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빈, 이게 무슨 뜻이야?” 강도겸은 다탁 앞으로 걸어왔다.“뭐가?”“왜 개발구역의 프로젝트를 중단한 거지?”현빈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협력하고 싶지 않아서 중단했어.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네가 중단하고 싶으면 다야?! 하루 지체하면 얼마나 큰 손실을 봐야 하는지 아냐고?”“아마도.”“그런데도 중단을 해?!”현빈은 차를 다 마신 다음, 아주 능숙하게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도겸은 찻주전자를 꾹 눌렀다.“넌 3일 동안 피해 다녔고, 지금은 한마디조차 하지 않고 있어. 계속 질질 끌면서 태도를 표명하지 않을 작정이냐?”현빈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내가 피했다고? 언제?”“네 비서가 너 출장 갔다고 했어. 그게 일부러 나 피한 거 아니야?”“허, 널 피한다고? 착각 좀 하지 마. 내가 L시 시찰을 하러 가는 일정은 이주 전에 이미 정해졌어. 내가 굳이 너를 피할 필요가 있을까?”“L시?” 도겸은 예민하게 무언가를 알아차렸다.현빈은 담담하게 웃었다.선우가 갑자기 다가와서 말했다.“현빈이 형, L시에 갔었어요? L시는 정말 좋은 곳이죠. 먹는 것도 모두 내 입맛에 맞고요... 그런데 정은 누나의 고향이 L시에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날 때리고 그래요!”동건은 미친 듯이 눈짓을 했지만, 선우는 좀처럼 눈치채지 못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선우를 때렸다.선우는 그제야 반응을 하더니 즉시 입을 다물었다.도겸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현빈을 보며 또박또박 물었다.“너 L시에 가서 정은이를 만난 거야?”현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시찰하러 갔다고 말했잖아.”“그런데...”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확실히 정은이를 만났지.”“지금 뭐라고 했어?”“정은이를 만났다고.”“너 한 번만 더 말해봐?!”“정은이 만났는데.”도겸는 그의 옷깃을 덥석 잡아당겼다.“심현빈, 내가 지난번에 경고했었지?”현빈은 도겸의 손을 뿌리치며 유유히 옷깃을 정리했다.“경고?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경고를 해? 전 남자친구
“너 설마, 나와 깨끗이 선을 그으면, 정은이는 절친이었던 우리의 사이를 개의치 않고, 네 마음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멍청하긴!” 도겸은 현빈이 든 찻잔을 빼앗아오며 땅에 찧었다.낭랑한 소리와 함께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심현빈, 전에는 왜 몰랐지, 너 사랑꾼이었어? 여자 없인 못 사는 거냐고?”선우와 동건은 얼른 뒤로 물러서며, 깨진 조각에 다치지 않도록 했다.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모두 도겸의 말 때문에 은근히 놀랐다.현빈은 뜻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는 방식으로 도겸과 강제로 선을 긋고 있었다.전에 두 사람은 비록 사이가 틀어졌지만, 사적으로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에 불과했다.그러나 투자할 프로젝트는 여전히 함께 투자하며 같이 돈을 벌었다.이익 앞에서 개인적인 일은 전부 보잘것없었으니까.선우와 동건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여자 때문에 싸우더라도 장사는 계속해야 했다.하물며 현빈은 여우였다.‘그런데 이번엔 왜...’도겸이 현빈을 사랑꾼이라 욕하는 것을 듣고, 선우와 동건도 현빈이 이해되지 않아 침묵을 지켰다.현빈은 바닥에 깨진 찻잔을 바라보았다.“정말 아깝네. 멀쩡한 찻잔이 이렇게 깨졌다니. 넌 성질이 참 더러워. 그나저나, 넌 그때 정은이를 이 찻잔과 똑같이 대하지 않았니?”도겸은 매섭게 눈살을 찌푸렸다.“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쩨쩨하면 뭐가 어때? 유치하면 또 어때? 난 쩨쩨하고 유치해서 너와 깨끗하게 선을 그을 거야. 뭐 굳이 완벽한 이유는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러길 원해서 그래. 왜, 안 돼?”“너...”이 말에 도겸은 화가 나서 숨이 거칠어졌고, 이를 꽉 물었다.현빈은 웃으며 도발했다.“왜? 그 프로젝트들이 아까운 거야? 그 돈이 그렇게 아까워?”“그래, 너만 잘났다. 넌 돈이 싫은 거야?!”“그건 아니지만 돈보다 정은이가 더 중요해.”선우와 동건은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현빈은 계속해서 말했다.“네 말대로, 내가 너와 깨끗하게 선을
“정은이는 사랑이 부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도겸은 몸을 돌렸다.현빈이 또박또박 말했다.“정은이에게 한 사람을 사랑할 용기가 있고, 동시에 그 사람을 포기할 용기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아마도 이것 때문에 처음에 정은이가 전 세계와 맞선다 하더라도 의롭게 널 선택했던 거야.”“아쉽게도 넌 정은이의 마음을 저버렸어. 아마도 너와 다른 사람들은 정은이가 너한테 미쳐서 6년 동안 참아왔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난 알아. 정은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정은이는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전에 내린 결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리고 배신을 당했더라도 정은이는 너와 좋게 끝내고 싶었어.”현빈의 말은 도겸의 정곡을 쿡쿡 찔렀다.도겸은 몸이 비틀거리더니 눈시울을 붉혔다.“너 지금 나한테 자랑하는 거야?”“그렇게 생각해도 돼.” 현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더 이상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가정에서 나온 아이는 감정에 대한 요구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 정은이는 온전하고 포용적이며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을 원하거든.”재삼 고민한 끝에 내린 선택이 아니라.현빈은 도겸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자신도 불합격이었다.그는 생각이 많은 여우라서, 예전 같으면 절대로 한 여자를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왜냐하면 확실히 도겸이 말한 대로, 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은 모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현빈은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그는 정은을 위해 제멋대로 굴고 싶었다.앞으로 두 번, 심지어 세 번, 수천수만 번 이런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결국 도겸은 문을 박차며 가버렸고, 그 소리는 하늘을 뒤흔들었다.선우와 동건은 문 뒤에 서 있었는데, 하마터면 놀라 죽을 뻔했다.“도겸이 형 그 눈빛 봤어요?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아요.”동건이 대답했다.“야, 그 자식 정말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을지
도겸은 바로 확인을 한 다음, 전화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대리를 불렀다.“이것들 모두 종료해.”“네?” 대리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이 프로젝트들은 모두 회사가 현재 가장 중시하는 프로젝트인데, 그중 몇 개는 곧 수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갑자기 종료를 하다니?“내가 한 말에 무슨 이의라도 있는 거야?”“아, 아닙니다.”“아니면 이해가 안 되는 거야?”“그것도 아닙니다.”“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대리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대표님, 저 이해가 좀...”“이해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시킨 대로 해.”...20여개의 프로젝트를 어떻게 정리하고, 어떻게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지 모두 큰 문제였다.도겸이 회의실에서 나올 때, 이미 깊은 밤이 되었다.그는 사무실의 창문 앞에 서서 먼 곳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휘영청 밝고 등불은 희미했다.“처음에 정은이가 전 세계와 맞선다 하더라도 의롭게 널 선택했던 거야.”“아쉽게도 넌 정은이의 마음을 저버렸어.”현빈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도겸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회도 여러 가지로 나뉘었는데,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너에게 네가 얼마나 좋은 여자를 놓쳤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그런데 그 전에 그들은 분명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왜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도겸은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고, 이런 느낌은 별장에 돌아가 텅 빈 거실을 바라볼 때 절정에 달했다.‘난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심현빈은 이미 정은이의 부모님을 만났다고 했어...’이른 아침, 금빛 햇살이 대지에 쏟아졌다.정은은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했는데, 소진헌과 이미숙을 깨우지 않고 혼자 먹고 조용히 아침운동을 하러 나갔다.오전에 수업이 없어서 그녀는 아침 운동을 마치고 시장에 들렀다.그렇게 소진헌과 이미숙이 일어났을 때, 아침식사뿐만 아니라, 정은은 신선한 채소와 고기까지 사왔다.
“이 물건들 그냥 가져가. 우리는 친척도 친구도 아니니, 이 물건들이 비싸든 안 비싸든 우리는 받을 이유가 없어. 그리고 너와 정은이는 이미 헤어졌어. 지금은 낯선 사람과 마찬가지이니, 우리는 네 선물을 받을 이유가 더욱 없지 않겠어?”도겸과 처음이자 유일하게 만났을 때, 이미숙은 소진헌과 레스토랑에서 30분 넘게 기다렸다.도겸은 빈손으로 와서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먼저 말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때 이미숙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이 남자는 우리 정은이와 어울리지 않아.’그러나 정은은 그때 도겸에게 푹 빠졌다. 도겸이 핑계를 대고 떠난 뒤, 그녀는 열심히 그의 편을 들어주며 그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이미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마음이 아팠다.굽실거리는 딸이 안타까웠고, 남자의 존중을 받지 못해서 더욱 안쓰러웠다.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든, 적어도 도겸은 그들을 하나도 존중하지 않았다.한 남자가 자신의 부모님조차 존중하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그 여자를 존중하겠는가?이미숙은 어머니로서 기쁨을 안고 찾아왔지만, 다시 근심과 걱정을 안고 돌아갔다.물론, 그녀도 또한 이러한 도리를 정은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심지어 좀 더 강경하게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으니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미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녀는 정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끝을 보지 않는다면, 정은은 앞으로 후회할 것이고, 줄곧 이 일이 마음에 걸려 평생 행복해하지 않을 것이다.아이가 성인이 된 이상, 부모로서 그들도 이제 손을 놓아줘야 했다. 정은이 스스로 인생을 겪도록.그러나 이미숙은 정은이 이대로 공부를 포기할 줄은 몰랐다.그 대가는 너무 컸다.“다행히 모든 일이 지나갔고, 정은이도 이제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어. 만약 마음속으로 여전히 우리 정은이에게 미안하다면, 더 이상 찾아와서 방해하지 마.”이미숙은 다른 사람과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다투는 것을 더욱 좋아하지
도겸의 심장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났다.소진헌이 재석을 대할 때의 열정과 자신을 대할 때의 냉담함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도겸은 계속 서 있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문을 닫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는데, 재석이 정은의 집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도겸은 거절당한 선물 더미를 가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왕순자는 이미 청소를 마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이곳은 다시 정은이 금방 떠났을 때의 쓸쓸하고 적막한 곳으로 변했다.도겸은 위층으로 올라간 다음 안방으로 들어갔다.화장대는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고, 그 위에는 아직 다 쓰지 않은 스킨케어 제품이 놓여 있었지만, 그들의 주인은 이미 그들을 원하지 않았다.‘정은이 날 버린 것처럼.’도겸은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전에 이 안에는 수표 한 장과 토지 증여 계약서, 그리고 다이아몬드 팔찌가 들어 있었다.몇 개의 다이아몬드는 사수자리의 모양을 이루었다.이것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 팔찌였다. 정은의 22번째 생일이 되던 해에 도겸은 특별히 유명한 디자이너인 존 스미스를 청하여 그녀를 위해 디자인했고, 그녀가 자신의 삶을 비춘 별이라는 뜻이었다.정은에게 서프라이즈를 주기 위해 도겸은 고의로 그녀와 말다툼을 벌였는데, 전화도 받지 않고 톡까지 차단했다.정은의 생일날인 새벽 12시, 도겸은 이 팔찌를 들고 서비대학교 문 앞에 나타나 그녀에게 가장 큰 서프라이즈를 가져다주었다.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비록 정은이 팔찌를 받았고, 두 사람도 오해를 풀고 다시 화해했지만 도겸은 그녀가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고 느꼈다.그 후 그도 정은이 이 팔찌를 몇 번 찬 것을 보았다.그러나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은이 이 팔찌를 낄 때마다 두 사람은 크게 싸우곤 했다.후에 정은은 아예 팔찌를 서랍에 잠그며 다시는 끼지 않았다.“도겸아, 난 너와 다투고 싶지 않아. 정말이야. 매번 다툴 때마다 난 우리의 감정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아. 나와 너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고
“선배님, 다 됐어요?”정은이 입을 열고서야 재석은 정신을 차렸다.“응, 다 됐어.”“고마워요.”재석은 또 정은의 허리를 힐끗 쳐다보았다.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너무 말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게 분명해!’...도겸은 해가 지고 다음 날 날이 밝을 때까지 줄곧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그도 잠을 자고 싶었지만 아예 잠이 오지 않았다.머리는 지칠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했다.두 사람이 달콤하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고, 자신이 찌질하게 굴던 장면도 있었다.날이 밝자, 도겸은 그제야 추억의 늪에서 벗어났다.아침 8시, 직장인들은 저마다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운전을 하며 달북동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평소에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은 거리였지만, 오늘 꼬박 한 시간이나 걸렸다.“안녕하세요, 망고 케이크 하나 주세요.”점원은 멈칫했다.“통째로 된 케이크를 원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한 조각을 원하시는 거예요?”“통째로 된 거요.”“손님, 정말 운이 좋네요. 지금 금방 하나 만들었는데 곧 자르려고 했거든요. 몇 분만 늦으셨다면 아마도 1시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도겸은 가볍게 응답했다.점원은 포장을 하면서 물었다.“이렇게 일찍 케이크를 사러 오셨다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내 여자... 전 여자친구가 좋아해서요.”이 말 한마디에 젊은 점원은 바로 예전에 본 로맨스 소설을 떠올렸다.‘누가 진정한 주인공인지 모르겠네.’도겸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아 케이크를 받은 다음 바로 차에 올라탔다.점원은 카운터 앞에 서서 유리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이야, 스포츠카라니... 더 소설 주인공 같잖아.’...오전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자, 하민지와 임서준은 실험실에 가려고 했다.강의동을 나오자마자 민지는 참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목이 좀 마른데.”서준은 말을 하지 않았다.이미 그의 침묵에 익숙해진
“그래, 진작에 이렇게 나왔어야지...”말하면서 민지는 서준의 팔짱을 끼고 기뻐하며 학교 밖으로 돌진했다.서준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손을 빼려고 했다.민지는 바로 그를 잡아당겼다.“야, 쑥스러워하지 마. 우린 절친이잖아!”민지는 말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팔을 못 빼겠네! 이 여잔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두 사람은 교문을 나서자마자 케이크를 들고 스포츠카에서 내려오는 도겸을 보았다. “어머!”민지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사람은 왜 매번 차를 교문 앞에 세우는 건지 모르겠네. 심각한 교통 체증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서준은 잠시 침묵했다.“아마도 이런 자신이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어디가 멋있다는 거야? 포르쉐에서 내려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으니까?”“그럴 수도?”민지는 서준을 바라보았다.“너도 이런 게 멋있다고 생각해?”서준은 고개를 저었다.“우리 집은 국산 자동차를 선호해서.”민지가 말했다.“나와 우리 아버지, 그리고 삼촌 할아버지는 모두 렉서스가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거든.”“그럼 왜 자꾸 포르쉐를 운전하는 거지?”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도겸을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들고 있는 케이크는 아주 맛있어 보이는데.”서준은 그녀가 침을 삼키는 동작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도겸은 몇 번이나 찾아오면서 정은이 늘 민지와 서준과 함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횟수가 많아지자, 그도 두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도겸은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정은이는? 오늘 왜 너희들과 같이 있는 않는 거야?”민지는 사실대로 말했다.“정은 언니 오늘 학교에 안 나왔어요.”“왜?”“휴가를 냈거든요.”“왜 갑자기 휴가를 낸 거야?”“그건 저희도 잘 몰라요.”도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묻고 싶었다.그러나 민지는 이미 서준의 팔을 잡으며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저희는 아직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도겸은 허탕을 쳤다. 양복 차림을 한 사람이 미니언즈 포장의 케이
말을 마치고, 정은은 학교로 들어갔다.도겸은 제자리에 서서 쓴웃음을 지었다.“나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너에게 있어 난 그렇게도 형편이 없는 건가...”정은은 먼저 수업하러 갔다.수업이 끝난 후, 그녀는 민지, 서준과 함께 실험실에 갔다.5일 후면 그들은 실험실을 학교에게 돌려줘야 했다.그들은 마감 기한 전에 제1단계의 실험 데이터를 완성하고 싶었다.그러나 세 사람이 실험실에 왔을 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청소부 몇 명이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민지가 말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가 이 실험실에 들어오라고 했죠? 이건 저희의 물건인데, 어디로 옮기시려는 거예요?!”그들도 당초에 이 실험실을 장식하느라 엄청난 신경을 썼다.물건도 함께 사고, 청소도 함께 하고. 그들은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여겼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서 두말없이 물건을 옮기다니, 누가 가만히 있으려 하겠는가?아무튼 민지는 제대로 화가 났다.“내려놓으세요! 내려놓으라고요!”청소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영문을 몰랐다.그들도 억울했다.“학교에서 물건을 옮기라는 통지가 내려왔거든요.”정은은 그나마 냉정했다.“누가 통지를 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송지혜 교수님이요. 이 실험실이 소방 점검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후속 시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옮길 수 있는 물건을 모두 옮기라고 하셨어요.”“또 그 빌어먹을 송 교수님이야!” 민지는 이를 갈았다.“아직 5일이나 남았는데, 잠시도 기다릴 수 없이 기어코 우리를 쫓아내고 싶은 거야!”‘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밉살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이런 사람이 교수님으로 될 자격이 있는 건가?’청소부는 머리를 긁적였다.“미안해요, 학생들. 우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요. 그냥 위에서 시킨대로 할 수밖에 없거든요.”정은은 그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곧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오후에 다시 이야기하죠.”“그래
정은은 생각 끝에 동의했다.도겸이 사인할 거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도겸은 웃으며 핸드폰을 왕순자에게 돌려준 후, 유쾌한 발걸음으로 올라갔다.왕순자는 핸드폰을 받으며 감탄했다.“도련님께서 이렇게 웃으신 게 얼마만이야.”...새벽, 정은은 벨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평소 일어날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베갯머리에 놓인 핸드폰은 끝없이 윙윙거렸다.그녀는 눈을 억지로 뜨며 확인했는데, 전부 도겸이 보낸 문자라는 것을 발견했다.연달아 수십 통의 문자를 보낸 것도 모자라 온통 쓸데없는 말뿐이었다.[정은아, 자?][어젯밤에 네 꿈을 꿨어][아직도 자는 거야?][오늘 아침에 수업 있어?][서정이 수업시간표 확인했는데, 너희들 오전에 전공 수업이 하나 있더라.]이와 같은 쓸데없는 문자였다.정은은 차갑게 읽으며 이 모든 것을 확인하기가 귀찮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또 하나의 문자가 들어왔다.[정은아, 나 네가 좋아하는 떡 샀는데, 지금 네 집 아래층에 있어.][조급해하지 마, 계속 널 기다릴게]정은은 눈살을 찌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베란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먹을 것을 들고 아래층에 서 있었다.그녀는 어이가 없었다.남자는 뭔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눈이 마주치자 도겸은 입을 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정은이 탁 하고 창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정은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잠을 잤다.물론 편하게 자지 못했다.하지만 아침 이맘때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자체가 편했다.아침 7시, 그녀는 제시간에 일어나 세수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하게 아침밥을 먹은 다음에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도겸은 정은을 보자마자 눈빛이 밝아지더니 바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정은아, 이 떡과 만둣국은 네가 예전에 자주 갔던 그 가게에서 산 거야. 하지만 지금 좀 식었으니까 전자레인지로 데워야 할 것 같아.”“난 이미 집에서 먹었으니까 이건 너 혼자 먹어.”도겸은 이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래, 그럼
“하하하, 그건 아니지만 나름 경험이 있는 편이에요.”“한번 듣고 싶네요.”이세운은 도겸의 옆에 앉아 유유히 입을 열었다.“옛말에 ‘집에 여자가 있어야 집안이 잘 된다’라는 말이 있어요. 집에 있는 여자는 내조를 잘 해야 돼요. 우리를 도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고,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며 아이를 키우면 얼마나 좋아요.”“접대할 때는 젊은 여자들을 데리고 나가면 돼요. 술도 대신 막아줄 수 있고, 또 손님을 잘 모실 수 있으니까요. 끝나면 작은 돈을 써서 보내면 되고요.”“사모님은 의견이 없으신 거예요?”“집사람이 무슨 의견이 있겠어요? 매일 큰 별장에서 지내며, 명품 가방에 고급 화장품을 쓰잖아요. 그리고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심지어 나가서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 불만을 느낄 리가 있을까요?”도겸이 물었다.“만약 어느 날 사모님이 먼저 이혼을 제기하신다면...”“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여자는 돈 많은 남자에게 의지하면 점차 혼자 생존할 능력을 잃을 거예요.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날겠어요?” 이세운은 자신의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만약 날개가 있다면요? 정말 날아갔다면요?”이세운은 멍해졌다.‘이건...’그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떠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도겸은 일어서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이 대표님, 너무 자신 있게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왜냐하면...”이세운은 영문을 몰랐다.“앞으로 뼈 저리게 후회할 수 있으니까.”말을 마치고 도겸은 골프카트에 올라탔다.“계속 즐기세요, 전 먼저 돌아갈게요.”“네?”...골프장을 떠난 도겸은 원래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귀신에 홀린 듯 서비대학교로 찾아갔다.이번에 그는 대문 앞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길 건너편에 멈춘 다음, 차창을 내리고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통해 도겸은 교문을 바라보았다. 대문은 여전히 6년 전 그대로였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정은을 처음 본 곳이 바로 여기였다.그녀를 본 순간, 도겸의 심
재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현빈은 계속해서 말했다.“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셨다면서요? 오늘은 꽤 일찍 돌아오셨네요.”“들었다고요?” 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누구한테서 들었죠?”그는 오늘 수업이 있었는데, 마침 생명과학대학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그러나 강의실에 민지와 서준밖에 없었다.물어보니 정은이 휴가를 냈다는 것이었다.실험실은 확실히 매우 바빴다. 평소에 재석은 수업이 끝난 후,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바로 돌아갔기에, 이 시간에 집에 가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현빈은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정은에게서 들은 거겠죠.”재석은 쌀쌀하게 말했다.“그럼 정은이는 골목 어귀에서 주차하면 안 된다고 알려준 적이 없는 건가요?”“바로 가야죠.” 현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페달을 밟고 떠났다.잠시 후, 현빈은 갑자기 뭔가를 알아차렸다.방금 재석이 정은을 다정하게 ‘정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점점 멀어지는 차를 보며, 재석은 시선을 돌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다만 이를 악물고 있는 동시에 눈빛도 싸늘해졌다.7층에 도착하자, 그는 가장 먼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옆집의 문을 두드렸다.“정은아?”몇 초 후, 문이 열렸다.“네, 선배님.”재석은 위아래로 정은을 한번 훑어보았다.“괜찮아?”“네?” 정은은 멍해졌다.“오늘 교실에서 널 보지 못했는데, 네가 휴가를 냈다고 해서.”“네. 처리할 일이 좀 있었어요.”“실험실과 관련이 있는 일이야?”“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됐어?”정은은 담담하게 웃었다.“마지막 한 단계만 남았어요.”“내 도움이 필요해?”“아니요.”현빈의 말이 아주 옳았다. 도겸이 스스로 사인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강요할 수 없었다.재석은 눈빛이 반짝였다.“방금 요 앞에서 심현빈을 만났어.”“아, 심 대표님이 날 데려다줬어요.”“같이 간 거야?”“아니요.”정은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공교롭게
“썰렁해서 웃긴 거야.”‘참 긍정적인 사람이야.’현빈은 웃음을 거두며 갑자기 정색했다.“말해봐, 무슨 일이야? 굳이 강도겸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가?”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그렇게 말하는 건데요?”“네가 강도겸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어떻게 같이 앉아서 그 사람과 밥을 먹겠어? 부탁할 일이 있으면 몰라도. 무슨 일인지 나에게 말해줄래?”정은은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서 지금 강도겸이 사인한 동의서를 받아야 수속을 마칠 수 있는 거야?”“네.”“아무나 찾아서 사인해 주면 안 돼?”정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에헴!” 현빈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농담이야.”“난 돈과 비준을 받는 일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나에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얘 사인 안 했어?”“네.”남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무슨 조건을 말했는데?”정은은 대답하지 않았다.“너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했겠지? 두 사람 다시 시작하자고.’‘이 사람이 테이블 밑에 숨어서 엿들은 거야?’“쳇! 뻔뻔스럽긴! 화해는 무슨, 자신의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몰라!”‘같은 부류의 사람이라서 이런 정곡을 찌를 수 있는 건가?’“난 마음속으로 뭘 중얼거리고 있어?”정은은 깜짝 놀랐다.“아, 내가요?”“분명히 있을 텐데!” 현빈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난 다 알고 있으니까 발뺌할 필요 없어.”정은은 말문이 막혔다.“맞네! 어차피 좋은 말은 아닐 거야! 몰래 날 욕한 거 아니겠지?”“에헴, 그건 아니에요...”“방금 그 땅이 어디에 있다고 했지?”“동쪽의 교외에요.”“위치는 좋네. 시내에서 멀지 않고 교통도 편리하고. 헤어질 때 강도겸이 준 거야?”정은은 입가를 실룩거렸다.“왜 질문이 그렇게 많아요?”“이건 정말 까다롭네. 강도겸을 억지로 강요해서 사인하게 할 수도 없고. 그러나 방법이 이거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야.”정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다른 방법이 있어요?”“그럼.”
시선이 마주치자, 도겸의 그윽한 눈빛이 정은의 눈에 들어왔다.“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넌 잘 알고 있을 텐데.”정은은 눈썹을 찡그렸다.“아주 간단해, 내게 돌아와. 동의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난 네가 원하는 것 모두 줄 수 있어.”“그건 불가능해!”정은은 깔끔하게 거절했다.“정은아...”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지금 마음속으로 분명히 내가 비열하고 파렴치하다고 욕하고 있겠지. 그러나 난 정말 네가 없으면 안 돼...”“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는 건 어때? 약속할게, 지금부터 나에게 여자라곤 너 하나뿐이야. 네가 싫어하는 것들 내가 모두 고칠게. 그러니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줘, 응?”말이 끝나자 도겸은 다급하게 정은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정하게 피했다.“난 네가 한 말을 한 글자도 믿지 않아. 네 요구에 더욱 승낙하지 않을 거고.”그녀는 서류와 펜을 거두었다.“오늘은 내가 잘못 찾아왔어. 네가 사인하고 싶지 않은 이상, 나도 더 강요하고 싶지 않아.”말을 마치고 정은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발걸음은 급하면서도 빨랐다.마음속으로 이미 도겸에게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후에 정은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이 지경으로 파렴치하다는 것에 엄청 놀랐다.레스토랑을 나온 정은은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다만 문을 열고 앉기도 전에, 쫓아온 남자는 강경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뒤로 당겼다.기사는 이 상황을 보고, 두 사람에게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바로 떠났다.“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강도겸!”“말을 마치자마자 날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다니. 난 매번 네가 떠나는 뒷모습밖에 볼 수밖에 없었어. 정은아, 넌 왜 날 이토록 괴롭히는 건데!”“그래서? 다 내 잘못이라는 거야? 강도겸 도련님은 영원히 무고하고 영원히 당당한 거야? 집에 돌아가, 강도겸. 네 어머니를 찾아가라고. 그분은 네 성질을 받아주시겠지만, 난 그럴 의무가 없어!”남자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정은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리고 숨을 깊이
“넌 스테이크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썰기가 귀찮아서 줄곧 안 먹었잖아. 그 이후로 양식을 먹을 때마다 내가 썰어줬고.”정은은 잘게 썬 스테이크를 보면서 표정이 담담했다. 그녀는 오늘 음식을 먹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었기에,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이미 그녀의 한계에 이르렀다.이번에 정은은 더 이상 남자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했다.“지금 수속은 거의 다 준비됐는데, 네 동의서가 필요해. 오늘 그 동의서 가지고 왔으니 위에 사인해 줄 순 없어?”도겸의 미소는 점차 사라졌다.정은을 바라보는 눈빛도 기쁨으로부터 냉정함, 그리고 실의에 빠졌다.“나랑 밥 한 끼 먹는 게 그렇게 어려워?”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왜 굳이 이럴 때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거야?”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네가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했잖아? 지금 밥을 먹으면서 또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다니. 넌 자신이 한 말을 이미 잊어버린 거야?”남자는 말문이 막히더니 칼과 포크를 내려놓았다.“얘기하자고?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정은은 저도 모르게 똑바로 앉았다.도겸은 정은이 꺼낸 서류와 펜을 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만약 이 동의서 때문이 아니라면, 넌 오늘 날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그녀는 사실대로 말했다. “응.”“허... 너에게 있어 나도 단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 거야? 사인을 해주면 각자의 인생을 살자 이건가?”정은의 말투는 평온했다.“우린 이미 각자의 길을 걸었고, 이제야 갈라선 게 아니잖아.”“만약 내가 오늘 사인하지 않겠다면?” 도겸은 또박또박 말하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은은 화를 내지 않았고 심지어 아무런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오직 의혹뿐이었고, 도겸이 그저 낯설다고 느낄 뿐이었다.“그 땅은 이미 나에게 증여했고, 계약서에도 이미 사인했어. 그런데 왜 굳이 동의서를 붙잡고 늘어놓는 거야?”“후회했으니까.”헤어지자고 말한 것을 후회했고, 정은을 놓아준 것을 후회했으며
정은은 정신을 차리며 몸을 돌렸다.도겸은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반듯하지만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는데, 얼굴은 조금 움푹 들어갔다.그녀가 남자를 훑어보는 동시에 도겸도 탐욕스럽게 정은을 주시하고 있었다.베이지색의 니트, 검은색 바지, 카키색 트렌치코트.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았고, 염색을 하지도 파마를 하지도 않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늘어졌다.그리고 하얀 색 운동화는 심플하면서도 수수했다.“안녕.” 정은은 도겸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먼저 입을 열어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다정했던 연인이 ‘안녕’이라는 말로 오프닝을 하다니.그 순간, 도겸은 마치 토르의 망치에 맞은 것 같았다.“정은아, 우리 사이에 굳이 인사를 할 필요가 있을까?”정은은 웃으며 말을 받지 않았다.도겸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그녀를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무슨 일 있어서 찾아온 거야?”“응.” 정은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서 얘기할까?”“좋아.”정은은 사무실로 들어갔다.도겸은 그녀의 뒤를 따라갔는데, 들어갈 때 문을 닫으며 바깥의 비서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차단했다.“임 비서님! 이 미녀는 누구예요? 왜 여태껏 본 적이 없죠?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 거예요?”말하는 사람은 새로 온 지 두 달도 안 된 여 비서였다.전에 비행기표를 잘못 예약했던 비서는 진작에 잘렸다.임태명은 눈살을 찌푸렸다.“할 일 다 했어? 배워야 할 것은 다 배운 거야? 질문이 그렇게 많으면 비서로 일하지 말고 기자가 되지 그래?”여 비서는 미소가 굳어졌다.“죄송합니다. 그냥 좀 궁금해서...”태명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너희들도 마찬가지야!”모두들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시선을 돌렸다.태명은 안색이 더욱 보기 흉해졌다.“너희들 중 들어온지 몇 년이나 된 사람도 있고, 갓 온지 얼마 안 되는 신인도 있어. 온 기간이 길든 짧든, 경력이 있든 없든, 여기에서 일할 거면 단단히 기억해...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말고, 보지
“네! 지금 바로...”“아니야, 나 혼자 갈게.”...정은은 비서의 테이블 옆에 서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큰 창문이 있었다.그녀는 창문 앞으로 걸어가서 아래의 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앞은 번화한 상가, 좌우 양쪽은 고급 오피스 빌딩, 그리고 멀리 내다보면 강이 보였다.정말 금싸라기 땅이었다.회사 창립 초기에 그들은 자금도 인맥도 없었고, 사무실은 두 사람이 세들어 사는 지하실 위층의 작은 아파트로 정했다.비록 방은 두 개밖에 없었고, 좀 누추했지만, 그래도 창문과 그리 크지 않은 주방이 있었다.스타트업은 규모가 아주 작아서, 도겸을 제외하고 직원이 5명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모두 기술을 책임졌다.프론트, 회계, 출납, 재무팀, 인사팀, 이런 직위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했다. 그들을 모집할 돈이 전혀 없었으니까.그럼 어떡하겠는가? 정은이 혼자서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매일 위층 아래층을 뛰어다니며, 나가서 일을 볼 때도 버스를 탈 수 있으면 절대 택시를 타지 않았다. 배달비를 절약하기 위해, 바쁘지 않을 때면 그녀는 스스로 채소를 사서 밥을 지었다.그때는 엄청 힘들었지만 그래도 열정이 넘쳤다.사람들은 정은이 공부를 포기한 것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학문이란 높은 산을 오르지 못했지만, 적어도 정은은 믿을 만한 애인과 나날이 발전하는 사업을 가지게 되었다.미래에도 행복한 가정, 귀여운 아이들이 생길 것이다.도겸도 매우 노력했다.그 2년 동안 그는 전심전력으로 일에 몰두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면서 밤늦게 잤다. 어렵게 하루의 휴가를 내면 또 정은을 데리고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그때의 도겸은 정은의 그 어떤 정서상의 변화도, 기쁨이든 슬픔이든 막론하고 가장 먼저 감지하며 제때에 위로를 해줄 수 있었다.언제부터 바뀌었을까?회사를 차린지 3년 되던 해에 회사는 고속발전단계에 들어섰고, 업무는 미친듯이 확장되기 시작했으며 버는 돈도 갈수록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