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린은 심미연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파 재빨리 가서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미연아...”뭐라고 위로해 주고 싶지만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자기 자신도 이 정도로 슬픈데 심미연은 얼마나 괴로울까 싶었고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전혀 위로되지 않을 것 같았다.이때, 의사가 난감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죄송하지만 외할머니를 빨리 영안실로 안치해야 합니다.”그는 직업상 여태껏 많은 유가족을 봐 왔는데 심미연처럼 슬퍼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덤덤한 사람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가 너무 슬프게 우는 걸 보니 유난히 마음이 괴로웠다.하여 시간을 조금 더 주고 싶었는데 규정이 규정인지라 어쩔 수 없이 빨리 데려가야 했다.심미연은 양경자를 더 자세히 보려고 눈물을 살살 닦고 조심스레 그녀의 눈을 감아주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외할머니, 이제 편히 자요. 이 원수는 제가 대신 꼭 갚을 테니까.”양경자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돌아간 걸 보면 분명 뭔가 억울한 일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왜 하필 외손녀라는 사람이 바보같이 남자한테 빠져 외할머니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따위 대우나 받으면서까지 남자 곁에 있고 싶었을까?’어쩌면 여태껏 키워준 손녀가 그런 수모를 당했는데도 반격조차 못 하는 모습에 억울해서 눈을 감지도 못했던 건 아닐까 싶었다.하지만 어떻게 생각했든 온지유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기에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신하린은 심미연의 곁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다가 문득 예전의 자기 자신이 떠올랐다.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런 식으로 떠나갔고 죽음의 이별에 대해서도 이미 몇 번 경험해 봤다.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의사도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코가 시큰거렸다.그녀가 슬픔에 젖어 마구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고 지금 얼마나 괴로울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심미연이 빠르게 눈물을 닦고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욱 안쓰러워 보였고 죽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
신하린은 깜짝 놀란 나머지 재빨리 심미연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줬다.“미연아...”대체 누구랑 전화 통화를 하길래 이 정도로 충격받은 얼굴인가 싶었다.“혹시 온지유가 나 때문에 유산되었다고 했어?”심미연은 다시 감정을 추스른 뒤 말을 이었다.“그럼 내가 왜 오늘 그 여자를 만나러 갔는지는 알아?”“왜 만나러 갔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 지유는 수술대에 누워있고 또 뱃속의 아이도 이제 없다는 거야! 심미연, 만약 지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지한의 말투에는 한껏 살기가 서려 있었다.온지유는 병원에 잘 입원해 있었는데 뜬금없이 심미연이 찾아와 질투심에 그녀를 바닥으로 밀치고 배를 발로 찬 바람에 유산되었다고 생각했다.중요한 건 온지유 뱃속의 아이가 강지성의 아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아무리 강준형이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뱃속의 아이가 건강히 태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어쨌든 자기 증손자이자 강지성의 유일한 핏줄이니까.그런 아이가 지금은 없어졌는데 식구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고 주범이 심미연이란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지금 온지유 편을 들어주려고 전화한 거야?”심미연은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자꾸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강지한 씨, 당신 마음속에는 온통 온지유, 그 여자뿐이고 난 아예 없는 거지?”“몇 번을 말해? 나랑 지유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헛소리 작작 해!”강지한은 큰 소리로 호통쳤다.심미연은 매번 잘못할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서 문제점을 찾았고 단 한 번도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반성하지 않았다.지금도 똑같은 반응에 강지한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지유가 우리 외할머니를 죽였어. 벌받아서 유산된 거라고!”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온지유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산되었는지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아무리 결백하다고 증거를 내밀어도 강지한은 믿지 않을 테니까.“지금 네가 한 짓을 인정하기 싫어서 돌아가신 외할머니까지 끌어
심미연이 깨어나 보니 자신은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고 문득 맡게 된 소독수 냄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신하린은 그녀가 깨어난 모습을 보고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미연아, 좀 괜찮아?”그러자 심미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그리고 재빨리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 하자 신하린이 그녀를 말렸다.“좀 더 자.”“마지막으로 외할머니 곁에 있고 싶어. 이제 날이 밝으면 재가 되어 그 작은 항아리에 담길 텐데 다시는 외할머니 얼굴을 볼 수 없잖아.”심미연의 말투는 유난히 차분하게 들렸는데 듣고 있던 신하린은 오히려 그녀가 더욱 걱정되었고 차라리 아까처럼 통곡하고 슬픈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저렇게 자기 감정을 계속 감췄다가는 한 방에 무너져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미연아, 시간도 늦었는데 가지 마. 임산부라 너무 무리하면 안 되잖아.”신하린은 원래 임산부가 영안실에 자주 드나들면 그곳에는 음기가 많아 뱃속의 아이한테 안 좋다고 하려 했지만 차마 솔직하게 말을 뱉을 수 없었다.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심미연을 예뻐해 줬던 사람이 양경자였고 그런 사람이 지금 죽어서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데 어찌 막을 수 있을까.“괜찮아. 잠깐만 보고 올 거야.”심미연이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러자 신하린은 냉큼 그녀에게 외투를 건네주며 말했다.“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입어.”심미연은 옷을 건네받고 나지막하게 답했다.“하린아, 고마워.”다행히 신하린이 곁에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고맙긴!”외할머니가 돌아간 것도 모자라 강지한의 냉정한 태도에 분명 지금 큰 충격일 텐데 자기 앞에서도 애써 괜찮은 척하는 심미연이 너무 안쓰러웠고 그녀가 얼마나 괴로울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지금 갔다가 외할머니 장례가 끝나는 대로 사무실에 갈게.”“사무실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가 괜찮으면 다시 나와.”바보같이 이 와중에 일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심미연은 그렇게 병실 밖으로 나갔고 신하린은 엘리베
영안실에서 나오자마자 심미연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외할머니의 사망 사건을 조사해 보기로 결심했다.이미 범인은 한 사람으로 추려졌는데 슬퍼할 일이 뭐가 더 있나 싶었다.그렇게 외할머니 빈소를 마련하자마자 조은하가 전화를 걸어왔다.심미연은 주소를 알려준 뒤 친척들에게도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양경자는 몇 년 동안 병원에서 쓸쓸하게 누워있었기만 했었는데 틀림없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여 다른 장례식보다 시끌벅적하게 차려주고 싶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은하가 심동현과 심서연을 데리고 도착했다.하지만 세 식구는 오자마자 먼저 양경자에게 인사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심미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심미연이 그녀인 걸 알아채기도 전에 조은하는 갑자기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외할머니의 재산만 노리고 지금까지 가둬놨다가 이제 돌아가시니까 가증스럽게 우리를 불러 마지막 인사하라고? 미연아, 좋게 말할 때 외할머니 유산 전부 다 내놔. 아니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현장에 있던 조문객들이 순간 깜짝 놀랐다.친딸이라는 사람이 어머니 장례식장에 와서 향도 꽂기 전에 유산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다니!정말 막장 드라마에서만 봤던 장면이다.심미연은 얼굴을 감싸고 있다가 다시 매서운 눈빛으로 조은하를 쏘아보았다.“양심이 없는 인간이란 건 진작에 알아챘지만 이 정도로 쓰레기일 줄은 몰랐네요. 오늘 이 자리에도 부르지 말아야 했는데!”저런 사람이 자기 어머니란 현실이 너무 가혹했다.양경자가 저런 사람도 친딸이라고 생전에 계속 그리워하지만 않았다면 오늘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지금 우리 몰래 외할머니 유산을 혼자 꿀꺽하려는 거잖아!”조은하가 화를 못 참고 또다시 그녀를 때리려고 팔을 들자 심미연이 단번에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외할머니께 마지막 인사하라고 불렀지, 깽판 부리라고 부른 게 아니에요. 생전에 잘못을 저질렀던 일은 이제 사과해도 못 들으니까 외할머니께 무릎이라도 꿇어요!”조은하는 심미연보다 키가 작아 손목이 붙잡힌 채 그녀를 올려다
“상주로 왔다면 영전에 꿇어앉아 울어야 하지 않겠나요. 이경 씨, 심 부인을 영전 앞으로 모셔 무릎을 꿇게 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심미연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고 그 자리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박유진을 보았다. 온화한 분위기와 얼굴에 떠오른 담담한 미소는 마치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다가가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듯했다. 그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서 혼나고 울 때마다 박유진은 항상 다정하게 달래주었었다. 그녀의 감정은 언제나 그가 나타나면 금방 진정되곤 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존재는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반면 조은하는 강제로 끌려가 양경자의 영전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커다란 영정 사진 속 그 눈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다가왔고 조은하는 그 눈을 무심코 한 번 바라보다가 공포에 질려 울기조차 잊어버렸다. ‘죽은 노인네가 여기서까지 나를 겁주고 있네!’ 뒤에서 조은하를 잡아끌려고 하던 신하린은 이 광경을 보고는 조용히 다시 자리로 물러났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잘된 거지.’ 심서연은 박유진을 보고 얼굴에 밝은 미소를 가득 띠며 그에게 다가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 씨, 회사 일 바쁘다고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이렇게 왔어?”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박유진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말한 것이다. 심씨 가문이 하룻밤 사이에 몰락하며 그들은 완전히 무일푼이 되었다. 다행히 떠나기 전 몇 벌의 옷과 보석, 가방 등을 챙겨 팔아 겨우 호텔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고 가족들 모두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돈이 바닥날 게 뻔했다. 그래서 오늘 그들은 심미연에게 유산을 받으러 온 것이다. 그런데 박유진이 갑자기 나타나자 그녀는 유산 따위는 제쳐두고 일단 박유진을 붙잡아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박 부인이 되기만 하면 남은 인생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박유진은 어린 시절부터 심미연이 자라는 모습을 봐왔기에 그녀의 성격을 모를 리 없었다. 강준형이 그녀를 그토록 아끼는 데도 알리지 않았다는 건 분명 그녀와 강지한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짐작은 했지만 심미연이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그 역시 굳이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잔 거 아니야? 눈이 벌게져 있잖아. 얼른 가서 좀 쉬어.” 강지한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도 제대로 아껴주지 않는 모습에 박유진은 꼭 한 번 제대로 혼을 내주고 싶었다. “안 피곤해. 쉬지도 않을 거야.”심미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곁에서 지켜드릴 시간이었고 그녀는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박유진은 설득이 안 되자 그녀 곁에 남기로 했다. 혹여라도 심미연이 쓰러지게 된다면 바로 병원으로 데려갈 수는 있으니까. 박유진이 심미연과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심서연은 이를 갈며 분노가 치밀었다. 이 남자는 분명 자신과 한 끗 차이로 결혼할 뻔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심동현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광경을 보며 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심서연은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심미연뿐이었다. 조은하는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강지한 하나만으로 심씨 가문을 몰락시킨 것도 모자라 이제는 박유진까지 끼어들었다. 둘이 합치면 그들은 아예 다시 일어서지 못할 처지로 몰릴지도 모른다. ‘심미연 이년이 정말 재주는 꽤 있는 것 같네.’‘아쉽게도 어릴 적부터 우리와 전혀 정을 쌓지 않았으니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지!’ 그러나 심미연은 이 세 사람의 속내를 알 리 없었고 박유진은 곧 그들을 내보냈다. 심씨 가문 일가가 떠난 후 조문객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유진 도련님은 심씨 가문과 언제 약혼을 깼지? 아무런 발표도 없었잖아!” “심씨 가문은 하룻밤 사이에 경성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가장 저렴한 호텔에
신하린은 문 쪽을 바라보다가 은발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강준형을 보고 급히 심미연을 불렀다. “미연아, 네 할아버지 오셨어.”심미연은 잠시 멈칫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준형은 지팡이를 짚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미연아, 이렇게 큰 일이 있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니!” 강준형은 그녀의 너무 지친 모습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정말 바보 같은 애구나.’ ‘어떻게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려고 했을까.’ 심미연은 일어나려 했지만 무릎이 너무 아파 일어설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할아버지, 어떻게 오셨어요?”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강씨 가문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강지한에게 외할머니의 죽음을 이용해 책임을 피하려는 교활한 사람일 테니 그 이미지대로 남기로 했다.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전화는 꺼져 있더라. 걱정돼서 사람을 시켜 확인해 봤더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미연아, 나는 네가 강지한 그 자식에게 마음이 떠난 걸 알아. 그런데 그놈은 그놈이고 나는 나야. 이런 일을 나한테까지 숨기지 말았어야지.”강준형은 빈소를 잠시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 바쁘게 모든 걸 처리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결국 이 모든 게 강지한 그 자식 때문이야!’ 강지한을 생각하니 강준형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심미연도 연락이 안 됐고 강지한도 연락이 안 되었다. 고의로 잠적을 한 건지 뭔 일이라도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면 반드시 그 자식에게 따지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바빳어요. 핸드폰도 꺼져버려서 잊고 있었어요.”심미연의 목소리는 피곤함에 찌든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기사님이 데려다주신 건가요?” 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강준형에게 진짜 생각을 말할 리 없었다. 강준형은 심미연의 눈에 짙게 퍼져 있는 혈관과 창백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내가 사람을 데려왔어. 나머지 일은 그들이
그는 그냥 강준형에게 더 이상 강지한의 일을 강제로 강요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강지한 같은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강준형은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미연이가 지난 3년 동안 겪은 그 모든 불공정한 대우는 다 내 잘못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계속 모른 척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그만둘 거야. 미연이가 이혼을 원한다면 그건 그 자식이 감당할 문제야.” 3일 후 양경자의 장례식이 있었다. 하늘에는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심미연은 검은 옷을 입고 우산을 쥔 채 묘비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 보였다. 마치 외할머니가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신하린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3일 동안 심미연은 잠을 2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사실 심미연이 잠을 자지 않은 것보다 이 3일 동안 한 번도 울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지나치게 조용했던 사실이 신하린을 더 두렵게 했다. 신하린은 심미연이 극단적인 생각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이 다가와 신하린과 짧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아, 외할머니는 이제 편히 잠드셨어. 집에 데려다줄게.” 이 3일 동안 그는 심미연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듣지 않았고 그녀가 하루하루 지쳐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외할머니는 편히 안장되었으니 그녀가 잘 수 있도록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랑 하린이는 먼저 가. 난 할머니랑 좀 더 있다가 갈게.” “너 3일 내내 잠도 자지 않았잖아. 더 버티면 몸이 망가져!” 신하린은 목소리가 떨렸고 눈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이 3일 동안 그녀는 심미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심미연의 눈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걸어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듯했다.그때부터 심미연은 데이터 하나, 리포터 하나 놓치지 않고 아이의 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방안에는 키보드 소리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뿐이었고 적절한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들리는 그 소리는 생명과 희망을 담은 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심미연은 본인의 전문적인 지식과 용기로 작은 생명을 살릴 방도를 모색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그 시각, 심태하를 데리고 집으로 온 박유진은 역시나 조용한 집안에 심미연이 또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하야, 엄마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박유진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간 심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왜 혼자 내려와? 엄마는?”“엄마는 안 먹는대요. 난 할 만큼 했으니까 나머지는 아빠가 해요.”심태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박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가볼게.”성큼성큼 걸어 올라간 박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방이 하도 조용해서 문 여는 소리마저 소음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소음이 심미연을 방해하지는 못한 듯했다.박유진은 부드러운 불빛이 비춰진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심미연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넓은 책상 앞에 마주 앉은 심미연의 얼굴에는 노트북 화면에서 나온 불빛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평소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두 눈도 이 시각만큼은 노트북에 고정한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심미연만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박유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그러다가 자연스레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과 그래프를 보게 된 박유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작게 쓰여있는 숫자와 그래프들이 박유진에게는 그저 낯선 부호였지만 거기에 쏟은 심미연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박유진은 감히 함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심미연의 건강이 걱정됐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 때문에 심미연의 손톱은 이미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의 입장이 되어 그 장면을 그려보았다.부서진 가구들과 온몸을 뒤덮은 상처,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도망가지 못해서 절망만 가득한 그 눈동자.가정폭력만 한 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면서 남자는 여자의 정신을 처참히 짓밟고 있었다.그 배신이 피해자의 마지막 남은 선까지 무너뜨려서 결국 그들을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다.여자는 해방되고 싶어서 제안한 이혼이 자신의 명을 단축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폭행을 일삼고 바람까지 피우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던 남자는 오히려 의심병이 도져 갑자기 이혼을 제안하는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배 속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여기까지 본 심미연은 숨이 가빠와서 호흡이 거칠어졌다.인간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 남자에 대한 분노로 쌓인 한기가 서서히 심미연의 영혼을 뒤덮고 있었다.어쩜 사람이 이처럼 잔인하고 매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딴 짓을 할 수 있는지 심미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인간이야!”차오르는 분노와 비통함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자 심미연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그게 경찰 출동을 알리는 경보음인가 싶어 심미연은 순간 숨을 죽였다.물론 이내 자신의 상상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심미연은 그 짧은 순간에 전화벨 소리가 마치 생명을 구원해줄 동아줄처럼 느껴졌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심미연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아이 사건은 보셨어요?”여자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심장병 걸린 세 살 아이의 사건을 떠올린 심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대답했다.“바로 볼게요.”
3년 동안 심태하를 자신의 친아들로 여기며 온 정성을 다 쏟은 박유진은 심태하가 신나게 떠드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아빠, 얼른 와요!”그때 들리는 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박유진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심태하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환한 아이의 미소 덕분인지 박유진은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아이에게로 다가간 박유진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자 심태하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엄마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엄마는 일만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니까요. 아들인 나도 설득 못 한 엄마라고요.”말을 하며 옆자리를 손으로 콕콕 찌르는 아이의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서 박유진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엄마는 항상 그래요. 일만 하면 밥 먹는 것도 까먹어요.”심태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엄마가 가슴 아픈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내가 말려봐도 일은 엄마의 사명이라면서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그래도 엄마가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나도 떼는 안 썼어요.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많은 걸 배우려고요. 그러면 엄마가 조금은 편해질 거잖아요.”심태하는 마치 박유진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맹세하는 사람처럼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엄마를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임현은 저 말들이 세 살 난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영민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자꾸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말들은 여름날 오후에 갑자기 찾아온 우레처럼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임현의 마음을 울렸다.임현은 그제야 왜 심미연이 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이런 아들이라면 백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았다.하지만 다정한 눈으로 심태하를 바라보던 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3년 전, 눈을 뜨자마자 심미연부터 찾은 박유진은 3
“죄송합니다!”“당신...”심미연의 사과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죽은 심미연 씨랑 똑같게 생겼어요.”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심미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는 바로 전설적인 존재인 박시훈이었다.그가 유명해진 건 그의 정보망 때문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이 찾기 싫은 건 있어도 못 찾는 건 없다는 말도 떠돌게 된 것이다.심미연과 일면식도 없는 그가 그녀를 알아봤다는 건 박시훈이 심미연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는 뜻이었다.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뒷조사를 한 사람과 지금은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잠깐만요!”“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때 나타난 박유진이 심미연에게로 뻗어진 박시훈의 팔을 가로막았다.박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그제야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그가 있는 한 적어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는 없기 때문이었다.“박유진?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한편 이미 멀어진 심미연에 박시훈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그는 매번 나타나서 자신의 일을 망치는 박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저 사람은 내 아내 될 사람이야. 네 형수고. 앞으로 보면 예의부터 갖춰.”그 순간, 박유진은 진심으로 심미연을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었다.박시훈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혼자만 보며 심미연의 마음속에도 본인뿐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나를 가족으로 인정해준 적도 없는 박씨 집안 사람들이야. 자꾸 친한 척하지마. 너랑 나는 남이니까.”박씨 집안에 돌아갈 생각도 없고 그 집안사람과 엮이기도 싫었던 박시훈은 손을 쳐내며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하지만 심미연이 아직 멀리 못 갔을 걸 생각해 박유진은 또다시 박시훈의 팔을 붙잡았다.“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박유진, 너 진짜 미친 거야? 왜 자꾸 날 잡아!”또다시 잡힌 팔에 박시훈은 표정을 구기며 박유진을 노려보았다.이 순간만큼은 정
흉부외과 전문의들을 다 찾아봐도 소용이 없어서 자신에게 연락을 한 걸 알기에 심미연은 마음이 착잡해졌다.“진작에 이메일로 보내놨죠. 시간 날 때 보세요. 그럼 전 먼저 끊을게요.”태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심장병으로 앓고 있다는 게 너무 불쌍해서 심미연은 전화를 끊었음에도 쉽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엄마, 괜찮아요?”그때 심태하가 심미연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레 묻자 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응, 엄마 괜찮아.”세 살 난 아이가 이렇게 빨리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 건 안타까웠지만 심미연은 태하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 했다.“알겠어요 그럼!”엄마가 괜찮다고 하자 심태하는 역시나 아이는 아이인지 곧바로 다시 디저트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유명한 식당답게 맛이 출중해서 태하는 아주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지만 마음이 불편했던 심미연은 몇 숟가락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임현도 전화를 받은 뒤로 저기압인 심미연이 걱정됐지만 함부로 물을 수도 없어서 그저 밥만 먹고 있었는데 그때 심미연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나 바람 좀 쐬고 올게요.”“네.”자신의 기분이 왜 갑자기 나빠졌는지는 심미연도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는 임현에 빠르게 복도 끝으로 걸어간 심미연은 창밖으로 다니는 차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미연아, 뭘 그렇게 보고 있어?”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심미연이 고개를 돌리며 웃어 보였다.“언제 왔어?”“좀 전에. 태하 데리러 가자.”자신에게로 내밀어진 박유진의 손을 잠시 보던 심미연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밥은 먹었어?”박유진은 별것도 아닌 그 말에 환히 웃으며 답했다.“좀 전까지 바빴어서 못 먹었지.”“그럼 뭐라도 좀 먹을래?”“그래.”고개를 끄덕이는 박유진과 함께 심미연은 아까의 룸으로 돌아갔다.갑자기 나타난 박유진에 심태하는 다급히 포크를 내려놓으며 그에게로 달려갔다.“아빠! 여긴 왜 온 거예요?”아빠가 이곳에 온 게 자신
심동현은 그때 고작 다섯 살이던 아이가 저런 악행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너무 미안해하지는 마. 당신의 마지막이 심미연보다는 더 처참할 테니까.”심서연의 말 몇 마디에 심동현은 그대로 기절해버렸고 심서연은 그런 그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나, 나는 네 아빠가 불러서 온 것뿐이야.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그때 옆에 있던 여자가 덜덜 떨며 말하자 심서연은 여자의 발을 즈려밟으며 말했다.“넌 너무 더럽잖아.”물론 심서연도 남자와 노는 걸 즐기긴 했지만 그녀는 이렇게 돈을 목적으로 남자를 탐하는 여자들을 경멸했다.그때 초인종이 울리자 다급히 발을 뗀 심서연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인터폰을 눌러보았다.역시나 성무진의 얼굴이 보이자 그녀는 칼을 들어 자신의 다리를 긋고는 절뚝이며 문을 열어주었다.“성 비서님... 저 좀 살려주세요...”눈을 감으며 죽는 척을 하는 심서연을 본 성무진은 바로 뒤따라온 사람을 향해 말했다.“이분은 차에 태워.”심서연이 그 사람에게 들려 나가자 곧바로 구급차가 도착했고 심동현과 여자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성무진은 강지한에 연락을 했다.*그때 심미연은 임현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는데 함께 앉아있던 심태하는 자신의 앞에 가득 놓인 디저트들을 보며 숟가락을 든 채 놀라고 있었다.“엄마, 이거 다 내 거에요?”평소에는 달달한 걸 많이 못 먹게 하던 엄마가 갑자기 이러니 심태하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응, 다 네 거야. 얼른 먹어. 대신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아프니까 적당히 먹어야 해.”“네! 조금만 먹을게요 그럼!”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심태하는 한입 한입 디저트들을 베어 물기 시작했다.심미연은 미소를 짓다가도 이렇게 일찍 철이 든 아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왔다.엄마가 힘든 게 싫어서 세 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성숙한 행동들을 하는 걸 심미연이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임현은 그저 부럽다는 듯 말했다.“태하는 진짜 너무 착한 것 같아요!”세
심서연이 사리를 분별하기 시작할 때부터 심동현은 늘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싶어 했다.그리고는 아들을 낳으라고 조은하를 달달 볶았는데 조은하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녀에게 화까지 내곤 했다.그때부터 심씨 집안의 딸은 하나여야만 한다는 걸 깨우친 심서연은 일부러 유괴범을 찾아 심미연을 팔아버리려고 했었다.이미 말까지 다 맞추고 심미연을 데려간 건데 심서연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사라져버린 심미연 때문에 심서연이 유괴범들에게 대신 끌려가게 된 것이다.그때부터 심서연의 악몽 같은 나날이 시작되었고 심미연을 향한 그녀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심서연은 심미연도 유괴범에게 자신을 넘기려고 계획을 짠 게 분명하다는 착각까지 해가며 그녀를 증오해왔었다.시골에 끌려간 뒤로 매일 맞고 욕을 먹으며 자라던 심서연은 양어머니가 아들을 낳게 된 뒤, 모든 신경이 그 아들에게 가 있는 틈을 타 빠르게 도망쳐 나왔고 그길로 기억에 남아있던 심씨 집안을 찾아갔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심서연은 예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심미연을 보며 질투심에 불타 그녀가 가진 걸 모조리 빼앗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심서연에게 회사를 맡긴다는 건 회사를 말아먹겠다는 거랑 다름이 없었기에 부모님은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믿지는 못하고 있었다.그 와중에 심미연은 여전히 화려한 집에서 세계적인 부자인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그렇게 심서연이 점점 질투심에 눈이 멀어가고 있을 때 하늘이 고맙게도 심미연을 죽여준 것이다.굶어 죽어가던 심서연이 그 틈을 타 강지한에게 연락을 했고 그 덕에 아무 상관도 없는 강지한의 보살핌으로 강씨 집안 둘째 사모님 대우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물론 그녀가 이 모든 걸 누릴 수 있게 된 건 다 문소영과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사람 덕분이었다.힘들고 가난한 시절을 겪어봤기에 더욱더 자신의 것을 잃고 싶지 않았던 심서연은 어떻게 해서든 강씨 집안에 들어가야만 했다.그리고 그동안 마음껏 누려온 심동현은 이제 그만 고생할 때도 된 것 같았다.“심서연! 걔
심서연은 자신의 말이 끝났음에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강지한이 혹시나 자신을 외면할까 봐 불안에 떨며 물었다.“지한 씨...”심서연은 사실 이번 기회에 강지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기회를 봐서 잠자리를 가지고 거기에서 애까지 생긴다면 그야말로 천운이겠지만 일단은 강지한을 끌어들이는 게 우선이었다.“성 비서 보낼게요.”“지한 씨가 직접 와주면 안 돼요?”자신이 대답을 했음에도 그칠 줄 모르는 심서연의 요구에 강지한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상미 열나서 지금 병원에 있어요. 귀국한 다음에 열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전에 왜 애 아프다는 말 안 했어요?”순식간에 차가워진 목소리에 심서연은 당황하며 물었다.“뭐라고요? 상미가 열이 나요? 전 진짜 몰랐어요!”해외에서는 남자들을 만나느라 바빠서 상미는 시터에게 맡겨뒀었기에 심서연이 아이의 몸 상태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의 말투가 심상치 않아 그녀는 다급히 한마디 더 보탰다.“이틀 전에 열이 나서 병원 데려가긴 했는데 그때는 큰 문제 아니라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신경을 좀 덜 썼는데, 많이 아픈 거예요?”심서연의 말이 변명임을 아는 강지한은 더 말하기도 입 아파 그저 전화를 끊어버렸다.심서연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붙잡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혹시라도 강지한이 자신이 해외에서 남자를 만나고 다닌 걸 알고 자신을 내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지만 그렇다 한들 심서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강지한이 결정한 일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애초에 없었으니까.한편 조은하는 어두워져 가는 딸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왜 그래 서연아?”조은하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심서연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아무 일도 아니니까 걱정 말고 누워 계세요. 먹을 것 좀 챙겨올게요.”“얼른 구급차 불러서 아빠부터 병원에 데리고 가.”심동현이 아픈 것도 보기 싫었고 또 심동현이 죽으면 하나뿐인 딸도 죽을 것 같아 조은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안 죽는다
조은하는 침대에 누워지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심미연 생각을 하고 있었다.어린아이가 자신들이 가하는 모진 매를 견뎌냈을 걸 생각하면 조은하는 자꾸만 가슴이 아파 왔다.그래서 지금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늘이 내린 벌 같았다.“엄마, 말할 수 있겠어요?”“응.”심서연이 눈시울이 빨개진 채로 묻자 조은하가 힘겹게 목소리를 짜내어 대답했다.“아빠한테 또 맞은 거예요?”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심서연은 한 번 더 물었다.“그냥 때리라지 뭐. 어차피 나 잘못한 거 많잖아.”조은하는 심동현에게 맞을 때마다 심미연에게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했다.물론 심미연은 이미 죽어서 자신이 이토록 참회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만.“나 잠깐 아빠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역시나 예상했던 답이 나오자 심서연이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나려 하는데 조은하가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됐어! 나 괜찮아.”“엄마가 이 꼴로 누워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그러고도 내가 사람이에요?”심서연은 마음 아파서 흐르는 눈물도 빠르게 닦아내며 방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그에 다급해진 조은하가 심서연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에 잡히는 건 공기뿐이었다.“서연아! 엄마한테 이제 딸이라곤 너 하나뿐인데 너까지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얼른 돌아와.”자식을 앞세우는 건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만약 심서연까지 잘못된다면 조은하는 정말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기에 목이 타게 그녀를 불렀지만 심서연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간 뒤였다.조은하는 조급한 마음에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는데 몸도 편치 않아서 그만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조은하가 고통에 미간을 찌푸릴 때 심서연은 이미 소파에서 입에 담지도 못할 행동을 하고있는 심동현과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집에 있는 딸과 아내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이런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심동현에 이성이 끊겨버린 심서연은 주방에서 칼을 들고나와 심동현의 다리 위에서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여자를 향해 휘둘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