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한참 동안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내가 문을 두드리자 그제야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선 사람은 바로 어제 나와 헤어진 남자였다. 내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그리워했던 석지훈이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나는 눈가가 붉어진 채 석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친 거예요?”석지훈은 검은색 롱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이마 한쪽에 상처가 있어 밴드를 붙인 상태였다.몸 전체를 훑어보아도 다른 부상이 보이지 않자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나는 석지훈을 안고 싶었지만 다가가지 못한 채 눈이 내리는 추위 속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여기 있는 거야?”석지훈의 말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마치 내가 그의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한 것처럼 말이다.순간 당황한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내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고 화면을 확인하니 원태웅의 전화였다.원태웅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나느 석지훈의 앞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내가 지훈 오빠는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원태웅이 먼저 말했다.“윤아야,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전화 받아.”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석지훈을 힐끔 쳐다본 뒤 고민하다가 일부러 한쪽으로 걸어가 원태웅에게 궁금해하며 물었다.“오빠가 한민수한테 전화해서 지훈 오빠가 습격당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진유겸의 사람들은 지훈 오빠가 추격당하지 않았다고 했어.”원태웅은 나의 말에 웃으며 부드럽게 설명했다.“그건 한민수가 널 비아드에서 따돌리고 담현아와 단둘이 있고 싶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야. 어젯밤 내게 한참 부탁했거든. 게다가 한민수가 나한테 워낙 많은 도움을 줘서 나도 거절하기가 좀 미안했어.”“두 사람 정말.”나는 화가 나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원태웅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서둘러 내게 당부했다.“절대 형한테 우리가 널 속여서 나웨이로 보냈다는 걸 말하지 마. 아니면 형이 돌아오면 우리 둘 다 곤란해질 거야.”원태웅이 나더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전화를 받으라고
석지훈이 이렇게 집요하게 물은 적은 처음이라 나는 최대한 정성껏 답을 해줬다.“희연이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예요, 진씨 집안 진서준 씨와 사귀면서 결혼 얘기까지 오갔었는데 서준 씨가 그렇게 가고 나서 진유겸 씨가 서준 씨 애인 돌봐주겠다고 희연이 데리고 있는 거예요.”나는 혹시나 석지훈이 오해를 할까 봐 한마디 더 덧붙였다.“희연이가 유겸 씨 좋아한 지도 꽤 됐는데 잘됐나 모르겠어요.”내 말이 끝났음에도 석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침대에 걸터앉았다.문을 닫고 거기에 기댄 나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낡아버린 가구들이 가득한 집안을 둘러보았다.“오빠는 어떻게 여길 온 거예요?”석지훈은 손가락을 들어 침대를 톡톡 두드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여긴 내가 태어난 곳이야.”이 낡고 초라한 집이 석지훈이 태어난 곳이었다니.나는 그제야 석지훈이 노르웨이까지 온 것이 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곳에 와보기 위함이었다는 걸 알아챘다.그 속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싶어 궁금한 나머지 나는 바로 석지훈 앞으로 가 앉았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다행히 석지훈은 내 질문 없이도 말을 이어나갔다.“내가 여기서 태어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와봤는데 이렇게 낡아 있을 줄은 나도 몰랐어. 사람 흔적도 전혀 없고.”왜 실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지훈의 표정과 말투에서 크나큰 실망이 엿보이자 나는 바로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어머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거에요? 나는 오빠가 석씨 집안 옛 저택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요.”내가 옛 저택을 언급하자 석지훈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지만 그는 결국 나의 질문에는 답을 해주지 않고 내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나가자, 여긴 묵을 곳이 못 돼.”그렇게 나는 들어온 지 2분도 안 돼서 다시 석지훈을 따라 나갔다.운전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어서 나는 그가 바로 비아드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석지훈은 대뜸 나를 끌고 쇼핑몰로 들어가더니 생필품을 고르
원태웅은 처음부터 우리의 연애를 찬성하고 또 우리 둘을 일부러 붙여놓기까지 한 사람이었다.내가 그의 생각을 하며 별을 보고 있을 때 석지훈은 눈으로 냄비를 씻고 또 깨끗한 물로 한 번 더 씻어내며 결벽증이 있는 사람다운 면모를 뽐내고 있었다.그에 나는 야채라도 씻으려고 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오빠는 왜 못 하는 게 없어요?”“살려고 배운 거지 다.”“네?”이해를 못 하는 나를 위해 석지훈은 자세히 말해주기 시작했다.“석씨 집안에서 나와서 혼자 살 때는 뭐든지 다 나 혼자 해야 했어. 여기저기서 조금씩 배우다 보니까 이렇게 다 알게 된 거지.”석지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아 나는 바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오빠, 몇십 년 동안 오빠 설레게 하는 여자는 없었어요?”내 질문에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석지훈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면 내가 곤란한 질문을 한 거예요?”“있었어.”갑작스레 들려온 그의 대답에 나는 조금은 울적한 기분으로 물었다.“누군데요?”“너.”깊은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며 처음으로 진심을 얘기하는 석지훈에 나는 뭐 큰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아이마냥 바보처럼 웃어버렸다.그의 등 뒤로는 별이 흩뿌려진 밤하늘까지 보여 지금 이 순간이 유난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말을 마친 석지훈은 일어나 차로 향하더니 검은색 후드티로 갈아입고는 다시 내 옆으로 와 쭈그려 앉았다.“안 춥겠어요?”온 오후를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었지만 그래도 나웨이는 워낙 기온이 낮아서 내가 걱정하며 묻자 석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안 추워.”“그래요, 오빠는 뭐 좋아해요?”“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어.”무미건조한 대답에 흥미가 생긴 나는 이내 또 다른 질문을 했다.“그럼 색깔은요?”“어두운 거 좋아해.”그 말에 자신과 진유겸 모두 검은색 계열을 좋아한다고 하던 한민수의 말이 떠오른 나는 석지훈을 보며 물었다.“검은색
그날은 완벽한 밤이었지만 눈치 없는 날씨 때문에 내가 혹시나 추워할까 봐 석지훈은 끝까지 가지는 않고 다시 내 옷깃을 여며주었다.그의 무릎에 앉은 나는 망원경을 들고 하늘을 비춰보다가 갑자기 그걸 돌려 석지훈을 비췄다.별이 수놓아진 밤하늘 속에 있는 자상한 남자를 본 순간, 나는 그와 한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그때는 정말 그와 평생을 보내고 싶었다.힘든 일은 함께 헤쳐나가면서 영영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는데 현실이라는 건 늘 이상과는 달랐다.모든 게 완벽했던 그날이지만 오로라는 나타나지 않아서 내가 실망하자 석지훈은 나를 위해 그곳에 이틀 더 머무르기로 했다.하지만 결국 버티지 못한 내 몸이 적신호를 보내자 석지훈은 바로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가 이틀 뒤 우리 둘은 헬기를 타고 동성으로 돌아왔다.나웨이에서 돌아온 뒤 나는 계속 병원에 입원해있었고 석지훈은 급한 일로 유럽으로 떠나버렸다.원태웅 말로는 그곳에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데 석지훈의 삶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나는 알 수 없었기에 원태웅도 구태여 길게 설명을 하진 않았다.그 뒤로도 나는 나을 기미가 없는 감기 때문에 보름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병원에 있을 때 석지훈은 한 번도 나를 보러 온 적도 없었고 내가 문자를 해도 좀만 기다리라는 답장뿐이었다.그동안 고현성은 고 씨 집안과 연씨 집안의 모든 거래를 끊고 우리 집안과 거래하는 회사들까지 매수하며 서서히 연씨 집안을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씨 집안의 백 년 가업이 무너지게 생겨서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갔지만 매일 같이 들려오는 안 좋은 소식들뿐이었다.지금 우리 집안을 구할 수 있는 건 석씨 집안 뿐이었지만 바빠 보이는 석지훈을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석지훈의 어머니가 무슨 일만 생기면 석지훈을 찾는 나를 무시할까 봐 연락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그렇게 연씨 집안이 서서히 기울어질 때, 친엄마라는 사람이 다른 번호로 나에게 연락을 했다.당연히 친엄마가 건 전화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어차피 나는 이제 선양을 지킬 힘이 없어요.”나의 상대는 고현성이었으니, 내가 그에게 빌며 애원하기만을 바라는 고현성이었으니 이 판은 나의 패배가 예상된 판이었다.하지만 나는 온 집안을 그에게 내어준다 한들 가서 애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비서도 나의 결심이 굳건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내 말대로 자선단체에 연락을 했다.회사를 넘긴 뒤에 공문을 내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통화를 마친 비서가 들어오더니 물었다.“누구에게 넘기실 거에요?”누구냐는 저 질문에 나는 고현성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현성한테 연락해요.”말을 마치고 가방을 챙겨 회사를 나선 나는 차 안에서도 여전히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내가 오늘날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내 뒷배가 되어주던 선양이, 내가 운성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있게 해주던 그 선양이, 나의 자랑이던 선양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했다.하지만 내 능력이 부족해서 선양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니 후회는 없었다, 그저 조금 슬플 뿐이었다.직접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그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건지 몇 번이나 구토를 했고 이튿날까지 그 증세가 계속되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국으로 가 임신테스트기를 사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역시나 임신 테스트기에는 빨간 줄 두 개가 선명히 찍혀있었다.다시는 엄마가 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임신은 요 며칠 중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기쁜 일이었다.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감동에 홀로 욕실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고 웃으며 그 희열을 만끽했다.나는 바로 이 사실을 알리려고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어차피 바쁜 일이 끝나면 다시 전화 줄 그를 알기에 나는 전화를 끊고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와 석지훈 중 누구를 더 닮았을지에 대해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사실 나는 아이의 성격은 나를 더 닮길 원했다.석지훈을 닮아 차가운 성격이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할 테니까.
아직 임신 소식을 전하기도 전인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기쁨의 눈물 때문에 나는 벌써부터 목이 메어왔다.내가 애써 눈물을 훔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석지훈의 낮으면서도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무슨 소식인데?”“나 임신했어요.”“...”한 자 한 자 조심스럽게 내뱉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나는 바로 말을 덧붙였다.“두 달 좀 안됐을 거에요. 오빠, 나 오빠 아이 가졌다고요!”그 뒤로도 말이 없어 내가 오빠라고 소리 높여 부르자 석지훈은 마침내 대꾸를 하며 말했다.“윤아야, 내가 좀 바빠서 그러는데 나중에 얘기하자.”“그게 무슨 말이에요?”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불안함을 감추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오빠, 아이 안 좋아해요? 아니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던 거에요?”석지훈이 아니라고 하며 나를 다독여주기 바랐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응.”응이라니, 아이를 싫어하는지 가질 생각이 없는 것인지 제대로 답하지 않자 나는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석지훈은 아주 급한 일이 있는 듯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을 그의 말을 곱씹어 봤지만 그래도 무슨 뜻인지 알아내지 못했다.아니, 어쩌면 그냥 그 뜻을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아이를 싫어한다는 말이 곧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다는 말일 텐데 나는 차마 믿을 수 없는 그 말에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며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주는 석지훈은 왜 내 아이는 원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괴로워했다.반나절을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과 별개로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결심은 진작에 한 나이다.이 아이는 내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낳아야 했다.그 순간 나는 문득 내가 전에 송이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만약 나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만은 살릴 거라는 말.나는 이제야 그때 내 말을 듣던 송이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고현성과의 전화를 끊은 나는 선양 그룹 홈페이지로 들어가 공문을 발표했다.“선양 그룹은 다른 회사에 인수인계될 예정입니다, 인수인계 수익은 전액 적십자회에 기부할 예정입니다. 백 년 동안 우리의 곁을 지켜온 선양과는 이게 마지막 인사일 것 같습니다. 선양, 고마웠고 잘 가 이제.”선양의 일생을 담아 올린 글에 온라인에서는 바로 난리가 났고 그 댓글들이 거슬렸던 나는 바로 홈페이지를 나와버렸다.저녁때쯤 되자 갑자기 연락 온 원태웅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훈이 형이 경찰한테 잡혀갔어.”“장난치지 마.”전에도 이런 거짓말로 나더러 오빠를 찾아가게 했던 원태웅이라 나는 당연히 믿지 않았는데 원태웅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파브리 경유할 때 경찰한테 잡혀서 지금 감옥에 있어.”“말도 안 돼요, 오빠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은 아니잖아요.”“윤아야, 누가 형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그럼 어떡해요...”원태웅의 말이 장난이 아니란 걸 눈치챈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전에 이런 일이 생기면 해결은 늘 석지훈의 몫이었는데 지금은 석지훈이 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니 그를 도울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원태웅은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내가 일단 핀란드 대사관 쪽에 연락해볼게, 형이 어쨌든 국적이 핀란드니까 거기서 나서주면 빠를 거야. 별일 없을 테니까 연락 기다리고 있어.”그제야 나는 석지훈의 국적이 비아드인 것을 알 수 있었다.어쩐지 텅 빈 허허벌판 같은 국내의 별장과 달리 비아드의 별장은 화려하더라니.얼마 지나지 않아 원태웅은 다시 나에게 연락을 해왔는데 별로 긍정적인 소식은 아니었다.“비아드 쪽에서도 방법이 없대, 누가 일부러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했나 봐. 파브리에서는 계속 아무 말도 안 하고 잡아두고만 있어.”그때 나는 석지훈을 너무 걱정한 나머지 그가 혼자서도 일 처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진유겸에게 부탁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 순간 석지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주면서 석지
“네, 일단은 좀 기다려볼게요.”일을 너무 무모하게 처리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일단 원태웅의 연락을 기다려보기로 했다.새벽 3시쯤 되었을 때 원태웅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배후가 누군지 알려주었다.“누가 꾸민 짓인지 알아냈어.”“누군데요?”누가 감히 석지훈을 감옥에 넣을 생각을 했는지 나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진유겸.”“어떻게...”진유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까지 했던 나라서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진유겸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내가 당황스러워할 때 원태웅이 차분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유럽에서 지훈이 형이랑 이 정도로 맞붙을 수 있는 사람은 진유겸뿐이야. 몇 년 동안 둘 사이가 마냥 좋았던 건 아니라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그동안 진유겸도 지훈이 형 능력이니까 서로 얼굴 붉힐 일은 하지 않은 거지. 이번에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그럼 어떡해요?”이대로 석지훈을 계속 감옥에 있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나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일단 변호사 말 들어봐야지.”원태웅은 한숨을 쉬며 나를 다독여주었다.“걱정 마, 네가 불안해한다고 해서 상황 나아지는 거 아니니까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어.”“뭘 기다려요?”“진유겸이 뭐 할지 지켜봐야지.”전화를 끊고 나서도 내 불안함은 가실 줄 모르고 커져가기만 했다.이튿날 원태웅이 변호사가 석지훈을 보지도 못해 그와의 거래도 물 건너갔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창문가에 앉아있던 나는 당장이라도 진유겸에게 연락해 석지훈을 건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하지만 진유겸도 유럽을 자주 오가는 석지훈처럼 공사다망한 사람이었고 또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뼛속까지 자본주의인 사람들이었기에 내가 최희연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내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그들이 얻을 이익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기에 나는 끝내 진유겸에게 부탁을 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그리고 석지훈도
최욱현은 아이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현정우가 입고 있는 검은색 군복에도 관심을 보였다.“우리 옷이랑 다르네. 여기 허리띠가 있네.”나: “...”나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현정우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는 것을 보았지만 현정우는 그를 무시했다.최욱현은 재미없다는 듯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대신 나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가주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무기력해? 아까 왜 그 이씨 가문 사람들을 그냥 뒀어?”나는 설명했다.“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니 권세로 억누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다은이 시댁 될 사람들인데 예의는 지켜야지. 정재 씨도 의사 선생님 체면을 생각해서 고급 차로 데려오지 않고 검소하게 했는데 네가 나타나서 다 망쳐놨잖아! 이제 이씨 가문 사람들과 의사 선생님 동료, 친구들이 다 다은이가 돈이 많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앞으로 그녀를 귀찮게 할 일도 많아지겠지. 그 사람들 눈에 다은이는 졸부로 보일 거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돈은 다은이에게는 껌값일 테니 한 번 도와주고 두 번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뒷말이 나올게 뻔해.”최욱현은 내 옆에 앉아 말했다.“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구나. 네 말이 맞아. 앞으로 돈이 필요하면 신부를 찾을 거야. 신부는 시댁 식구들이나 친구들이니 분명 도와 줄것이고 그 사람들은 신부가 만만하니까 돈 뜯어낼 궁리만 하겠지.갈수록 더 심하게 말이야! 하지만 너는 한 사람을 간과했어. 바로 신랑이야. 신랑이 자기 쪽 사람들이 신부를 괴롭히는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까? 게다가 오늘 일을 크게 벌인 건 앞으로의 많은 문제를 예방하는 거야. 아무도 신부를 얕보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아무도 신부를 괴롭히지 않겠지.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의 동료 중에 신부를 괴롭혔던 사람도 있었어.”“나는 그런 일은 잘 몰라.”내가 말했다.나는 윤다은의 성격상 스스로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여러 사람들 속에서 혼자 나를 구해준 적도 있었으니까.“됐다, 그 얘긴 그만하자.”
최욱현이 F국을 언급하자 F국에 정착한 나의 친어머니 안혜인이 떠올랐다. 고귀한 공작부인 말이다.나는 패딩을 여미며 거절했다.“시간 없어.”최욱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가 너 보자고 하셔. 지금 F국 성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우리 엄마 알아?”최욱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내가 눈을 부릅뜨자 자기 머리 쓱 만지면서 말했다.“알지. 옛날부터 알았어. 너 지난번에 입은 드레스도 네 엄마가 보내준 거야.”“엄마가 그런 식으로 보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지난번 일 때문에 솔직히 너 못 믿겠어.”최욱현이 되물었다.“내가 네 엄마 아는 거 못 믿는 거야?”나는 아무 말 없이 헬리콥터 쪽으로 걸어갔다. 최욱현은 내 뒤를 따라오며 설명했다.“진짜야. 나 네 엄마 알아. 우리 삼촌 와이프거든. 어릴 때 네 엄마랑 몇 년 같이 살았어. 비록 숙모지만 난 어머니라고 불렀지.”나는 걸음을 멈췄다. 최욱현도 예전에 자기 엄마가 도라지 꽃을 좋아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우리 엄마도 도라지꽃을 좋아하셨는데.그렇지 않고서야 석 씨 저택 아래의 운산 기슭에 그렇게 많은 도라지꽃을 심어 놓았을 리가 없었다. 최욱현의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내가 동요하는 것을 보고 그는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번호를 누르고 내게 건넸다.“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나: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최욱현은 대답 안 하고 씩 웃으면서 나를 봤다.나는 휴대폰을 귀에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 유난히 부드럽고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나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누구...”묻자마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최욱현이 그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수아야, 나 안혜인이야.”그녀는 감히 자신을 나의 엄마라고 칭하지 못했다.“네. 욱현 씨가 건 거예요.”나의 어조는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매우 차분했다.“수아야, 널 만나고 싶구나.”비록 그녀는 나를 버렸지만 나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었다.
지금의 최욱현은 마치 오지랖 넓은 할아버지 같았다.나는 다시 물었다.“금운에는 어떻게 온 거야?”“아까 말했잖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그가 말했다.나는 차갑게 말했다.“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나는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잖아? 눈보라 속에서 너를 업고 몇 시간이나 걸었고.”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지훈 씨가 네가 꾸민 일이라고 했어.”“진실을 알고 있었네.”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는 친구 아니야. 얼른 가.”최욱현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흠칫 놀라 그의 손을 쳐냈다.“만지지 마.”“그냥 쓰다듬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그는 어린아이처럼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차마 미워할 수 없었다.석지훈이 그에게 백혈병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병으로 나와 너무나도 닮았다.우리 둘은 다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허락 없이 만지는 건 성추행이야.”내 말을 듣자 그는 순순히 말했다.“그럼 앞으로 허락을 받고 터치할게.”12월의 날씨에 들러리 드레스만 입고 있으니 너무 추웠다. 담현아가 패딩을 가져다주자 나는 패딩을 받아 들고 웃으며 말했다“나는 이따 핀란드에 갈 거야. 너는 정재 씨랑 같이 동성으로 돌아가.”그러자 담현아가 말했다.“나랑 그 사람은 사는 도시가 다르잖아요.”나는 작게 말했다.“어쩌면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수도 있잖아.”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굳이 길을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담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 망설이다가 나에게 물었다.“언니, 아저씨에 대한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많이 망설여져요...”나는 차분히 물었다.“뭐가 망설여지는데?”내 옆에는 최욱현이 서 있었지만 담현아는 솔직하게 말했다.“내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잖
12월 금운의 날씨는 포근했고 부드러운 햇살이 쫙 쏟아져 짙은 색 군용 점퍼를 입은 남자에게 따스하게 내려앉았다.한 달 만에 만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그랬다. 그는 아름다웠다.최현욱, 아니지. 그의 이름은 최욱현이었다.최욱현은 사람을 홀릴만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선글라스를 손에 든 채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긴 부츠는 반짝반짝 빛났는데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요정 같았다.이씨 가문 친척들과 하객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고급 차 수십 대가 한꺼번에 있는 모습을 본 적도 거의 없었다. 모두 경악과 부러움에 휩싸였다.이주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신지?”최욱현은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다만 화려한 분홍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나는 그가 왜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최욱현은 우리 앞에 와서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신부 친구입니다. 원래 신부 데리러 오려고 했는데, 좀 늦어져서 아쉽네요. 이 고급 차 수십 대를 활용하지 못했으니 사과의 의미로 신부에게 선물할게요. 다은 씨, 어때요?”최욱현과 윤다은이 아는 사이라고?윤다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혹시 도와주러 온 건가?윤다은은 재치 있게 대답했다.“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차는 뭐 하러 줘요? 나도 살 수 있는데.”신부의 당당한 말에 이씨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최욱현은 웃으며 물었다.“다들 왜 입구에 서 계시는 거죠?”윤다은은 시무룩하게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했다고 내 들러리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그러자 최욱현은 나를 보며 물었다.“수아 씨는 어떻게 생각해?”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어?”최욱현은 다시 이씨 가문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이씨 가문 사람들도 멍해졌다.“네?”최욱현은 허리에 손을 얹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비꼬는 척하며 말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고향에서 부랴부랴 달려오신 윤다은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수아야.”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아주머니.”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맙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윤다은도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인터넷에서 화제였던 그 연수아 맞죠? 이혼한 사람이 어떻게 다은이의 들러리를 설 수 있죠?”맞다. 이혼한 내가 어떻게 들러리를 설 수 있겠는가?사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윤다은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지적하다니.윤다은의 결혼식이었기에 나는 그 사람과 논쟁하기 싫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윤다은은 내가 억울한 거 같았는지 립스틱 내려놓고 정색하면서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한 건 맞지만, 지금은 미혼이에요. 왜 들러리를 설 수 없다는 거죠?”그 여자는 고집스럽게 말했다.“불길해요.”하지만 윤다은은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길하다고 하면 길한 거예요.”“집안이 좋다고 우리 이씨 가문을 무시하지 마세요. 작은어머니께 말씀드릴 테니, 그때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요!”알고 보니 그녀는 이주원 쪽 친척이었다.그녀가 방을 나가자 나는 윤다은을 달래며 말했다.“저 사람 말이 맞아. 나는 이혼했으니 네 들러리로는 적합하지 않아.”나는 혹시라도 이씨 가문 사람들이 윤다은을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윤다은은 고집스럽게 말했다.“나는 언니가 꼭 내 들러리를 서 줬으면 좋겠어요. 오늘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나: “...”점심때쯤 이주원이 신부를 데리러 왔다. 이주원의 들러리들은 모두 같은 과 의사들이나 오랜 친구들이었는데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주원에게 들러리 중 한 명을 소개해 달라고 했지만 이주원은 나와 최희연에게 이미 남
담현아와 나는 호텔에서 근처 야시장까지 걸어갔고 배가 고파진 그녀는 꼬치구이를 먹자고 했다. 그녀가 이것저것 엄청 많이 시키는 걸 보자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둘이서 다 먹을 수 있겠어?”그녀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희연 언니에게 전화해서 같이 먹자고 해요. 희연 언니는 술도 잘 마시니까 오늘 취할 때까지 마셔보자고요.”나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누군가는 술 한 잔에 취했던 것 같은데?”담현아는 투덜거렸다.“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웃음을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최희연에게 카톡을 보냈다. 곧 그녀의 답장이 왔다.[미안. 유겸 씨가 왔어.]나: ...진유겸은 꽤 집착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최희연이 금운에 오자마자 바로 따라온 걸 보면 말이다.문득 나도 석지훈이 보고 싶어 졌다.그는 떠난 지 한참이 되었고 그동안 나는 그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나는 휴대폰을 들고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잘 자요.]하지만 그는 답장이 없었다.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오빠, 자요?]잠시 후, 그의 답장이 왔다.[어?]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듯했다.그는 최소한의 안부 인사조차 없었다.나는 더 이상 그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담현아가 메뉴를 고르고 내 옆에 앉자 나는 그녀가 주문한 맥주를 보며 물었다.“취하지 마. 난 너 호텔까지 못 업고 가니까. 그럼 정재 씨를 불러야 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담현아는 겁도 없이 대답했다.“아저씨는 완전 신사예요.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진작 일어났겠죠! 그 사람은 보수적이라 그의 신혼 아내 외에는 누구에게도 선을 넘지 않을걸요. 그런 사람한테 뭘 하기를 바라겠어요?”나는 숨은 뜻을 알아채고 물었다.“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얘기 같은데?”담현아는 나를 흘겨보았다.“내가 언제요?”나는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한 거잖아.”“수아 언니, 나이 들면 다 이렇게 생각이 구려지는 거예요?”나: “...”내가 늙었나?갑자기 좀 서운했다.
그는 두 사람의 표정 차이가 워낙 커서 분간할 수 있었다. 고정재는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고현성은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윤다은과 고정재는 강가를 따라 그의 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윤다은은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이었다.뭔가 겁먹고 참는 듯한 기색이었다.이주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윤다은의 긴장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오빠, 미안해. 이제야 결혼한다는 얘기를 해서. 난 그저... 미안해... 많이 보고 싶었어.”고정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어떤 위로를 담고 있었다.“다은아, 네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었는데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 같아.”“오빠, 난 수십 년 동안 오빠를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수아 언니를 놓치게 만들었어... 미안해. 내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알아. 사실 오래전부터 오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 오빠, 난 이제 오빠를 놓았고 내 행복을 찾았어. 그러니 오빠도 날 축복해 줬으면 좋겠어.”그 말을 듣고 이주원은 마침내 윤다은이 마음속에 숨겨온 비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 행복은 진정한 행복일까?윤다은은 한 남자를 수십 년 동안 사랑했고 그를 따라 전 세계를 누볐다.하지만 그 남자는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이주원은 그녀가 안쓰러웠다.“다은아, 네 행복을 빌어.”고정재는 손을 들어 윤다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다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내가 성인이 된 후로 오빠는 더 이상 이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았어. 내가 그동안 오빠에게 짐이 되고 불편하게 했지?”고정재는 그녀를 불렀다.“다은아.”“오빠...”“너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야.”윤다은은 고정재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였고 연수아는 가장 소중한 가족이었다.그렇다, 그는 그녀를 가족으로 여겼다.담현아는 고정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여자였다.“오빠, 지금까지 날 지켜줘서 고마워.”고정재는 웃으며 말했다.“오빠는 평생 너를 지켜줄 거야.”
“그 사람은 누구야? 너한테 뭘 요구했어?”내가 다그쳐 묻자 윤다은은 어물거리며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담현아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머리를 나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얼굴이 어두워진 윤다은을 보고 나는 그녀가 너무 난처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더는 캐묻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감돌았다.그러다가 갑자기 고현성이 떠올랐는데 그의 머리가 공백이 된 것을 생각하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물었다.“정재 씨는 아직 안 왔어?”담현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저야 모르죠.”1년 시간이 지났어도 고정재에 대한 태도가 여전한 담현아를 보며 나는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했다.내가 담현아의 머리를 톡톡 치자 그녀는 두 손으로 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저랑 내려가서 산책할래요?”담현아는 어리지만 눈치가 빨랐다. 나와 윤다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우리 둘을 갈라놓아 냉정함을 되찾으려는 것이다.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나는 그러자고 대답했다.담현아와 아래층에 내려오자마자 마침 호텔 문 앞에 주차하고 있는 고정재를 만났는데 그도 나와 담현아를 보고 멍해졌다.“나를 마중하러 온 거야?”담현아가 발끈해서 말했다.“아저씨는 망상이 심하네요.”이 말을 듣고 고정재는 부드럽게 웃었고 나도 웃으면서 설명했다.“우린 산책 중이에요.”“먼저 다은이 보러 갈게.”......고정재는 호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우람지고 곧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담현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고정재는 내가 어렸을 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어. 너무 눈부셔서 탐욕이 생겼지만 빛은 여전히 빛이었을 뿐 난 다가갈 수 없었어...”오늘따라 금운시의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였다. 담현아는 나의 팔을 잡고 호기심에 물었다.“왜 다가갈 수 없어요?”나는 담현아의 예쁘고 어린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빛은 너무 뜨거워서 사람은 그 빛에 다칠 수 있거든. 내가 그
하물며 그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모두 평범했다... 내가 이렇게 경호원을 데리고 결혼식에 나타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웠다.현정우는 기타 경호원은 대기시키고 그만 나를 따라다녔다.마침 내려와 보니 문준혁이 지인들과 이야기하고 있어 우리는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그는 내 곁으로 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다은 씨는 안전감이 부족하지만 또 독립적인 여자예요. 저는 왠지 다은 씨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나는 대뜸 그 말을 알아들었다.“다은이의 속마음을 물어보는 거죠?”“아마 연수아 씨는 알 것 같아서요.”문준혁이 말했다.문준혁은 잘 생겼고 외모로 보면 윤다은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윤다은을 배려했으며 태도도 비굴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괜찮아 보였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건 잘 모르겠지만 임신으로 인한 우울증이 아닐까요? 임산부라면 다 그럴 겁니다.”윤다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사람은 고정재였다. 물론 이건 이전의 상태였고 지금은 잘 모른다.의사는 멍해졌다.“임신이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몰랐어요?”“죄송해요. 저도 방금 들었어요.”“아니. 남편과 아빠가 될 분이 어떻게...”“연수아 씨, 전 다은 씨를 만지지 않았어요.”나는 거의 도망하다시피 떠났고 방에 돌아와 윤다은에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도 몰랐다. 윤다은의 어른으로서, 또 그녀를 관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일은 꼭 물어봐야 했다.나는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있는 윤다은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아이의 아빠가 누구야? 닥터 문을 아빠로 만들어줄 생각이었어?”윤다은은 나에게 진심을 알려주기 싫어 건성으로 대답했다.“수아 언니, 묻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에게 설명할게요.”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닥터 문은 호텔을 떠났어.”윤다은은 말이 없었다....오후 3시쯤, 최희연과 담현아가 도착했고 기타 세 들러리도 도착했는데 보아하니 문준혁은 결혼식을 계속할 계획인 것 같다.내가 윤다은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