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 다 털어놓는 성격이라 나는 김예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김예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뭐, 그런 셈이지.”“왜 싸웠는데요?”김예진은 꾸밈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민수 씨는 내가 매사에 너무 무심하고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나 봐. 네가 수술을 받은 뒤에도 난 계속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결국 문제의 본질은 민수 씨는 내가 민수 씨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데서 비롯됐어. 넌 그저 우리가 싸움을 터뜨린 계기가 됐을 뿐이야.”조민수는 늘 내 일에 대해 책임감 있게 신경 써 주었고 나도 거리낌 없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모두 김예진의 마음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미안해요, 언니.”그리고 붉어진 눈시울을 손으로 가리며 덧붙였다.“정말 미안해요. 그런 점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사실 오빠는 정말 언니를 사랑해요. 나에게 신경 쓰는 것도 그저 의무감 때문이에요. 앞으로 오빠에게 부탁하는 일 줄일게요, 언니. 제발 오빠에게 너무 화내지 마세요.”“그런 게 아니야, 수아야.”김예진은 차분히 설명했다.“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우리는 단지 싸움의 이유를 찾은 것뿐이지, 본질적인 문제는 민수 씨는 내가 너무 쌀쌀맞다고 느낀다는 거야. 아마 내가 생각만큼 민수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나 봐.”“그럼 언니는 오빠에게 마음이...”“사실 나와 민수 씨가 다시 만나기까지 생각처럼 순조롭지 않았거든. 그 사람이 나를 많이 아프게 했었어. 그때는 정말 평생 용서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결국 민수 씨의 끈질긴 구애에 마음이 돌아섰어. 다시 만난 후로 한동안은 참 행복했어.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불편함이 있더라. 그 마음의 벽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아서 내가 예전처럼 민수 씨를 사랑할 수 없게 됐나 봐.”나는 깜짝 놀랐다. 민수 오빠와 예진 언니 사이에 그런 벽이 있었다니.김예진은 이어서 말했다.“우리가
최희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 앞 복도 한쪽에 고현성이 담배를 들고 서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서둘러 담배를 치우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희연 씨는 응급 처치가 끝났어. 그런데... 운전한 사람이 희연 씨가 접근하고 싶어 하던 그 남자더라고.”나는 곧바로 물었다.“진유겸이라고요?”고현성은 어떻게 최희연이 진유겸에게 접근하려 했다는 걸 알았을까?고현성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진유겸을 조사한 게 혹시 희연 씨 때문이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고현성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곧 모든 것을 이해한 듯 말했다.“내 생각엔 희연 씨가 일부러 그런 것 같아. 스스로 위험에 뛰어들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거지. 우리가 희연 씨의 복수심을 과소평가했나 봐. 진씨 가문에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진유겸을 건드리고 이런 일까지 계획하다니.”고현성의 말은 그 역시 진서준의 죽음과 관련해 의심을 품고 있음을 암시했다. 우리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도 최희연이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나는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진유겸은 어디 있어요?”설마 최희연을 치고 그냥 도망쳐버린 건 아니겠지?“갔어. 대신 비서를 남겨두고 갔더군.”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었다.“이렇게 해서 희연이가 얻을 수 있는 게 뭘까요?”단지 교통사고로 진유겸이 최희연에게 책임감을 느낄 리도 없는데.고현성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아마도 협상할 기회를 얻고 싶은 거겠지.”나는 그 협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병실로 들어가 보니 최희연은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얼굴을 제외한 온몸에 멍이 들어 있었다. 이런 그녀를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최희연의 인생은 참으로 험난했다. 평생 진서준을 기다렸고 어렵사리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불과 석 달 만에 그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마음이
유서정은 아마 내가 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신의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휴대폰을 슬며시 옆에 있던 유지영의 가방에 넣었을 터였다.“괜찮아요. 어차피 우리가 원한 건 이미 이루어졌으니까.”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비서가 놀란 듯 물었다.“대표님, 처음부터 유서정이 범인인 줄 아셨던 거예요?”“추측은 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어요.”비서의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침대에 앉아 출생 기록을 펼쳤다.이름이 연수아인 건 맞았다. 아기였던 내 사진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출생 연도가 1995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나는 1996년생으로 올해 23세다. 그러나 이 기록에 있는 연수아는 24세였다.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감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임지혜가 무엇을 하려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나는 급히 비서에게 문자를 보내 나의 출생 기록을 삭제해 달라고 부탁했다.비서는 이유를 묻지 않고 알았다고 답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고 불안했다.순간 내가 다른 사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 나는 진짜 연수아가 아닐 수도 있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내 부모님도 진짜 부모님이 아니란 말인가?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연씨 가문에는 지금 나를 위해 이 사실을 확인해 줄 어른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머릿속에 떠오른 유일한 사람은 연시혁이었다.나는 연락처를 뒤져 연시혁의 번호를 찾아냈다. 그가 번호를 바꿨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한참 동안 기다리자 전화가 연결되었고 그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연수아, 갑자기 왜 전화했는데? 우리 사이가 그렇게 좋다고 생각해?”연시혁은 어릴 때부터 나에게 늘 냉담했다. 나와 큰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성격이 그런 사람이다.나는 개의치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요즘 어떻게 지내? 돈 필요한 건 아니지?”“너랑 무슨 상관인데? 돈 필요해도 널 찾아갈 일 없어.”나는 말문이 막
나는 고정재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윤다은이 고정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고정재가 지금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 점에서 나는 윤다은에게 있어 일종의 경쟁자 같은 존재였다.윤다은이 나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하니 그녀의 속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윤다은은 내 질문을 듣고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맞아요. 앞이 보이지 않는 짝사랑이라서요.”보통 이런 경우에는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야 했겠지만 그 사람이 고정재라는 걸 알기에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감정 문제는 말로 하기 참 어려운 것 같아.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에 담요가 있으니까 그거라도 덮어.”윤다은은 내 말투에서 냉담함을 느꼈는지 입술을 꼭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담요를 가져다 덮지도 않았다.나와 고현성의 관계가 있으니 그녀는 어쨌든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순간적으로 약속을 잡은 게 후회스러웠다. 나는 그녀가 안타까워 뒷좌석에서 담요를 집어 건네주었다. 윤다은은 조용히 받아 들고 담요를 덮으며 말했다.“난 수아 언니가 정말 부러워요.”오늘 윤다은이 나를 찾은 건 결국 고정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일 터였다.나는 차를 출발시키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난 건강한 몸도 없고 아이도 가질 수 없는 몸이야. 그런 내가 뭐가 부럽다는 거야? 다은아, 너는 지금 너의 행복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그래도 언니가 너무 부러워요.”내가 그 남자의 사랑을 얻었다는 게 부러운 걸까?나는 그저 모르는 척 웃어넘겼다.“나도 네가 부러워.”창밖의 비는 점점 거세졌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차를 길가에 세웠다.“비가 좀 잦아들 때까지 기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지나친 것 같았다...고정재랑 나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 남자는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 평생 기다리면 되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그는 평생을 바쳐서라도 나를 기다리겠다고 했다.내 말을 들은 윤다은은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차 안은 갑자기 낯설 정도로 고요해졌다. 나는 기억 속의 길을 따라 그녀의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우산을 건넸다. 윤다은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수아 언니,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그냥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어요.”그녀는 잘못한 게 없었다. 오히려 내 태도가 문제였다.윤다은의 두려워하는 듯한 눈빛을 보며 나는 살며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재 씨의 마음마저 내가 어떻게 할 순 없겠지만 정재 씨와 다시는 엮이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윤다은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저는 언니랑 오빠가... 그런 게 걱정되는 게 아니에요.”“다은아.”내가 그녀를 부르자 윤다은은 입을 다물고 눈시울이 붉어진 채 나를 바라보았다.“나도 예전에 현성 씨를 좋아했었어. 그때 정말 미치도록 질투했던 사람이 있었거든.”나에게는 임지혜가 그랬다. 미치도록 질투했던 사람.“수아 언니, 저는 언니를 질투하는 게 아니에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아. 그래도 내가 너라면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건 신경 쓰일 거야.”나도 한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었기에 윤다은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녀는 우산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나는 차에 올라 곧 출발했다. 그러다 연시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 오는 날 굳이 만나자고 했다. 사실 가지 않으려 했지만 낮에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려 결국 수락했다.“한 시간쯤 걸릴 것 같아. 기다려.”비가 오니 운전은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연시혁이 약속한 장소는 외딴곳이었다. 결국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그곳은 운성시 외곽의 작은
“김대성, 당장 그 여자를 놓지 못해?”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을 움켜쥐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손을 놓아버렸다. 나는 비바닥에 쓰러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김대성이라는 남자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비웃듯 말했다.“비겁한 놈이 드디어 나타났네?”“웃기지 마. 전화하느라 늦었을 뿐이야.”통화 중이었던 이유가 바로 다른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나는 기침을 몇 번 하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빗속에서 당당히 서 있는 연시혁이 보였다. 여전히 그는 거침없고 천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치 연씨 가문을 떠나던 그때처럼 하늘 아래 두려울 게 없는 모습이었다.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시혁도 나를 보며 잠깐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눈에는 살짝 죄책감이 스쳤다.드물게 그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미안해, 수아야.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나한테 덫을 놓고 기다릴 줄은 몰랐어. 너까지 휘말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불안함이 가득했다. 연시혁은 맨손에다 혼자였다. 괜히 윤다은처럼 그가 다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옆을 돌아보니 윤다은이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로 땅에 엎드려 있었다. 크게 다친 것 같았다. 나는 다급히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고 되뇌었다.“괜찮아, 이제 괜찮아”이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로하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연시혁이 갑자기 혼자 뛰어 들어왔다. 걱정이 밀려오는 순간 그의 뒤에서 여러 사람이 뛰어나와 함께 싸우기 시작했다.김대성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나를 잡으려 했지만 연시혁이 재빨리 그에게 발길질하고 내 옆으로 다가와 나를 지켰다.그는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오로지 나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막았다.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비가 너무 쏟아져 연시혁은 내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만남을 약속한 이상 당연히 자초지종을 알고 있겠지.연시혁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는 수아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연씨 가문의 진짜 핏줄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나는 웃으며 말했다.“시혁아, 너답지 않네. 너라면 뭐든 직설적으로 말했을 텐데. 나도 진실을 알고 싶어. 말해줄 수 있어?”연시혁은 뭐라고 하려다가 갑자기 내 뒤를 쳐다보며 말했다.“다음에 시간 나면 내가 연락할게.”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고현성이 뒤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시혁이 불편해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다음엔 조용한 곳에서 보자.”마음 한편이 허전하게 느껴졌다.연시혁이 떠난 후 뒤를 돌아보니 고현성이 차가운 표정으로 연시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물었다.“너희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야?”“네, 친구예요.”내 대답에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감추고 있는 게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고현성은 더 묻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먼저 물었다.“정재 씨는 다은이가 다친 걸 알고 있어요?”“응, 전화했어.”“그럼 다은이를 보러 오겠다고 했어요?”내가 다시 묻자 고현성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빛 속에 무언가 탐색하는 듯한 기운이 섞여 있었고 오랜 침묵 끝에 대답했다.“시간이 없대.”나는 윤다은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그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불쌍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과거의 나라고 달랐을까?문득 윤다은이 방금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정재가 나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그녀가 거짓말로 막았다고 했다.사실 그 남자도 한때는 나에게 따뜻함을 주려 했던 걸까.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윤다은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녀는 상태가 많이 좋아진 듯했고 고현성을 보자 살짝 놀라며 말했다.“작은오빠가 여기 웬일이야? 새언니는 참 행복하겠네.”고현성 앞에서 그녀는 나를 수아 언니가 아니라 새언니라고 불렀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아마도 내 옆에 고현성이 있는 게 부러워해서겠지.그녀는... 고정재를 원했다.
‘다은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응답해야 하는 거야?’고정재의 말이 머릿속 깊이 울려 퍼졌다.나는 순간 멍해졌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한숨을 쉬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꼬마 아가씨, 세상엔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 네가 다은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나도 다은이 오빠로서 흔들리지 않는 척하기 어려워. 하지만 어떤 일에는 내 나름의 기준이 있어. 다은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다은이의 감정이지만 내가 다은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건 내 선택이야. 내가 무정하게 대하지 않으면 다은이가 내게서 희망을 보게 될 테니까.”그의 말이 맞았다. 사랑이란 건 양쪽이 마음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다. 고정재가 윤다은에게 마음이 없다면 그녀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 게 오히려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괜히 기대하게 만들면 결국 둘 다 상처를 입을 테니까.윤다은도 속으론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미련을 버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녀는 쉽게 고정재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사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녀가 나를 구해준 후에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더욱 깊어졌다. 마음이 착잡해지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말했다.“정재 씨의 입장을 이해해요. 제가 이런 걸로 당신을 불편하게 해드려선 안 됐네요.”고정재는 너그럽게 괜찮다고 하며 물었다.“몸은 괜찮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네, 괜찮아요.”“고생했네. 나중에 운성시에 가게 되면...”그가 말을 하다가 멈추더니 낮고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꼬마 아가씨, 드디어 현성이를 용서하고 자신을 놓아주기로 결심했구나. 축하해.”“...”고정재가 이미 내가 고현성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아마도 고현성이 금운시에 갔을 때 그에게 말했을 터였다.그 남자는 참으로 강한 소유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주도권을 선언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다.결국 나는 9년 전의 그 따뜻함을 선택하지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