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뭐래? 쌍둥이니까 특별히 뭘 더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신하린은 술잔을 내려놓고 심미연의 배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다시 봐도 여기에 두 명의 아이가 들어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는데 하루빨리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바랐다.“안정기가 아니라서 남편이랑 잠자리는 갖지 말라고 했어.”강지한과 같이 살게 되면 분명 매일 저녁 하자고 덤빌 텐데 그녀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어려웠다.또한 강지한은 이 일에 대해서 순순히 물러서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이대로 돌아가면 네 침대로 기어들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 거절하면서 뭐라고 핑계 댈 건데?”신하린이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아니면 우리 집에 와서 있을래? 집이 이렇게 넓은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그러나 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신하린과 이진영 사이를 고려해 봤을 때 그가 분명 자주 이 집에 드나들 것 같았다.지금은 신하린이 아무리 혼자 산다고 해도 두 사람이 분위기를 내고 싶은 눈치면 또 자리를 피해줘야 하기에 오히려 심미연의 입장에서는 더 불편할 것 같았다.“내일 우리 사무실로 가겠다며? 우리 집에 있으면 내일 아침 같이 출근하면 되잖아!”신하린은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일단은 네 사무실로 출근은 하겠지만 나중에 다시 리우로 돌아가야지. 난 무조건 우리 스승님을 모함했던 사람을 찾아내서 판결을 뒤집을 거야.”심미연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윤미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스승인 진운혁의 투신 사건에 대한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는데 무조건 법률 사무소에 계속 붙어 있어야만 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무슨 뜻인지 알아. 하지만 넌 지금 홑몸도 아닌데 변호사는 하루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잖아. 네 몸이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어서 그래!”“남들도 다 출산 예정일 직전까지 일하다가 휴가 내잖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 아기들은 너무 착해서 날 힘들게
그리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네. 지금 당장 갈게요!”무슨 일인지 물어보기도 두려웠다.신하린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심미연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미연아, 무슨 일이야?”심미연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몸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그리고 이상하게 자꾸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외할머니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미연아, 대답해 줘. 나 놀라게 하지 말고!”신하린은 가볍게 그녀의 얼굴을 잡고 한껏 높은 소리로 물었다.그제야 정신이 살짝 돌아온 심미연이 그녀에게 답했다.“외할머니가 지금 응급실로 실려 갔대서 빨리 가봐야겠어.”“같이 가자.”신하린은 설거지하려던 고무장갑을 내팽개치고 메슥거리는 속도 애써 참으며 심미연과 같이 출발했다.그리고 저녁에 술을 마셨기에 어쩔 수 없이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차에 오른 뒤 심미연은 여전히 몸을 잘게 떨며 신하린의 어깨에 기댔다.신하린은 한껏 기운 없는 모습으로 가만히 누워있는 그녀가 너무 가슴이 아팠다.“미연아, 외할머니는 별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심미연한테는 외할머니의 존재가 가장 소중한데 혹시나 그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예감이 안 좋아. 외할머니가 진짜로...”심미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또다시 몸을 잘게 떨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할머니가 얼마나 선한 분이신데 이대로 너만 두고 가시진 않을 거야.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신하린은 애써 담담하게 그녀를 다독였지만 솔직히 방금 심미연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도 똑같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가끔은 사람의 육감은 정말 정확히 들어맞을 때 있다.게다가 지금 심미연이 가장 신경 쓰고 걱정하는 사람이 외할머니라 무조건 그녀한테 아무런 일도 없기를 바라야 했다.아니면 심미연의 성격으로는 절대로 혼자 감당해 내기 어려울 것이다.심미연은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슬픔을 참았다....이때, 인하 병원의 V
“오늘은 일단 돌아가. 내가 내일 다시 전화할 테니까!”온지유는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참고 그녀에게 말했다.“큰 사모님, 제발 조금이라도 먼저 빌려주세요. 빈손으로 돌아가면 그 사람들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눈치 빠른 추가영은 진작에 그녀가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또한 그녀의 말대로 지금 집에 돌아가면 돈은 고사하고 바로 죽임을 당할 게 뻔해 보였다.하여 작은 액수라도 빌려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나도 지금 돈이 없어!”그러나 온지유는 추가영에게 단돈 백 원도 주기 싫었다.“큰 사모님은 제가 밖에서 이 일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댈지 걱정도 안 되시나 봅니다? 그때 가서 인터넷에 온통 사모님의 가십거리로 도배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추가영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방법을 꺼냈고 오늘 돈을 받지 못하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온지유가 아무리 무서워도 사채업자들은 진짜 사람을 때려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아니면 오늘 이 자리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온지유가 깊은 한숨을 들이쉬더니 핸드폰을 꺼냈다.“먼저 3천만 원 보낼게. 이래도 만약 그 거래 증거들을 인터넷에 떠벌렸다간 그때는 진짜 생매장당할 줄 알아!”비록 요구했던 1억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3천만 원이라도 일단 가져가야 했다.송금해 준 뒤 당장 꺼지라고 호통치는 온지유의 성화에 추가영은 허겁지겁 자리를 빠져나왔다.문소영이 두 달 후에 양수로 DNA 검사를 한다고 했다. 어차피 아이의 아빠가 강지한이고 강지성과는 이복형제이기에 어쩌면 유전자 검사 결과에서 어느 정도는 강지성과 혈연관계가 있는 걸로 나오리라 생각했다.하지만 방금 저 빌어먹을 여자가 그게 자기 아들의 정액이었다고 실토한 바람에 모든 계획이 다 수포로 되었다.사실 온지유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저 여자의 말에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다.강지한처럼 똑 부러진 사람이 일 처리를 그렇게 소홀히 했을 리가 없다.이게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심미연은 진작에 시험관 임신을 시도했을
온지유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내가 알기로는 외할머니께서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계셨다던데 그만하면 돌아가실 때도 됐지.솔직히 너도 지긋지긋했잖아? 오히려 나중에 내가 고맙다고 느껴질걸?”심미연 앞에서 온지유는 단 한 번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 감추는 법이 없었다.아무리 강지한에게 고자질한다고 해도 절대 그가 심미연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무서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심미연이 뻔뻔스럽게 말하는 온지유를 한껏 살기가 돋친 눈빛으로 쏘아보며 물었다.“온지유,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양경자가 응급실에 실려 간 뒤 심미연은 몇 번이고 의사한테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이제 진짜로 외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다가 왜 갑자기 응급실까지 실려 오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웠던 찰나에 문득 화장실에서 두 간호사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웬 여자가 와서 양경자에게 온갖 악독한 말을 퍼붓고 갔는데 얼마 가지 않아 쓰러져서 바로 응급실로 실려 왔다고 했다.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 온지유밖에 없었다.분명 본가에서 맞은 일이 심미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복수심에 양경자를 찾아간 것이다.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경자가 듣자마자 응급실에 실려 온 걸 보면 과장해서 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강지한과의 사이에 대해 말했겠지!’심미연은 너무 화가 나 그쪽은 일단 신하린에게 맡기고 재빨리 온지유를 찾아왔다.온지유는 불같이 화내는 심미연을 보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거의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계속 병원에 그렇게 누워있는 것도 매달 돈이 엄청 들잖아. 그 돈을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돈이 없으면 또 지한 씨한테 손을 벌리겠지. 그런데 어차피 이제 두 사람은 이혼할 사이이고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갈 텐데 내가 미리 지한 씨 돈을 절약해 주는 게 뭐가 문제야?”온지유는 마치 강지한과 금방에라도 부부가 될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도 심미연을
심미연이 지금 당장 온지유를 죽이게 되면 살인죄를 면치 못한다.하여 외할머니를 먼저 잘 보내드린 뒤에 다시 온지유에게 따지리라 마음먹었다.온지유는 그러다가 문득 심미연의 배를 보게 되었는데 여느 임산부처럼 배가 불러오지 않고 여전히 납작한 걸 발견했다.사람을 시켜서 몰래 확인해 보니 심미연은 이씨 가문 근처의 병원에서 검사받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임신 기간이 딱 한 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그 당시 온지유가 막 임신했을 때 입덧이 너무 심해 강지한은 거의 매일 그녀를 늦게까지 돌봐주다가 집에 돌아가곤 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가지고 임신까지 했다니!강지한은 분명 자기 입으로 심미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버릇처럼 말했으니 남자 쪽이 적극적으로 덤빌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그렇다면 저 불여우가 먼저 강지한을 꼬셨다는 건데!’두 사람이 침대에서 자기 몰래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온지유는 질투 나 미칠 것 같았다.요 몇 년 동안 그는 강지한에게 수없이 대놓고 들이댔고 심지어는 알몸 상태로 덤벼들기까지 했지만 강지한은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처음에는 강지성이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 게 께름칙하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고 혹시나 또 그녀가 내연녀로 몰려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받을까 봐 심미연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한 뒤에 다시 그녀에게 마음을 열 것으로 생각했다.심미연을 그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잠자리도 갖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예상을 깨고 그녀가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또한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아직 강지한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오늘에 그녀를 유산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 같았다.‘무언가 찔리는 게 있으니까 강지한에게 알려주지 못했겠지!’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온지유는 눈빛이 순간 돌변하더니 단번에 심미연의 배를 향해 발길질했다.하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을 진작에 눈치챘던 심미연은 재빨리 피했고 온지유는 그대로 침대에 부딪힌 뒤 바닥에 넘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심
신하린은 심미연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파 재빨리 가서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미연아...”뭐라고 위로해 주고 싶지만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자기 자신도 이 정도로 슬픈데 심미연은 얼마나 괴로울까 싶었고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전혀 위로되지 않을 것 같았다.이때, 의사가 난감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죄송하지만 외할머니를 빨리 영안실로 안치해야 합니다.”그는 직업상 여태껏 많은 유가족을 봐 왔는데 심미연처럼 슬퍼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덤덤한 사람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가 너무 슬프게 우는 걸 보니 유난히 마음이 괴로웠다.하여 시간을 조금 더 주고 싶었는데 규정이 규정인지라 어쩔 수 없이 빨리 데려가야 했다.심미연은 양경자를 더 자세히 보려고 눈물을 살살 닦고 조심스레 그녀의 눈을 감아주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외할머니, 이제 편히 자요. 이 원수는 제가 대신 꼭 갚을 테니까.”양경자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돌아간 걸 보면 분명 뭔가 억울한 일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왜 하필 외손녀라는 사람이 바보같이 남자한테 빠져 외할머니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따위 대우나 받으면서까지 남자 곁에 있고 싶었을까?’어쩌면 여태껏 키워준 손녀가 그런 수모를 당했는데도 반격조차 못 하는 모습에 억울해서 눈을 감지도 못했던 건 아닐까 싶었다.하지만 어떻게 생각했든 온지유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기에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신하린은 심미연의 곁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다가 문득 예전의 자기 자신이 떠올랐다.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런 식으로 떠나갔고 죽음의 이별에 대해서도 이미 몇 번 경험해 봤다.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의사도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코가 시큰거렸다.그녀가 슬픔에 젖어 마구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고 지금 얼마나 괴로울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심미연이 빠르게 눈물을 닦고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욱 안쓰러워 보였고 죽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
신하린은 깜짝 놀란 나머지 재빨리 심미연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줬다.“미연아...”대체 누구랑 전화 통화를 하길래 이 정도로 충격받은 얼굴인가 싶었다.“혹시 온지유가 나 때문에 유산되었다고 했어?”심미연은 다시 감정을 추스른 뒤 말을 이었다.“그럼 내가 왜 오늘 그 여자를 만나러 갔는지는 알아?”“왜 만나러 갔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 지유는 수술대에 누워있고 또 뱃속의 아이도 이제 없다는 거야! 심미연, 만약 지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지한의 말투에는 한껏 살기가 서려 있었다.온지유는 병원에 잘 입원해 있었는데 뜬금없이 심미연이 찾아와 질투심에 그녀를 바닥으로 밀치고 배를 발로 찬 바람에 유산되었다고 생각했다.중요한 건 온지유 뱃속의 아이가 강지성의 아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아무리 강준형이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뱃속의 아이가 건강히 태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어쨌든 자기 증손자이자 강지성의 유일한 핏줄이니까.그런 아이가 지금은 없어졌는데 식구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고 주범이 심미연이란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지금 온지유 편을 들어주려고 전화한 거야?”심미연은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자꾸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강지한 씨, 당신 마음속에는 온통 온지유, 그 여자뿐이고 난 아예 없는 거지?”“몇 번을 말해? 나랑 지유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헛소리 작작 해!”강지한은 큰 소리로 호통쳤다.심미연은 매번 잘못할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서 문제점을 찾았고 단 한 번도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반성하지 않았다.지금도 똑같은 반응에 강지한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지유가 우리 외할머니를 죽였어. 벌받아서 유산된 거라고!”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온지유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산되었는지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아무리 결백하다고 증거를 내밀어도 강지한은 믿지 않을 테니까.“지금 네가 한 짓을 인정하기 싫어서 돌아가신 외할머니까지 끌어
심미연이 깨어나 보니 자신은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고 문득 맡게 된 소독수 냄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신하린은 그녀가 깨어난 모습을 보고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미연아, 좀 괜찮아?”그러자 심미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그리고 재빨리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 하자 신하린이 그녀를 말렸다.“좀 더 자.”“마지막으로 외할머니 곁에 있고 싶어. 이제 날이 밝으면 재가 되어 그 작은 항아리에 담길 텐데 다시는 외할머니 얼굴을 볼 수 없잖아.”심미연의 말투는 유난히 차분하게 들렸는데 듣고 있던 신하린은 오히려 그녀가 더욱 걱정되었고 차라리 아까처럼 통곡하고 슬픈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저렇게 자기 감정을 계속 감췄다가는 한 방에 무너져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미연아, 시간도 늦었는데 가지 마. 임산부라 너무 무리하면 안 되잖아.”신하린은 원래 임산부가 영안실에 자주 드나들면 그곳에는 음기가 많아 뱃속의 아이한테 안 좋다고 하려 했지만 차마 솔직하게 말을 뱉을 수 없었다.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심미연을 예뻐해 줬던 사람이 양경자였고 그런 사람이 지금 죽어서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데 어찌 막을 수 있을까.“괜찮아. 잠깐만 보고 올 거야.”심미연이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러자 신하린은 냉큼 그녀에게 외투를 건네주며 말했다.“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입어.”심미연은 옷을 건네받고 나지막하게 답했다.“하린아, 고마워.”다행히 신하린이 곁에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고맙긴!”외할머니가 돌아간 것도 모자라 강지한의 냉정한 태도에 분명 지금 큰 충격일 텐데 자기 앞에서도 애써 괜찮은 척하는 심미연이 너무 안쓰러웠고 그녀가 얼마나 괴로울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지금 갔다가 외할머니 장례가 끝나는 대로 사무실에 갈게.”“사무실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가 괜찮으면 다시 나와.”바보같이 이 와중에 일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심미연은 그렇게 병실 밖으로 나갔고 신하린은 엘리베
온지유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순간 마음 한편에서 감동이 살짝 밀려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만약 그녀가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육현성이 이런 말을 한 순간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 온지유의 침묵은 육현성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었고 어쩌면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자신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국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현성 오빠, 저는...” 온지유는 육현성이 괴로워하는 것을 느꼈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알아요. 지유 씨,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요.” 결과를 알게 된 육현성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앞으로 자주 만날 수는 없을 거예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당연히 그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현성 오빠, 나랑 이제 아예 연락고 안 해줄 건가요?” “지유 씨, 미안해요. 그냥 내가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요즘 육씨 가문이 엉망진창이라 육현성도 정신없이 바빴기에 온지유를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온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며 갑자기 눈가가 붉어졌고 이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알겠어요!” 그녀는 육현성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육현성이 떠나자마자 강지한이 도착했다. 온지유의 붉어진 눈을 보고 또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울었다고 생각했다. “유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눈에 안 좋다고 울지 말랬잖아.” 강지한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달래야 했다. 온지유는 육현성의 다정함이 떠오르며 울음을 참지 못하고 더 크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고 강씨 가문의 저택에서. 심미연은 단정한 원피스를
‘차라리 돌아와서 직접 아는 게 낫겠어.’ “성 비서,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강지한의 목소리가 예리해졌다. 성무진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알게 된 사실을 모두 전했다. 강지한의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잠시 멈칫했다. 그날 전화로 심미연에게 온지유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그녀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었지만 그때 그는 뭐라고 말했지? 그는 심미연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심미연은 전화하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녀가 사과하고 싶지 않아서 그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큰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마 슬픔에 잠겨 있었겠지.’‘그래서 내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대표님.” 성무진은 전화기 속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부르며 물었다. “알았어. 그럼 여기까지 하자.” 강지한은 전화를 끊고 창밖의 차들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서 외할머니의 영정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그는 남편이었지만 아무것도 몰랐으며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그때 할아버지의 전화를 다시 떠올리니 아마 할아버지도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화가 너무 나서 전화를 끊어버렸던 거다. ‘할아버지는 나한테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강지한은 창가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 온지유의 전화가 다시 울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또 무슨 일이야?”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한 씨, 나 무서워.”온지유는 반쯤 진심이고 반쯤 아닌 듯 말하였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강지한은 신속하게 응답했다. “지한 씨, 내가 일 방해한 건 아니야?” 온지유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하던 강지한은 결국 그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전화기에서 울려 퍼지는 건 차가운 신호음뿐이었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바쁜 신호음만이 들려왔다. 강지한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심미연이라는 여자는 진짜 단 한 번도 그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잘못한 것도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다니. 그녀가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면 그 역시 그녀를 찾을 필요 없이 돌아가서 처리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강지한은 화면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 여자가 또 할아버지에게 고자질이라도 한 건가?’ ‘이젠 할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그를 혼내려는 걸까?’ 지난번에 매를 맞은 뒤로 최근 너무 바빠서 상처도 신경 못 썼더니 이제 염증이 나서 며칠째 고통스러웠다. 한참 후 강지한은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강지한! 너 요즘 어디에 가 있었냐? 왜 전화는 한 번도 받지 않는 거냐?”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는 듯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저 요즘 진성에 출장 갔었어요. 핸드폰을 계속 켜놓고 있었는데 왜 안 받았겠어요?” 강지한은 늘 그렇듯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는 정말로 전화를 꺼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쪽에 계속 있어! 평생 돌아오지 마!” 강준형은 화가 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출장을 갔을 뿐인데 전화가 계속 안 된다니. 그게 단순한 우연일까?강지한처럼 예리한 사람이 왜 이 정도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강지한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생각하고 있을 때 온지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그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지한 씨, 지금 어디야? 나 혼자 병실에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와서 좀 같이 있어 줄래?” 온지유의 목소리엔 떨림이 섞여 있었고 그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알았어. 금
“그럼 어머니가 계획한 대로 하세요.” 이진영은 어머니와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의 모든 결정은 이씨 가문을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그들은 이씨 가문의 명예를 누렸으니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할 수 없었던 일이니까. “넌 먼저 한유나 씨와 연락하고 다시 전화해 줘. 저녁 식사는 취소할게.” “알았어요!” 이진영은 전화를 끊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 연기 속에는 그 여자의 눈부시고 매혹적인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담배 한 개비를 마저 피우고 나자 여자의 얼굴도 사라졌다. 그는 살짝 웃으며 비서에게 한유나의 번호를 찾게 한 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전화기에서 여자의 자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당신의 소개팅 상대 이진영이에요.” “무슨 일이죠?”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냉담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태도지?’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별일 없으면 그냥 끊을게요. 바빠요.” “소개팅 상대로 만나려면 점심에 얼굴 한 번 봐야죠. 어디죠? 데리러 갈게요.” 이진영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연구소로 와요.” 그녀는 빠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생각했다. ‘역시 대가문의 따님답게 감히 나를 명령하네.’ “제가 일이 있어서 그럼 이만.” 그녀는 말을 끝내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바쁜 신호음이 들려오자 이진영은 코웃음을 치며 미소를 흘렸다. ‘잘난 척은 끝내주네.’ 그때 강지한의 전화가 걸려 왔고 이진영은 잠시 응급실에 있는 심미연을 떠올리며 망설인 뒤 전화를 받았다. “구도심 사람들 다 동의했어. 지금 와서 계약서에 사인해.” 강지한은 매우 지친 목소리였다. “내일은 안 돼?”그는 오늘 일정이 꽉 찬 상태였다. “오늘 밤에는 경성으로 돌아가야 해!” 강지한은 무의식
이진영은 신하린의 얼굴이 금세 빨개지는 것을 보고 살짝 눈을 좁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신하린,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 여자가 혹시 자기가 여기서 뭔가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이 병원이 자기가 소유하는 곳이라 해도 그런 식으로 무모하게 행동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하는 건 비밀스러움이 주는 그 자극적인 느낌이 있어 확실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오늘 밤 당신 집에 가야 되나요? 아니면 우리 집으로 올래요?” 신하린은 이제 거짓말도 입을 열자마자 술술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사실 남자도 그녀가 진심을 말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진짜 속마음을 말하면 상처가 될 테니까. “내가 네 집 하나 샀어. 일이 끝나면 같이 가서 보여줄게.”이진영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내가 사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신하린은 그가 주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에게 뭔가를 받는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뿐이었다. “너 그곳 너무 좁아. 할 때 별로야.” 이진영은 손을 뻗어 신하린을 품으로 끌어안으며 그녀의 매혹적인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서한테 큰 소파랑 넓은 침대로 바꾸라고 했으니까 오늘 밤 한 번 써보자.” 조금 조롱이 섞인 말투였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은근히 기대가 치솟았다. 신하린의 얼굴은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남자가 정말 끝까지!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 하는 거냐고.’ “너 밥 해줄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거기는 부엌도 넓고 기계도 다 새것으로 준비됐어...” 마지막 말은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이듯 말했고 신하린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었고 귀까지 붉어졌다. ‘이 남자는 정말 너무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고 신하린을 잠시나마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이진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며 번호를 확인
신하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박유진에게 말했다. “잠깐 다녀올게요. 먼저 여기서 미연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진영은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더 기다리게 하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박유진은 그저 응답했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신하린은 그를 그윽하게 한 번 쳐다보고 그제야 돌아서서 떠났다. 박유진과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가능성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접고 있었다.안전 통로에서 이진영은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연기가 퍼져 나가면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그 속에서 아련하게 비쳤다. 신하린은 문 앞에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참으로 잘생겼다. 그때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며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왜 안 와? 내가 널 잡아먹니?” 신하린은 시선을 떼고 한 발짝씩 그에게 다가갔고 마음속은 불안하고 떨렸다. 남자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신하린은 그의 앞에 다가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연이가 쓰러져서 박유진 씨와 함께 병원에 데려왔어요.” 이진영은 자연스레 그날 밤 강씨 가문에서 봤던 그 여자가 떠올랐다. 정말 독특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분위기 또한 차분하고 목소리는 매우 부드럽고 온화했다. 경성에서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웠음에도 강지한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남자들은 결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미연이의 외할머니가 사흘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혼자서 지키며 사흘을 보냈고 오늘 아침에 외할머니 장례식을 마친 후 쓰러졌어요.” 박유진과 자신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오해받길 원치 않았기에 그녀는 스스로 설명했다. 이진영은 눈을
신하린은 깜짝 놀라 손을 급히 떼었고 다시 돌아섰을 때 남자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최근 며칠 동안 그의 전화를 피했던 신하린은 마음속에서 불안이 밀려왔다. 여기서 이 남자가 자신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도 있는데 말이다. 이진영은 신하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속에서 폭발할 듯한 분노가 일렀다. ‘이렇게 겁을 먹은 정도로 내가 무서운 거야?’ 신하린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곧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급히 그 앞에 다가가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여긴 내 병원이야. 점검하러 왔는데 무슨 문제 있어?” 남자의 말투는 거칠었고 이미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신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에 제가 직접 요리할게요. 함께 와서 먹을래요?” 심미연의 임신 사실이 절대 누설되지 않도록 이진영이 이미 말해둔 상태여서 신하린은 심미연을 이곳으로 데려왔지만 여기서 이진영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예상 밖이었다. “나한테는 수석 셰프가 요리해 주는데 넌 셰프 자격증은 있어? 나한테 밥 해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진영은 차갑게 웃으며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며칠 동안 이 여자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도 답장하지 않았으며 영상통화는 아예 무시했었다. 그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이제 와서 한 끼 식사로 그를 달래려고 한다니 그건 어림도 없었다. “그럼 됐어요!” 신하린은 약간 당황한 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이 남자가 살짝 꼬리를 내리면 풀릴 줄 알았지만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셰프 수준은 아니지만 요리를 꽤 잘하는 그녀였고 남자의 말은 그녀를 정말 난처하게 했다. 박유진은 이진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와 신하린 사이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미연은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다면 알려야 할까?’
그는 그냥 강준형에게 더 이상 강지한의 일을 강제로 강요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강지한 같은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강준형은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미연이가 지난 3년 동안 겪은 그 모든 불공정한 대우는 다 내 잘못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계속 모른 척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그만둘 거야. 미연이가 이혼을 원한다면 그건 그 자식이 감당할 문제야.” 3일 후 양경자의 장례식이 있었다. 하늘에는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심미연은 검은 옷을 입고 우산을 쥔 채 묘비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 보였다. 마치 외할머니가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신하린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3일 동안 심미연은 잠을 2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사실 심미연이 잠을 자지 않은 것보다 이 3일 동안 한 번도 울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지나치게 조용했던 사실이 신하린을 더 두렵게 했다. 신하린은 심미연이 극단적인 생각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이 다가와 신하린과 짧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아, 외할머니는 이제 편히 잠드셨어. 집에 데려다줄게.” 이 3일 동안 그는 심미연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듣지 않았고 그녀가 하루하루 지쳐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외할머니는 편히 안장되었으니 그녀가 잘 수 있도록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랑 하린이는 먼저 가. 난 할머니랑 좀 더 있다가 갈게.” “너 3일 내내 잠도 자지 않았잖아. 더 버티면 몸이 망가져!” 신하린은 목소리가 떨렸고 눈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이 3일 동안 그녀는 심미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신하린은 문 쪽을 바라보다가 은발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강준형을 보고 급히 심미연을 불렀다. “미연아, 네 할아버지 오셨어.”심미연은 잠시 멈칫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준형은 지팡이를 짚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미연아, 이렇게 큰 일이 있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니!” 강준형은 그녀의 너무 지친 모습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정말 바보 같은 애구나.’ ‘어떻게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려고 했을까.’ 심미연은 일어나려 했지만 무릎이 너무 아파 일어설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할아버지, 어떻게 오셨어요?”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강씨 가문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강지한에게 외할머니의 죽음을 이용해 책임을 피하려는 교활한 사람일 테니 그 이미지대로 남기로 했다.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전화는 꺼져 있더라. 걱정돼서 사람을 시켜 확인해 봤더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미연아, 나는 네가 강지한 그 자식에게 마음이 떠난 걸 알아. 그런데 그놈은 그놈이고 나는 나야. 이런 일을 나한테까지 숨기지 말았어야지.”강준형은 빈소를 잠시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 바쁘게 모든 걸 처리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결국 이 모든 게 강지한 그 자식 때문이야!’ 강지한을 생각하니 강준형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심미연도 연락이 안 됐고 강지한도 연락이 안 되었다. 고의로 잠적을 한 건지 뭔 일이라도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면 반드시 그 자식에게 따지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바빳어요. 핸드폰도 꺼져버려서 잊고 있었어요.”심미연의 목소리는 피곤함에 찌든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기사님이 데려다주신 건가요?” 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강준형에게 진짜 생각을 말할 리 없었다. 강준형은 심미연의 눈에 짙게 퍼져 있는 혈관과 창백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내가 사람을 데려왔어. 나머지 일은 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