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웅의 말에 나는 의아해했다. 왜냐하면 오혜원이 보육원을 떠날 때 신장이 두 개였다면 나중에 신장이 하나만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머릿속에 문득 대담한 추측이 떠올랐다.나는 원태웅에게 계속 묻고 싶었지만 간호사가 수술실로 들어가자고 재촉해서 호기심을 누르고 간호사를 따라서 수술실로 들어갔다.간호사는 안에 피투성이 된 장면을 보지 못하게 하였고 나를 송이연의 옆에 앉혀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가르쳐 주었다.“환자분의 정서를 최대한 위로해 주세요. 잠들지 못하게 하고 평소에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송이연의 얼굴은 땀투성이 되었고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녀는 흐트러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물었다.“제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수아 씨예요?”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맞아요.”“오혜원이 저의 뒤꿈치를 밟아서 제가 똑바로 서지 못해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예요... 수아 씨, 제 아이는 괜찮아요?”나는 아이가 괜찮은지 몰랐다. 지금 송이연이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나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그녀를 위로했다.“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었는데 아이는 살 수 있대요. 이연 씨가 버티기만 하면 돼요. 이연 씨, 의사 선생님이 딸이라고 하셨어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송이연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다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거짓말을 하였다.“거짓말이 아니에요. 아이가 곧 나올 거예요. 이연 씨가 잘 버티기만 하면 아이는 꼭 무사할 거예요.”“네, 수아 씨를 믿을게요.”이 말을 하고 나서 송이연은 기절하였다. 나는 다급히 의사를 불렀고 간호사는 나를 데리고 수술실을 떠났다.수술은 모두 열세 시간이나 진행하였다. 저녁 9시9분에 아이가 태어났으나 송이연은 위독한 상황에 빠졌고 의사는 계속 응급처치를 진행하였다.11시가 되어서야 그녀의 활력징후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는 미숙아여서 ICU로 실려 갔다.지금 아이는
원태웅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땐 내가 어려서 돈 쓰기가 불편했거든.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몇천만 원을 가져가서 기억에 남은 것 같아.”나는 속으로 많이 놀라워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분노가 더 많았다.나는 황급히 강 비서에게 전화해서 당시 연씨 가문을 떠난 집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그는 틀림없이 일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집사가 내 궁금증을 완전히 풀어 주기를 기대했다.나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말하였다.“셋째 오빠, 오혜원은 너무 가식적이고 사람을 자주 괴롭혀요! 저와 이연 씨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모두 걔 때문이에요. 하지만 걔는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고 여기까지 와서 이연 씨를 괴롭혔어요. 오늘 이연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정말 배은망덕한 인간이에요!”오혜원은 자신의 체내에 있는 신장이 누구의 것인지 알면서도 어떻게 송이연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지?송이연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왜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지?나는 원태웅을 밀치고 다급히 아래로 내려가서 오혜원을 찾았다. 그녀는 이미 병원을 떠났다. 내가 원태웅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내가 틀림없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도망친 것이었다.나는 당황한 나머지 바로 병원을 나와서 그녀를 찾아 나섰다.그녀는 마침 도로 옆에 있었다. 바람이 불어서 가냘픈 그녀는 바로 쓰러질 것 같았다.그녀를 질책하려는 말이 갑자기 목에 걸렸다.어쨌든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었다.그러나 불쌍한 사람은 반드시 미운 데가 있을 것이다.오혜원은 위장을 너무 잘 해서 모든 사람을 속였다. 그녀가 운성시로 돌아온 후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의 진담도 없었다.아니다. 진담 한 마디를 한 적이 있었다.그녀는 내 체내에 있는 신장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고 한 적이 있었다.나는 그냥 그녀를 놔주고 강 비서에게 이틀 후에 그녀를 스위스로 보내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녀를
나는 내 몸 안에 있는 신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내가 아는 사람인지 늘 궁금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거짓말쟁이인 오혜원을 믿지 않을 것이다.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였다.“필요 없어.”그러고 나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로 말했다.“누구이든 상관없어. 지금 내게 있어서 네가 골칫덩어리야. 네가 이곳을 떠나야 나와 시혁에게 좋아.”오혜원이 이곳에 남으면 분명 다른 사고를 칠 것이다. 광풍을 맞으면서 무릎을 꿇고 있는 가냘픈 몸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를 설득했다.“혜원아, 너도 말했잖아.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넌 운성시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 병세가 안정됐으면 스위스로 돌아가!”이에 오혜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불쌍하게 말했다.“싫어. 아직 미련이 남아서 떠나지 못해.”나는 쭈그리고 앉아 맑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누구에게 미련이 남은 거야?”그녀는 줄곧 고개만 가로저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정말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는 걸 알기에 동정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가 연시혁에게 미련이 남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나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시혁이가 널 위해 많은 일을 했는데 넌 왜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다치게 했어? 그리고 우리 연씨 가문이 너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고현성에게 유서정과 결혼하라고 강요한 거지? 넌 여러 커플을 헤어지게 했어. 네 마음은 철판으로 만든 거니? 너에게 아무리 잘 대해줘도 녹일 수 없는 거야?”오혜원은 고집스럽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냥 울면서 내가 그녀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나는 이런 그녀를 볼수록 답답해서 미간을 찌푸리면서 강 비서에게 전화했다.전화가 연결되자 나는 지시를 내렸다.“오혜원이 송이연을 계단에서 밀어내서 아이를 조산하게 하였고 위독한 상황에 빠지게 했어요. 당장 경찰에 신고하고 변호사를 찾아서 인도하게 하세요...”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혜원은 내 다리를 안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구걸하였다.나는 한순간에
나는 병원에 잠깐 있다가 원태웅과 같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밖에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태웅은 수트를 벗어 머리에 뒤집어쓰고 재빨리 자신의 차를 찾으러 달려갔다.집에 도착하니 벌써 새벽 3시였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석지훈은 하루 종일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심지어 문자 한 통조차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예전에 그와 사귀지 않았을 때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유달리 걱정되었다.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나는 샤워하고 나서 얇은 잠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서 연예계 메인 뉴스를 둘러보았는데 요새 이슈 거리가 없었다. 소파에 누워서 바깥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 벨소리에 깨어났다.나는 얼떨결에 전화를 귀에 대고 소리쳤다.“오빠!”“그래. 문 열어.”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잠겨 있었다.나는 놀라서 물었다.“어디세요?”“말 듣고 문 열어줘.”그는 두 번이나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였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서 오피스텔의 문을 열었으나 문 앞에서 석지훈을 보지 못했다. 문밖으로 나가서 보니 로비 끝에 뒷모습이 매우 외로워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눈을 내리깔고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살금살금 다가가서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그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의 팔을 비집고 머리를 내밀어 보니 건물 밖에 어떤 귀부인이 빗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검푸른 치파오를 입었고 꽃무늬 접이식 우산을 들고 있었다.그녀는 머리를 들고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에 두는지 모르지만 석지훈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석지훈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석지훈의 허리를 꽉 끌어안자 석지훈이 비로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물게 그의 이마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멍한 모습으로 나를 불렀다.“아가야...”나는 남자의 의기소침한 정서를 느낀 것 같았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침대에 누웠고 석지훈은 욕실로 들어갔다.그의 샤워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나올 때 나는 거의 잠이 들 뻔했다. 그가 내 허리를 껴안자 나는 비로소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그의 단단한 가슴에 묻었다.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어제 어디에 갔어요?”그는 차가운 말투로 대답하였다.“상주시.”지금 이런 차가운 말투로 말하다니. 나는 입을 벌리고 그의 상처를 깨물었다.석지훈의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비를 맞고 샤워하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가 그를 깨무는 행위를 저지하지 않았고 아프다고 끙끙거리지도 않았다. 정말 참을성이 많은 남자였다.흥미를 잃은 나는 입을 떼고 그의 몸에 난 상처를 보았다. 그가 욕실에서 상처를 치료한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살살 그의 상처를 만지면서 가슴이 아팠다.“안 아파요?”그는 정말 아프지 않은 듯 말하였다.“안 아파.”“거짓말. 다쳤는데 어떻게 안 아파요?”석지훈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아프지 않아. 예전에 이보다 더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어.”석지훈은 처음으로 ‘예전’이란 단어를 말하였다...나는 석지훈의 ‘예전’ 모습이 궁금했다. 나는 머리로 그의 날카로운 턱을 비벼대고 환심을 사려고 그의 쇄골에 뽀뽀하였다.“오빠의 예전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요?”석지훈은 워낙 말수가 적고 자신의 과거를 다른 사람과 쉽게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예전처럼 나의 질문을 무시할 줄 알았는데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순탄하지 않았어. 이후에 시간이 있으면 얘기해 줄게.”지금 시간이 있잖아!나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그는 나에게 그의 과거사를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눈치 있게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어젯밤에 왜 그렇게 열정적이었어요? 오빠답지 않게...”석지훈은 매우 피곤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더 이상 내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섭섭해서 그
귀부인의 나이를 보면 나의 연적은 절대 아니었다.나는 병원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석지훈도 줄곧 연락이 없어서 갑자기 짜증이 났다.오피스텔로 돌아왔을 때 이미 저녁이 되었다. 운성시는 여전히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석지훈은 긴 창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위치에서 내가 단지 안에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인기척을 듣자 그는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나는 냉담하게 그를 힐끗 쳐다본 다음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잠깐 누워있었는데 그는 문을 열었다.그의 머리는 거의 문틀에 닿았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나한테 화났어?”그는 내가 화가 난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가식적으로 말했다.“아니에요.”“넌 지금 화가 났어.”그의 목소리는 아주 단호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어젯밤에 건물 밖에 있는 여자는 누구예요?”석지훈은 내 말을 듣고 한순간 묵묵히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차갑게 보여서 답을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하였다.“내 어머니이셔.”그는 냉혹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사실 그 전에 나는 석씨 가문의 여자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왜냐하면 치파오를 입은 모습이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정말 사실일 줄은 몰랐다.“어제 상주시에 갔다면서요?”나는 물었다.그러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날 의심하는 거야?”석지훈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는 잠자코 있다가 냉랭하게 해석했다.“어젯밤에 운성시에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갈라진 후 계속 내 뒤를 밟을 줄은 몰랐어.”석지훈은 중간에 말을 잠시 멈췄는데 그사이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그럼 x약은 도대체 누가 먹여준 거지?그를 노리는 자는 도대체 누구냐고?!나는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 석지훈이 내 궁금증을 풀어 주기를 기대했다.하지만 그는 해명하고 싶을 생각은 없었다.내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
나는 석지훈에게서 귀여움과 안전감을 얻을 수 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인제야 원래 감정에 대해 참을성이 있었던 내가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으로 사랑했던 남자가 반응해 주기를 절박하게 갈망한다는 것을 알았다.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남자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석지훈을 쫓아다니는 모습이 예전에 내가 고현성을 따라다니는 것과 뭐가 다른가?나는 예전에 고현성과 결혼해서 그 사람을 가졌지만 사랑을 받지 못했다.지금 나는 석지훈을 가졌지만 그는 예전처럼 냉담하게 대해주었다.석지훈은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로 차갑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집요하게 석지훈에게 사귀자고 요구하지 말아야 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나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결국은 나의 모든 자존심을 걸고 그가 날 사랑하는지를 묻고 싶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갑자기 차분해졌고 기쁘거나 억울한 감정이 없었다. 내가 자업자득한 것이 아닌가?나는 가식적으로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오늘 출근 안 했어요?”내가 조용히 묻는 것을 보자 석지훈은 눈빛이 번쩍거렸다.“이따가 본가로 돌아갈 거야.”그가 말한 본가는 운성시와 동성시 사이에 있는 대저택일 것이다.나는 알았다고 건성건성 대답하였는데 그는 같이 가자고 하였다.지금 나는 어떻게 그를 마주 봐야 할지 몰랐고 이 숨이 막히는 공간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그래서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거절하였다.“저는 이따가 일이 있어서 회사로 가야 해요.”석지훈은 묵묵히 있다가 한참 후에야 방에서 나갔다.나는 일어나서 창문 밖으로 바라보니 윤 비서는 이미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수트 차림을 한 석지훈이 나타났다.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윤 비서를 향해 걸어갔다. 차에 타기 전에 그는 살짝 곁눈질로 내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나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
“강 비서, 우연이라고 생각해요?”이에 강 비서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대표님의 말씀은?”“우연일 리가 없어요.”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우연은 없다.모두 누군가의 음모로 발생한 것이다.두 시간 뒤 집사는 수술실에서 나왔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계속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식물인간으로 될 확률이 매우 높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내 가슴에 웅장한 큰 산이 짓누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강 비서를 따라서 떠났다. 병원 입구에서 내 차 옆에 어떤 고급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그것도 내가 매우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고급차였다.나와 고현성이 결혼한 후 3년 동안 그가 자주 이 마이바흐를 운전했기에 자동차 번호를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나는 눈을 감다가 다시 떠서 강 비서에게 말했다.“먼저 돌아가세요.”강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는 우산을 나에게 건넸다. 그가 떠난 후 나는 힘겨운 발걸음으로 그 마이바흐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걸어가자 차창이 스르르 내리면서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갑자기 제자리에 서서 다가가지 않았다.고현성은 고개를 까닥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나 안 보고 싶었어?”나는 우산을 들고 쏟아지는 폭우를 사이에 두고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비꼬는 듯이 웃으면서 물었다.“수아야, 석지훈이랑 같이 있으니까 행복해?”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솔직하게 말했다.“행복하지 않아요.”이에 그는 눈썹을 추켜세워서 물었다.“왜?”“날 사랑하지 않아서 괴로워요.”고현성은 이해한 듯이 물었다.“그럼 석지훈은 누구를 사랑할 것 같아?”석지훈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지금 눈앞의 고현성은 정상적인 인격인 것 같았다.낯익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지난 3년이 떠올랐다. 우리 두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사랑의 족쇄를 벗었다. 나는 석지훈을 선택하고 그를 포기한 것이다.그러나 당시 내가 또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내가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