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화가 난 채로 침실로 돌아오더니 쿵 하고 문을 닫았다.이튿날 아침, 왕미자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연희가 위층에서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이봐요, 빨리 나 좀 병원에 데려다줘요.”왕미자는 어이가 없었다. 지난번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그녀는 어찌 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이것도 다 경험이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기사님, 그 사람이 또 배가 아프다네요.”[알았어요, 지금 바로 차 몰고 갈게요.]왕미자는 또 서영숙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모님, 그게 말입니다...”그녀는 이 모든 일에 습관되어 순조롭게 보고까지 마쳤다.병원에서.서영숙은 차가운 표정으로 병실 밖의 복도에 서 있었다.의사는 여전히 어제와 같은 말을 했다.“큰 일은 없으니 많이 휴양하시면 됩니다.”서영숙은 참다못해 병실로 들어가 욕설을 퍼부었다.“하다하다 이젠 콩알 만한 일로 병원으로 달려오다니, 넌 여기가 네 집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머리가 없는 거야 뭐야? 아마도 너처럼 이렇게 사람 들볶는 임산부가 없을 거다. 아이를 챙기는 일도 잘 하지 못하다니, 넌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그녀는 전에 정은이 아직 도겸의 곁에 있을 때를 떠올렸다. ‘소정은 그 아이는 매일 우리 도겸이를 잘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종래로 날 귀찮게 하지 않았지. 무슨 일이 생겨도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서 해결했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겨도 떠들지 않고 나와 잘 상의했잖아.’다시 병상에 있는 연희를 보면 서영숙은 그저 짜증이 났다.‘어쩜 매미보다도 더 시끄럽고, 바퀴벌레보다 더 귀찮은 건지! 조그마한 일로 온 집안사람을 들볶다니. 우리가 자기 종이야 뭐야? 누가 그럴 여유가 있다고. 정말 자기를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퉤, 재수없는 것!’연희는 왼쪽 귀로 듣고 오른쪽 귀로 흘리며 서영숙의 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날 오후 퇴원한 뒤, 연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또 배가 아프다며 병원에 가겠다고
‘도겸이도 그 아이를 원하지 않잖아. 게다가...’강구염도 아직 이 일을 몰랐는데, 서영숙은 감히 그에게 알리지 못했다.그녀는 강구염이 절대로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다.‘이 두 부자는 마음이 정말 독하지.’지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연희에게 아이를 지우하고 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그래서 서영숙도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참, 임 여사의 며느리가 임신했다면서요? 그것도 쌍둥이라고 들었는데.”“그래요, 나도 이제야 알았어요. 우리 아들과 며느리가 어찌나 신중한지, 3개월이 지나서 태아의 상태가 안정되어서야 말한 거 있죠? 뭐 나한테 서프라이즈를 주고 싶었다나? 나도 확실히 깜짝 놀랐죠, 하하...”“정말 축하해요! 우리 은호는 여자친구조차 없는데. 나도 내가 언제 손자를 안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참, 서 여사의 아들은 우리 은호와 동갑이지 않았어요? 이미 여자친구 사귀었나요?”서영숙은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하루 종일 자신의 회사에서 바쁘게 돌아치고 있어요. 그냥 돌아와서 편안하게 가업을 계승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겸손하셔라, 도겸이의 회사가 이미 상장했다고 들었는데!”서영숙은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여전히 겸손하게 말했다.“에이, 그냥 재미 삼아 그러는 것뿐이에요.”“아이고, 우리 아들은 창업할 마음이 없는 것 같네요. 지금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이미 흡족하고 있으니 더욱 아무런 동력도 없잖아요. 나야 아들에게 기대하지 못하겠지만, 이제 며느리 뱃속에 있는 그 두 손자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자기 아버지보다 더 능력이 있어야 할 텐데.”“뭘 기대해요? 아직 태아일 뿐이잖아요, 하하...”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웃음을 금치 못했다.“이건 모르죠? 외국에서 태아가 뱃속에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지식을 흡수한다는 연구가 나왔어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남에게 뒤처지면 안 되죠! 어차피 난 이미 우리 며느리에게 국내 최고의 태교 수업을 신청했어요. 며느리에게나 아이에게
연희는 귤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서영숙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거절했다.“아주머니, 저 몸이 불편하단 말이에요. 아시잖아요, 제가 요즘 병원에 자주 입원한 거. 그러니 태교 수업에 갈 수가 없어요...”지난번에 티파티에서 받은 억울함과 비난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연희는 수업을 모임으로 삼아 꽃을 꽂고 차나 맛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거부감을 느꼈다.서영숙은 화가 나서 혈압이 올라갔다.‘이 계집애 지금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낸 거야? 그딴 걸 변명이라고!’[상의할 여지는 없어. 넌 반드시 가야 해!]서영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에서 뚜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희가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서영숙은 믿을 수 없단 듯이 핸드폰을 보았다.‘이 천한 것이! 이젠 감히 내 전화를 끊어? 오냐오냐 해줬더니 정말 겁도 없구나. 아이를 낳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날뛰게 굴다. 정말 아들이라도 낳았다면 더 깐족댈 거 아니야?!’여기까지 생각하자 서영숙은 다시 집사를 불렀다.“그 수업표를 들고 도겸이 별장에 한 번 다녀와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 전해줘요. 가고 싶지 않아도 괜찮지만, 당장 내 아들의 별장에서 꺼져야 한다고. 우리 가문은 절대로 그 뱃속의 아이를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저녁 9시, 집사가 돌아왔다.“그 아이 뭐라고 했어요?”“서연희 아가씨께서는 제시간에 수업하러 갈 거라고 하셨습니다.”“흥! 그래도 눈치 빠른 셈이군!”...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연희는 핸드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그녀는 졸린 두 눈을 뜨며 전화를 받았고, 초조하게 말했다.“누구세요?”[서연희 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진별 태교의 선생님이에요. 어젯밤 조교가 수업 시간표를 이미 서연희 씨에게 보냈을 텐데. 첫 수업은 디저트 만들기고, 8시에 시작할 예정이에요. 지금 이미 7시 25분이니, 35분 안으로 달려오실 수 있나요?]상대방은 직접 자아소개를 했다. 아마 연희가 아직 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또 한 마디 덧붙였다.[강 사모님께서 말
이렇게 되면 연희는 태교에 전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겸에게 더욱 신경을 쓸 수 있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곧 재벌 집안 며느리로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대학을 다니든 안 다니든 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그래서 월요일에 연희는 바로 학교에 가서 자퇴 신청을 했다.그녀는 아프다는 이유로 자퇴를 했으니 심사 절차는 보통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어차피 학교에 온 이상, 기숙사에 가서 짐이나 정리하자.’월요일 오후에 수업이 없었기에, 연희가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룸메이트 모두 안에 있었다.연희는 이사 나간 지 오래였다. 비록 평소에 쓰는 물건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룸메이트들은 갑자기 나타난 연희 때문에 깜짝 놀랐다.“연희야, 어쩐 일로 돌아온 거야? 네 남자친구 집에서 지내는 거 아니었어?”“무슨 중요한 물건이라도 깜박한 거야? 우리에게 문자 보냈으면 배달로 보내줬을 텐데.”연희는 입술을 구부리더니 턱을 살짝 들었다.“나 짐 싸러 왔어. 이미 자퇴하기로 결정했거든.”그녀는 오늘 샤넬의 신상 스웨터와 모직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외투는 버버리 클래식 트렌치코트였다. 그리고 손에는 서영숙이 선물로 준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있었다.화려한 옷차림 덕분에 귀티가 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행동거지마다 재벌 집 사모님의 기운이 물씬했다.아직 대학생인 룸메이트들은 또 어찌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겠는가. 그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장나미는 연희와 사이가 가장 좋았다. 연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녀는 좀 놀랐다.“자퇴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야. 연희야, 넌 충동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면 안 돼.”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자퇴는 휴학과 다르잖아. 학교에서 비준하면 학적을 보류할 수 없어. 만약 네가 앞으로 후회한다면...”“후회? 내가 뭘 후회해?” 연희는 콧방귀를 뀌었다.“이렇게 결정한 이상, 난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넌 이미 2년 넘게 공부를
지금의 연희는 이미 예전의 가난한 학생이 아니었으니, 전에 쓰던 물건도 더 이상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너희들 이 안에 쓸만한 거 있는지 좀 봐. 원하면 가져가고, 원하지 않으면 나 대신 좀 버려줘.”“어? 너 다 버릴 거야?”“응.”룸메이트들은 말문이 막혔다.연희는 기숙사에 갔지만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교문을 나서자, 그녀는 바로 기사에게 전화를 해서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했다.주위 사람들의 놀라움, 부러움, 질투, 의혹의 눈빛 속에서 연희는 태연하게 뒷좌석에 앉으며 멋지게 떠났다.그날 저녁, 연희는 도겸이 뜻밖에도 별장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웃으며 다가가서 맞이했다.“도겸 씨, 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게요. 저 오늘 이미 학교에 자퇴 신청을 제출했거든요. 이제부터 안심하고 집에서 당신과 뱃속의 아이를 챙겨줄 수 있어요.”도겸은 금방 접대를 끝냈다. 회사에 진행 중인 입찰 프로젝트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그는 가까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외투를 벗기도 전에 연희의 ‘서프라이즈’를 들었다.순간, 연희를 바라보는 눈빛은 비웃음으로 가득 찼다.“넌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연희는 도겸의 비웃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자가 마침내 자신의 희생에 감동한 줄 알고 그녀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도겸 오빠, 지금 저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생각해 봤는데, 오빠와 아이가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두 사람을 위해서라면 전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어요. 하지만 더 이상 저를 원망하지 말고, 저와 아이에게 좀 잘해 주면 안 될까요...”“풉-” 도겸은 냉소를 지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학교 다니고 싶지 않으면 그냥 솔직히 말해도 되는데. 그 책임을 나에게 전가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네 일은 나와 상관이 없으니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이 여자는 스스로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오히려 내가 관심해주길 바라는 거야
“미진 언니, 방금 류머티즘이라고 하셨어요?”“너도 이 병을 알아?”“네. 오미선 교수님도 이 병을 앓고 계세요. 저한테 한약 처방전이 있는데, 근절할 수는 없지만 진통 효과가 좋은 데다가 부작용도 일반 약보다 훨씬 작아요.”미진은 이 말을 듣자 두 눈이 밝아졌다.“그럼 정말 잘 됐네! 이따가 그 처방전을 나에게 보내줘. 내가 퇴근하면 바로 약국에 가서 약을 사야지. 너무 고마워, 정은아. 넌 모르겠지만, 우리 시어머니는 아파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신다니깐. 진통제도 효과가 없어. 지금 나도 다른 방법이 있어야지. 만약 그 약에 정말 효과가 있다면, 내가 밥 살게!”정은은 웃으며 말했다.“밥 사실 필요 없어요. 마침 도왔을 뿐인데요.”진욱이 말했다.“너희들 발견했어? 정은이가 온 이후로 우리 매번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늘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 같아. 정은이는 우리 실험실의 복덩어리가 다름없어!”손태민은 금방 도착했다.“복덩어리요?”미진이 대답했다.“정은이 말이야. 예쁘고 또 만능이니 복덩어리와 다름없잖아.”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려고 했는데, 이수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황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누가 제 컴퓨터에 손을 댄 것 같아요!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실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었단 말이에요!”“뭐야?”“또 바이러스에 걸린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진욱은 즉시 자신의 컴퓨터 앞으로 걸어가 살펴보기 시작했다.“지난번 IT 쪽에서 방어벽을 업그레이드했으니 바이러스는 아닐 거야.”미진도 바로 자신의 컴퓨터를 켰다.일시에 사람들은 긴장되기 시작했다.진욱이 말했다.“난 데이터를 잃어버리지 않았어. 미진아 넌?”미진이 대답했다.“내 것도 멀쩡한데.”두 사람은 동시에 태민과 정은을 바라보았다.태민도 말했다.“저도 문제가 없어요.”정은이 대답했다.“저도요.”그래서 수아 혼자만 데이터가 없어진 것이다.미진이 생각했다.“다시 한 번 찾아봐. 다른 곳에 저장해 둔 거 아니야?”수아는
태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않았다.수아는 모두들 정은을 돕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하필이면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소정은의 속셈이 도대체 무엇인지 누가 알겠어요? 만약 다 우리를 속인 거짓이라면요? 어제 아침에 체크할 때 멀쩡했던 데이터가 오늘 사라졌다니. 어제 오후, 미진 언니와 전 교수님이 먼저 떠나셨죠? 그리고 저와 태민 선배가 바짝 따라 떠났고요. 그럼 실험실에는 소정은과 소 교수님만 남은 셈이잖아요. 소 교수님은 이렇게 할 이유가 없으시니, 남은 건 오직 소정은일 뿐이에요!”수아는 기세등등하게 몰아쳤다. 언뜻 들으면 꽤 그럴 듯해 보였다.그러나 정은은 여전히 그 속의 허점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수아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어제 아침에 데이터를 체크했다고 했죠? 그럼 어제 떠날 때는 검사한 적이 있나요?”“물론이지! 그때는 데이터가 다 있었다고!”“확실해요?”“그럼. 넌 왜 이걸 물어보는데? 내가 일부러 너한테 누명을 씌웠다고 말하려는 거야?”정은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좋아요, 선배 말을 믿을게요. 그럼 데이터는 어제 떠난 후부터 오늘 실험실에 도착하기 전, 이 기간에 없어진 거란 말이죠?”“맞아.”“그럼 그동안의 감시 카메라부터 확인해 봐요.”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CCTV가 있다는 것을 깜박했네. 우리 실험실은 24시간 동안 CCTV가 켜져 있잖아.”“그래요.”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냉소했다.“그럼 먼저 감시 카메라부터 확인해요. 저도 제가 고의로 누구를 겨냥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감시실에 오자, 진욱은 그들에게 최근 이틀 간의 감시 카메라를 확인하겠다고 했다.그러나 그 결과, 감시 카메라가 사라졌단 것이다.미진이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CCTV가 왜 없어져요?”경비도 영문을 몰랐다.“최근 한 달의 CCTV는
진욱이 물었다.“너한테 방법이 있어?”“삭제된 실험 데이터를 직접 복구한 다음, 삭제 기록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리고 데이터가 삭제된 정확한 시간을 찾은 다음, 그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실험실에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거죠.”“그건 그렇지만, 누가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을까? 그 컴퓨터의 휴지통은 이미 비워져 있어서 복구하기가 어려울 텐데.”정은이 대답했다.“제가 한 번 해볼 수 있어요.”처음에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데이터를 복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시 카메라를 확인하는 것은 가장 간단하고 빠른 방법이었다.그러나 지금, 이 문제는 이미 감시 카메라로 해결할 수 없었다.정은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려 할 때, 재석이 갑자기 그녀를 제지했다.정은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재석이 설명했다.“현재 정은이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잖아. 기존의 추론이든 의심이든 모두 수아 개인의 주장이고. 이것은 마치 길거리에서 지갑을 도둑맞은 것과 같아. 가장 도둑처럼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자신의 의심을 뒤집어씌우고 있잖아. 예를 들면 그 사람이 도둑놈처럼 생겼다, 차림새가 건들건들하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럼 그 사람은 단지 남의 의심 때문에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까? 아마도 상대방이 정신병자라고 욕을 하겠지.”재석은 정은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정은아, 넌 사실을 증명할 능력이 있지만, 자칫하면 자신을 증명하려다가 남의 함정에 빠질 거야.”그 순간, 정은은 재석은 선보인 엄청난 이성과 논리사변능력에 충격을 받았다.“그래.” 미진은 이마를 두드렸다.“왜 정은이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건데? 의심을 한 사람이 증거를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수아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미소가 굳어졌는데, 일이 왜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몰랐다.“저, 저도 단지 의심했을 뿐이에요.”수아는 침을 삼켰다.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