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너 때문이잖아! 어디서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고 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나와 철봉이가 어떻게 강도겸을 찾아갔겠어?”돈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이순정도 자애로운 척하고 싶지 않았다.철봉이 맞장구를 쳤다.“그 강도겸이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왜 진작에 말하지 않은 거야? 오늘 나와 엄마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지금 일부러 우리를 해치려고 그런 거지? 그리고 그 6억을 독차지하려고!”연희는 다급히 반박했다.“그런 적 없어! 내가 왜 엄마와 널 해치려 했겠어? 나도 도겸 씨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고!”이순정은 냉소를 지었다.“넌 강도겸의 곁을 그렇게 오래 따라다녔는데,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그래! 이 상처들도 정말 많은 돈을 썼는데, 지금 강도겸 쪽은 한 푼도 주려 하지 않잖아. 그러니 누나가 돈 배상해! 돈 없다고 발뺌하지 마. 강도겸은 너에게 6억을 준 적이 있다고 말했어!”이 일을 말하자, 이순정은 바로 화가 났다. ‘분명히 돈이 있는데도 일부러 숨기다니. 나와 철봉이를 팔아먹은 것과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돈을 받으면 되고. 양심도 없는 계집애!’연희는 시선을 피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나한테도 지금 돈이 얼마 없어. 4백만 원 정도밖에 줄 수 없단 말이야...”“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아? 카드는?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면 여기에 있는 거야?”이순정은 연희가 자신의 성격과 똑같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계집애 지금 틀림없이 돈을 어디에 숨겨놓았을 거야!’그녀는 울부짖고 있는 연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연희는 마지막 남은 돈까지 빼앗길까 봐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철봉이 가로막았다.“가만히 있어! 나와 엄마는 누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한 줄 알아? 하마터면 차에 치여 죽을 뻔했는데, 사례비를 좀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이순정은 책상과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가방에서 은행카드 한 장을 찾았다.“철봉아! 빨리 와!
“병원비를 납부하라고?” 연희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줄곧 도겸 씨의 계좌에서 돈을 긁지 않았어?”“죄송하지만 그 계좌는 이미 사용금지가 된 상태라서요.”“사용금지?! 왜?!”“이건 대표님께서 직접 신청하신 거예요.”‘도겸 씨가 직접 신청했다니...’“하하하... 강도겸, 당신 정말 너무 독하구나!”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연희는 이날 마침내 퇴원했다.그녀는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면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도겸은 오늘 일찍 퇴근했다.차에 찬 후, 그는 기사에게 분부했다.“별장으로 가.”“네, 대표님.”도중에 도겸은 눈을 잠깐 붙이다가, 창밖을 휙휙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떴다.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침울한 날씨는 곧 비라도 내릴 것만 같았다.매년 장마철이 되면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도겸은 혐오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차는 평온하게 별장 구역으로 들어갔다.이때 기사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끼익.도겸의 몸은 관성으로 인해 앞으로 기울어졌는데, 안전벨트가 없었다면 지금쯤 이미 앞좌석에 부딪혔을 것이다.“어떻게 된 거야?” 그는 말투가 좋지 않았고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죄송합니다.”기사는 재빨리 사과했다.“한 여자가 갑자기 뛰쳐나와서 저도 얼른 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도겸은 고개를 들었다.밖에는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차 앞에 서 있었고, 몸은 이미 푹 젖었다. 머리카락은 목에 달라붙었으며 얼굴은 핏기가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연희는 생얼에 하얀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때 빗물에 젖은 옷감은 그녀의 몸에 딱 달라붙었는데, 여자의 아름다운 몸매를 그대로 그려냈다.마치 폭우 속의 꽃처럼 애처롭게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며 떨어질 듯 말 듯했다.기사조차도 마음이 약해졌다.그러나 도겸은 냉담하게 시선을 거두며 눈빛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이곳의 치안이 언제 이렇게 나빠졌지? 아무나 안으로 들여보내다니. 경비원에게 통지해서 이 여자 끌
연희는 경호원에 의해 길가에 버려졌다.“스스로 가라고 할 때는 가지 않더니, 꼭 남에게 끌려 나가야 속이 시원한 거예요? 빨리 꺼져요!”비가 많이 오는 날, 그들도 나와서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모두 이 미친 여자 때문이야.’...비가 그치자, 연희는 넋을 잃은 채로 거리를 서성였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대학에 도착했다.드나드는 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생기발랄한 것을 보고 연희는 마음이 씁쓸했다. ‘한때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는데.’이 순간, 연희는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나미야.”연희는 돌진하여 장나미의 팔을 잡았는데,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과 같았다.나미는 깜짝 놀랐다.그녀의 곁에 있던 두 여학생은 연희를 훑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나미야, 우리 먼저 안에 가서 기다릴게.”“좋아.” 나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연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복잡해졌다. “너... 너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한 달 전 병문안 하러 갔을 때, 연희의 안색은 좀 창백했지만 그래도 고급스러운 음식만 먹었는데.’지금의 연희는 치마가 젖었고 머리카락이 흩어져 마치 처녀귀신과 같았다.“나미야...”연희는 입을 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내 아이가 없어졌어. 그리고 그 사람도 날 버렸고.”나미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연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나 이제 갈 곳이 없어. 그러니 기숙사로 돌아가게 도와줄 순 없어?”나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넌 이미 퇴학을 신청했으니 규정에 따라 기숙사에서 지낼 수 없어. 그리고 내가 너를 돕고 싶어도 어쩔 수 없거든. 네 침대는 지금 다른 학생이 쓰고 있어. 그래서...”연희는 입술이 떨렸고 불쌍한 눈빛으로 애원했다.“나미야, 나 좀 도와줘. 나 정말 갈 곳이 없단 말이야.”나미는 난처함을 느꼈다.“아니면, 돈 좀 빌려줄래? 내가 돈이 생기면 꼭 갚을게!”나미는 한
연희가 물었다.“먹을 거 있어요?”여자는 작은 소리로 웃으며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았다.“들어와요.”연희는 네온사인으로 된 간판을 쳐다보았다.[텔미나오클럽.]그녀는 들어가면 무엇을 직면하게 될지 알고 있었지만, 배고픔과 피곤함, 그리고 명품에 대한 동경 때문에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여자를 따라 그 문에 발을 들여놓았다.‘난 살아야 해. 살아야만 강도겸과 소정은에게 복수를 할 수 있어!’...그러나 현실은 또다시 연희에게 타격을 입혔다.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돈을 벌 수가 없었던 것이다.연희는 아름다운 외모로 즉석에서 채용되었고, 클럽은 그녀에게 무료 음식과 숙소를 제공했다. 그날 밤, 연희는 마침내 편하게 잘 수 있었다.다음날 밤이 되자, 연희는 노출된 미니스커트로 갈아입고 ‘매니저’를 따라 한 룸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아주 좋은 방음 효과로 안의 동정이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문이 다시 열릴 때, 연희는 비틀비틀 안에서 걸어 나왔다.치마는 이미 찢어졌고, 하이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의 몸에 지금 속옷밖에 없었다.가슴, 허벅지, 허리, 목에 모두 색깔이 다른 키스자국이 있었는데, 어떤 것은 심지어 핏방울까지 배어있었다.연희는 울어서 두 눈이 부었고 목까지 쉬었다. 그녀는 품에 있는 수표를 꼭 잡았.두 시간에 천만 원.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마치 큰 구멍이 뚫린 듯 찬바람이 안으로 몰려왔다.연희는 사흘이나 버텼다.만신창이가 되어서 4억을 벌 수 있었다.그녀는 탐내지 않고 바로 이곳을 떠나려 했다.그러나 사장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떠나? 이곳이 무슨 마트인 줄 알아?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게? 매일 수천만 원 벌 수 있는데, 좋지 않아? 왜 가려는 거지?”연희는 여전히 떠나려 했다.‘4억이면 충분해. 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사장은 연희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았다.“가도 되지만 위약금부터
연희는 웃음을 지었다.이때, 창고 문이 밖에서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그 바람에 불빛이 이곳을 밝게 비추었다.“젠장, 이 여자 지금 손목을 베었잖아? 너희들은 사람을 어떻게 지켜본 거야?!” 사장은 두 경비에게 욕설을 퍼붓더니 다시 허리를 굽혀 앞장선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죄송합니다, 임 사장님. 다 제 잘못입니다.”“얼른 지혈해줘.” 남자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고작 이런 상처로 죽을 리가 없으니까.”“네...”피가 멈추자, 사장은 또 연희의 얼굴에 차가운 맥주를 뿌렸다.연희는 그제야 유유히 깨어났다.남자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신발로 연희의 턱을 들어올렸다.“허, 만약 정말 죽고 싶었다면, 넌 손목이 아니라 목을 베었어야 했어.”연희는 갑자기 찾아온 사람을 보며 아직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당, 당신은...”연희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쳐다보았다.불빛 아래에서 남자는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당신이죠! 당신 맞죠?!”연희는 갑자기 흥분해지더니, 아직도 피가 흐르는 손목을 무시하고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덥석 잡았다.연희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그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사장은 안색이 변하더니 얼른 여자를 걷어차려 했지만, 임시호는 그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서 연희와 마주했다.“날 알아본 거야?”“정말 당신이었어요! 그때 강도겸이 날 버려서 당신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왜 받지 않은 거죠?! 왜 예전처럼 날 도와줄 수 없었던 거냐고요?! 나 지금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우선 난 계속 너를 도울 의무가 없어. 둘째, 넌 이미 자신의 앞길을 망쳤으니 나더러 어떻게 도와주라는 거지?”시호는 연희의 손목을 바라보았다.“죽을 용기가 있는 이상, 왜 살아서 복수할 용기가 없는 거야?”‘복수? 그래, 난 소정은이 싫어 그리고 강도겸은 더욱 싫어. 난 복수를 해야 해!
“헐...”넓은 교실에서 갑자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조재석? 내가 생각하는 그 교수님 맞아?”“야! 서비대에 조재석이라고 하는 교수님이 더 있냐?”“하긴.”“세상에! 조 교수님이 우리에게 수업을 해주러 오시다니. 정말 너무 잘생겼잖아!”사람들은 모두 외모지상주의였다.아름다운 것을 보면 당연히 감상하고 감탄하며 칭찬했다.민지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런데 이 교수님은 볼수록 낯이 익은 것 같은데...’“어? 정은 언니, 이분 그날 식당에서 언니를 불렀던 사람 아니에요?”“응.”“와, 그 사람이 조 교수님이셨어요?”정은은 의혹을 느꼈다.“넌 이 교수님을 모르는 거야? 대학원생 면접 시험 때 면접관이셨는데.”“네?” 민지는 머리를 긁적였다.“이분은 없었는데. 저를 면접하신 교수님들 중, 저 오직 송지혜 교수님밖에 몰라요.”“이상하네... 그때 난 송지혜 교수님을 보지 못했는데... 넌 그때 오전에 시험을 본 거야?”“오후예요.”“어쩐지, 난 오전에 시험을 봤거든.”“그렇군요...”정은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만약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당시 강서정도 오후에 면접을 보러 왔었고, 심지어 나에게 면접 문제를 알아봤잖아? 면접관에는 오전에 송지혜 교수가 없었는데, 하필 오후에 나타나셨다니...’최근 송지혜 팀이 자비로 CPRT 측정기 한 대를 구입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송지혜가 서정을 학생으로 받아들인 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쯧... 강서정을 자신의 통장으로 삼았구나.’강단에서, 재석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치고 수업을 하려 했다.그는 오늘 옅은 회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을 통해 눈빛도 많이 부드러웠다.그곳에 서니 우아함이 절로 묻어났다.이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교수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물어봐.”“교수님은 아주 유명하시고 대단하시잖아요.”그 학생은 입을 열자마자 칭찬을 했다. “그런데 물리대학의 교수님이 생물과학의 강의까지 하실
“아, 네! 그럼 얼른... 엥?”민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사라졌다.“뭐가 이렇게 급하신 거지?”그녀는 정은이 서두르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정은은 강의동을 나간 후, 가로수길에 이르러서야 재석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남자는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은은 심호흡을 하고 숨을 돌린 뒤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직시했다.“선배님, 나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요?”재석은 가슴이 떨렸다.그는 정은이 쫓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그녀가 이렇게 물어볼 줄은 더욱 생각지도 못했다.”“아니.”‘내가 무슨 불만이 있겠어?’“없는 이상 왜 그동안 일부러 날 피한 거죠?”재석은 가슴이 떨리더니 감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마음이 찔린 게 분명했다.“그런 적 없는데.”재석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일 있었어요?” 정은이 다시 물었다.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머릿속에 저도 모르게 말할 수 없는 장면과 디테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꿈속의 여자는 지금 자기 앞에 서 있었다.살며시 손만 내밀면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은을 품에 안을 수 있었고, 다시 고개를 숙여 천천히 키스할 수 있었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재석은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자신의 뺨을 두 대 때리고 싶었다.‘조재석,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고개를 들어 정은의 맑고 깨끗한 두 눈을 마주하자, 재석은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선배님? 교수님?!”“어? 미안, 방금 딴 생각 좀 했어.”“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정은은 재석을 걱정했다.“응?”“지금 얼굴이...”정은은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엄청 빨갛거든요.”얼핏 보면 마치 열이 나는 것 같았다.재석은 점차 어찌 할 바를 몰랐다.“응,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래.”“아.” 정은은 그래도 이 대답을 받아들였다.“전에 왜 나를 피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나 자신이 오해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정은은 집중을 하며 표정 역시 진지했
재석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그게... 전 교수가 전에 그랬는데, 시간 있으면 실험실에 많이 놀러 오라고. 모두들 네가 엄청 보고 싶거든.”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전 교수님이 언제 말씀하셨는데요?”“일주일 전.” 재석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아...” 정은은 나른하게 말했다.“그래서 전 교수님이 일주일 전에 전해 달라고 한 말을 오늘에야 나한테 알려준 거예요?”‘이래도 날 피한 게 아니라고?!’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는 법. 재석은 황량하게 도망쳤다.정은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오후의 햇살은 따뜻했고, 하늘은 푸르며 흰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모든 것이 아름다웠다.오후에 수업이 없는 정은도 도서관에 있고 싶지 않았다. 최근 수업이 너무 꽉 차서 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집안 청소를 하지 않았다.오늘 날씨가 좋았으니 정은은 빨래를 하며 청소를 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맛있는 음식까지 만들어줄 생각을 하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그러나 학교 앞에서 꽃을 안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 미소는 바로 사라졌다.도겸은 양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입으니 이미 학교의 학생들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손에 꽃까지 들고 있어 더욱 눈에 띄었다.오가는 사생들은 모두 참지 못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도겸을 훑어보았다.“또 이 사람이야?”“이번에는 파란 장미로 바꿨군. 그렇게 큰 한 다발을 사려면 돈이 엄청 들겠지?”“그 여자가 너무 부러워. 잘생기고 로맨틱하잖아. 나 같으면 1초도 못 버티고 바로 받아줄 거야.”“그래도 네가 이 사람 마음에 들어야지! 하하하...”정은은 정말 머리가 아팠다.‘그날 말을 분명하게 한 것 같은데.’그 후 도겸도 확실히 찾아오지 않았기에 정은은 그가 포기한 줄 알았다. 그러나 또 이런 짓을 하다니.‘정말 짜증나!’정은은 교문을 나선 발걸음을 다시 거두고 몸을 돌려 도서관으로 갔다.‘청소를 꼭 오늘 할 필요는 없어. 내일로 미루어도 돼. 이주 연속 날씨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