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438화

작가: 십일
그러니 비밀번호를 바꾸는 건 상식이었다.

“넌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다 이러는 거야?”

“모두는 아니지. 비밀번호를 바꿀 때마다 우리 엄마와 정은이에는 꼭 문자로 새 비밀번호를 알려줬거든. 엄마와 정은이 찾아와도 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을 것이고. 그런데 이걸 왜 물어봐?”

“그럼 왜 내가 알았다고 바로 바꾼 거야?”

수민은 어이가 없었다.

“넌 누군데? 내가 왜 바꾸면 안 되는 거지? 우리 친한 사이냐?”

“그럼 다른 남자가 만약 네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면...”

“당장 바꿔야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동건은 한동안 기뻐해야 할지 탄식해야 할지 몰랐다.

기쁜 것은 이 여자가 너무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른 남자랑 자도 여전히 그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방비할 줄 알았던 것이다.

탄식하는 이유는 자신이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동건도 경계가 필요한 리스트에 올라갔다.

“나한테 볼일 있어?”

수민이 물었다.

동건은 실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밖은 아주 더운데.”

“그래서?”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돼?”

수민은 손을 내려놓더니 옆으로 비키며 길을 양보했다.

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익숙하게 슬리퍼를 갈아신은 다음 곧장 거실로 갔다. 그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곳이 자기 집인 줄 알겠어.’

수민은 눈을 부라렸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나 엄청 바쁘거든.”

동건은 냉소를 지었다.

“뭐가 바빠? 사람을 집으로 불러서 같이 지루한 여름을 보내는 거? 아니면 나른한 오후를 함께 감상하는 거?”

“미친.”

수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할 거면 제대로 말해. 왜 내가 올린 SNS를 언급하는 건데?”

그것도 큰 소리로 외우니 무척 어색했다.

“올릴 때 아주 신이 난 것 같은데, 내가 말해도 안 되냐? 너만 보낼 수 있고, 난 읽으면 안 되는 거냐고?”

“아니... 너 오후에 내가 보낸 SNS를 읽어주려고 우리 집에 왔어? 넌 할 일이 없어서 발광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잠긴 챕터

관련 챕터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39화

    “왜 그래... 왜 갑자기 계약을 끝내는 건데? 무슨 일 있으면 그냥 상의하면 되잖아!”수민은 차갑게 웃었다.“네 말이 그 뜻 아니었어?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바로 협력을 끝낼 것 같았는데? 나는 남에게 강요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갑자기 이런저런 조건을 추가하는 것을 더욱 싫어해. 애초에 약속했는데, 지금 네가 조항을 추가하자면 추가해야 하는 거야? 난 성격이 엄청 까칠하거든. 믿을 수 없는 협력 대상과는 일찌감치 헤어지고,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동건은 바로 똑바로 앉았다.“내가 왜 믿을 수 없는 건데?!”수민은 직접 물었다.“그럼 새로운 계약서를 만들어야 할까?”“아, 아니.”그는 다시 주눅이 들었다.‘자존심이 뭐라고? 이건 중요하지 않아!’“흥! 진작에 그랬어야지.”동건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난 밥도 먹지 않고 이렇게 찾아왔는데.”“뭐라고? 남자가 왜 말을 이렇게 작게 하는 거야? 크게 하면 죽어?”“배고프다고!”수민은 멈칫했다. 동건이 몰래 자신을 욕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우리 도련님도 밥을 먹을 돈이 없는 거야?”동건은 순식간에 화가 났다.“난 네 집 앞에서 꼬박 한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으니 어디로 가서 밥을 먹으란 거야?! 개밥 먹으라고?”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멍청하면서 남 탓을 하긴...”동건은 머리가 아팠다.결국 수민은 동건에게 라면을 끓여 주었다.동건은 먹으면서 투덜댔다.“좀 좋은 걸로 날 접대할 순 없는 거야?”수민은 소파 반대편에 앉아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먹기 싫으면 그냥 꺼져.”‘됐어, 그냥 라면이나 먹자.’동건은 국물까지 깨끗이 마셨다.“꺽!”수민은 시기해하며 동건을 흘겨보았다.“밥도 다 먹었으니 언제 가려고?”동건은 소파에 기대어 편안하게 배를 두드렸다.“뭐 마실 거 없어? 차가운 걸로 줘.”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날 이모님으로 착각한 거야?”“화내지 마, 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40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고마워.”문에 들어서자마자 냉기가 밀려왔는데, 재석의 집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처음 온 것도 아니었기에, 재석은 능숙하게 슬리퍼로 갈아입었다.정은은 주방으로 들어가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지금 이미 오후 4시였다. 재석이 이미 식사를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은은 여전히 친절하게 물었다.“선배님, 점심 먹었어요?”“응, 먹었어.”“그럼... 과일 좀 먹을래요? 방금 깎은 건데.”말하면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올 때, 정은은 손에 과일 쟁반을 들고 있었다.“고마워.”정은도 소파에 앉아 이쑤시개로 멜론 한 조각을 먹으면서 물었다.“언제 다 고칠 수 있는 거예요?”“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교체할 부품이 하나 있는데, 지금 가방에 없다고 하셨어. 그냥 근처의 수리점에게 보내달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다 수리하려면 2~3시간 더 걸릴 거야.”“그래도 빠른 셈이네요.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요. 다 수리되면 다시 돌아가요. 이런 날에 에어컨이 없으면 너무 괴롭죠...”“고마워. 넌 할 일 하러 가. 날 상관할 필요 없으니까.”“좋아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재석을 바라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배님, 샤워하고 싶으면 저쪽에 가서 씻으면 돼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재석의 셔츠는 거의 다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심지어 어깨와 등의 근육까지 은은하게 그려냈다. 차가운 실내로 들어오니 옷은 바로 차갑게 변했다.더웠다 추웠다 하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쉽게 감기에 걸릴 것이다.“에헴!”이 말이 나오자, 재석은 사레가 들렸다. 멜론 반조각이 아직 입에 있어 삼킬 수도 토할 수도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야, 돌아가서 씻을게. 씻고 다시 돌아오면 되지.”“그래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돼요. 만약 머리가 어지럽거나 재채기, 콧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41화

    재석이 걸어 나왔다.화장실 문은 마침 옷걸이 맞은편에 있어서 두 사람은 이렇게 딱 마주쳤다.남자는 갈아입은 옷을 품에 안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축축해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렇게 입고 있던 티셔츠는 어느새 젖었다. 목과 얼굴도 축축해서 물 같기도 하고 땀 같기도 했다.정은을 본 순간, 재석의 머리는 새하얘졌다.여자아이는 검은색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타이트한 옷은 포만하고 아름다운 상반신 곡선을 그려냈다.탱크톱 끈이 좀 짧아서 허리가 살짝 드러났고 작은 배꼽이 똑똑히 보였다.가늘고 긴 팔, 뚜렷한 쇄골, 검은색에 비쳐 하얗게 빛나고 있는 피부.꿈속의 ‘정은’과 똑같았다.정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손에 티셔츠를 들고 있단 것도 깜빡 잊고 멍을 때렸다.“선, 선배님...”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즉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될수록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 결국 네 화장실 좀 썼어.”그러나 오직 재석 자신만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짧디 짧은 말 한마디 하려고 목이 얼마나 탔는지, 호흡이 또 얼마나 거칠었는지를.“두근두근.”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재석은 확실히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려 했다.깨끗한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수리기사들이 안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구식 건물은 고정된 에어컨 실외기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에어컨 실외기는 일반적으로 바깥의 벽에 걸려 있었다.마침 재석네 실외기는 화장실 밖의 벽에 걸려 있었기에, 수리기사는 이미 안전줄을 타고 화장실 창문에 매달려 실외기를 수리하고 있었다.샤워는커녕, 지금 화장실을 제대로 쓸 수조차 없었다.그래서 재석은 정은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원래 정은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침실 앞까지 걸어간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정은이를 방해하는 거 아니야? 지금 자고 있을 수도 있잖아? 어차피 빨리 씻으면 몇 분밖에 안 걸리니 공교롭게 마주칠 일은 없겠지?’그러나 두 사람은 뜻밖에도 이렇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42화

    두 사람은 이미 여러 번 호흡을 맞추었기에 무척 능숙했다.재석은 채소를 씻고 다듬으며 정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정은은 채소를 썰고 볶는 것을 책임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 3개와 국 하나가 식탁에 놓였다.두 사람은 각자 맞은편에 앉았다. 재석은 밥 한 그릇을 담아 먼저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정은은 받으면서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분위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전의 어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밥을 다 먹은 후, 재석은 예전처럼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를 도왔다.정은은 그가 건네준 접시를 받아 수건으로 닦고 옆에 놓았다.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아 일사불란하게 일했다.하지만 쓰레기를 정리할 때, 정은과 재석은 동시에 허리를 굽혀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머리를 부딪혔다.“아...”정은은 이마를 가리고 일어서더니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미안, 정말 미안해, 주의하지 않았어...”재석은 사과하며 즉시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아프지?”말하면서 정은의 손을 살짝 떼어냈다.손톱만한 부위가 빨갛게 되었지만 다행히 붓지 않았다.“미안, 난 쓰레기를 들고 싶었는데, 너와 부딪힐 줄은 몰랐어.”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녀의 눈에 여전히 눈물이 좀 고였다.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오르니 무슨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재석은 더욱 미안해했다.“저... 선배님, 일단 나 좀 놓아주면 안 돼요?”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아직도 여자의 손목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미안!”그는 뜨거운 것에 데인 것처럼 손을 거두어들였고 심지어 뒤로 물러섰다.정은은 처음에 어색했지만, 재석의 과장된 반응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재석도 따라서 입술을 구부렸다.“그렇게 웃겨?”“네!”그는 한숨을 쉬었다.“그럼 됐어.”말하면서 다시 허리를 굽히고 쓰레기봉투를 묶었다....재석의 에어컨은 마침내 수리되었는데 수리기사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교수님, 와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43화

    “응.”“그럼 오늘 밤에 달리기 하러 나갈 거예요?”“응. 같이 뛸래?”“좋아요.”두 사람은 각자의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만난 다음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달렸다.해가 이미 졌기에 하늘은 서서히 어둡기 시작했고, 대지는 점차 어둠에 휩싸였다.두 사람이 한 바퀴 뛰었을 때, 달빛이 점점 밝아지더니 별도 깜빡이기 시작했다.세 바퀴째 다릴 때, 정은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선... 선배님 먼저 뛰어요. 난 좀 쉴게요.”재석도 따라서 멈추었다.“괜찮아?”정은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힘들진 않지만 너무 더워서 그래요.”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었고, 땀방울이 볼에서 굴러 떨어져 티셔츠 속에 스며들었다.“그럼 나도 쉴게. 같이 걸을까?”정은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머쓱해했다.두 사람은 가로수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비대학교의 교문 앞에 도착했다. 재석은 편의점에 가서 생수 2병을 샀고, 한 병을 연 다음 정은에게 건네주었다.“고마워요.”앞문을 지나 또 반 바퀴를 돈 다음, 두 사람은 뒷문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면 개방된 농구장이 하나 있었다.두 사람이 지나갈 때, 농구공 하나가 마침 정은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그녀는 이를 알아차리고 피하려 했다.그러나 재석의 반응이 더욱 빨랐다. 그는 정은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감싼 후, 다른 한 손으로 정확하게 슛을 했다.농구장에서 바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야! 기술이 아주 좋구나!”재석은 오늘 하얀 농구복을 입었는데 언뜻 보면 정말 대학생 같았다.“우리 딱 한 사람 부족한데, 한 판 할래?”재석은 그러고 싶었지만 먼저 정은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가요, 건배님. 난 관중석에 응원석에 앉아서 지켜볼게요.”‘선배님이 농구를 할 줄 알았다니...’자리에 앉자, 정은은 멈칫했다.‘방금 선배님은 왜 날 바라본 거지? 이런 일로 나에게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재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44화

    재석이 대답했다.“아직은 아니야.”“아! 알겠네! 아직 썸을 타고 있는 거구나?”그는 말을 하지 않았고, 몇몇 남자아이들은 재석이 인정했다고 생각했다.“알고 지낸 지 얼마 됐어?”재석은 잠시 생각했다.“1년 좀 넘었어.”“야, 1년이나 넘었는데도 아직 성공을 하지 못한 거야? 이건 말이 안 되지. 훤칠하고 잘생긴 사람이 왜 이렇게 굼뜬 거야!”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야,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게. 이건 99%의 여자도 당해낼 수 없을 거야...”재석은 처음에 개의치 않았지만, 상대방이 본론으로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돌아가는 길에 정은이 물었다.“선배님, 그 슛 정말 너무 멋있었어요... 그리고 그 자세도...”그녀는 걸으면서 슛을 하는 시늉을 했다.재석은 옆에서 가끔 대답을 했는데,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다.약국을 지나다가 남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깐만 기다려.”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나올 때, 재석의 손에는 소독약 한 병이 있었다.재석은 정은의 이마를 가리켰다.“여전히 좀 빨간 것 같아. 내일 멍이 들 수도 있으니까 약 좀 바르면 빨리 나아질 거야.”정은은 재석이 약국에 들어가서 자신을 위해 약을 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리 큰 상처도 아니니 내일이면 다 나을 거예요. 이렇게 번거롭게 약을 사줄 필요가 없는데.”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얼굴에 멍 들면 보기 안 좋을 텐데. 너희 여자애들은 모두 예쁜 것을 좋아하지 않니?”“너희 여자애들?” 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응, 수민이도 그렇거든.”“그럼 고맙게 받을게요.”말하면서 소독약을 받으려 했다.재석은 오히려 건네주지 않고 조용히 의료용 면봉을 꺼냈다.“지금 혼자 약 바를 수 없으니 내가 도와줄게.이것 때문에 재석은 심지어 약국에서 손을 씻고 소독수로 소독을 한 다음 그제야 약을 들고 나왔다.정은은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남자는 이미 면봉에 소독약을 묻힌 다음,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 앞의 잔머리를 가볍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45화

    “그래야만 그 여자는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근심 따윈 완전히 버리고 네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알았어?”재석은 그의 말에 아주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그중 하나는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일부러 넘어져서 키스하는 거랑 그냥 사람을 품에 안고 뜨겁게 키스하는 거... 하나는 너무 가식적이고 위험하고, 다른 하나는 건달과 다를 게 없고.’재석은 이것이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것은 여성을 무시하는 짓이었다.‘그래, 그건 정은이를 무시하는 거야!’그러나 꿈속의 재석은 오히려 정은을 제대로 ‘무시’했다.심지어 귀신에 홀린 것처럼 꿈속의 정은에게 물었다.“자기야, 좋아?”재석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괴로움에 머리를 움켜주었다.한참 지나서야 감정이 가라앉은 재석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옷장 앞으로 가서 깨끗한 속옷을 꺼내 갈아입었다.‘다 나은 거 아니었어? 왜 또 이러는 거지?’...이튿날 아침, 전진욱은 일찍 실험실에 도착했다.어제 그는 실험 결과가 나오기 전에 가버렸는데, 오늘 특별히 일찍 와서 보충하려 했다.‘만약 재석이 이 일을 알았다면 또 끝없이 잔소리를 할 거야.’그래서 진욱은 알람시계 세 개나 맞추었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차를 몰고 실험실로 달려갔다.“야! 넌 언제 온 거야?! 오늘 일요일이잖아?! 이번 주에 이틀 쉬기로 했는데, 넌 뭐 하러 왔어?!”진욱은 무척 흥분했다. 그래서 재석은 단번에 그가 도둑이 제 발 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재석은 실험대 앞에 서서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어제 데이터를 정리하지 않은 거야?”‘이런, 망했네!’“아니... 넌 집에서 쉬지 않고 왜 실험실에 온 거야?! 재석아, 넌 정말 너무 열심히 일을 하는 거 아니니? 남에게 숨 쉴 틈 좀 주라!”재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난 이미 너 대신 데이터 두 조를 계산했는데, 지금 보니 그럴 필요가 없는 건가?”진욱은 멈칫하더니 즉시 웃음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46화

    왜냐하면 지금 정은은 이미 L시로 돌아가는 고속열차에 탔기 때문이다.소씨 가문의 3형제는 할머니 진말숙의 팔순잔치를 근사하게 치르기로 결정했다.그래서 정은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날짜는 아주 일찍 정해졌는데, 연속 3일이었다. 그러나 휴일이 아니라서 정은은 휴가를 낼 수밖에 없었다.오미선은 지금 외국의 세미나에 참가했기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시차 때문에 정은은 전화를 하지 않고 미리 이메일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오미선은 정은이 집에 돌아가는 것을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축복까지 전해 달라고 했다.오후 2시, 고속열차는 역에 도착했다.이미숙은 차를 몰고 정은을 데리러 왔다.“아빠는요?” 정은은 차에 타자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소진헌이 없는 것을 보며 그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이미숙은 면허가 있었지만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 이런 ‘막일’은 모두 소진헌이 했다.‘오늘은 왜...’이미숙은 고개를 흔들었다.“네 아빠는 시간이 없거든.”“오늘은 일요일이니 수업이 없으시잖아요.”‘그럼 뭐가 바쁘신 거지?’여기까지 말하자, 이미숙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정은은 더욱 영문을 몰랐다.“이 일은 말하자면 길어...”팔순잔치인 데다가 진말숙이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비록 잔치는 모레이지만, 고향의 친척들은 모두 이틀 앞당겨 올라왔다.십여 명이 어디서 지낼지가 가장 큰 문제로 되었다.소남진과 진말숙은 지금 첫째 소진우를 따라 별장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 별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위에 2층, 지하 1층에 잠을 잘 수 있는 방이 4개 뿐이었다.게다가 소진우는 가끔 집에서 접대를 해야 했으니, 시골 친척들이 집에 드나드는 것은 너무 말이 안 됐다.진말숙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보거라. 어차피 진우네 집은 안 된다!”가정모임에서 진말숙은 무덤덤하게 말했다.말이 끝나자, 한 쌍의 늙은 눈은 소진호와 소진헌을 바라보았다.첫째는 안 되니, 지금은 당연히 둘째와 셋째가 나서야 했다.소수정

최신 챕터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2화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1화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0화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9화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8화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7화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6화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5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4화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