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마실래.” 수민은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술을 많이 마시면 문제가 생기기 쉬웠는데, 특히 지금 집에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이 정도의 분수는 그래도 잘 알고 있지.’동건은 멈칫했다.“아직 다 마시지 않았는데, 왜 벌써 일어서는 거야?”“진짜 우리 집을 술집으로 취급한 거야? 여기서 계속 마시고 싶어?”“이 좋은 술을 다 마시지 않으면 너무 아깝잖아?”“하나도 안 아까워. 남은 건 내일 나 혼자 마실 수 있으니까.”동건은 말을 하지 않았다.“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가.”수민은 벽에 걸린 벽시계를 가리켰다.“아니,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내가 뭘?”“필요할 때는 사람한테 달라붙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사람을 쫓아내다니. 이 세상에 너 같은 여자가 어딨어?”“아니면? 여기서 자게 하라고?”“남자친구가 여자친구 집에서 밤을 보내는 건 정상 아니야? 우리는 비록 가짜로 사귀는 거지만, 그래도 척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어이가 없네! 누가 그딴 걸 신경 쓴다는 거야?”말이 막 떨어지자 동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톡 영상전화였다.그는 확인하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여기 있네, 신경 쓰는 사람!”수민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때, 동건은 이미 수신버튼을 눌렀다.“네, 어머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맞은편의 송보미가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 네 별장 같지가 않은데?]동건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수민이 집이요.”[정말이니?]송보미는 깜짝 놀랐다.[너 거짓말하지 마...]“제가 그런 사람이에요? 수민이 불러올게요. 수민아, 우리 어머니 전화야...”수민은 즉시 미소를 지으며 동건의 곁에 앉았다.“어머님, 안녕하세요.”[그래! 이 자식이 정말 너와 같이 있을 줄은 몰랐네. 이제 쉴 건가?]“네.”[그럼 꼭 머리 말리고 자. 너무 오래 싸고 있으면 좋지 않으니까.]“네, 어머님. 바로 말리러 갈게요.”[동건이 시켜.]“네.”[이 팔찌를 끼고 있으니 정말 예쁘구나. 정말 잘 샀어
동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자.” 그는 드라이를 껐다.수민은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는데, 건조하지 않고 아주 매끄러웠다.“어때?”수민은 처음으로 동건의 실력을 인정했다.“헤어샵 하나 차려. 난 네 단골손님이 될 테니까.”‘이 여자 정말 어이가 없네...’그녀는 하품을 하며 곧장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뒤로 누워 이불을 꼭 껴안았다.“나 잘 거니까 불 좀 꺼줘. 문도 꼭 닫고. 그럼 안녕!”‘내가 네 종이냐?!’속으로는 투덜댔지만 동건은 그래도 시킨대로 했다.불을 끈 다음 그는 또 가볍게 문을 닫았다.술을 좀 마셨기에, 살짝 취한 상태로 자니 정말 너무 편했다. 그렇게 수민은 곧 잠이 들었다.동건은 나간 후 거실에 놓인 다 마시지 못한 와인을 보았다. 잠시 생각하다 그는 잔을 들어 술 한 잔을 따랐다.그리고 와인 병이 다 비워질 때까지 한 잔 한 잔 마셨다.그는 머리가 어지러웠고, 술에 취해 눈이 흐리멍덩했으며 온몸은 날아갈 정도로 가벼웠다.하지만 여전히 의식이 있었다.‘술기운이 밀려오고 있군.’술이 좋아서 이런 느낌도 아주 신기했다.그는 아예 소파에 누워서 좀 쉬었다 떠나려 했다.그러나 바로 잠이 들 줄이야.밤중에 목이 말라서 일어난 수민은 침대에서 내려왔다.침실 문을 열자, 거실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살펴보더니, 자신이 불 끄는 것을 잊어버린 줄 알고 스위치를 눌렀다.물을 마시고 소파를 지나갈 때, 누군가 갑자기 수민의 손목을 잡았다.수민은 소름이 돋더니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로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공격했다.그러나 따뜻한 손이 수민의 손을 꽉 잡았다.그녀는 지금 통제를 당한 셈이었다.“고동...”‘앗!’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수민은 동건에게 끌려 앞으로 넘어졌다.그렇게 그녀는 결국 술기운으로 가득 찬 품에 안겼고, 단단하고 따뜻한 가슴에 떨어졌다.“이게 뭐하는 짓이야?!” 수민은 약간 화가 났다.그러나 동건의 손가락은 그녀의 머리카락
이른 아침, 햇빛이 구름을 뚫고 대지에 쏟아졌다.거실 소파에서 침실 침대까지, 벗겨진 옷들이 바닥에 쫙 깔렸다.대부분은 남자의 옷이었고, 여자의 옷은 잠옷 하나밖에 없었다.동건은 눈을 천천히 떴다. 깨어난 순간, 그는 어젯밤의 뜨거운 장면을 떠올렸고,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옆에서 깊이 잠든 여인을 바라보니, 동건은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부드러움과 온정을 드러냈다.수민은 아직도 자고 있었는데, 두 눈을 꼭 감으며 호흡은 평온했다.동건의 시선은 여자의 예쁜 이목구비에서 목으로 옮겨졌다. 하얀 피부에는 어젯밤에 그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했다.동건은 경험이 많은 남자인 데다가, 이성의 몸에 집착할 나이가 아니었지만, 어젯밤 그는 처음 고기를 먹은 짐승처럼 피곤한 줄도 모르고 계속 힘을 썼다.수민이 뺨을 한 대 때리고서야 동건은 비로소 멈추었다.정말 아팠지만 그 느낌도 정말 짜릿하고 즐거웠다.이렇게 생각하니 남자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여자의 미간에 키스를 한 다음, 그는 일어나 살금살금 방을 나갔다.물론 동건은 수민이 계속 쉬도록 가볍게 문을 닫는 것을 잊지 않았다.주방에서, 동건은 몸을 돌려 라면 두 그릇을 탁자 위에 놓으려 했다, 이때 수민은 실크 잠옷치마를 입고 문을 기댄 채로 서 있었다.언제 왔는지, 거기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모른다.눈을 마주치자, 동건은 어색해했지만 곧 애틋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일찍도 일어났네? 어젯밤에 내가 힘을 좀 더 썼어야 했나.”그러나 수민은 웃지 않고 시선을 그의 손에 떨어뜨렸다.라면 두 그릇 위에 계란 프라이가 하나씩 있었다.계란 프라이는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약간 탄 것 같았다.동건은 가볍게 기침했다.“한 바퀴 찾았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 라면 좀 끓였어. 그러니까 그냥 먹어...”말하면서 수민을 지나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수민은 몸을 돌렸다. 라면을 보는 눈빛이든 동건을 바라보는 눈빛이든 무척 복잡했다.“이리 와, 얼른 앉아서 먹어. 왜 날
동건은 미소가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야?”옷 들고 나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 여기에 오지 말라니, 그건 또 무슨 뜻인가?“말 그대로야. 내가 전에 말했었지, 협력 대상과 얽매이지 않을 거라고. 어젯밤에 우린 이미 관계를 가졌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니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협력을 그만두는 거야.”동건은 똑바로 앉으며 어둡고 무서운 눈빛으로 수민을 바라보았다.“난 어젯밤에 취하지 않았어.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맞지?”“응.”관계를 맺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정신이 멀쩡했다. 그래서 서로를 남이라 착각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다.“허...”동건은 헛웃음을 지었다.“나랑 자자마자 바로 책임을 떠넘기겠다 이거야? 나 지금 옷도 입지 않았는데?”수민은 입가를 실룩거렸다.“그건 너 자신이 옷을 입지 않은 거잖아? 왜 내 탓을 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무슨 책임을 떠넘겼다는 건데?”“지금 네가 하는 말이 그렇잖아!” 남자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조수민, 너 지금 뭐 같은지 알아?”“뭐?”“순진한 여자를 침대로 꼬신 다음 바로 차버린 남자!”수민은 침묵하다가 불쑥 물었다.“네가 순진한 여자야?”동건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네가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지 마. 어젯밤의 일은 우리가 원해서 일어난 상황이잖아, 너랑 나랑 모두 성인인데, 무슨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거니? 그동안 네가 잤던 여자들은 적게 말해도 50명은 되겠지.”“그럼 넌 너와 잔 모든 여자들에게 소리를 치면서 자신을 책임지라고 떠들어댈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나도 너에게 책임을 질 필요가 없잖아? 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로 남을 강요하는 건데?”동건은 이처럼 방탕했던 자신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이 순간, 예전의 기억들이 밀려오면서 그는 후회에 잠겼다.“쳇, 누가 책임지라고 했어?! 나한테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네가 책임질 필요가 있을까?”수민은 한숨을 돌렸다.“그럼 됐어.”동건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수민의 모습을 보며 묵묵히
남자가 떠난 후, 수민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식탁 위의 그릇과 젓가락을 바라보았다.‘치우고 가라 할 걸 그랬어...’“여보세요, 청소부 하나 보내줘요. 두 시간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맞아요, 집안 구석구석 모두 깨끗이 청소해야 되거든요. 특히 소파...”동건은 문을 박차고 나간 후, 바로 차를 몰고 별장으로 돌아갔다.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으며 신호등까지 무시했다.집에 들어서자, 그는 바로 옷을 벗고 샤워를 하며 어제 남긴 냄새를 씻어내려 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씻고 나오니 동건은 여전히 수민의 독특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젠장.”그는 화가 나서 소파에 걷어찼다.그러나 머릿속에서 어젯밤 두 사람이 먼저 소파에서 뒹굴다 침실로 들어간 화면이 떠올랐다.얽히고설키며 미친 듯이 키스를 하는 화면.동건은 정말 몰랐다. 왜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도발하던 여자가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차가운 모습으로 변했는지를. 심지어 무정하게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문제는 수민이 동건이 끓인 라면을 먹었단 것이다.‘내가 이 20여 년 동안 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가 한 여자를 위해 밥을 해 주었는데. 비록 라면이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서 만들었단 말이야. 그러나 그 여자는 다 먹은 다음 바로 날 차버리다니!’“미친!”동건은 또다시 소파를 걷어찼다. 그러나 그 결과...“아! 아파 죽겠네, 정말 아파 죽겠어! 너까지 나와 맞서는 거야?! 그래, 널 발로 찼다, 어쩔래! 어쩔 거냐고!”소파는 묵묵히 모든 것을 감당했다.“그래, 협력을 중지하겠다 이거지? 그럼 중지해! 나도 네가 싫어!’여기까지 생각한 동건은 핸드폰을 꺼내 수민의 모든 연락방식을 차단했다.그러고는 핸드폰을 소파에 던지며 침대에 가서 누우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초인종이 울렸다.딩동.동건은 잔뜩 긴장을 하더니 숨소리를 죽였다.‘흥! 쫓아와서 사과하면 내가 용서해줄 것 같아? 나도 성질이 있다고! 그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가와서 사과를 한 다음 나에게 술을
“아니... 어머니, 저는 어머니 아들이잖아요! 조수민은 남이고요. 그런데 제가 욕을 좀 했다고 제 다리를 부러뜨리시겠다뇨?!”“수민이는 내가 인정한 며느리이니까 그 누구도 우리 수민이를 괴롭힐 수 없어. 너도 마찬가지야.”동건은 코가 찡해졌다.‘며느리...’그는 등을 돌리고 팔짱을 안으며 가볍게 중얼거렸다.“그 여자는 안목이 높아서 이런 건 눈에도 안 찰 거예요...”‘어머니 아들도 마음에 안 들고요!’“하긴.” 송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이는 안목이 확실히 높지. 하지만 그 아이는 더 좋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어! 넌 누구나 다 너 같은 줄 알아? 하루 종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매일 술집에 다니기나 하고...”동건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화가 나서 와와 소리를 질렀다.“저는 어머니의 아들이라고요! 친아들!”“알아,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내 정곡을 찌를 필요는 없어.”“네?”“이건 너한테 맡길게. 시간 나면 수민이에게 가져다줘. 가능한 한 빨리, 들었어?”동건은 못 들은 척했다.송보미는 직접 그의 귀를 잡으며 말했다.“들었냐고?”“아파요, 아프다고요! 알았어요!”“참, 그리고, 다음 주말에 내가 티파티에 참가할 예정이니까, 수민이 데리고 와. 마침 나도 수민이를 내 그 친구들에게 소개해줘야지!”“그,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동건은 시선을 돌렸다. ‘이미 협력을 중지한 데다가 연락처까지 삭제했으니 어떻게 데려가겠어? 차라리 날 죽여!’송보미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왜 필요가 없어? 넌 그냥 내가 시킨대로 해. 무슨 쓸데없는 말이 그렇게 많아? 됐어, 나 친구랑 쇼핑해야 하니까 먼저 갈게. 넌 이따가 수민이한테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네!”송보미는 그제야 흐뭇하게 웃으며 떠났다.이쪽의 동건은 골치가 아파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수민은 정상적으로 출퇴근하며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예전과 다름없이 가끔 술집에 가거나, 테니스를 쳤다.그러나 그녀도 나름 고민이 있었다.[수민아, 너도 동건이랑 사귄 지 꽤
“왜 그래?” 정은이 입을 열었다.두 사람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마치 억울함을 당한 아이가 마침내 부모님을 만난 것 같았다.민지는 바로 달려왔고, 말을 하기도 전에 눈시울이 빨개졌다.서준은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팽팽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쥐고 있었다.정은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무슨 일이야? 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앉아 있어?”“정은 언니...”민지는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눈물이 이미 눈가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흘러내리지 못하게 했다.“이제 실험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못 들어간다니?” 정은은 깜짝 놀랐다.“어제 학교의 검사팀과 소방대가 갑자기 실험실에 찾아와서 검사하겠다고 했는데...”소방점검을 정상적인 검사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문을 열고 협조했다.그러나 이 사람들은 들어온 후에 이리저리 만져보고 몇 바퀴 돌아보더니 그들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을 알려주었다.“소방 점검이 불합격이니 일주일 내로 실험실에서 나가세요!”말을 마치자, 그들은 두 사람에게 설명과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직접 문에 붉은 딱지를 붙였다.민지는 계속 말했다.“그때 저와 서준이는 모두 어리둥절해졌어요. 지난주에 맞은편 실험실에서도 소방점검을 받았지만, 그 사람들은 들어와서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바로 떠났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검사를 받을 때 불합격이라니? 심지어 실험실에서 나가야 한다잖아요!”방금 정리된 실험실에 새로 산 CPRT, 그들은 실험실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가라니?정은은 여전히 냉정을 유지했다.“그럼 너희들 왜 문 앞에 앉아 있는 거야? 일주일안으로 나가면 되는 거잖아? 그럼 얼른 들어가지 않고 뭐 하고 있어?”서준이 대답했다.“이번에는 시 소방대에서 점검을 진행했는데, 백 부총장님은 학교에서도 검사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실험실 열쇠를 가져가셨어요.”그러나 정은에게 다른 열쇠가 하나 있었다.그녀는 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
민지가 말했다.“당시 우리는 모두 있었어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기도 잠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으로 꺼졌단 말이에요. 이따가 또 써야 하는데, 누가 전원을 끊어버리겠어요?”정은은 이미 대충 그 이유를 추측해냈지만 지금은 증거가 없었다.“가자, 맞은편 실험실로.”민지는 영문을 몰랐다.“거긴 왜요? 그것은 다른 전문적인 실험실인 것 같은데. 저희와는 상관이 없어요...”서준도 수상함을 예민하게 감지하며 얼른 따라갔다.“가라면 그냥 가, 넌 왜 문제가 그렇게 많아?”‘이 자식이, 이젠 간이 부었구나!’세 사람이 맞은편 실험실에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벽 모퉁이에 이미 소방 기자재가 갖추어져 있었다.“아니...” 민지는 놀라서 아연실색했다.“지난달까지만 해도 없었는데!”세 사람은 또 다른 몇 개의 실험실을 확인했다. 모두 예외 없이 부족했던 기자재는 이미 보충되었고, 전에 없었던 것도 지금은 전부 갖추게 되었다.민지는 오싹하기만 했다.“이, 이건 우리를 겨냥한 것 같은데?”전 실험실은 모두 소방설비를 갖추었지만 오직 그들의 실험실만 배제되었다. 그전에 민지는 줄곧 우연이라고 여겼다.우연히 그들이 당첨되었고, 또 우연히 붙잡혔다고. 누군가가 일부러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정은은 냉소를 지으며 직접 두 사람을 데리고 부총장 사무실로 갔다.백두강은 한눈에 그들이 오미선이 올해 새로 모집한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특히 정은은 올해 신입생 중 처음으로 학술지 에 논문을 발표한 천재로서, 그날 정기회의에서 만장이 들끓는 장면은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정은 학생,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얼마 전 현빈과 재석의 연이은 타격을 떠올리며 그는 바로 웃음을 지었다.“부학장님, 저희 실험실이 강제로 시정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백두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지?”“문제라면 정말 많죠. 우선 왜 다른 실험실의 소방 기자재가 완전한데, 유
어떤 곡인지, 어떻게 변주를 했는지 현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현장의 어두운 조명은 가장 좋은 은폐가 되어, 현빈이 거리낌 없이 부드러움과 깊은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었다.그의 시선은 통제되지 않고 정은의 하얀 손에 떨어졌다. 몇 번이나 그 손을 꽉 쥐고 영원히 놓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잠시 후, 현빈은 스스로를 억제하며 이성을 되찾았다.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 이 밤만 지나면... 더 이상 급해할 필요 없어, 정은이를 놀라게 해선 안 돼...’두 시간, 어떤 사람에게는 괴로움과 시련이겠지만, 정은에게는 엄청난 시청각 향연이었다.그렇기에 공연이 끝난 후에도 정은은 입맛을 다셨다.“방금 그 ‘크로아티아 랩소디’ 들었어요? 록 요소를 추가한 거 있죠! 예상치 못한 낭만과 생동감이 넘쳤고, 특히 중간의 변주는 더욱 놀라웠어요! 심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해요?”현빈은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응? 그래, 듣기에는 확실히 괜찮았지.”정은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남자의 이상한 반응을 놓쳤다.홀을 나서자, 가로등이 켜지고, 네온사인이 땅에 비추는 빛과 그림자가 쏟아져 내리며, 그때서야 정은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깨달았다. 날이 이미 어두워진 것이다.정은은 논문을 아직 끝내지 못했고, 내일 실험실에 가져갈 점심도 준비하지 않았기에 먼저 가려고 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현빈이 갑자기 말했다.“나랑 어디 좀 가줄래?”“네?”“안 돼?” 남자의 검은 눈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이며 놀라울 정도로 밝았다.정은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승낙했다.하지만...“9시 전에 집에 가야 돼요.”“좋아.” 현빈은 그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정은은 자신의 차에 올라 현빈의 차를 따라 근교로 향했다.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두 사람은 산 꼭대기에 도달했다.“정은아, 봐봐...”두 사람은 바람을 맞으며 차를 멈추자, 정은은 고개를 숙이고 패딩으로 자신을 꼭 싸맸다. 이때 현빈이 갑자기 입을 열
“켁...” 정은은 놀라서 기침을 했다.밥을 잘 먹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을 언급하다니? 정은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우린 사귀는 사이가 아니지만, 심 대표님에게 있어 이번 식사는 확실히 공짜와 다름없죠. 왜냐하면...”정은은 웃으며 사장을 바라보았다.“제가 사는 거니까요.”사장은 멍하니 있다가 이어서 의미심장하게 현빈을 바라보았다.‘이 녀석도 당하는 날이 있군! 잘됐어!’다 먹고 정은은 주동적으로 계산하러 갔다.사장은 현빈을 잡아당겨 목소리를 낮추었다.“야, 너도 열심히 노력 좀 해. 얼른 그 친구의 마음을 얻어야지. 다음에 올 때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 정말 널 비웃을 거야!”현빈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그러고 싶지.” “이야, 이 세상에 드디어 너를 혼내 줄 여자가 나타났구나, 희한하다.”“야...”“그래! 이 친구가 도와줄게.”정은은 이미 계산대에 가서 결제를 하려 했다.결제한 후, 그녀는 뒤에 있는 현빈을 바라보았다.“갈까요?”“에이, 잠시만요!” 사장이 먼저 입을 열더니 웃으며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직원에게 물건을 건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네?” 직원은 어리둥절해졌다.“티켓.”“아!”사장은 받아서 현빈에게 주었다.“자, 내 여동생이 피아노 연주회 티켓 두 장을 구했는데, 음치인 내가 또 어떻게 그걸 들으러 가겠어? 자리에 앉으면 정말 쇠귀에 경 읽기가 되는 거잖아! 하하... 오늘 마침 만났으니 너한테 줄게!”현빈은 참지 못하고 눈썹을 치켜세웠다.“이건 정말 구하기 어려운 건데, 정말 나한테 줄 거야?”“그럼, 가져가!”“그래, 그럼 나도 고맙게 받을게.”두 사람은 사장의 배웅을 받고 샤브샤브 가게를 떠났다.현빈은 손에 든 티켓을 흔들며 정은에게 물었다.“맥심 피아노 연주회, 가고 싶어?”“맥심이요? 진짜예요?” 정은은 의아함을 참지 못했다.“연주회 티켓은 정말 구하기 어려운데.”“자, 직접 확인해 봐...”정은이 머리를 숙였는데 정말 맥심의 연주회였다.“내 친구가 호의로 우
현빈이 말했다.[일단 생각 좀 해볼게. 만나서 얘기하자.]“좋아요.”통화를 마치고 정은은 3분 안으로 패딩 코트를 걸치고 두꺼운 스노우부츠를 신은 뒤 가방을 들고 외출했다.소한이 지난 후, 그렇게 춥지 않은 것 같지만, 태양은 여전히 구름 뒤에 숨어 얼굴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정은은 아래층에 도착하자마자 현빈이 골목 어귀에 서서 한정판 마이바흐 옆에 기대어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자동차 열쇠를 들고 노는 것을 보았다.그녀를 본 순간 현빈은 갑자기 똑바로 섰다.정은은 웃으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아까까지만 해도 얼굴이 덤덤했던 남자가 순식간에 입꼬리를 들어올렸다.차에 오르자 현빈은 그녀에게 아침을 건네주었다.“두유와 만두, 뜨거울 때 먹어.”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심 대표님은 기사로 됐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아침까지 사온 거예요? 쯧쯧, 꿈도 꾸지 못한 대우를 받았네요.”현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왜? 넌 심지어 더 대담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정은은 말을 받지 않고 두유만 들고 몸을 녹였다. “왜 안 먹어?”“뜨거우니까요.”“에헴! 방금 수리점에서 전화가 왔는데, 네 차 앞부분이 심하게 손상된 것은 아니니, 다시 페인트를 칠한 후에는 이미 흔적을 볼 수 없대.”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20분 후에 두 사람은 수리점에 도착했다.정은은 사인을 하고 차를 운전했고, 현빈에게 밥을 사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생각 다 했어요? 뭐 먹을래요?”“이렇게 추운 날에는 샤브샤브 먹기 딱이지.”정은은 표정이 환해졌다.샤브샤브 가게는 현빈이 골랐는데, 정은은 도착해서야 그것이 아주 유명한 가게라는 발견했다.입구에 길게 줄이 늘어졌고, 모두 젊은이들이었다.정은은 침을 삼켰다.“우리 그냥 다른 집으로 갈까요?”‘언제까지 줄을 서야 하는 거야?’그러나 현빈은 그녀를 데리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뭘 바꿔? 따라와.”“아니...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새치기를 하는 거예요?”그러나 종업원은 현빈을 보자 제지하기는커녕 웃으며
“정은아, 우리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어? 조 교수님, 정은아! 두 사람 여기서 뭐 해? 안 올라가고?”갑자기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것은 두 사람의 아래층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지금 그녀는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단지 입구로 들어오며 활짝 웃었다.“이 추운 날씨에 하마터면 꽁꽁 얼 뻔했네... 할인만 아니었으면 나도 이 늦은 시간에 나올 리가 없었을 텐데!”근처 대형 마트는 밤 9시 이후부터 할인 행사를 했다.살림에 알뜰한 아주머니는 종종 늦은 저녁 장을 보러 나가곤 했다.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재석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재석은 입가까지 올라왔던 말을 조용히 삼켰다.“같이 올라가자.” 아주머니가 따뜻하게 말했다.정은은 곧장 다가가 그녀의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제가 도와드릴게요.”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재석이 자연스럽게 정은의 손에서 장바구니를 넘겨받으며 앞장섰다.“내가 들게.”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행동은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아주머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조 교수님은 말이야, 정말 다정해! 너희 젊은이들은 그걸 뭐라고 했더라... 매너! 맞아, 매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은아?”정은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렇게 좋은 총각이면 진작에 여자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조 교수는 그저 연구와 학술밖에 모르잖아! 하루 종일 실험하고 논문 쓰느라 바쁘다니까!”“노벨상이라도 받으려는 건지 원. 그래, 남자가 일 열심히 하는 건 좋지! 그런데 연애도 좀 하고, 일도 하면 더 좋잖아?”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정은을 보며 말을 이었다.“정은아, 넌 몰라서 그래. 나랑 3층 왕 교수님이 조 교수한테 여자아이를 얼마나 많지 소개해 주려고 했는지 알아? 말로는 좋다고 해놓고, 막상 약속 잡으려고 하면 갑자기 사라지는 거야! 며칠씩 집에도 안 들어오고! 우리가 그걸 모를 줄 아나 봐?”앞에서 조용히 걸어가던 재석은 갑자기 움찔했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착하니,
정은은 그런 자신을 비웃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재석은 순간 숨이 멎을 듯했다. 왜인지 그녀의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덜컥하게 만들었다.마치... 무언가 중요한 걸 놓쳐버린 것만 같았다.두 사람이 공장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경비도 교대 시간이라, 유쾌하고 농담을 잘하던 아저씨는 퇴근했고, 대신 젊은 청년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성격이 조금 내성적인지, 청년은 말없이 열쇠를 받아 제자리에 두고는 조용히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배웅했다.밤이 완전히 찾아오기 전, 하늘가에는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었고, 길가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황혼 속 적막함을 한층 더 짙게 만들었다.정은과 재석은 나란히 걸으며, 둘 사이에는 자연스레 고요함이 내려앉았다.재석은 입을 떼려다 망설였다. 그녀의 감정이 흔들리는 걸 느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결국,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중, 정은은 문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선배님이 정성껏 준비해 준 생일 선물, 정말 의미 있었어요. 덕분에 기뻤어요. 고마워요. 그럼, 나도 보답으로 저녁을 살 테니, 뭐 먹고 싶어요?”재석은 그녀가 눈을 드리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멍해졌다.정은이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결정했어요?”재석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매운 요리 어때? 괜찮겠어?”“좋아요!” 정은은 망설임 없이 답하며 밝게 웃었다.매운 걸 먹고 나오자, 정은은 입김을 불며 목도리를 꼭 맸다.재석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목도리를 벗어 숄처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려 했다.그러나 정은은 한 발짝 물러서며 환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선배님. 안 추워요.”재석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곰곰이 생각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고, 차가운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가로등 불빛마저 옅은 안개에 덮인 듯 흐릿하게 퍼
두 사람의 학술 토론이 마침내 끝나자, 수민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다음에 또 이런 얘기할 거면 나 부르지 마, 정말 지루해...”수민은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음식을 올리라고 했다.그리고 모두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밥을 다 먹은 뒤, 수민은 정은과 쇼핑을 하려 했는데, 레스토랑을 나서자마자 회사의 전화를 받았다.“알았어, 알았다고! 하루조차 기다릴 수 없는 거야 뭐야?!”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민은 전화를 끊고 급히 회사로 달려갔다.떠나기 전에 재석에게 당부했다.“오빠, 오늘 정은 생일이니까 뭐든 다 들어줘야 지!”“알았어.”“어디로 가고 싶어?” 수민을 보낸 후, 재석은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어디든 다 되는 거예요?” 정은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재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그럼 그 다이아몬드를 만든 곳으로 가봐도 돼요?”“정말 가고 싶어?”“네!”“좋아.”정은은 그곳이 실험실이나 조작실 같은 곳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재석이 자신을 공장으로 데리고 갈 줄은 몰랐다.“조 교수! 무슨 일로 또 온 거야?” 재석이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경비 아저씨가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점심 드셨어요?”“그럼! 오늘 식당에서 족발을 삶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맞다. 그 다이아 목걸리 여자친구가 어땠어?”콜록콜록-재석은 좀 어색해하며 자연스럽지 않게 몇 번 기침을 했다.정은은 옆에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경비 아저씨가 그제야 재석 곁에 한 여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마? 이 친구가 바로 네 다이아몬드를 받은 여...”“아저씨! 7호 작업장의 열쇠 좀 주시겠어요?” 재석은 소리를 높여 경비의 말을 끊었다.“그래!” 경비는 바로 열쇠를 찾으러 고개를 돌렸다.재석은 어색하게 정은을 바라보았다.“아저씨가 워낙 농담을 좋아하셔서...”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거 같았어요.”열쇠를 받고 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7호 작
“자, 내가 끼워줄게.”수민은 팔찌를 정은의 가녀린 손목에 끼워주었고, 이는 정은의 손을 더욱 하얗게 돋보이게 했다.“이럴 줄 알았어! 이 디자인과 컬러는 너와 아주 잘 어울려!”정은은 고개를 숙이며 팔찌를 바라보았고,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수민이 입을 열었다.“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응?” 정은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뭐가 더 있어?”수민은 웃으면서 말을 하지 않고 웨이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레스토랑에서 베토벤의 ‘환희의 찬가’가 울려펴졌다.잔잔한 음악소리 속에서 재석은 케이크를 밀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핑크색 크림 위에 예쁜 인형이 하나 서 있었다. 커다란 눈,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정은과 똑 닮았고, 주위는 핑크색 진주로 장식되었다.심플하면서도 예뻤다.“선배님?” 정은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재석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며 담담하게 웃었다.음악이 점차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 레스토랑 안이 너무 따뜻해서, 남자의 미소가 너무 눈부시고,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수많은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정은은 일시에 멍해졌다.재석은 정은의 앞에 멈춰 서며 손에 든 파란 아이리스를 건넸다.“생일 축하해.”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고, 고마워요, 선배님. 꽃과 케이크 정말 너무 예뻐요...”파란 아이리스의 꽃말은 우아함과 생기, 꿈과 희망, 그리고 찬양과 애모였다.수민은 이 상황을 보고 웃으며 일깨워주었다.“정은아, 잘 봐봐, 정말 꽃과 케이크밖에 안 보여?”정은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그 파란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정은은 멈칫했다.은색과 핑크색으로 된 작은 선물함이 꽃다발 속에 숨겨져 있었다.수민의 주시와 재석의 기대를 감지한 정은은 그 선물함을 열었는데, 예쁜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이건...?”수민이 대답했다.“우리 오빠가 준비한 생일 선물이야.”목걸이 외곽은 둥근 호형으로, 마치 행성 궤도와 같았다. 그리고 그 ‘궤도’에는 9개의 다이아몬드가 분포
이미숙은 계속 말했다.[정은아, 생일 축하해. 원래 나와 네 아빠는 며칠 전에 J시에 가서 너와 같이 생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출판사에서 임시로 『7일담』 재판을 하기로 한 거야. 심지어 속표지 세 상자나 부쳤고. 정말 떠날 수가 없어서 네 아빠와 상의 끝에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널 보러 가기로 했어.]이미숙도 어쩔 수 없었다.새 책이 대박 나서, 이미 세 번째로 재판되었고, 지금 서재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속표지가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때로는 책이 너무 잘 팔리는 것도 고민이었다.정은은 눈을 깜빡이며 다정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얼마나 인기 많으신데, 좀 바쁘신 것도 다 정상이잖아요.”자랑스러운 정은의 말투에 이미숙은 웃음을 터뜨렸다.[참, 넌 몰라, 네 엄마 지금 인기가 정말 장난도 아니야! 얼마 전에 한 독자가 어디에서 네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얻었는지, 전화하면서 자신에게 따로 사인을 해달라고 한 거 있지? 심지어 돈 2천만 원을 주겠다잖아.]이미숙이 전화를 받을 때, 소진헌은 마침 옆에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독자의 요구대로 축복의 말을 써주기만 하면 2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니?소진헌은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어?” 정은조차도 좀 놀랐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그때 네 엄마는 멍해서 반응하지 못했는데, 상대방은 네 엄마가 가격에 불만이 있는 줄 알고 직접 4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어. 쯧쯧...]지금 생각해도 소진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그럼 엄마는 허락하셨어요?”[사인해 주겠다고 했지만, 돈은 받지 않았어. 그 사람도 J시 사람인 것 같아!]전화를 끊자, 정은은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그녀는 어렵게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커튼을 열었다.어젯밤에 또 눈이 내렸기에 창밖은 온통 새하얬다.이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정은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펑!리본이며 반짝이는 종이가 정은의 머리와 몸에 떨어졌다.정은은 멍해졌다.수민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 앞에 붉은색
추운 섣달, 낡은 주택 단지는 저녁 9시가 넘으면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근처의 가로등은 또 켜졌다 꺼졌다 했으니, 재석은 정은이 걱정되어 틈만 나면 시간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가 기다렸다.비록 정은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고정되지 않았지만, 겨우 20분에서 30분 정도 차이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옹근 두 시간이나 늦었다.그리고 현빈의 차에서 내렸다.재석은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밤바람이 불자, 이따금 한기를 안겨왔고, 재석은 정은의 코가 얼어서 빨개진 것을 보았다.“가자, 밖은 너무 추우니 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손바닥에 입김을 불었고, 고개를 돌려 현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가로등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고, 걸음걸이까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복도의 음향 제어등은 층층이 켜져 있는데, 은은한 말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현빈은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떠나는 방향을 응시했다. 정은이 재석을 언급할 때 엄청 기뻐해하며 그란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보고, 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때는 나와 강도겸이 절친이었기에 정은을 놓쳤는데, 지금은 또 정은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을 지켜볼 거야?’일이 자연스럽게 성사되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이 순간, 현빈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이러다가 무슨 이변이 생길지도 몰라.’그는 전에 망설였기에 6년이란 기다림을 바쳤고, 정은도 이제 겨우 도겸과 헤어졌다.‘같은 잘못은 절대로 다시 범하면 안 돼. 그건 바보와 다름없으니까.’몸을 돌리는 순간, 남자의 눈빛은 마치 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확고해졌다....이 날은 소한이었다.사람들은 소한과 대한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섣달 그믐날 전의 마지막 두 번째 절기이기도 했다.그러나 정은에게 있어, 이것은 또 다른 특수한 의미가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생일이었다.이른 아침, 가장 먼저 축복을 보낸 사람은 정은의 아버지 소진헌이었다.정은이 아직 자고 있을 때, 그의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