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순간 기뻐하며 말했다.“알았어! 나 지금 옷 갈아입으러 갈게.”강지한이 그녀를 찾으러 오면 심미연은 강지한을 꼬실 기회가 없지 않은가! 심미연이 발끈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너무 좋아.’전화를 끊은 강지한은 서류를 챙기고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성무진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제가 음식을 포장해 왔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바로 30분 전에 강 대표의 음식을 포장해서 가져오라는 전화를 받은 성무진은 영문도 모른 채 급하게 음식을 포장해서 이쪽으로 달려갔다.“놔둬. 난 급히 나가야 해.”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기졌던 배가 이젠 배고프다는 감각도 잃었다.성무진은 할 말을 잃었다.‘강 대표님은 변덕이 많네.’강지한은 차에 올라탔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온지유가 아이를 잃고 많이 괴로워했다. 그는 곧 심미연을 잃을 것인데 그때 가서 자신도 이렇게 괴롭겠지?생각에 잠겼을 때 온지유의 전화가 또 걸려와 강지한은 미간을 문지르며 받았다.“왜 그래?”예전 같으면 그는 삼박사일을 휴식하지 않고 일해도 여전히 힘이 넘쳤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매우 피곤했다.“출발했어?”온지유가 부드럽게 물었다.“방금 차에 탔어.”“서쪽에 있는 함평집의 죽이 먹고 싶은데 테크 아웃 해줄래?”온지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이를 유산한 후 그녀는 강지한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고 느껴졌다.분명히 앞에 있지만 마치 산과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있는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강지한을 꽉 잡고 싶었지만 또 잡을 수 없는 것 같았다.안전감이 없어서 그녀는 계속 그에게 전화를 걸어 옆에 있어 달라고 했고 그래야만 안전감을 느낄 수 있었다.“알았어.”강지한이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에서 들려오는 전화가 끊겼다는 안내음을 들으며 은근히 당황해진 온지유는 급히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마음속의 이런 느낌을 억누르려고 애썼다.이어 그녀는 전화를 걸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당신이 어떤
사랑스러운 말투였다.아마 이진영이 신하린을 좋아할 거라고 심미연은 추측했다.아니면...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생각에 빠졌던 심미연은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박유진이 왜 나한테 전화했지?’의심이 들었지만 그녀는 곧 전화를 받았다.“오빠!”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박유진이 많이 도와줘서 그녀는 큰 신세를 졌다.“늦은 밤에 전화해서 미안해.”부드러운 박유진의 소리를 들으면 그의 얼굴에 띈 웃음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심미연은 당황했다.“아무 일도 없어.”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저녁에 박인우, 강지한, 그리고 이진영이 함께 술 마신 거 알아?”“몰라.”심미연은 정말 몰랐다.이진영이 신하린을 데리러 왔을 때도 말하지 않았다.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뭔가 짐작이 갔는지 더듬거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아니면 박유진이 이렇게 늦은 밤에 일부러 전화해서 이 일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진영이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랑 사귀나 봐.”박유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한씨 가문의 아가씨인 것 같은데 연구원에서 일한대. 배경도 있고 능력도 좋으니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이 결혼할 것 같아.”그러나 그의 추측으로 보아 양가에서는 만족할 것이다. 다 정계 배경을 가졌으니 양가에서 정말 한 가족이 된다면 서로 돕고 더 발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그래서 신하린은 그저 놀고 버려질 게 분명하다.그가 심미연에게 이런 일을 알려주는 건 신하린에게 너무 빠지지 말라고 귀띔하기 위해서다. 결국 그녀 자신만 다치게 되니까.“알았어, 고마워.”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꽉 움켜쥔 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신하린이 술에 취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항상 이진영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술에 취하면 이진영의 이름만 불렀다.막상 헤어지면 신하린은 이 상처에서 헤쳐나올 수 있을까?심미연은 이 일을 신하린에게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이때 박유
온지유는 어색한지 사레에 걸린 것처럼 기침을 했다.“만약 네가 대신 결정 내릴 수 있다면 내가 당장 말하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전화 바꿔! 아니면 후회할 건 너야.”심미연이 차갑게 말했다.그녀는 온지유의 속셈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와 말을 섞기도 싫었다. 그저 빨리 이 혼인을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었다.“왜 나한테 화를 내?”온지유의 목소리는 갑자기 울음이 섞인 것처럼 아련해졌다.심미연은 대뜸 강지한이 왔다는 것을 알아듣고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너와의 대화는 이미 녹음되고 있어. 나한테 구정물 끼얹을 생각하지 마.”강지한과 이혼할 건데 온지유에게 체면을 남겨줄 필요도 없었다.잠시 어리둥절해진 온지유는 그제야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년이 감히 녹음하다니!’“이젠 강지한과 통화할 수 있겠어?”실은 온지유에게 전달해 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자기야말로 진짜 사모님인 것처럼 으스대는 태도가 싫어서 심미연은 그녀와 말을 하는 것도 귀찮았다.“나와 지한은 아이를 달라고 사찰에서 기도하는 중이야. 기도가 끝나면 너에게 전화하라고 할게.”온지유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난 그저 지한 씨에게 오늘 이혼 절차를 밟는 날이라고 알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사찰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니 일단 전화를 끊어야겠네. 이혼은 다음 날에 해도 상관없어!”심미연의 말투는 여전히 쌀쌀했다. 그녀가 장담하건대, 온지유는 즉시 강지한을 불러 전화를 받게 할 것이다.심미연이 이런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온지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들려왔다.“지한 씨, 빨리 전화 받아! 심미연 씨 전화야.”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온지유는 아마 너무 기뻐서 하늘을 날 것 같겠지?’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귓가에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나 지금 구청으로 가는 길이야.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구청으로 와.”강지한을 마음에서 내려놓은 후 그녀는 강지한과 대화를 하더라도 마음이 평온했다.마치 평범한 낯선 사람을 만
온지유는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난감해졌다.‘강지한이 이렇게 급하게 나와 선을 그은 이유는 무엇일까?’“지한 씨... 나...”온지유는 뭔가 설명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지한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며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님.”“찾았어?”“휴대폰에 차단 기록이 있습니다. 실은 그게... 상대방의 번호를 대표님께서 차단했습니다.”성무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온지유에게 퇴원절차를 해줘.”강지한은 쌀쌀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진성시에서 업무를 보고 있어 휴대폰이 조종당한 걸 몰랐고 그래서 어르신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심미연은 원래 그를 싫어하다 보니 그에게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결국 유일하게 그에게 전화할 수 있었던 어르신의 번호가 차단당했다.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다!“그리고?”“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강지한은 전화를 끊고 손을 뻗어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는 마치 심미연이 우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며칠 동안 혼자 버티느라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담배를 다 피운 후 그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마치자마자 어르신이 전화를 걸어왔다.“강지한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어?”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강준형의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한은 손에 든 담배꽁초를 눌러 끄며 차갑게 말했다.“곧 돌아갈게요.”‘할아버지는 심미연을 제일 좋아하지 않았어? 심미연이 나와 이혼한다는데 말리지 않고 나더러 빨리 구청에 오라고 재촉하다니. 나 참...’강준형은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은 미간을 주무르며 할아버지는 그를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누가 친손자인지 모르겠어.’이때 심미연은 강준형과 함평 집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강준형은 해물 죽을 그녀에게 떠밀었다.“네가 제일 좋아하는 해물 죽이야.
“방금 누가 전화 왔어요?”심미연이 물었다.“지한이 어머니야.”강준형의 말투가 나빠졌다.“저와 지한 씨가 이혼하는 거 어머님은 알아요?”심미연은 문소영이 전에 사람을 시켜 배 속의 아이를 없애려던 것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호감이 있을 수 없었다.이런 여자는 그녀의 어머님이 될 자격이 없다.“알려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알려줄 생각이 없어.”강준형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뭔가 이상해서 물었다.“왜요?”‘강지한의 어머니인데 왜 알려주지 않는 거지?’“지한이가 문소영과 지한이 관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어?”강준형이 되물어보자 심미연은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저었다.강지한이 그녀를 이토록 싫어하는데 어찌 이런 것을 알려 수 있겠는가.“실은 문소영은 지한이 친엄마가 아니야.”강준형은 한숨을 쉬며 심미연의 표정을 살핀 후 머뭇거리며 계속해서 말했다.“지한이 친엄마는 어릴 적에 돌아갔어. 그런 후 지한은 강씨 가문에 돌아왔는데 신분이 특별해서 줄곧 내가 키웠어. 하지만...”강준형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그런 과거에 대해 회억하고 싶지 않았다.“말씀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세요. 저도 꼭 알아야 하는 일이 아니라서요.”아는 것이 많을수록 점점 더 내려놓을 수없어질 것이다. 그녀는 그저 편해지고 싶었다.“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얘기가 길어져서 두세 마디로 다 할 수가 없어! 미연아, 지한이가 이렇게 변한 건 다 내 잘못이야!”강준형은 과거를 회억하기 싫었는데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마음이 괴로웠다.“그럼 말하지 마세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얘기해요.”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숟가락을 들고 죽을 먹었다. 그녀와 강지한은 곧 이혼하니 그에 관한 일은 알 필요가 없었다.“너에게 지한이 과거에 관해 말해야겠어. 만약 걔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다면 넌 지한이 성격이 왜 그렇게 차가운지 알게 될 거고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지도 알게 될 거야.”‘두 사람이 이혼하게 되는데 만약 미연이에게 지한에 관한 일을 알려준
강준형은 기분이 좋아졌다.심지어 문소영이 전화에서 강지한과 이씨 가문 아가씨가 맞선을 본 일을 말했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심미연은 고개를 숙이고 죽을 먹었다. 보아하니 강준형은 그녀와 강지한이 이혼하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은데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 두 사람 사이에 정이 있는 줄 오해라도 한다면... 그녀는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었다.밥을 먹은 후 강준형은 심미연을 차에 태운 한 후 기사더러 구청으로 운전하라고 했다.거절하지 못하고 차에 오르는 심미연을 보고 강준형은 그제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구청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강지한의 전화가 걸려오자 강준형은 이내 받으며 물었다.“넌 언제 도착해!”“심미연더러 전화를 받으라고 하세요!”강지한이 진지하게 말했다.“무슨 말투야!”강준형이 화를 냈다.“중요한 말이 있어요.”강준형은 그제야 전화를 심미연에에 넘겨줬다.“지한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대.”심미연은 머뭇거리다가 휴대폰을 받아들고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할아버지가 이노하이브 1% 주식을 너에게 넘겼어. 지금 절차 밟으러 갈래 아니면 나중에 할래?”지분에 관한 일을 강준형이 전에 말했었지만 강지한은 바쁘다 보니 이 일을 까먹었다. 오늘 이혼하러 가는 길에 심미연과 지난 3년 동안에 있었던 기억을 더듬다가 이 일을 떠올렸다.“할아버지, 저와 강지한 씨가 오늘 이혼하는 거 알면서 왜 이노하이브 주식을 저에게 넘겼어요? 할아버지, 저는 주식이 필요 없어요!”“너에게 주는 건 그냥 가지면 돼. 거절하지 마!”강준형은 화난 척 돌려 말했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이노하이브 주식은 너무 많아요! 전 가질 수 없어요!”강준형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지한이와 이혼하는데 이노하이브 주식은 위자료라고 생각해. 이 주식을 가지면 앞으로 강지한은 너의 일꾼일 뿐이야. 생각만 해도 기쁘지 않아?”심미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심미연이 이 주식을 가졌으면 했다.“하지만...”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강준
심미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남자를 바라봤다. 심지어 이것이 환각일 뿐 이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심미연, 네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나는 출장 중이어서 휴대폰이...”여기까지 말한 강지한은 말을 멈추었다. 지금의 온지유는 그때 그의 어머니를 궁지에 몰아넣고 심지어 어머니를 죽인 그 사람과 정말 비슷했다.‘만약 심지연이 이 일을 알고 온지유를 찾아간다면 어쩌지? 그때가 되면 온지유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그냥 온지유를 보낸 후 다시 얘기하는 게 나을 거야.’그의 말을 반쯤 듣고 나니 심미연은 문득 깨달았다.‘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며칠 동안 휴대폰이 계속 꺼져있었네. 그때 내가 전화하지 않아 다행이야. 아니면 얼마나 어색했겠어.’‘아, 맞다. 그때는 온지유가 낙태되어 슬퍼할 때네. 그렇게 사랑했으니 당연히 그녀 곁에서 돌봐야겠지? 휴대폰을 끄고 모든 외부의 방해가 없어야겠지.’심미연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신경 쓰지 않는다고 알려주기 위해 심미연은 웃으며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 다 이해하니까.”강지한은 눈썹을 찡그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해한다고 하는 거지?’“변호사는 언제 와?”심미연은 그의 언짢아진 표정을 보고 이 화제를 계속하고 싶지 않아 돌려 물었다.변호사가 와야 사인하고 떠나지 않겠는가.이혼하면 이젠 낯선 사람인데 그에게 관련된 일을 알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심미연의 쌀쌀한 태도에 강지한은 당황해서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마침 밖에서 노크가 울려 그는 하려던 말을 되로 삼켰다.“들어와!”문이 열리고 변호사가 서류봉투를 들고 들어오더니 심미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강 대표님, 심 변호사님.”심미연이 경성 변호사 중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그들은 서로 아는 사람이다.인사를 하자마자 강지한의 쌀쌀한 목소리가 들렸다.“사모님이라 불러!”변호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모님!”심미연은 어이가 없었다.‘이 남자는 돌아버렸어? 지금이 언
“사인했으니 이젠 구청으로 가.”심미연은 사인한 문서를 변호사에게 넘겨주며 강지한을 향해 말했다.“심미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강지한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변호사는 서둘러 물건을 챙기고 급히 떠났다.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그가 어찌 감히 들을 수 있겠는가?“난 이미 마음을 굳혔어. 가자.”심미연은 눈앞의 익숙한 이 얼굴을 보면서 마음은 평온했다. 그녀의 마음은 그의 거듭되는 상처와 거짓말 속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어젯밤에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는데 지난 몇 년 동안 자기 자신에게 제일 미안하다고 생각했다.“심미연...”강지한은 또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때 강준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변호사가 그러는데 사인을 마쳤다며? 왜 아직도 안 가? 꾸물거리다간 구청이 퇴근하겠어!”강준형의 기운찬 목소리가 문간에 울려 퍼졌다.강지한은 말문이 막혔다.‘도대체 누구의 할아버지야? 왜 내가 심미연과 이혼하지 않을까 봐 안달이지?’심미연은 몸을 돌려 대문으로 걸어가며 강준형의 팔짱을 끼고 부드럽게 말했다.“지금 가요.”심미연은 그들이 이혼하면 강준형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 이 상태를 보니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오히려 강지한이 이혼하고 싶지 않다고 차일피일 미루며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강준형은 돌아설 때 강지한을 유심히 보았는데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도 이혼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예전 같으면 그도 심미연을 타이르겠지만 강지한이 그렇게 심한 짓을 하고 나서 이런 말들을 할 수 없었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에야 강지한이 급히 달려오자 심미연은 손으로 문을 막았다.강지한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들어왔다.강준형이 그를 노려보며 구석으로 밀어붙였는데 분명히 꼴도 보기 싫다는 태도였다.강지한의 눈길은 심미연을 향했다.심미연도 그를 바라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강준형을 향해 방긋 웃으며 부드럽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
심미연은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나오기 전에 꽤나 공을 들여 꾸미고 온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 위엔 파운데이션이 지나치게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덕지덕지 얹은 듯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 씨가 내가 안에서 고생하는 거 못 본다고... 날 꺼내줬어.” 온지유는 등을 곧게 펴고 얼굴 가득 자부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심미연, 지한 씨랑 재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들은 박시훈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강지한이 직접 저 여자를 꺼냈다고?’ 그는 불과 얼마 전, 온지유가 출고했다는 사실을 강지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결국 바보는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심미연의 눈동자가 조용히 온지유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건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곡선. “그래?” 낮고 담담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속을 들키지 않는 말투였다. 온지유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미연은 문득 의심했다. ‘혹시... 강지한이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사실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용히 찌릿하고 아려왔다. 그녀는 과거, 온지유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 여자가 평생 거기서 썩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4년. 너무도 빠른 재등장이었다. ‘강지한... 온지유한테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네.’심미연의 눈빛에 눌린 온지유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덮쳐왔고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그럼.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의 말은 당당했지만 박시훈이 보내는 미묘한 시선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혹시... 이 남자, 뭐라도 눈치 챈 건 아니겠지?’‘아냐. 아닐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말자.’하지만 박시훈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몰래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
‘왜? 심미연을 보호하려고?’박시훈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다가온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 미연 씨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고백했다가 차였고요.”심미연에게 거절당한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지유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 지한 씨 친구라면서요? 심미연이 지한 씨한테 몇 번이나 안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고 시선엔 뚜렷한 분노가 일렁였다. ‘심미연이 뭐라고... 도대체 왜 다들 심미연만 좋아하는데?’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심미연이 있는 자리는 늘 그녀가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마치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양. 온지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이랑 미연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박시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미연 씨를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심미연에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미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온지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모르게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심미연 같은 중고품이 이렇게 인기 많다고?’‘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딩.”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심미연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청아했고 단아했다. 말없이 걸어 나오는 짧은 그 순간마저 도도하게 빛나는 존재감으로 공간을 압도했다. 그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품, 고요하지만 단단한 아우라. 심미연이라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박시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듯 조심스
강지한의 목소리는 다소 불쾌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어조가 단호하고 차가웠다.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시훈은 더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온지유가 지금 은성 빌딩 로비로 들어갔어.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싸움이라도 날까 봐... 너 빨리 와봐.”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급하게 말하다 목이 막힌 박시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너 먼저 막고 있어. 나 바로 갈게.” 강지한의 목소리엔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박시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여전히 똑같네. 참 미련한 놈이지.’ 하지만 그가 온지유를 막으라고 했으니 일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정말로 위층까지 올라가서 둘이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박시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안 그러면 강지한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온지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박시훈이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절 아세요?” 온지유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를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이랑 아는 사이면 당신도 알죠.”박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얄밉고 교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강지한이 눈이 정말 많이 멀었지. 저런 여잘 좋다고...’“지한 씨 친구라고요? 근데 전 왜 처음 보죠?” 온지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지한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익숙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지금 알면 됐죠. 그리고 지한이가 방금 전화했어요. 당신한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