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사랑하냐고?고정재는 이 질문을 수천 번도 더 생각해 봤다.그는 평생 덤덤하게 살아왔고 결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처음 연수아를 만나고 나서 그녀의 변함없는 확신에 감동하며 마음속에 서서히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녀에게 한평생까지 약속했다.그러나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엄현히 달랐다.그는 눈앞에 있는 이 아이를 사랑한다.그녀는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었다.비록 그녀의 성격이 그보다 더 차갑다 해도 상관없었다.고정재는 몇 해 전 설날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단호하게 그를 거절했고 올해 설날에 다시 그의 마음을 고백하려던 찰나, 그녀는 다른 남자랑 함께 핀란드로 떠나버렸다.다른 남자와 함께 새해를 보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정재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마음속은 온통 슬픔과 무력감 그리고 그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이 아이는 결코 그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그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마침 연수아에게서 문자를 받았다.그녀가 단지 일 때문에 핀란드에 간 것임을 알게 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은 그녀를 원망했다.지난 2년 동안 그의 일방적인 감정이었다.그 생각에 고정재는 억울함을 느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그는 이 추격전에서 결국 졌다고 생각했지만 담현아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저랑 결혼할래요?”그는 그녀와 남은 생을 함께하고 싶었다.그는 간절히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그는 서둘러 서류를 챙기고 아일랜드로 향했다. 결혼 등록소에서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한겨울에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야말로 너무 아름다웠다.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현아야.”그는 그녀보다 14살이나 더 많았다.사실 그는 나이가 많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너무 어리다 보니 고정재가 나이가 많아 보였다.담현아는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바
오늘 밤의 일은 정말 불쾌하게 끝났다. 담현아가 그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진심으로 최희연을 친구로 여겼다.별장에 거의 도착했을 때 함승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가주님, 죄송합니다. 아까 샤워 중이라 보내신 메시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석씨 가문에서 분명 가능할 겁니다. 가주님께서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 알려주세요.”나는 최희연을 위해 복수를 하고 싶었다.주민솔이 저지른 일을 그에게 자세히 설명하자 그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습니다. 가주님의 뜻에 따라 처리하겠습니다.”석씨 가문과 고정재가 동시에 주민솔을 상대했다. 비록 진유겸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보니 형벌까지 내릴 수는 없겠지만 그가 양어머니와 관련된 일을 마치고 나서 주민솔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이미 늦었을 것이다. 그동안 그녀는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며 고통을 겪을 것이다.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다.“희연이 너무 안타까워.”마치 예전의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하지만 어떤 일은 스스로 받아들여야 했다.게다가 오늘 그녀의 상태를 보니 꽤 괜찮아 보였다. 진유겸이 그녀의 얼굴 흉터를 보았을 때 잠시 당황한 것 외에는 늘 차분함을 유지했다. 심지어 진유겸 앞에서 주민솔을 고발하기까지 했다. 예전의 그녀라면 아마 진유겸을 위해 한발 물러섰을 것이다.석지훈은 깊은 생각에 빠진 나를 보더니 물었다.“둘의 이혼 때문에 그래? 사실 진유겸은 나름의 사정이 있어.”그는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내 궁금해서 물었다.“유겸 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희연이를 잠깐 사랑했던 거예요?”창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는 창문을 닫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주민솔은 어린 시절부터 진유겸 곁에 있었어. 아마 열다섯 살 때, 진유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었어. 그 당시 유겸은 아무런 권력도 없어서 그저 주민솔이 그 남자들에게 농락당하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 일이 있고 주민솔은 죽을 뻔했어. 정신 상태가
그 시절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우스웠다면 지금의 최희연 역시 똑같이 억울하고 우스웠다.나는 고개를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단호하게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 항상 오빠를 선택할 거예요. 어떤 사람이나 어려움 때문에 오빠를 떠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그는 짧게 대답했다.“그래.”...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에게 아이들을 보러 석씨 별장에 가자고 했고 그는 나를 거절했다.“일찍 쉬어. 내일 상주시에 가서 볼 일이 있어. 돌아오면 그때 같이 보러 가자.”석지훈은 절대 피곤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문득 그가 두 아이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마치 나 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아이들에게 다소 냉담해 보였다.나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다소 불쾌했다.씻고 나서 배에 난 상처를 확인했더니 거의 다 나았다. 하지만 항암제는 계속 복용해야 했다.수술하고 나서 정신 상태는 훨씬 나아졌고 예전처럼 자주 기절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완치된 건 아니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암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병이 아니었다. 지금 상태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러웠다.욕실에서 나왔을 때 석지훈은 침대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었다.나는 그의 품에 기댔고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그리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일부러 말했다.“아이들이 보고 싶어요. 지금쯤 자고 있을까요?”그는 차분히 대답했다.“이미 늦었어. 자고 있을 거야.”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달래듯 말했다.“내일 최대한 빨리 운성시로 돌아올게. 그때 같이 보러 가는 거 어때?”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코끝에서 은은히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곧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소리가 나는 바람에 반쯤 잠이 깬 상태로 눈을 떠보니 그는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나는 졸
그녀의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라면 충분히 답을 알고 있을 만큼 똑똑했다.나는 침실에서 나오면서 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해?]주방으로 가서 우유 한 잔을 따르며 잠시 생각한 뒤 다시 물었다.[너랑 정재 씨, 둘이 관계를 맺은 적 있어?]담현아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아직이요.]아직이요...석지훈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직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나는 우유 한 모금을 들이마신 뒤 다시 물었다.[그럼 원해?]그리고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은 채 냉장고에서 빵 한 조각과 상추 두 장을 꺼내 간단히 토스트를 만들었다.담현아는 다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아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와 정원에서 살구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리고 별장 입구에 나와 보니 현정우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정우 씨는 어디서 사는 거예요?”“석 대표님께서 옆 별장을 매입하셨어요. 매일 밤마다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방금 교대했습니다.”“그렇네요, 그럼 지금 저랑 희연이 만나러 가죠.”나는 최희연의 집으로 찾아갔더니 그녀는 별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녀를 데리고 가게 계약을 마친 뒤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야.”그녀가 말하지 않으니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계약을 마친 뒤 최희연은 비서 강해온과 함께 가게 인테리어를 논의하러 갔고 나는 석씨 가문의 일을 처리하고 나서야 아이들을 보러 가려고 차에 올랐다. 그때 원태웅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어디야?][운성시.][둘째 형은 지금 상주시에 있어.][어제 저한테 말했어요.][상주시에서 다치지 않겠지?]원태웅은 의문스러운 말투로 물었다.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뭐가 다친다는 거죠?][상주시에 형의 원수가 있어.]그 말을 듣고 나니 순간 마음이 얼어붙은 듯했다. 나는 석지훈의 안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때 원태웅이 나에게 물었다.[나랑
나는 놀라운 마음으로 현정우를 보며 말했다.“보고 싶대요.”그는 웃으며 말했다.“대표님은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시죠.”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정확히 어디에 있어요?]그는 영리하게 되물었다.[지금 상주시야?][네.]석지훈은 곧바로 나에게 위치를 보내왔다.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현정우와 함께 서둘러 찾아갔다.그곳에 무사히 있는 그를 보자마자 나는 문득 원태웅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가까이 다가가 핑계를 대며 말했다.“셋째 오빠가 절 데리고 왔어요. 이곳 풍경이 좋다면서, 그러더니 여기 도착하자마자 날 버리고 가버렸어요. 그래서 상주시에 있는 김에 오빠한테 연락한 거예요.”석지훈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너도 상주시에 오고 싶었던 거야?”당연했다. 그가 여기에 있으니 당연히 오고 싶었다.나는 그 앞에서 내 사랑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의 팔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네, 너무 오고 싶었어요. 근데 상주시가 아니라, 상주시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석지훈은 허리를 굽혀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현정우가 보는 앞에서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아가, 많이 컸네.”나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왜 여기에 온 거예요?”“개인적인 일 때문에.”석지훈은 자세히 말하려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눈치채고 이내 질문을 바꿔 언제 운성시로 돌아가는지 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 줄래?”나는 그와 함께 공식적으로 연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다소 기대되었지만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고민 끝에 나는 따라가기로 했다.그는 나를 데리고 호텔로 갔다. 나는 침대에 기댄 채 지긋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씻을래?”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나는 그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어요.”나는 거절했다.그는 더 이상 나를 강요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 일은 지나갔다.나는
석지훈이 상주시에 있는 연회에 참석한다면 조민수도 분명 올 텐데 그때면 김예진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항상 나를 가족처럼 대해줬고 힘든 순간마다 나에게 도움을 주곤 했다.가는 길에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요즘 잘 지내세요? 오빠랑 뭐 하세요?]그녀는 놀란 이모티콘을 보내며 답했다.[나랑 네 오빠는 집에 있어. 곧 연회에 참석할 건데 혹시 무슨 일 있어? 수아야, 너 혹시 지금 상주시야?”그녀는 금방 눈치챘다.나는 석지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네, 무슨 연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훈 씨가 말 안 했어요. 그냥 지훈 씨랑 함께 가는 거예요. 이따 거기서 봐요.”그녀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한씨 가문이 상주시에 새로 지사를 설립했어. 그래서 현지 유명 가문들을 초대한 거야.”한씨 가문?혹시 한민영의 가문인가?그러면 석지훈이 상주시에 온 것도 원태웅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모두 이해가 됐다.그런데 나는 이 모든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나는 날카로운 옆태의 석지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무슨 일이든 혼자 마음속에 감추고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다.심지어 지금 참석할 연회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나는 그의 성격이 과묵한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점점 불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마치 나와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 그의 바깥 세계에 있었던 것 같았다.나뿐만 아니라 우리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연회장에 도착한 후 석지훈은 먼저 차에서 내리더니 직접 내 차 문을 열어 주었다.그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조명 아래로 들어섰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은색 정장을 입은 고현성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지금 고씨 가문의 고민영과 함께 있었다.고민영은 고현성의 사촌 여동생이다. 2년 전 1억 원을 들고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과 연애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녀와
고민영은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제 친구가 저쪽에 있어서 먼저 갈게요. 언니, 저랑 나중에 다시 얘기 나눠요.”또 나를 언니라고 부르다니...정말 답답했다.지금 자리를 뜬 것도 고현성에게 나와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왜냐하면 그녀가 떠나자마자 고현성은 곧바로 나에게 제안했기 때문이다.“우리 저쪽 가서 얘기 좀 할까?”나는 거절했다.“미안하지만,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요.”우리 둘의 일은 이미 과거형이었다.내 단호한 태도에 그는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계속해서 너한테 상처 줬어.”고현성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후회가 담겨 있었다.그는 화려한 연회장을 쓸쓸히 바라보며 말했다.“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너를 다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하지만... 우리 3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내가 먼저 잘못한 건 맞아. 그 후로도 내가 잘못했고, 물론 다 유서정 때문이긴 했지만...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 모든 건 내가 저지른 일이니 책임도 내가 져야 해. 네가 나를 원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래도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고현성의 진심 어린 고백에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슬픔에 젖은 그의 옆모습을 보며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삼켜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연회장을 지나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수아야, 바람이 사는 거리는 너와 고정재의 이야기야.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너한테 안겨준 상처 외에 남은 게 뭐가 있겠어?”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과거 이야기는 그만해요.”“난 그때 오혜원을 시켜 네가 치료를 받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지금도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수아야, 하지만 이건 꼭 말하고 싶어. 내 평생 유일하게 후회하는 게 바로 2년 전 이혼 서류에 그
내 모든 사랑을 오직 너 한 사람한테 주고 싶다고...고현성은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였다. 그가 지금 이렇게 집요한 모습을 보이니 가슴이 아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다잡고 돌아섰다. 그에 대한 내 마음속 불쾌함은 갈수록 깊어졌다.그는 어떻게 계속해서 나한테 상처 입힌 뒤에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어떻게 내 모든 사랑을 오직 너 한 사람한테 주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건 나를 조롱하는 거나 다름없었다.그때 나는 그한테 이생은 너 하나뿐이라고 했던 말을, 그리고 내가 또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그때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쳐야 했을까?고현성을 평생 지키는 게 당연한 건가?나한테 행복을 추구할 권리조차 없는 건가?나는 정말 어렵게 석지훈을 만났다.차갑기 그지없지만 나한테는 따뜻한 남자.평생 함께하고 싶은 남자.석지훈과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석지훈이 냉랭한 태도로 “아직”, “다시는 없어”, “이생에 너 하나뿐”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좋고 다정하게 “아가”라고 부르는 것도 좋았다.그토록 강인한 남자였고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알면서 단 한 번도 나한테 상처 입힌 적 없는 그 남자를 나는 너무도 사랑한다.나는 이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그리고 그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도 모른다.그는 말이 별로 없고 뭐든 짧게 말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천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차갑고 냉혹해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뜻했다.그의 강렬하고 힘 있는 서체와 살짝 문학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말투와 고지식한 성격도 좋다.나는 그의 모든 게 좋았다.나는 귀빈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누구도 없었다. 창가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담현아는 황급히 부인했다.“말도 안 돼요. 난 아직 어린데 무슨 애를 가져요. 그리고 아저씨도 아직 우리 집에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 없어요. 연말쯤에나 생각해 보려고요.”“임신한 줄 알았잖아.”담현아는 재빨리 대답했다.“아니라니까요.”그녀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서려고 했다. 내가 조심하라고 당부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석씨 가문 전체가 언니 거고 지훈 오빠도 여기에 있는데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어요.”조심하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에 특히 아이들 일에는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담현아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섰다.나는 윤아를 비서에게 넘겨주었고 그는 담현아를 따라갔다.두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원에는 다시 나와 현정우만 남았다.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방에 같이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현정우는 휴대폰으로 날씨 예보를 확인하고는 말했다.“가주님,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그칠 것 같네요.”“음, 다행히 봄비는 보슬보슬 내리니까.”나는 아버지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음침했다.이곳에 오는 것은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으스스했다.현정우는 방의 불을 켰다. 밝은 불이 아니라 어두운 불이었다. 현정우는 오랫동안 석씨 가문 사람이었기에 내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설명했다.“저는 훈련을 받고 여러 차례 선발 과정을 거친 후 처음부터 이 정원을 지키는 일을 했어요. 근데 밖에 나갈 기회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석 회장님은 1년 내내 매일 방 안에만 계셨거든요. 가장 멀리 가본 곳이라고 해 봐야 새해에 가족들과 거실에서 식사하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석씨 가문 사람들은 회장님을 두고 방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나 보다 하고 수군거렸었지요. 하지만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사모님이 이 방을 정리했고 석 대표님도 함께 계셨는데 아무런 비밀도 없었습니다. 다만, 작은 밀실이 하나 있는데 아무도 열 수 없었죠. 부수지 않는 이상은요. 사모님은 부수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직 이정희에게 원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것은 석지훈을 위해서였다.나는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랐다.강해온이 아이들을 데리고 석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담현아도 와 있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물었다.“너 여긴 어떻게 왔어? 아니, 너 내 비서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지훈 오빠가 나보고 언니랑 같이 있으라고 하던데요.”이 시간에 석지훈이 담현아를 나에게 보내다니...나는 담현아에게 의아하게 물었다.“이해가 안 돼. 내일 아침이면 우린 떠날 건데, 너 괜히 왔다 가는 거잖아?”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도 이해가 안 돼요. 근데 연락은 아침에 받았는데 내가 일이 있어서 늦어졌어요. 그러다가 저녁에 이쪽으로 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강 비서님을 만났거든요. 그냥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목적지가 같더라고요. 아, 맞다! 윤민이가 방금 나보고 이모라고 불렀어요!”나는 그녀의 품에서 윤민이를 받아안으며 물었다.“네가 가르쳤어?”“강 비서님이 가르쳤어요. 이 녀석 너무 똑똑해요! 볼수록 너무 사랑스러워요. 근데 수아 언니, 나 윤아랑 윤민이 양엄마 하면 안 될까요?”나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너 아직 한참 어리잖아.”내가 거절하자 담현아는 시무룩하게 말했다.“사람 무시하지 말아요. 나도 결혼한 성인이거든요.”“알았어, 알았어. 성인인 거 인정할게.”내가 쉽게 허락하지 않자 담현아는 더 이상 조르지 않고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양엄마는 안 할 테니까 그냥 이모 할게요.”담현아는 아직 어려서 아이들의 양엄마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담현아와 함께 정원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석지훈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누가 데려왔어?”내가 설명했다.“내가 강 비서에게 부탁했어요.”석지훈은 담현아의 품에서 윤아를 안아 들었다. 윤아는 그의 품에서 얌
수아야. 넌 참 가여운 사람이야.난 도대체 내가 왜 불쌍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석지훈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고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내가 어떻게 오빠에게 차갑게 대할 수 있겠어요? 난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오빠가 날 원망할까 봐 무서웠고요.”석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추고 단호하고 따뜻하게 말했다.“난 오빠를 좋아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오빠를 사랑하고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나는 고현성과 사귈 때 키스를 거의 하지 않았고 석지훈과도 자제하는 편이었다.아마도 장례식 중이라 그런지 석지훈은 나를 놓아준 후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그저 나를 품에 안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정우의 말대로, 남자는 그저 따뜻함을 원하는 존재인 것 같다. 따뜻함을 충분히 주면 만족하는 것 같았다.지금의 석지훈처럼 말이다.그는 계속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꼭 어린아이 같았다.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다.그는 내가 아직도 그 자세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일어나 나를 눕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윤아야, 왜 나를 안 불렀어?”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깨울까 봐...”내 말을 듣자 석지훈의 표정이 누그러졌다.“다음에는 그러지 마.”그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내일 아침에 어머니 장례식이 끝나면 너랑 같이 운성에 갈 거야. 운성에서 며칠 있다가 아이들과 함께 핀란드로 가자.”나는 놀라서 물었다.“나랑 아이들을 핀란드에 데려간다고요?”석지훈은 검은색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그는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내가 말했잖아. 앞으로 널 내 세상으로 데려가겠다고. 윤아야, 더 이상 너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널 내 곁에 두고 싶어. 우리 핀란드와 운성을 오가며
점심에 차를 너무 많이 마셨던 탓에 밥도 못 먹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배고파요.”석지훈은 짧게 응수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문가에 서서 무덤덤한 눈빛으로 천장의 하얀 등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속으로 굉장히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힘들어도 모든 고통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나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다.특히 그의 어머니가 나 때문에...나는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현정우가 밥을 가져왔다. 석지훈은 많이 먹지 않았고 나도 입맛이 없어서 많이 먹지 못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석지훈은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그동안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 석지훈을 찾아갔다. 그는 이미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좀 쉬라고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중에.”아침부터 하루 종일 석지훈은 계속 바쁘게 일했고 석나은도 그를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손 놓고 있었었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석나은과 비교되니 아주 한심해 보였다.나는 힘없이 정원으로 돌아와 문턱에 앉았다. 현정우도 내 옆에 앉았고 우리 둘 다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꼴이었다.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물었다.“나 진짜 쓸모없는 것 같아요.”이럴 때 석지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위로조차 해 주지 못했다.현정우는 대답했다.“지금 가주님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선입니다. 어쨌든 관에 누워 계신 분이... 가주께서는 그냥 여기서 석 대표님을 기다리세요. 지쳐서 방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주님, 남자는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작은 온기면 충분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의 마지막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났다.나는 의아해서 물었다.“요즘 왜 이렇게 감성적이에요?”현정우: “...”내 말에 현정우는 나를 상대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네가 지훈 씨라고 부르면 멀게 느껴져.”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시큰하게 아파왔다.석지훈이 언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가?자신의 슬픔을 이렇게 드러낼 정도로 약해지다니. 순간 마음속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다.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사과했다.“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희연이가...”그녀는 내 말을 듣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비록 그녀가 죽였다고 하지만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단지 석지훈한테 죄책감이 좀 덜할 뿐이었다.그는 다시 말했다.“넌 잘못 없어.”석지훈은 항상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다.난 차라리 그가 날 원망하길 바랐다.적어도 화라도 냈으면 좋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나는 어쩔 줄 몰라 말했다.“오빠,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오늘 밤 나는 그와 함께 있어주기로 했다.나는 몸이 안 좋아서 후반야쯤 되니 힘들었고 결국 석지훈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나는 또 꿈을 꿨다.꿈에는 엄마만 나왔다.엄마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나는 나지막이 불렀다.“엄마.”“수아야, 넌 참 가엾구나.”나는 놀라서 물었다.“엄마,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사랑하는 남자, 애들 둘, 부모님, 친구, 돈, 권력... 다 있는데 내가 왜 가엽다는 거지?“수아야, 넌 가여운 사람이야.”엄마는 왜 날 가엽다고 하는 걸까?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엄마, 무슨 말이에요?”엄마는 대답 없이 꿈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놀라 눈을 뜨고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내 모습에 석지훈은 날 안아줬다.“왜 그래?”“오빠, 나 악몽을 꿨어요.”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나는 엄마의 이 꿈을 악몽이라고 했다.요즘 들어 자꾸 엄마 꿈을 꾼다.지난번에는 나에게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했고 이번엔 내가 가엽다고 했다.왜 이런 꿈을 꿀까?뭔가 징조인가?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우
하지만 그녀가 했던 말 중에 ‘나는 정말, 정말, 정말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이 말은...그녀는 세 번이나 강조하여 말했다.이정희가 석지훈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할까.그런데 이 편지는 분명 석지훈에게 쓴 것이었다.게다가 이정희는 편지에서 석지훈을 '잡종'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던 현정우에게 물었다.“이정희가 편지에 지훈 씨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썼는데 이걸 지훈 씨에게 보여줘야 할까요?”현정우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이건 석 대표님께 남긴 편지입니다.”현정우는 내게 석지훈에게 직접 편지를 전달하라고 넌지시 권하는 것이었다.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도 있어요? 난 윤아랑 윤민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죽는 순간까지 지훈 씨한테 그럴 수 있죠? 이정희는 정말 독한 여자네요.”현정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가주님, 생각을 바꿔 보시죠. 어쩌면 돌아가신 분은 석 대표님이 계속 마음 쓰는 게 싫어서 그런 말을 남기신 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아마 마음속에 죄책감이 많았을 겁니다.”현정우의 말에 내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나는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엄마가 평생 너무 고집스럽게 살았구나...그 고집 때문에 그와 수십 년을 떨어져 살았고 그가 죽던 날에도 그와 다투며 누구를 사랑하는지 물었고 그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어.내가 너무 고집스러웠어.그 고집 때문에 평생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하지만 난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단다.죽음 앞에서조차 후회하지 않았어.지훈아, 나는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실망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이제 더 이상 날 감싸주지 않겠지?정말 더 이상 날 감싸주지 않을 것 같구나!네가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차가웠으니까.하지만 네가 더 이상 날
이 편지를 손에 들고 있으니 묵직했다. 사실 아까부터 알고 있었지만 열어볼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이정희의 유품이었으니까. 나는 관심이 없었지만 석나은이 여기에 떨어뜨리고 갔다.게다가 이정희가 편지를 썼다는 사실에 놀랐다.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나는 편지를 가방에 넣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거실에 도착하니 석지훈은 이미 어머니를 관에 모셔 놓은 상태였다. 지난번 어머니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이번에는 석씨 가문의 방계를 부를 수 없어서 조용히 이정희를 아버지 곁에 묻어야 했다. 사실 그녀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이다.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것도 너무나 잔인한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누가 옳고 그른지 누구의 잘못인지 더 이상 판단하고 싶지 않다.나는 거실 입구에서 지키고 서 있었다. 석지훈은 어머니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밤샘을 하고 있었다. 요즘 이 2년 동안 정말 쉴 새 없이 많은 일이 있었다.우리 곁을 떠난 사람이 너무 많았다.나의 친아버지와 석지훈의 두 어머니, 그리고 친어머니까지. 나와 석지훈은 장례식을 네 번이나 치렀다.나는 거실에 오래 머물지 않고 석지훈의 정원으로 돌아왔다. 수선화는 이미 시들었고 4월의 단풍잎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나는 문턱에 앉아 정원 안 인공 호수를 바라보며 계속 생각에 잠겼다. 친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석지훈의 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내 마음속에는 큰 슬픔이 없었다. 다만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있을 뿐이었다. 몇 번 만나지 못해 깊은 정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까.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마음이 차가운 게 아니야.”나는 마음이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피가 뜨겁게 끓고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고현성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옆에 있던 현정우가 물었다.“뭐라고 하셨습니까?”“아니에요. 그저 세상사가 무상하다고 느껴서요.”나는 내가 석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 될 줄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나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을 지켰다.석지훈은 방을 나섰다. 그는 내 앞을 지나쳐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방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안아 들었다.그는 이정희를 안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지만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잠시 후, 원태웅이 올라왔다.“윤아야, 왜 아직 여기 있어?”나는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오빠.”“지훈이는 석씨 가문으로 갔는데, 왜 따라가지 않았어?”“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내가 말했다.원태웅은 나를 보며 말했다.“네가 죽인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그리고 희연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건 지훈이가 허락했기 때문이야!”나는 놀라서 되물었다.“네?”“희연이 혼자 힘으로 지훈이 어머니를 죽일 수 있었을 것 같아?”지훈 씨였구나...그는 어머니를 포기하는 것으로 나에게 대답을 주었다.마음이 답답하고 석지훈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나를 향한 그의 배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편애할 줄은 몰랐다.어머니와 나 사이에서, 그는 나를 선택했다.나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석지훈을 쫓아가려 했지만 그의 차는 이미 떠난 후였다. 그때 최희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살려 줘.”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야?”“유겸 씨 집이야. 여기서 나가고 싶어!”나는 재빨리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원태웅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아직 떠나지 않은 나를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아직 안 갔어? 이건 형 어머니 유품인데 석 씨 저택으로 가져가야 해.”“제가 가져갈게요. 오빠 저 좀 도와줄래요.”원태웅은 흔쾌히 물었다.“무슨 일인데?”“희연이를 좀 구해주세요. 그리고 운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지금 최희연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왕자현의 곁이었다.“알았어. 내가 처리해 줄게.”원태웅이 떠난 후, 나는 이정희의 유품을 가지고 석 씨 저택으로 향했다.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고풍스러운 저택에 도착했다.대문에는 흰 천이
최희연이 이정희를 죽였다는 소식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원태웅의 전화를 받자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던 먹구름이 걷히는 듯했다.최희연이 자신을 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신 나서준 것이다.고마운 마음과 함께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살인이라는 것은...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특히 최희연처럼 부드럽고 여린 사람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 최희연은 이미 껍데기를 깨고 나비가 되어 날갯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난 카페에 앉아 오후 시간을 보냈다. 원태웅의 전화 이후 두 시간이 더 흘렀고 바깥은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석지훈은 이미 그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게다가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나는 차를 몇 잔이고 계속해서 마셨다. 예하나는 내 모습을 보고 말했다.“차를 너무 많이 마시면 밤에 화장실 계속 가야 할 텐데요.”나는 차를 내려놓았다. 그때 마침 카페에 한민수가 들어왔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물었다.“지훈의 어머니가...”나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알고 있어요.”“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죠?”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아무 말이 없자 한민수는 말을 이었다.“지훈이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거의 없는 사람이에요. 예전엔 어머니가 유일한 정이었죠. 그가 석씨 가문으로 돌아가 가업을 이으려 했던 것도 어머니 때문이었어요. 비록 그의 어머니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잔인하고 냉정하고 이기적이며 그를 싫어했지만 어쨌든 그를 낳아준 사람이니까요. 지금 지훈이는 수아 씨가 필요할 거예요.”한민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어쨌든 수아 씨는 그의 아내니까요.”석지훈의 아내...나는 허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