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가문의 둘째 부인은 남편을 재빠르게 흘겨보며 눈치를 주었다.“아버님이 전화하라면 그냥 하라고 해요!”강준형은 이미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반항했다가는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둘째 부인은 셋째 부인을 향해 손짓하며 심미연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셋째 부인이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다가 실수로 구겨진 휴지까지 함께 끌어내고 말았다.휴지가 풀리면서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흰 약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셋째 부인은 순간 얼굴이 새파래지며 황급히 사과했다.“아버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전화부터 걸고 약은 바로 치우겠습니다!”그녀는 급히 신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준형은 바닥에 떨어진 약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차갑게 강지한을 향해 물었다.“미연이 어디 아픈 거냐?”강지한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몰라요...”그의 대답은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강준형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넌 미연이의 남편이란 놈이면서, 아내의 상태를 전혀 모른단 말이냐? 강지한, 너 이혼할 준비가 다 된 거야?”강준형은 원래 두 사람이 계속 함께하길 바랐다. 그러나 오늘의 일을 겪으며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미연이 같은 예쁘고 착한 아이가 이런 결혼 생활 속에서 점점 망가지는 걸 더는 지켜볼 수 없어...’강지한은 대답하지 못했다.강준형의 말은 뼈아프게 와닿았고 심미연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예전에는 그녀가 집에 돌아오면 사건 이야기나 의뢰인들에 대해 종종 얘기하곤 했다.그러나 그는 늘 짜증스럽게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대화가 줄어들면서 그녀의 얼굴에서 기쁨이나 슬픔도 점차 사라졌고, 그는 그 변화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그저 일이 많고 항상 바빴기에, 집에서는 머리를 비우고 싶다는 이유로 그녀의 존재를 외면했을 뿐이었다.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관심했는
늙은이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빠르게 통증이 밀려왔고 순간 이 복수는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되었다.문소영은 온지유가 차에 앉자마자 담담하게 시동을 걸고 대문 쪽을 향해 운전하다가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지유야,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 봐. 지금 네 뱃속의 아이 아빠가 대체 누구야?”순간 깜짝 놀란 온지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했다.“제가 지성 씨 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설마 지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그녀의 대답에 문소영이 백미러로 보이는 온지유에게 차갑게 답했다.“지금 그 대답이 사실이어야 할 거야!”만약 저게 거짓말이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순간 온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속으로는 강지한이 먼저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와 결혼해야만 문소영뿐만 아니라 강준형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어르신은 지금 화가 단단히 난 상태니까 넌 잠시 병원에 있어. 어차피 이노하이브 산하라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나중에 어르신께서 화가 다 풀리면 다시 가서 말해 보고 허락받으면 내가 집에 데리고 갈게.”사실 문소영도 온지유가 썩 달갑지 않았지만 지금 뱃속에 자기 친손주를 품고 있기 때문에 따지더라도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어머니, 지한 씨가 제 명의로 집 한 채 마련해주겠다고 해서 이제 거기서 지내려고요. 어머니도 괜찮으시면 그 집에서 저랑 같이 살아요!”온지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구슬렸다.강지한이랑 결혼하기만 하면 문소영쯤이야 쉽게 구슬릴 수 있었다.“지한이가 사준 집에서 굳이 살겠다면 나도 말릴 생각 없어. 그리고 도우미도 두어 분 보내줄게. 난 지금 사는 집이 익숙해서 갈 필요 없을 것 같아.”문소영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었다.“어머니, 이 일은 제가 꼭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한 일인데요.”온지유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문소영의 반응을 살폈다.“무슨 일?”“제가 듣기로는 지금 심미연도 임신했다던데
그 모습을 본 강지한이 냉큼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중심을 잃고 금방에라도 넘어질 것 같은 느낌에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는데 무의식중에 의자를 잡으려다가 그만 강지한의 손을 잡게 되었다.순간 잠깐 멈칫하다가 그녀는 재빨리 다시 똑바로 앉았다.깜짝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지현정은 심미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사과했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혹시나 심미연이 화를 낼까 봐 매우 긴장한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렸다.심미연은 강지한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다정하게 답했다.“덕분에 살았는데 오히려 제가 고맙다고 해야죠. 감사합니다!”강씨 가문에서 지현정은 그 누구든 모두 살갑게 대해야 했다.또한 강형준이 심미연을 매우 아낀다는 사실을 지현정도 알고 있어서 더욱 함부로 대하지 못하기에 연신 손을 저으며 답했다.“별말씀을요.”심미연은 한눈에 봐도 부자연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진지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말했다.“제 생일에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로 식사 자리는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맙고 또 미안합니다!”말을 마친 뒤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 신하린 쪽으로 걸어갔다.사실 심미연은 진작에 강지한이 지금 매우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오늘 일로 강지한에 대해 철저히 단념하게 되었다.또한 하루빨리 외할머니를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거나 병이 빨리 낫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만 이 지긋지긋한 경성을 떠나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신하린이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미연아, 괜찮아?”심미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괜찮아. 빨리 나가자.”그렇게 두 사람은 자리를 떴고 이진영도 강지한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떠나가
그저 혼자 평생 지내려고 했지, 심미연이랑 결혼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강준형이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난 미연이랑 십여 년 동안 알고 지냈고 또 내 목숨도 살려줬던 애야. 그래서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아주 잘 알아. 또한 너랑 함께 지낸 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내 앞에서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너에 대한 나쁜 말도 한 적이 없어!”강지한은 그의 말에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심미연이 그 일에 대해 고자질한 게 아니면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고 계시지?’‘설마 일부러 떠본 건 아닐 텐데?’“미연이가 나한테 일러바쳤다고 생각하지? 미르 파크에 우리 쪽 사람들이 있어서 너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내 귀에 흘러들어오게 되어있어. 그래서 저번에 미연이한테 혹시 이혼할 생각이냐고 물었는데 똑바로 대답해 주지 않더라. 그때 난 이미 그 애가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어.”강준형은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자꾸 그가 심미연을 억지로 불구덩이에 떠민 바람에 그녀가 지금처럼 불행하게 지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강지한은 강준형의 엄숙한 얼굴을 보고 그제야 그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걸 알아챘다.지금까지 줄곧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했던 심미연이 그저 온지유한테 질투심을 느껴 일부러 쇼한다고만 생각했다.하여 그녀의 이혼 제안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하지만 방금 강준형의 말을 들어보니 심미연은 진심으로 그와 이혼하고 싶어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돈이 부족한 사람이라 분명 이혼하게 되면 빈털터리로 집에서 나오게 되고 또한 외할머니는 더 이상 치료를 못 받게 되어 죽는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텐데 이 모든 걸 다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예전에 네가 미연이를 살갑게 대하지 않는 원인이 그저 억지로 결혼시킨 게 억울해서 일부러 심술부린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네. 네가 진짜 사랑하는 여자는 온지유란걸.”강준형은 너무 어이없는 나머
강지한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지면서 그에게 되물었다.“할아버지, 무슨 뜻이에요?”‘심미연과의 이혼?’그가 어떻게 심미연과 이혼한다는 말인가?더구나 온지유와 그런 사이도 아니기에 그녀와의 결혼도 더더욱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강준형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먼저 내 물음에 대답해!”지난번에 심미연에게도 똑같은 물음을 물었는데 그녀는 강지한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답했다.하지만 오늘 강지한의 행동은 누가 봐도 선을 넘었고 이에 따라 심미연이 혹시나 이혼하는 걸로 마음을 굳힌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단 한 번도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그런 비겁한 짓은 절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더구나 유일하게 잠자리에서 흥미를 돋게 하는 사람이 바로 심미연인데 혹시나 이혼하게 되면 혼자 해결해야 한다.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면 분명 심적으로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아무튼 절대 이혼은 말도 안 돼!’“하지만 너랑 온지유는 이미 형수와 시동생 사이를 넘어선 관계가 되었어. 또한 오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미연이를 구박한 행동은 누가 봐도 그 애한테 큰 상처였을 거야. 네가 이혼하기 싫다고 해도 미연이는 이미 마음을 굳혔을 거라고! 그 애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사실 강준형은 그가 이혼하기 싫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안심되었다.구제 불능한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미연이가 다시는 이혼에 대해 말도 못 꺼내고 제 옆에 꼭 붙어 있게 할 방법이 있으니까요.”어쨌든 지금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자기 의료팀에서 치료받고 있기에 강지한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자기 앞에서 절대 이혼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그렇다면 한 번 더 믿어볼게. 그러나 오늘 미연이가 받은 수모를 보상해 주기 위해 난 이노하이브 주식 1%를 그 애한테 주기로 마음먹었어. 그리고 이 일은 네가 직접 처리해. 지난번처럼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무조건 넘겨. 안 그러면 내
기절한 척하느라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잊어버렸다.“미연아, 할아버지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넌 좀 어때? 병원에 가 봤어? 의사가 뭐래?”강준형은 혹시나 수화기 너머의 심미연이 놀랄까 한껏 다정하게 물었다.“병원 갈 정도는 아니라 저도 괜찮아요. 가봤자 괜히 돈만 낭비해요.”심미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돈으로 차라리 할아버지께 맛있는 음식 사드릴게요.”그 말에 강준형도 활짝 웃었다.“착하다.” 심미연은 언제나 심성이 착한 아이였고 그의 앞에서는 항상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할아버지, 오늘 제 생일상을 마련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비록 마무리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꼭 하고 싶었어요.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 꼭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약 강지한과 온지유만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오붓한 생일잔치를 아마 평생 기억했을 것이다.하지만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것 때문에 확실히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았다. 또한 이번이 아마 강씨 가문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일일 것이다.“오늘 밤의 일로 내가 지한이를 호되게 혼내줬는데 많이 다쳤어. 그러니까 네가 옆에서 잘 돌봐줘. 혹시나 열이라도 나면 주치의 부르고.”강준형의 목적이 바로 오늘 밤 심미연과 강지한이 함께 있는 것이다.아직은 부부인데 떨어져 지내면 마음도 자연히 멀어진다고 생각했다.심미연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답했다.“알겠습니다.”강준형이 오늘 강지한을 혼낸 건 심미연을 대신해서 화를 내준 것과 동시에 그녀가 얌전히 집에 돌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아니면 강준형도 이렇게까지 티 나게 귀띔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미연아, 나도 지한이가 너를 많이 힘들게 하고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난 여전히 네가 우리 지한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강준형은 말하면서도 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강지한이 오늘 심미연을 어떻게 대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를 용서하라고 요구하는 자신이 너
하루빨리 강지한과 이혼할 수 있기를.하루빨리 뱃속의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 그녀와 만날 수 있기를.소원을 빌고 촛불을 불었다.신하린은 초들을 모두 뽑아 휴지통에 버린 뒤 심미연에게 포크를 건네며 말했다.“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런지 이런 미니 컵케이크 밖에 남지 않았더라고. 아쉽지만 이거라도 맛있게 먹자.”심미연은 한 숟갈을 떠서 신하린의 입가에 가져갔다.“첫입은 네가 먹어.”신하린은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한껏 기대에 찬 심미연의 눈빛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받아먹었다.“물이 끓으면 내가 잔치 국수도 말아줄게. 케이크 다 먹고 국수 먹으면 되겠다.”말을 마친 뒤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갔다.심미연은 급히 자리를 뜨는 신하린과 또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아끼는 사람은 외할머니 외에 신하린 밖에 없는 듯했다.얼마 후, 신하린이 국수가 다 되었다고 그녀를 불렀다.심미연이 허겁지겁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은 뒤 주방에 와 보니 테이블에 국수 두 그릇이 올려져 있었다.계란 고명까지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있는 국수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간지럽히더니 단번에 없던 식욕을 자극했다.심미연은 냉큼 자리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와, 맛있는 냄새!”신하린은 그녀의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건넸다.“뜨거울 때 먹어. 아니면 국수라서 다 불어.”심미연은 신하린을 꼭 안아주며 감격스레 말했다.“하린아, 진짜 잘 먹을게!”“겨우 국수 한 그릇에 이 정도로 감동한다고? 나중에 비싼 음식 사줬다가는 아주 울고불고 난리 나겠는데?”그러자 심미연이 다시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비싼 음식보다 난 이 국수가 더 좋아.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랑은 비교가 안 되지!”“알겠어. 다음에는 내가 더 비싸고 정성스러운 요리를 준비할 테니까 빨리 먹어.”신하린은 말을 마친 뒤 재빨리 면을 입에 넣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그리고 화면에 뜨는 이름을 보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의사가 뭐래? 쌍둥이니까 특별히 뭘 더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신하린은 술잔을 내려놓고 심미연의 배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다시 봐도 여기에 두 명의 아이가 들어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는데 하루빨리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바랐다.“안정기가 아니라서 남편이랑 잠자리는 갖지 말라고 했어.”강지한과 같이 살게 되면 분명 매일 저녁 하자고 덤빌 텐데 그녀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어려웠다.또한 강지한은 이 일에 대해서 순순히 물러서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이대로 돌아가면 네 침대로 기어들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 거절하면서 뭐라고 핑계 댈 건데?”신하린이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아니면 우리 집에 와서 있을래? 집이 이렇게 넓은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그러나 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신하린과 이진영 사이를 고려해 봤을 때 그가 분명 자주 이 집에 드나들 것 같았다.지금은 신하린이 아무리 혼자 산다고 해도 두 사람이 분위기를 내고 싶은 눈치면 또 자리를 피해줘야 하기에 오히려 심미연의 입장에서는 더 불편할 것 같았다.“내일 우리 사무실로 가겠다며? 우리 집에 있으면 내일 아침 같이 출근하면 되잖아!”신하린은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일단은 네 사무실로 출근은 하겠지만 나중에 다시 리우로 돌아가야지. 난 무조건 우리 스승님을 모함했던 사람을 찾아내서 판결을 뒤집을 거야.”심미연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윤미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스승인 진운혁의 투신 사건에 대한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는데 무조건 법률 사무소에 계속 붙어 있어야만 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무슨 뜻인지 알아. 하지만 넌 지금 홑몸도 아닌데 변호사는 하루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잖아. 네 몸이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어서 그래!”“남들도 다 출산 예정일 직전까지 일하다가 휴가 내잖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 아기들은 너무 착해서 날 힘들게
온지유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순간 마음 한편에서 감동이 살짝 밀려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만약 그녀가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육현성이 이런 말을 한 순간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 온지유의 침묵은 육현성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었고 어쩌면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자신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국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현성 오빠, 저는...” 온지유는 육현성이 괴로워하는 것을 느꼈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알아요. 지유 씨,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요.” 결과를 알게 된 육현성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앞으로 자주 만날 수는 없을 거예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당연히 그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현성 오빠, 나랑 이제 아예 연락고 안 해줄 건가요?” “지유 씨, 미안해요. 그냥 내가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요즘 육씨 가문이 엉망진창이라 육현성도 정신없이 바빴기에 온지유를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온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며 갑자기 눈가가 붉어졌고 이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알겠어요!” 그녀는 육현성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육현성이 떠나자마자 강지한이 도착했다. 온지유의 붉어진 눈을 보고 또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울었다고 생각했다. “유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눈에 안 좋다고 울지 말랬잖아.” 강지한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달래야 했다. 온지유는 육현성의 다정함이 떠오르며 울음을 참지 못하고 더 크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고 강씨 가문의 저택에서. 심미연은 단정한 원피스를
‘차라리 돌아와서 직접 아는 게 낫겠어.’ “성 비서,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강지한의 목소리가 예리해졌다. 성무진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알게 된 사실을 모두 전했다. 강지한의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잠시 멈칫했다. 그날 전화로 심미연에게 온지유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그녀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었지만 그때 그는 뭐라고 말했지? 그는 심미연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심미연은 전화하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녀가 사과하고 싶지 않아서 그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큰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마 슬픔에 잠겨 있었겠지.’‘그래서 내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대표님.” 성무진은 전화기 속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부르며 물었다. “알았어. 그럼 여기까지 하자.” 강지한은 전화를 끊고 창밖의 차들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서 외할머니의 영정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그는 남편이었지만 아무것도 몰랐으며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그때 할아버지의 전화를 다시 떠올리니 아마 할아버지도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화가 너무 나서 전화를 끊어버렸던 거다. ‘할아버지는 나한테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강지한은 창가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 온지유의 전화가 다시 울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또 무슨 일이야?”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한 씨, 나 무서워.”온지유는 반쯤 진심이고 반쯤 아닌 듯 말하였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강지한은 신속하게 응답했다. “지한 씨, 내가 일 방해한 건 아니야?” 온지유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하던 강지한은 결국 그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전화기에서 울려 퍼지는 건 차가운 신호음뿐이었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바쁜 신호음만이 들려왔다. 강지한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심미연이라는 여자는 진짜 단 한 번도 그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잘못한 것도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다니. 그녀가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면 그 역시 그녀를 찾을 필요 없이 돌아가서 처리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강지한은 화면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 여자가 또 할아버지에게 고자질이라도 한 건가?’ ‘이젠 할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그를 혼내려는 걸까?’ 지난번에 매를 맞은 뒤로 최근 너무 바빠서 상처도 신경 못 썼더니 이제 염증이 나서 며칠째 고통스러웠다. 한참 후 강지한은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강지한! 너 요즘 어디에 가 있었냐? 왜 전화는 한 번도 받지 않는 거냐?”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는 듯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저 요즘 진성에 출장 갔었어요. 핸드폰을 계속 켜놓고 있었는데 왜 안 받았겠어요?” 강지한은 늘 그렇듯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는 정말로 전화를 꺼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쪽에 계속 있어! 평생 돌아오지 마!” 강준형은 화가 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출장을 갔을 뿐인데 전화가 계속 안 된다니. 그게 단순한 우연일까?강지한처럼 예리한 사람이 왜 이 정도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강지한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생각하고 있을 때 온지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그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지한 씨, 지금 어디야? 나 혼자 병실에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와서 좀 같이 있어 줄래?” 온지유의 목소리엔 떨림이 섞여 있었고 그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알았어. 금
“그럼 어머니가 계획한 대로 하세요.” 이진영은 어머니와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의 모든 결정은 이씨 가문을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그들은 이씨 가문의 명예를 누렸으니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할 수 없었던 일이니까. “넌 먼저 한유나 씨와 연락하고 다시 전화해 줘. 저녁 식사는 취소할게.” “알았어요!” 이진영은 전화를 끊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 연기 속에는 그 여자의 눈부시고 매혹적인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담배 한 개비를 마저 피우고 나자 여자의 얼굴도 사라졌다. 그는 살짝 웃으며 비서에게 한유나의 번호를 찾게 한 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전화기에서 여자의 자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당신의 소개팅 상대 이진영이에요.” “무슨 일이죠?”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냉담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태도지?’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별일 없으면 그냥 끊을게요. 바빠요.” “소개팅 상대로 만나려면 점심에 얼굴 한 번 봐야죠. 어디죠? 데리러 갈게요.” 이진영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연구소로 와요.” 그녀는 빠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생각했다. ‘역시 대가문의 따님답게 감히 나를 명령하네.’ “제가 일이 있어서 그럼 이만.” 그녀는 말을 끝내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바쁜 신호음이 들려오자 이진영은 코웃음을 치며 미소를 흘렸다. ‘잘난 척은 끝내주네.’ 그때 강지한의 전화가 걸려 왔고 이진영은 잠시 응급실에 있는 심미연을 떠올리며 망설인 뒤 전화를 받았다. “구도심 사람들 다 동의했어. 지금 와서 계약서에 사인해.” 강지한은 매우 지친 목소리였다. “내일은 안 돼?”그는 오늘 일정이 꽉 찬 상태였다. “오늘 밤에는 경성으로 돌아가야 해!” 강지한은 무의식
이진영은 신하린의 얼굴이 금세 빨개지는 것을 보고 살짝 눈을 좁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신하린,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 여자가 혹시 자기가 여기서 뭔가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이 병원이 자기가 소유하는 곳이라 해도 그런 식으로 무모하게 행동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하는 건 비밀스러움이 주는 그 자극적인 느낌이 있어 확실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오늘 밤 당신 집에 가야 되나요? 아니면 우리 집으로 올래요?” 신하린은 이제 거짓말도 입을 열자마자 술술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사실 남자도 그녀가 진심을 말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진짜 속마음을 말하면 상처가 될 테니까. “내가 네 집 하나 샀어. 일이 끝나면 같이 가서 보여줄게.”이진영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내가 사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신하린은 그가 주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에게 뭔가를 받는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뿐이었다. “너 그곳 너무 좁아. 할 때 별로야.” 이진영은 손을 뻗어 신하린을 품으로 끌어안으며 그녀의 매혹적인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서한테 큰 소파랑 넓은 침대로 바꾸라고 했으니까 오늘 밤 한 번 써보자.” 조금 조롱이 섞인 말투였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은근히 기대가 치솟았다. 신하린의 얼굴은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남자가 정말 끝까지!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 하는 거냐고.’ “너 밥 해줄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거기는 부엌도 넓고 기계도 다 새것으로 준비됐어...” 마지막 말은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이듯 말했고 신하린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었고 귀까지 붉어졌다. ‘이 남자는 정말 너무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고 신하린을 잠시나마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이진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며 번호를 확인
신하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박유진에게 말했다. “잠깐 다녀올게요. 먼저 여기서 미연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진영은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더 기다리게 하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박유진은 그저 응답했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신하린은 그를 그윽하게 한 번 쳐다보고 그제야 돌아서서 떠났다. 박유진과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가능성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접고 있었다.안전 통로에서 이진영은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연기가 퍼져 나가면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그 속에서 아련하게 비쳤다. 신하린은 문 앞에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참으로 잘생겼다. 그때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며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왜 안 와? 내가 널 잡아먹니?” 신하린은 시선을 떼고 한 발짝씩 그에게 다가갔고 마음속은 불안하고 떨렸다. 남자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신하린은 그의 앞에 다가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연이가 쓰러져서 박유진 씨와 함께 병원에 데려왔어요.” 이진영은 자연스레 그날 밤 강씨 가문에서 봤던 그 여자가 떠올랐다. 정말 독특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분위기 또한 차분하고 목소리는 매우 부드럽고 온화했다. 경성에서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웠음에도 강지한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남자들은 결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미연이의 외할머니가 사흘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혼자서 지키며 사흘을 보냈고 오늘 아침에 외할머니 장례식을 마친 후 쓰러졌어요.” 박유진과 자신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오해받길 원치 않았기에 그녀는 스스로 설명했다. 이진영은 눈을
신하린은 깜짝 놀라 손을 급히 떼었고 다시 돌아섰을 때 남자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최근 며칠 동안 그의 전화를 피했던 신하린은 마음속에서 불안이 밀려왔다. 여기서 이 남자가 자신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도 있는데 말이다. 이진영은 신하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속에서 폭발할 듯한 분노가 일렀다. ‘이렇게 겁을 먹은 정도로 내가 무서운 거야?’ 신하린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곧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급히 그 앞에 다가가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여긴 내 병원이야. 점검하러 왔는데 무슨 문제 있어?” 남자의 말투는 거칠었고 이미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신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에 제가 직접 요리할게요. 함께 와서 먹을래요?” 심미연의 임신 사실이 절대 누설되지 않도록 이진영이 이미 말해둔 상태여서 신하린은 심미연을 이곳으로 데려왔지만 여기서 이진영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예상 밖이었다. “나한테는 수석 셰프가 요리해 주는데 넌 셰프 자격증은 있어? 나한테 밥 해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진영은 차갑게 웃으며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며칠 동안 이 여자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도 답장하지 않았으며 영상통화는 아예 무시했었다. 그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이제 와서 한 끼 식사로 그를 달래려고 한다니 그건 어림도 없었다. “그럼 됐어요!” 신하린은 약간 당황한 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이 남자가 살짝 꼬리를 내리면 풀릴 줄 알았지만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셰프 수준은 아니지만 요리를 꽤 잘하는 그녀였고 남자의 말은 그녀를 정말 난처하게 했다. 박유진은 이진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와 신하린 사이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미연은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다면 알려야 할까?’
그는 그냥 강준형에게 더 이상 강지한의 일을 강제로 강요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강지한 같은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강준형은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미연이가 지난 3년 동안 겪은 그 모든 불공정한 대우는 다 내 잘못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계속 모른 척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그만둘 거야. 미연이가 이혼을 원한다면 그건 그 자식이 감당할 문제야.” 3일 후 양경자의 장례식이 있었다. 하늘에는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심미연은 검은 옷을 입고 우산을 쥔 채 묘비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 보였다. 마치 외할머니가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신하린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3일 동안 심미연은 잠을 2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사실 심미연이 잠을 자지 않은 것보다 이 3일 동안 한 번도 울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지나치게 조용했던 사실이 신하린을 더 두렵게 했다. 신하린은 심미연이 극단적인 생각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이 다가와 신하린과 짧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아, 외할머니는 이제 편히 잠드셨어. 집에 데려다줄게.” 이 3일 동안 그는 심미연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듣지 않았고 그녀가 하루하루 지쳐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외할머니는 편히 안장되었으니 그녀가 잘 수 있도록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랑 하린이는 먼저 가. 난 할머니랑 좀 더 있다가 갈게.” “너 3일 내내 잠도 자지 않았잖아. 더 버티면 몸이 망가져!” 신하린은 목소리가 떨렸고 눈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이 3일 동안 그녀는 심미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신하린은 문 쪽을 바라보다가 은발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강준형을 보고 급히 심미연을 불렀다. “미연아, 네 할아버지 오셨어.”심미연은 잠시 멈칫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준형은 지팡이를 짚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미연아, 이렇게 큰 일이 있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니!” 강준형은 그녀의 너무 지친 모습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정말 바보 같은 애구나.’ ‘어떻게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려고 했을까.’ 심미연은 일어나려 했지만 무릎이 너무 아파 일어설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할아버지, 어떻게 오셨어요?”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강씨 가문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강지한에게 외할머니의 죽음을 이용해 책임을 피하려는 교활한 사람일 테니 그 이미지대로 남기로 했다.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전화는 꺼져 있더라. 걱정돼서 사람을 시켜 확인해 봤더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미연아, 나는 네가 강지한 그 자식에게 마음이 떠난 걸 알아. 그런데 그놈은 그놈이고 나는 나야. 이런 일을 나한테까지 숨기지 말았어야지.”강준형은 빈소를 잠시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 바쁘게 모든 걸 처리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결국 이 모든 게 강지한 그 자식 때문이야!’ 강지한을 생각하니 강준형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심미연도 연락이 안 됐고 강지한도 연락이 안 되었다. 고의로 잠적을 한 건지 뭔 일이라도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면 반드시 그 자식에게 따지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바빳어요. 핸드폰도 꺼져버려서 잊고 있었어요.”심미연의 목소리는 피곤함에 찌든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기사님이 데려다주신 건가요?” 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강준형에게 진짜 생각을 말할 리 없었다. 강준형은 심미연의 눈에 짙게 퍼져 있는 혈관과 창백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내가 사람을 데려왔어. 나머지 일은 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