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욱이 물었다.“너한테 방법이 있어?”“삭제된 실험 데이터를 직접 복구한 다음, 삭제 기록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리고 데이터가 삭제된 정확한 시간을 찾은 다음, 그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실험실에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거죠.”“그건 그렇지만, 누가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을까? 그 컴퓨터의 휴지통은 이미 비워져 있어서 복구하기가 어려울 텐데.”정은이 대답했다.“제가 한 번 해볼 수 있어요.”처음에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데이터를 복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시 카메라를 확인하는 것은 가장 간단하고 빠른 방법이었다.그러나 지금, 이 문제는 이미 감시 카메라로 해결할 수 없었다.정은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려 할 때, 재석이 갑자기 그녀를 제지했다.정은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재석이 설명했다.“현재 정은이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잖아. 기존의 추론이든 의심이든 모두 수아 개인의 주장이고. 이것은 마치 길거리에서 지갑을 도둑맞은 것과 같아. 가장 도둑처럼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자신의 의심을 뒤집어씌우고 있잖아. 예를 들면 그 사람이 도둑놈처럼 생겼다, 차림새가 건들건들하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럼 그 사람은 단지 남의 의심 때문에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까? 아마도 상대방이 정신병자라고 욕을 하겠지.”재석은 정은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정은아, 넌 사실을 증명할 능력이 있지만, 자칫하면 자신을 증명하려다가 남의 함정에 빠질 거야.”그 순간, 정은은 재석은 선보인 엄청난 이성과 논리사변능력에 충격을 받았다.“그래.” 미진은 이마를 두드렸다.“왜 정은이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건데? 의심을 한 사람이 증거를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수아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미소가 굳어졌는데, 일이 왜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몰랐다.“저, 저도 단지 의심했을 뿐이에요.”수아는 침을 삼켰다.
재석은 정은이 자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저녁 8시, 재석은 모두에게 야식을 대접했다.“이 가게는 꼬치구이가 정말 싸고 맛있거든. 정은아, 이 간판 메뉴는 꼭 먹어야 해. 내가 소고기구이 더 시켜줄게.”자리에 앉자마자 미진이 열정적으로 말했다.진욱은 정은의 왼쪽에 앉아 먼저 그녀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날씨도 더우니 땀이 많이 날 거야. 일단 차부터 좀 마셔. 저쪽에 식욕을 돋우는 반찬도 있는데. 김치를 강력히 추천할게. 좀 먹을래?”정은은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열정에 놀랐다.‘수아 선배가 나한테 죄를 뒤집어쓴 일로 미안해서 그런가? 안 그래도 되는데.’수아는 묵묵히 이 장면을 보았고, 입술을 점점 더 세게 깨물었다.‘예전에 다들 에워싸며 챙겨줬는데, 소정은이 온 후부터, 사람들 조금씩 그 사람의 편을 들기 시작했어. 난 빤히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좀 답답해서요, 밖에 나가서 신선한 공기 좀 마셔야겠어요.”말하면서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태민은 줄곧 수아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때 그도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근처의 골목은 인터넷에서 유명한 장소였는데, 골목 양쪽에 화려한 등불이 가득 걸려있었다. 수아는 목적없이 걷고 있었고, 태민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수아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귀찮아서 뒤돌아보았다.“대체 언제까지 따라올 거예요? 귀찮지도 않아요?! 전 나와서 숨 좀 쉬어도 안 되는 거냐고요?”태민은 잠시 침묵을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수아야, 네 데이터 말이야, 정말 잃어버린 거야?”수아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그게 무슨 뜻이죠?”“요 며칠 우리는 퇴근하자마자 바로 실험실을 떠났잖아. 넌 언제 그 실험을 완성할 시간이 있었지? 데이터는 더 말할 것도 없고.”“선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수아는 약간 화가 나서 목소리도 절로 커졌다.“넌 정말 착한 여자아이잖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돼.”수아는 입술을 깨물
“비록 전 교수님과 미진 누나, 그리고 소 교수님은 모두 정은을 관심하고 있지만, 난 아니야. 내 눈에는 너 하나밖에 없거든. 난 영원히 네 편에 서서 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여길 거야. 난 네가 정말 너무 좋아. 나에게 널 보호하고, 네 곁에 서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줄래?”태민은 수아가 실험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그녀는 열정적이고 활발하며 재능이 있었고 또 집안까지 무척 좋았다. 아무튼 자신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기에, 태민이 수아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그는 수아를 오랫동안 좋아해왔지만, 수아는 줄곧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태민은 갑자기 자신을 위해 다시 한번 노력해 보고 싶었다.수아는 남자의 다정한 눈빛을 무시했다. 그녀는 단지 놀라움과 의심이 들 뿐이었다. ‘지금 나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속셈이 도대체 뭐지! 일종의 협박인 건가? 이 틈을 타서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이라고? 만약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모두에게 내가 한 모든 짓을 알려주는 거 아니야?’두려움을 느끼자, 수아는 몸서리를 쳤다. 만약 그녀가 실험실을 떠난다면, 재석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수아야? 날 거절해도 괜찮아.”태민은 머리를 긁적였다.“이 두 가지 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나도 갑자기 용기가 생겨 이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참, 난 네가 왜 정은을 좋아하지 않는지 이해해. 하지만 앞으로 정말 그런 짓 하지 마. 만약 소 교수님에게 알려지면, 넌 정말 엄중한 처벌을 받을 거야.”비록 태민은 진심으로 수아가 걱정돼서 이런 말을 했지만, 수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눈빛이 약간 차가워졌다.‘흥, 정말 날 협박하고 있었어.’“좋아요, 그럼 사귀어요.”“뭐, 뭐라고?” 태민은 이미 거절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수아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수아는 또박또박 말했다.“우리, 사귀자고요.”“우와! 수아야,
강변을 따라 앞으로 걷자, 양쪽의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도시가 갑자기 조용해져 정은은 시간과 함께 천천히 걷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침묵이 흘렀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척 화기애애했다.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 사람 곁에 있으면 가장 편한 것 같았다.“다리에 가서 바람 좀 쐴래요?”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잔머리를 뒤로 넘겼다.재석은 정은의 눈빛을 따라 멀리 바라보았다.“그래. 하지만 좀 먼 것 같은데.”정은은 농담을 했다.“벌써 힘이 든 거예요?”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그럼 시합해볼래?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말을 마치자, 재석은 자신의 말이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나이를 합치면 이미 50살이 넘었는데,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제안을 하다니.정은은 오히려 도전해보고 싶었다.“좋아요, 그럼 누구보다 먼저 도착하는지 봐요. 진 사람은 아이스크림 사기!”만약 수민이 있었다면 진작에 눈을 부라리며 야유했을 것이다.“야, 넌 머릿속엔 아이스크림밖에 없냐?”“달랑 아이스크림만 달라고 하다니. 우리 오빠 돈 엄청 많아. 비싼 걸 사달라고 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걸?”그러나 재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럼 내가 셋 세면 바로 시작하는 거예요. 셋, 둘, 하나...”정은은 발을 빼며 달렸고, 재석은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뒤쫓았다.달리는 과정에서 재석은 정은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했다.단숨에 다리로 뛰어간 정은은 힘들어서 숨을 헐떡였지만 눈빛은 무척 밝았다.잠시 후, 그녀는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고, 작은 여우처럼 득의양양했다.“선배님, 내가 이겼어요!”재석은 이미 편의점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냉동고를 가리켰다.“어느 거 먹고 싶어?”“딸기 맛이면 돼요, 고마워요.”재석도 자신을 위해 아무 하나를 골랐다.그렇게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길가에 나른하게 앉아 운
“매번 엄마가 찾아내시면, 나와 아빠는 이를 교훈으로 삼아 돈을 더 은밀한 곳으로 숨겼거든요. 그런데 우리 엄마는 마치 우리 몸에 카메라라도 장착한 것처럼 아무리 찾기 어려운 곳이라도 바로 찾을 수 있었...”말하면서 정은은 재석이 이미 오랫동안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선배님, 듣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돌리자, 재석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정은은 멍해졌다.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어깨까지 자랐는데, 방금 밥을 먹을 때 머리띠가 이미 느슨해졌다. 이때 밤바람이 스치자, 정은의 머리카락은 흩날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그 순간, 뜻밖에도 매혹적이었다.“응, 듣고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약간 잠겼다.“아주머니는 아주 똑똑하시고, 더욱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계셔.”정은은 시선을 돌렸다. 목이 좀 말라서 그녀는 침을 삼켰고, 한참 후에야 계속 말했다.“물론이죠, 우리 엄마는 미스터리 소설을 쓰시는 작가잖아요!”미스터리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추리하는 능력이었다.만약 소진헌이 정은에게 예의염치를 알게 하고, 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이미숙은 정은 자신이 가장 되고 싶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했다.“그럼 선배님은요? 선배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책을 보고, 공부하고, 시험을 봤지.”“그게 다예요?”“다른 것도 있겠지만, 이미 기억이 잘 나지 않네.”오늘의 가로등 불빛이 너무 부드러워서인지, 아니면 정은의 눈빛이 너무 밝아서인지, 재석은 강 건너편의 네온등판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하소연하고 싶어졌다.“다섯 살 때였나, 난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물리에 관한 책을 하나 보았어. 이름은 이었고.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물리와 관련된 책을 접했던 거였어. 심지어 난 '물리'라는 두 글자의 개념조차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무척 재밌다는 것을 발견했어.”남자는 담담하게 웃으며 눈빛은 간절하고 뜨거웠다.“‘천지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려면 만물의 이치를 분석해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 우주의 가장
정은은 발걸음을 멈추었다.“미진 언니, 전 교수님, 왜 저를 이렇게 보고 계시는 거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미진과 진욱은 바로 이 말을 기다렸다!“정은아, 너와 상의할 일이 하나 있는데.”“무슨 일이죠?”미진이 말했다.“지금 내 손에 두 조의 데이터가 있거든. 양이 엄청 많아. 계산은커녕 정리하기도 어려워. 정은이 넌 프로그래밍을 잘하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간단하게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생각해 줄 수 있어?”진욱은 얼른 보충했다.“우리는 프로그래밍을 할 줄 몰라서 기껏해야 전통적인 속산법을 사용하고 있거든. 그러나 이번에 데이터 양이 정말 너무 많아서 그래. 인간은 결국 컴퓨터와 비교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에헴... 네가 우리를 도와 프로그래밍 같은 것을 써줬으면 좋겠어. 이 데이터를 대량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더 좋고.”30분 후.“미진 언니, 이 계산 링크와 운행 속도는 어떤가요? 조정해야 할 부분이 있나요?”정은이 자리를 비켜주자, 미진은 앉아서 마우스로 확인했다.원래 5일 넘게 걸려야 계산을 마칠 수 있었지만, 이런 속도라면 하루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정말 대단해! 고마워, 정은아. 정말 사랑한다! 어쩜 이렇게 대단한 거니!” 미진도 원래 큰 희망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정은은 그녀에게 엄청난 서프라이즈를 가져다주었다!정은은 손을 흔들었다.“천만에요,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진욱은 얼른 다가왔다.“내가 한 번 해볼게...”재석은 수업이 끝난 후 평소대로 실험실에 들어왔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정은이 불편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억지로 의자에 앉아있었다.그리고 미진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고, 진욱은 방금 뛰어나가서 산 밀크티를 건네고 있었다.“정은아 수고했어. 내가 어깨 두드려 줄게. 우리 남편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어...”“정은아, 밀크티 좀 마셔. 설탕을 많이 넣지 않았으니 혈당에 아무 부담도 없을 거야!”재석은 영문을 몰랐다. 그의 ‘수하’들이
선생님은 바로 연희를 깨워 질문을 했다.연희는 수업을 아예 듣지 않아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수업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곁눈질로 연희를 바라보더니 은근히 그녀를 비웃었다.연희도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확실히 비싼 옷과 가방을 매우 좋아하지만, 소유하기만 하면 이미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매치해야 더 잘 어울릴 수 있는지, 색깔의 조합, 쿨톤과 웜톤은 어떤 색깔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연희는 전혀 들을 마음이 없었다.가까스로 수업이 끝나자, 연희는 그 누구보다도 빨리 교실을 나섰다.마침 나가면 백화점이었다. 연희는 전에 복수를 하려고 도겸의 가족카드를 긁은 적이 있었는데, 후에 도겸은 전혀 따지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자신의 돈을 썼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마침 이때 연희는 또 간절히 쇼핑을 통해 마음속의 초조함을 달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브랜드 가게에 들어가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도겸은 정례적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끊임없이 신용카드 문자 알림을 받았다. 진동은 거의 끊어지지 않았다.그는 힐끗 보더니 차갑게 전원을 껐다.서영숙은 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맞추며 연희를 데리러 갔다. 그녀는 기사에게 차를 백화점으로 몰고 가라고 한 다음, 차에서 내려 교실로 가려고 했다.사실 그녀도 오고 싶지 않았다.예전처럼 사모님들과 모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차나 마시는 게 더 편하지 않겠는가?가장 큰 고민은 아마도 내일 어디로 쇼핑을 갈지, 외국으로 가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건 아닐지, 먼저 어느 명품 브랜드의 기성복을 입어보는 것이 좋을지 뿐이었다...지금처럼 연희와 뱃속의 아이를 에워싸고 돌아다녀야 하다니. 매일 제때에 연희에게 수업을 하라고 일깨워줘야 할 뿐만 아니라, 정시에 사람을 데리러 와야 하다니. 마치 사춘기 아이의 엄마처럼 고생해야 했다!그러나 감시하지 않으면 또 안 됐다. 연희가 또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뱃속의 아이도 못된 것만 배울지도 모르니까.그때마
연희는 그동안 서영숙의 비위를 맞추고 싶었지만, 자신의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 이상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연희도 꾹 참지 않고 직접 서영숙의 말을 받아쳤다.“가방 몇 개 좀 샀다고 뭔 호들갑을 떠시는 거예요? 제가 수업하느라 고생한 자신을 위해서 사면 안 되는 거냐고요? 그 수업들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저 정말 한 글자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다 제가 꾹 참았기 때문이에요.”“가방 몇 개일 뿐인데, 저 더 살 거예요. 이건 아주머니 아들이 저에게 준 가족 카드예요. 도겸 씨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아주머니가 대신해서 난리를 부리시는 거죠?”서영숙은 화가 나서 혈압이 치솟았다. ‘소정은이 우리 도겸 곁에 있을 때, 종래로 비싼 옷을 사거나 명품 가방 같은 것을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만날 때마다 소박하게 입었지만, 취향도 좋고 코디도 잘해서 아무리 입기 어려운 아이템도 정은이 입으면 무척 예뻤다.설령 정말 명품 가방을 메더라도, 모두 중요한 장소에 출석하기 위해서, 또는 도겸이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은에 비하면 연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서영숙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참지 못하고 전부 말했다.연희는 듣자마자 냉소를 하며 비꼬았다.“소정은이 그렇게 좋으신 이상, 왜 돌아오라는 말조차 하시지 못하는 거죠? 아주머니와 도겸 씨도 정말 우습네요. 예전에 함께 지낼 때는 소정은이 싫다고 투덜대셨으면서. 지금 그 여자가 정작 도겸 씨와 헤어지고 멀리 숨어 있으니 오히려 그리운 거예요? 이러는 자신이 창피하지도 않나 봐요! 저는 소정은이 아니니 절대로 참고 살지 않을 거예요. 아주머니의 괴롭힘을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라고요. 기껏해야 다 같이 죽는 거죠! 지금부터 저는 더 이상 아주머니의 안배를 듣지 않을 거예요. 태교 수업이며 의상 코디 수업이며 다 때려치울 거예요. 아주머니가 원하시면 혼자를 수업을 들으시러 가든가 마음대로 하세요!”말이 끝나자 연희는 바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