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비밀번호를 바꾸는 건 상식이었다.“넌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다 이러는 거야?”“모두는 아니지. 비밀번호를 바꿀 때마다 우리 엄마와 정은이에는 꼭 문자로 새 비밀번호를 알려줬거든. 엄마와 정은이 찾아와도 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을 것이고. 그런데 이걸 왜 물어봐?”“그럼 왜 내가 알았다고 바로 바꾼 거야?”수민은 어이가 없었다.“넌 누군데? 내가 왜 바꾸면 안 되는 거지? 우리 친한 사이냐?”“그럼 다른 남자가 만약 네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면...”“당장 바꿔야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동건은 한동안 기뻐해야 할지 탄식해야 할지 몰랐다.기쁜 것은 이 여자가 너무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른 남자랑 자도 여전히 그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방비할 줄 알았던 것이다.탄식하는 이유는 자신이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동건도 경계가 필요한 리스트에 올라갔다.“나한테 볼일 있어?”수민이 물었다.동건은 실내를 힐끗 쳐다보았다.“밖은 아주 더운데.”“그래서?”“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돼?”수민은 손을 내려놓더니 옆으로 비키며 길을 양보했다.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익숙하게 슬리퍼를 갈아신은 다음 곧장 거실로 갔다. 그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곳이 자기 집인 줄 알겠어.’수민은 눈을 부라렸다.“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나 엄청 바쁘거든.”동건은 냉소를 지었다.“뭐가 바빠? 사람을 집으로 불러서 같이 지루한 여름을 보내는 거? 아니면 나른한 오후를 함께 감상하는 거?”“미친.”수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말할 거면 제대로 말해. 왜 내가 올린 SNS를 언급하는 건데?”그것도 큰 소리로 외우니 무척 어색했다.“올릴 때 아주 신이 난 것 같은데, 내가 말해도 안 되냐? 너만 보낼 수 있고, 난 읽으면 안 되는 거냐고?”“아니... 너 오후에 내가 보낸 SNS를 읽어주려고 우리 집에 왔어? 넌 할 일이 없어서 발광을 하고 있는 거야?”“그
“왜 그래... 왜 갑자기 계약을 끝내는 건데? 무슨 일 있으면 그냥 상의하면 되잖아!”수민은 차갑게 웃었다.“네 말이 그 뜻 아니었어?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바로 협력을 끝낼 것 같았는데? 나는 남에게 강요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갑자기 이런저런 조건을 추가하는 것을 더욱 싫어해. 애초에 약속했는데, 지금 네가 조항을 추가하자면 추가해야 하는 거야? 난 성격이 엄청 까칠하거든. 믿을 수 없는 협력 대상과는 일찌감치 헤어지고,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동건은 바로 똑바로 앉았다.“내가 왜 믿을 수 없는 건데?!”수민은 직접 물었다.“그럼 새로운 계약서를 만들어야 할까?”“아, 아니.”그는 다시 주눅이 들었다.‘자존심이 뭐라고? 이건 중요하지 않아!’“흥! 진작에 그랬어야지.”동건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난 밥도 먹지 않고 이렇게 찾아왔는데.”“뭐라고? 남자가 왜 말을 이렇게 작게 하는 거야? 크게 하면 죽어?”“배고프다고!”수민은 멈칫했다. 동건이 몰래 자신을 욕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우리 도련님도 밥을 먹을 돈이 없는 거야?”동건은 순식간에 화가 났다.“난 네 집 앞에서 꼬박 한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으니 어디로 가서 밥을 먹으란 거야?! 개밥 먹으라고?”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멍청하면서 남 탓을 하긴...”동건은 머리가 아팠다.결국 수민은 동건에게 라면을 끓여 주었다.동건은 먹으면서 투덜댔다.“좀 좋은 걸로 날 접대할 순 없는 거야?”수민은 소파 반대편에 앉아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먹기 싫으면 그냥 꺼져.”‘됐어, 그냥 라면이나 먹자.’동건은 국물까지 깨끗이 마셨다.“꺽!”수민은 시기해하며 동건을 흘겨보았다.“밥도 다 먹었으니 언제 가려고?”동건은 소파에 기대어 편안하게 배를 두드렸다.“뭐 마실 거 없어? 차가운 걸로 줘.”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날 이모님으로 착각한 거야?”“화내지 마, 넌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고마워.”문에 들어서자마자 냉기가 밀려왔는데, 재석의 집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처음 온 것도 아니었기에, 재석은 능숙하게 슬리퍼로 갈아입었다.정은은 주방으로 들어가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지금 이미 오후 4시였다. 재석이 이미 식사를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은은 여전히 친절하게 물었다.“선배님, 점심 먹었어요?”“응, 먹었어.”“그럼... 과일 좀 먹을래요? 방금 깎은 건데.”말하면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올 때, 정은은 손에 과일 쟁반을 들고 있었다.“고마워.”정은도 소파에 앉아 이쑤시개로 멜론 한 조각을 먹으면서 물었다.“언제 다 고칠 수 있는 거예요?”“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교체할 부품이 하나 있는데, 지금 가방에 없다고 하셨어. 그냥 근처의 수리점에게 보내달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다 수리하려면 2~3시간 더 걸릴 거야.”“그래도 빠른 셈이네요.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요. 다 수리되면 다시 돌아가요. 이런 날에 에어컨이 없으면 너무 괴롭죠...”“고마워. 넌 할 일 하러 가. 날 상관할 필요 없으니까.”“좋아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재석을 바라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배님, 샤워하고 싶으면 저쪽에 가서 씻으면 돼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재석의 셔츠는 거의 다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심지어 어깨와 등의 근육까지 은은하게 그려냈다. 차가운 실내로 들어오니 옷은 바로 차갑게 변했다.더웠다 추웠다 하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쉽게 감기에 걸릴 것이다.“에헴!”이 말이 나오자, 재석은 사레가 들렸다. 멜론 반조각이 아직 입에 있어 삼킬 수도 토할 수도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야, 돌아가서 씻을게. 씻고 다시 돌아오면 되지.”“그래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돼요. 만약 머리가 어지럽거나 재채기, 콧물
재석이 걸어 나왔다.화장실 문은 마침 옷걸이 맞은편에 있어서 두 사람은 이렇게 딱 마주쳤다.남자는 갈아입은 옷을 품에 안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축축해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렇게 입고 있던 티셔츠는 어느새 젖었다. 목과 얼굴도 축축해서 물 같기도 하고 땀 같기도 했다.정은을 본 순간, 재석의 머리는 새하얘졌다.여자아이는 검은색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타이트한 옷은 포만하고 아름다운 상반신 곡선을 그려냈다.탱크톱 끈이 좀 짧아서 허리가 살짝 드러났고 작은 배꼽이 똑똑히 보였다.가늘고 긴 팔, 뚜렷한 쇄골, 검은색에 비쳐 하얗게 빛나고 있는 피부.꿈속의 ‘정은’과 똑같았다.정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손에 티셔츠를 들고 있단 것도 깜빡 잊고 멍을 때렸다.“선, 선배님...”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즉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될수록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 결국 네 화장실 좀 썼어.”그러나 오직 재석 자신만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짧디 짧은 말 한마디 하려고 목이 얼마나 탔는지, 호흡이 또 얼마나 거칠었는지를.“두근두근.”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재석은 확실히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려 했다.깨끗한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수리기사들이 안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구식 건물은 고정된 에어컨 실외기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에어컨 실외기는 일반적으로 바깥의 벽에 걸려 있었다.마침 재석네 실외기는 화장실 밖의 벽에 걸려 있었기에, 수리기사는 이미 안전줄을 타고 화장실 창문에 매달려 실외기를 수리하고 있었다.샤워는커녕, 지금 화장실을 제대로 쓸 수조차 없었다.그래서 재석은 정은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원래 정은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침실 앞까지 걸어간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정은이를 방해하는 거 아니야? 지금 자고 있을 수도 있잖아? 어차피 빨리 씻으면 몇 분밖에 안 걸리니 공교롭게 마주칠 일은 없겠지?’그러나 두 사람은 뜻밖에도 이렇게
두 사람은 이미 여러 번 호흡을 맞추었기에 무척 능숙했다.재석은 채소를 씻고 다듬으며 정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정은은 채소를 썰고 볶는 것을 책임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 3개와 국 하나가 식탁에 놓였다.두 사람은 각자 맞은편에 앉았다. 재석은 밥 한 그릇을 담아 먼저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정은은 받으면서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분위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전의 어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밥을 다 먹은 후, 재석은 예전처럼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를 도왔다.정은은 그가 건네준 접시를 받아 수건으로 닦고 옆에 놓았다.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아 일사불란하게 일했다.하지만 쓰레기를 정리할 때, 정은과 재석은 동시에 허리를 굽혀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머리를 부딪혔다.“아...”정은은 이마를 가리고 일어서더니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미안, 정말 미안해, 주의하지 않았어...”재석은 사과하며 즉시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아프지?”말하면서 정은의 손을 살짝 떼어냈다.손톱만한 부위가 빨갛게 되었지만 다행히 붓지 않았다.“미안, 난 쓰레기를 들고 싶었는데, 너와 부딪힐 줄은 몰랐어.”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녀의 눈에 여전히 눈물이 좀 고였다.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오르니 무슨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재석은 더욱 미안해했다.“저... 선배님, 일단 나 좀 놓아주면 안 돼요?”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아직도 여자의 손목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미안!”그는 뜨거운 것에 데인 것처럼 손을 거두어들였고 심지어 뒤로 물러섰다.정은은 처음에 어색했지만, 재석의 과장된 반응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재석도 따라서 입술을 구부렸다.“그렇게 웃겨?”“네!”그는 한숨을 쉬었다.“그럼 됐어.”말하면서 다시 허리를 굽히고 쓰레기봉투를 묶었다....재석의 에어컨은 마침내 수리되었는데 수리기사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교수님, 와서
“응.”“그럼 오늘 밤에 달리기 하러 나갈 거예요?”“응. 같이 뛸래?”“좋아요.”두 사람은 각자의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만난 다음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달렸다.해가 이미 졌기에 하늘은 서서히 어둡기 시작했고, 대지는 점차 어둠에 휩싸였다.두 사람이 한 바퀴 뛰었을 때, 달빛이 점점 밝아지더니 별도 깜빡이기 시작했다.세 바퀴째 다릴 때, 정은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선... 선배님 먼저 뛰어요. 난 좀 쉴게요.”재석도 따라서 멈추었다.“괜찮아?”정은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힘들진 않지만 너무 더워서 그래요.”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었고, 땀방울이 볼에서 굴러 떨어져 티셔츠 속에 스며들었다.“그럼 나도 쉴게. 같이 걸을까?”정은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머쓱해했다.두 사람은 가로수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비대학교의 교문 앞에 도착했다. 재석은 편의점에 가서 생수 2병을 샀고, 한 병을 연 다음 정은에게 건네주었다.“고마워요.”앞문을 지나 또 반 바퀴를 돈 다음, 두 사람은 뒷문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면 개방된 농구장이 하나 있었다.두 사람이 지나갈 때, 농구공 하나가 마침 정은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그녀는 이를 알아차리고 피하려 했다.그러나 재석의 반응이 더욱 빨랐다. 그는 정은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감싼 후, 다른 한 손으로 정확하게 슛을 했다.농구장에서 바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야! 기술이 아주 좋구나!”재석은 오늘 하얀 농구복을 입었는데 언뜻 보면 정말 대학생 같았다.“우리 딱 한 사람 부족한데, 한 판 할래?”재석은 그러고 싶었지만 먼저 정은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가요, 건배님. 난 관중석에 응원석에 앉아서 지켜볼게요.”‘선배님이 농구를 할 줄 알았다니...’자리에 앉자, 정은은 멈칫했다.‘방금 선배님은 왜 날 바라본 거지? 이런 일로 나에게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재
재석이 대답했다.“아직은 아니야.”“아! 알겠네! 아직 썸을 타고 있는 거구나?”그는 말을 하지 않았고, 몇몇 남자아이들은 재석이 인정했다고 생각했다.“알고 지낸 지 얼마 됐어?”재석은 잠시 생각했다.“1년 좀 넘었어.”“야, 1년이나 넘었는데도 아직 성공을 하지 못한 거야? 이건 말이 안 되지. 훤칠하고 잘생긴 사람이 왜 이렇게 굼뜬 거야!”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야,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게. 이건 99%의 여자도 당해낼 수 없을 거야...”재석은 처음에 개의치 않았지만, 상대방이 본론으로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돌아가는 길에 정은이 물었다.“선배님, 그 슛 정말 너무 멋있었어요... 그리고 그 자세도...”그녀는 걸으면서 슛을 하는 시늉을 했다.재석은 옆에서 가끔 대답을 했는데,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다.약국을 지나다가 남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깐만 기다려.”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나올 때, 재석의 손에는 소독약 한 병이 있었다.재석은 정은의 이마를 가리켰다.“여전히 좀 빨간 것 같아. 내일 멍이 들 수도 있으니까 약 좀 바르면 빨리 나아질 거야.”정은은 재석이 약국에 들어가서 자신을 위해 약을 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리 큰 상처도 아니니 내일이면 다 나을 거예요. 이렇게 번거롭게 약을 사줄 필요가 없는데.”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얼굴에 멍 들면 보기 안 좋을 텐데. 너희 여자애들은 모두 예쁜 것을 좋아하지 않니?”“너희 여자애들?” 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응, 수민이도 그렇거든.”“그럼 고맙게 받을게요.”말하면서 소독약을 받으려 했다.재석은 오히려 건네주지 않고 조용히 의료용 면봉을 꺼냈다.“지금 혼자 약 바를 수 없으니 내가 도와줄게.이것 때문에 재석은 심지어 약국에서 손을 씻고 소독수로 소독을 한 다음 그제야 약을 들고 나왔다.정은은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남자는 이미 면봉에 소독약을 묻힌 다음,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 앞의 잔머리를 가볍
“그래야만 그 여자는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근심 따윈 완전히 버리고 네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알았어?”재석은 그의 말에 아주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그중 하나는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일부러 넘어져서 키스하는 거랑 그냥 사람을 품에 안고 뜨겁게 키스하는 거... 하나는 너무 가식적이고 위험하고, 다른 하나는 건달과 다를 게 없고.’재석은 이것이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것은 여성을 무시하는 짓이었다.‘그래, 그건 정은이를 무시하는 거야!’그러나 꿈속의 재석은 오히려 정은을 제대로 ‘무시’했다.심지어 귀신에 홀린 것처럼 꿈속의 정은에게 물었다.“자기야, 좋아?”재석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괴로움에 머리를 움켜주었다.한참 지나서야 감정이 가라앉은 재석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옷장 앞으로 가서 깨끗한 속옷을 꺼내 갈아입었다.‘다 나은 거 아니었어? 왜 또 이러는 거지?’...이튿날 아침, 전진욱은 일찍 실험실에 도착했다.어제 그는 실험 결과가 나오기 전에 가버렸는데, 오늘 특별히 일찍 와서 보충하려 했다.‘만약 재석이 이 일을 알았다면 또 끝없이 잔소리를 할 거야.’그래서 진욱은 알람시계 세 개나 맞추었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차를 몰고 실험실로 달려갔다.“야! 넌 언제 온 거야?! 오늘 일요일이잖아?! 이번 주에 이틀 쉬기로 했는데, 넌 뭐 하러 왔어?!”진욱은 무척 흥분했다. 그래서 재석은 단번에 그가 도둑이 제 발 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재석은 실험대 앞에 서서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어제 데이터를 정리하지 않은 거야?”‘이런, 망했네!’“아니... 넌 집에서 쉬지 않고 왜 실험실에 온 거야?! 재석아, 넌 정말 너무 열심히 일을 하는 거 아니니? 남에게 숨 쉴 틈 좀 주라!”재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난 이미 너 대신 데이터 두 조를 계산했는데, 지금 보니 그럴 필요가 없는 건가?”진욱은 멈칫하더니 즉시 웃음을
오직 셋째 소진헌만이 그들에 비하면 많이 못살았다.‘명문대를 졸업한 다음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나? 좋긴 좋지만 돈을 못 벌잖아!’소순자는 집에 있을 때 줄곧 비아냥거렸다.‘진말숙의 자식들도 다 돈이 있는 건 아니구나!’그러나 지금은 소진헌까지 부자로 됐다니.‘진말숙은 팔자도 참 좋구나...’소순자는 생각할수록 속상해서 손자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온 김에 제대로 먹어야지!’소순자와 여덟 식구 말고도 '숙모'라고 불리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도 온 집안식구를 데리고 왔다.숙모 나정혜는 집에 들어온 후, 소순자와 약속이나 한 듯 감탄을 금치 못했다.“진헌아, 너 로또라도 당첨된 거야?”“지금 선생님은 돈을 이렇게 많이 벌 수 있는 건가?”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이 안에 뭐 있지? 돈 건질 수 있는 방법 말이야.”소진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흔들었다.“절대 없어요! 저는 국공립학교의 선생님이라 매달 고정된 월급만 받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돈을 건질 수 있겠어요?”“너도 참, 이 숙모를 남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런 적이 없다면 어떻게 이렇게 크고 예쁜 별장을 살 수 있겠어? 장난해?”소진헌은 머리를 긁적였다.“저는 확실히 아무런 돈도 벌지 못했어요. 그러나 제 아내와 딸은 돈을 많이 벌거든요. 이 별장도 다 집사람과 정은이 산 거지, 저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저는 아무런 능력도 없어서 그저 운이 좀 좋았을 뿐이에요. 이렇게 좋은 아내를 얻고 또 효자 딸을 낳았으니까요.”나정혜는 어이가 없었다.‘지금 돈을 어떻게 벌었냐고 묻고 있는데, 왜 엉뚱한 대답만 하는 거야? 네가 행복하든 말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사람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 선생님은 무슨!’나정혜는 난간을 만지다가 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시선은 방금 소순자가 탐냈던 그 꽃병에 떨어졌다.“진헌아, 이거 정말 예쁘네. 엄청 비싸지?”소진헌은 나정혜의 성격을 그런대로 잘 알고 있었다. ‘이 꽃병이 마음에 들었는데,
주덕순은 웃으며 계속 말했다.“서방님과 동서가 지금 큰 별장에 살고 있지 않나요? 시골 친척들을 모두 서방님의 집으로 데려가면 되잖아요! 방도 많고 인테리어도 호화롭고, 난방이며 에어컨도 다 갖추어져 있으니 바닥에서 자도 괜찮은 것 같은데!”“십여 명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많은 사람들이 와도 될 것 같은데! 레이크 다이아 별장의 후문이 그 호텔과 아주 가깝잖아요. 걸어서 몇 분이면 도착하니 데려다줄 필요도 없고요!”주덕순은 말을 하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나 자신의 집도 그 근처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소진헌은 이때 마침내 입을 열 수 있었다.전에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는데, 끼어들지 못하거나 입을 열자마자 바로 말 할 기회를 빼앗겼다.“저도 원래 그렇게 생각했어요. 큰형과 둘째 형이 불편하신 이상, 저와 집사람이 상의해서 친척들을 모두 저희 집으로 모시고 갈게요.”‘어차피 3일만 같이 지내면 되니까.’진말숙이 이렇게까지 말한 데다가, 주덕순은 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으니 이미숙은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시골 사람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최근에 새 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미 나석천에게 줄거리를 보냈는데 아직 좀 수정해야 했다. 이미숙은 조용한 창작 환경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님, 안심하세요. 저희가 친척분들을 잘 대접할 거예요.”...이미숙은 운전을 하면서 말했다.“지금 친척들이 모두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어. 네 아빠는 손님을 접대하느라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거든. 그래서 내가 널 데리러 올 수밖에 없었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평소에 엄마가 운전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지만, 실력이 꽤 좋네요.”이때 정은은 아직 ‘위험’을 의식하지 못했다.이미숙은 턱을 들더니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럼! 나 천재잖아!”...레이크 다이아 별장에서.“진헌아, 이거 네 집이야?! 어머, 정말
“그러나 제가 부끄러워도 상관이 없지만, 그 친척들이 물어볼까 봐 두려워서 그래요.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사는데 왜 세탁기도 없냐고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그럼 저는 또 뭐라고 대답하겠어요.”“돈이 없다, 제 부모님은 집 살 돈을 줬으니 이미 남은 돈이 없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저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나중에 이 친척들이 시골에 돌아가서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뜨리면 어떡해요?”“저와 시율이는 상관이 없죠. 어차피 저희도 시골에 돌아갈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의 체면은요? 물론 어머님께서 이런 일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저야 당연히 대환영이죠. 저는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니까요!”주덕순은 웃으며 말을 마쳤고, 진말숙이 말하기를 기다렸다.사실 마음속으로 그녀는 이미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웃기고 있네. 새로 이사간 새 집에 나 자신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그 촌놈들을 들여보내라고? 누가 좋다고 하겠어!’진말숙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너도 이제 겨우 이사를 간 데다가 가구도 다 사지 않았으니 그럼 됐어. 내 생일에 친척들이 세탁기도 없는 집에서 살게 할 수는 없잖아?”“그럼요.” 주덕순은 한숨을 쉬었지만 입가의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만약 부모님께서 돈을 좀만 더 주셨다면 저희도 이렇게 빠듯하게 살지 않았을 텐데... 어머, 어머님,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지금 제 부모님을 말하는 거지, 어머님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진말숙은 원래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주덕순이 이렇게 말하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진말숙은 시종 주덕순에게 새 집에 보탤 돈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주덕순은 은근히 입을 삐죽거렸다.‘정말 인색하시다니깐!’그러나 주덕순은 확실히 말을 잘 했다.적어도 진말숙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소진우는 중간에 앉아 줄곧 입을 열지 않았다.그는 매우 바빴는데, 만약 스케줄이 임시로 변동되지 않았다면 지금 이미 회사에 있었을 것이다.그의 아내 박나영이
왜냐하면 지금 정은은 이미 L시로 돌아가는 고속열차에 탔기 때문이다.소씨 가문의 3형제는 할머니 진말숙의 팔순잔치를 근사하게 치르기로 결정했다.그래서 정은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날짜는 아주 일찍 정해졌는데, 연속 3일이었다. 그러나 휴일이 아니라서 정은은 휴가를 낼 수밖에 없었다.오미선은 지금 외국의 세미나에 참가했기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시차 때문에 정은은 전화를 하지 않고 미리 이메일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오미선은 정은이 집에 돌아가는 것을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축복까지 전해 달라고 했다.오후 2시, 고속열차는 역에 도착했다.이미숙은 차를 몰고 정은을 데리러 왔다.“아빠는요?” 정은은 차에 타자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소진헌이 없는 것을 보며 그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이미숙은 면허가 있었지만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 이런 ‘막일’은 모두 소진헌이 했다.‘오늘은 왜...’이미숙은 고개를 흔들었다.“네 아빠는 시간이 없거든.”“오늘은 일요일이니 수업이 없으시잖아요.”‘그럼 뭐가 바쁘신 거지?’여기까지 말하자, 이미숙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정은은 더욱 영문을 몰랐다.“이 일은 말하자면 길어...”팔순잔치인 데다가 진말숙이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비록 잔치는 모레이지만, 고향의 친척들은 모두 이틀 앞당겨 올라왔다.십여 명이 어디서 지낼지가 가장 큰 문제로 되었다.소남진과 진말숙은 지금 첫째 소진우를 따라 별장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 별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위에 2층, 지하 1층에 잠을 잘 수 있는 방이 4개 뿐이었다.게다가 소진우는 가끔 집에서 접대를 해야 했으니, 시골 친척들이 집에 드나드는 것은 너무 말이 안 됐다.진말숙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보거라. 어차피 진우네 집은 안 된다!”가정모임에서 진말숙은 무덤덤하게 말했다.말이 끝나자, 한 쌍의 늙은 눈은 소진호와 소진헌을 바라보았다.첫째는 안 되니, 지금은 당연히 둘째와 셋째가 나서야 했다.소수정
“그래야만 그 여자는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근심 따윈 완전히 버리고 네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알았어?”재석은 그의 말에 아주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그중 하나는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일부러 넘어져서 키스하는 거랑 그냥 사람을 품에 안고 뜨겁게 키스하는 거... 하나는 너무 가식적이고 위험하고, 다른 하나는 건달과 다를 게 없고.’재석은 이것이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것은 여성을 무시하는 짓이었다.‘그래, 그건 정은이를 무시하는 거야!’그러나 꿈속의 재석은 오히려 정은을 제대로 ‘무시’했다.심지어 귀신에 홀린 것처럼 꿈속의 정은에게 물었다.“자기야, 좋아?”재석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괴로움에 머리를 움켜주었다.한참 지나서야 감정이 가라앉은 재석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옷장 앞으로 가서 깨끗한 속옷을 꺼내 갈아입었다.‘다 나은 거 아니었어? 왜 또 이러는 거지?’...이튿날 아침, 전진욱은 일찍 실험실에 도착했다.어제 그는 실험 결과가 나오기 전에 가버렸는데, 오늘 특별히 일찍 와서 보충하려 했다.‘만약 재석이 이 일을 알았다면 또 끝없이 잔소리를 할 거야.’그래서 진욱은 알람시계 세 개나 맞추었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차를 몰고 실험실로 달려갔다.“야! 넌 언제 온 거야?! 오늘 일요일이잖아?! 이번 주에 이틀 쉬기로 했는데, 넌 뭐 하러 왔어?!”진욱은 무척 흥분했다. 그래서 재석은 단번에 그가 도둑이 제 발 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재석은 실험대 앞에 서서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어제 데이터를 정리하지 않은 거야?”‘이런, 망했네!’“아니... 넌 집에서 쉬지 않고 왜 실험실에 온 거야?! 재석아, 넌 정말 너무 열심히 일을 하는 거 아니니? 남에게 숨 쉴 틈 좀 주라!”재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난 이미 너 대신 데이터 두 조를 계산했는데, 지금 보니 그럴 필요가 없는 건가?”진욱은 멈칫하더니 즉시 웃음을
재석이 대답했다.“아직은 아니야.”“아! 알겠네! 아직 썸을 타고 있는 거구나?”그는 말을 하지 않았고, 몇몇 남자아이들은 재석이 인정했다고 생각했다.“알고 지낸 지 얼마 됐어?”재석은 잠시 생각했다.“1년 좀 넘었어.”“야, 1년이나 넘었는데도 아직 성공을 하지 못한 거야? 이건 말이 안 되지. 훤칠하고 잘생긴 사람이 왜 이렇게 굼뜬 거야!”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야,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게. 이건 99%의 여자도 당해낼 수 없을 거야...”재석은 처음에 개의치 않았지만, 상대방이 본론으로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돌아가는 길에 정은이 물었다.“선배님, 그 슛 정말 너무 멋있었어요... 그리고 그 자세도...”그녀는 걸으면서 슛을 하는 시늉을 했다.재석은 옆에서 가끔 대답을 했는데,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다.약국을 지나다가 남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깐만 기다려.”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나올 때, 재석의 손에는 소독약 한 병이 있었다.재석은 정은의 이마를 가리켰다.“여전히 좀 빨간 것 같아. 내일 멍이 들 수도 있으니까 약 좀 바르면 빨리 나아질 거야.”정은은 재석이 약국에 들어가서 자신을 위해 약을 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리 큰 상처도 아니니 내일이면 다 나을 거예요. 이렇게 번거롭게 약을 사줄 필요가 없는데.”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얼굴에 멍 들면 보기 안 좋을 텐데. 너희 여자애들은 모두 예쁜 것을 좋아하지 않니?”“너희 여자애들?” 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응, 수민이도 그렇거든.”“그럼 고맙게 받을게요.”말하면서 소독약을 받으려 했다.재석은 오히려 건네주지 않고 조용히 의료용 면봉을 꺼냈다.“지금 혼자 약 바를 수 없으니 내가 도와줄게.이것 때문에 재석은 심지어 약국에서 손을 씻고 소독수로 소독을 한 다음 그제야 약을 들고 나왔다.정은은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남자는 이미 면봉에 소독약을 묻힌 다음,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 앞의 잔머리를 가볍
“응.”“그럼 오늘 밤에 달리기 하러 나갈 거예요?”“응. 같이 뛸래?”“좋아요.”두 사람은 각자의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만난 다음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달렸다.해가 이미 졌기에 하늘은 서서히 어둡기 시작했고, 대지는 점차 어둠에 휩싸였다.두 사람이 한 바퀴 뛰었을 때, 달빛이 점점 밝아지더니 별도 깜빡이기 시작했다.세 바퀴째 다릴 때, 정은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선... 선배님 먼저 뛰어요. 난 좀 쉴게요.”재석도 따라서 멈추었다.“괜찮아?”정은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힘들진 않지만 너무 더워서 그래요.”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었고, 땀방울이 볼에서 굴러 떨어져 티셔츠 속에 스며들었다.“그럼 나도 쉴게. 같이 걸을까?”정은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머쓱해했다.두 사람은 가로수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비대학교의 교문 앞에 도착했다. 재석은 편의점에 가서 생수 2병을 샀고, 한 병을 연 다음 정은에게 건네주었다.“고마워요.”앞문을 지나 또 반 바퀴를 돈 다음, 두 사람은 뒷문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면 개방된 농구장이 하나 있었다.두 사람이 지나갈 때, 농구공 하나가 마침 정은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그녀는 이를 알아차리고 피하려 했다.그러나 재석의 반응이 더욱 빨랐다. 그는 정은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감싼 후, 다른 한 손으로 정확하게 슛을 했다.농구장에서 바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야! 기술이 아주 좋구나!”재석은 오늘 하얀 농구복을 입었는데 언뜻 보면 정말 대학생 같았다.“우리 딱 한 사람 부족한데, 한 판 할래?”재석은 그러고 싶었지만 먼저 정은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가요, 건배님. 난 관중석에 응원석에 앉아서 지켜볼게요.”‘선배님이 농구를 할 줄 알았다니...’자리에 앉자, 정은은 멈칫했다.‘방금 선배님은 왜 날 바라본 거지? 이런 일로 나에게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재
두 사람은 이미 여러 번 호흡을 맞추었기에 무척 능숙했다.재석은 채소를 씻고 다듬으며 정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정은은 채소를 썰고 볶는 것을 책임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 3개와 국 하나가 식탁에 놓였다.두 사람은 각자 맞은편에 앉았다. 재석은 밥 한 그릇을 담아 먼저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정은은 받으면서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분위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전의 어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밥을 다 먹은 후, 재석은 예전처럼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를 도왔다.정은은 그가 건네준 접시를 받아 수건으로 닦고 옆에 놓았다.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아 일사불란하게 일했다.하지만 쓰레기를 정리할 때, 정은과 재석은 동시에 허리를 굽혀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머리를 부딪혔다.“아...”정은은 이마를 가리고 일어서더니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미안, 정말 미안해, 주의하지 않았어...”재석은 사과하며 즉시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아프지?”말하면서 정은의 손을 살짝 떼어냈다.손톱만한 부위가 빨갛게 되었지만 다행히 붓지 않았다.“미안, 난 쓰레기를 들고 싶었는데, 너와 부딪힐 줄은 몰랐어.”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녀의 눈에 여전히 눈물이 좀 고였다.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오르니 무슨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재석은 더욱 미안해했다.“저... 선배님, 일단 나 좀 놓아주면 안 돼요?”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아직도 여자의 손목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미안!”그는 뜨거운 것에 데인 것처럼 손을 거두어들였고 심지어 뒤로 물러섰다.정은은 처음에 어색했지만, 재석의 과장된 반응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재석도 따라서 입술을 구부렸다.“그렇게 웃겨?”“네!”그는 한숨을 쉬었다.“그럼 됐어.”말하면서 다시 허리를 굽히고 쓰레기봉투를 묶었다....재석의 에어컨은 마침내 수리되었는데 수리기사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교수님, 와서
재석이 걸어 나왔다.화장실 문은 마침 옷걸이 맞은편에 있어서 두 사람은 이렇게 딱 마주쳤다.남자는 갈아입은 옷을 품에 안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축축해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렇게 입고 있던 티셔츠는 어느새 젖었다. 목과 얼굴도 축축해서 물 같기도 하고 땀 같기도 했다.정은을 본 순간, 재석의 머리는 새하얘졌다.여자아이는 검은색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타이트한 옷은 포만하고 아름다운 상반신 곡선을 그려냈다.탱크톱 끈이 좀 짧아서 허리가 살짝 드러났고 작은 배꼽이 똑똑히 보였다.가늘고 긴 팔, 뚜렷한 쇄골, 검은색에 비쳐 하얗게 빛나고 있는 피부.꿈속의 ‘정은’과 똑같았다.정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손에 티셔츠를 들고 있단 것도 깜빡 잊고 멍을 때렸다.“선, 선배님...”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즉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될수록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 결국 네 화장실 좀 썼어.”그러나 오직 재석 자신만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짧디 짧은 말 한마디 하려고 목이 얼마나 탔는지, 호흡이 또 얼마나 거칠었는지를.“두근두근.”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재석은 확실히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려 했다.깨끗한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수리기사들이 안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구식 건물은 고정된 에어컨 실외기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에어컨 실외기는 일반적으로 바깥의 벽에 걸려 있었다.마침 재석네 실외기는 화장실 밖의 벽에 걸려 있었기에, 수리기사는 이미 안전줄을 타고 화장실 창문에 매달려 실외기를 수리하고 있었다.샤워는커녕, 지금 화장실을 제대로 쓸 수조차 없었다.그래서 재석은 정은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원래 정은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침실 앞까지 걸어간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정은이를 방해하는 거 아니야? 지금 자고 있을 수도 있잖아? 어차피 빨리 씻으면 몇 분밖에 안 걸리니 공교롭게 마주칠 일은 없겠지?’그러나 두 사람은 뜻밖에도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