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온지유를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온지유 너라면 벌써 겁먹고 숨어 있었을 거야. 이렇게 나올 용기도 없었어. 그러다 썩은 달걀에 너덜너덜한 채소라도 맞으면 어쩌려고?”‘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정말 지극정성이네. 경찰까지 물러서게 하고.’하지만 그게 오히려 그녀에게 도움이 된 셈이었다.온지유는 그 말을 듣고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지며 심미연을 노려보았다. “이 일 네가 꾸민 거지? 두고 봐. 너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야!” 심미연은 가볍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해봐. 나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가 이렇게 비참한 꼴로 사는데 심미연은 왜 그렇게 잘사는 거야?’‘대체 뭐가 잘나서!’‘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바로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온지유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받으며 한껏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한 씨.”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겨우 얼마 떨어져 있었다고 벌써 전화해?’‘잃어버릴까 봐 걱정되는 거야?’‘강지한이 언제부터 그렇게 세심한 사람이었지?’ 온지유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넣으며 심미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걸 보았다. “지한 씨가 기다리고 있거든. 난 먼저 갈게.” 명백히 심미연을 자극하려는 태도였다. 하지만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 배웅은 사양할게.”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일부러 발걸음을 더디게 옮겼다. 화장실 문턱을 막 넘어설 때 그녀의 시선이 무심한 듯 심미연의 살짝 불룩한 배를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에는 뚜렷한 조롱이 담겨 있었지만 그 속엔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도 어렴풋이 드러났다. 잠시 후 온지유는 단호한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엔 심미연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슴 속에 치솟은 불안감을 억누르며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운명은 늘 그렇듯 사람을 농락하기 일쑤였다. 문 앞에 다가갔을 때 예상치 못한 누군가
심미연은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왜 가야 하지? 내가 왜 너한테 그걸 증명해야 해? 온지유, 너 진짜 웃기네.” 예전엔 강지한과 부부였으니까 임신 사실이 들통나면 강지한이 그녀를 낙태시키려 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이혼한 사이고 더 이상 강지한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온지유 같은 사람과 얽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너 검사 받으러 못 가는 거지? 이렇게 빨리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소문나면 별로 좋게 들리지도 않잖아.”온지유는 일부러 ‘다른 남자 아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강지한을 자극하려 했다. 그녀는 강지한이 화가 나면 심미연을 끌고 병원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 부채질하면 강지한이 심미연 뱃속에 있는 망할 아이를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심미연 뱃속에 그 아이만 없어지면 더 이상 그녀에게 위협이 될 게 없었다. 심미연은 온지유를 냉정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다 말했어? 다 말했으면 이제 녹음 끌게.” 온지유가 이런 식으로 뒤끝을 보이면 심미연은 바로 고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이제 그녀는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었다. 온지유는 이를 악물며 손에 쥔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의 심미연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이 년이 또 녹음했네.’‘그럼 아까 내가 한 말도 다 녹음한 거 아니야?’이어 강지한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한 씨, 저걸 봐! 얘기하는데 녹음까지 했어. 진짜 너무 교활하지 않아?” “다 말했어?” 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온지유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강지한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눈물 글썽인 채 간절하게 말했다. “지한 씨, 내가 말한 거 다 진짜야! 심미연 씨 정말 임신했어. 왜 날 믿지 않는 거야?” 그 모습은 마치 세상 모든 불행이 그녀에게 집중된 것처럼 온몸으로 억울함을 표현하려는
그가 묻는 방식은 거침없었고 심미연은 그 질문에 별다른 불쾌감은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직은 너무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사모님이었다. 그 생각에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그때 갑자기 손목이 잡혔고 뒤를 돌아보니 차가운 살기가 가득한 강지한의 눈과 마주쳤다. 심미연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불안함이 엄습했다. ‘강지한은 도대체 왜 찾아온 거야!’ 강지한이 갑자기 그녀를 잡아당기자 심미연은 비틀거리며 몇 발짝 뒤로 밀려갔다. 그 순간 남자는 그녀를 아무도 없는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방원호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이 쾅 하고 닫히며 모든 소리와 외부의 시선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방원호는 손을 뻗어 문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강지한 씨! 그 사람 내보내세요.” 심미연은 문 바로 뒤에서 몸을 문에 붙인 채 두 손은 강지한에게 위로 들어 올려져 문에 눌려 있었다. 남자의 힘은 너무 강해 마치 옷을 뚫고 그녀의 떨리는 심장까지 닿을 것처럼 느껴졌다. 방원호의 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강지한 씨, 뭐 하자는 거야? 빨리 놔줘.” 그녀는 방원호에게 자신과 강지한의 관계가 밝혀지는 걸 원치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고 이제는 다시 과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강지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심미연, 대답해. 임신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떨렸으며 하나하나의 단어가 마치 이를 악물고 내뱉는 듯했다. 그 속에 묻어 있는 절박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이 일을 확실히 알고 싶었다. 심미연의 동공이 잠시 커졌고 그녀는 몰래 깊은숨을 들이쉬며 이 압박감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아니. 강지한, 너 온지유한테 속은 거야!” 그녀가 인정하지 않으면 강지한은 그녀를 더 이상 어쩔 수
[차 돌려! 내가 직접 가서 찾을 거야!] 강지한의 목소리는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하게 들렸다. 각 단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한 결단이 묻어났다. 심미연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곧장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경멸과 비웃음이 어우러져 있었다. ‘온지유가 일이 생기니까 직접 가서 찾겠다고?’ ‘내가 일이 생기면 온지유와 함께 있어 줬을 텐데.’ ‘사람이 다르니까 이렇게 되는 거구나.’ 강지한이 전화를 끊고 심미연의 조롱 섞인 웃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내가 또 이 여자에게 뭘 잘못했을까?’ 심미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만 풀어줘. 네 여자나 찾으러 가. 무슨 일이 생기면 또 내 탓으로 돌리려고 할 거잖아.” 예전에 그녀는 그런 걸 아주 잘 떠안았다. 온지유는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 일쑤였다. 강지한은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이미 말했잖아. 온지유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심미연은 한층 더 비웃으며 말했다. “맞아. 너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지! 이제 우리는 이혼했으니까 더 이상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강지한 씨, 이제 그만하고 나 좀 보내줘.” 그녀가 여기 있으면 방원호가 분명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급박하고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며 방원호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들려왔다. “미연아, 괜찮아? 미연아, 내가 곧 문을 부술 거야. 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강지한은 그 말을 들으며 가슴 속에 쌓인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강지한은 깊은숨을 들이쉰 뒤 터져 나올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심미연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턱을 거세게 움켜잡아 강제로 자신의 시선과 맞대게 했다. 그의 눈에는 반항할 수 없는 강한 빛이 어려 있었다. “강 부인께서 날 떠나고 아주 잘 지내나 봐. 주변 남자들 하나둘씩 바꿔 가면
다행히 미련을 버렸기에 이제는 이런 말을 들어도 더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방원호는 그녀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빨리 가요. 돌아가서 밥부터 먹어요.” 심미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원호를 바라봤다. 방원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다시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막 도착했을 때 사모님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네 표정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우리한테 숨기려는 거 아니야?” 사모님의 농담 섞인 한마디에 심미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고 그 움직임은 미세했지만 결연했다.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말이다. ‘지금은 절대 말하면 안 돼.’“아니에요, 사모님. 오해하셨어요.” 심미연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 휘몰아칠지도 모른다는 걸.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신중함은 곧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모님은 그런 그녀를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앉으라고 옆에 있는 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일단 앉아서 밥부터 먹자.”테이블 분위기는 방금의 상황 탓에 어딘가 미묘하게 변했지만 심미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써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다.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한입씩 넘겼지만 입안에선 음식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힘겹게 삼켜낼 뿐이었다. 식사 도중에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창밖으로 흘러갔다. 머릿속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온갖 위험한 상황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침묵만이 맴도는 어색한 식사가 계속되었다. 식사가 끝난 뒤 사모님은 옆에 두었던 정교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표면은 복잡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오랜 세월이 빚어낸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이건 네 스승님이 생전에
대답이 없자 온지유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심미연을 희생해야 한다. “왜 대답하지 않아요? 혹시 심미연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제 핸드폰에 사진이 있어요. 핸드폰을 저에게 주시면 그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온지유의 말투에는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이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녀가 도망칠 수 없다면 심미연을 끌어들여 함께 끌고 가야 한다. 도망칠 수 있다면 심미연을 여기서 죽게 해야 한다. 한 몸에 두 목숨이라니. 그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이 심미연을 데려오기만 하면 그녀는 심미연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심미연이 죽으면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좋아! 한 번 믿어볼게! 가서 손 풀어줘.” 드디어 누군가 입을 열었고 온지유는 기쁨에 벅차 벌떡 일어나고 싶을 정도였다. 너무 좋았다.곧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풀어주었고 손목을 가볍게 풀자마자 바로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어 던졌다. 눈에 들어온 것은 일제히 같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런 생사를 거는 자들이 아닌 것처럼 매우 전문적으로 보였다. 온지유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고 잠금을 풀었다. 그 사람이 뒤를 돌려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틈을 타 급히 강지한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곧바로 삭제하고 그제야 갤러리를 열기 시작했다. 갤러리에는 심미연의 사진이 적지 않았고 대부분 몰래 찍은 것이었다. 심미연과 박유진이 함께 있는 사진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사진도 있었다. 이 사진들은 그녀가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찍게 한 것들이었고 아직 강지한에게 보여줄 적절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탈출 해야만 말할 수 있었다. “이거 보세요.” 온지유는 핸드폰을 건넸다. 남자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정말 전문적이네.’ ‘그럼 사람을 처리할 때도 이렇게 전문적으로 할까?’ 온지유는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손이 묶였고 누군가가 그녀의 눈을 천으로 가렸다. 순간 그녀의 세상은 암흑으로 변했다. 가슴 속에서 이유 모를 불안이 일었다. ‘이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이때 귀에 남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한 남자가 주의를 주듯 말했다. “먼저 간다. 너희들은 저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잘 지켜.” 온지유는 속으로 생각했다. ‘심미연이 오기 전까지 내가 도망을 갈 리 없지.’‘난 반드시 심미연이 죽는 걸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그래야 마음이 놓이지.’온지유의 전화를 받은 후 심미연은 서재로 향했다. 금고를 열고 그 안에 강준형이 전해준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조심스레 금고 속에 넣었다. 두 상자가 나란히 놓였을 때 왠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며 손끝으로 상자 위를 매만졌다.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며 화면에 낯선 번호가 뜨자 심미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또 온지유일까?’‘아니야!’ ‘온지유는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계속 전화를 걸어오는 거지?’ ‘혹시 방금 그 전화로 내 위치를 추적하려던 걸까?’ 심미연은 그 생각이 들자 등골에 오싹한 기운이 스쳤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집에 있는 게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 벨 소리가 멈추고 곧바로 다시 울렸다. 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냉정하고 감정 없이 흘러나왔다.[무슨 일이야?] 지금 심미연의 머리속엔 온통 온지유가 자신을 해치려는 생각뿐이었다. 강지한과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자기를 지켜야 했다. [기사 보낼게. 본가에 가서 지내.]강지한의 태도는 단호했다. [별일 없으면 끊을게.] 심미연은 그 말만 남기
“먼저 혼자 겁먹지 마! 내가 금방 갈게.” 방원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비록 무섭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정말 무서웠다. ‘문밖에 있는 사람이 스승님이 아니라면 그건 분명 변장한 누군가일 테고 그들의 목적은 대체 뭘까?’ “전화 끊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 방원호는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선배, 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와요.” “알았어.”심미연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엔진 소리 덕분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방원호는 심미연이 위험에 처할까 봐 차를 미친 듯이 몰고 있었다. 심미연은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던 중 문밖에 있던 남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예전에 본 괴담 영화들이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그 장면들이 유독 생생하게 떠올랐다. 심미연은 자신이 기억력이 좋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났다. 방원호는 오고 나서 건물의 모든 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심미연이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심미연의 상태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할 것 같았다. 차라리 조용히 그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볼래?” 방원호가 조심스레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친구 집에 갈게요. 데려다주세요.” 방원호가 아무리 잘해주더라도 두 사람은 선후배 사이였으니 모든 일에 기댈 수는 없었다. “알았어. 그럼 준비하는 동안 기다릴게.” “잠깐만 기다려줘요. 금방 끝낼게요.” 심미연은 방원호에게 자리를 권한 후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원호는 소파에 앉아 거실을 한번 둘러본 후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문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심미연은 곧 짐을 챙겨 내려왔고 방원호가 핸드폰을 보고 있자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선배, 준
“아침밥 가져왔는데...”방원호는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가 두 사람의 야릇한 장면을 목격하고는 뒤의 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순간 지금 자연스레 계속 들어와야 할지 아니면 나가야 할지 몰랐다.심미연은 재빨리 강지한을 밀쳐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췄다.그 모습에 화가 난 심미연은 단번에 그를 물어버렸고 입가에는 빠르게 피비린내가 풍겨왔다.강지한은 그녀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그 정도로 내 입맞춤이 싫은 건가?“지한 씨, 빨리 가.”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더 이상 보기 싫어졌다.하지만 순순히 갈 사람이 아니었다.“왜? 내가 여기에 있는 게 방해돼?”능글스럽게 답하는 그를 애써 무시하고 그녀는 방원호한테 다가갔다.“여긴 어떻게 왔어요?”“네가 아침 먹을 시간도 없을까 봐 걱정돼서 가져왔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야채죽인데 와서 좀 먹어.”방원호는 가져온 아침을 테이블에 올려다 놓으며 소파에 앉았다.사실 그도 강지한이 별로 달갑지 않지만 굳이 심미연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심미연도 소파 쪽으로 다가가 그를 도와 포장지를 뜯었다.“와, 냄새가 너무 좋은데요.”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한껏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빨리 먹어.”방원호는 그녀의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심미연은 숟가락으로 죽을 먹기 시작했는데 강지한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그리고 한숨을 길게 들이쉰 뒤 화를 애써 참고 두 사람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심미연 옆에 털썩하고 앉더니 그녀의 숟가락으로 죽을 한 입 먹었다.심미연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빠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강지한 씨, 미쳤어?”같은 숟가락으로 먹었으니 이것도 간접 키스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그러다가 강지한은 곧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무슨 죽이 이리도 맛이 없어.”심미연은 대체 어떤 입맛을 가졌기에 이 따위 죽도 맛있다고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순간 방원호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강지한에게 차갑게 말했다.
“아니. 미연이는?”“사모님은 지금 병실에 계십니다.”“오늘 모든 스케줄은 다 취소해 줘. 난 병원에 가봐야겠다.”성무진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결국에는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강지한은 지금 모든 일의 1순위가 다 심미연일 만큼 순애보가 되었다.성무진이 떠난 뒤 강지한은 빠르게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부랴부랴 사무실에서 나왔다.그리고 차를 병원 주차장에 세워두고 차 안에서 담배 두 대를 태운 뒤에야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VIP 병실 앞에 도착해서도 그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침대에는 박유진이 눈을 꼭 감고 온몸에는 수많은 줄을 달고 누워있었는데 옆에 기기에서는 끊임없이 소리가 나고 있었다.그리고 심미연은 그의 옆에서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엎드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강지한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졌다.만약 그때 박유진이 올 줄 알았다면 진작에 그가 막아설 거란 사실을 눈치채야 했는데.그러면 온지유가 미친 사람처럼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을 것이다.강지한은 성큼성큼 심미연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그녀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었다.누군가의 손길에 심미연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는데 눈앞의 사람이 강지한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차갑게 물었다.“여긴 왜 왔어?” 금방 깨어난 탓인지 목소리는 나른했다.“널 데려가려고.”강지한은 당당하게 여기에 온 목적을 말했다.심미연이 다른 남자를 돌봐주는 게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심미연은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여기에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집사람들을 부르면 되잖아. 아니면 간병인이라도 불러줄게.”강지한은 심미연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나랑 집에 가자.”강지한은 요즘 집에 혼자 있는 게 너무 괴로웠고 그녀가 없으면 그곳은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강지한 씨, 난 그저 당신 곁으로 돌아간다고만 했지 다시 예전처럼 부부로 지내겠다는 뜻은 아니었어.”
“먼저 어머니 핸드폰을 저한테 주세요.”온지유는 혹시나 문소영이 지금도 녹음할 것 같아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온지유, 선 넘지 마!”문소영은 화가 난 나머지 이를 악물고 말했다.“제가 너무하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온지유는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뒤에서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빨리 주세요.”문소영은 그녀의 성화에 핸드폰을 꺼내 옆에 내려놨다.“됐지?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온지유는 말없이 그녀의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보았고 인내심이 바닥난 문소영은 또다시 그녀를 재촉했다.“빨리!”이때, 온지유가 그녀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는데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문소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안돼!”“어머니는 무조건 방법이 있을 거라 믿어요.”온지유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빨리 가서 준비부터 하세요. 그리고 늦어도 내일은 제가 여기서 나가야겠어요.”강지한이 절대 이대로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하여 가능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안전할 것 같았다.“만약 지한이가 날 막는다면 나도 더 이상 너를 도와줄 방법이 없어.”문소영은 여전히 강지한을 두려워했다.만약 그가 대놓고 자신과 맞서 싸운다고 하면 결과는 아주 참담할 게 뻔했다.그렇다고 해서 고작 온지유 때문에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요. 아무튼 저한테는 결과만 알려주시면 돼요.”온지유의 눈빛은 소름 돋을 정도로 살벌했다.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경성을 벗어나야 했다.“온지유, 선 넘지 말라고 했지!”문소영은 사실 온지유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어디가 아파서 입원했는지 몰랐다.어쨌든 어제저녁의 일은 이미 강지한 쪽에서 비밀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입단속을 시켰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지금 당장 가서 준비해야 할 거예요. 시간이 없어요!”온지유는 또다시 문
“지한 씨, 거기 서!”온지유는 강지한의 등 뒤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너무 격분한 나머지 가슴의 상처가 벌어지면서 또다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그리고 순간 하늘이 핑하고 돌더니 그대로 쓰러졌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 오전이었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나른했다.“누구 없어요? 저 목말라요.”목소리도 이미 다 잠겨 있었는데 아마 어제 너무 크게 소리 지른 탓인 것 같았다.이때, 간호사가 링거가 가득 걸린 밀차를 밀고 들어왔다.“물 주세요!”온지유는 간호사에게 대뜸 소리쳤다.하지만 그녀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수액을 갈아주고 체온을 재줬다.그 모습에 온지유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녀의 뺨을 때리려고 팔을 높게 들었다.“목이 마르다는 말이 안 들려요? 물 좀 달라고요!”간호사가 그녀의 모습을 힐끔 보고는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았다.그리고 수액 바늘을 거칠게 뽑더니 다시 새로운 것으로 갈아줬다.“자꾸 움직이시면 바늘이 다른 곳을 찔러 다시 꽂아야 하는 수가 있어요.”사실 온지유도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하여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들고 그녀의 손에 십여 개의 바늘구멍을 찔러 손등에 멍이 드는 것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간호사는 그녀에게 새로운 수액을 달아준 뒤 거들떠보지도 않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온지유는 저 따위 간호사한테도 무시당하는 자신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그리고 나중에 다 나으면 꼭 본때를 보여주리라 다짐했다.오후에 문소영이 병문안 왔다.온지유는 그녀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물었다.“어머니, 혹시 저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시면 안 돼요?”순간 문소영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그녀에게 다가와 뺨을 내리쳤다.“나쁜 계집애, 감히 그런 더러운 수법으로 날 속여?”모든 사실을 안 문소영은 지금 당장에라도 온지유를 죽여버리고 싶었다.온지유는 뱃속의 아이가 강지성이 예전에 정자를 냉동 보관했다가 그 정자로 시험관 임신이 성공했다고 말했는데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
강지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온지유를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비 오던 날 네가 나랑 우리 어머니를 살려줬던 일로 이미 몇 년 동안 보상할 건 다 보상해 줬다고 생각해. ”강지한의 말투는 아주 담담했다.그리고 심미연은 처음으로 강지한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또한 강지한은 온몸이 굳은 채 아까부터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대체 비 오던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그러다가 문득 강준형이 그녀에게 줬던 그 상자가 떠올랐다.‘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지?’갑자기 한번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날 결혼식 날 밤에 왜 미연 씨를 버리고 나한테 왔어?”온지유는 여기서 포기하기 싫었다.여태껏 힘들게 버텨왔는데 이제 와서 순순히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이때 심미연이 강지한을 빤히 바라보았다.결혼식 날 밤에 강지한이 밤새 돌아오지 않아서 지금껏 그가 회사에서 야근한 줄 알았는데 3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그날 밤에 온지유랑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생각하던 와중에 강지한은 심미연을 내쫓으며 다급히 말했다.“너도 빨리 병원에 가봐. 혹시나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자세히 검사해 보고.”심미연은 차가운 그의 눈빛과 마주쳤지만 그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전혀 알아보기 힘들었다.“빨리 가!”강지한은 또다시 그녀를 재촉했고 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강지한과 온지유는 지금 할 말이 많을 텐데 제삼자인 그녀가 있으면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콕콕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밖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 강지한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온지유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우리 형이 변태란 사실은 나도 진작에 알고 있었거든? 그날 밤에 우리 형이 널 때렸다고 전화했을 때도 난 네 말을 믿었어. 하지만 너를 찾아갔던 건 단지 그때 나를 구해줬던 일이 생각나서였지 아니면 절대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거야.”어렸을 때
어차피 앞날은 길게 펼쳐져 있으니 그에게는 아직 많은 기회가 있다. 그는 속으로 서두를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그러고 나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안 돌아온다면 구연궁에서 살면 돼. 네 결정 존중할게.” 심미연은 잠시 멍해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앞에 있는 강지한은 가짜일까?’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온지유는 마음속 절망이 파도처럼 몰려와 그녀를 삼키듯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단지 외부인일 거로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미 깊숙이 빠져들어 버렸고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그녀는 허탈하게 두 사람의 꼭 쥔 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때 자신이 나아가게 했던 믿음은 이 순간 폭발하듯 무너졌고 남은 건 끝없는 공허함과 씁쓸함뿐이었다. 마치 공간 전체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얼어붙은 듯 시간마저도 이 순간 유난히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공기 중에는 긴장감과 복잡한 감정이 엉켜 있어 숨이 막힐 듯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답답함이 감돌았다.강지한과 심미연의 대치 그리고 온지유의 침묵 속 절망이 하나의 강렬하고 가슴을 울리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 장면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저도 모르게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온지유의 손끝은 분노와 결단으로 떨고 있었다. 그녀는 급하게 몸을 숙였고 바닥에 놓인 어두운 빛 속에서 차가운 광채를 내뿜는 단검을 보았다. 그 칼날은 마치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마음처럼 차갑고 결연하게 빛났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두 눈은 불처럼 붉게 타올랐다. 모든 증오를 이 순간에 담아내려는 듯 그녀는 힘껏 손을 잡아당겼고 단검이 손에 꽉 쥐어졌다. 칼날은 심미연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고 공기 속에는 진한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 그 긴장감은 마치 하나의 바늘이 떨어져도 폭발할 듯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순간 강지한의 손이 철갑처럼 온지유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 힘이 너무 강해 온지유의 손이 떨리며 그로 인해
심미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무진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유진 도련님이 지금 위험합니다.” 이대로 계속 미루면 정말로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심미연은 가슴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박유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강지한에게 돌아가 예전처럼 살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럼 밖에 던져버려.” 강지한은 얼굴을 차갑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시선을 옆으로 흘려보내며 심미연의 창백한 얼굴을 엿본 그는 잠시 마음 한편에서 안쓰러운 생각이 스쳤지만 그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 그가 바로 그라는 사람의 방식이었다. “좋아. 약속할게.” 심미연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녀는 강지한이 오늘 반드시 그녀를 압박해 동의하게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박유진을 절대로 구하지 않을 것이다. 눈앞에서 박유진이 죽어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온지유는 온 힘을 다해 거의 울부짖듯 외쳤다. 심미연은 그녀를 쳐다보며 모진 말을 덧붙였다. “내가 말했지? 강지한 씨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넌 계속 이 사람이 널 사랑한다고 우겼잖아. 진짜 사랑했다면 벌써 너랑 결혼했을 거야.”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는 일을 온지유는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모른 척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강지한은 반쯤 좁혀진 눈으로 심미연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 여자가 화풀이 상대를 찾는 데는 정말 능숙하네.’“강지한 씨, 내가 다 약속했잖아. 빨리 성 비서님께 사람 데리고 가게 해.” 심미연은 강지한에게 급하게 말했다. 자신을 희생하고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지 못하면 안 되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강지한의 깊고 어두운 눈빛은 마치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처럼 빛났다. 그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에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서 있었다. 주변 공기는 마치 얼어붙은 듯 숨소리조차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온지유는 강지한의 말에 담긴 뜻을 비로소 깨달았고 참을 수 없는 공포와 초조함에 휩싸였다. 그녀는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꽉 움켜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절박하게 애원하듯 말했다. “지한 씨, 당신은 나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언제 할까? 그냥 지금 하자. 어때? 제발 부탁이야. 난 더 이상 누구도 나 때문에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끝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력감이 느껴져 안타깝기도 했다. 강지한의 시선은 심미연과 온지유 사이를 오가다 결국 온지유의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에 멈췄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내가 결혼하자고 한 적이 있었나. 형수님?”그 말투에는 비꼬는 듯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마치 그 일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온지유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강지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 속에 결단의 빛을 비췄다. 심미연도 잠시 멈칫했다. ‘강지한은 온지유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분명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일 거야.’세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시간은 마치 고요하게 멈춘 듯했다.오랜 시간이 지나 온지유는 간신히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근데 그동안 당신은 나한테 너무 잘해줬잖아. 내가 임신했을 때도 당신은 내가 부르면 언제나 달려왔고...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왜 그렇게 잘해준 거야?” 그녀는 늘 강지한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어왔다. 결국 그가 보였던 모든 행동들이 그녀에겐 사랑의 표현처럼 느껴졌으니까. 다만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심미연, 왜 멍하니 있어? 빨리 병원에 따라가야지.” 온지유는 강지한이 아직 심미연에게 미련을 두고 있을까 봐 걱정돼 먼저 심미연을 보내려 했다. 심미연은 몸에 가지고 있는 녹음 펜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강지한에게 들킬까 봐 걱정되었고 온지유의 말에 급히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해서든 증거는 반드시 챙겨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박유진을 돌봐야 했다. 박유진은 그녀 때문에 다친 것이었고 그녀는 당연히 그를 돌봐야 했다. “성 비서, 사람 내려놓고 심미연이 혼자 해결하게 놔둬.” 강지한은 심미연을 한 번 쳐다본 뒤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크지 않았지만 심미연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강지한을 돌아보았다.“강 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 심미연은 화가 치밀어 올라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온지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한 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다시 생각해 보니 강지한은 나타난 이후로 계속 이상했다. ‘어쩌려는 거지?’“이리 와.” 강지한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심미연에게 말했다. “좀 더 가까이 와야 내가 무슨 뜻인지 말해줄 수 있지. 그렇게 멀리 있으면 네 얼굴이 잘 안 보이잖아.” 그녀와 이혼한 후 그는 항상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도 수도 없이 떠올려 왔다. 온지유는 완전히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말했다. “지한 씨, 심미연 씨를 불러서 뭐 하시려고. 저 여자가 갑자기 발광이라도 해서 당신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녀는 두 사람이 다시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걸 막아야 했다. 심미연은 강지한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 내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어서 밤낮으로 그리워했어?” 그녀는 강지한을 자극하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화를 내기만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