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아픈 곳을 건드린 듯 고현성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제나 강인해 보였던 그는 지금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터져 나오는 울분을 억누르며 말했다.“넌 정말 너무해.”고현성은 정말 사람을 너무 몰아붙였다.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에 그는 급히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수아야, 우선 지금 중요한 일부터 해결하자, 응?”지금 중요한 일은 바로 아이들 문제였다.나는 급히 자리를 떠났고 고현성은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차에 타려던 순간,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나는 그를 무시한 채 차를 몰고 떠났다.얼마 가지 않아 급하게 차를 길가에 세우고 유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나는 급히 별장으로 돌아가 현정우를 찾았고 헬리콥터를 타고 바로 산꼭대기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고현성의 별장에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다섯,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었지만 유독 쌍둥이만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별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도우미는 나를 발견하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가까이 와서 말했다.“이 아이는 전유입니다.”내 눈앞의 아이는 이제 겨우 서너 달 정도 되어 보였다.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물었다.“사별은요?”도우미는 설명했다.“잘 모르겠어요. 연휴가 끝나고 다시 출근했을 때 사별이와 사현이는 없었어요. 제가 사모님께 물었더니 친부모님과 함께 있다고 하셨어요.”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의 친부모라면...나는 급히 물었다.“서당시에 있나요?”도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나는 또 물었다.“유 회장님은 집에 계신가요?”이제야 사별이와 사현이가 내 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그들을 품에 꼭 안은 채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손을 잡고 싶었다. 평범한 엄마들처럼 그들에게 젖을 물리고 싶었다.하지만...나는 이미 모유 수유를 끝냈다.아이들에게 젖을 물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넘쳐났다.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석지훈이 나를 상대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잠시 생각하다가 원태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셋째 오빠, 날 다시 단톡방에 추가해 줄 수 있어요?”그는 빠르게 답장했다. “또 마음이 바뀐 거야?”“제발 부탁이에요.”원태웅은 나를 다시 탄톡방에 추가해 주었다. 나는 바로 단톡방에서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핀란드 날씨가 좀 춥네요.”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나 추워요.”그는 항상 나를 아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 앞에서 약해진 모습을 보이며 사과하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질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석지훈은 여전히 나를 무시했다.순간 눈물이 핑 돌며 핀란드의 바람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눈 내리지 않는 날이 눈 내리는 날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수술 부위도 은근히 다시 아려왔다.계속해서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담유미가 갑자기 영상 하나를 올렸다.낮에 고현성의 회사 앞에서 그를 때리던 장면이었다.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가 했던 말들이었다.듣기엔 차가워 보이는 말들이었지만 사실은 과거 고현성에게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묻어나 있었다.지금 우리 둘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게 분명했다.이제 그는 나를 만나고 싶지도 않을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 내 아이들이 그의 손에 있는 이상 나는 반드시 그를 만나야 했다.그 순간 원태웅은 단톡방에 짧고 굵게 한마디를 던졌다.“왜 쓸데없는 걸 마음대로 올리고 지랄이냐? 추방당하고 싶어?”단톡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이제 석지훈은 날 보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9977.”원태웅은 물었다.“형, 그게 무슨 뜻이야?”그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나는 급히 별장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석지훈은 내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고 지금처럼 질책하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예전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그는 결코 나무라지 않았고 심지어 나는 그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그 역시 한낱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간이라면 희로애락을 느끼기 마련이다.나는 그의 마음속에 담긴 억울함을 느끼고 갑자기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순간 내 몸 상태도 잊은 채 그를 안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내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석지훈은 갑자기 돌아서서 원래 자리로 물러났다. 그리고 붓을 들고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침묵을 깨려고 했지만 석지훈이 먼저 말했다.“아이는 네가 목숨으로 바꿔온 거니까 내가 가질 자격은 없어. 보고 싶으면 윤 비서한테 연락해.”그는 너무나 쉽게 아이들을 내게 돌려주었다.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그는 나를 괴롭힌 적이 없었다. 석지훈은 다시금 예전처럼 거만한 태도로 돌아가 마치 방금 내게 따져 묻던 모습은 없었던 일 같았다.내 마음속에 깊은 실망감과 당혹감이 밀려왔다.지금 이 순간 나는 두 아이를 찾아가야 했지만 발이 땅에 뿌리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석지훈이 곁눈질로 나를 보며 차갑게 물었다.“할 말 남았어?”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럼 가 봐.”석지훈은 분명 나를 내쫓고 있었다.이제는 대놓고 나를 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내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석나은 씨, 여기서 뭐 하세요?”석나은은 흰색 밍크코트 안에 검은색 한복을 입고 있어 더욱 우아해 보였다. 하얗고 가는 손목에는 푸른 옥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그녀는 아름다웠다. 전형적인 낙동강 변에서 자란 고전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기품 있는 자태는 부러움을 자아냈고 사랑에 대한 굳건한 집념은 존경스러웠다.석
석나은이 갑자기 제안했다.“수아 씨,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줘요. 만약 이번에도 제가 실패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당신들 앞에서 사라질게요.”차가운 강바람에 으슬으슬 떨렸고 몸도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그런 유치한 내기 같은 건 생각 없어요. 하지만 지훈 씨에 대한 그쪽의 마음은 존중해요. 그게 다예요. 그러니 나를 끌어들여서 무슨 약속을 하려 하지 마세요!”그녀가 석지훈을 좋아하든 말든, 쫓아다니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와 그런 쓸데없는 내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까.나는 그렇게 어리석게 나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었다.석나은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수아 씨는 정말 냉정하고 무정하네요.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고집불통이라고 해야 할까요. 항상 자신을 유리한 위치에 두는 것이 참 존경스러워요.”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은 씨와 지훈 씨의 일에 대해서 나는 할 말 없네요.”지금 내가 무슨 자격으로 왈가불가한단 말인가?석나은은 나와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한마디만 남기고 가버렸다.그녀는 분명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그 남자를 찾아갈 것이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현정우는 석나은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내게 다가와 코트를 걸쳐주었다.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석나은 씨 예쁘죠?”현정우는 남자의 시점으로 대답했다.“예쁩니다.”나는 이어서 물었다. “정우 씨 이상형이에요?”현정우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감히 석나은 씨에게 흑심을 품겠습니까.”나는 그를 흘겨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그냥 이상형인지 물어봤을 뿐이에요.”현정우는 진지하게 잠시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네, 맞아요.”나는 무심코 말했다.“그럼 지훈 씨의 이상형이기도 하겠네요.”옆에 있던 현정우는 대담하게도 되물었다.“가주님, 질투하시는 겁니까?”질투?!내가 현정우를
2층은 매우 조용했고 서재는 더 조용했다. 나는 뭔가 엿들을 수 있을까 싶어 갔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보니 석지훈은 여전히 고개를 살짝 숙이고 큰 글씨를 쓰고 있었고 흰 선지에는 빽빽하게 작은 해서체 글씨가 가득했다. 그리고 석나은은 그의 옆에 서서 감상하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세월이 정지된 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늑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가시에 찔린 듯 아팠다. 그 순간 고현성이 나에게 키스하는 사진을 봤을 때 그가 느꼈을 슬픔과 분노 그리고 깊은 소유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세상에. 석지훈과 석나은이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견디기 힘든데 하물며 나와 고현성은 키스까지 했으니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석지훈이 주먹을 날린 것도 이해가 됐다.나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엄청 우울했을 것이다.갑자기 석지훈의 마음이 참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강하면 강할수록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항상 내 감정만 생각하고 내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봤지 한 번도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감정은 애써 달래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무시했던 것이다.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 내가 쓰레기 같다고 느꼈다. 석지훈과의 관계에서 나는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내 잘못이었다. 몰래 그에게 상처를 거듭해서 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석나은이 먼저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지훈아.”석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는데 늘 그랬듯 무뚝뚝한 모습이었다.석나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수아 씨가 왔어.”석지훈이 석나은 앞에서 나를 무시하고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붓을 내려놓고 석나은에게 말했다.“운성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서 데려다줄게.”석지훈의 말에 석나은의 고운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
하지만 나는 그들의 아빠를 더 사랑했다.그는 내 마음의 전부니까.석지훈이 내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더 이상 나에게 일어서라고 하지 않고 붓을 들어 하얀 선지 위에 ‘석윤아’, ‘석윤민’이라고 적었다.나는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짐작하며 굳은 몸으로 물었다.“이건 뭐예요?”석지훈은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설명했다.“석윤아, 사별의 이름이야.”나는 석지훈의 말에 이어서 물었다. “그럼 석윤민은 사별이 오빠의 이름인 거예요?”그러고 보니 석지훈은 이미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놓았던 것이다.마음속에 따스함이 차올랐다. 나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껴안고 참았던 마음을 털어놓았다.“고마워요. 오빠. 미안해요. 다시는 오빠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내가 너무 세게 껴안았는지 아니면 그가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탓인지 그는 무심하게 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뻔뻔하게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원태웅이 예전에 석지훈을 상대하려면 적극적이고 뻔뻔해야 한다고 했었다.석지훈은 갑자기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눈가에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잘생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이런 걸 가르쳐줬어?”나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했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석지훈은 바로 돌아서서 서재를 나가버렸다. 나는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아 찰싹 붙어 따라갔다. 마치 작은 강아지가 주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 그는 나를 기다려주기도 했던 것 같은데.석지훈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나도 따라 내려갔다.그가 주방으로 가자 나는 주방 문 앞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사실 나는 고현성과의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그러니 그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하지만 나는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석지훈은 우동 한 그릇과 샌드위치 두 개를 만들었다.그리고 우유 한 잔과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우동은 안 먹어요?”
전화 속 목소리는 진유겸이었다.‘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결혼한단 말인가? 약혼녀랑 결혼하는 건가? 그럼 2년 동안 그와 같이 있었던 최희연은 어떻게 되는 거지?’석지훈은 애매모호하게 말했다.“나중에 봐.”“그래. 운성에서 보자고.”석지훈은 전화를 끊고 침대 위에 던졌다.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진유겸은 그 솔이라는 여자랑 결혼하는 거예요?”석지훈은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다시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바닥에 앉아 우동을 다 먹고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가 설거지를 했다.주방 정리를 끝내고 위층 침실로 돌아왔지만 석지훈은 아직 욕실에 있었고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나는 맨발로 방안을 서성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 해야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까.나는 그가 나를 봐주길, 나를 안아주길, 그의 온기를 나에게 나눠주기를 간절히 바랐다.욕실 문이 갑자기 열리자 나는 얼어붙은 채 시선을 돌렸다. 석지훈의 이마에는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고 검은색 실크 가운은 단정하게 걸쳐져 있었다. 드러난 가슴은 없었고 바닥에 닿은 두 다리는 길고 곧으며 탄탄했다.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석지훈은 나를 지나쳐 발코니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파 세트와 테이블 위에 놓인 레드 와인 한 잔이 있었다.그는 소파에 앉아 곧은 등으로 나를 등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부드럽게 불렀다.“오빠.”석지훈은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이리 와.”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재빨리 그의 옆에 얌전히 쪼그려 앉았다.그는 위에서 아래로 깊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감히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잘못했어요.”그 말을 들은 석지훈은 와인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 잘못이 아니야.”그는 갑자기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나는 영문을 몰랐
“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전화 속 목소리는 진유겸이었다.‘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결혼한단 말인가? 약혼녀랑 결혼하는 건가? 그럼 2년 동안 그와 같이 있었던 최희연은 어떻게 되는 거지?’석지훈은 애매모호하게 말했다.“나중에 봐.”“그래. 운성에서 보자고.”석지훈은 전화를 끊고 침대 위에 던졌다.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진유겸은 그 솔이라는 여자랑 결혼하는 거예요?”석지훈은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다시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바닥에 앉아 우동을 다 먹고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가 설거지를 했다.주방 정리를 끝내고 위층 침실로 돌아왔지만 석지훈은 아직 욕실에 있었고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나는 맨발로 방안을 서성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 해야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까.나는 그가 나를 봐주길, 나를 안아주길, 그의 온기를 나에게 나눠주기를 간절히 바랐다.욕실 문이 갑자기 열리자 나는 얼어붙은 채 시선을 돌렸다. 석지훈의 이마에는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고 검은색 실크 가운은 단정하게 걸쳐져 있었다. 드러난 가슴은 없었고 바닥에 닿은 두 다리는 길고 곧으며 탄탄했다.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석지훈은 나를 지나쳐 발코니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파 세트와 테이블 위에 놓인 레드 와인 한 잔이 있었다.그는 소파에 앉아 곧은 등으로 나를 등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부드럽게 불렀다.“오빠.”석지훈은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이리 와.”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재빨리 그의 옆에 얌전히 쪼그려 앉았다.그는 위에서 아래로 깊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감히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잘못했어요.”그 말을 들은 석지훈은 와인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 잘못이 아니야.”그는 갑자기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나는 영문을 몰랐
하지만 나는 그들의 아빠를 더 사랑했다.그는 내 마음의 전부니까.석지훈이 내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더 이상 나에게 일어서라고 하지 않고 붓을 들어 하얀 선지 위에 ‘석윤아’, ‘석윤민’이라고 적었다.나는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짐작하며 굳은 몸으로 물었다.“이건 뭐예요?”석지훈은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설명했다.“석윤아, 사별의 이름이야.”나는 석지훈의 말에 이어서 물었다. “그럼 석윤민은 사별이 오빠의 이름인 거예요?”그러고 보니 석지훈은 이미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놓았던 것이다.마음속에 따스함이 차올랐다. 나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껴안고 참았던 마음을 털어놓았다.“고마워요. 오빠. 미안해요. 다시는 오빠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내가 너무 세게 껴안았는지 아니면 그가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탓인지 그는 무심하게 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뻔뻔하게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원태웅이 예전에 석지훈을 상대하려면 적극적이고 뻔뻔해야 한다고 했었다.석지훈은 갑자기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눈가에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잘생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이런 걸 가르쳐줬어?”나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했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석지훈은 바로 돌아서서 서재를 나가버렸다. 나는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아 찰싹 붙어 따라갔다. 마치 작은 강아지가 주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 그는 나를 기다려주기도 했던 것 같은데.석지훈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나도 따라 내려갔다.그가 주방으로 가자 나는 주방 문 앞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사실 나는 고현성과의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그러니 그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하지만 나는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석지훈은 우동 한 그릇과 샌드위치 두 개를 만들었다.그리고 우유 한 잔과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우동은 안 먹어요?”
2층은 매우 조용했고 서재는 더 조용했다. 나는 뭔가 엿들을 수 있을까 싶어 갔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보니 석지훈은 여전히 고개를 살짝 숙이고 큰 글씨를 쓰고 있었고 흰 선지에는 빽빽하게 작은 해서체 글씨가 가득했다. 그리고 석나은은 그의 옆에 서서 감상하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세월이 정지된 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늑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가시에 찔린 듯 아팠다. 그 순간 고현성이 나에게 키스하는 사진을 봤을 때 그가 느꼈을 슬픔과 분노 그리고 깊은 소유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세상에. 석지훈과 석나은이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견디기 힘든데 하물며 나와 고현성은 키스까지 했으니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석지훈이 주먹을 날린 것도 이해가 됐다.나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엄청 우울했을 것이다.갑자기 석지훈의 마음이 참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강하면 강할수록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항상 내 감정만 생각하고 내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봤지 한 번도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감정은 애써 달래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무시했던 것이다.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 내가 쓰레기 같다고 느꼈다. 석지훈과의 관계에서 나는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내 잘못이었다. 몰래 그에게 상처를 거듭해서 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석나은이 먼저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지훈아.”석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는데 늘 그랬듯 무뚝뚝한 모습이었다.석나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수아 씨가 왔어.”석지훈이 석나은 앞에서 나를 무시하고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붓을 내려놓고 석나은에게 말했다.“운성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서 데려다줄게.”석지훈의 말에 석나은의 고운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
석나은이 갑자기 제안했다.“수아 씨,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줘요. 만약 이번에도 제가 실패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당신들 앞에서 사라질게요.”차가운 강바람에 으슬으슬 떨렸고 몸도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그런 유치한 내기 같은 건 생각 없어요. 하지만 지훈 씨에 대한 그쪽의 마음은 존중해요. 그게 다예요. 그러니 나를 끌어들여서 무슨 약속을 하려 하지 마세요!”그녀가 석지훈을 좋아하든 말든, 쫓아다니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와 그런 쓸데없는 내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까.나는 그렇게 어리석게 나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었다.석나은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수아 씨는 정말 냉정하고 무정하네요.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고집불통이라고 해야 할까요. 항상 자신을 유리한 위치에 두는 것이 참 존경스러워요.”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은 씨와 지훈 씨의 일에 대해서 나는 할 말 없네요.”지금 내가 무슨 자격으로 왈가불가한단 말인가?석나은은 나와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한마디만 남기고 가버렸다.그녀는 분명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그 남자를 찾아갈 것이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현정우는 석나은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내게 다가와 코트를 걸쳐주었다.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석나은 씨 예쁘죠?”현정우는 남자의 시점으로 대답했다.“예쁩니다.”나는 이어서 물었다. “정우 씨 이상형이에요?”현정우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감히 석나은 씨에게 흑심을 품겠습니까.”나는 그를 흘겨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그냥 이상형인지 물어봤을 뿐이에요.”현정우는 진지하게 잠시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네, 맞아요.”나는 무심코 말했다.“그럼 지훈 씨의 이상형이기도 하겠네요.”옆에 있던 현정우는 대담하게도 되물었다.“가주님, 질투하시는 겁니까?”질투?!내가 현정우를
석지훈은 내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고 지금처럼 질책하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예전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그는 결코 나무라지 않았고 심지어 나는 그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그 역시 한낱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간이라면 희로애락을 느끼기 마련이다.나는 그의 마음속에 담긴 억울함을 느끼고 갑자기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순간 내 몸 상태도 잊은 채 그를 안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내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석지훈은 갑자기 돌아서서 원래 자리로 물러났다. 그리고 붓을 들고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침묵을 깨려고 했지만 석지훈이 먼저 말했다.“아이는 네가 목숨으로 바꿔온 거니까 내가 가질 자격은 없어. 보고 싶으면 윤 비서한테 연락해.”그는 너무나 쉽게 아이들을 내게 돌려주었다.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그는 나를 괴롭힌 적이 없었다. 석지훈은 다시금 예전처럼 거만한 태도로 돌아가 마치 방금 내게 따져 묻던 모습은 없었던 일 같았다.내 마음속에 깊은 실망감과 당혹감이 밀려왔다.지금 이 순간 나는 두 아이를 찾아가야 했지만 발이 땅에 뿌리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석지훈이 곁눈질로 나를 보며 차갑게 물었다.“할 말 남았어?”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럼 가 봐.”석지훈은 분명 나를 내쫓고 있었다.이제는 대놓고 나를 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내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석나은 씨, 여기서 뭐 하세요?”석나은은 흰색 밍크코트 안에 검은색 한복을 입고 있어 더욱 우아해 보였다. 하얗고 가는 손목에는 푸른 옥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그녀는 아름다웠다. 전형적인 낙동강 변에서 자란 고전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기품 있는 자태는 부러움을 자아냈고 사랑에 대한 굳건한 집념은 존경스러웠다.석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넘쳐났다.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석지훈이 나를 상대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잠시 생각하다가 원태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셋째 오빠, 날 다시 단톡방에 추가해 줄 수 있어요?”그는 빠르게 답장했다. “또 마음이 바뀐 거야?”“제발 부탁이에요.”원태웅은 나를 다시 탄톡방에 추가해 주었다. 나는 바로 단톡방에서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핀란드 날씨가 좀 춥네요.”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나 추워요.”그는 항상 나를 아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 앞에서 약해진 모습을 보이며 사과하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질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석지훈은 여전히 나를 무시했다.순간 눈물이 핑 돌며 핀란드의 바람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눈 내리지 않는 날이 눈 내리는 날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수술 부위도 은근히 다시 아려왔다.계속해서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담유미가 갑자기 영상 하나를 올렸다.낮에 고현성의 회사 앞에서 그를 때리던 장면이었다.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가 했던 말들이었다.듣기엔 차가워 보이는 말들이었지만 사실은 과거 고현성에게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묻어나 있었다.지금 우리 둘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게 분명했다.이제 그는 나를 만나고 싶지도 않을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 내 아이들이 그의 손에 있는 이상 나는 반드시 그를 만나야 했다.그 순간 원태웅은 단톡방에 짧고 굵게 한마디를 던졌다.“왜 쓸데없는 걸 마음대로 올리고 지랄이냐? 추방당하고 싶어?”단톡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이제 석지훈은 날 보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9977.”원태웅은 물었다.“형, 그게 무슨 뜻이야?”그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나는 급히 별장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마치 아픈 곳을 건드린 듯 고현성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제나 강인해 보였던 그는 지금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터져 나오는 울분을 억누르며 말했다.“넌 정말 너무해.”고현성은 정말 사람을 너무 몰아붙였다.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에 그는 급히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수아야, 우선 지금 중요한 일부터 해결하자, 응?”지금 중요한 일은 바로 아이들 문제였다.나는 급히 자리를 떠났고 고현성은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차에 타려던 순간,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나는 그를 무시한 채 차를 몰고 떠났다.얼마 가지 않아 급하게 차를 길가에 세우고 유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나는 급히 별장으로 돌아가 현정우를 찾았고 헬리콥터를 타고 바로 산꼭대기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고현성의 별장에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다섯,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었지만 유독 쌍둥이만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별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도우미는 나를 발견하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가까이 와서 말했다.“이 아이는 전유입니다.”내 눈앞의 아이는 이제 겨우 서너 달 정도 되어 보였다.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물었다.“사별은요?”도우미는 설명했다.“잘 모르겠어요. 연휴가 끝나고 다시 출근했을 때 사별이와 사현이는 없었어요. 제가 사모님께 물었더니 친부모님과 함께 있다고 하셨어요.”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의 친부모라면...나는 급히 물었다.“서당시에 있나요?”도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나는 또 물었다.“유 회장님은 집에 계신가요?”이제야 사별이와 사현이가 내 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그들을 품에 꼭 안은 채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손을 잡고 싶었다. 평범한 엄마들처럼 그들에게 젖을 물리고 싶었다.하지만...나는 이미 모유 수유를 끝냈다.아이들에게 젖을 물
“난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는 웃으며 물었다.“희연아, 내가 투자해도 될까?”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고마워, 수아야.”“네가 돌아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하자.”“윤아야, 너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나는 웃으며 답했다.“나도 마찬가지야.”난 이생에서 그녀를 만난 걸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겼다.통화를 마친 뒤 나는 비서와 함께 검사를 받으러 병원으로 갔다. 아직 예약 시간 전에 여유가 좀 있기에 오피스텔에 들러 석지훈의 책, 을 챙겼다.그만 떠나려던 찰나 침대 머리맡에 있던 선물 상자를 치고 말았다.그건 새해에 고현성이 준 선물이었다.나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고현성이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그가 과거에 많은 잘못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지금의 그는...과연 누가 사랑에서 후회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나는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잘못까지.손을 뻗어 상자를 여는 순간 안에 든 사진을 보고 그만 충격을 받았다.놀람과 기쁨, 그리고 분노와 증오가 금세 뒤섞였다.어느새 가슴속의 설렘은 증오로 완전히 덮어버렸다.상자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더니 비서는 급히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차 키 줘.”그는 순순히 차 키를 건네주었다.나는 직접 운전해서 고씨 가문으로 향했지만 집사 말로는 고현성이 집에 없다고 했다. 그에게 전화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그의 회사로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 회사 건물 아래에서 그와 마주친 순간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그의 얼굴을 향해 세게 내리쳤다.이토록 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운지 멍해 있었고 나는 울먹이며 외쳤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어떻게 내 두 아이를 숨길 수 있는 거지?나는 상자를 꼭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펑펑 울었다.상자 안에는 두 장의 아기 사진과 고현성이
나는 새벽 1시에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입이 바짝 말라 있었지만 다행히 비서가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나는 힘겹게 입을 열어 물을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곧바로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왔다.“수술 결과는 어떤가요?”비서는 다정하게 대답했다.“수술은 아주 성공적입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시간에 맞춰 약을 복용하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면서 더 이상 무리하지 않으시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뜻은 병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병의 악화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선의 결과였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의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가서 쉬세요.”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머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내가 프랑스에 온 사실을 어쩌면 엄마한테 숨길 수 없는 게 당연했다.하지만 엄마가 나를 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나한테 엄마는 단지 혈연만 있을 뿐 낯선 존재였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적당히 핑계 대고 거절하세요.”비서가 방을 나간 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수술 부위가 너무 아파와서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의사는 진통제를 처방했고 이곳에서 계속 요양하라고 당부했다.원래는 빨리 귀국할 계획이었지만 몸이 너무 쇠약하다 못해 일주일 뒤에 실밥을 풀고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며칠 더 머물렀다. 거의 2월 초가 되어서야 운성시로 돌아갔다.2월은 이미 눈이 녹는 시기였고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봄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운성시로 돌아오자 그제야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시간이 되면 연씨 별장에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부모님께서 석지훈에 대해 이야기하실까 봐 두려웠다.나는 아직 부모님께 그와의 일을 이야기할 용기가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예 모르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어쨌든 나와 고현성의 스캔들로 떠들썩했으니 말이다.그런데도 사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