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이 없자 온지유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심미연을 희생해야 한다. “왜 대답하지 않아요? 혹시 심미연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제 핸드폰에 사진이 있어요. 핸드폰을 저에게 주시면 그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온지유의 말투에는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이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녀가 도망칠 수 없다면 심미연을 끌어들여 함께 끌고 가야 한다. 도망칠 수 있다면 심미연을 여기서 죽게 해야 한다. 한 몸에 두 목숨이라니. 그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이 심미연을 데려오기만 하면 그녀는 심미연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심미연이 죽으면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좋아! 한 번 믿어볼게! 가서 손 풀어줘.” 드디어 누군가 입을 열었고 온지유는 기쁨에 벅차 벌떡 일어나고 싶을 정도였다. 너무 좋았다.곧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풀어주었고 손목을 가볍게 풀자마자 바로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어 던졌다. 눈에 들어온 것은 일제히 같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런 생사를 거는 자들이 아닌 것처럼 매우 전문적으로 보였다. 온지유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고 잠금을 풀었다. 그 사람이 뒤를 돌려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틈을 타 급히 강지한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곧바로 삭제하고 그제야 갤러리를 열기 시작했다. 갤러리에는 심미연의 사진이 적지 않았고 대부분 몰래 찍은 것이었다. 심미연과 박유진이 함께 있는 사진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사진도 있었다. 이 사진들은 그녀가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찍게 한 것들이었고 아직 강지한에게 보여줄 적절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탈출 해야만 말할 수 있었다. “이거 보세요.” 온지유는 핸드폰을 건넸다. 남자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정말 전문적이네.’ ‘그럼 사람을 처리할 때도 이렇게 전문적으로 할까?’ 온지유는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손이 묶였고 누군가가 그녀의 눈을 천으로 가렸다. 순간 그녀의 세상은 암흑으로 변했다. 가슴 속에서 이유 모를 불안이 일었다. ‘이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이때 귀에 남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한 남자가 주의를 주듯 말했다. “먼저 간다. 너희들은 저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잘 지켜.” 온지유는 속으로 생각했다. ‘심미연이 오기 전까지 내가 도망을 갈 리 없지.’‘난 반드시 심미연이 죽는 걸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그래야 마음이 놓이지.’온지유의 전화를 받은 후 심미연은 서재로 향했다. 금고를 열고 그 안에 강준형이 전해준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조심스레 금고 속에 넣었다. 두 상자가 나란히 놓였을 때 왠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며 손끝으로 상자 위를 매만졌다.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며 화면에 낯선 번호가 뜨자 심미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또 온지유일까?’‘아니야!’ ‘온지유는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계속 전화를 걸어오는 거지?’ ‘혹시 방금 그 전화로 내 위치를 추적하려던 걸까?’ 심미연은 그 생각이 들자 등골에 오싹한 기운이 스쳤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집에 있는 게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 벨 소리가 멈추고 곧바로 다시 울렸다. 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냉정하고 감정 없이 흘러나왔다.[무슨 일이야?] 지금 심미연의 머리속엔 온통 온지유가 자신을 해치려는 생각뿐이었다. 강지한과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자기를 지켜야 했다. [기사 보낼게. 본가에 가서 지내.]강지한의 태도는 단호했다. [별일 없으면 끊을게.] 심미연은 그 말만 남기
“먼저 혼자 겁먹지 마! 내가 금방 갈게.” 방원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비록 무섭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정말 무서웠다. ‘문밖에 있는 사람이 스승님이 아니라면 그건 분명 변장한 누군가일 테고 그들의 목적은 대체 뭘까?’ “전화 끊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 방원호는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선배, 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와요.” “알았어.”심미연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엔진 소리 덕분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방원호는 심미연이 위험에 처할까 봐 차를 미친 듯이 몰고 있었다. 심미연은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던 중 문밖에 있던 남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예전에 본 괴담 영화들이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그 장면들이 유독 생생하게 떠올랐다. 심미연은 자신이 기억력이 좋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났다. 방원호는 오고 나서 건물의 모든 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심미연이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심미연의 상태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할 것 같았다. 차라리 조용히 그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볼래?” 방원호가 조심스레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친구 집에 갈게요. 데려다주세요.” 방원호가 아무리 잘해주더라도 두 사람은 선후배 사이였으니 모든 일에 기댈 수는 없었다. “알았어. 그럼 준비하는 동안 기다릴게.” “잠깐만 기다려줘요. 금방 끝낼게요.” 심미연은 방원호에게 자리를 권한 후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원호는 소파에 앉아 거실을 한번 둘러본 후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문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심미연은 곧 짐을 챙겨 내려왔고 방원호가 핸드폰을 보고 있자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선배, 준
심미연은 눈을 깜빡였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조명 아래 몇 개의 흐릿한 노란 불빛만이 그 넓고 텅 빈 곳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주변에는 각종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쌓여 있고 그 그림자들이 벽에 뒤엉켜 왜곡된 모습으로 비쳤다. 그때 심미연은 온지유를 발견했다. 그녀는 창고 한가운데 서 있었고 빛에 의해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유난히 고독하고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온지유는 심미연을 등지고 있었다.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쥐어져 있었고 칼날은 약한 불빛 속에서 차가운 빛을 반사하며 칼을 한 번 돌릴 때마다 다가올 폭풍을 예고하는 듯했다.발소리를 듣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입가에 비웃음이 떠오르며 그 눈빛은 마치 사람의 가장 깊은 두려움까지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심미연, 드디어 왔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난 저 사람들이 날 속이는 줄 알았는데.”심미연은 마음속의 혼란과 분노를 억누르며 온지유를 응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이를 악물고 내뱉는 것처럼 단호했다. “너 대체 뭐 하려는 거야?” 온지유는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네 할머니랑 함께 있을 수 있게 널 보내주려는 거지. 그 노인네가 혼자 아래에 있으면서 외로웠을 거야. 노인네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넌 당연히 내려가서 같이 함께 있어 줘야지.”외할머니가 언급되자 심미연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앞의 온지유를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온지유, 왜 우리 외할머니를 죽게 만든 거야? 할머니는 너랑 아무 원한도 없잖아.” 온지유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몇 걸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있는 칼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며 거의 은빛의 빛막을 이루는 듯했다. “그 노인네랑은 원한이 없지만 너랑은 있잖아. 결국 네 존재가 그 노인네를 죽게 만든 거야.” 온지유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멸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네 할머니는 알면 안 되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어. 살려둘 수 없었어. 결국 죽일 수밖에.” 심미연의 몸은 분노로 떨렸지만 그녀는
심미연의 눈빛이 빛났고 온지유를 향해 냉소를 지었다.“강지한 씨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죽어도 그 남자는 날 잊을 리 없고 너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 온지유, 인정해! 너는 강지한 씨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이 너에게 잘하는 건 그냥 네가 과부라서 불쌍해서 그런 거야.”‘과부’라는 두 글자는 온지유를 완전히 자극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굽혀 손에 들고 있던 칼날을 심미연의 심장에 대며 미친 듯이 웃었다. “내가 이 칼을 힘껏 찔러넣으면 내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거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강지성 같은 그런 무능하고 쓸모없는 놈과 결혼한 거야.” 칼날은 날카로웠고 그 차가운 느낌이 심미연에게 전해져 그녀는 순간적으로 냉큼 숨을 들이켰다. 온지유가 미쳐버리면 심미연의 운명은 한 마디로 끝이다. 바로 죽음이었다. 심미연은 잠시 감정을 가라앉힌 후 온지유에게 물었다. “너와 강지한 씨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잖아. 그런데 왜 강지성 씨와 결혼 한 거야? 강지성 씨의 죽음도 너와 관련이 있는 거 아니야?” 문소영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강지성의 죽음은 의문점이 많았지만 그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한 사람은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었다. 당시 강지성과 함께 있었던 사람은 온지유였다. 강지성은 죽고 온지유는 살아남았다. 가장 유력한 범인은 온지유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교통사고 현장에서는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완벽하게 처리되어서 오히려 누군가 조작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게 진짜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상황이 너무 이해되지 않았다. 방원호가 찾은 온지유의 범죄 증거들로는 아직 충분치 않은 것 같다. 온지유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친 듯이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이 웃음에 맞춰 심미연의 가슴 위로 왔다 갔다 하며 조금만 실수하면 그 칼이 심장에 박힐 수도 있었다. 심미연은 속으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온
심미연은 충격을 받았다. ‘어떤 우연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이지?’ 온지유는 여전히 그때의 기억에 빠져들어 심미연의 표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차 사고는 우연이었고 강지성은 그때 정신이 멀쩡했어. 그 사람은 밖으로 기어 나가려 했고 나는 중앙 대시보드에 놓여 있던 장식품으로 그를 기절시켰어. 내가 차 밖으로 나가고 나서 차가 불타면서 강지성은 재로 변했고 나는 살아남았어. 결국 나쁜 놈은 자신이 한 일의 대가를 받는 거야!”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여전히 속이 후련했다.강지성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모습으로 보였지만 침대에서는 변태처럼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그녀를 괴롭혔고 울지 못하게 강요했다. 그가 죽고 나서야 그녀는 마침내 해방된 기분이었다. 심미연은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며 그 어떤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강지성은 그녀가 선택한 남편이었다. 만약 그가 변태라면 이혼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강지성이 원하지 않더라도 떠날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장 잔인한 방법을 선택해 그를 죽였다. 그녀에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었다. “심미연, 네 외할머니가 왜 죽었는지 알아? 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을 알았거든.” 온지유는 손에 든 칼날을 심미연의 목에 대며 말했다. “내가 이대로 한 칼 휘두르면 네가 죽어가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을 거야. 딱 네 외할머니가 죽기 전 고통스럽게 몸부림친 것처럼 말이야.”순간 심미연의 머릿속에는 외할머니가 몸부림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심장을 칼로 찔러놓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고 가슴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가슴 속의 분노가 거의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눈앞의 온지유를 천번 만번 찔러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차분함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온지유가 방심하고 더 많은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아! 맞다. 그거 알아? 너가 가진 그 핑크색 보석
심미연은 놀라서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이미 피할 시간은 없었다. 그때 강한 힘이 그녀의 몸을 세게 밀쳐냈다. 힘이 너무 강해서 그녀는 버틸 수 없었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퍽!” 칼이 살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공기 속엔 짙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심미연은 급히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박유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가슴에는 칼이 박혀 있었고 온지유는 그 앞에 서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 유진 오빠!” 심미연이 그를 부를 때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미연아, 빨리 도망쳐.” 박유진이 급하게 외쳤다. 온지유는 마치 미친 듯이 변해버렸고 심미연을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온지유는 정신을 차린 후 박유진을 노려보며 눈빛에 피가 어려 있었다. “심미연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왜 구하려는 거예요? 그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다. 하지만 강지한이 위험에 처한다면 그녀는 그의 목숨과 바꿀 정도로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랑과 생명. 당연히 생명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정말로 상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았다. 그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가치 있어요.” 박유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고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다행히도 그가 제때 도착해 심미연이 다치지 않게 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온지유는 그런 깊은 감정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심미연이라는 여자가 대체 뭐길래 누군가는 생명을 걸고 구하려는 걸까?’ 정말 질투가 나게 했다. 심미연은 고통을 참으며 바닥에서 일어나 한 걸음씩 박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 오빠, 내가 데리고 나가 줄게.”온지유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심미연은 운이 참 좋았다. 그녀의 곁
그가 들었다면 그녀의 여리고 착한 이미지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강지한이 말을 하기 전에 박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 대표님, 죽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드리죠. 미연이가 평생 무사히 살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그의 심미연은 너무나 가엾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고 지금도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말로 하늘도 눈 감은 것 같았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박유진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그 소리를 듣고 심미연은 그제야 박유진이 다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강지한과 온지유 사이의 일에만 신경을 썼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심미연은 머리를 살짝 흔들며 급히 머릿속의 생각들을 떨쳐내고 박유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급히 박유진의 넥타이를 풀어 지혈을 시도하며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강지한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울먹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이 답답했다. 온지유는 가까운 거리에서 강지한의 눈 속에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안 돼!’ ‘절대 이렇게 끝날 수 없어.’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노력해 왔는데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강지한을 붙잡아야만 했다.심미연은 박유진의 상처를 급히 처리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박유진의 상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떨리는 입술로 강지한에게 말했다. “강 대표님, 제발 유진 오빠 좀 살려줘. 제발 죽게 하지 마.” 박유진이 자신 때문에 죽는다면 그녀는 평생 죄책감과 자책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런 삶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온지유는 이를 악물고 낮게 속삭였다. “지한 씨, 나 좀 집에 데려다줄 수 있어? 여기 있기 너무 무서워.” 그녀는 강지한이 자신의 말을 따라줄지 아니면 심미연의 말을
박유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켜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할아버지, 방금 병원에서 나왔어요. 시훈이 상태는 안정적이고 의사 말로는 회복도 아주 좋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그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혹여 할아버지가 그의 불안함을 눈치채지 않도록.전화를 끊은 후 그는 다시 한번 책상 위에 놓인 목걸이를 바라보았는데 가슴 속에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앞날은 예측할 수 없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숨겨진 사랑을 위해서든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해서든 말이다.“유진아, 너 시훈이한테 내 뜻은 전했니?”박정재의 목소리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시훈이가 뭐라고 하더냐? 돌아오겠다고 했어?”뭐가 됐든 박시훈은 박씨 집안의 피를 잇는 자손이고 아직 살아 있는 한 그를 인정하고 가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박유진은 무표정하게 목걸이를 금고에 넣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은 전했어요. 설득도 했고요. 하지만 결정은 시훈이가 하는 거고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시간을 좀 가지자고 했어요. 조금 지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니까요.”박유진은 아주 어릴 적부터 자신이 한원 그룹의 후계자가 될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척 열심히 공부했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았다.하지만 그의 진짜 꿈은 기업 경영자가 아니라 의사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었고 등에 지고 있는 책임이 너무 컸기에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운명이었다.그래서 그는 박시훈이 박씨 가문을 받아들이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걸 넘기고 심미연과 함께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유진아, 너도 이제 서른이 넘었잖니. 슬슬 혼사도 생각해야지. 며칠 안에 네 엄마가 맞선을 하나 주선할 거다.”“할아버지, 전 맞선 안 봐요. 결혼할 사람 있습니다.”박유진은 말하면서 미연의 예쁜 얼굴을 떠올렸다.그는 알고 있었다. 심미연에 대한 그의 사랑은
박유진은 병원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그를 환히 비추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속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웠다.세상은 여전히 눈부시게 밝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런 색도 담기지 않았다.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가슴 속 답답함을 털어내듯 다시 내쉬며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박시훈... 왜 하필 너야.”그 시계가 천근만근의 무게로 가슴에 내려앉았다. 정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오늘은 분명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고 하늘은 푸르렀으며 햇살은 따뜻했다. 하지만 박유진의 세상은 마치 무너져 내린 듯 캄캄했다. 어둠이 그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그는 외투를 꼭 여몄고 텅 빈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묘한 감정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교차했다.병원으로 오기 전 그는 왜 그렇게 무심하게도 박시훈이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다쳤는지부터 알아보지 않았을까?갑작스레 들려온 이 소식은 날이 선 칼처럼 예고도 없이 맹렬하게 그의 심장을 찔렀다. 너무나도 아팠다.그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돌아가 박시훈을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왜 심미연에게 다가갔냐고, 도대체 무슨 이유냐고.하지만 그의 발은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사슬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왜냐하면 그는 묻을 자격이 없었다. 심미연과는 약속만 한 사이지, 서류 한 장 없는 관계였다. 약속이라는 것은 시간 앞에서 가장 무력한 것이었다. 어쩌면 당장 내일 그 약속이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으니까.그런 생각이 들자 수많은 개미가 가슴속을 물어뜯는 듯한 괴로움이 엄습했고 돌덩이가 가슴 위에 얹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어지러운 감정을 억누른 채 박유진은 서둘러 병원을 나와 차에 올랐다.회사 건물 앞에 도착하자 박유진은 바로 차에서 내려 분주한 인파 속을 가르며 큰 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그리고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그는 책상 위 전화기를 들고 재빠르게 버튼을 눌렀다.“박시훈이 다친 일에 대해 전부 조사해. 단서
강지한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생긴 얼굴은 평소와 달리 유난히 지쳐 보였다.“상미의 혈액형이 RH 마이너스래.”그의 낮고 힘없는 목소리엔 어쩔 수 없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그런 혈액형은 워낙 드물어서 혈액 보유량이 부족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심미연의 가슴이 갑자기 턱 하고 내려앉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움켜쥔 듯 숨이 막혔다.“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상미가 RH 마이너스 혈액형이라고?”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목소리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상미가 자신과 같은 혈액형이라니, 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정말 있을 수 있는 걸까?“왜 그래?”강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그녀가 이토록 놀라는 이유는 뭘까? 설마...심미연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상미의 웃는 얼굴, ‘언니’라고 부르던 그 맑은 목소리, 그리고 해맑게 뛰놀던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그림자에 덮여버린 듯 어두워졌다.“나도 RH 마이너스야.”심미연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도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녀와 강상미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인데 혈액형이 같았다.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감춰진 진실이 있는 걸까?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문득 그녀는 강상미와 심태하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렸다. 두 아이는 생일도 비슷했다. 외모가 닮은 건 우연일 수 있어도 생일까지 겹치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강지한은 멍하니 서 있었다.“너랑 상미의 혈액형이 같다고?”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그는 지금 처음으로 심미연의 혈액형을 알게 된 것이다.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심미연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심미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왜, 믿기지 않아?”그들은 한때 부부였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혈액형조차 몰랐다.강지한의 마음은 온지유라는 첫사랑이 늘 차지하고 있었고 그는 늘 그녀만 바라보았지, 심미연에게 관심을 준 적이 없
“박유진, 네가 여긴 왜 왔어? 누가 오라 했는데?”박시훈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평소의 건들건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한겨울 찬바람처럼 차가웠다.“할아버지께서 네가 다쳤단 소식을 들으시고 나더러 대신 보러 가라고 하셨어.”박유진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박시훈, 너도 박씨 집안의 핏줄이야. 이젠 집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어?”언제나처럼 점잖고 느긋한 말투였다.“뭐야, 한원 그룹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 이제 와서 나한테 돈 좀 달라는 거야? 감정 팔면서 접근하겠다는 거지?”박시훈은 조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딱 잘라 말할게. 설령 한원 그룹이 망한다 해도 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할 거야. 나는 재밌게 구경이나 할 거라고.”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어머니는 그를 수없이 때렸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왜 넌 죽지도 않고 살아 있니?’그 말은 어린 박시훈의 가슴속에 깊게 파였고 그때부터 그는 박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게 되었다.그리고 스스로 맹세했었다. 평생 다시는 그 집안에 발도 들이지 않겠다고.예전에 잠시 심미연과 결혼하려는 마음에 집안에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그 생각도 곱씹어본 끝에 접어버렸다.그런데 이제 와서 박유진이 이런 얘기를 꺼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하지만 박유진은 여전히 한결같은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표정과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한원 그룹이 망해도 너한테 손 벌릴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시잖아. 넌 할아버지에게 남은 유일한 손주고 평생 할아버지 마음속에 있는 존재야. 그러니 이번 한 번만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거야.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것도 아니고.”박시훈은 코웃음을 쳤다.“그럴듯하게 포장하려 들지 마. 내가 안 간다고 했으면 진짜 안 가.”그는 박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오히려 바깥세상에서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나는 그냥 할
박시훈의 상처가 너무 깊어 봉합이 필요해서 심미연은 곧장 그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수납 창구로 가 요금을 지불하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한 사람이 휙 튀어나오더니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 도망쳤다.요금을 받던 직원조차 그런 장면은 처음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대낮에 병원에서 휴대폰을 털다니!’그런데 정작 휴대폰을 빼앗긴 심미연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침착하게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또 다른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번호를 눌렀다.“내 휴대폰 위치 추적해. 그리고 혹시 상황이 심상치 않으면 바로 폭파해 버려!”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폭파’라는 단어는 등골이 오싹해질 말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친구랑 날씨 이야기나 하는 듯 가볍게 내뱉었고 일말의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심미연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이 여자... 보통이 아니네.’‘멀리 있어야 괜히 엮이지 않겠지...’한편 병원 밖에서 한 남자가 외투를 벗어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후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도련님, 심미연 씨의 휴대폰을 확보했습니다.”“지정한 장소에 놔둬. 내가 사람 보낼게.”“예,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남자는 재빨리 택시 한 대를 세우고 주소를 불러주었다.그 시각 요금을 다 내고 수술실 쪽으로 돌아가던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방금 위치 전송해 드렸습니다. 그런데요... 무슨 묘지 근처 같습니다.”심미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바로 사람 몇 명 보내. 나도 직접 갈 거야.”전화를 끊고 나니 그녀는 어느새 수술실 문 앞에 도착해 있었고 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수술실 안의 불이 꺼졌다.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박시훈이 스스로 걸어 나왔다.심미연을 발견한 그는 두 눈이 환히 빛나며 달려왔다.“아직 안 갔네요!”그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동안 심미연이 자신을 두고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줄
심미연은 고개를 홱 돌렸다. 시선이 옆에 서 있는 박시훈에게 닿는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과 이마를 뒤덮은 땀방울이었다. 지금 박시훈은 극심한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이때 심미연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녀는 즉시 깨달았다. 박시훈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임을.그녀가 가늘고 가지런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강지한 쪽을 돌아보니 그는 마치 온 세상이 자기에게 빚이라도 진 듯 분노로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순간 심미연의 얼굴은 단숨에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강지한을 바라보는 그 맑은 눈동자 속엔 두 줄의 칼날이 담겨 있는 듯 단숨에 사람의 심장을 찌를 것 같은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이 드러났다.그녀는 단단한 결심을 품고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한에게로 다가갔다.그리곤 망설임 없이 그를 밀쳐냈다.“박시훈 씨 다쳤는데 왜 그렇게 세게 잡아당겨!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어쩌려고!”심미연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고 눈빛은 칼끝처럼 예리했다. 그녀는 강지한을 똑바로 응시하며 외쳤다.“이 정도 상식도 없어, 강지한?”심미연이 밀치자 강지한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얼굴에 더 짙은 분노가 어렸다.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밀어낸 심미연을 바라보며 강지한은 그제야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강이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 한편이 텅 비는 듯한 좌절감이 밀려왔다.‘안 돼. 심미연을 이렇게 그냥 보낼 순 없어!’“박시훈 씨, 가요.”심미연은 금세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얼굴로 박시훈을 바라보았다.박시훈은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아픔이 누그러지는 듯했다.‘미연 씨의 미소가 설마 치유하는 힘이라도 있는 걸까?’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를 끌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타요.”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심미연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강지한이 다급히 달려와 차 문을 잡
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랑 지유는...”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시훈이 불쑥 끼어들었다.“미연 씨... 가슴이...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박힌 것처럼 아파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예요. 혹시... 병원에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그의 목소리에 진한 고통이 묻어났고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박시훈, 너... 정말로 내 사람을 가로채려는 거야?”하지만 강지한의 여인이 그렇게 쉽게 빼앗길 리가 있는가?박시훈은 더 이상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직 심미연만 쳐다보았다.“이제 가도 될까요?”그가 보기엔 심미연과 강지한의 언쟁은 겉으로는 날이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은 감정의 불씨가 바람에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그만큼 지극히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다.반면 자신과 심미연 사이에는 언제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얇은 장막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고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가까워질 기회를 잡기도 전에 늘 놓쳐버리고 만다. 심지어 다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만큼의 간극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은 절대 저 둘이 더 오래 함께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심미연은 잠시 강지한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그리고 단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그래요. 지금 바로 같이 병원으로 가요.”그 말에 박시훈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같이’라는 단어가 마치 봄바람처럼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 싸늘하던 마음에 조그마한 온기를 남겼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그는 ‘심미연과 박시훈’이 아니라 ‘우리’였다.심미연은 더 이상 강지한을 돌아보지 않았고 박시훈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잠시 뒤 강지한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그들을 뒤쫓아왔다. 그러고는 박시훈의 팔을 붙잡으며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부축할게. 그래야 더 빨리 갈 수 있지.”그러자 박시훈은 속으로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이 자식, 진짜 사람 속 뒤
박시훈은 심미연의 부축에 힘을 빌려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요.”그러면서도 시선의 끝자락으로는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강지한이 보이는 반응을 조심스레 훔쳐보았다.강지한의 얼굴은 마치 폭풍 전야의 하늘처럼 어두컴컴했다. 그의 날카롭기로 유명한 눈빛은 이 순간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깊고 검은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시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였다. 사업가로서 냉정하고 치밀하게 ‘전장’을 지휘하던 강지한은 언제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냉철한 인물이었고 사람들에게 감정이라곤 없는 기계처럼 여겨졌었다.하지만 지금 심미연은 그런 강지한을 화나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질투하게 만들었다.‘그러네, 질투하는 거였어!’박시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엔 이번 무언의 대결에서 자신이 우세를 점한 듯 보였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곳엔 조금의 기쁨도 없었다. 오히려 뭔가 답답하고 찝찝했다.“박시훈 씨, 가요.”그 순간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며 그의 흩어진 생각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여느 때처럼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강지한을 앞에 두고도 저토록 태연한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강지한을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미연 씨는... 지한이를 사랑하지 않는구나.’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박시훈의 기분은 조금 가벼워졌다.그러나 바로 그때 날카롭고 매서운 목소리가 정적을 찢고 들어왔는데 그 말 한마디가 박시훈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찔렀다.“박시훈, 너 다리가 부러졌어, 아니면 팔이 나갔어? 왜 여자한테 부축까지 받는 거야?”그 말투엔 감춰지지 않는 조롱과 위압이 섞여 있었고 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지한과 눈을 마주치자 그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 얼음장 같은 서늘함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박시훈은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심미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강지한을 노려보았다.
강지한은 두려웠다. 자신의 고집과 독단이 심미연과 아이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심지어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까 봐.그래서 그는 인내를 배웠고 절제를 익혔다. 비록 그 절제가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괴롭고 아팠을지라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심지어 박시훈일지라도 그와 심미연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하고도 위태로운 경계를 함부로 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강지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관통해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을 보는 것처럼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 속에는 짙은 조소가 스며 있었고 그건 어떤 말보다도 상처로 깊이 박혔다.“강지한, 잊었나 본데...”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날카로운 칼끝처럼 정확히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우리 사이는 4년 전에 끝났어. 네 입에서 ‘내 여자’라는 말이 나오는 건 너의 비정상적인 소유욕일 뿐이야.”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단호했고 그 말은 마치 갑작스레 몰아친 폭풍처럼 강지한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모든 신념과 자존심을 산산이 무너뜨렸다.강지한은 당황했고 분노했으며 그보다 더 큰 좌절과 무력감이 가슴을 짓눌렀다.바로 그 순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온 사랑은 빼앗고 움켜쥐는 방식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이때 박시훈의 시선은 심미연의 작고 예쁜 얼굴에 꽂혀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도 냉정했으며 세상의 모든 거짓을 꿰뚫어 보는 듯했지만 동시에 사람들과의 거리감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넘을 수 없었다.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건 어쩌면 ‘권력’이라 불리는 존재에 도전하는 듯한 일종의 쾌감이었다.‘강지한’, 그 이름은 오랫동안 그의 세계를 짓누르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들던 절대자, 사람들조차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