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만남을 약속한 이상 당연히 자초지종을 알고 있겠지.연시혁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는 수아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연씨 가문의 진짜 핏줄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나는 웃으며 말했다.“시혁아, 너답지 않네. 너라면 뭐든 직설적으로 말했을 텐데. 나도 진실을 알고 싶어. 말해줄 수 있어?”연시혁은 뭐라고 하려다가 갑자기 내 뒤를 쳐다보며 말했다.“다음에 시간 나면 내가 연락할게.”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고현성이 뒤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시혁이 불편해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다음엔 조용한 곳에서 보자.”마음 한편이 허전하게 느껴졌다.연시혁이 떠난 후 뒤를 돌아보니 고현성이 차가운 표정으로 연시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물었다.“너희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야?”“네, 친구예요.”내 대답에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감추고 있는 게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고현성은 더 묻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먼저 물었다.“정재 씨는 다은이가 다친 걸 알고 있어요?”“응, 전화했어.”“그럼 다은이를 보러 오겠다고 했어요?”내가 다시 묻자 고현성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빛 속에 무언가 탐색하는 듯한 기운이 섞여 있었고 오랜 침묵 끝에 대답했다.“시간이 없대.”나는 윤다은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그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불쌍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과거의 나라고 달랐을까?문득 윤다은이 방금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정재가 나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그녀가 거짓말로 막았다고 했다.사실 그 남자도 한때는 나에게 따뜻함을 주려 했던 걸까.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윤다은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녀는 상태가 많이 좋아진 듯했고 고현성을 보자 살짝 놀라며 말했다.“작은오빠가 여기 웬일이야? 새언니는 참 행복하겠네.”고현성 앞에서 그녀는 나를 수아 언니가 아니라 새언니라고 불렀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아마도 내 옆에 고현성이 있는 게 부러워해서겠지.그녀는... 고정재를 원했다.
‘다은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응답해야 하는 거야?’고정재의 말이 머릿속 깊이 울려 퍼졌다.나는 순간 멍해졌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한숨을 쉬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꼬마 아가씨, 세상엔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 네가 다은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나도 다은이 오빠로서 흔들리지 않는 척하기 어려워. 하지만 어떤 일에는 내 나름의 기준이 있어. 다은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다은이의 감정이지만 내가 다은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건 내 선택이야. 내가 무정하게 대하지 않으면 다은이가 내게서 희망을 보게 될 테니까.”그의 말이 맞았다. 사랑이란 건 양쪽이 마음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다. 고정재가 윤다은에게 마음이 없다면 그녀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 게 오히려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괜히 기대하게 만들면 결국 둘 다 상처를 입을 테니까.윤다은도 속으론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미련을 버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녀는 쉽게 고정재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사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녀가 나를 구해준 후에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더욱 깊어졌다. 마음이 착잡해지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말했다.“정재 씨의 입장을 이해해요. 제가 이런 걸로 당신을 불편하게 해드려선 안 됐네요.”고정재는 너그럽게 괜찮다고 하며 물었다.“몸은 괜찮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네, 괜찮아요.”“고생했네. 나중에 운성시에 가게 되면...”그가 말을 하다가 멈추더니 낮고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꼬마 아가씨, 드디어 현성이를 용서하고 자신을 놓아주기로 결심했구나. 축하해.”“...”고정재가 이미 내가 고현성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아마도 고현성이 금운시에 갔을 때 그에게 말했을 터였다.그 남자는 참으로 강한 소유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주도권을 선언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다.결국 나는 9년 전의 그 따뜻함을 선택하지
주황색 고양이가 한 번 야옹 소리를 냈지만 고현성은 귀찮은 듯 무시하고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방 안의 침구는 이틀 전 그대로였다. 그는 어두운 밤하늘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지금 새벽 3시야. 얼른 자자.”나는 얌전히 돌아서서 욕실로 가 세수를 하고 나왔다. 그가 보이지 않아서 창밖을 내다보니 수영장 쪽에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방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점점 거세져서 잠결에 신경이 쓰였다. 나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눈을 떴다. 옆에 잠들어 있는 고현성을 보며 살짝 몸을 돌리다가 그를 깨우고 말았다. 그가 나를 팔로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깼어?”나는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밖에 또 비 오는 거예요?”오늘 밤 비가 유난히 많이 내렸다. 윤다은이 수술실에서 상처를 치료받을 때는 잠시 멈췄는데 지금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고현성은 내 머리를 살며시 만지며 설명해 주었다.“운성은 원래 비가 잦은 도시야. 조금 지나면 나아지겠지만 여름이 되면 본격적인 우기야.”몸이 조금 으슬으슬해지자 나는 두 팔로 고현성의 몸을 꼭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나 좀 추워요.”그는 내 이마에 손을 얹어보며 물었다.“감기 걸린 거 아니야?”“아마도... 머리가 좀 어지러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체온계를 가져와 내 입에 물렸다. 미열이 조금 있었다. 고현성은 구급상자에서 비상약을 찾아서 나에게 먹이고 계란 두 개를 삶아 내 얼굴에 대주며 부기를 빼주었다.뺨을 맞은 자국이 아직도 살짝 붉게 남아 있었다. 그는 계란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문지르며 부드럽게 말했다.“내일 점심쯤이면 다 가라앉을 거야.”“네.”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고현성이 갑자기 내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내일은 얌전히 집에 있어.”잠시 멈추더니 그는 내 이마를 만지며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괜히 돌아다니지 마. 아니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 알아? 아, 너 우리 아버지 무서워
연시혁의 여자 친구가 말하기를, 경찰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쳐 연시혁을 잡아갔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어젯밤 만난 김대성이 떠올랐다.그는 연시혁을 무척이나 증오하는 듯 보였고 어젯밤 나를 붙잡고 연시혁의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위협했었다. 아마도 연시혁과 김대성 사이에 심각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지금 당장 차도 없고 비서에게 와 달라고 하면 여기까지 오가는 데 몇 시간이 걸리니, 마을에 도착하면 오후 5시가 될 것이다. 게다가 고현성은 저녁 7시쯤 집에 올 텐데 모든 일을 처리하고 다시 별장으로 돌아오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만약 또 나간 걸 들키면 분명히 그가 화를 낼 게 뻔했다.그리고 밖에는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몸도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다시 자고 싶었지만 연시혁을 그냥 두고는 차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한숨을 내쉬며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침대에 누워 조금 더 미적거리다가 마지못해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화장도 끝냈지만 비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어제 제대로 먹은 게 없어 배가 고팠기에 나는 주방으로 가서 직접 라면을 끓였다. 두어 젓가락 먹고 나니 옆집의 주황색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를 데리고 나를 보러 왔다.문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연신 ‘야옹’거리는 것이 꼭 중년 남자의 쉰 목소리처럼 거칠게 들렸다.라면을 다 먹고 주방을 정리한 후 별장 문 앞에서 주황색 고양이를 향해 손짓하며 불렀다.“이리 와, 착하지.”이 고양이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내 손짓에 반응하며 다가왔다.나는 그들을 데리고 뒷마당의 연못으로 가서 그물로 잉어 두 마리를 잡아 주었다.두 마리 모두 입에 물고 다른 별장 쪽으로 바삐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얼마나 남았어요?][5분 남았습니다.]나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방으로 들어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색 패딩을 꺼내 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 비서를 기
연시혁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멍청한 여자.”나는 그를 바라보며 고쳐 말했다.“그 사람은 널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야.”연시혁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양옆엔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너 집이 어디야?”내가 묻자 연시혁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넌 뭘 알고 싶은 거야?”연시혁이 묻고 있는 건 어제 질문했던 그 일이었다. 바로 ‘95년생 수아’에 대한 이야기.그가 물어온 김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내 출생 기록에 ‘95년생’이라고 쓰여 있는데, 나는 분명 96년생이잖아. 그 95년생 수아는 누구야?”연시혁은 드물게 나를 조롱하듯 물었다.“연수아, 너 혹시 부모님이 널 호적에 올릴 때 나이를 잘못 기록한 거 아닐까? 꼭 또 다른 수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나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우리 부모님은 그런 실수 안 해. 연시혁, 여기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거야?”“세상에는 또 다른 수아라는 여자가 있어.”나는 순간 굳어버렸다. 연시혁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네 부모님은 예전에 보육원에서 한 여자아이를 입양하셨어. 연씨 가문과는 전혀 혈연관계가 없지만 그 아이의 신장이 네 어머니에게...”나는 경악하며 물었다.“그 아이의 신장이었어?”내 어머니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고 신장이식으로 겨우 목숨을 지탱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신장이 ‘수아’라는 아이의 것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연시혁은 잠시 어두운 기억을 떠올린 듯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맞아, 그 아이는 당시 유일하게 신장이 맞는 기증자였어. 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기 때문에 네 어머니는 수술할 수 없었지.”나는 가슴이 아파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다음은?”연시혁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네 부모님은 그 아이를 입양해서 너와 같은 이름을 지어줬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을 때도 네 이름으로 기록을 남겼고. 사실 네가 본 그 병
나는 우산을 들고 좁은 골목을 지나 차로 돌아왔다. 여전히 조금 전의 무거운 감정에 내 가슴을 짓눌렀다. 부모님이 오혜원을 그렇게 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신장을 빼앗아 갔다니...결국 그녀도 나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어린 소녀였을 뿐인데, 단지 태어난 가정이 다르다는 이유로 운명이 이렇게나 달라지다니.비서는 내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채고는 차를 몰며 조용히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 있으셨나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 괜찮아요.”방금 집 앞에서 보았던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오혜원을 닮은 여자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괜히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게 정확히 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른다.나는 연시혁에게 그 여자가 오혜원인지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혜원은 국내에 없어.”오혜원을 닮은 그녀, 그러나 오혜원이 아닌 그녀, 그리고 연시혁의 연인이라는 그녀... 나는 그제야 연시혁이 오혜원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가 연씨 가문을 떠난 진짜 이유였다. 좋아하는 마음에 그녀를 닮은 여자를 곁에 두었던 거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오혜원을 찾으러 갈 생각이 있어?”연시혁은 답했다.“이번 생엔 절대 그럴 일이 없어.”그가 왜 그렇게 결심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연시혁이 평생 연씨 가문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때 비서가 물었다.“지금 운성시로 돌아가실 건가요?”윤다은이 마을 병원에 있어 나는 비서에게 병원으로 가 달라고 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비서에게 잠시 문 앞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두툼한 롱패딩을 몸에 두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곧은 등을 가진 한 남자의 뒷모습이었다.고정재가 윤다은의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들어갈지 말지를 망설이는 듯 보였다.인사를 하려는 순
병실을 나서며 4층을 둘러보았지만 고정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혹시 이미 떠난 걸까?멀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이유가 단지 윤다은을 한 번 보기 위해서란 말인가?1층으로 내려가 병원을 나서자 문 앞에 서 있는 고정재가 눈에 들어왔다. 비가 많이 잦아들어 가랑비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고정재는 얇은 정장을 입고 그 안에는 연한 아이보리색 셔츠를 매치했다. 손목에는 롤렉스 시계가 빛났다. 그는 키가 굉장히 컸고, 앞머리를 올려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은색 대나무 손잡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맑고 반짝였으며 마치 수많은 별빛이 담긴 듯했다.그 눈 속의 광활한 별빛은 내가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순수한 세계였다. 이제는 감히 가질 수 없는 세계였다. 나는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그의 얼굴을 닮은, 하지만 그와는 다른 남자를.나는 나에게 있었던 집착을, 순수한 사랑을 배신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있었기에 고현성을 만났으니 그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가질 수 있었다.“정재 씨.”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다가가서 그를 불렀다.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같이 걸을래?”내 차가 병원 앞 계단 아래에 있었으니 바로 떠나도 됐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무정해 보일 것 같았다.“그래요.”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는 우산을 내 쪽으로 더 기울이며 내 옆에서 걸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근처에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했다.고정재는 거절하지 않았다.카페에 들어가자 마침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고 가장 앞쪽 무대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궁금해하자 직원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저희 카페에서는 매일 피아노 연주를 하는데요, 잘 치는 분께는 커피가 무료예요. 지금 저분은 많은 상대를 이겨내고 무대를 지키고 계세요.”나는 호기
바람이 사는 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애의 곡이었다. 이 곡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실력은 여기에 있었다.관객들은 내게 표를 주었다. 내 연주가 인정받았다.직원이 마지막으로 도전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을 때 아까 그 정통 검은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분과 한번 겨뤄보고 싶어요.”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그는 이 카페의 주인이었고 마지막 우승자를 기다리며 직접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나는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내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무엇보다 고정재가 이곳에 있으니까.피아노에 있어서는 그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나는 다시 현대 피아노곡을 한 곡 연주했고 그 중년 남자는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했다. 그의 실력은 실로 대단했고 나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었다.그가 이기자 나는 고정재에게 무력하게 웃어 보였다. 고정재는 부드러운 미소로 내 곁에 다가와 말했다.“내가 한번 해볼게.”고정재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상대의 격식 있는 예복과는 조금 달랐다. 그럼에도 그는 고결하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고정재는 감정 없는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는 차가운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그는 내가 방금 연주했던 곡을 선택했다. 같은 곡으로 그 중년 남자를 이겨내려는 듯했다.고정재의 손놀림은 빠르고 연주에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의 연주를 볼 때마다 그에게 사로잡히곤 했다.그 중년 남자는 고정재가 한 소절을 치기도 전에 이미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관객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정재는 완벽하게 승리했고 우리는 무료 커피를 얻었다. 잠시 카페에서 쉬다 나왔을 때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중년 남자가 우리를 따라 나와 있었다. 그는 우리 앞에 다가와 손을 내밀며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이 카페의 주인입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