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 씨의 마음은 이미 석지훈 씨에게 갔어요. 다만 고현성 씨와의 관계를 어떻게 끊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한 것뿐이죠.”송이연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수아 씨의 사랑은 석지훈 씨에게 향해 있으니 고현성 씨는 단호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어요.”나는 고현성과 분명히 얘기할 것이다.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석지훈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수아 씨가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송이연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세상에 어떤 남자도 아무런 관심도 없는 여자에게 그 정도로 하지 않아요. 수아 씨는 당사자라서 모르겠지만 나는 제삼자로서 더 정확하게 보여요. 특히 석지훈 씨처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고집스럽게 수아 씨를 보호하는 남자는 수아 씨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깊이 수아 씨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요.”나는 희망을 품고 물었다.“그런데 왜 석지훈은 나를 거절한 걸까요? 그리고 왜 우리 둘 사이의 일을 잊으라고 한 거죠?”송이연은 통찰력 있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혹시 그게 수아 씨의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나는 놀라서 물었다.“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석지훈 씨는 전형적인 오만한 대표님 스타일이에요. 석지훈 씨에게는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죠. 그런데 수아 씨는 반경우 씨와의 스캔들과 고정재 씨와의 스캔들 그리고 고현성 씨의 전와이프라는 점까지. 게다가 어젯밤 수아 씨와 고현성 씨의 대화를 석지훈 씨가 다 들었다면서요.”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지훈 오빠가 질투하는 걸까요?”송이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추측했다.“수아 씨는 현실의 따뜻함에 굴복했다고 했죠? 수아 씨가 석지훈 씨를 좋아하는 이유도 수아 씨가 원하는 따뜻함을 석지훈 씨가 줬기 때문 아니에요? 그럼 석지훈 씨도 수아 씨의 인생에서 유일한 남자가 되고 싶어 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해봤어요? 석지훈 씨가 사실은 너무 화나고 실망해서 그런 행동을 했을 수도 있잖아요.”송이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수아 씨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의사에게 물었다.“최대 얼마나 버틸 수 있나요?”“기껏해야 보름입니다.”이 말을 들은 연시혁은 순간 멈칫했다. 그는 병실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내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송이연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송이연에게 말했다.“연시혁이 문밖에 있어요.”“네. 그냥 돌아가라고 해요.”나는 송이연의 옆에 앉아 말했다.“연시혁은 이연 씨에게 용서받고 싶어 해요.”그러나 송이연은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불가능해요.”송이연의 표정은 확고했고 협상의 여지도 없어 보였다.며칠 전만 해도 송이연은 연시혁을 사랑한다고 말했었다.“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수아 씨, 내가 시혁 씨를 사랑하는 건 맞지만 인생에는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어요. 자존심과 원칙 그리고 자존감 같은 것들이요. 난 자존심과 원칙 때문에 시혁 씨를 용서할 수 없어요.”송이연은 갑자기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수아 씨처럼 현실의 따뜻함에 굴복해 과거의 상처를 용서할 수 없어요. 수아 씨, 만약 그런 상처를 받고도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겪었던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은 결국 웃음거리에 불과한 게 되지 않겠어요?”나는 순간 당황하며 다급하게 말했다.“이연 씨 말이 맞아요.”송이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사람의 인생에는 사랑 외에도 자존심과 한계가 있다.연시혁이 송이연의 자존심을 짓밟았기에 송이연은 연시혁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나는 과거에 고현성에게 마음이 약해졌었다.나는 문득 우리 중 가장 깊이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송이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가장 꿰뚫어 본 사람도 송이연이었다.병원을 떠나면서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내 과거는 정말로 과거가 되었지만 석지훈과의 일은 여전히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나는 석지훈에게 감동을 줄 수 없었고 더 이상 내 마음을 고백할 수도 없었다.나는 갑자기 얼마 전 석지훈이 별장에서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석
석지훈은 우리 사이에 이렇게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하지만 이 거리는 석지훈이 직접 나에게 그어준 것이었다.나는 석지훈을 무시하고 차를 몰아 병원을 곧장 떠났다.뒤에 남은 원태웅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었다.차를 몰고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태웅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우리 수아. 지훈이 형을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근데 형은 화도 안 내.]나는 답장했다.[나 진짜 바빠.]원태웅에게서 답장이 왔다.[쳇. 분명 형이 너를 거절해서 네가 삐져서 무시하는 거겠지. 넌 내가 그렇게 쉽게 속을 줄 알아?]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 원태웅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나는 결국 찝찝한 기분으로 아파트에 돌아왔다. 집에 오니 답답해서 차 키를 들고 근처 강가로 나갔다.강가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어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밤은 유혹적이었고 강가의 풍경은 더 매혹적이었다.나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시간이 흐르는 걸 잊고 있었다.그러나 귀에 맑고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를 피하고 있는 거야?”며칠 전에 석지훈은 최면으로 나의 기억을 지우려 했다.그런데 오늘은 또 쫓아와서 물었다.“나 피하는 거야?”“오빠는 내가 귀찮다면서요.”내 말투에는 무심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옆에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려보니 석지훈이 뒷짐을 진 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석지훈의 시선은 차가웠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그 사이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모두 석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석지훈은 어디에 있어도 주목받는 사람이었다.나는 얼른 일어나 강가를 따라 걸었지만 석지훈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나는 차 키를 꺼내 운전해서 이내 아파트로 돌아왔다.아파트 아래에 검은색 카이엔이 보였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석지훈의 차였다.석지훈은 나의 동선을 정말 훤히 꿰뚫고 있었다.석지훈은 차에서 내려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
석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에게 계속 물었다.“어머니는 석씨 저택에 사세요?”“응. 우리 가문 오래된 저택에 살고 계셔.”나는 석지훈이 전보다 훨씬 인내심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제는 적어도 내가 묻는 말에 하나하나 답해주고 있으니 말이다.혹시 이제 나의 신분이 그의 여자가 되었으니 나에게 조금 더 친절해진 걸까?나는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문득 석지훈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아마 석씨 가문의 오래된 저택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저런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그곳과 관련된 어떤 슬픈 기억이라도 떠오른 걸까?원태웅은 이렇게 말했었다.“지훈이 형은 저택에만 들어가면 늘 상처받고 나왔어.”도대체 왜 상처를 받는 걸까?이미연이 석지훈을 그렇게 무서워하는데 또 누가 석지훈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걸까?나는 묻고 싶었지만 석지훈의 기분을 건드릴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석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석지훈은 차를 도로 옆에 세웠다.이곳은 오직 한 채의 별장만 있을 뿐이라 다른 차량이 지나갈 일이 없었다.석지훈이 소유한 사유지이기에 어디에 주차해도 상관없다.석지훈이 차에서 먼저 내렸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내리려 했지만 석지훈이 멈춰 서는 바람에 그의 단단한 등에 부딪히고 말았다.나는 순간 콧등이 약간 아팠다. 나는 손으로 코를 문지르며 물었다.“갑자기 왜 멈춘 거예요?”석지훈이 손을 내밀었다.넓은 손등과 그 끝에 보이는 하얀 셔츠 소매가 블랙 수트와 잘 어우러져 몹시 절제된 매력을 풍겼다.나는 석지훈의 손을 잡고서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석지훈이 먼저 내 손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나를 자신의 여자로 인정한 것 같았다.나는 기뻐하며 석지훈을 따라 들어갔다.그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실크 가운으로 갈아입은 채 나왔다.석지훈은 흰색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배고프지? 내가 밥 차려 줄게.”실크 가운은 크고 넉넉했지만 석지훈의 크고 단
석지훈은 나에게 준 핸드폰에 GPS 위치추적기를 설치했기에 내가 언제 어디에 있든 정확하게 내 곁에 나타날 수 있었다.내가 그를 만난 후부터 그는 날 감시하기로 한 것이었다.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석지훈은 나의 질책을 들은 후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면서 간단하게 해명하였다.“너의 안전을 위해서야. 내 핸드폰에도 위치추적기가 있어. 불쾌하다면 핸드폰을 바꿔도 좋아.”남에게 감시를 당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일인데, 석지훈은 아주 간단한 일로 취급하였다.그러나 사실 좋은 점도 있다. 그는 내 행방을 알고 있기에 내가 어디에 있든 제때 찾아올 수 있었다. 그날 밤에 바닷가에서 그가 오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석지훈은 그릇을 식탁에 올려놓고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면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한 다음에 유유히 침실로 들어갔다.문을 열었지만 석지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큰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고 욕실에 가서 샤워했다.샤워를 마친 후 나와 보니 석지훈은 침대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은은한 불빛 아래 아련하고 온화해 보였다.나는 침대에 올라가 그의 팔을 껴안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였다. 남자의 어깨는 넓고 단단해서 기대면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산뜻한 체향까지 맡을 수 있었다.나는 손끝으로 살며시 그의 단단한 가슴을 어루만지자 그는 갑자기 곁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오빠라고 불렀다.그는 책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치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피했다.“일찍 자.”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시간이 이르잖아요.”이에 나는 대답했다.“내일 아침에 상주시로 가야 해.”그러니까 자기는 바쁘니까 쉬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는 다소 섭섭한 심정으로 그의 옆에 누웠고 그는 방 안의 불을 끄고 나서 얌전하게 내 옆에 누웠다.석지훈은 잘 때 자세가 매우 반듯했다. 심지어 예전처럼 낯선 사이인 듯 날 안아주지도
나는 내키는 대로 둘러댔다.“어젯밤에 일이 있어서요...”“거짓말하지 마. 내가 바보인 줄 알아?”원태웅은 죽어도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넌 꼭 형이랑 잤어.”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와 말하는 것이 후회해서 그를 째려보면서 경고하였다.“계속 이러면 오빠에게 이를 거예요.”“쯧쯧. 난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야.”나는 더 이상 원태웅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하였다.“오빠는 왜 상주시에 가신대요?”“형의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원태웅은 나에게 되물은 뒤 일어서서 물을 한 잔 따르면서 탄식하였다.“형은 무슨 일을 해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아. 독고다이같아.”원태웅은 얼음물을 반 잔 마신 후 웃으면서 말했다.“가자. 형이 아침에 널 오피스텔까지 무사히 데려다주라고 했거든.”이에 나는 말하였다.“잠깐만요. 옷 갈아입고 올 게요.”나는 위에 올라가서 블루 원피스로 갈아입고 내려오는 도중에 갑자기 송이연의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나에게 전화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했을 것이다. 전화가 연결되자 그녀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씨, 저 너무 무서워요... 어서 병원에 와서 같이 있어 주세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요.”그래서 나는 급히 원태웅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송이연은 수술실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다.그리고 뜻밖에도 수술실 앞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오혜원을 보았다.나는 놀라서 물었다.“넌 왜 여기에 있어?”오혜원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떠나기 전에 송이연 씨를 보고 싶었어.”나는 급히 그녀를 지나서 간호사에게 수술실 안의 상황을 물었더니 간호사는 설명해 주었다.“환자분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바람에 출혈을 많이 하게 되어 임산부와 아이는 모두 위험합니다.”어떻게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수가 있지?나는 얼른 여기에 나타나지 말아야 했을 오혜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내가 한 것은 아니야.
원태웅의 말에 나는 의아해했다. 왜냐하면 오혜원이 보육원을 떠날 때 신장이 두 개였다면 나중에 신장이 하나만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머릿속에 문득 대담한 추측이 떠올랐다.나는 원태웅에게 계속 묻고 싶었지만 간호사가 수술실로 들어가자고 재촉해서 호기심을 누르고 간호사를 따라서 수술실로 들어갔다.간호사는 안에 피투성이 된 장면을 보지 못하게 하였고 나를 송이연의 옆에 앉혀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가르쳐 주었다.“환자분의 정서를 최대한 위로해 주세요. 잠들지 못하게 하고 평소에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송이연의 얼굴은 땀투성이 되었고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녀는 흐트러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물었다.“제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수아 씨예요?”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맞아요.”“오혜원이 저의 뒤꿈치를 밟아서 제가 똑바로 서지 못해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예요... 수아 씨, 제 아이는 괜찮아요?”나는 아이가 괜찮은지 몰랐다. 지금 송이연이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나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그녀를 위로했다.“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었는데 아이는 살 수 있대요. 이연 씨가 버티기만 하면 돼요. 이연 씨, 의사 선생님이 딸이라고 하셨어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송이연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다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거짓말을 하였다.“거짓말이 아니에요. 아이가 곧 나올 거예요. 이연 씨가 잘 버티기만 하면 아이는 꼭 무사할 거예요.”“네, 수아 씨를 믿을게요.”이 말을 하고 나서 송이연은 기절하였다. 나는 다급히 의사를 불렀고 간호사는 나를 데리고 수술실을 떠났다.수술은 모두 열세 시간이나 진행하였다. 저녁 9시9분에 아이가 태어났으나 송이연은 위독한 상황에 빠졌고 의사는 계속 응급처치를 진행하였다.11시가 되어서야 그녀의 활력징후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는 미숙아여서 ICU로 실려 갔다.지금 아이는
원태웅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땐 내가 어려서 돈 쓰기가 불편했거든.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몇천만 원을 가져가서 기억에 남은 것 같아.”나는 속으로 많이 놀라워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분노가 더 많았다.나는 황급히 강 비서에게 전화해서 당시 연씨 가문을 떠난 집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그는 틀림없이 일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집사가 내 궁금증을 완전히 풀어 주기를 기대했다.나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말하였다.“셋째 오빠, 오혜원은 너무 가식적이고 사람을 자주 괴롭혀요! 저와 이연 씨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모두 걔 때문이에요. 하지만 걔는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고 여기까지 와서 이연 씨를 괴롭혔어요. 오늘 이연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정말 배은망덕한 인간이에요!”오혜원은 자신의 체내에 있는 신장이 누구의 것인지 알면서도 어떻게 송이연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지?송이연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왜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지?나는 원태웅을 밀치고 다급히 아래로 내려가서 오혜원을 찾았다. 그녀는 이미 병원을 떠났다. 내가 원태웅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내가 틀림없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도망친 것이었다.나는 당황한 나머지 바로 병원을 나와서 그녀를 찾아 나섰다.그녀는 마침 도로 옆에 있었다. 바람이 불어서 가냘픈 그녀는 바로 쓰러질 것 같았다.그녀를 질책하려는 말이 갑자기 목에 걸렸다.어쨌든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었다.그러나 불쌍한 사람은 반드시 미운 데가 있을 것이다.오혜원은 위장을 너무 잘 해서 모든 사람을 속였다. 그녀가 운성시로 돌아온 후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의 진담도 없었다.아니다. 진담 한 마디를 한 적이 있었다.그녀는 내 체내에 있는 신장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고 한 적이 있었다.나는 그냥 그녀를 놔주고 강 비서에게 이틀 후에 그녀를 스위스로 보내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녀를
그가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다정하게 물었다.“아직 졸려?”나는 그의 품에 기대며 물었다.“장례를 치르는 건가요?”“그래,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나는 몸을 겨우 일으키고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은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석지훈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러 나섰다. 관을 덮는 순간, 석지훈의 눈가가 계속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장례는 아침 9시에 끝났다. 우리는 석씨 집안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동성시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아랫배는 계속 아팠고 목에서는 쇳맛이 점점 짙어졌다.우리는 오후 한두 시쯤 아파트에 도착했다. 석지훈은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샤워를 한 뒤 곧장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나는 그가 잠든 틈을 타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갔다.도착한 곳은 석씨 집안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병원장은 내가 온 것을 알고 급히 달려와 나를 친절히 안내하며 검사를 도왔다. 그러나 CT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의사는 내 암이 재발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나는 충격을 받은 채 물었다.“암이 완치됐다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재발할 수 있죠?”“가주님, 조금 전에 이전 진료 기록을 검토했는데 전에 앓으셨던 자궁암이 말기였습니다. 말기라는 건... 완치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현재 의료 기술로는 재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넉 달 전 난산을 겪으셨잖아요. 비록 치료가 제때 이루어졌지만 몸에 무리가 갔던 건 사실입니다. 지금의 상태는 재발 초기 징후가 보이고 있으니 항암제를 다시 복용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재발 초기 징후라니... 언제든 병이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인가?나는 이미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었는데 이번에도 과연 또 기회가 있을까?죽음이 이번에도 나를 비켜가 줄까?나는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항암제 효과는 얼마나 있나요?”“가주님께서 이전에 드셨던 항암제는 석씨 집안에서 만든 약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치료 효과가 뛰어나 병세를
석지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내가 질문을 던지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 깊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방금 누가 뭐라고 했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냥 물어보고 싶어서요.”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석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넌 거짓말할 때마다 고개를 젓고 눈빛이 흔들려서 날 똑바로 보지 못해. 윤아야, 어떤 소문을 들었든 한 가지만 믿어. 난 어떤 이유로도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네 손을 놓지 않을 거고.”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지만 고집스럽게 물었다.“그럼 오빠가 나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예요?”이전 같았더라면 석지훈 어머니의 말을 들은 뒤 혼자 속앓이하며 복잡한 생각에 빠졌겠지만 석지훈과 함께하면서부터는 모든 걸 명확히 물어보고 싶어졌다.석지훈은 내가 진지하게 답을 원한다는 걸 알고 한참 생각한 뒤 차분히 대답했다.“전에 네 이름은 들어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네 얼굴도 몰랐어. 너한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건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였고 네가 연씨 집안의 대표이자 고현성의 전 부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였어. 사실 네 신분을 더 일찍 알 수 있었지만 난 네 신분조사에 관심이 없었거든. 네가 연윤아라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믿었어. 진실이든 거짓이든 당시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석지훈이 우리가 민박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을 때 나는 믿었다.그가 뭐라 하든 난 그의 말을 믿었으니까.게다가 그 시기 석지훈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는 내가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으니까. 만약 그가 그때 내 정체를 알았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그러니 우리의 만남엔 어떤 불순한 의도도, 다른 요인도 없었다.그가 내가 접근하도록 내버려둔 건 단지 내가 ‘연윤아’였기 때문이지 모두가 오해하는 그 ‘신장’ 때문이 아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오빠는 왜 그때 내가 접근하도록 둔 거예요?”왜 내 오빠가 되어
공식 자리에서 나는 석수아로만 불릴 수 있다.석씨 성은 내가 석씨 집안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석지훈의 차분하지만 위압적인 말이 끝나자 한 중년 여성이 나섰다. 그녀는 뚱뚱한 청년의 팔을 붙잡아 끌어내며 담담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가주님. 제 아이가 철없이 행동해 사모님을 언짢게 했네요. 지금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그녀가 바로 석지훈이 석지윤일 것이다.정당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석씨 집안의 방계 식구들은 적지 않았다.석지윤은 청년이 석지훈을 모욕하도록 내버려두다가 석지훈이 나를 언급하자 그제야 가식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모욕하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석지훈이 했던 ‘없앨 수도 있다’는 말은 석씨 집안의 방계들이 있는 곳에서 가주의 위엄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리고 이 뚱뚱한 청년은 본보기가 될 만한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그에게 문제였던 건 단 하나, 자신의 입을 조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호랑이가 개에게 무시당한다 해도 여전히 호랑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청년과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석씨 집안은 예로부터 규율과 존비귀천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상과 벌도 분명해야 하고요. 댁의 자제가 규율을 어겼으니 어쩔 수 없이 석씨 집안이 직접 가르쳐야겠습니다.”몇 달 전 함승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석씨 집안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부서가 있는데 처벌이 워낙 혹독해 사람들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석지윤은 내가 말한 ‘석씨 집안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가주님, 제 아이를 용서해 주십시오.”나는 비웃으며 답했다.“잘못을 저질렀으니 집안의 규율대로 가르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단...”잠시 멈춘 뒤 나는 말했다.“단, 당신의 아이가 석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 달라지죠.”정당에 모인 방계 식구들의 안색이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때 지훈이는 날 친어머니라고 믿었기에 나를 많이 그리워했어. 하지만 나는... 나는 지훈이한테 늘 차갑게 대했지. 생일날에만 잠깐씩 만났고. 지훈이가 네 곁에 나타난 이유는 네 몸속의 신장이 내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널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여자를 멀리하던 남자가 유독 너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쏟겠니?”‘석지훈이 나를 그렇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니!’나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석지훈이 정말 널 사랑한다고 믿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 넌 지훈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석지훈은 예전에 사랑을 모른다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이 어떤 건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정작 그의 행동은 내가 느끼기에 누구보다 사랑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나는 침묵했고 그녀는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지훈이는 석씨 집안에서 자란 아이야. 고독 속에서 자라 강인하고 잔인하고 냉혹해. 그런 사람이 사랑이란 감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니?”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음속으로는 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녀의 말이 날 혼란스럽게 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남자들은 다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 그런데 만약 지훈이가 너와 함께 있는 이유가 단지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라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녀가 이번에는 더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수아야, 지훈이의 또 다른 비밀을 알고 있니? 그 아인 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그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며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함승윤이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가주님, 그분이 뭐라고 하셨나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답했다.“아니에요.”함승윤과 함께 정당으로 향하자 석지훈이
그녀가 당시 아기였던 석지훈을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지훈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그녀가 고마웠고 그녀가 석지훈을 내 곁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했다.이때 김윤정이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석지훈의 것처럼 차가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석지훈의 손바닥은 차가워도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독사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한 걸음 물러났고 이를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지?”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흥, 도도하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있는 상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이 한 어머니는 이미 너 때문에 돌아가셨어. 네가 지훈이 또 다른 어머니마저 잃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훈이랑 더 이상 얽히지 마!”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당신을 존중하는 건 당신이 오빠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오빠의 또 다른 어머니를 해치셨으니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오빠의 존경심과 인내심을 모두 깎아내렸어요. 이대로 계속하시면... 오빠가 당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협박 때문에 지훈 오빠랑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남의 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녀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뭐 죽는 것보다 더하겠어?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 지훈이가 두 어머니를 모두 포기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하지!”눈앞의 여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을 상대하는 건 정말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석지훈의 어머니이자 내 친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왜 이렇게 증오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어젯밤, 석지훈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슬프기는 했지만 그 깊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의 슬픔을 보며 나도 점점 그의 감정을 공감하게 되었다.그가 방금 말했던 어머니 김혜정과 나를 증오하는 김윤정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혜정은 석지훈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녀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석지훈만 있었다.그녀는 단지 그가 건강하고 평온하길 바랐다.심지어 석지훈이 나와 결혼하려 할 때 그녀는 이를 찬성하기까지 했다.석지훈은 방금 그녀가 늘 쉽게 양보했다고 말했다.문득, 내가 두 번째로 석씨 가문에 갔을 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온화한 태도가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는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늘 한복 차림으로 석지훈만 바라보던 부드러운 여인은 결국 시들어버렸다.그녀는 분명 석지훈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혹시 그녀가 언니 김윤정에게 몰려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그녀가 죽기 전에 느꼈을 절망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석지훈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이것 또한 석지훈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이 아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분명히 그도 슬펐지만 여전히 나를 위로하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힘을 주어 말했다.“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요.”석지훈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응, 난 먼저 가서 빈소를 지킬게.”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옷 갈아입고 바로 따라갈게요.”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떠났다.나는 함 집사에게 상복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에게서 상복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함 집사가 내 팔에 검은 완장을 채워주었다.함 집사와 함께 정원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앞쪽에 검은 상복을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불렀다.“지훈 오빠.”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은 사람은 나의 어머니야. 평생 다른 신분으로 석씨 가문에서 살아가며 나를 아들처럼 키워준 분이야.”석지훈의 말투는 차분했고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있는 늘어진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는 아홉 살 때 석씨 가문을 떠났어.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그 당시 나를 입양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 알지 못했어. 그 아홉 해 동안 어머니는 나를 정말 잘 돌봐주셨어.”“그때 나는 후계자가 아니었고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어.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 작은 사모님들과 형제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어머니가 제일 먼저 나를 지켜주셨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석씨 가문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갔던 11년 동안 어머니는 항상 내게 편지를 보내주시며 버티라고 하셨어. 석씨 가문에서도 내 몫을 항상 챙겨주셨지. 내가 이렇게 빨리 성공해서 석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야.”석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나는 어머니를 정말 존경했어. 어머니 역시 나를 매우 존중해주셨지. 내 평생 어머니가 반대했던 유일한 일은 너와 나의 관계였어. 하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하자 결국 허락하셨어.”“어머니는 나를 위해 언제나 쉽게 양보하셨고 단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었어. 얼마 전에도 너를 며느리로 잘 대하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어.”석지훈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산산조각 난 듯 보였다.나는 그의 허리를 가만히 안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도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예요. 미안해요...혹시 우리의 약혼 때문일까요?”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잘못은 너에
석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단호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잘 모르겠어요.”우울한 마음에 나는 석만호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장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담현아 옆에 누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번 일은 지훈 오빠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야.”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담현아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정이 있으니 당연하지 않을까요?”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현아야, 우리 동성시에 돌아가자.”담현아가 대답했다.“정재 아저씨가 내일 지인들과 같이 캠핑한다면서 초대했어요. 나는 곧 운성시로 가야 해요.”‘고정재 씨가 운성시에 친구가 있다고?’아마도 담현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핑계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말을 마친 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차 키를 들고 별장을 떠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였다.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며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어요. 걱정 말고 일 보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응, 잘 자.]석지훈은 아직 깨어 있는 것 같았고 아마도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감았다.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나는 시간을 내어 석씨 가문 회사에 들렀다.석씨 가문의 업무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반년간 배운 경험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함 집사가 세심하게 가르쳐 주어서 모르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저녁 무렵, 함 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안주인께서 어젯밤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시면, 석씨 가문의 다른 계파들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나는 놀라며 물었다.“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