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만남을 약속한 이상 당연히 자초지종을 알고 있겠지.연시혁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는 수아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연씨 가문의 진짜 핏줄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나는 웃으며 말했다.“시혁아, 너답지 않네. 너라면 뭐든 직설적으로 말했을 텐데. 나도 진실을 알고 싶어. 말해줄 수 있어?”연시혁은 뭐라고 하려다가 갑자기 내 뒤를 쳐다보며 말했다.“다음에 시간 나면 내가 연락할게.”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고현성이 뒤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시혁이 불편해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다음엔 조용한 곳에서 보자.”마음 한편이 허전하게 느껴졌다.연시혁이 떠난 후 뒤를 돌아보니 고현성이 차가운 표정으로 연시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물었다.“너희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야?”“네, 친구예요.”내 대답에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감추고 있는 게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고현성은 더 묻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먼저 물었다.“정재 씨는 다은이가 다친 걸 알고 있어요?”“응, 전화했어.”“그럼 다은이를 보러 오겠다고 했어요?”내가 다시 묻자 고현성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빛 속에 무언가 탐색하는 듯한 기운이 섞여 있었고 오랜 침묵 끝에 대답했다.“시간이 없대.”나는 윤다은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그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불쌍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과거의 나라고 달랐을까?문득 윤다은이 방금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정재가 나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그녀가 거짓말로 막았다고 했다.사실 그 남자도 한때는 나에게 따뜻함을 주려 했던 걸까.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윤다은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녀는 상태가 많이 좋아진 듯했고 고현성을 보자 살짝 놀라며 말했다.“작은오빠가 여기 웬일이야? 새언니는 참 행복하겠네.”고현성 앞에서 그녀는 나를 수아 언니가 아니라 새언니라고 불렀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아마도 내 옆에 고현성이 있는 게 부러워해서겠지.그녀는... 고정재를 원했다.
‘다은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응답해야 하는 거야?’고정재의 말이 머릿속 깊이 울려 퍼졌다.나는 순간 멍해졌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한숨을 쉬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꼬마 아가씨, 세상엔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 네가 다은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나도 다은이 오빠로서 흔들리지 않는 척하기 어려워. 하지만 어떤 일에는 내 나름의 기준이 있어. 다은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다은이의 감정이지만 내가 다은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건 내 선택이야. 내가 무정하게 대하지 않으면 다은이가 내게서 희망을 보게 될 테니까.”그의 말이 맞았다. 사랑이란 건 양쪽이 마음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다. 고정재가 윤다은에게 마음이 없다면 그녀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 게 오히려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괜히 기대하게 만들면 결국 둘 다 상처를 입을 테니까.윤다은도 속으론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미련을 버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녀는 쉽게 고정재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사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녀가 나를 구해준 후에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더욱 깊어졌다. 마음이 착잡해지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말했다.“정재 씨의 입장을 이해해요. 제가 이런 걸로 당신을 불편하게 해드려선 안 됐네요.”고정재는 너그럽게 괜찮다고 하며 물었다.“몸은 괜찮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네, 괜찮아요.”“고생했네. 나중에 운성시에 가게 되면...”그가 말을 하다가 멈추더니 낮고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꼬마 아가씨, 드디어 현성이를 용서하고 자신을 놓아주기로 결심했구나. 축하해.”“...”고정재가 이미 내가 고현성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아마도 고현성이 금운시에 갔을 때 그에게 말했을 터였다.그 남자는 참으로 강한 소유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주도권을 선언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다.결국 나는 9년 전의 그 따뜻함을 선택하지
주황색 고양이가 한 번 야옹 소리를 냈지만 고현성은 귀찮은 듯 무시하고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방 안의 침구는 이틀 전 그대로였다. 그는 어두운 밤하늘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지금 새벽 3시야. 얼른 자자.”나는 얌전히 돌아서서 욕실로 가 세수를 하고 나왔다. 그가 보이지 않아서 창밖을 내다보니 수영장 쪽에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방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점점 거세져서 잠결에 신경이 쓰였다. 나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눈을 떴다. 옆에 잠들어 있는 고현성을 보며 살짝 몸을 돌리다가 그를 깨우고 말았다. 그가 나를 팔로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깼어?”나는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밖에 또 비 오는 거예요?”오늘 밤 비가 유난히 많이 내렸다. 윤다은이 수술실에서 상처를 치료받을 때는 잠시 멈췄는데 지금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고현성은 내 머리를 살며시 만지며 설명해 주었다.“운성은 원래 비가 잦은 도시야. 조금 지나면 나아지겠지만 여름이 되면 본격적인 우기야.”몸이 조금 으슬으슬해지자 나는 두 팔로 고현성의 몸을 꼭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나 좀 추워요.”그는 내 이마에 손을 얹어보며 물었다.“감기 걸린 거 아니야?”“아마도... 머리가 좀 어지러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체온계를 가져와 내 입에 물렸다. 미열이 조금 있었다. 고현성은 구급상자에서 비상약을 찾아서 나에게 먹이고 계란 두 개를 삶아 내 얼굴에 대주며 부기를 빼주었다.뺨을 맞은 자국이 아직도 살짝 붉게 남아 있었다. 그는 계란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문지르며 부드럽게 말했다.“내일 점심쯤이면 다 가라앉을 거야.”“네.”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고현성이 갑자기 내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내일은 얌전히 집에 있어.”잠시 멈추더니 그는 내 이마를 만지며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괜히 돌아다니지 마. 아니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 알아? 아, 너 우리 아버지 무서워
연시혁의 여자 친구가 말하기를, 경찰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쳐 연시혁을 잡아갔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어젯밤 만난 김대성이 떠올랐다.그는 연시혁을 무척이나 증오하는 듯 보였고 어젯밤 나를 붙잡고 연시혁의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위협했었다. 아마도 연시혁과 김대성 사이에 심각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지금 당장 차도 없고 비서에게 와 달라고 하면 여기까지 오가는 데 몇 시간이 걸리니, 마을에 도착하면 오후 5시가 될 것이다. 게다가 고현성은 저녁 7시쯤 집에 올 텐데 모든 일을 처리하고 다시 별장으로 돌아오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만약 또 나간 걸 들키면 분명히 그가 화를 낼 게 뻔했다.그리고 밖에는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몸도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다시 자고 싶었지만 연시혁을 그냥 두고는 차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한숨을 내쉬며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침대에 누워 조금 더 미적거리다가 마지못해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화장도 끝냈지만 비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어제 제대로 먹은 게 없어 배가 고팠기에 나는 주방으로 가서 직접 라면을 끓였다. 두어 젓가락 먹고 나니 옆집의 주황색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를 데리고 나를 보러 왔다.문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연신 ‘야옹’거리는 것이 꼭 중년 남자의 쉰 목소리처럼 거칠게 들렸다.라면을 다 먹고 주방을 정리한 후 별장 문 앞에서 주황색 고양이를 향해 손짓하며 불렀다.“이리 와, 착하지.”이 고양이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내 손짓에 반응하며 다가왔다.나는 그들을 데리고 뒷마당의 연못으로 가서 그물로 잉어 두 마리를 잡아 주었다.두 마리 모두 입에 물고 다른 별장 쪽으로 바삐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얼마나 남았어요?][5분 남았습니다.]나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방으로 들어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색 패딩을 꺼내 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 비서를 기
연시혁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멍청한 여자.”나는 그를 바라보며 고쳐 말했다.“그 사람은 널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야.”연시혁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양옆엔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너 집이 어디야?”내가 묻자 연시혁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넌 뭘 알고 싶은 거야?”연시혁이 묻고 있는 건 어제 질문했던 그 일이었다. 바로 ‘95년생 수아’에 대한 이야기.그가 물어온 김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내 출생 기록에 ‘95년생’이라고 쓰여 있는데, 나는 분명 96년생이잖아. 그 95년생 수아는 누구야?”연시혁은 드물게 나를 조롱하듯 물었다.“연수아, 너 혹시 부모님이 널 호적에 올릴 때 나이를 잘못 기록한 거 아닐까? 꼭 또 다른 수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나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우리 부모님은 그런 실수 안 해. 연시혁, 여기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거야?”“세상에는 또 다른 수아라는 여자가 있어.”나는 순간 굳어버렸다. 연시혁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네 부모님은 예전에 보육원에서 한 여자아이를 입양하셨어. 연씨 가문과는 전혀 혈연관계가 없지만 그 아이의 신장이 네 어머니에게...”나는 경악하며 물었다.“그 아이의 신장이었어?”내 어머니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고 신장이식으로 겨우 목숨을 지탱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신장이 ‘수아’라는 아이의 것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연시혁은 잠시 어두운 기억을 떠올린 듯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맞아, 그 아이는 당시 유일하게 신장이 맞는 기증자였어. 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기 때문에 네 어머니는 수술할 수 없었지.”나는 가슴이 아파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다음은?”연시혁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네 부모님은 그 아이를 입양해서 너와 같은 이름을 지어줬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을 때도 네 이름으로 기록을 남겼고. 사실 네가 본 그 병
나는 우산을 들고 좁은 골목을 지나 차로 돌아왔다. 여전히 조금 전의 무거운 감정에 내 가슴을 짓눌렀다. 부모님이 오혜원을 그렇게 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신장을 빼앗아 갔다니...결국 그녀도 나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어린 소녀였을 뿐인데, 단지 태어난 가정이 다르다는 이유로 운명이 이렇게나 달라지다니.비서는 내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채고는 차를 몰며 조용히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 있으셨나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 괜찮아요.”방금 집 앞에서 보았던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오혜원을 닮은 여자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괜히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게 정확히 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른다.나는 연시혁에게 그 여자가 오혜원인지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혜원은 국내에 없어.”오혜원을 닮은 그녀, 그러나 오혜원이 아닌 그녀, 그리고 연시혁의 연인이라는 그녀... 나는 그제야 연시혁이 오혜원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가 연씨 가문을 떠난 진짜 이유였다. 좋아하는 마음에 그녀를 닮은 여자를 곁에 두었던 거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오혜원을 찾으러 갈 생각이 있어?”연시혁은 답했다.“이번 생엔 절대 그럴 일이 없어.”그가 왜 그렇게 결심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연시혁이 평생 연씨 가문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때 비서가 물었다.“지금 운성시로 돌아가실 건가요?”윤다은이 마을 병원에 있어 나는 비서에게 병원으로 가 달라고 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비서에게 잠시 문 앞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두툼한 롱패딩을 몸에 두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곧은 등을 가진 한 남자의 뒷모습이었다.고정재가 윤다은의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들어갈지 말지를 망설이는 듯 보였다.인사를 하려는 순
병실을 나서며 4층을 둘러보았지만 고정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혹시 이미 떠난 걸까?멀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이유가 단지 윤다은을 한 번 보기 위해서란 말인가?1층으로 내려가 병원을 나서자 문 앞에 서 있는 고정재가 눈에 들어왔다. 비가 많이 잦아들어 가랑비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고정재는 얇은 정장을 입고 그 안에는 연한 아이보리색 셔츠를 매치했다. 손목에는 롤렉스 시계가 빛났다. 그는 키가 굉장히 컸고, 앞머리를 올려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은색 대나무 손잡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맑고 반짝였으며 마치 수많은 별빛이 담긴 듯했다.그 눈 속의 광활한 별빛은 내가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순수한 세계였다. 이제는 감히 가질 수 없는 세계였다. 나는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그의 얼굴을 닮은, 하지만 그와는 다른 남자를.나는 나에게 있었던 집착을, 순수한 사랑을 배신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있었기에 고현성을 만났으니 그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가질 수 있었다.“정재 씨.”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다가가서 그를 불렀다.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같이 걸을래?”내 차가 병원 앞 계단 아래에 있었으니 바로 떠나도 됐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무정해 보일 것 같았다.“그래요.”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는 우산을 내 쪽으로 더 기울이며 내 옆에서 걸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근처에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했다.고정재는 거절하지 않았다.카페에 들어가자 마침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고 가장 앞쪽 무대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궁금해하자 직원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저희 카페에서는 매일 피아노 연주를 하는데요, 잘 치는 분께는 커피가 무료예요. 지금 저분은 많은 상대를 이겨내고 무대를 지키고 계세요.”나는 호기
바람이 사는 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애의 곡이었다. 이 곡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실력은 여기에 있었다.관객들은 내게 표를 주었다. 내 연주가 인정받았다.직원이 마지막으로 도전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을 때 아까 그 정통 검은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분과 한번 겨뤄보고 싶어요.”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그는 이 카페의 주인이었고 마지막 우승자를 기다리며 직접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나는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내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무엇보다 고정재가 이곳에 있으니까.피아노에 있어서는 그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나는 다시 현대 피아노곡을 한 곡 연주했고 그 중년 남자는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했다. 그의 실력은 실로 대단했고 나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었다.그가 이기자 나는 고정재에게 무력하게 웃어 보였다. 고정재는 부드러운 미소로 내 곁에 다가와 말했다.“내가 한번 해볼게.”고정재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상대의 격식 있는 예복과는 조금 달랐다. 그럼에도 그는 고결하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고정재는 감정 없는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는 차가운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그는 내가 방금 연주했던 곡을 선택했다. 같은 곡으로 그 중년 남자를 이겨내려는 듯했다.고정재의 손놀림은 빠르고 연주에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의 연주를 볼 때마다 그에게 사로잡히곤 했다.그 중년 남자는 고정재가 한 소절을 치기도 전에 이미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관객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정재는 완벽하게 승리했고 우리는 무료 커피를 얻었다. 잠시 카페에서 쉬다 나왔을 때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중년 남자가 우리를 따라 나와 있었다. 그는 우리 앞에 다가와 손을 내밀며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이 카페의 주인입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