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릇한 분위기가 순간 깨졌고 심미연은 힘껏 그를 밀쳐내면서 소리쳤다.“빨리 내려줘!”강지한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내려줬고 심미연은 한 발로 걸어가더니 겨우 소파에 앉았다.그리고 옆에 있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강지한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성무진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강 대표님, 온지유 씨가 깨어났는데 지금 울면서 대표님만 찾습니다. 지금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하는데 혹시 언제쯤 올 수 있으실까요?”“지금 출발할게!”말을 마친 뒤 강지한은 전화를 끊고 소파에 앉아 있는 심미연에게 눈길을 돌렸는데 그녀는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그 모습이 오늘따라 참하고 예뻐 보였는데 순간 복잡했던 마음이 진정되면서 이렇게 평생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제야 남자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심미연은 고개를 들어 강지한에게 물었다.“왜 아직도 안 가고 있어?”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자 강지한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왜 자꾸 날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이지? 이따 데이트라도 있나 봐?”그러자 심미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고.”말 한마디에 저런 오해를 살 바에는 앞으로 대화를 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갈게.”강지한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대로 자리를 떴다.지금으로서는 온지유가 그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고 심미연은 그저 사모님 타이틀을 달고 있는 동거녀일 뿐이다.심미연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책을 읽었다.법률에 관한 책이라 그런지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순간 화면에 박유진의 이름이 뜬 걸 보고 심미연은 살짝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지금 만나고 싶은데 시간 돼?”박유진의 말투는 너무 다정해서 거절하기 힘들었다.“오빠, 나...”거절하려던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다시 파혼하자고 했어. 이번에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건
예전에 심미연은 집에서 구박당할 때마다 박유진을 찾아갔고 매번 그는 오늘처럼 문 앞에서 기다려줬다.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 모습을 다시 보니 그때의 추억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심미연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박유진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하면서 걱정스레 물었다.“다리는 괜찮아?”“괜찮아.”심미연은 그의 손을 피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추운데 빨리 들어가자.”예전처럼 함부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기에 가능한 신체접촉은 피해야 했다.박유진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손을 거뒀다.그렇게 심미연은 그와 거리를 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저녁을 먹지 않아 살짝 허기진 심미연은 자리에 앉자마자 우유 한 잔과 티라미수를 시켰고 박유진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저녁에 커피 마셔도 잠이 와?”심미연이 의아해서 물었다.“괜찮아.”박유진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어차피 요즘 잠을 못 자서 커피를 마시나 안 마시나, 못 자는 건 마찬가지였다.“그나저나 오빠, 왜 갑자기 또 파혼한다는 거야? 저번에 분명 날짜까지 잡았잖아.”심미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박유진처럼 진중한 사람이 몇 번이고 말을 번복하는 게 좀 이상했다.“우리 두 사람은 안 맞아. 그리고 괜히 나 때문에 서연이 시간 낭비하는 것 같아서 그냥 파혼하자고 했어.”주문했던 커피가 배달되자 박유진은 컵을 들고 커피 향을 한번 맡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이 파혼이 괜히 네 탓으로 되어 너를 괴롭할까 봐 걱정돼.”애초에 심서연과의 결혼도 전제 조건이 바로 심씨 가문에서 그 누구도 심미연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결혼이 깨졌으니 분명 그 사람들이 다시 심미연을 찾아갈 것 같았다.“이 일이 아니었어도 그쪽 사람들은 원래부터 나를 미워했어. 그래서 어떻게든 또 시비를 걸겠지.”이때, 우유와 티라미수까지 배달되자 그녀는 재빨리 케이크 한 입을 입에 넣었다.심동현과 심서연이 그녀를 싫어하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자기 뱃속에서 열 달을 품고 낳은 어머니마저
‘앞으로 자주 만나면 되지.’“이것만 다 먹고 가자.”심미연은 케이크 한 입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맞다. 그런데 난 내일부터 휴가라서 언제 다시 회사로 출근할지 몰라. 그러니까 경호원은 필요 없을 것 같아.”지금 그녀는 임신 중이라 그런지 아주 잘 먹었고 자주 허기짐을 느꼈다.더구나 저녁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엄청 배고픈 상태였다.“벌써 출산 휴가 쓰는 거야?”박유진이 의아해서 물었다.‘강지한이 임신한 사실을 알았나?’‘보아하니 두 사람도 꽤 애틋하네.’“아니. 그냥 단순히 휴가를 낸 거야.”어디까지나 개인 사정이라 심미연은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래. 케이크 먹어.”박유진도 더 이상 물어보는 게 실례인 것 같아 여기서 멈췄다.심미연은 고개를 숙이고 남은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고 박유진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하지만 누군가가 창밖에서 카메라로 두 사람을 몰래 찍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그렇게 심미연은 다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배부르다. 이제 그만 가자.”“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가게에서 나왔고 박유진은 걸음이 느린 그녀를 배려해서 일부러 천천히 걸어줬다.아무런 대화도 없이 어느새 차가 세워진 곳까지 도착하자 박유진은 다정하게 차 문을 열어줬다.심미연은 조심스레 운전석에 앉아 창문을 내리고 웃으며 인사했다.“갈게. 오빠도 조심히 가.”“그래. 알겠어.”박유진은 조심스레 차 문을 닫아준 뒤 한 발짝 물러섰고 심미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자리를 떴다.하지만 박유진은 그녀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심미연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강지한이 거실 소파에 앉아 차가운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지금 병원에서 온지유랑 같이 있어야 할 사람이 집에 있으니 심미연은 의아해서 그에게 물었다.“왜 왔어?”“이 늦은 시간에 누구를 만나러 나간 거야? 말해봐.”강지한은 손에 든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더니 살벌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순간 심미연의
열어보니 케이스 안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순간 강지한의 눈빛에 살기가 돋치더니 한껏 매서운 눈빛으로 심미연에게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다친 다리를 끌면서까지 그 인간을 만나러 간 이유가 고작 이 브로치 때문이었어?”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아왔던 울화가 치밀어올랐다.분명히 그가 떠날 때까지 그녀는 걷는 것 조차 힘들어했는데 박유진한테는 그런 아픔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만나러 갔다고 생각했다.그 뜻인즉, 박유진은 여전히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란걸 말해준다.강지한의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매우 음산했고 마치 곧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심미연은 이미 그한테 들킨 마당에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 뒤 싱긋 웃으며 답했다.“지한 씨는 한밤중에도 온지유 씨 만나러 잘만 다녔고, 또 두 사람이 밤새 같이 있었던 적도 많았잖아? 난 그저 잠깐 만나 생일 선물만 받고 왔을 뿐인데 굳이 비교하자면 내가 너무한 것도 아니잖아? 강지한 씨, 화내기 전에 먼저 자기 행실부터 뒤돌아보는 게 어때?”자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왜 심미연만 제재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구나...그들은 쇼윈도 부부이다. 각자 알아서 살면 되는데 왜 갑자기 질투 나는 척인지 그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이제 두 사람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나랑 온지유 씨는 아주 결백해. 그게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였던 두 사람이랑 같아?”강지한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손에 든 케이스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브로치가 갖고 싶으면 내가 내일 당장 이것보다 더 이쁘고 값비싼 걸로 사 오라고 할게!”솔직히 강지한 자신도 지금 왜 이 브로치를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알지 못했다.그저 심미연은 아직 자기 여자고, 오직 그만이 심미연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 다른 남자들이 넘보는 게 싫었다.하지만 이 모든 반응이 다 질투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심미연은 버려진 케이스를 빤히 쳐다보며 애써 감정을 추슬렀
순간 강지한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죽은 건가?’오늘 마침 자살 시도했던 온지유 때문에 강지한은 자연스레 그녀의 이런 행동이 자살이라고 생각했다.하여 냉큼 달려가 욕조 안의 심미연을 건져 올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심미연, 만약 죽어버리면 지금 당장 내 의료팀을 전부 철수해 버릴 꺼야! 그러니까 정신 차려!”너무 다급한 나머지 목소리까지 떨렸다. 순간 너무 시끄러운 소리에 심미연은 잠에서 깨어 천천히 눈을 떴는데 눈앞의 강지한을 발견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왜 이래?”“죽은 줄 알았잖아!”강지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너무 피곤해서 잠이 들었을 뿐이야.”심미연은 눈을 비비며 다시 물었다.“내가 죽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심미연은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무조건 살아야만 희망이 있고 더 나은 미래를 볼 수 있기에 절대 혼자 죽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괜히 집에서 죽었다가 나중에 흉가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집값만 내려가!”솔직히 강지한은 방금 그녀가 진짜로 죽었을까 봐 매우 놀랐지만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걱정하지 마. 온지유 씨 같은 사람은 당신 때문에 죽는시늉까지 할 수 있겠지만, 난 아니야.”온지유는 멘탈이 약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절대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그녀의 단호함에 강지한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다.“누가 온지유가 죽었다고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설마 내 말뜻을 이해 못 한 건가?’‘온지유가 죽었다고 한 적이 없는데?’하지만 남자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심미연은 잠깐 생각해 보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혹시 오늘 지유 씨가 진짜 당신 때문에 죽겠다고 한 거야?”아니면 저 사람이 이 정도로 예민하게 굴 이유가 없어 보였다.강지한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닥쳐. 계속 허튼소리를 하면 바로 2층에서 던져버릴 거야!”심미연은 그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자기 생각이 딱 들어맞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
“심미연, 무슨 뜻이야!”강지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가 실수로 수건을 잡아당긴 바람에 그녀가 몸에 두르고 있던 가운이 그대로 풀어졌다.순간 깜짝 놀란 심미연이 비명을 질렀다.“뭐 하는 짓이야!”“아직 머리도 안 말랐는데 침실로 가면 안 되지!”강지한은 어색한 기운을 애써 달래며 재빨리 그녀의 머리에 수건을 던져줬다.“빨리 말려!”심미연은 그의 손에 들린 가운을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그거나 먼저 돌려줘.”쑥스러움이 한껏 묻어난 말투에 강지한의 몸은 또다시 반응하기 시작했다.수건을 들고 심미연에게 다가가 물기를 닦아주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귀를 살짝 베어 물었다.심미연은 축축한 상태에서 귀까지 간질거리니 기분이 묘했다.방금까지 자신을 모질고 거칠게 대하던 남자가 순간 너무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3년 동안 부부로 지내면서 유독 침데에서만 호흡이 잘 맞았다. 게다가 지금 심미연은 임신한 상태이고 성욕이 아주 강할 때라 그의 작은 손놀림에도 빠르게 온몸이 불덩이가 되고 두 다리는 나른해졌다.강지한은 더는 못 참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심미연이 다리를 힘껏 오므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애원했다.“지한 씨... 제, 제발... 멈춰. 나 배 아파.” 심미연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 무의식적으로 자기 배를 움켜쥐었다.원래 오늘 저녁에 병원에 가야 했고 신하린이 예약까지 마쳤는데 외할머니 일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이 상태에서 또 강지한이랑 그 짓을 하게 되면 뱃속의 아이한테 무리가 갈게 뻔했다.‘그럴 수는 없지!’“이러면서 나를 거부해? 심미연, 아직도 내가 싫어?”강지한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더니 힘껏 자기 몸에 밀착시켰다.부드럽고 또 향기로운 그녀를 당장에라도 품에 안고 먹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심미연은 지금 이 순간에 수치심만 들었다.분명 그를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몸이 자기도 모르게 반응해 버렸기 때문이다.부부로 산 세월이 오래되어서 그런가, 그녀의 민감한 곳이 어딘
인하병원, VIP 병실.병실 침대에 창백한 얼굴로 핸드폰을 꼭 쥐고 있는 온지유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심미연, 그 여자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강지한이 집을 그리 헐레벌떡 뛰어가나 싶었다.‘고약한 계집애!’그리고 하루빨리 방법을 찾아 심미연을 없애버려야 했다.바로 이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리자 온지유는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마자 육현성의 얼굴이 보였다.“현성 오빠, 여긴 웬일이에요?”온지유가 의아해서 물었다.밤도 늦었는데 갑자기 여기엔 무슨 일인가 싶었다.그러자 육현성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온지유를 품에 안았다.“지유 씨, 잠깐만 안고 있을게요.”심상치 않은 그의 목소리에 온지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여태껏 큰형수라고 부르던 육현성이 갑자기 호칭도 바꾸고 이런 행동을 하니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그것도 아주 큰 일.“아니요. 그저 안고 싶어서요.”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그녀도 같이 안아줬다.“무슨 일이 있으면 저한테 말해요. 어쩌면 제가 해결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육현성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녀로서는 받아 줄 수도, 또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조금이라도 여지를 주면 바로 달려드는 사람인데 지금은 무슨 일인지부터 알아야 했다.“진짜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저 한번 안아주고 금방 가려고 했거든요.”온지유를 안고 있으니 또 가기 싫어졌다.하지만 고민 끝에 재빨리 팔을 풀고 다시 일어섰다.“오늘 많은 실례를 범했네요. 화내지 말아 주세요. 큰형수님.”육현성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침대 옆에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그 모습에 온지유는 그의 손을 다시 다정하게 잡아주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화 안 내요. 그러니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요.”육현성한테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아니면 이 정도로
육현성은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파 또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제가 진성 쪽에 집이 한 채 있는데 리우까지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요. 만약 진짜 갈 곳이 없으면 거기서 지내도 되고 거기에 가사 도우미도 두 분 정도 붙여드릴게요. 지유 씨, 이제 더 이상 당신이 힘든 일은 없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그의 말은 매우 감동적이었고 온통 온지유를 배려한 말들이었다.육현성은 가능하다면 자신의 모든 걸 온지유에게 주고 싶었다.그의 고백처럼 들리는 말에 온지유는 육현성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러다가 다시 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저랑 심미연 씨 관계는 이제 벌어질 대로 벌어졌어요. 저번에 제가 인터넷에서 된통 욕먹게 된 일도 아마 들었을 텐데 만약 제가 오빠네 집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또다시 네티즌들을 이용해서 저를 공격할 거예요. 저는 지금 그저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어요. 그리고 혹시나 이 소식이 육씨 가문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오빠도 곤란하게 될 텐데 괜히 저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요.”육현성은 그녀의 말에 더욱 가슴이 아파 팔에 힘을 꽉 주면서 답했다.“그렇다고 지유 씨가 고생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심미연은 제가 반드시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온지유는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화를 내는 육현성이 너무 고마웠다.예전부터 그는 온지유가 무얼 먹고 싶다고 하면 아무리 한밤중이라고 해도 나가서 사다 주곤 했었다.나중에 강지성에게 시집을 갔어도 그녀에 대한 다정함은 여전했다.그저 예전보다 분수에 맞게 거리를 살짝 뒀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전의 육현성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현성 오빠, 괜히 저 때문에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아요. 아무리 그래도 심미연은 지금 강지한의 아내이고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는 날에는 강지한 씨부터 분명 오빠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괜히 그 사람이랑 사이가 벌어질 필요는 없잖아요.”온지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말리자 육현성
온지유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순간 마음 한편에서 감동이 살짝 밀려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만약 그녀가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육현성이 이런 말을 한 순간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 온지유의 침묵은 육현성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었고 어쩌면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자신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국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현성 오빠, 저는...” 온지유는 육현성이 괴로워하는 것을 느꼈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알아요. 지유 씨,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요.” 결과를 알게 된 육현성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앞으로 자주 만날 수는 없을 거예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당연히 그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현성 오빠, 나랑 이제 아예 연락고 안 해줄 건가요?” “지유 씨, 미안해요. 그냥 내가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요즘 육씨 가문이 엉망진창이라 육현성도 정신없이 바빴기에 온지유를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온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며 갑자기 눈가가 붉어졌고 이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알겠어요!” 그녀는 육현성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육현성이 떠나자마자 강지한이 도착했다. 온지유의 붉어진 눈을 보고 또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울었다고 생각했다. “유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눈에 안 좋다고 울지 말랬잖아.” 강지한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달래야 했다. 온지유는 육현성의 다정함이 떠오르며 울음을 참지 못하고 더 크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고 강씨 가문의 저택에서. 심미연은 단정한 원피스를
‘차라리 돌아와서 직접 아는 게 낫겠어.’ “성 비서,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강지한의 목소리가 예리해졌다. 성무진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알게 된 사실을 모두 전했다. 강지한의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잠시 멈칫했다. 그날 전화로 심미연에게 온지유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그녀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었지만 그때 그는 뭐라고 말했지? 그는 심미연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심미연은 전화하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녀가 사과하고 싶지 않아서 그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큰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마 슬픔에 잠겨 있었겠지.’‘그래서 내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대표님.” 성무진은 전화기 속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부르며 물었다. “알았어. 그럼 여기까지 하자.” 강지한은 전화를 끊고 창밖의 차들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서 외할머니의 영정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그는 남편이었지만 아무것도 몰랐으며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그때 할아버지의 전화를 다시 떠올리니 아마 할아버지도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화가 너무 나서 전화를 끊어버렸던 거다. ‘할아버지는 나한테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강지한은 창가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 온지유의 전화가 다시 울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또 무슨 일이야?”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한 씨, 나 무서워.”온지유는 반쯤 진심이고 반쯤 아닌 듯 말하였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강지한은 신속하게 응답했다. “지한 씨, 내가 일 방해한 건 아니야?” 온지유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하던 강지한은 결국 그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전화기에서 울려 퍼지는 건 차가운 신호음뿐이었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바쁜 신호음만이 들려왔다. 강지한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심미연이라는 여자는 진짜 단 한 번도 그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잘못한 것도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다니. 그녀가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면 그 역시 그녀를 찾을 필요 없이 돌아가서 처리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강지한은 화면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 여자가 또 할아버지에게 고자질이라도 한 건가?’ ‘이젠 할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그를 혼내려는 걸까?’ 지난번에 매를 맞은 뒤로 최근 너무 바빠서 상처도 신경 못 썼더니 이제 염증이 나서 며칠째 고통스러웠다. 한참 후 강지한은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강지한! 너 요즘 어디에 가 있었냐? 왜 전화는 한 번도 받지 않는 거냐?”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는 듯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저 요즘 진성에 출장 갔었어요. 핸드폰을 계속 켜놓고 있었는데 왜 안 받았겠어요?” 강지한은 늘 그렇듯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는 정말로 전화를 꺼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쪽에 계속 있어! 평생 돌아오지 마!” 강준형은 화가 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출장을 갔을 뿐인데 전화가 계속 안 된다니. 그게 단순한 우연일까?강지한처럼 예리한 사람이 왜 이 정도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강지한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생각하고 있을 때 온지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그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지한 씨, 지금 어디야? 나 혼자 병실에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와서 좀 같이 있어 줄래?” 온지유의 목소리엔 떨림이 섞여 있었고 그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알았어. 금
“그럼 어머니가 계획한 대로 하세요.” 이진영은 어머니와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의 모든 결정은 이씨 가문을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그들은 이씨 가문의 명예를 누렸으니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할 수 없었던 일이니까. “넌 먼저 한유나 씨와 연락하고 다시 전화해 줘. 저녁 식사는 취소할게.” “알았어요!” 이진영은 전화를 끊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 연기 속에는 그 여자의 눈부시고 매혹적인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담배 한 개비를 마저 피우고 나자 여자의 얼굴도 사라졌다. 그는 살짝 웃으며 비서에게 한유나의 번호를 찾게 한 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전화기에서 여자의 자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당신의 소개팅 상대 이진영이에요.” “무슨 일이죠?”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냉담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태도지?’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별일 없으면 그냥 끊을게요. 바빠요.” “소개팅 상대로 만나려면 점심에 얼굴 한 번 봐야죠. 어디죠? 데리러 갈게요.” 이진영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연구소로 와요.” 그녀는 빠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생각했다. ‘역시 대가문의 따님답게 감히 나를 명령하네.’ “제가 일이 있어서 그럼 이만.” 그녀는 말을 끝내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바쁜 신호음이 들려오자 이진영은 코웃음을 치며 미소를 흘렸다. ‘잘난 척은 끝내주네.’ 그때 강지한의 전화가 걸려 왔고 이진영은 잠시 응급실에 있는 심미연을 떠올리며 망설인 뒤 전화를 받았다. “구도심 사람들 다 동의했어. 지금 와서 계약서에 사인해.” 강지한은 매우 지친 목소리였다. “내일은 안 돼?”그는 오늘 일정이 꽉 찬 상태였다. “오늘 밤에는 경성으로 돌아가야 해!” 강지한은 무의식
이진영은 신하린의 얼굴이 금세 빨개지는 것을 보고 살짝 눈을 좁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신하린,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 여자가 혹시 자기가 여기서 뭔가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이 병원이 자기가 소유하는 곳이라 해도 그런 식으로 무모하게 행동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하는 건 비밀스러움이 주는 그 자극적인 느낌이 있어 확실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오늘 밤 당신 집에 가야 되나요? 아니면 우리 집으로 올래요?” 신하린은 이제 거짓말도 입을 열자마자 술술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사실 남자도 그녀가 진심을 말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진짜 속마음을 말하면 상처가 될 테니까. “내가 네 집 하나 샀어. 일이 끝나면 같이 가서 보여줄게.”이진영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내가 사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신하린은 그가 주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에게 뭔가를 받는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뿐이었다. “너 그곳 너무 좁아. 할 때 별로야.” 이진영은 손을 뻗어 신하린을 품으로 끌어안으며 그녀의 매혹적인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서한테 큰 소파랑 넓은 침대로 바꾸라고 했으니까 오늘 밤 한 번 써보자.” 조금 조롱이 섞인 말투였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은근히 기대가 치솟았다. 신하린의 얼굴은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남자가 정말 끝까지!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 하는 거냐고.’ “너 밥 해줄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거기는 부엌도 넓고 기계도 다 새것으로 준비됐어...” 마지막 말은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이듯 말했고 신하린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었고 귀까지 붉어졌다. ‘이 남자는 정말 너무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고 신하린을 잠시나마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이진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며 번호를 확인
신하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박유진에게 말했다. “잠깐 다녀올게요. 먼저 여기서 미연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진영은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더 기다리게 하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박유진은 그저 응답했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신하린은 그를 그윽하게 한 번 쳐다보고 그제야 돌아서서 떠났다. 박유진과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가능성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접고 있었다.안전 통로에서 이진영은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연기가 퍼져 나가면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그 속에서 아련하게 비쳤다. 신하린은 문 앞에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참으로 잘생겼다. 그때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며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왜 안 와? 내가 널 잡아먹니?” 신하린은 시선을 떼고 한 발짝씩 그에게 다가갔고 마음속은 불안하고 떨렸다. 남자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신하린은 그의 앞에 다가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연이가 쓰러져서 박유진 씨와 함께 병원에 데려왔어요.” 이진영은 자연스레 그날 밤 강씨 가문에서 봤던 그 여자가 떠올랐다. 정말 독특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분위기 또한 차분하고 목소리는 매우 부드럽고 온화했다. 경성에서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웠음에도 강지한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남자들은 결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미연이의 외할머니가 사흘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혼자서 지키며 사흘을 보냈고 오늘 아침에 외할머니 장례식을 마친 후 쓰러졌어요.” 박유진과 자신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오해받길 원치 않았기에 그녀는 스스로 설명했다. 이진영은 눈을
신하린은 깜짝 놀라 손을 급히 떼었고 다시 돌아섰을 때 남자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최근 며칠 동안 그의 전화를 피했던 신하린은 마음속에서 불안이 밀려왔다. 여기서 이 남자가 자신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도 있는데 말이다. 이진영은 신하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속에서 폭발할 듯한 분노가 일렀다. ‘이렇게 겁을 먹은 정도로 내가 무서운 거야?’ 신하린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곧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급히 그 앞에 다가가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여긴 내 병원이야. 점검하러 왔는데 무슨 문제 있어?” 남자의 말투는 거칠었고 이미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신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에 제가 직접 요리할게요. 함께 와서 먹을래요?” 심미연의 임신 사실이 절대 누설되지 않도록 이진영이 이미 말해둔 상태여서 신하린은 심미연을 이곳으로 데려왔지만 여기서 이진영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예상 밖이었다. “나한테는 수석 셰프가 요리해 주는데 넌 셰프 자격증은 있어? 나한테 밥 해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진영은 차갑게 웃으며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며칠 동안 이 여자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도 답장하지 않았으며 영상통화는 아예 무시했었다. 그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이제 와서 한 끼 식사로 그를 달래려고 한다니 그건 어림도 없었다. “그럼 됐어요!” 신하린은 약간 당황한 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이 남자가 살짝 꼬리를 내리면 풀릴 줄 알았지만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셰프 수준은 아니지만 요리를 꽤 잘하는 그녀였고 남자의 말은 그녀를 정말 난처하게 했다. 박유진은 이진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와 신하린 사이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미연은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다면 알려야 할까?’
그는 그냥 강준형에게 더 이상 강지한의 일을 강제로 강요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강지한 같은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강준형은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미연이가 지난 3년 동안 겪은 그 모든 불공정한 대우는 다 내 잘못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계속 모른 척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그만둘 거야. 미연이가 이혼을 원한다면 그건 그 자식이 감당할 문제야.” 3일 후 양경자의 장례식이 있었다. 하늘에는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심미연은 검은 옷을 입고 우산을 쥔 채 묘비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 보였다. 마치 외할머니가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신하린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3일 동안 심미연은 잠을 2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사실 심미연이 잠을 자지 않은 것보다 이 3일 동안 한 번도 울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지나치게 조용했던 사실이 신하린을 더 두렵게 했다. 신하린은 심미연이 극단적인 생각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이 다가와 신하린과 짧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아, 외할머니는 이제 편히 잠드셨어. 집에 데려다줄게.” 이 3일 동안 그는 심미연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듣지 않았고 그녀가 하루하루 지쳐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외할머니는 편히 안장되었으니 그녀가 잘 수 있도록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랑 하린이는 먼저 가. 난 할머니랑 좀 더 있다가 갈게.” “너 3일 내내 잠도 자지 않았잖아. 더 버티면 몸이 망가져!” 신하린은 목소리가 떨렸고 눈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이 3일 동안 그녀는 심미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신하린은 문 쪽을 바라보다가 은발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강준형을 보고 급히 심미연을 불렀다. “미연아, 네 할아버지 오셨어.”심미연은 잠시 멈칫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준형은 지팡이를 짚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미연아, 이렇게 큰 일이 있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니!” 강준형은 그녀의 너무 지친 모습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정말 바보 같은 애구나.’ ‘어떻게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려고 했을까.’ 심미연은 일어나려 했지만 무릎이 너무 아파 일어설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할아버지, 어떻게 오셨어요?”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강씨 가문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강지한에게 외할머니의 죽음을 이용해 책임을 피하려는 교활한 사람일 테니 그 이미지대로 남기로 했다.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전화는 꺼져 있더라. 걱정돼서 사람을 시켜 확인해 봤더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미연아, 나는 네가 강지한 그 자식에게 마음이 떠난 걸 알아. 그런데 그놈은 그놈이고 나는 나야. 이런 일을 나한테까지 숨기지 말았어야지.”강준형은 빈소를 잠시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 바쁘게 모든 걸 처리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결국 이 모든 게 강지한 그 자식 때문이야!’ 강지한을 생각하니 강준형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심미연도 연락이 안 됐고 강지한도 연락이 안 되었다. 고의로 잠적을 한 건지 뭔 일이라도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면 반드시 그 자식에게 따지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바빳어요. 핸드폰도 꺼져버려서 잊고 있었어요.”심미연의 목소리는 피곤함에 찌든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기사님이 데려다주신 건가요?” 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강준형에게 진짜 생각을 말할 리 없었다. 강준형은 심미연의 눈에 짙게 퍼져 있는 혈관과 창백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내가 사람을 데려왔어. 나머지 일은 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