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그녀는 메시지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온지유의 셀카 한 장이 담겨 있었다. 셀카 뒤로 보이는 뒤편 벽에는 예전에 그녀가 사람을 시켜서 합성한 강지한과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결혼사진을 걸었을 당시 강지한은 비웃으며 조롱했었다. 그녀는 그저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고 그의 조롱 따위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으로 그 사진은 3년 동안 그대로 벽에 걸려 있었다. 이사를 할 때 서두르다 보니 사진을 내려서 없애는 걸 깜빡했다.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온지유가 벌써 그 집에 들어갈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정말 성급하기도 하네.’그런데 아까 본가에서 밥 먹을 때 강지한은 그녀에게 무례한 장난을 쳤었다. ‘재밌네.’그녀는 이제 강지한에 대한 감정은 모두 놓아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사진을 봤을 때 아마 속이 뒤집혔을 것이다. 사진을 지우려던 찰나 온지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심미연은 온지유가 단지 자신에게 자랑하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지한에게 더 이상 마음이 없는 그녀는 그와 온지유의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온지유 같은 아무런 자존심도 없이 끝까지 낮아지는 사람은 정말로 그녀의 세계관을 새롭게 만들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온지유의 메시지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섹시한 속옷 차림의 사진이었다. 심미연은 전에 한 번 그런 걸 샀던 기억이 났지만 그걸 어디다 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심미연은 강지한에게 선물했던 그 넥타이를 떠올렸다. 아마 아직도 옷장에 있을 거다. 온지유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녀는 한 장 한 장 점점 더 노골적인 셀카를 계속 보내왔다. 심미연은 속으로 잠깐 욕을 뱉고 그 사진들을 바로 강지한의 이메일로 보내버렸다. ‘둘이 진짜 끼리끼리네.’ ‘앞으로 둘이 평생가라! 서로 다른 사람 건드리지 말고!’사진을 보내고 난 후 심미연의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심미연은 잠도
신하린은 심미연이 걱정되어 이진영이 소개팅 간 일은 잠시 잊어버렸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급히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신하린을 기다렸다. 신하린은 전화를 끊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 급하게 집을 나섰다.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려고?” 남자는 얼굴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물었다. 신하린은 고개를 푹 숙이며 그를 보지 않았다. “지금은 당신 보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요.” 어떤 일들은 시간을 두고 혼자 차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신하린, 지금 나한테 성질부리는 거야?” 이진영의 말투는 썩 좋지 않았다. “네가 날 떠나라고 말해준 게 아니야!” 신하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당신 말은 그 여자랑 함께한 후에도 날 놔주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이진영은 그녀에게 내연녀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고 부끄럽지 않냐고 비난받게 만들고 싶어 했다. ‘이 남자한테는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비천하고 하찮은 존재였던 걸까?’“네 존재는 나와 그 여자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어. 우린 예전처럼 살 거야.” 이진영의 말은 정말 역겨울 정도였다. 신하린은 그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난 당신들의 관계를 망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끼어드는 거라는 말이죠?”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얼굴에는 비웃음이 섞인 냉소가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하찮고 비열하게 보여요?” 신하린은 이진영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 자신을 무시하고 천하게 생각하는 말을 들으니 가슴 깊이 상처를 받았다.“나랑 그 여자는 단지 상업적인 결혼일 뿐이고 감정 같은 건 없어. 왜 그렇게 질투를 해?” 이진영은 도대체 왜 신하린이 그들 사이의 관계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렇게 몇 년 동안 잘 지내지 않았나? 신하린은 더 이상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서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미연이 찾으
이진영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마주하자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내가 당신의 통제를 벗어나고 그런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그 순간부터 난 경성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든 이 도시. 여기 남아 있는 건 슬픔만 더할 뿐이었다. 차라리 떠나서 다시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녀의 말에 이진영은 당황한 듯 손에서 힘을 풀고 그녀를 놓아주었다.신하린은 손목을 문지르며 그를 향해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만 손을 쓰기 전에 미리 말은 해주세요. 그래야 내가 준비할 수 있잖아요.” 그녀는 평온하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고 차 문을 열어 내렸다. 차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울렸고 이진영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서둘러 창문을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들어왔고 그제야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시선은 내내 그녀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신하린은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 줄기 시선이 자신의 등을 끝없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이유 없이 코끝이 시큰해졌다. 울고 싶었다.“하린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신하린은 현실로 돌아왔다. 얼른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어 심미연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미연아, 너 왜 내려왔어? 배 아프다며.” “네가 걱정돼서 내려와 기다렸지.” 심미연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살짝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스쳤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집 갈래? 아니면 술집 갈래?”심미연은 신하린이 취해서 푹 자고 내일 아침엔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길 바랐다. “좋아. 강남바로 가자!” 신하린은 술에 취하면 더 이상 그 남자의 냉정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
“저는 물 한 잔 마시러 갈게요. 운전 조심하세요!” 한유나는 조금 당황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이진영이 자신을 미래의 이 부인이라고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혹시 결혼을 서두를 만큼 정말 나를 좋아하게 된 건가?’ 그녀는 오늘 밤 부모님과 결혼에 대해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씨 가문은 명문가라 결혼 준비가 복잡하고 예절도 많아서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이진영과 결혼한다는 생각에 한유나의 가슴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건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일이었다!문 앞과 차 안에서 이진영은 핸드폰을 옆에 두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연기 속에서 신하린의 붉어진 눈이 떠올랐다. 그가 한유나와 결혼한다고 해도 그와 신하린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여자는 도대체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심미연과 신하린은 방에 들어갔고 신하린은 거침없이 두 사람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곧 방문이 열리고 두 명의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가 장미꽃을 하나씩 들고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은 귀엽고 매혹적이었다. 심미연은 급히 손을 내밀어 신하린의 팔을 잡았다. “난 남자는 필요 없어.” 그녀는 이미 임신 중이라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면 안 되니까.신하린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저 즐기고 싶은 마음이었고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너 필요 없으면 내가 다 가질 거야.” 신하린은 소파에 기대어 두 남자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둘 다 내 옆에 앉아요.”이진영과 그 여자는 곧 결혼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분명 한 침대에서 함께 자고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교감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녀는 싱글인 여자로서 인생을 즐길 때 제대로 즐겨야 한다. 두 남자는 그녀의 옆에 순순히 앉았다. 장미꽃을 입에 물고 얼굴을 가까이 대며 큰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감쌌다. 두 사람의 숨결이 서로 얽혔다.신하린은 심장이 급격히 요동치며 남자를 밀어내려고 손을
신하린은 조금 짜증이 나서 손을 뻗어 그를 잡았다. “먼저 나 좀 놔줘요!” 이진영은 얼굴을 돌릴 틈도 없이 그녀의 손톱에 얼굴을 긁혀 잘생긴 얼굴에 긴 상처가 남았다.하지만 신하린 앞에서만큼은 그의 성격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지금 그와 신하린의 관계는 얼어붙었고 신하린은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더 이상 참을 성질이 남아있지 않았다. 심미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진영은 어떻게 강지한보다 더 밉상일 수 있지.’ 신하린은 조금 당황한 채 입술을 꽉 물었다. “이진영 씨, 만약 나한테 그렇게 한다면 난 평생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이진영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손끝에 끈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기분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어차피 넌 평생 내 곁에 있어야 해. 용서하나 안 하나 그게 무슨 상관이야?”그동안 그녀를 얼마나 아껴줬는데 결국 그녀는 여기서 다른 남자와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제 그 역시 그녀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녀를 자기 곁에 묶어두고 이제는 오직 자신과만 자게 만들 것이다.신하린은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난 당신 장난감이 아니에요. 왜 평생 당신 곁에 있어야 하는데?” 심미연은 신하린의 붉어진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잠시 망설이다가 두 사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진영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심미연은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신하린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말라고 눈짓으로 전했다. 이진영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한유나의 번호를 확인한 뒤 바로 전화를 받았다.“진영 씨, 도착했어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스며들자 이진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신하린이 이런 말투로 나한테 말한다면 아마 너무 기뻐서 뛰어오를 거야.’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밖은 춥고
방금 전의 답답한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진영은 이 모든 걸 이해한 뒤 시선은 더 확고해졌다. “와! 유나 총괄 엔지니어의 남자 친구 진짜 잘생겼다!” 누군가가 놀라며 외쳤다. 한유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자부심을 느꼈다. ‘누구 남자 친구인데 당연히 잘생겼지!’ “취했어요? 걸을 수 있겠어요?” 이진영이 부드럽게 물었다. 한유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걸을 수 있어요.” “내가 안고 나갈게요.”이진영은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구부려 그녀를 안았다. “세상에. 진짜 로맨틱해!” “남자는 잘생기고 여자는 예쁘고 너무 잘 어울려. 천생연분이야.”한유나는 이진영이 자기를 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잠깐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이내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쌌다. “진영 씨, 이러면 안 돼요.”입에서는 투정 섞인 말이 나왔지만 마음속은 달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이 부인으로서 누려야 할 특권이죠.”이진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았고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한유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얼굴에 상처는 어떻게 난 거예요?” 가장 중요한 건 그 상처가 왠지 모르게 애매하고도 은근히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여자가 화나서 긁은 듯한 자국처럼 보였다. ‘혹시 진영 씨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걸까?’ 이진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긁었을 뿐이에요.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지만 한유나는 순간 그가 진짜로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때 다른 방에서는 신하린이 술병을 안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까 이진영이 그녀 앞에서 전화를 받은 일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취하게 만들고 싶었다.“하린아, 적당히 마셔. 너무 취하면 내가 너를
박유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진영 도련님.” 경성에서는 이씨 가문의 사람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이진영의 아버지는 정치에 몸담고 있고 어머니의 집안은 부유한 대가문이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 이씨 가문과는 충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때 박유진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몸을 움직이며 두 손으로 박유진의 목을 감싸고는 입에서 거침없이 욕을 내뱉었다. “이진영 이 자식! 죽어버려.” 이진영은 얼굴이 어두워졌고 여자의 두 손을 처절하게 응시했다. 만약 눈빛만으로 그 손을 잘라낼 수 있었다면 아마 벌써 뼈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며칠 전 이 여자는 술에 취해 그를 때리고 욕하며 밤새도록 괴롭혔다. 그런데 오늘 밤 또 술에 취하다니! ‘이 여자는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가!’ 하지만 이진영이 가장 많이 화가 나는 점은 이 여자가 술에 취해 결국 박유진에게 안겨 나왔다는 것이다! 박유진이 누구냐? 박씨 가문의 도련님이다. 신하린이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 남자. 처음으로 심미연을 돕기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 침대에서 거칠게 당했던 그녀는 결국 울며 박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의 감정을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속이 터지고 억울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를 벌주기 위해 그는 집안의 구석구석에서 그녀를 가졌다. 그렇게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그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함께한 5년 동안 그는 도무지 그녀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박유진뿐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이진영은 눈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안겨 있는 여자를 그냥 당장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심미연은 이진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급히 서둘러 설명했다. “방금 이진영 씨가 떠난 후 하린이가 마음이 괴로웠던 거 같아요. 계속 술을 마시는데 내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
“언제 검사하러 가? 내가 같이 갈게.”박유진은 화제를 바꾸어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가자!”심미연이 거절하려고 할 때 박유진이 입을 열었다.“내가 줄 서는 거나 비용을 내는 것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 너 임산부인데 이리저리 뛰어다니려면 너무 피곤할 거야.”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침묵했다.예전에 이진영과 신하린이 사귈 때 이런 우대를 받아도 괜찮으나 이제 이진영은 결혼 상대도 있고 신하린과의 관계도 유지할 수 없으니 그녀는 더는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이 주는 우대를 받을 수 없다.하지만 검사를 받으려면 줄을 서야 하고 또 위층과 아래층을 오르내려서 심미연 혼자서는 확실히 매우 피곤하긴 했다.박유진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그녀가 다시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다.“그럼 다음번 검사 때 부를게.”박유진은 그녀의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전에 넥타이에 넣었다고 했던 카드를 가져왔어?”심미연은 갑자기 그 일이 떠올랐다.“차에 있어.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네 차는 내가 비서에게 가져가라고 할게.”박유진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부드럽게 들려 마치 여자를 달래는 것 같았다.심미연이 시간을 보니 이미 새벽 1시가 되였다. 이렇게 늦게 혼자 차를 몰고 집에 돌아가는 것은 확실히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유진을 따라 차에 올랐다.“넌 임산부야. 앞으로 이렇게 늦게 다니지 마.”박유진은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며 말했다.“너 먼저 좀 자. 도착하면 내가 깨울게.”그는 잔소리하고 있었지만 심미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강지한과 결혼한 3년 동안 할아버지는 가끔 그녀의 귓가에 몇 마디 했다.지금 그녀가 이혼했으니 그녀가 할아버지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어 잔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이미 졸음이 밀려온 심미연은 차가 시동을 건 지 얼마 가지 않아 잠이 들었다.여자의 얕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유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랑이 넘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일부러 차의 속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
심미연은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나오기 전에 꽤나 공을 들여 꾸미고 온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 위엔 파운데이션이 지나치게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덕지덕지 얹은 듯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 씨가 내가 안에서 고생하는 거 못 본다고... 날 꺼내줬어.” 온지유는 등을 곧게 펴고 얼굴 가득 자부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심미연, 지한 씨랑 재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들은 박시훈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강지한이 직접 저 여자를 꺼냈다고?’ 그는 불과 얼마 전, 온지유가 출고했다는 사실을 강지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결국 바보는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심미연의 눈동자가 조용히 온지유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건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곡선. “그래?” 낮고 담담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속을 들키지 않는 말투였다. 온지유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미연은 문득 의심했다. ‘혹시... 강지한이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사실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용히 찌릿하고 아려왔다. 그녀는 과거, 온지유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 여자가 평생 거기서 썩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4년. 너무도 빠른 재등장이었다. ‘강지한... 온지유한테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네.’심미연의 눈빛에 눌린 온지유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덮쳐왔고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그럼.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의 말은 당당했지만 박시훈이 보내는 미묘한 시선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혹시... 이 남자, 뭐라도 눈치 챈 건 아니겠지?’‘아냐. 아닐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말자.’하지만 박시훈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몰래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
‘왜? 심미연을 보호하려고?’박시훈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다가온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 미연 씨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고백했다가 차였고요.”심미연에게 거절당한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지유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 지한 씨 친구라면서요? 심미연이 지한 씨한테 몇 번이나 안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고 시선엔 뚜렷한 분노가 일렁였다. ‘심미연이 뭐라고... 도대체 왜 다들 심미연만 좋아하는데?’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심미연이 있는 자리는 늘 그녀가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마치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양. 온지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이랑 미연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박시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미연 씨를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심미연에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미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온지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모르게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심미연 같은 중고품이 이렇게 인기 많다고?’‘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딩.”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심미연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청아했고 단아했다. 말없이 걸어 나오는 짧은 그 순간마저 도도하게 빛나는 존재감으로 공간을 압도했다. 그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품, 고요하지만 단단한 아우라. 심미연이라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박시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듯 조심스
강지한의 목소리는 다소 불쾌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어조가 단호하고 차가웠다.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시훈은 더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온지유가 지금 은성 빌딩 로비로 들어갔어.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싸움이라도 날까 봐... 너 빨리 와봐.”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급하게 말하다 목이 막힌 박시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너 먼저 막고 있어. 나 바로 갈게.” 강지한의 목소리엔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박시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여전히 똑같네. 참 미련한 놈이지.’ 하지만 그가 온지유를 막으라고 했으니 일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정말로 위층까지 올라가서 둘이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박시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안 그러면 강지한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온지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박시훈이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절 아세요?” 온지유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를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이랑 아는 사이면 당신도 알죠.”박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얄밉고 교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강지한이 눈이 정말 많이 멀었지. 저런 여잘 좋다고...’“지한 씨 친구라고요? 근데 전 왜 처음 보죠?” 온지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지한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익숙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지금 알면 됐죠. 그리고 지한이가 방금 전화했어요. 당신한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