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 그녀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했다.심미연은 순간 수치심과 함께 증오심이 끓어올랐다.강지한의 횡포와 파렴치함이 너무나 증오스러웠다.그녀는 사람이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장난감이 아니었다.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미연아, 시작해! 날 화나게 하지 말고!”강지한은 일부러 말을 천천히 했다. 조금 전, 그는 분명 박유진의 눈에서 분노를 보았다.비록 박유진과 친구는 아니지만 박인우가 항상 곁에 있으면서 그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그래서 박유진이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박인우의 눈에는 박유진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렇게 자주 듣다 보니, 그도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되었던 것이다.예전에는 심미연과 박유진 사이에 그런 유년 시절의 추억이 있었는지 몰랐기에 박유진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들 두 사람 사이의 과거를 알게 된 데다가 심미연이 박유진의 편을 드는 모습까지 보니, 박유진에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적의를 느꼈다.그는 박유진이 심미연 앞에 나타나는 걸 원치 않았다.“내가 하면 당신은 차를 몰고 떠날 거야?”심미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지한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미연아, 내가 저 녀석을 어떻게 할까 봐 그렇게 무서워?”이 여자는 박유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말은 박유진을 위한 것이었다.그녀는 박유진을 너무 걱정했고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할 각오까지 되어 있는 듯했다.마음속에 이런 인식이 자리 잡자 분노만 느껴졌다.그와 박유진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던 심미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무 말도 안 하면 동의한 거로 알고 있을게.”말을 마친 후, 고개를 숙여 입술을 가져다 대고 서투른 동작으로 남자의 입술에 키스했다.강지한의 몸은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반응했다.그는 반사적으로 여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고 거의 허리를 부러뜨릴 듯했다.이 장면을 본 박유진의 눈에 고
심미연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강지한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강지한은 그녀의 떨리는 몸을 안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연, 얌전히 말 들어. 그렇지 않으면 꽤 힘든 날을 보내게 될 거야.”심미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면, 그는 그녀의 옷을 모조리 벗겨 박유진의 앞에 내던져서 박유진과 엮이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심미연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런 수모를 겪고 어떻게 박유진과 연락하겠는가?그는 언제나 결과만을 중요시할 뿐 과정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수단이 얼마나 잔인하든 상관없었다.이 끔찍한 상황 속에서, 심미연의 마음속에 싹튼 절망은 덩굴처럼 그녀를 옥죄어 숨 막히게 했다.‘지한 씨는 진심으로 나를 벗겨서 유진 오빠 앞에 내보이려는 걸까? 내 존엄은 안중에도 없는 건가?’만약 심미연이 아닌 온지유라면 결코 이토록 잔인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강지한은 항상 그녀에게만 가차 없었다.“내 옆자리를 힘들게 손에 넣었으면 평생 그 자리를 지켜야지.”강지한은 그녀의 귀가에 낮게 속삭였다. 자신을 건드려놓고도 다른 남자에게 갈 생각은 어림없다는 뜻이었다.굴욕감에 몸서리치며 심미연은 목구멍에 차오르는 쓰라림을 꾹 삼키고 흐트러진 옷을 정돈했다. 정돈을 마친 후 고개를 들어보니 강지한은 여전히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그런 그와 그녀의 초라한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심미연은 몸을 약간 틀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옆자리로 가도 돼?”방금 겪은 굴욕으로 확실히 알았다. 사람들이 그를 염라대왕으로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를 정말로 분노케 하면 진짜 염라대왕보다 더 무섭다.오늘은 억지로 그의 비위는 맞추는 데 그쳤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동시에 그녀는 강지한과의 결혼을 끝내야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심미연, 너 내가 무서워?”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그녀의 눈앞엔 두려움이 역력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일 정도였다.심미연은 조수석으
심미연은 재빨리 감정을 추슬러내고 강지한을 돌아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우리 엄마가 전화해서 오늘 저녁 너랑 나 보고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는데, 심서연의 결혼 문제를 의논하겠다나 봐.”“오늘 저녁 몇 시? 어디서 먹는데?”강지한은 연달아 물었다.심서연과 박유진의 결혼이라니 당연히 직접 개입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내일 당장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도 박수를 칠 것이다.“난 안 가.”부모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걸 아는데 뭐 하러 가겠는가.“근데 네 엄마가 나를 초대했잖아?”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의 뺨을 살짝 집으며 물었다. 박유진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기분 상한 건 아닌가 싶었다.“심씨 가문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봤자 사람들 심기만 불편해질 테니 갈 이유가 없지.”이미 슬픈 감정을 털어낸 심미연은 말할 때 옅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어릴 적 심서연이 실종됐을 때 그녀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들은 어린 그녀를 독종이라며 증오했다. 명백히 그녀 잘못이 아닌데도 말이다.강지한은 그녀의 담담한 표정을 보며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후 입을 떼며 말했다.“집안사람들이 널 안 좋아하는 건 네가 나를 본가에 자주 데리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야. 날 데려가기만 하면 너한테 아부하느라 바쁠걸?”심씨 가문 입장에서는 그에게 부탁할 일들이 있을 테니, 그가 심미연을 아낀다는 태도만 보이면 그녀에게 굽실거릴 게 뻔했다.“난 굳이 아부 받고 싶지 않고, 잘 지내고 싶지도 않아. 평생 이렇게 살 거야. 굳이 누굴 기쁘게 할 생각 없어.”강지한과 결혼한 지난 3년간 심미연은 깨달았다. 아무리 잘해줘도 진심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자신답게 사는 게 낫다는 것을 말이다.그녀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강지한은 잠시 불안해졌다. 혹시 앞으로는 자신도 비위를 맞춰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싶었다.시간을 확인한 심미연은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일단 날 로펌에 데려다줘. 이러다 늦겠어.”더 이상 이 주제를 이어가고 싶지
임현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재빨리 심미연을 사무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변호사님은 우선 사무실로 들어가요. 제가 상황을 알아볼게요.”목소리만 들어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임현은 혹시라도 누군가 심미연을 해치려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그러지 말고 차라리 경찰을 부르는 게 어떻겠어요?”심미연이 말을 꺼내는 순간 한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이 못된 년! 내가 이혼 소송을 맡겼더니 감히 내 남편을 유혹해?!”이 말에 로펌 내부는 금세 소란에 휩싸였다.의뢰인의 남편을 빼앗다니? 변호사가 상대편과 짜고 의뢰인을 배신한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삽시간에 퍼졌다. 도덕적으로 파탄 난 변호사는 자격이 없지 않냐는 비난도 터져 나왔다.임현은 급히 심미연 앞으로 나서서 그녀를 막아섰다. 거칠게 달려든 여자는 문틀을 붙잡고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이 상황을 참지 못한 임현은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증거도 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면 명예훼손에 해당합니다. 저희도 법적 대응이 가능합니다.”“증거 있어! 둘이 식사하는 사진이 내 손에 있다고!”여자는 증오로 불타는 시선으로 임현 뒤에 선 심미연을 노려보았다.“못된 년, 남의 남편을 꼬셨으면 당당히 나와서 나랑 맞서 보란 말이야!”여자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내가 돈 주고 고용한 변호사가 내 남편 편을 들어 내 등을 치다니!’그렇게 생각할수록 한이 치밀었다.심미연은 임현의 어깨를 살짝 젖히고 앞으로 나섰다.“그 사진에 나온 사람이 정말 저입니까?”며칠 전만 해도 의뢰인은 정서적으로 불안해 심야에 상담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무슨 오해나 음모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누가 뒤에서 나를 음해하려는 건가? 정말 악랄하네.’여자는 심미연의 담담한 태도에 더 화가 났다.‘이 여자가 합의를 자꾸 권유했던 게 내 재산을 빼앗기 위한 속셈이었나?’분노가 가슴속에서 다시 치밀어 올랐다.“사진을
심미연은 여자가 누군가에게 끌려 나가는 광경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로펌 안에서 함부로 그 여자를 어떻게 할 리도 없었으니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이상 이제 본격적으로 이 일을 누가 꾸민 건지 밝혀내면 될 뿐이었다.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긴 심미연은 인파 속에 숨어 있던 주아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뻗어 주아연의 가발을 확 잡아당겼다.“전에 도 대표님 차에서 정사하다가 사모님한테 딱 걸려서 머리를 밀리셨다던데... 가발을 쓰고 계셨군요.”이 업계에선 누군가 비밀을 만들면 또 누군가 그 비밀을 알아내기 마련이다. 한번 소문이 나면 금세 퍼져나가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주아연은 항상 그녀보다 못했다. 그래서 돈 많은 유부남이라도 꼬셔보려고 했던 것인데, 하필이면 상대가 아내를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나타나자마자 그는 꼬리를 내렸다.주아연이 그런 일을 당한 날로 누군가 그녀에게 영상을 보냈다. 주아연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녀도 이 영상을 공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현지 때처럼 말이다.주아연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고 로펌 내에서 아무 소문도 듣지 못했기에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심미연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이야. 증거까지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그리고 아까 나간 제 의뢰인께 제가 그분 남편을 꼬셨다고 부추긴 사람도 주아연 변호사님 맞죠.”심미연은 여자가 보내준 사진을 휴대폰으로 열어 보였다. 사진 속 여성의 등에 있는 붉은 점을 짚으며 말했다.“주아연 변호사님 등에도 똑같은 붉은 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사진 속 얼굴은 분명 주아연이었지만 몸은 다른 여자였는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단숨에 달라졌다.“아까 의뢰인이랑 주아연 씨가 비상계단 쪽에서 속닥이던데 한패였나 봐.”“또 심 변호사랑 동시에 들어왔잖아. 심 변호사는 벌써 유명 변호사가 됐고 주아연 씨는 아직 재판도 못 나가봤다던데... 질투였나?”
진아리에게 최대한 유리한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심미연은 요즘 계속해서 증거를 모으고 진아리 남편 주변 인물들을 몰래 조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아리를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돌아온 건 뒤통수에 칼을 꽂는 배신이었다.그런 사람이라면 평생 고통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사람을 힘든 상황에서 구해줄 필요도 없었다.임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변호사님, 이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심미연은 옷차림을 가다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차를 기다리며 심미연은 신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신하린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묻어났다.“미연아, 미안해!”“나 배 아파. 의사한테서 약 받아서 법정으로 좀 가져와 줘. 지금 당장. 재판 시작 전에 꼭 먹어야 해!”아까 그 여자가 달려들었을 때 손으로 막은 덕에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났다. 아니었으면 더 심하게 아팠을 것이다.요즘 들어 왜인지 자꾸 배를 다치는 일이 많았다.‘이러다 뱃속 아이가 언젠가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면 어쩌지...’그녀는 속으로 불안감이 스쳤다.“배 아픈데도 법정에 가겠다는 거야? 그렇게까지 해야 해?”신하린은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심미연이 안쓰러워서 한마디 했다.임신한 사실을 강지한에게 들키지 않으려니 입원조차도 미리 가짜 진단서를 준비해야 했다. 배가 아파도 일을 미룰 수 없었고, 혹시라도 임신 사실이 드러날까 매일 전전긍긍이었다.“지금은 참을 만해. 걱정 말고 빨리 병원 가.”심미연은 미간을 짚으며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몸 상태 계속 신경 쓰고 이상하면 당장 병원 가는 거다, 알지?”신하린은 조바심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했다.“응, 알겠어.”마침 차가 도착하자 심미연은 전화를 끊었다.차에 오르자 임현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변호사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제가 대신 신청이라도...”“아니에요, 괜찮습니다.”오늘 이 재판은 반드시 치러야 하고 미룰 수 없었다.임현은 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심미연은 무심결에 휴대폰을 꽉 쥐었다.시어머니가 그녀에게 리우를 떠나라고 하는 건, 온지유를 위해 걸림돌을 치워주는 걸까? 마치 이전에 그녀가 누군가를 시켜 수액에 유산약을 주입했던 것처럼 말이다. 온지유가 임신했으니 그녀의 아이는 죽어야 하는 건가 싶었다.“내가 통보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어머님한테 직접 전화하게 할게!”수화기 너머로 거칠어진 숨소리를 들은 온지유는 속으로 크게 흡족해하며 말했다.“내가 임신했으니, 넌 무조건 나한테 양보해야 해. 알겠어?”심미연은 힘껏 심호흡을 하고 나서 답했다.“지한 씨가 리우의 대표예요. 해고 건은 지한 씨가 직접 말하라고 하세요!”강지한이 가라고 하면 그녀는 주저 없이 떠날 것이다.온지유는 콧방귀를 뀌었다.“심미연, 너 지금 어머님한테 대놓고 대드는 거야? 아니면 강씨 가문의 늙은이가 널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그녀는 속으로 심미연이 문소영과 갈라서길 바랐다. 그래야 강준형이 보호하고 싶어도 못 보호할 테니까. 심미연이 집안에서 쫓겨나는 것도 시간문제다.그렇게 되면 그녀가 강지한의 합법적인 아내가 될 수 있고, 뱃속에는 강지한의 아이까지 있으니 강씨 가문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지위는 강지한 바로 다음이다.온지유는 강지한과 함께하는 수많은 장면을 마음속에서 그려봤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장면들이었고, 강지한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갈수록 강렬해졌다.심미연은 온지유가 강준형을 그렇게 험담하는 걸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지한 씨와 결혼한 3년 동안, 제가 여기까지 온 건 할아버지 도움 아니라 제 힘입니다! 팀장님, 마지막으로 말씀드릴게요. 본인 위치를 똑바로 하세요! 지한 씨와 저는 부부고, 리우는 저희 거예요! 제가 떠나는 건 아무나 결정할 수 없고 오직 지한 씨만 할 수 있어요!”온지유가 리우에 온 첫날부터 심미연은 자신이 언젠가 해고당하리란 걸 예감했다. 다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을 뿐이다. 그렇지만 온지유 앞에서만큼은 절대 기죽지 않을 것이다.임현은 그 말
자신처럼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리우에 온 첫날부터 심미연이 봐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임현은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심미연의 사과를 받겠는가.“전에 제가 리우에서 어떤 신분이었든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이건 임현 씨 혼자만 알고 계시면 돼요.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요!”심미연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사모님이라고 부르지도 말고 계속 변호사님이라고 부르면 돼요.”사모님이라는 호칭도 그저 하나의 호칭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임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로펌의 다른 사람들은 줄곧 온지유를 미래의 사모님으로 떠받들어왔는데, 진짜 사모님은 이미 모두 곁에 있었다고 말이다.심미연이 너무 꽁꽁 잘 숨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즉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 안달이었을 소식을 말이다.하지만 임현은 걱정되었다. 이제 심미연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었으니 예전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고, 당연히 어느 정도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로펌 사람들은 눈치가 빠른 편이라 언젠가 이 변화를 눈치챌 수도 있었다. 그러면 심미연의 비밀을 지키기 어려울지도 몰랐다.“임현 씨, 오늘 사건 꼼꼼히 검토해 봤나요?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면 승률을 더 높일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심미연이 임현에게 물었다.법정에서는 순간적인 대처 능력이 관건이다. 상대방이 언제든 새로운 증거나 증인을 내세울 수 있다. 강한 멘탈과 빠른 대응력이 없으면 승소하기란 정말 어렵다.“아니요...”임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심미연을 따라 법정에 나갔을 때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갑자기 의견을 묻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생각해 보지 않았어도 괜찮아요. 다음에 사건 자료를 정리할 때는 좀 더 고민해 보세요.”만약 심미연이 리우를 떠나게 된다면 임현은 혼자 성장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가능한 한 많은 걸 익혀두는 게 그녀에게 유리했다.임현은 심미연이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변호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
“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온지유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지금의 온지유에게 육현성은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육현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심미연, 기다려. 복수할 기회는 반드시 만들 거야.’“세상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유야, 그런데 만약 네가 날 배신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육현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만약 온지유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걸 느낀 온지유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지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오빠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엔 오빠만 사랑할 거고 영원히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온지유는 속마음을 감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육현성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유야, 이제 좀 쉬어. 나는 아래층 좀 보고 올게. 밥 먹을 때 부를게
보통이라면 그녀가 화를 내면 강지한은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영은 성무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만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성무진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손짓하며 말했다. “큰 사모님, 모시겠습니다.”문소영은 강지한을 향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강지한! 너 계속 이렇게 나를 몰아붙인다면 정말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성 비서, 데려가.”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문소영의 모습이 점점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무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큰 사모님.” 그 말과 함께 그는 차가운 손길로 문소영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당장 놔!” “손 떼! 지금 당장!” 문소영은 크게 외치며 저항했지만 성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거칠게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운 후 성무진은 팔을 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문소영은 재빨리 차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큰 사모님, 죄송합니다.”성무진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문소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무진은 그녀를 차 안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 밖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역시 대표님을 화나게 하면 끝이 좋을 리가 없지.’‘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성무진은 갑자기 떠오른
도진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진지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신하린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어제 하린이를 하늘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한 번 들러보세요. 하린이 곁에 조금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미연은 서류봉투를 흘깃 바라본 뒤 덧붙였다. “이 서류는 제가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도진혁이 직접 합작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이상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수익이 보장된 일이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놓쳐선 안 되는 법이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도진혁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 방금 전 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서 조용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린이 목에 남은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 텐데...’‘진혁 씨가 그걸 보면... 혹시 이진영 씨에게 따지러 가는 건 아닐까?’강지한 사무실.성무진은 문소영을 데려다주고 서둘러 떠났다. 강지한의 얼굴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성무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문소영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느긋하게 쏘파에 앉았다. “비서한테 차 좀 가져오라 해. 괜찮은 차로.” 그녀는 비서부가 꽤 유능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알아서 해줄 정도로. 하지만 강지한은 말없이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그 봉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직접 보시죠.”“뭘 보라는 거야?” 문소영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시선을 던졌다. “보면 알아요.” 강지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뭐가 들어있길래...?” 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봉투를 들었다. 무
심미연은 박유진이 수년 동안 마음을 다해 사랑해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박유진이 쉽게 놓을 리 없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정말 모든 걸 걸고 계시는군요... 제발 심미연 씨가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기를...”한편,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진혁이었다. 그는 마치 급히 돌아온 듯 피곤하고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 비서님...?” 심미연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휴가를 낸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그의 뒤에서 따라 들어온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심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분은 저희 도강홀딩스의 대표, 도진혁 대표님이십니다.”비서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서류는 도강홀딩스와 은성 그룹이 합작할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서입니다. 먼저 검토 부탁드립니다.”심미연은 비서가 놓고 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혁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진혁 대표님...?’ ‘그렇다면 도진혁 씨가 휴가를 낸 이유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그때 도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잠깐 나가 있어. 심 대표님과 단둘이 얘기할 게 있어.” 도진혁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신경 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은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그에게서 흐르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 엘리트의 품위였다. “네. 대표님.” 최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심미연을 한 번 쳐다봤다. ‘이분이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분인가... 정말 예쁘다. 대표님이 회사를 물려받은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면 이해
전화를 받자마자 박유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미연아,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오늘 실검에 너 이름이 올라서...”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한마디에도 목소리에는 슬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기다림 끝에 다가온 것은 예상했던 이별이었다. ‘결국 우리는 엇갈릴 운명이었던 걸까?’언젠가 마주할 결말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감정은 휘몰아쳤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기사를 본 뒤 그는 두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겨우 전화를 걸었던 이유는 사실 아직 남아 있는 미련 때문이었다. 끝이라면 끝이라도 적어도 그 이유는 알고 싶었다. 심미연은 자신이 지시한 기사 내용을 떠올리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 표정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실검에 오른 그 기사, 내가 일부러 퍼뜨린 거야.”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온지유가 나왔어. 태하가 위험해질까 봐... 그 여자를 끌어내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어. 어쩔 수 없었어.” 온지유는 어둠 속에 숨어 있고 그녀는 그 빛 속에 서 있다. 상대는 그녀를 바라보지만 그녀는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 불안한 감각이 점점 가슴 속 깊이 스며들며 심태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온지유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모습을 드러내길 바랐다. 심미연은 그 여자가 강지한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자신과 강지한이 다시 만났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바로 온지유를 붙잡을 기회가 될 것이다. 박유진은 그녀의 설명을 들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의 목소리에 힘이 조금 실렸다. “그랬구나... 다행이다. 사람 몇 명 더 붙일게. 미연아, 정말 조심해야 해. 그 여자는... 완전히 선을 넘은 사람이야.”
심미연은 신하린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아침 식사를 이어갔다. 아침을 다 먹고 난 후 심미연은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심태하도 유치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 한편, 백선영은 휠체어를 밀며 신하린을 거실로 데려왔다. “신하린 씨, 여기서 편하게 쉬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네. 고마워요. 가서 일 보세요.” 백선영은 식탁 정리를 하러 주방으로 갔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어쩌다 다리를 잃은 거야...’ 그때 심미연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심태하도 유치원복을 입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세 살짜리 아이지만 늘 옷을 깔끔하게 입고 다녔다. 엄마를 보자마자 심태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달려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 우리 이제 가요.” 심미연은 그런 아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열정적인 반응이었다. “너 유치원 가기 싫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가고 싶어 하는 거야?” 뭔가 이상했다. 심태하는 순간적으로 등을 꼿꼿이 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더 많은 걸 배워야 엄마를 잘 지켜줄 수 있지.” ‘이 녀석,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 거야?’ “내가 강해지면, 아무도 우리한테 함부로 못 할 거예요.” 진지하게 말하는 아들을 보자 심미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 꼬맹이,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워 온 거야... 눈물 날 것 같네.’ 신하린은 그런 심미연을 보며 속으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따뜻한 아들이 있다니. 진짜 부럽다...’ 심미연은 생각을 멈추고 아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신발을 신고 나가기 전 신하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린아, 나 간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유치원으로 가는 길에 심미연은 심태하에게 당부했다. “낯선 사람하고 말하지 마. 그리고 모
“입 닥쳐.” 강지한이 짜증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들이 돌아오길 제일 바랐던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열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박시훈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전처랑 완전히 끝난 거 맞지?” ‘그렇다면 이제 자기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 아닌가?’ “너, 한 마디만 더 해봐.” 강지한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새파래졌다. 설령 심미연이 자신과 끝난다 해도 박시훈 같은 놈을 허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겠어. 그럼 내가 직접 물어보러 가지 뭐.” 박시훈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강지한은 핸드폰을 쥔 채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심미연, 박유진 하나로도 모자라서 또 다른 남자까지 꼬드기고 있는 건가?’ ‘정말 남자를 끌어들이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군.’ 심미연의 저택.아침 식사 도중 심미연은 재채기를 했다. “엄마, 여기.” 심미연이 재채기하자마자 심태하가 재빨리 휴지를 뽑아 건넸다. 그의 작은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엄마, 감기 걸린 거야?” 엄마가 아프면 힘들어하니까 심태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냐. 감기 안 걸렸어. 걱정 안 해도 돼.” 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심태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표정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린은 괜히 가슴이 찡했다. ‘이런 기특한 아들을 키우는 기분은 대체 어떨까?’ ‘나도 아들 하나 낳고 싶어지네.’심미연은 사용한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아들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엄마는 어른이니까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태하는 엄마 걱정 안 해도 돼. 알겠지?” 다른 집 아이들은 이 나이면 그저 먹고 놀기에 바쁠 텐데 심태하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그게 안쓰러워서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때 심태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남자는 여자를 챙겨줘야 하는 거라고.”
“다 말했어? 다 했으면 이제 가.” 심미연은 강지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강지한이 찾아온 목적이야 뻔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번이나 그의 말에 넘어간 결과가 뭔가? 아들이 끌려갔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이제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아무리 미안해해도 그가 아무리 후회해도 그녀에게는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상미가 아무리 불쌍하다고 해도 결국 남의 집의 아이였다. “그럼 난 가볼게.”강지한은 심미연이 최소한 한 번쯤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냉정했다. 그녀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애초에 갈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착잡한 감정을 느꼈다. 눈앞에 어린 딸의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이 아려왔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초래한 일이었다. 그는 수없이 그 모자를 상처 입혔고 이젠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심미연이 문을 닫고 들어가자 그는 무심코 문틈을 바라봤다. 잠시 스치듯 보인 것은 심태하의 밝게 웃는 얼굴이었다. 순간, 가슴이 답답했다. 그 아이가 자기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엔 오직 차가운 증오만 담겨 있었다. 조용히 문을 바라보다가 강지한은 무거운 걸음을 돌렸다. 차에 올라탄 순간,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보니 성무진의 전화였다. “대표님, 임지혜 씨가 들어올 때 영상 찾았습니다.” “지금 당장 회사로 갈게. 사무실에서 기다려.” 그는 단숨에 차를 돌려 회사를 향해 달렸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사무실로 향했고 들어가자마자 성무진이 대형 스크린에 영상을 띄웠다. 화면 속에서 문소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럽게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