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연시혁은 어렸으니 부모님을 말릴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나는 송이연에게 연시혁은 원래 제 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는다고 하며 그녀를 위로했지만 사실 연시혁은 오혜원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저 혜원 씨 본 적 있어요. 연약하고 순진한 분이더라고요, 남자들의 첫사랑은 그런 여자일 것 같았어요.”작고 왜소한 오혜원은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어릴 때부터 연씨 집안이랑 엮이면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왔기에 나는 오혜원은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했다.“혜원이는 언제 봤어요?”천천히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송이연은 어느새 허리까지 차오른 물에 작디작은 몸을 반쯤만 드러낸 채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송이연은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 말에 답을 했다.“시혁 씨가 부탁해서 조직 적합성 검사하러 갔었어요. 아까 비서한테서 결과 전해 들었는데 어떻게 또 마침 적합하다네요.”“적합하다고요?”내가 놀란 듯 되묻자 절망적인 얼굴을 한 송이연이 말을 이었다.“네, 그런데 전 기증해줄 마음 없어요. 시혁 씨가 부탁하니까 마음 약해진 건 맞는데 그렇다고 제 마음 모른 척하면서 기증하고 싶지는 않아요. 수아 씨, 제가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까요?”고현성과 동시에 적합성 검사를 통과한 송이연이지만 하나는 기증을 원하고 하나는 기증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마침 나는 고현성의 기증을 반대하고 있었고 연시혁은 송이연이 기증하길 원하고 있었다.송이연 본인만 원한다면 완벽하게 해결될 일이지만 적합성 검사도 그냥 연시혁에게 등 떠밀려 한 그녀이기에 지금 이렇게 나한테 연시혁을 거절할 방법을 묻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나도 오혜원이 살길 바라는 사람 중 하나로서 특별한 묘안은 없었다.그래도 기증이라는 건 목숨을 내건 큰 결심이기에 강요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나는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이연 씨가 싫으면 아무도 이연 씨한테 강요할 수 없어요. 시혁인 이연 씨가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지 굳이 그 사람을 위해서 인생
연시혁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송이연의 눈가는 금세 촉촉해졌다. 너무 억울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지 못해서 더 슬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말아무는 그녀에 나는 연시혁에게 뭐라고 더 묻지도 못했지만 그는 계속 중얼거리듯 말했다.“수아야, 우리가 혜원이한테 진 빚은 갚아야 해.”“그럼 이연 씨한테 진 빚은 어떻게 할 건데?”내가 담담하게 묻자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연시혁은 갑자기 화를 내며 대꾸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그 말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연시혁에 나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며 송이연을 다독였다.“미안해요, 시혁이한테는 내가 다시 얘기해볼게요.”하지만 송이연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직접 해결할 거야. 저랑 혜원 씨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 때문에 신장을 내놓을 만큼 제가 착하진 않아서요. 생각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에 가까울 거예요 저는.”그녀의 마지막 말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의 송이연은 예전의 망설이고 두려워하던 그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씨 가문 앞에서 내린 나는 송이연이 가는 걸 지켜본 뒤에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저 앞에 서 있는 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사실, 그가 올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를 피하고 싶긴 했다.하지만 여기서 굳이 피한다면 오히려 내가 자신한테 떳떳하지 못한 것 같아 나는 좀 더 당당해지기로 했다.나에게는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까.그렇게 그를 대차게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얘기 좀 하자.”“내가 왜요?”괜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거절하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고현성은 갑자기 나를 들어 올리더니 아무 말도 없이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차에 태워 버렸다. 내가 차 안에서 몸부림치며 내려
“자꾸 그 얘기 꺼내서 나 자극하지마.”“나 진짜 속상해 수아야.”내 손을 잡아 오며 나지막하게 말하는 고현성에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불쌍한 척 좀 그만해요!”“두 달 전에 내 속은 편했는 줄 알아요? 내가 혜원이 도움받고 싶었을 것 같아요?”“너는 안 원했겠지만 방법이 있는데 내가 왜 포기하겠어, 널 기절시켜서라도 치료받게 했을 거야 나는.”“비켜요.”두 달 전 성당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기에 나는 짜증을 내며 그를 발로 차버렸다.매번 상처를 다 줘놓고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하는 사과, 이제는 받고 싶지도 않았다.그런 사람을 더 용서해주기도 싫었고 앞으로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설령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 해도.고현성은 내 발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를 껴안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수아야,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 그래서 너도 그때 고정재 거절하고 날 선택한 거잖아.”여름날의 무더위도 이길 정도로 시린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요, 그래서 몇 번이고 용서해줬어요. 그런데 난 평생 그렇게는 못 살아요, 우리가 만나는 3년 동안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해봐요, 나한테 잘해준 게 있긴 해요?”지난 3년 동안 고현성은 나에게 수 없는 상처만 남겨주었었다.암도, 불임도 모두 고현성 때문에 얻은 병이었고 얼굴에 난 상처는 더더욱 고현성과 임지혜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나는 갈기갈기 찢기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내 불임도 당신 때문에 생긴 거잖아요.”내 말에 고현성은 마음이 아프긴 했는지 나를 꼭 끌어안으며 뜨거운 액체를 흘려보냈다.내 살결을 따라 흐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지자 나는 그제야 고현성이 울고 있음을 눈치챘다.최희연이 묘지 앞에서 울고 있던 고현성의 모습이 그렇게 처절했다고 말한 적은 있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라서 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어떨지 한 번도 제대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별장 2층에서 뛰어내려 크게 다친 나를 본 고현성은 많이 놀랐는지 입술까지 떨며 바들거리는 몸으로 나를 안으려 했다.꼼짝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전에 났던 상처가 긁혀 피가 철철 나는 얼굴에도 평온하게 말했다.“나는 이 정도로 당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죽어도?”“당신한테 바친 내 청춘은 이미 충분히 많거든요.”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도 단호하게 답했다.“수아야,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한 거야?”“그러는 현성 씨는 나한테 좋은 남자였나요?”3년 동안 따뜻한 온기 하나 느껴보지 못한 연애였음에도 그를 사랑하니까 그냥 버텨왔었다.하지만 이미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는데 또 그에게 얽매여 남은 날들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놈의 사랑 때문에 내 몸을 또 혹사시킬 수는 없었다.고단해질 삶도,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아플 이 사랑도, 그리움에의 고통도 끝없는 서러움도 너무나도 두려워져서 다시 그에게 마음을 내어줄 용기가 없었다.그래서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이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그 누군가가 고현성이 될 수는 없었다.고현성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응급실에서 온몸에 붕대를 감고 나온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병실 한쪽에 기대 서 있었다.나는 온몸이 찌릿찌릿하게 아파왔지만 그의 앞에서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먼저 못 버티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지는 인내심 싸움이었기에 나도, 고현성도 둘 다 아무 말 않고 있었다.하지만 내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면서까지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여줬을 때, 사실 고현성은 진작 자신이 질 내기임을 알고 있었다.결국 그가 조용히 병실을 나서자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드디어 끝냈네.”그와의 관계를 끝내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마음은 누가 후벼 파는 것 마냥 아파왔다.3년이나 그만을 바라봐왔으니 이 정도 아픔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마음도 아픈데 몸까지 쑤셔오니 잠이 안 왔던 나는 문득 석지훈이 뭐 하는지 궁금해
그때는 몰랐지만 사실 석지훈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 내 주위에서 머물고 있었다.하지만 한 번도 먼저 날 귀찮게 하거나 하지는 않고 늘 내가 필요할 때만 내 앞에 나타나 주었다.그날도 아마 내가 그와 같은 기종의 핸드폰을 쓰고 있어서 GPS 공유기능을 통해 나를 찾아낸 것 같았다.“계속 상주시에 있었던 거에요?”내가 있는 도시에는 항상 석지훈도 함께 했던 것 같아 나는 문득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응, 운성에서 왔어.”“아, 네.”나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석지훈 옆으로 빨간 월계화가 피어있었는데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그 꽃보다 석지훈이 더 매혹적인 것 같았다.남녀노소 누구나 인정할 만큼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에게는 유독 절제된 것 같은 섹시함이 있어 모든 여자들의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그런 남자가 이렇게 나를 걱정해주고 다쳤다는 말에 한걸음에 달려와 준 게 고마워서, 그리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여름 바람과 은은한 달빛 아래로 보이는 완벽한 그의 얼굴까지 모든 게 너무 완벽해서 그 분위기에 취해버린 나는 웃으며 말했다.“오빠 진짜 잘생겼네요.”“나 놀리는 거야?”그의 앞에서는 누구도 감히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듯 당황하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비치는 석지훈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고 보니 저번에 잘 생겼다고 했을 때도 정색을 하며 말했던 것 같았다.“윤아야, 나한테 마음 품지 마.”이번에는 그리 상처 되는 말은 하지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았다.원래 성격이 과묵한 편이라 나만 입을 다문다면 어차피 말을 잇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래서 나는 힘겹게 그의 곁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오빠, 나랑 같이 병실로 올라갈래요?”짧게 알겠다고 대답한 석지훈은 자연스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등을 보였다.그 의미가 너무 명확해서 원래 걷기도 힘들었던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그에게 업혔다.내 다리를 두 팔로 감싼 채 천천히 걷는 그가 너무 듬직해 보여 나는 턱을 그의 어깨에 올리며 물었다.“오빠, 몇 살이
반경우가 전에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석지훈 세대에는 원래 아들이 꽤 많았는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석지훈 단 한 사람뿐으로 모두 경쟁에서 져서 탈락하였다고 말이다.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지금 윤승민은 나한테 이렇게 말해주었다.“석씨 가문의 상속자는 단 한 명뿐입니다.”결국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이라는 뜻이다.‘석지훈이 바로 그 험난한 과정을 뚫고 살아남은 사람이란 말인가? 석씨 가문이란 대체 어떤 존재지? 규칙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지?!’나는 윤승민에게 물었다.“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윤승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저는 석 대표님의 개인 비서이지만 석씨 가문... 석 대표님의 뒤에 있는 그 가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아직까지 제대로 석씨 집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윤승민은 설명했다. “석 대표님이 다섯 살 때 가문을 떠나 혼자 생활하셨다고 말씀드렸죠? 그게 석씨 가문의 방식입니다. 그때 석 대표님과 함께 세 명의 형님도 석씨 가문을 떠났는데 당시 석 대표님은 가장 어렸지만 결국 석씨 가문의 유일한 상속인이 되셨지요.”나는 호기심에 물었다.“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윤승민이 되물었다.“황자들이 황위를 다투는 것을 보신 적 있어요?”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무슨 뜻이죠?”“지면 죽는 겁니다.”윤승민은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저는 석 대표님을 7년간 모셨는데 그해 석 대표님과 그의 형님들은 함께 석씨 가문으로 들어가셨는데 결국 혼자 나오셨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그때의 석 대표님은 말수가 적긴 했지만 지금처럼 차갑지는 않으셨어요. 지금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세상사에 무관심한 사람 같지만요. 뭔가 엄청난 일을 겪고 변해버린 것 같은데 저와 원 선생님은 아직까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윤승민이 말하는 원 선생님은 원태웅이었다.나는 주저하며 물었다.“예전의 석
“수아 씨는 전공이 뭐죠?”송이연이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나는 풀이 죽어 말했다.“열네 살에 연 씨 가문을 물려받은 후로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어요. 잘 생각해 보니 중학교 졸업장에 피아노 10급 자격증만 있네요.”송이연은 부러운 듯이 물었다.“피아노를 칠 줄 아세요?”“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어요.”내가 말했다.“그럼 정말 잘 치시겠네요.”송이연은 진짜 눈치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학력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반대로 내가 피아노를 칠 줄 아는 것을 부러워한다고 말했던 것이다.그녀와 대화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고 심지어 무척 편안함을 느꼈다.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비로소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먼저 나에게 물었다.“연수 씨는 왜 제가 계약을 파기하길 바라죠?”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저는 유씨 가문이랑 사이가 안 좋아요.”그녀는 이유는 묻지 않고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수아 씨 뜻대로 오후에 유씨 가문과의 계약을 거절할게요.”나는 재빨리 말했다.“위약금은 제가 부담할게요.”송이연은 고개를 저으며 우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새 친구 사귄 셈 치죠. 수아 씨에게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설명했다.“내가 수아 씨와 친구가 되려는 건 시혁 씨 때문이 아니라 수아 씨가 진솔한 사람 같아서 그래요.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잖아요.”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나도 거짓말해요.”그녀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수아 씨는 나에게 거짓말하지 않을 거예요.”“믿어줘서 고마워요.”좀 있다가 강해온이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나는 송이연에게 자원 공유 계약서에 서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송씨 가문에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다.그녀는 정중하게 거절하며 말했다.“아직은 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그녀는 이 계약에 현혹되지 않고 매우 이성적으로 나를 거절했다. 나는 설명했다.“이것은 제가 새 친구에
석지훈은 뜬금없이 나에게 석씨 가문에 갈 거냐고 물었다.‘나랑 석씨 가문으로 갈래’라는 그의 질문은 어떻게 들어도 묘한 뉘앙스였다.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그 사람들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나: “...”내가 그들을 걱정한다고 해서 석씨 가문에 가야 하는 건가?나는 단지 석씨 가문의 상황이 어떤지 궁금했을 뿐이지 석씨 가문에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석지훈이 왜 이렇게 생각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그와 대화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게다가 그에게선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나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고 둘 사이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얼른 화장실에 다녀왔고 나오니 석지훈은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밝은 불빛이 손끝에서 천천히 타들어 갔다. 밤하늘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는 밤의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느껴졌고 그의 모습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담배 피우는 석지훈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렸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침대에 누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강인한 턱선과 완벽한 옆얼굴, 그리고 크고 탄탄한 등을 가졌다. 이런 남자가 늘 위험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그는 늘 다치고 몸에는 수많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나는 원태웅에게 왜 그렇게 강한 석지훈이 항상 위험 속을 드나드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원태웅은 석지훈이 혼자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그는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그러면서도 매혹적이고 마음을 흔들었다.석지훈은 담배를 반쯤 피우다 끄고는 나에게 물었다.“왜 뛰어내리려고 했지?”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나는 솔직하게 설명했다.“전남편이 찾아왔는데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자꾸 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제가 또 마음이 약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도망치려 했는데 그가 저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제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저를 전혀 존중하지 않아서 정말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