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저녁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그래.”강지한은 손으로 심미연의 코를 건드리며 말했다.“가서 할머니 옆에 있어 드려.”그 말에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도 얼굴 한번 못 본 손주사위가 보고 싶으시다던 할머니가 떠올라 심미연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지한 씨, 나랑 같이...”그때 갑자기 울리는 강지한의 핸드폰에 심미연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강지한의 핸드폰에 적힌 온지유라는 이름에 심미연은 품고 있던 모든 기대가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세 사람이 나누는 사랑은 항상 참는 이가 생기기 마련이었다.“가서 할머니 옆에 있어 드려. 나는 로펌 좀 가봐야겠어, 지유가 배 아프다고 해서.”강지한은 혹시나 심미연이 기분 나빠할까 봐 부러 한마디 더 보탰다.“임신 중이라 감정 기복이 심한 거야, 3개월 뒤면 괜찮아질 거야.”온지유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던 심미연은 애써 괜찮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얼른 가봐, 운전 조심하고.”심미연은 자신도 임산부라고 나랑은 같이 있어 줄 수 없는 거냐고 다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말한다 해도 강지한이라면 그녀가 온지유를 질투해서 꾸며낸다고 생각할 테니 말 안 하느니만 못했다.그런 심미연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지한이 그녀의 얼굴을 잡아 올렸는데 심미연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린 탓에 입술이 그녀의 볼에 가 닿았다.그에 강지한은 조금 언짢은 듯 물었다.“기분 나빠?”아까 온지유의 상태에 대해 다 설명했는데 왜 기분 나빠하냐는 듯한 질문에 심미연은 애써 주먹을 그러쥐며 웃음을 띠고 말했다.“아니야 그런 거, 얼른 가봐. 저녁에 밥 같이 먹자.”지금은 자신의 기분 따위가 아니라 할머니의 신약이 더 중요했기에 심미연은 이런 억지웃음은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다.하지만 자신의 그런 속내를 보아내려는 듯 집요하게 눈을 맞추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그를 살짝 밀어내며 웃어 보였다
심미연이 주치의와 알고 지낸 지는 3년 정도 되었지만 둘의 대화는 늘 할머니의 병세를 에워싸고 진행되었기에 이렇게 사적인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건 불편해서 그녀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아까 대표님이랑 신약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내일이면 약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약만 있으면 할머니 상황도 괜찮아지는 거죠?”심미연은 빨리 다 나은 할머니를 모시고 바깥세상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다.심미연을 대신해 안타까워하던 주치의도 그녀가 강지한 얘기는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모른 척 그녀의 질문에 답을 했다.“약을 한동안 써야 알아요 그건, 어느 정도로 좋아질지는 저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환자의 상태라는 건 언제건 다시 악화될 수 있었기에 의사들은 함부로 장담하지 못했다.그 대답에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이던 심미연이 말했다.“그럼 저는 먼저 할머니 보러 가볼게요.”“네.”심미연이 나가자 의사는 한숨을 쉬며 언젠가는 심미연이 결혼을 숨긴 걸 후회할 날이 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유부남인 게 알려져도 자중하지 못하는 게 남자들인데 총각이라고 알려져 있으면 더 하면 더 하지 절대 덜하진 않을 것 같아서였다.한편 심미연이 무거운 마음으로 병실에 들어서자 김지영은 바로 그녀에게 의자를 내어주며 말했다.“미연 씨, 여기 앉아요.”“고마워요, 요즘 고생이 많으세요.”“아이고, 아니에요, 고생은요!”웃으며 자신을 걱정해주는 심미연에 김지영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전에 간호하던 사람들에 비해 착하고 서글서글한 양경자는 아주 돌보기 쉬운 편이었다.게다가 심미연이 월급도 넉넉하게 주니 김지영은 고생을 해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좀 쉬고 계세요, 제가 할머니 곁에 있을게요.”“그럼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부르세요.”심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지영은 양경자의 옷을 잘 여며주고 밖으로 나갔다.방에 홀로 남은 심미연은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파와 목에 멘 채로 중얼거렸다.“강지한이 신약
“심미연 때문이 아니라 너 좀 쉬라고 그러는 거야. 이렇게 무리하다가 배 속의 애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미간을 찌푸리는 강지한이 기분이 좋아진 온지유가 웃으며 대답했다.“나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출근도 안 하면 나 혼자 심심한데, 그러다 우울증 걸리면 어떡해?”“친구랑 카페도 가고 피부과 다니면서 쇼핑하면 괜찮잖아.”온지유 배 속의 아이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강지한은 그녀를 위해 이것저것 방법을 생각해주고 있었다.“너도 알잖아, 지성 씨 그렇게 되고 나서 어머님이 나한테 준 건 집 한 채, 차 한 대랑 2억뿐이야. 전에는 무용단에서 일했었으니까 돈 걱정은 없었는데 지금은 임신해서 거기도 못 다니니까 일 안 하면 친구랑 놀러 다닐 돈도 없어. 멀쩡한 옷도 당연히 못 사 입고...”눈시울 붉히며 말하는 온지유가 가여워 보였던 강지한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그건 내가 어머니랑 얘기해볼게.”강지성이 그렇게 되고 나서 재산분할에는 관여를 안 했었는데 온지유에게 고작 그만큼만 줬다는 소리에 강지한은 제 어머니도 참 너무한 분이라고 생각했다.그 말에 온지유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어머님이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데 내가 너한테 이런 소리 한 거 알면 당장 나 내쫓으실 거야, 그럼 고용인도 내가 직접 구해야 하고 모든 걸 다 내가 떠안게 되는 거잖아. 나 그럼 더 힘들어져.”강지성이 죽은 뒤 온지유는 강씨 집안에 머무르면서 큰 사모님 대우를 계속 받는 대가로 재산을 그것만 챙긴 것이다.지금 강지한한테 돈이 없다고 불쌍한 척하는 것도 사실은 돈이 아니라 이노 하이브의 지분을 받기 위해서였다.이노 하이브 지분은 1%만 받아도 매년 몇백억씩은 받을 수 있기에 그것만 있으면 평생 돈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그런데 강지한이 이 얘기를 문소영한테 하게 되면 문소영이 제 속내를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강지한조차 저를 믿지 않을 것이니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일단 밥부터 먹어.”온지유는 다시 수저를 들며 말하는 강
“지한 씨, 미연이 화난 거 아니야? 나 무시하는데?”“지한 씨가 가서 좀 달래줘 봐.”말은 저렇게 불쌍한 척해도 온지유는 이미 심미연의 조상들까지 다 한 번씩 욕한 상태였다.오랄 때는 안 오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자마자 등장한 그녀에 혹시 문밖에서 엿듣다가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강지한 역시 심미연이 자신이 달래주길 바라서 온 줄로 알고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수저를 내려놓고 목소리를 낮게 깐 채 그녀를 불렀다.“심미연, 이리와.”심미연은 보고 싶지 않은 두 얼굴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주먹만 꽉 쥔 채 제 갈 길을 갔다.“지한 씨, 내가 가서 사과라도 할게.”둘이 아직은 이혼하지 않았지만 안 좋은 일들을 자꾸 만들어내면 강지한도 심미연의 인성에 대해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온지유는 이번에도 심미연에게 누명을 덮어씌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지 마.”강지한은 사실 아직도 온지유를 어린 시절 그 착한 여자애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 경성에서 유명한 이혼변호사인 심미연은 똑 부러지다 못해 매정하기까지 한 여자였으니 온지유가 그녀와 붙으면 당연히 피해를 볼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온지유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불러세웠다.“내가 가서 사과 안 하면 미연이도 안 올 거야. 시간도 늦었는데 배고플 것 같아서 그래. 나 괜찮으니까 내가 가서 사과하고 데려올게.”심미연은 그런 온지유의 말을 들으며 헛웃음을 흘렸다.온지유가 사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심미연은 그녀가 움직이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영상녹화를 시작했다.누가 봐도 모함을 하기 위해 다가가는 것인데 강지한은 그것도 모르고 미간을 찌푸린 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심미연을 빤히 쳐다보았다.그 시각 어떻게 일을 꾸며낼지 생각해낸 온지유는 서서히 심미연에게로 다가갔다.몇 걸음 걸은 뒤 심미연이 밀친 것처럼 넘어질 생각이었는데 그 순간 신하린이 불쑥 나타나며 심미연의 팔을 잡고 말했다.“왜 이제야 와,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음식 다 식겠어, 얼른 가자.”일부러 간
심미연은 바로 신하린의 팔을 잡으며 강지한을 향해 말했다.“강지한, 당신도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누구 탓을 하기 전에 증거부터 가져와. 여기 CCTV 있으니까 가서 확인하고 하린이가 한 짓 맞으면 그때 다시 찾아와.”원래 같았으면 실컷 욕하고 뛰쳐나갔겠지만 지금은 강지한에게 바라는 게 있으니 심미연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그에 일부러 넘어졌던 온지유는 다급하게 강지한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지한 씨, 진짜 내가 실수로 넘어진 거라니까, 저 사람들 탓 아니야.”“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사실대로 얘기하면 돼.”제 눈앞에서 다른 여자만 싸고도는 강지한을 보던 심미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매일 침대에서 가장 진한 스킨십을 하는 상대는 자신인데 이럴 때는 저를 남처럼 대하는 강지한에 마음이 아파왔고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그런 심미연의 마음을 눈치챈 신하린은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미연아, 됐어. 그만 말해.”그녀가 잡은 심미연의 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는데 그게 또 가슴이 아파 신하린은 한숨을 내쉬며 강지한을 향해 말했다.“강 대표님이 저한테 편견 있으신 건 알겠는데요, 아까는 맹세코 온지유 씨한테 손댄 적 없어요. 못 믿겠으면 CCTV 돌려보세요.”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모함하려 드는 온지유를 참아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면 심미연이 곤란해질 것 같아 신하린이 온 힘을 다해 참고 있는데 강지한은 오히려 제가 아니라 심미연을 보며 묻고 있었다.“심 변호사도 그렇게 생각해?”전에는 심미연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심 변호사라 부르며 선을 긋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가슴이 아파와 말을 잇지 못했다.“왜 대답이 없어? 할 말이 없는 거야?”저번에 신하린의 뺨을 때리고 덮어씌운 일이 들켰을 때 강지한이 아주 정색을 했었는데 정말 CCTV를 확인했다가 이번 일도 가짜라는 게 까발려지면 그때는 강지한이 정말 저를 신경 쓰지도 않을 것 같아 온지유는 그의 옷소매를 잡으며 간곡하게 애원했다.“지한 씨, 이 사람들
“CCTV 굳이 안 봐도 돼, 형님이 한 행동 여기 다 찍혔으니까.”일부러 형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하는 심미연에 온지유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져 갔다.심미연이 몰래 영상까지 찍을 줄은 몰랐는데, 상황이 자신에게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자 온지유는 급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쓰러지는 것과 배가 아프다고 하는 건 다 이미 쓴 수법이라 또 쓰면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게 티 나서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결국 온지유는 아무런 방법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배 째라는 식으로 영상을 확인하기로 했다.어차피 자신은 계속 혼자 넘어졌다고 주장해왔으니 딱히 걸릴 것도 없었다.심미연의 영상만 있다면 온지유도 더 이상 누명을 씌우진 못할 것 같아 신하린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며 말했다.“역시 내 친구야, 잘했어!”눈을 가늘게 뜨고 그 영상을 보던 강지한의 주위에 한기가 맴도는 게 느껴지자 온지유는 점점 불안해졌다.당장이라도 강지한이 저를 외면한다면 저는 기댈 곳도 없어지기에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넌 일단 가서 앉아 있어. 혼자 갈 수 있지?”“지한 씨, 나 혼자 가기 싫은데...”온지유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애써 평온하게 말하는 강지한에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지 온지유는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나 혼자 가기 싫은데...”그때 심미연이 핸드폰을 그녀의 얼굴을 향해 들이밀며 말했다.“형님, 설마 도련님이랑 붙어먹으려고 했다는 거 온 세상에 다 까발려지고 싶은 거예요? 내연녀가 본처의 자리를 노린다는 것도 같이?”“지한 씨, 나 좀 도와줘!”그에 온지유는 일부러 더 놀란 척을 하며 소리 질렀지만 속으로는 온지유가 더 막 나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그녀가 쫓겨날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역시나 강지한은 바로 온지유를 품에 가두고 심미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밥 먹으러 오라고 할 때는 안 오더니, 몰래 와서 나랑 지유가 밥 먹는 영상이나 찍고 있었어? 왜? 이혼할 때 재산이라도 더 가져가려고?”강지한은 3년 전에도 일을 꾸며 결혼
“사과해!” 강지한은 맞은 얼굴을 만지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그는 조금 전 그녀를 엄하게 벌하고 싶었다.하지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심미연을 보자 가혹하게 벌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무의식 속에서 그는 심미연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전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사과해,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 강지한이 언성을 높였다.그가 원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 따위가 아니라 여자가 굴복하는 것이었다.신하린은 황급히 심미연을 떼어내고 강지한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미연이 대신 사과할게요, 죄송해요.”그런다고 강지한이 이대로 그냥 넘어갈지는 모르겠지만...심미연은 감동에 눈시울이 붉어졌다.신하린은 강지한이 일부러 자신을 힘들게 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를 대신해 사과한 거다.강지한이 어떤 사람인데, 작정하고 신하린을 난처하게 만든다면 신하린은 무사히 넘기기 힘들다.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신하린을 끌어당기고 강지한 앞에 서서 날카롭게 말했다.“하린이 난처하게 하지 마. 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강지한,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온지유는 담담하게 웃었다.“신하린 씨랑 미연 씨는 정말 좋은 친구네요. 사과까지 대신하는 걸 보니 지한 씨가 죽으라고 하면 같이 죽을 거예요?”신하린에게 하는 말이다.요즘 재벌가에선 다들 가식 떨기 바쁜데 신하린과 심미연이 진짜 우정을 나눌 리 없었다.강지한의 검은 눈동자가 심미연의 얼굴로 향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사과하는 태도야?” 길게 늘이는 말끝에는 약간의 조롱이 담겨 있었다.온지유의 속내를 알고 있는 신하린은 그녀가 일부러 그런 말로 강지한을 자극해 강지한이 심미연을 힘들게 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강지한 씨가 나보고 미연이 대신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죽을 거예요.”심미연이 구해준 목숨이니 기꺼이 그녀를 위해 죽으리라.심미연은 눈물이 맺힌 채 신하린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바보야.”신하
어쨌든 그녀는 강지한에게 특효약을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그에게 밉보이면 약을 얻지 못할 테고, 그러면 할머니는 계속 시달려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그래, 가자.” 강지한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걸어갔다.온지유는 심미연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서둘러 강지한의 뒤를 따랐다.심미연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강지한은 온지유 말이라면 다 해준다.신하린은 서둘러 심미연을 식탁 쪽으로 끌어당겼고, 자리에 앉은 뒤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미연아, 미리 말하는데 이따가 깜짝선물이 있어.”심미연은 생각을 정리하고 차 두 잔을 따라 신하린에게 한 잔을 건네며 물었다.“깜짝선물이 뭔데?”강지한과 결혼한 지 3년, 그녀의 삶은 파문 하나 없이 고인 물처럼 흘러갔기에 딱히 무슨 서프라이즈를 기대하지 않았다.신하린은 일부러 말을 돌렸다.“맞춰봐!”심미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신하린이 눈을 부릅떴다.“그냥 협조 좀 해 줘. 맞춰봐.”신하린은 심미연이 그저 주어진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 삶에 대한 열정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이렇게 계속 사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생일 선물 준비했어?”이틀 뒤가 그녀의 생일이었는데 신하린이 미리 생일 선물을 줄지도 모르겠다.“아니!” 신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야!” “무슨 사람? 남자 친구라도 소개해 주려고?” 말을 마친 심미연이 먼저 피식 웃었다.그녀는 유부녀였고 결혼 생활 중에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강지한은 젓가락을 들었지만 입맛이 없었다.그는 문득 지난 며칠 동안 심미연이 자신의 앞에서 많이 차분해졌고 예전처럼 줄곧 자신의 곁에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마치 두 사람이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자는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 그저 보통의 관계인 것처럼 말하는 것조차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그런 생
신하린의 눈빛은 마치 두 개의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조금의 온도도 없이 이진영의 깊은 눈동자를 찔렀다. 그 눈빛에는 의외와 분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가 가득했다.“무슨 일이 있어요?”그녀의 말은 나지막하고 힘차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이 사이로 비집고 나온 듯 거부할 수 없는 무거움을 띠고 있었다.이진영은 몸을 살짝 움직였다. 그녀가 이 한마디를 뱉는 순간 그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암울하게 변했고 마음속에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그는 한 걸음 천천히 앞으로 내디디며 꿈에도 그리지만 아득히 먼 이 그림자에 접근하려 했지만 신하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담함과 거부감은 보이지 않는 장벽처럼 그를 격리했다.“괜찮으시다면 먼저 나가서 기다렸다가 나중에 들어오세요!”그녀가 계속 말했다. 말투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확고함과 결단만이 있었다.그녀의 두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핏줄이 하얀 손등에 내비쳐 그녀의 마음속 거친 정서를 드러냈다.이 순간, 그녀는 더는 그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니라 복수의 사신으로 변신하여, 죽은 절친을 위해 따지려는 듯했다.이진영의 마음이 아프게 조여왔다. 그는 신하린의 증오로 가득 찬 두 눈을 바라보며 전례 없는 무력함과 고통을 느꼈다.그는 앞으로 나가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위로해주고 싶고그녀와 얘기도 하고 싶었지만 신하린의 눈빛은 너무 차가웠다.두 사람은 이렇게 대치하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긴장과 억압이 가득 차 있어 마치 시간조차 이 순간에 정체된 것 같았다.“왜 아직도 안 가?”신하린이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더는 이 남자와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는 복수의 불길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이진영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충격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이왕 만났으니 우리 얘기 좀 할까?”신하린은 가슴이 아파지는 걸 느끼며 입을 벌리고 그를 불렀다.“진영 씨.”그녀의
짝! 짝!맑은 따귀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서 터져 마치 여름에 갑자기 닥친 천둥소리처럼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신하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머금은 두 눈엔 억울함과 한이 반짝이였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흐느낌을 참으며 마치 모든 억울함과 고통을 이 간단한 동작을 통해 털어놓으려는 것 같았다.강지한은 눈앞에 별이 보이도록 얻어맞았지만 그 따가운 통증이 뺨에 번지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히려 했다. 머릿속에는 꽃처럼 예쁘게 웃고 있는 심미연의 모습이 떠올랐고 심미연의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함께 보낸 따스한 시간이 조수처럼 밀려와 그를 파묻었다.“만약 심미연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런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낮고 잠긴 목소리에는 끝없는 슬픔과 후회를 품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멍한 눈빛으로.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많은 장애물을 뚫을 수 있는 것처럼 이미 멀어졌지만 영원히 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그 모습을 보았다.그런 그의 모습에도 신하린의 마음속 분노는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용솟음쳤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서 두 손을 주먹으로 꼭 쥐었다. 손끝은 너무 힘을 주어 하얗게 질렸지만 목소리는 떨리면서도 확고했다.“강지한 씨, 무슨 자격으로 미연이를 언급해요? 강지한 씨가 뱉는 모든 글자가 미연이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이에요!”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그 순간 더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 것처럼 극도로 팽팽해졌다.그러나 바로 이 긴장된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강지한이 갑자기 웃었다. 그것은 일종의 씁쓸하고 자조적인 웃음이었다.“그래요.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내가 미연이를 죽였어요.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반드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신하린은 모든 슬픔을 삼킨 것 같은 강지한의 얼굴을 보고 입가에 시큰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풍자와 경멸이 숨어 있었는데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졸렬한 연기를 비웃는 것 같았다.“허, 정말 가소롭네
성무진은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뻗어 신하린을 붙잡았다.“신하린 씨,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신하린은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성무진의 손을 한입 물었다.“놔요!”성무진이 아파서 손을 놓자 신하린은 또 강지한을 덮쳤다.순간 강지한이 갑자기 그녀를 노려보았다.그 눈빛이 너무 매서워서 신하린은 바로 걸음을 멈추었다.“신하린 씨, 지금 하린 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 일은 우리 강 대표님과 무관해요.”성무진은 황급히 입을 열어 강지한을 대신해서 설명했다.신하린은 몸을 곧게 펴고 머리카락이 국에 젖은 강지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강지한 씨가 온지유를 밑도 끝도 없는 포용하지 않았다면 온지유가 어떻게 감히 미연이 앞에서 그렇게 날뛰고 방자할 수 있겠어요? 강지한 씨가 미연이를 믿지 않은 게 아니었다면 미연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억울함을 당할 수 있었을까요!”“강지한 씨, 그거 알아요? 미연이는 강지한 씨를 꼬박 10년 동안 사랑했어요!”심미연은 26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러니 계산해 보면 심미연은 정말 강지한을 10년 동안 사랑했다.결국 그녀는 10년 동안 자신을 다른 세계로 보내버렸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강지한의 차가운 표정이 마침내 흔들렸다.심미연이 그를 10년 동안 사랑했다니, 이것은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성무진도 놀란 표정이었다.강 대표님의 부인이 강 대표님을 10년 동안 사랑했다니.10년이란 시간은 참 긴 세월인데 말이다.“강지한 씨, 나도 알아봤어요. 온지유가 안에서 맛있는 걸 먹으며 잘 지낸다는데 이렇게 하면 미연이게게 미안하지 않아요?”신하린은 화가 난 나머지 눈물이 흘러 내렸다.그 악독한 여자가 미연이와 외할머니를 죽였는데 어떻게 멀쩡하게 살아있단 말인가! 빌어먹을!강지한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그는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기에 온지유의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성무진은 그제야 반응하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어요.”그는 온지유를 잘 모시라고 당부했었다.설마...그들이
임혜자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말했다.“성 비서님께서 아까 사모님 유품을 가져왔더라고요. 그리고 둘째 도련님께서는 지금 응급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습니다.”임혜자는 강지한이 너무 걱정되었고 혹시나 그에게 일이 생기면 아무것도 모르는 강준형이 그들을 탓하지는 않을지도 걱정되었다.“네...”강준형을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순간 본가 쪽도 아수라장이 되어 집사들은 그를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의사와 간호사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강준형은 깨어날 수 있었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김준혁은 그가 깨어난 모습을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어르신,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강준형은 겨우 침상에서 일어나 앉더니 온 힘을 다해 집사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성 비서한테 전화해서 그 팔찌를... 가져오라고 해.”성무진도 마침 병원에 있었기에 빠르게 그의 병실로 오게 되었고 오자마자 주머니에서 그 팔찌를 그에게 넘겨줬는데 조명 아래 비치니 더욱 반짝거리는 모습이 보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했다.강준형은 떨리는 손으로 팔찌를 건네받고 만져보다가 익숙한 촉감에 결국에는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문득 심미연의 해맑은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의 것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강준형은 마음이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팔찌를 움켜쥐고 몸을 잘게 떨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칼로 찌르기라도 한 듯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순간 그는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 끝없는 공허함과 절망에 빠져버렸다.김준혁은 그의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어르신,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너무 흥분하시면 심장에 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잠깐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떠세요?”그러나 강준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가 그토록 아끼던 심미연이 이렇게 떠나버렸다.시신도 남기지 않고 가버린 사실을 강지한이 깨어나 알게 되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3일 후, 강지한이 드디어
강지한은 심미연이 이제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는데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살짝 벌렸지만 너무 떨려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피가 용솟음쳐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 뒤 낮은 신음을 내뱉더니 곧바로 입에서 피를 쏟아내면서 픽 하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그리고 마치 온몸의 모든 공기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힘없이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성무진은 갑자기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손으로 임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머니, 혹시 지금 위층 안방에 가서 강 대표님이 괜찮은지 확인 할 수 있으실까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너무 걱정돼서요.”전화 받은 임혜자도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러나 다년간의 경험으로 그녀는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킨 뒤 성무진을 위로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강지한은 창백한 얼굴로 피를 토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방안에는 이미 피비린내가 가득 퍼져있었다.임혜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119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가능한 빨리 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그러나 기다리는 1분 1초가 너무 괴로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집 앞에 도착했고 의료진들은 신속하고 질서 있게 방에 들어가 강지한을 조심스럽게 들것에 옮겨 데리고 나갔다.임혜자는 구급차가 떠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강지한이 이 고비를 빨리 넘길 수 있도록 기도했다.그렇게 강지한은 빠르게 응급실로 옮겨졌다.응급처치가 끝난 뒤 그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는데 여전히 깨나지 못한 채 긴 꿈을 꾸게 되었다.꿈속은 마치 길고 인상 깊었던 영화와 같았는데 프레임마다 그가 심미연과 함께한 3
“미연 씨랑 완전히 깨진 거야? 그럼 찾으면 이제 내 차례네?”박시훈은 어차피 이제 강지한이 심미연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박시훈, 지금 너랑 농담할 기분이 아니니까 빨리 사람 풀어서 찾아봐.”강지한의 마음속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만약 박시훈도 못 찾는 거라면 심미연은 완전히 실종되었다고 봐야 한다.“강지한,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줘. 미연 씨를 아직 사랑하지?”박시훈은 만약 그가 여전히 심미연을 좋아하는 거라면 여기서 깔끔하게 포기하겠다고 다짐했다.친구의 여자를 뺏는 건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그러나 강지한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큰 소리로 답했다.“전혀!”그는 여전히 자존심을 부렸다.강지한의 말에 박시훈은 또다시 히죽거리며 말했다.“그럼 미연 씨를 찾아도 나만 볼 수 있게 어디 숨겨둬야겠다.”강지한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박시훈, 싫다는 사람을 왜 억지로 데려가려고 해. 그리고 어디까지나 내 전 아내였던 사람인데 들이대고 싶어?”“난 미연 씨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거야. 그게 네 전 아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데?”박시훈도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됐어. 난 그만 사람 찾으러 가야겠다.”박시훈과의 통화 뒤에 강지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모태 솔로인 박시훈이 심미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그는 모든 잡생각을 다 집어치운 뒤 강준형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바로 수화기 너머에서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연이한테 사과했어? 용서는 받았어?”“혹시 오늘 미연이 만나셨어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어요?”강지한은 다짜고짜 그녀가 사라졌다고 할 수 없었기에 에둘러 물었다.“미연이가 사라졌어?”강준형의 물음에 강지한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그에게 거짓말했다.“혹시 할아버지한테 찾아가서 무슨 이야기 나눴나 궁금해서요.”보아하니 강준형을 만나러 가지도 않은 것 같았다.“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 그런데 너한테는 비밀이야.”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강지한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설마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건가 싶어 머뭇거리다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미연아, 나 왔어.”들어가 보니 침대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는데 순간 강지한은 깜짝 놀라 온몸이 굳어졌다.침대 머리맡의 결혼사진은 틀이 깨진 채 신부 머리는 잘려 나가고 웨딩드레스만 남겨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온통 유리 파편이 널려져 있었다.강지한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그러다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문을 박차고 아래층에 대고 소리 질렀다.“아주머니, 빨리 올라와 보세요!”임혜자는 무슨 일인지 몰라 부리나케 위층으로 달려갔다.“도련님, 무슨 일이에요?”강지한은 마음속의 화를 애써 억누른 뒤 침실을 가리키며 물었다.“오늘 누가 침실에 들어왔어요?”임혜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그에게 답했다.“오늘 사모님만 침실에 들어갔고 누구도 오지 않았는데요? 왜요? 뭐 귀중한 물건이라도 없어졌을까요?”강지한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미연이는 지금 어디 있어요?”“도련님께서 아까 나가시고 얼마 안 돼서 사모님도 나갔어요. 어디 가시냐고 물어보니까 급한 일이 있다고만 하시고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도련님께 따로 연락하지 않으셨을까요?”임혜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심미연은 어디 가면 꼭 강지한에게 먼저 알려줬던 것 같은데 왜 오늘은 나가면서 아무런 말도 없었는지 의문스러웠다.강지한은 마음속의 불안이 점점 커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내려가서 혹시나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는지 한번 물어봐요.”그는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애써 덤덤한 척했다.임혜자는 그렇게 방문을 나오자마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강지한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임혜자는 내려가서 모든 사람에게 한 바퀴 물어봤지만 누구도 심미연의 행방을 알지 못했고 그녀는 이제야
온지유는 박시훈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기절했고 경찰은 그녀를 연행해 갔다.박시훈은 차에 앉아 멀리서 사진을 찍어 강지한에게 보여준 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아, 일은 이미 해결됐어.”“그래.”“내가 이렇게 고생한 걸 봐서라도 미연 씨한테 제대로 고백할 수 있게 허락해 줘.”박시훈은 이미 비서 쪽에서 오늘 심미연이 모든 증거를 가지고 혼자 경찰서에 갔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저런 패기 있는 여자와 함께하면 분명 하루하루가 즐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꺼져!”강지한은 어두운 얼굴로 그에게 소리를 쳤다.‘감히 누구 여자를 탐내?’“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잖아. 그럼 남남이고 내가 도전해 보겠다는 데 뭐 어때서? 설마 미연 씨랑 다시 합칠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신경 쓰지 마!”강지한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리가 복잡해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밖의 오가는 차들과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지금껏 심미연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안겨줬기에 아무리 빌어도 이제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문득 심미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이미 흘렀고 후회해도 늦었다.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강형준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한, 당장 온지유를 데려오지 않으면 지금 네 눈앞에서 혀 깨물고 죽어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심미연은 인터넷에 녹음 하나를 공개했는데 내용에는 그날 밤 온지유와 양경자가 죽기 전의 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이 소식은 이미 널리 널리 퍼져 전 경성의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그리고 드디어 강준형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는데 그는 이 악독한 여자를 한시라도 빨리 감옥에 가두고 싶었다.사람을 죽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이미 경찰서에 잡혀갔어요.”강지한은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박시훈은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미 온지유가 저질렀던 모든 추잡한 일을 다 조사해 냈다.그리고 강지한은
온지유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강지한은 비록 몇 년 동안 그녀 앞에서는 항상 온화하고 다정한 모습만 보여줬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거의 피도 눈물도 없다고 봐야 한다.그런데 강지한은 그날 밤 모든 사실을 다 알게 되었는데도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걸 보면 분명 뭔가가 이상했다.또한 육현성은 분명 그녀에게 내일 저녁에 출발한다고 말했었는데 갑자기 오후에 전화 와서는 오늘 저녁으로 앞당겨졌다고 알렸다.‘함정인가?’온지유는 순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만약 이 모든 게 강지한의 계획이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절대 그럴 수는 없다.그리고 그날 강지한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을 살게 할 거란 말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설마 진짜 도망칠 수 없단 말인가?’‘아니!’바로 이때, 한 줄기 눈 부신 불빛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비쳤다.순간 깜짝 놀란 심미연은 습관적으로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다.하지만 그녀의 뒤에는 이미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한 줄로 서서 그녀를 막고 있었다.“온지유 씨, 경찰입니다.”경찰이 신분증을 보여주는 순간 온지유는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고 더 이상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전화 한 통화만 할게요.”그래도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강지한에게 이 판을 짠 사람이 진짜 그가 맞는지 직접 묻고 싶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지한 씨가 직접 전해달라고 했거든요...”바로 이때, 박시훈이 차에서 내리더니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박시훈 씨? 당신이 어떻게...”온지유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외부 소문에 의하면 현재 전 경성의 정보망은 다 박시훈의 손아귀에 있다고 할 정도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다.하여 이번 일도 아마 그가 나섰기에 이렇게 쉽게 들켜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래요. 접니다.”불빛이 그의 앳된 얼굴에 비치니 귀여운 외모 때문인지 날카로운 목소리와 많이 상반되는 느낌이었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