말 심미연이 안쓰러웠다.강지한은 이미 온지유 일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심미연이 이런 식으로 대꾸하자 순식간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미연의 목을 움켜잡더니 험악하게 말했다.“오늘 온지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죽어.”목이 잡힌 심미연은 숨쉬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눈동자를 크게 뜨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난 3년 동안 나에게 계속 상처를 줬어! 나도 인간이야, 강철이 아니라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아프고 괴롭다고! 강지한, 이혼하자는 말 진심이야.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진심이고.”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한때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환상을 가졌다.그러다 이 결혼 생활에서 아무리 진심을 다 바쳐도 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과거엔 사랑하지 않아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려 했는데 이제야 자존심도 버린 사랑은 상대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뚝뚝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는
심미연은 그를 돌아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왜요?”예전에는 강지한을 사랑해서 24시간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기를 바랐던 그녀였지만 조금 전 강지한의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그의 곁에 있겠나.최대한 멀어지는 게 좋았다.성무진은 그녀의 질문에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강지한이 화가 났다고 말해야 하나.“그쪽 대표님은 안 바쁘대요? 왜 차에 안 타요? 아니면, 우리가 먼저 갈까요?”심미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나 일이 있어서 서둘러야 해요.”할머니에게 일주일 치 약이 있으니 일주일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그것만으로도 기꺼이 온지유에게 사과할 수 있었다.게다가 온지유가 그녀를 해친 것에 대해서 나중에 진실을 밝히고 되돌려주면 그만이다.아무리 늦어도 복수를 하기만 하면 되니까.성무진은 두려움에 차 밖을 내다봤다.다행히 강지한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아니면 심미연이 또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당연히 강지한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없었다.그의 비서에게 그를 놔두고 가자고 하다니, 참 대단한 여자다.허리를 굽혀 차에 앉으려던 그는 심미연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뒤에 앉아, 물어볼 게 있어!”심미연은 짜증을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미 사과하라고 했는데 대체 왜 화를 내는 건지.’“심미연, 다시 한번 말할게. 뒤에 와서 앉아.”강지한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필사적으로 마음속에 치미는 분노를 삭였다.“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봐, 다 들리니까!”그녀는 이제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성 비서, 전화해서 약 다시 가져오라고 해.”강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싸늘했다.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강지한은 정말 나쁜 놈이다!성무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 뒤에 앉으시죠.” 한순간 홧김에 힘들게 얻은 약을 잃을 수는 없었다.심미연의 작은 얼굴이 창백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강지한은 고개를 들어 그의 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심미연은?”성무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여자 화장실에 사람 시켜서 찾아봤는데 아무도 없어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한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다.“전화해서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 안 그러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성무진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심미연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도대체 사모님이 무슨 짓을 했길래 대표님이 저렇게 화가 난 걸까.강지한은 극도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빨리 전화해!”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그 시각 심미연은 회사 밑 정원에서 통화 중이었다.할머니의 주치의는 누군가 특효약을 일주일 치 보내왔다며 방금 할머니에게 투여해서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을 전했다.의사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구쳤다.“이따가 할머니 뵈러 갈게요,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저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약을 전해준 분께 감사해야죠!” 의사가 겸손하게 말하자 심미연은 의사가 말하는 ‘약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았다.하지만 의사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한참을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심미연은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성무진의 연락이 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성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사실 성무진이 왜 전화를 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사모님, 길 잃으셨나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성무진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직접 묻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나 아래층 정원에 있으니까 오세요.”마음속으로는 강지한이 미웠지만 강지한의 뜻을 거스르는 순간 할머니가 쓰던 특효약은 순식간에 모두 회수될 것이기에 할머니가 더 이상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강지한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알겠습니다.”성무진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심미연의 말을 강지한에게 전달했다.강지한은 얼굴을 찡그
“미연 씨,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난 진심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무슨 짓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온지유의 진지한 말투에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요, 그러면 지금 강지한 사무실로 와요. 셋이 함께 얘기하죠.”단지 수작을 부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던 거다. 아니면 온지유가 지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오를 수나 있었겠나.“지한 씨한테 갔다고요? 왜 지한 씨를 찾아갔어요?”온지유가 한층 언성을 높이며 다급하게 말했다.“당연히 내 남편과 부부 사이 친밀한 일을 하려는 거죠. 왜 그렇게 불안해해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온지유가 전화를 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절대 사적으로 그녀와 만나지 않을 거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세수하고 손을 닦은 후 화장실을 나섰다.사무실 문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순간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육체적 욕구 해결하려고 자는 거예요. 밖에서 만난 여자들보다 깨끗하니까. 그 여자가 이혼을 원하면 어떡하냐고요? 허, 절대 안 되죠. 3년 동안 내가 심전그룹에 얼마나 투자했고 그 여자한테 얼마를 썼는데 이혼하면 내 돈도, 청춘도 다 버리는 거잖아요. 게다가 난 아직 질리지 않았어요. 충분히 갖고 놀다가 질리면 회사 법무팀 통해 소송해서 한 푼도 안 주고 내보낼 거예요.”여기까지 들은 심미연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황급히 엘리베이터 입구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고 그 남자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알고 보니...강지한은 단지 육체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다.그녀가 밖에 있는 여자들보다 깨끗해서!그리고 아직 충분히 갖고 놀지 못해서 이혼하지 않는 것이고 지겨워지면 그때 소송해서 빈털터리로 쫓아낼 생각이었다.영리한 사업가인 강지한은 그녀를 내쫓기 전에 마지막 남은 가치까지 쥐어짜 내려 했다.그런 남자를 9년이나 사랑했다니.참 우스웠다.그 시각 사무실에서 강지한은
어쨌든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든 증거가 심미연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배후는 그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고소하면 심미연은 법의 심판을 받는다.이제 온지유에게 사과만 하면 될 일인데 뭐가 문제일까.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분명하게 말했다.“강지한, 나한테 계속 이렇게 상처를 주면 언젠가 내가 당신한테 너무 상처받아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떠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떠났어야지! 3년이나 기다릴 게 아니라!” 그의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강지한의 말이 맞다.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그에게 계속해서 상처받으면서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곁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전에는 그것이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강지한의 눈에 그녀의 사랑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내가 말 바꿀까 봐 걱정되면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약 보내줄게. 할머니가 약 받고 사과하러 가도 돼.”강지한은 이미 자신이 많이 양보했으니 심미연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그녀가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지금 전화해. 난 약을 먼저 받아야겠어.”강지한이 이렇게 말하니 심미연은 아무리 억울해도 삭힐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몸이 더 중요했기에 할머니가 고통받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건 불효였다!강지한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고 심미연은 전화를 거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남몰래 결심했다.통화를 마친 강지한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약 곧 올 테니까 앉아서 기다려.”심미연은 그가 뻗은 손을 피해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할머니 주치의한테 특효약에 대해 말하고 올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온지유에게 사과하는 건데, 무릎 꿇으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강지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그래.”“그러면 미연 씨가 사과를 하면 내가 직접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취하하는 게 어떨까요, 지한 씨?”달래는 듯한 말투였다.“지한 씨...”머뭇거리는 온지유가 난감한 듯 보였다.“할 말 있어?” 강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심미연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셔츠가 젖어 가슴에 꽉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절제되고 섹시했다.심미연은 수년 전 강지한을 처음 봤을 때 믿기지 않는 그의 얼굴에 반해 바로 넘어갔던 걸 떠올렸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자신이 참 한심했다.온지유는 망설이다가 말했다.“미연 씨가 내 번호를 차단해서 연락이 안 돼요.”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내가 데려갈게.”“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요?”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잘못했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지. 됐어,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몸조리나 잘해.”“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 너무 강요하지 마요.”“내가 이따가 데려갈게”이 말을 들은 온지유는 뜻대로 흘러가자 순순히 강지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의 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마음속으로 막연한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온지유가 무슨 말을 했을까.“심미연, 지금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강지한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심미연을 향해 걸어가며 강압적인 어투로 말했다.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온지유가 또 무슨 짓을!강지한이 말했다.“네가 사람을 시켜서 지유를 차로 쳤잖아. 다행히 지유는 다른 데는 괜찮은데 손만 부러졌고 뱃속 아기도 멀쩡해.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지유에게 사과하면 지유가 바로 고소 취하할 거야.”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경악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꾸민 일인데 내가 그런 거라고 모함하고 나한테 사과까지 하라는 거잖아. 어떻게 그런 허술한 연기에 속아?”이노하이브를 인수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노하이브를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심미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담긴 물을 강지한의 얼굴에 뿌렸다.“당신이랑 그래도 3년 동안 부부로서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잤으니까 여기 오기 전에는 내가 어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도 당신이 내 결백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네. 이번 일 사실대로 밝히고 싶으면 뒤에서 수작 부리지 마. 내가 꼭 진실을 밝혀줄 테니까.”지금 강지한을 찾으러 여기 올 게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가서 온지유를 한바탕 두들겨 팼어야 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고는 검은 눈동자로 심미연을 바라보며 비웃었다.“그렇게 자신 있는데 왜 나한테 와서 큰소리야?”이 여자가 무슨 배짱으로 그에게 물을 뿌리는 걸까.그와 시선을 마주한 심미연은 진작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이번에야말로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이 일이 밝혀지면 그와 온지유의 소원대로 반드시 강지한과 이혼할 거다.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며 정적을 깨뜨렸고 강지한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심미연은 화면에 뜬 온지유 이름에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심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오붓하게 통화해.’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심미연!”심미연의 발걸음이 살짝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사람 시켜서 교통사고에 대해 조사할 거야.”그가 당황했다.심미연에게 뭘 해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녀가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는 것은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인데 그녀의 감정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까.하지만 이번엔 심미연의 감정이 조금 신경 쓰였다.“전화 받고 얘기해.”3년 동안 심미연은 한가지 규칙을 발견했다. 강지한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풀릴 기세가 보이면 온지유는 전화를 걸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둥, 몸이 안 좋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댔고 강지한은 매번 철석같이 믿으며 심미연을 혼자 버려둔 채 온지유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