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원은 이 말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투덜댔다.“이 건물은 어쩜 이렇게도 더러운 거니? 도처에 쓰레기가 널려 있고, 냄새도 나고. 이것의 사람들은 너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청소하는 사람도 없는 거야? 그리고 이 벽은 새까맣게 변했잖아. 이 난간도 전부 먼지고. 아마 닦은 적이 없을 거야...”정은은 시간을 보았는데, 더 이상 꾸물대면 늦을 것이다. 강서원이 멀쩡한 것을 보자, 그녀가 계속 투덜대는 것을 듣기 귀찮아서 정은은 그냥 가버렸다.강서원은 정은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있다가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렸다.그런 무시당하는 느낌이 더욱 강렬해졌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는데, 아직 몇 층이나 남았다. 게다가 모두 이런 계단이었다.강서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이를 악물었고, 하이힐을 신은 채 계속 올라갔다.다만 입으로 계속 투덜댔다.“멀쩡한 별장을 놔두고 굳이 이런 낡아빠진 아파트에서 지내려 하다니... 고집이 어쩜 이렇게도 센 건지.”간신히 7층에 도착한 강서원은 비상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재석은 집에 없었다.‘이 시간이라면 아마도 실험실에 있겠지.’한 바퀴 둘러본 다음, 강서원은 거실이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여자의 생활용품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심지어 바닥까지 검사했지만 긴 머리카락 하나조차 발견하지 못했다.강서원은 사색에 잠겼다.‘내가 너무 예민했나?’그날 가져온 도시락통을 가져가려고 강서원은 주방을 향했다.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멈칫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식탁 위에는 도시락통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하나밖에 없어! 다른 하나는 어디에 있지? 다른 사람한테 준 게 분명해. 정말 수상하네!’강서원도 오래 있지 않았다. 실마리를 발견한 다음, 그녀는 곧장 본가로 돌아갔다.“거 봐요! 역시 내 말이 맞았다니깐요!”소기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당신한테 잡힌 거야?”“잡히긴 뭘 잡혀요? 재석이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고!”“그게 아닌데 왜 그렇게 투덜대는 거야?”강서원은 자신의 생각에 잠겨 그의
“선배님.”“이제야 돌아오는 거야?”정은이 대답했다.“도서관에서 잠깐 자료 좀 찾았어요.”말하는 사이, 두 사람은 이미 7층까지 올라갔다.“참, 도시락통은 이미 깨끗이 씻었는데, 잠깐만 기다려요...”정은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다음 얼른 도시락통을 들고 나왔다.재석은 받으면서 갑자기 입을 열어 물었다.“요즘 오미선 교수님과 함께 과제를 하고 있는 거야?”“네. 하지만 진도가...”“전에 교수님과 이 일로 토론한 적이 있어. 사실 이 과제의 접점부터 문제가 있거든. 그러나 너도 교수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을 거야.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교수님은 절대로 뒤돌아보시지 않을 거야.”정은도 이를 발견했고, 오미선에게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미선은 지금 충분한 데이터가 없으니 이대로 연구 방향을 바꾸면 지난 2년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있어? 같이 밥 먹으면서 상의하는 건 어때? 교수님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토요일이요?” 정은은 입술을 깨물었다.“미안해요, 이미 약속이 있어서요.”재석은 멈칫했지만 이내 대답했다.“괜찮아, 그럼 시간 나면 다시 나에게 연락해.”“좋아요.”...토요일, 정은과 민지는 서준의 집에 찾아갔다.[미리 경비 아저씨에게 말했으니까 들어올 때 직접 방 번호를 말하면 돼요.]서준이 톡을 보냈다.정은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빌딩을 바라보았다.민지는 혀를 차며 말했다.“와, 서준이는 정말 돈이 많네요.”이 집은 세낸 것이 아니라 직접 산 것인데, 심지어 서준의 명의로 된 것이었다.방금 경비실에 찾아갔을 때, 두 사람 모두 이를 보았다.“들어와요. 일회용 슬리퍼로 갈아신으면 돼요.”서준의 집은 12층에 있었다. 민지와 정은이 문에 들어서자 감응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는 문을 열며 담담하게 말했다.“뭐 마실래?”민지는 바로 눈을 깜박였다.“콜라 있어?”“응. 칼로리 있는 거 없는 거?”“당연히 칼로리가 있는 거 마셔야지. 제로 칼
“드디어 끝났네요!” 민지는 노트북을 덮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그녀의 곁에는 빈 깡통 한 무더기가 있었다.서준이 입을 열었다.“가요, 내가 밥 살게요.”정은과 민지는 거절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앞으로 같이 일해야 했기에 서로에게 밥을 사주는 기회가 많았다.레스토랑 안,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우아한 피아노 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세 분 예약하셨나요?”“어제 예약했어요.”서준은 핸드폰을 꺼내 예약한 정보를 보여주었다.곧 종업원은 세 사람을 데리고 자리로 갔다.정은이 전에 온 적이 있었기에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 레스토랑은 같은 레벨의 레스토랑에서 평가가 가장 좋지만 그 가격도 무척 비쌌다.민지는 자리에 앉은 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이야, 다르긴 정말 다르구나...”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주위를 찰칵찰칵 찍기도 했다.두 사람의 눈빛에 민지는 어색하게 웃었다.“우리 아빠한테 보여주려고요. 아직 이렇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을 본 적이 없으시거든요...”말을 마치고 또 사진에 전념했다.민지를 바라보는 서준의 눈빛은 저도 모르게 동정이 묻어났고 이내 부드러워졌다.‘민지의 집안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다니...’그러나 서준은 또 자신이 오해할까 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네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시지?”민지는 멈칫했다.이 표정을 본 서준과 정은은 그녀가 말하기 뻘쭘한 줄 알았다.“만약 불편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어... 우리 엄마는 가정주부야. 우리 아빠도 그냥 평소에 건물 출입자를 관리하는 경비원이시고. 내 고향은 시골인 데다가 바다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두 분은 한가하실 때 함께 바다로 나가서 물고기를 잡으시곤 했어. 기회가 되면 방금 건져낸 새우와 물고기를 먹으러 우리 집에 와! 아주 싱싱하고 맛있어!”시골에 살고, 부모님은 직장이 없으며, 아빠는 가끔 대문을 지키는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두 사람 가끔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는다는 민지의 말을 듣고 정은과 서준
다 많은 다음, 서준은 일어나서 계산하러 갔다.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세 사람은 뜻밖에도 신진호, 서지예, 심경혜, 탁재민 일행과 부딪쳤다.유독 강서정만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가 오지 않은 것도 정상이었다.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어떻게 이런 등급의 레스토랑에 나타나겠는가.“우쭈쭈, 이거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들 아니야?!”진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조롱하는 말투와 눈빛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정은 그들은 진호를 상대하지 않았다.진호는 웃음이 굳어졌지만 계속 입을 열었다.“공교롭게도 여기서 만났네. 그런데 왜 오미선 교수님이 보이지 않는 거지? 이렇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고 싶지 않으신가 봐? 우리는 송지혜 교수님이 모든 비용을 결산해주시는데 말이야. 학교의 중시를 받으니 다르긴 다르구나. 올해 대부분의 연구비용도 우리 과제팀에게 주었잖아. 아이고, 나도 정말 걱정이야. 너희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대학원에 합격했는데, 발언권도 없는 교수님을 따라다니면 무슨 성과를 거둘 수 있겠어? 정말 아쉽군!”진호는 쉴 새 없이 나불댔고, 지예와 경혜는 옆에 서서 방관했다. 오직 재민만이 어수룩하게 그를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진호에게 밀려났다.“이 촌놈아, 나한테 달라붙지 마! 저리 좀 꺼져!”재민은 멈칫하더니 자존심이 상한 동시에 열등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말렸다.“다들 동창이니까 이렇게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잖아...”“넌 입 좀 다물어! 여기서 말할 자격이 있긴 한 거야?”“난 왜 말을 할 수 없는 건데? 나한테도 입이 있으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재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그는 다툼을 진짜 잘 하지 못했다.진호가 말했다.“어쭈! 촌놈 주제에 성깔이 있어가지고. 내가 만만해 보여!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야?”재민은 고개를 숙이며 남진일의 말을 떠올렸다.“우리처럼 가난한 집구석에서 자란 아이는 원래 불공평한 대우를 받게 돼. 될수록 참아. 네가 강대해지면 공평
진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뭐, 뭐 하려는 거야?! 이거 초상권 침해야! 고소할 거라고?!”민지가 말했다.“공공장소에서 합리적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거니까 어디 한번 고소해 봐. 나는 단지 정의의 화신일 뿐이야.”“너, 너희들...”진호는 화가 나서 말까지 더듬었다.지예는 민지가 정말 찍고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신진호, 너 뭐 잘못 먹었어?”진호는 영문을 몰랐다.“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 각자 계산하기로 해서 이 레스토랑에 온 거잖아. 누가 결산한다는 거야! 야, 들어가는 사람 막지 말고 빨리 네 밥이나 먹어. 다 먹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니까!”진호는 달갑지 않아서 정은 일행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그제야 자리를 비켰다.재민은 움직이지 않았다.‘각자의 비용을 내야 하구나...’“미안, 나, 나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먼저 돌아갈게. 너희들 천천히 먹어!”말을 마치자 재빨리 밖을 나갔다.진호는 얄밉게 말했다.“촌놈! 돈이 없어서 저러는 게 분명해!”지예가 대답했다.“신경 쓰지 마.”정은 일행이 레스토랑을 나서자, 마침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민지와 서준이 먼저 올라탔다.정은은 조수석에 앉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녀는 생각하다가 여전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탁재민... 맞지?”모퉁이에서 한 훤칠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맞, 맞아요.”“학교로 돌아가려고? 마침 우리도 차를 불렀으니 같이 갈 수 있는데.“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재민은 깜짝 놀란 듯 안절부절못했다.이곳은 학교와 너무 멀어서 방금 왔을 때 진호가 택시를 잡았고, 비용이 만 원이었다.재민은 원래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이 시간에 그 버스는 이미 운행이 중단되었다.그는 카풀앱에서 차를 불렀는데, 학교에 가면 단지 2천 원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줄곧 승객이 없어서 재민은 주문을 취소하려 했고, 고민하고 있을 때 정은이 나타났다.“응. 어차피 우리도 돌아가
차가 골목 어귀에 멈추자, 정은이 차에서 내렸다.서준과 민지는 이미 앞의 골목에서 내렸다.정은은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잔잔한 달빛이 떨어지며 밤하늘에 별이 몇 개 걸려 있었다.한여름의 무더위를 띤 바람은 결코 시원하지 않았다.이때 정은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아파트 아래층에서 한 남자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남자는 바로 똑바로 섰다.곧이어 그는 미소를 지었다.“왜? 내가 여기에 나타나서 많이 놀랐어?”심현빈이 정은의 앞으로 다가왔다.정은은 잠시 멈칫했다.“조금요.”“학교 생활은 적응이 잘 되고?”“네.”“수업은 많지 않아?”이 말은 정은의 정곡을 정확하게 찔렀다.‘수업은 정말 꽉 찼지!’현빈은 어깨를 들썩였다.“네 표정을 보니 이미 답을 알겠네.”“그렇게 티가 나나요?” 정은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아니.”“그럼 어떻게 안 거예요?”“내가 눈치가 빨라서.”정은은 어이가 없었다.“밖이 너무 덥네. 하지만 넌 분명히 날 집으로 초대하지 않을 거야. 그럼 우리 시원한 곳에 가서 좀 앉을까?”현빈은 그래도 정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넌 지금 마음속으로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 이 남자는 정말 눈치가 빠르고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어.”정은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음, 내가 또 맞혔구나, 맞지?”...두 사람은 전에 갔던 밀크티 가게에 도착했다.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데다가 에어컨이 있어서 무척 시원했다.다만 현빈은 양복을 입고 있었기에 아무리 봐도 밀크티 가게와 어울리지 않았다.그래서 자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정은이 물었다.“뭐 마실래요? 내가 살게요.”“오레오 밀크티, 노 얼음 그리고 설탕 좀 많이 추가해줘.”“네?”“왜 그렇게 쳐다봐?” 현빈은 자신의 턱을 만졌다.정은은 잠시 침묵하더니 카운터에 가서 주문했다.“오레오 밀크티, 얼음 빼주시고요 설탕 많이 넣어주세요. 아, 똑같은 걸로 두 잔이요.”말이
말을 꺼내자마자 정은은 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현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너.”‘난 너에게 관심이 있지.’정은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남자는 입가를 실룩거렸다.“못 들은 척하지 마.”“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하나도 안 들리네, 에헴! 이제 그만해요.”현빈은 딴청 피우는 정은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그래,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언젠간...”“어머.” 정은은 그의 말을 끊었다.“휴지를 안 챙겨왔네요. 휴지 있어요?”“응.”“한 장 줘요, 고마워요.”현빈은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이제 내 말 들리는 거야?”정은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그녀의 추측도 맞았는데, 현빈은 확실히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었다.다만 밀크티를 다 마신 후에야 그는 본론으로 들어갔다.“성 교수님 쪽에 진행 중인 과제가 있어. 현재 난관에 부딪혀서 이미 두 달 넘게 진도를 나가지 못했거든. 그래서 교수님은 지금 네 생각을 묻고 싶으셔. 이것은 모든 자료야.”말하면서 USB를 하나 건네주었다.정은은 손을 뻗었는데, 현빈은 이대로 손을 놓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닿았다.남자의 체온은 그녀보다 훨씬 높았다.정은은 USB를 받은 다음 즉시 손을 거두었다.현빈은 표정이 바뀌지 않았지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일부러 그런 게 분명해! 이 남자 대체 뭐 하자는 거야!’정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때 현빈은 주동적으로 휴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좀 닦아, 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말고.”정은은 비록 화가 났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현빈이 이렇게 말한 이상, 만약 정은이 계속 따진다면 오히려 속이 좁아 보일 것이다.‘길을 가다가 부주의로 남을 부딪치는 것도 흔한 일이잖아. 굳이 심현빈 씨 때문에 이럴 필요가 있을까? 그럼 오히려 내가 심현빈 씨를 특별 취급하고 있다는 게 아니겠어? 진짜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일을 해도 함정인 것 같아!’밀크티 가게를 떠나자, 현빈은 정은을 집으로 바래다
[뭐야?]성달수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네가 줬다고? 언제? 나한테 말한 적 있어?]“저 오늘 마침 학교에 왔거든요. 오후에 지나가다 그 USB를 정은이에 가져다줘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들었고요.”[그렇구나. 그런데 왜 나한테 말 한마디도 안 한 거야? 오후 내내 찾았잖아...]현빈은 속으로 생각했다.‘미리 설명하면 교수님이 이것저것 물어보실 게 분명해.’“저도 갑자기 시간이 생겨서 가져간 거라 교수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깜박했네요.”[그래, 정은이에게 줬으면 됐어.]“네.”통화가 끝나자, 현빈은 핸들을 잡고 즐겁게 휘파람을 불었다....서재에서, 재석은 한창 실험 데이터를 통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집중이 안됐다.지금 재석의 머릿속은 두 시간 전에 베란다에서 본 장면으로 가득했다.현빈이 정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골목 어귀에 나타난 것이었다.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정은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먼저 눈살을 찌푸렸는데, 어이가 없었는지 눈을 부라리며 도망쳤다.현빈은 제자리에 서서 그렇게 정은을 바라보았다. 마치 장난이 심한 아이를 보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동시에 또 애정이 넘쳐났다.가로등 아래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졌다.심지어 두 손이 겹쳐 마치 다정한 커플과 같았다.‘그래서... 정은이와 약속한 사람이 심현빈이었구나?’재석은 문득 정신을 차리더니 고개를 들어 컴퓨터를 바라보았다.‘내가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어느 열부터 시작했더라? 어느 줄까지 체크했지?’그렇게 그는 처음부터 다시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새벽 3시, 서재의 불은 줄곧 꺼지지 않았다.재석은 의기소침하게 노트북을 덮었다. 결국 그는 똑똑히 정리하지 못했다.‘됐어, 내일 다시 하자.’간단히 씻은 재석은 침대에 누웠지만, 몸을 뒤척여도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힘들게 잠들었지만 여전히 편하게 자지 못했다. 왜냐하면 복잡하고 황당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재석은 꿈속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몰랐다.
더군다나 이미숙이 실종되었을 때, 이미 스물두 살이었다. 당시 어려서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하더라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 만약 정말 살아있다면 무슨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자신의 부모님에게 연락할 것이다.그런데 전화 한 통도, 문자 한 통도 없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남은 인생을 편하게 향수해야 나이에 두 사람은 이국 타향에서 분주히 뛰어다녔다.현빈은 마음이 약해졌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정원에 한 번 가보세요.”“그래! 미숙이는 정원에 있는 그네랑 자등나무를 제일 좋아했지...”현빈이 봉수진을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갈 때,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발신 번호를 확인한 후, 내색하지 않고 봉수진이 보지 못하게 손바닥으로 번호를 가렸다.“할머니, 저 전화 좀 받으러 나갈게요.”“그래.”본관을 나서자, 현빈은 그제야 수신 버튼을 눌렀다.“어머니, 무슨 일이시죠?”[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맞은편의 이미윤은 기분이 좀 좋지 않았는데, 기다리다 짜증이 났던 것이다.[너 지금 어디에 있는 거니?]현빈은 그녀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일 때문에 좀 바빴어요. 지금 밖에 있고요.”[뭐가 바쁜데? 너 지금 누구랑 같이 있어?]현빈은 눈살을 찌푸렸다.“어머니, 전 범인이 아니니까 저를 그렇게 심문하실 필요 없어요.”[범인?! 허--]이미윤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지금 누굴 말하는 거야? 범인은 나 아니니? 그래서 너희들 다 날 속이고 있는 거잖아? 지금 날 뭘로 보고?!]“어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그럼 넌 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귀국하셨는데, 왜 나에게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니?]현빈은 말문이 막혔다.[그럴 줄 알았어!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어머니...” 현빈은 씁쓸하게 웃었다.[너 지금 네 외할아버지 그들과 함께 있는 거지? 맞지? 나 방금 이미 본가에 갔었는데, 집사가 그러더라, 네가 두 분을 데리
이미숙은 길치였다.이렇게 큰 정원은 말할 것도 없고, 가본 적이 없는 작은 골목에 들어서도 늘 길을 잃곤 했다.“엄마, 어떻게 길을 찾으신 거예요?”이미숙은 단번에 말문이 막혔다.“나도 모르겠어. 그냥 이렇게 가면 된다는 직감을 받아서? 그런데 바로 나올 줄은 몰랐어...”소진헌도 감탄을 했다.“역시 아내를 믿어야 되는 거야!”부녀는 모두 이미숙이 운 좋게 맞혔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이미숙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교한 정원, 은폐된 작은 문, 이 모든 것은 전부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곳에 숨겨 있었던 장면이었다....같은 시간, 같은 정원에서.현빈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예전에 살던 정원에 왔다.십여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두 노인은 본관의 인테리어가 여전히 예전과 똑같다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리움을 드러냈다.당시 이 정원을 상납할 때, 그들은 요구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본관의 물건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미숙이가 돌아와서 이 낯선 집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괴로워할까?’봉수진은 눈을 크게 뜨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그들 가족이 십여 년 동안 살았던 이 곳을 똑똑히 보려고 했고, 머릿속에는 이미숙이 어렸을 때 정원에서 놀던 장면이 가득했다.“미숙아, 물고 좀 봐. 대나무 잎을 따서 누구에게 주려고?”“아빠한테 줄 거예요, 헤헤!”딸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맴돌았고, 그때의 기억도 마치 어제 금방 일어난 일인 것만 같았다.“당신,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난 자꾸만 미숙이가 우리 곁에 있는 것 같아요...”봉수진은 복도 기둥을 만지며 말했다.“봐요, 미숙이가 그린 그림이 아직 남아 있잖아요.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가능하다면 봉수진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봉수진은 딸을 지키며 딸에게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미숙이 우리의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잘 보호할 거야! 미숙아, 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동안 잘 지내고
정은은 다시 한번 자세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이미숙은 걸어가서 자신의 딸과 함께 전시판 앞에 섰다.“전쟁이 끝난 후, 이원은 이씨 가문의 후손들에게 돌려주었다고 적혔는데, 돌려준 이상 이 정원은 개인 정원인 거잖아?”‘개인의 것이니 왜 모든 관광객들이 참관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티켓을 살 필요도 없고. 마치 자선하는 것처럼 말이야. 정말 이상해!’그러나 이미숙도 깊이 연구하지 않고, 일가족은 계속 동쪽으로 걸어갔다.이 정원은 정말 컸는데, 10여 분을 걸어서야 다음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건물 옆에는 작은 대나무 숲이 있었는데, 대나무 숲 밖에는 청석판이 깔려 있었고, 대나무 숲 깊은 곳까지 뻗어 있었다.구불구불한 길은 신비한 느낌을 더해주었다.바람이 불자, 대나무 잎도 따라서 소리를 냈다. 바람도 대나무의 맑은 향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일가족은 안내판을 따라 앞으로 걸었고, 소진헌은 사진을 찍으면서 감탄했다.“정말 너무 예쁘네!”세 식구가 작은 정원을 지나, 좁은 문을 나가자, 눈앞이 탁 트였다. 평지의 끝에는 기품 있는 집이 하나 있었다.웅장하면서도 화려했다.한가운데에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위에는 ‘본관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안에는 출입을 허용하지 않아 그들은 바깥에서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이미숙은 천천히 다가가더니, 노란색 선 밖에 멈춰 섰다.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도저히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그녀는 망연히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그 익숙한 느낌이 갈수록 강렬해졌다.나... 여기에 온 적이 있는 것 같은데?’정은은 여전히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미숙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심지어 곤혹을 드러내고 있었다.“엄마?” 그녀가 소리쳤다. “왜 그래요?”소진헌도 고개를 돌렸다.“햇볕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좀 쉴까?”이미숙은 웃으며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괜찮아요, 그냥... 여기가 너무 예뻐서 그래요. 만약
“뭐가요?” 선우는 영문을 몰랐다.“그때 정은과 헤어진 거 말이야, 내가 잘못한 거야?”“형...”도겸을 바라보는 선우의 눈빛은 많이 복잡했다.“그걸 이제야 깨달은 거예요?”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다.“정은 누나가 얼마나 좋은 여자인데! 나 같으면 어디 다칠까 봐 평생 아껴줄 거예요...”말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은 선우는 즉시 말을 바꾸었다.“물론 난 누나에게 그런 마음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내가 만약 형이었다면, 정은 누나를 꽉 붙잡았을 거예요.”좋은 여자는 흔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손을 놓은 순간,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이끌 것이다.“그때 내 생일날 말이에요, 정은 누나는 기분 좋게 와서 내 생일을 축하해 주었는데, 형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헤어지자고 말했잖아요. 나 그때 정말 깜짝 놀랐어요! 동건이 형도 그래요! 그날 후에 조용히 나에게 말했는데, 형이 조만간 후회를 할 거라고.”다만 그런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다.두 사람도 꽤 오랫동안 사귀었으니, 6년이 지난 지금,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은 다시 화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 정은이 정말 떠났을 줄이야.“도겸이 형, 지금 심정을 잘 알겠는데, 지금 정은 누나는...”“난 이미 잘못을 깨달았고, 또 잘못을 인정했어.”도겸은 눈을 드리우며 손에 든 담배를 꽉 쥐었다.“그러나 정은은 여전히 날 용서하려 하지 않잖아... 선우야,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일을 만회할 수 있을까?”이 질문에 선우도 골치가 아팠다.‘정은 누나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하지만 그는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슬퍼해하는 도겸을 보며 선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형, 사실 좋은 여자는 엄청 많아요. 이제 앞을 보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또 다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도겸은 가볍게 웃었다. 담배는 이미 구겨졌고,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그래, 좋은 여자는 많지만 정은은 하나밖에 없잖아.”선우는 어안이 벙벙했다.‘이
밖에 나오자, 세 사람은 모두 술을 마셨기에 각자의 전화로 대리운전을 불렀다.기다리는 사이에 선우는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라이터를 찾지 못했다.동건에게 달라고 할 때, 그는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뒷좌석에 있으니까 혼자 가지러 가.”선우는 차 문을 열고 라이터를 찾았다.“아, 여깄었네...”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라이터를 동건에게 돌려주었다.방금 뒷좌석에서 본 숄을 떠올리며 선우는 입가를 실룩거렸다.“형 이제 차에서 그런 짓 하는 것을 좋아하는 거야?”동건은 영문을 몰랐다.“그런 짓? 무슨 말을 하는 거야?”“모르는 척할 거예요? 뒤에 숄이 있잖아요? 그건 여자만 입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노란색. 솔직히 말해요, 어느 여자가 남긴 거예요?”동건은 어이가 없었다.“헛소리 하지 마.”“어머, 인정 안 하는 거 좀 봐요, 이건 형 답지가 않은데.”“인정하긴 개뿔! 그거 정은 씨 어머니의 숄이야. 내일 돌려주려고 했다고. 그런데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 야동 좀 그만 봐!”선우는 깜짝 놀랐다.“정은 누나 어머니요? 그 분의 물건이 왜 형의 차에 있는 거죠?”한쪽에 있던 도겸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동건은 방금 입을 열려고 했는데, 선우와 도겸이 모두 궁금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헤헤 웃으며 갑자기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글쎄, 그건 당연히 이유가 있겠지...”선우는 계속 추궁했다.“무슨 이유인데요?”“아니, 왜 질문이 이렇게 많아? 너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당연히 상관이 있죠! 난 이미 오랫동안 정은 누나의 소식을 듣지 못했거든요. 지난번에 다리가 부러져 이주 넘게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정은 누나가 병문안 하러 왔었거든요. 날 그렇게 걱정하고 있으니 나도 당연히 누나를 관심해야 하지 않겠어요?”“뭐? 정은 씨가 병문안을 갔었다고?” 동건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며 곁눈질로 줄곧 도겸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는 몸을 살짝 기울이더니, 눈썹을 치켜
동건은 얼마 전에 도겸의 회사에 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서연희의 어머니와 양아치 같은 남동생을 떠올렸다.“아이가 없어졌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서영숙은 아마 울다 기절할지도 모른다동건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곧 그가 부른 대리도 도착했다.“저기요! 대표님! 잠시만요!”동건이 뒷좌석 차 문을 열고 앉으려 할 때, 레스토랑 지배인이 그를 불렀다.“무슨 일이에요?”“방금 저희가 룸을 청소할 때 이 숄을 발견했습니다. 그 위에 브로치가 하나 있는데, 아마도 여성분이 빠뜨린 것 같습니다...”정은네 일가는 이미 떠났기에, 지배인은 그들과 함께 밥을 먹은 동건을 보자마자 즉시 그를 불렀다.“이리 줘요, 내가 돌려주면 되니까.’“네, 감사합니다.”동근은 숄을 뒷좌석에 놓고는 내일 사람 시켜 정은에게 돌려주려 했다.“가요, 선생님.”“네.”도중에 선우에게 전화가 왔다.[형! 왜 아직도 안 온 거예요? 지금이 몇 시인데. 우리 지금 형 하나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요 며칠 너무 신나게 놀다가 몸이 약해진 거예요?]선우가 있는 곳은 좀 시끄러웠는데, 클럽이 아니면 술집이었다.“꺼져, 이 미친 자식아! 말도 참 더럽게 하네! 딱 기다려, 곧 도착할 테니까!”동건은 주소를 물어본 다음 직접 대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슬라이드 바에서.선우가 나와서 동건과 어깨동무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왜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예요? 어느 여자의 품에 있다 온 건 아니겠죠?”“꺼져, 정상적인 식사를 했을 뿐이니 함부로 말하지 마.”선우는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믿을 것 같아요?”“난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니 이상한 루머 좀 퍼뜨리지 마세요.”“가짜 여자친구잖아요?” 선우는 히죽거리며 말했다.동건은 멈칫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누가 그래?”“수민 누나가요.”“언제?”선우는 잠시 생각했다.“지난 주말이었을 걸요? 테니스를 치러 갔는데, 한 남자와 아주 다정하게 옆방에서 공을 치고 있더라고요...”남자는 수민의
이미숙은 이렇게 말했다.“뭘 먹을지 모르겠으면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정해. 가격은 모든 것을 대표할 순 없지만 적어도 성의를 표시할 수 있으니까.’그래서 동건은 레스토랑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또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이미숙은 감사 인사를 해야 했으니 틀림없이 식사 자리를 비싼 곳으로 정할 것이다.금요일, 저녁.동건은 10분 앞당겨 도착했는데, 정은네 일가는 그보다 더 일찍 도착할 줄이야. 그들은 이미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원래 정은은 수민까지 불렀지만, 그녀는 너무 바빠서 이미 연속 이틀동안 야근을 했기에 정말 시간이 없었다.“정말 안 올 거야? 고동건 씨도 있는데.”수민은 눈을 부라리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서? 그 남자가 있으면 내가 가야 하는 건가?]“두 사람 지금 사귀고 있잖아. 다 먹으면 동건 씨는 또 네 기사가 되어 널 집에 데려다줄 수 있고.”[쳇, 누가 데려다 달라고 했어? 나한테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는 가짜 커플이잖아. 넌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지금 자꾸 비아냥거릴 거야...]룸 안에서.동건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두 분도 참, 저도 간단하게 도와드렸을 뿐인데, 이렇게 특별히 밥을 사주시다니!”“당연히 그래야지.”소진헌은 웃으며 그와 악수했다.‘네가 나석천 편집장님을 정은에게 소개해준 덕분에 지금의 『7일담』이 있게 된 거야.”이미숙도 옆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동건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젊었다.소진헌은 훤칠하지만 우아한 기질을 선보이고 있었다. 옷이든 하는 말이든 모두 지식인만이 가지고 있는 기질을 내뿜었다.이미숙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파란 원피스에 긴 머리를 걷어올린 채로 소진헌의 곁에 서 있으니 침착하면서도 도도했다.그녀가 서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곧 음식이 올라왔다.소진헌은 좋은 술 한 병을 가지고 왔다. 가득 따른 후, 그는 먼저 마시며 동건을 바라보았다.“작은 은
“정말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재석은 잠시 멈칫했다.“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뭐?!” 소진헌은 갑자기 흥분해졌다.“정말이야? 고백은 했어? 왜 아직도 사귀지 않은 거야?”잇단 질문에 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이럴 줄 알았으면 대답하지 말걸 그랬어.’네 사람은 집 앞에서 헤어졌다.재석은 왼쪽으로 향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고, 정은네 일가족은 명이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이미숙은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오늘 덕분에 잘 먹었어.”“에이,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오늘 아주머니의 사인을 받았잖아요.”이 말 한마디에 이미숙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정은은 샤워하러 갔다.평소처럼 머리를 묶고 머리가 젖지 않도록 샤워모자를 썼다.그러나 손을 뒤로 뻗은 순간, 딱딱한 집게핀을 만진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머리가 이미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정은은 고개를 힘껏 흔들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음, 정말 대단한 수법이야. 그런데 왜 나만 못하는 거지? 말도 안돼,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짜증나!’이미숙과 소진헌은 씻은 다음 이미 방으로 돌아가 누워있었다. 부부는 불을 켜고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나석천이 이때 문자를 보내왔다.[이 작가님, 축하드립니다!][『7일담』은 오늘 판매량이 또 최고치를 기록했고, 이미 몇 개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이 책의 영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받고 싶다고 했어요.][30분 전에 출판사의 전화를 받았는데, 첫 번째로 인쇄한 책은 이미 품절되었고, 공장은 밤새 인쇄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작가님의 다른 배당금도 이미 도착했고요. 잠시 후에 계좌로 넣어드릴게요.][원래 전화로 말하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이미 주무셨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렇게 문자를 보냈어요. 내일 전화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정말 너무 흥분해서요.]이미숙은 문자를 보고 나서 자신의 남편을 꽉 껴안았다.소진헌은 갑작스런 포옹에 흠칫 놀랐다.
“자.”정은은 목을 움직이더니 또 고개를 저었다. ‘어, 정말 안 떨어지네. 꽤 단단하게 묶었나 봐.’“어머!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빨리 배웠네요. 나보다 더 잘 하는 것 같아요!” 사장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재석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정은은 설명하려 했다.“제 남자친구 아닌...”그러나 사장님은 그녀에게 말을 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예전에는 시집간 여자들이 머리를 걷어올렸어요. 시집간 후, 금슬이 좋다면 남편이 직접 부인을 위해 머리를 묶어주었고요. 이게 다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빗겨주며 백년해로하고 영원히 한마음을 맺는다는 뜻이 있어요.”“안타깝게도 지금 이 남자들은 머리를 묶어주긴커녕 빗으로 간단하게 빗겨주는 것도 귀찮다고 하니 정말 게으름뱅이와 다름이 없다니깐요. 하지만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대단해요.”사장님은 재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배울 뿐만 아니라 인내심이 있어서 직접 아가씨를 위해 머리를 말아올렸잖아요.”“이 사람은 제 남자...”“아가씨, 이 총각 꼭 소중히 여겨야 돼요. 요즘은 좋은 남자가 그리 많지 않거든요.정은은 속이 답답해졌다.‘내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순 없는 거야?’두 사람은 노점을 떠나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제 할 줄 아는 거야?”“뭘요?”“머리카락을 걷어올리는 거.”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난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배우라는 거야?!’재석이 말했다.“내가 다시 한번 가르쳐줄까?”“아니요!” 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굳이 안 걷어올려도 되니까 그냥 마음대로 묶으면 되지.’“날 못 믿겠어?”정은은 쓴웃음을 지었다.“나 자신을 믿지 않아서 그래요.”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어차피 봐도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나았다.두 사람은 걷다가 멈추었고, 거리를 나갈 때에야 이미숙, 소진헌과 합류했다.“엄마...”“어? 이 집게핀은...”이미숙은 바로 정은의 걷어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