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17화

Author: 십일
10초도 안 되자, 대량의 관련 데이터가 화면에 나타났다.

미진은 목에 핏줄까지 세우며 불렀다.

“선생님! 빨리 와서 이 데이터가 맞는지 좀 보세요...”

기술자는 서둘러 컴퓨터 앞에 앉았고,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전에 잃어버린 데이터네요. 하지만 이것이 교수님들이 찾고 있는 데이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누가 한 번 검사해 보세요...”

수아가 바로 앞으로 걸어갔고, 기술자는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그녀에게 양보했다.

시간이 1분 1초 지나갔다. 수아가 계속 말을 하지 않자, 미진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말 좀 해, 데이터가 얼마 정도 회복된 거야?”

“거의 다 회복되었어요.”

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러나 표정은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미진은 수아가 말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스스로 가서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

“하나님이시여, 99%나 되찾았어!”

그녀는 말하면서 정은의 팔을 안았다.

“이번에 다 정은이 네 덕분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며칠이나 밤을 새워야 할지 몰라! 이 데이터들은 야근을 해도 두 주일 이상 걸릴 거야!”

“서비대 학생답게 머리가 정말 좋네요.”

기술자도 허벅지를 두드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진욱도 고개를 끄덕였고, 흐뭇한 동시에 감격에 겨웠다.

“그래, 이번에 정은이 덕분에 우리가 살아난 거야!”

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감탄을 하며 농담했다.

“우리 조 교수님의 안목이 참 대단한데? 이렇게 좋은 학생을 미리 찜해두었다니 정말 대단해!”

그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재석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마치 진욱의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그러나 양쪽에 늘어진 두 손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다음 순간, 재석은 자신이 뜻밖에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다시 두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정은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민은 쯧쯧 소리를 냈다. 정은을 주시하는 눈빛은 마치 무슨 외계인이라도 살펴보는 것 같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18화

    [응. 누군가 감시실에 잠입해 감시 시스템을 통해 바이러스를 심은 거야.][누군데요?][상대방은 얼굴을 가려서 알아볼 순 없지만, 서비대 내부의 사람이 확실해.]정은은 입술을 깨물었다.[절대로 그 사람을 가만두면 안 돼요. 이번에는 바이러스지만, 다음에 또 무슨 짓 할지 모르잖아요.]재석은 정은의 문자를 보고 낮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그의 옆에 있던 기술자는 영문을 몰랐다.‘뭐가 그렇게 웃기지? 갑자기 웃으니까 좀 섬뜩한데...’재석이 답장을 보냈다.[좋아, 네 말대로 할게.]정은은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고, 일어나서 샤워하러 갔다....숙취로 인한 두통에 도겸은 아파서 숨을 들이마셨다.일어나서 창밖을 바라보니, 날은 이미 어두웠다.‘내가 꼬박 하루 동안 잤구나.’위가 또 은근히 아프기 시작하자, 도겸은 능숙하게 침대 머리맡의 서랍에 있는 위약을 꺼냈다. 그리고 이미 식은 물을 들어 약을 삼켰다.차가운 물이 식도를 지나 위로 들어가자, 도겸은 아파서 몸서리를 쳤다.“약을 먹을 순 있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단 말이야. 약은 몸에 좋지 않으니 음식으로 몸을 조리하는 게 제일 좋지. 빨리 일어나서 이 대추탕부터 마셔...”“너무 달아? 그럼 다음에 설탕을 조금만 넣을게...”“오늘 저녁에 술 좀 적게 마실 수 없어? 내가 두 주일 넘게 보신탕을 끓이면서 네 위를 조리해 줬잖아. 또 많이 마시면 위병이 다시 도질 텐데...”“도겸아, 앞으로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지 마, 응? 네 몸이 너무 걱정돼...”“계속 이렇게 만취해서 돌아오면, 나 정말 화가 날지도 몰라!”“오늘은 양고기탕이야. 반드시 다 마셔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아! 어떻게 매번 보신탕을 마시라 할 때마다 날 키스하려는 거야? 이런 수작으로 내 입을 막아도 소용없어... 음!”“도겸아, 나 정말 화났단 말이야. 키스해도 소용없어!”...“마시지 마.”“강도겸, 난 네가 곤드레만드레 취한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죽은 솥에 있어. 난 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19화

    ”꺼져!”“도겸 씨...”“꺼지라고, 내 말 못 들었어?!”연희는 입술을 깨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러나 남자는 그런 연희를 조금도 봐주려 하지 않았다.“그리고,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이 방에 발을 들여놓지 마, 알아들었어?”“왜요?” 연희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글썽이며 도겸을 바라보았다.“여긴 안방이잖아요. 우리의 방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제가 들어올 수 없는 거죠?”“허, 우리?” 도겸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네가 내 아내로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연희는 충격에 몸을 비틀거리더니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그러나 도겸은 그녀를 부축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구경꾼처럼 차갑게 웃으며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연희에게 계속 연기하라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꺼져!”여자는 힘없이 돌아섰다.“잠깐만...”연희는 다시 희망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다음 순간, 도겸의 싸늘한 말이 들려왔다.“이 쓰레기들 가져가.”결국 연희는 쟁반을 들고 의기소침하게 안방에서 나왔다.“작은 사모님, 도련님께서 아직도 입맛이 없으신 거예요?”연희는 빠르게 감정을 조절하며 걱정을 하는 말투로 한숨을 내쉬었다.“그래요, 먹고 싶지 않다고 하니 내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네요. 이 음식들은 이모님이 알아서 처리해요. 난 다시 올라가서 도겸 씨와 함께 있어줄게요...”“네, 알겠습니다. 얼른 올라가세요. 이것은 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그래요.” 연희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받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러나 등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미소가 사라졌다.고개를 들어 안방을 보며, 연희는 맹세했다.‘난 언젠간 그 방이 주인이 될 거야!’그날 저녁, 도겸은 모처럼 외출하지 않았는데, 저녁 9시에 왕미자에게 음식을 들고 방에 올라오라고만 했다.연희는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왕미자가 드나드는 것을 듣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난 가정부만도 못하단 말이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20화

    [무슨 약을 말하는 거야?]“그... 남자들이 먹으면 흥분해질 수 있는 약...”상대방은 침묵을 하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남자에게 약을 먹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넌 이미 그런 꼴로 된 거냐고?]연희는 화를 냈다.“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요. 다른 일은 당신과 상관없으니까요!”[기다려.]상대방은 간단하게 대답한 다음 바로 전화를 끊었다.연희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재벌 집은 천장까지 예쁘게 꾸몄다.이런 생활을 체험해 본 그녀는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그러니 난 반드시 도겸 오빠의 마음을 잡아야 해.’...아침 일찍 일어난 정은은 청소를 하고 또 점심을 준비해서야 실험실로 출발했다.오전 내내 바쁘게 돌아치며 두 조의 데이터를 완성했는데, 정은은 이 진도에 나름 만족하는 편이었다.데이터를 입력하고 제대로 저장된 것을 확인한 다음, 정은은 냉장고에 있는 도시락통을 꺼내 전자레인지로 데우려 했다.조미진은 멀리서 향기를 맡고 달려왔다.“정은아, 점심에 뭘 먹는 거야? 냄새 정말 좋다. 배달시켰어?”치킨은 노랗고 바삭하게 잘 튀겨져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그리고 브로콜리는 푸르고 마늘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었다.고기와 야채의 조합은 너무나도 완벽해서 엄청 맛있어 보였다.“배달이 아니라 제가 만든 거예요. 치킨은 아직 먹지 않았는데, 한 번 드셔볼래요?”예전 같으면 미진이라면 쑥스러워서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황금빛깔의 치킨을 보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그럼 잘 먹을게!”말을 마치면서 바로 하나 집어갔다.치킨은 바삭바삭하고 고소하며 간도 딱 좋았다.“너무 맛있어!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네.”미진의 말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요리 솜씨는 보통이었고, 가족들도 요리를 잘 하지 못했다. 가끔 밖에서 외식해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 건 아닌데, 대부분 식재료가 싱싱하지 않거나 양념 맛이 너무 진했다.그러나 정은이 만든 음식은 아니었다. 식재료가 싱싱할 뿐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21화

    “그래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주소는 단톡방에 보낼게요. 이따가 저 먼저 장을 보러 갈 테니, 선배님들은 일 끝나시는 대로 오세요.”“그래!”진욱이 말했다.“조 교수에게 통지해야 하는 거 아니야?”미진이 대답했다.“그럼 전 교수가 통지해.”“그래.”진욱은 핸드폰을 꺼냈다.“조 교수는 수업이 끝났는지 모르겠네...”오후 2시, 정은은 컴퓨터를 끄고 실험대를 정리한 다음 조용히 떠났다.문을 나서자마자 재석을 부딪쳤다.“장보러 가는 거야?”재석이 묻자, 정은은 약간 의아해했다.“벌써 안 거예요?”“응, 전 교수가 나한테 연락했어. 가자.”“네?”“마트에 가는 거 아니었어? 내가 차로 데려다 줄게.”“오늘은 안 바쁜 거예요?”“그렇게 바쁜 편은 아니야.”바쁠 수도 있고, 쉴 수도 있었는데, 문제는 그 대상에게 달렸다.“그래요, 고마워요.”정은은 택시를 잡아야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뜻밖에도 재석이 제때에 나타났다니. 이번에는 돈을 절약한 셈이었다.잠시 후, 정은은 자신이 돈을 절약했을 뿐만 아니라, 힘까지 들이지 않았단 것을 발견했다.모든 음식과 재료들은 전부 재석 혼자서 들었다.정은은 너무 많아서 짐을 좀 덜어주고 싶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손을 피했다.“아니야, 내가 들면 돼.”집에 돌아온 정은은 앞치마를 두르며 잽싸게 일을 시작했다.“참, 선배님들 뭐 안 드시는 음식 있나요?” 정은은 생각나서 물었다.“전 교수는 새우를 먹지 않아. 그것 외에 다른 사람들은 꺼리는 음식 없어.”말하면서 재석도 소매를 걷어붙이며 주방으로 걸어갔다.“내가 도와줄게.”...6시, 실험실에 있던 네 사람은 정은의 집으로 향했다.“전 교수님, 조 교수님께 통지하셨어요?” 이때 수아가 갑자기 물었다.그녀는 원래 오고 싶지 않았지만, 재석도 갈 것이라는 진욱의 말을 듣고 그제야 따라왔다.태민은 단지 자신이 설득해서 수아가 온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이 까칠한 아가씨를 설득했군.’“그럼. 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22화

    미진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다른 사람들도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교, 교수님...”태민은 재석과 정은을 바라보며 마치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발견한 것 같았다.수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눈빛이 차가웠다.“조 교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진욱은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고 직접 입을 열었다.“정은 씨 도와주고 있는 거 못 봤어?”“이야, 정은이 집에까지 찾아와서 도와주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구나...”진욱은 농담을 했다.“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지. 그리고 난 확실히 식사하길 기다리는 너보다 훨씬 나아.”“이웃? 그게 무슨 뜻이야?”정은이 나서서 설명했다.“조 교수님은 바로 제 옆집에 사시거든요. 맞은편의 그 방이에요. 오늘 오후 실험실에서 나와 장을 보러 가려던 참에 교수님을 만났고, 저를 태우고 마트에 강 거예요.”“그렇구나.”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난 정말 이 두 사람이 동거라도 한 줄 알았어! 깜짝이야!’태민도 가슴을 두드렸다.‘하마터면 큰 오해를 할 뻔했네. 정말 다행이다...’어두웠던 수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미소로 가득 찼다.“이제 식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래, 그래.” 미진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이 말했다.“다들 앉아서 먼저 드세요. 아직 두 가지 요리가 남았는데, 곧 올라올 거예요!”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했다.미진은 정은의 요리 솜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태민도 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다이어트를 한다던 수아조차도 밥을 한 공기나 먹었다. 그녀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많이 먹었다.‘다 소정은 때문이야...’다 먹고 주방을 치운 다음, 정은은 그들을 바래다주었다.정확히 말하면 정은과 재석이 함께 그들을 아래층으로 바래다주었다.두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란히 걷고 있으니 정말 부부가 손님을 배웅하는 것만 같았다.이를 본 미진은 표정이 좀 이상해졌다.태민은 계속 수아와 말을 하느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23화

    재석은 안경을 위로 밀며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다음 순간, 현빈은 길을 건너 정은을 향해 걸어왔다.“올라가서 정은 씨 찾으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어.”“무슨 일 있어요?”“있지.” 현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표정이 심각해졌다.“우리 앉아서 얘기 좀 할까?”정은은 재석을 바라보았고, 현빈도 시선이 그에게 떨어졌다.“정말 공교롭게도 다시 만났네요, 조 교수님.”“공교롭긴요, 정은 씨를 찾아온다면 날 쉽게 볼 수 있을 텐데.”현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재석은 그의 눈빛을 바라보더니 피하지 않고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30분 줄게요.” 정은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충분해. 맞은편 카페에 가서 얘기하자.”이 근처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가장 많았다. 지금은 밤이라서 학생들도 이미 집이나 숙소에 돌아갔다. 그래서 나름 조용한 편이었다.정은은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일인지 말해요.”“몰디브에서 생긴 그 두 건의 돌발적인 사고를 조사했을 때, 변호사팀이 일부 증거를 수집했지만,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조사 보고에 쓰지 못했어. 최근에 그 자료들을 뒤적거리다가 뜻밖에 새로운 것을 발견했는데, 네가 관심 있을 것 같아서.”“새로운 발견이요?” 정은은 영문을 몰랐다.“이것 좀 봐...”현빈은 조사 보고서를 건넸다.“위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친 곳을 자세히 읽어봐.”정은은 의혹을 느끼며 보고서를 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표정이 심각해졌다.“알아차렸어? 산소통에서 가스가 새거나, 선물함에서 갑자기 독사가 튀어나오거나. 이 두 가지 일을 분석한다면, 전혀 서연희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후 감시 카메라를 다시 조사할 때, 표시된 시간도 확실히 이 점을 증명했어.”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그 뜻은, 서연희를 도와준 사람이 있다는 건가요?”“조사 결과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커.”현빈은 손을 모았다.“물론, 법률재판 차원에서 지금 이런 일들을 조사하는 것은 아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24화

    다 같은 남자였으니 현빈은 또 어찌 정은을 향한 재석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겠는가?티가 나지 않았지만, 재석은 정은을 좋아하고 있는게 분명했다.‘그런 감정이 존재하는 한, 절대로 내 눈을 속일 수 없어.’현빈은 발걸음을 멈추며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정은은 뒤에서 걷고 있었고, 현빈이 앞을 가로막으니 재석을 보지 못했다. 현빈이 갑자기 멈추자, 정은은 하마터면 그와 부딪칠 뻔했다.다행히 제때에 멈춰 섰다.“미안.” 현빈은 고개를 숙이고 정은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 하나 깜박했네.”다음 순간 정은의 손에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이 나타났다.따뜻한 온도가 전해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다.“잘 들고 있어, 쏟으면 난 책임지지 않을 거야.”정은은 의혹을 느꼈다.“언제 샀어요?”두 사람은 내내 서로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고, 정은은 현빈이 주문하러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현빈은 웃으며 말했다.“비밀이야.”“아.”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능숙한 것을 보니, 이런 수법으로 많은 여자를 꼬셨나 봐요.”“아니, 너 하나밖에 없어.”정은은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두 사람이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며 내색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현빈은 도망치고 싶은 정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그녀를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귀여운 여우가 급한 마음에 남의 품에 뛰어들면 안 되니까.’“자, 돌아가. 난 올라가지 않을게. 너도 내가 데려다 주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야.”“그럼 잘가요.”“음.”현빈은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정은이 길을 건너는 것을 본 다음, 그는 차를 몰고 떠났다.정은은 밀크티를 들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더니 재석이 나무 밑에 서있는 것을 보았고,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선배님, 아직 안 올라갔어요?”“너 기다리고 있었어.”말하면서 재석은 정은의 손에 있는 밀크티를 훑어보았다.“이런 거 좋아해?”“자주 안 마시는 편은 아니에요. 가끔 한 잔 마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25화

    ”만약 부족하다면, 또 다른 얘기를 해줄 수 있는데. 한 시간 전에 우린 정은 씨 집 근처의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어. 전부 사실이니 한 번 조사해봐.”선우는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진 도겸을 바라보았다.‘지금 스피커를 끄면 안 될까?’그러나 현빈은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했다.“다 들었어? 내가 다시 한번 말할 필요가 없겠지? 녹음해서 자세히 들어봐.”‘앗,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 좀 살려줘!’[저기, 현빈 형, 그럼 계속 일 봐요. 난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말이 끝나자 선우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현빈은 피식 웃더니 가속 페달을 밟았다.“도겸 형...”선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현빈 형이 하는 말 듣지 마요. 가짜일 수도 있잖아요...”도겸은 무뚝뚝하게 몸을 돌려 룸으로 돌아왔다.선우는 재빨리 따라가며 이미 망했다고 생각했다.동건은 소파에 앉아 선우에게 미친 듯이 눈짓을 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야?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람이 표정은 또 왜 이래?’‘아, 형 좀 묻지 마요. 나 너무 힘들어요.’도겸은 종업원을 불렀다.“위스키 두 병 더 가져와. 오늘 다 마시지 않으면 너희들 그 누구도 갈 수 없어.”...새벽 2시, 술은 다 마셨지만 사람도 취한 채로 소파에 엎드렸다.도겸은 바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고, 잠꼬대처럼 가볍게 중얼거렸다.“정은아...”선우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었다.동건은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손가락 사이에 끼웠는데, 그 말을 듣지 않아도 대충 알아맞힐 수 있었다.“또 소정은을 부르고 있는 거야?”“음.”“싸다 싸! 그러게 애초에 왜 헤어진 거야? 기어코 소정은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그 난리를 벌여가며 헤어졌는데, 지금은 왜 또 후회하면서 이 꼴로 된 건데. 정말 싸다 싸.”“에헴!” 선우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말 좀 작작 해요. 이제 어떡하죠? 집에 데려다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우리 둘 다 술을 마셨으니 누가 운전을 하겠어? 그냥 호텔에 데려다줘. 방 하나 예약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2화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1화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0화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9화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8화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7화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6화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5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4화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